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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Q31 】예수운동을 배척하는 동네에서의 행동 본문

영성수행 비전/큐복음서

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Q31 】예수운동을 배척하는 동네에서의 행동

柏道 2018. 12. 9. 21:42

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 Q31 】예수운동을 배척하는 동네에서의 행동, 고라신과 벳새다, 두로와 시돈, 그리고 가버나움

 

 

                                                  말                                          씀

Q 31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거든, 그 동네 거리로 나와 외쳐라. "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일랑 너희에게 떨어 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줄을 알라.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니라.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저희가 벌써 메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삶의 방식을 바꾸었으리라. 심판의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그리고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질 줄 아느냐! 너는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누구든지 너희를 저버리는 것은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마태 10

 

 

마태 11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누가 10

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3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여기 지명들이 많이 나오는데 갈릴리바다 북단에 가버나움(Capernaum)이 있고, 가버나움 서북쪽으로 약 5킬로 지점에 고라신(Chorazin, 현재의 Kirbet Keraze)이 있고, 벳새다(Bethsaida Julius)는 가버나움 북동쪽으로 7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데 요단강 동편에 있다. 가버나움은 예수활동의 본거지이고 그 주변도시 고라신, 벳새다도 물론 부촌으로서 예수운동의 활동영역이었다.

 

두로(Tyre)와 시돈(Sidon)은 갈릴리 북방 페니키아지역의 해변도시로서 매우 일찍이 헬라화된 개방적 분위기의 대도시였다. 갈릴리 예수에게는 현재 우리에게 뉴욕 맨해튼이 주는 느낌과 같은 느낌을 주는 대도시였다. 두로와 시돈은 BC 64년 로마에 의해 시리아주(the Roman province of Syria)로 편입되었지만 상인들에 의하여 왕권이 제약되는 독특한 정체를 지니는 자치왕국의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서는 이 지중해연안도시들은 바알신앙의 본거지로서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저주가 내려진 곳이었다(이사야 23장, 에스겔 26~28장, 요엘 3:4, 아모스 1:9~10, 스가랴 9:2~4). 2006년 여름, 헤즈볼라의 소탕이라는 명목하에 이스라엘군이 무차별한 폭격을 감행하였던 곳도 바로 시돈이었다(현재 레바논에 속함). 그러나 예수는 친근한 고라신과 벳새다와 이방적인 두로와 시돈의 가치판단을 역전시키고 있다. 예수는 항상 안락한 영역의 질서를 전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운동의 본거지인 가버나움에 대해서도, 자만에 빠져 하늘에까지 높아진 듯 생각하나, 하데스(Hades)에 떨어지는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 발에 묻은 먼지를 다 떨쳐버린다 " 는 표현도 혹독한 저주와 항의의 표시이다. 유대인 습관에 이방인의 땅을 밟았다 떠날 때에는 그 땅에서 신발과 옷에 묻은 모든 먼지를 그 땅에 털어놓고 떠난다. 그리고 그곳은 이스라엘백성의 땅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땅은 오염된 곳으로 심판에 복속될 수밖에 없다는 경고이다.(마 10:14, 막 6:11, 행 13:51).

 

"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쓱 " 라는 표현은 모두 슬픔과 참회를 나타내는 유대인 습관에서 온다(욘 3:5~6). " 베옷 "으로 번역한 삭코스(σαkkοs)는 낙타나 염소의 털로 만들어진 거친 천인데 살 위에 입으면 그것이 슬픔이나 유감을 표현한다. 우리나라도 베옷이 거칠수록 더 슬프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재를 머리에 뿌려 더 슬프다는 것을 나타낸다. 잿더미 위에 앉을 수도 있다.

 

고라신은 지금 가봐도 멋있는 회당과 옛 집터의 유적들이 남아있다.

 

" 저 날 " " 심판 때 "  같은 표현 때문에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기 일쑤이나, 유대인의 관념 속에서 심판의 그 날은 시간의 종료나 우주의 종말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의 진노였다. 따라서 관용구적인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볼트만처럼 후대 종말론적 교회의 창작이라고 일괄적으로 간주하기만은 힘들 것이다.

 

마지막에 "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 " 이라는 표현도 성서기자들의 습관적인 문장패턴의 소산일 수도 있다.(요 5:23).

 

시돈을 생각하면 열왕기상 · 하편에 너무도 드라마틱하게 기록되어 있는 이세벨(Queen Jezebel)이라는 여인의 삶과, 야훼신앙과 바알신의 격렬한 대결이 생각난다. 그것은 단순한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 고대 이스라엘 역사 자내(自內)의 바알숭배 계층과 야훼숭배 계층 사이의 필연적 갈등의 사회사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갈등은 야훼숭배자들에 의하여 기술된 것이기 때문에 그 실상을 객관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야훼숭배자들의 실정(失政)을 은폐하기 위하여 이방인 관련 역사를 악랄하게 왜곡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구약의 드라마들이다.

이세벨은 시돈의 왕인 에드바알(Ethbaal)의 딸로서 북이스라엘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오므리왕조의 왕 아합(king Ahab)과 결혼하고, 사마리아에 바알산당을 짓고 그 안에 바알제단을 세웠다.(왕상 16:31~32). 북이스라엘 전역에 바알신앙을 열렬하게 유포시켜 엘리야 선지와의 대결을 유발시켰고 결국 바알과 아세라(Ashera)의 예언자 850명이 참살되는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세벨은 결국 대비마마로서 예후 정변으로 쓰러지고 마는데,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끝까지 왕후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에도 애걸치 않는다. 눈화장을 하고 화려한 머리치장을 한 후 당당한 왕후의 모습으로 창가에서 예후를 야단친다. 그녀의 위엄에 주눅들어 다급해진 예후가 소리친다. " 저 년을 떨어뜨려라! " 내시들이 이세벨을 떨어뜨리자 피가 담벽과 말에 튀었다. 예후가 탄 말이 그 몸을 짓밟았다. 예후가 나중에 마음에 걸려 그녀의 시체를 묻어주려 하였다. " 그래도 시돈의 왕의 딸인데. " 나가보니 이미 시체는 사라지고 해골과 손발만 남아있었다. 예후는 말한다. 엘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구나. 이스라엘의 밭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시체를 먹으리라. " (왕하 9:30~37).

 

이세벨은 시돈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방 시돈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예수가 두로와 시돈에 대하여 관대함을 보이는 의식의 저변에는 바로 두로와 시돈이야말로 서구문명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페니키아문명(Phoenician Civilization)의 중라는 역사적 사실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페니키아라는 이름은 후대에 희랍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붉은 염료(phoinix, red-purple) 때문에 붙인 통속적 호칭이고,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 가나안 사람 " (Canaanites)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은 " 상인 " 이라는 의미였다(사 23:8, 슥 14:21). 이집트의 4왕조(c.2613~c.2494 BC)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집트문명을 흡수하였으며, 아카디아, 힛타이트, 필리스턴,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희랍, 로마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으면서도 도시국가연합체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유지시켰다.

그리고 사이프러스, 북아프리카(카르타고)지역을 포함하여 지중해연안에 광범위한 식민지를 개척하여 끊임없이 이 지역 문명을 소통시켰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를 발전시켜 이미 BC 15세기에는 자신의 독특한 22자 알파벳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희랍문자의 모태가 되었으며, 오늘날 서양알파벳의 조형이 된 것이다. 두로와 시돈이야말로 개방적 서구문명의 근원이었다. 역사적 예수는 율법에 젖어 사는 유대인들보다 개방된 상업적 사유를 하는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이 훨씬 더 구원의 가능성에 열려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예수는 이 지역을 몸소 두발로 걸어다니면서 이 지역 문화를 체득한 사람이다.(막 7:24, 31, 마 15:21).  

  

출처: 큐복음서 도올 김용옥 / 통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