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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Q26 】장터의 아이들, 미친놈과 술주정뱅이 본문
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 Q26 】장터의 아이들, 미친놈과 술주정뱅이
章 | 말 씀 |
Q 26 | 예수께서 가라사대, " 이 세대의 사람들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을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픈 노래를 불러도 너희가 울지 않는구나.' 함과 같도다.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 신 들렸다.' 하더니, 인자(人子)가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 보라! 이 사람은 탐식가요, 술주정뱅이요, 세리들과 부랑자들의 친구라.' 하니라. 그러나 지혜는 지혜의 모든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 |
마태 11 |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
누가 7 |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
매우 인간적이고 은유에 풍부하며 예수 당시의 사람들의 예수와 세례요한에 대한 인식을 매우 진솔한 언어로 표현한 위대한 기록이라 하겠다.
우선 " 이 세대의 사람들 " (the men of this generation)을 신학자들은 Q공동체와 Q공동체가 직면한 사회와의 긴장관계료 풀이하여 Q2시대의 호교론적 담론, 충돌담론, 갈등담론으로 규정하지만 구태여 그렇게 도식적으로 성서를 분석할 필요가 없다. 예수시대에도 이미 예수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 써클 밖의 사람들과의 긴장관계는 충분히 예상된 것이다. " 이 세대 " 라는 표현만 나오면 무조건 그것을 기준으로 호교론적 입장과 더 나아가서는 종말론적 입장으로 풀이하는 것은 성서 이해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여기 장터는 " 아고라 " (agora)이다. 장터에서 서로를 나무라면서 싸우는 어린이들의 짓궂은 모습을 통해 예수는 천국 선포의 좌절감을 나타내고 있다. 피리를 불어 춤을 추게 한다는 것은 결혼식에서 즐거운 축제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쁜 자리에서 풍악을 울리면 응당 친구들은 감정을 맞춰주면서 춤을 추고 그 기쁨을 같이 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얄궂은 아이들이 골만 부리고 같이 춤을 추지 않는 것이다. 또 마찬가지로 장례식에서 슬픈 곡을 노래하면(哭을 하면) 같이 울어 슬픔을 나누어야 하는데 짓궂은 아이들은 골만 부리고 같이 울지 않는 것이다.
예수가 천국을 선포하는 행위는 같이 기뻐 춤추고 슬퍼 눈물을 흘리는 일상적 동고동락(同苦同樂)의 감정 속에서 진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나 당대의 많은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이나 율법사 같은 지식인들이 천국선포를 빈정대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 좌절감을 예수는 매우 코믹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장터 아이들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다음의 이야기가 더욱 재미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비친 세례요한의 모습은 사람들과 같이 먹고 마시지 아니하며 단식하는 금욕주의자(an austere ascetic)였다. 크로쌍은 요한의 금욕주의는 아포칼립틱한 맥락을 지니고 있었다고 본다. 같은 천국이라도 세례요한의 천국은 종말론적 천국이었다. 쿰란공동체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종말을 기다리는 참회의 죄인으로서 삶의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천국은" 지금, 여기 " 의 천국이었다. 따라서 천국의 임박은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현세적 실천의 정언명령이었다. 예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사람들과 같은 밥을 나누어 먹고 같이 술을 마시면서 천국을 선포했다. 가난한 자, 배고픈 자들에게는 " 배부름 " 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갈릴리 전역에 유포되어 있는 상인들이나 중농 이상의 부농들이나 기술자들의 길드조직으로 구성된 광범위한 공급과 분배의 네트워크와 지역공동체들의 매개를 활용하여 " 같이 먹고 같이 마시는 "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천국은 빈부나 신분이나 계층이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마지막 심판의 날을 전제로 한다 해도, 유대인들은 심판은 이미 선택받은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사람들이야말로 심판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쿰란공동체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구원되고 쿰란 외의 모든 사람들은 파멸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그 따위 구획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특히 구원의 대상으로 여자를 배제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전통에서는 이브의 선악과(善惡果) 때문에 여자는 타락한 존재며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유대인 남자들은 남자로 태어난 것을 하나님의 최대의 축복으로 생각했고 일상적 삶 속에서 여자를 경멸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이러한 금기가 없었다. 여자야말로 오히려 천국을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요, 편견 많은 남자보다 더 훌륭한 구원의 대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운동을 여자들이 좋아했고 당대의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많은 여자들이 예수를 따랐고 예수운동의 재정을 도왔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의 엄마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베다니나사로집안의 마르다와 마리아, 헤롯의 청지지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잔나, 세베데의 아내 살로메,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의 머리에 붓는 여인, 예수의 최후를 지킨 십자가 밑의 여인들, 예수의 무덤에 제일 먼저 달려간 여인들, 이들 모두가 예수운동의 재임(齋任)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지키고 목도한 사람들이었다. 수난설화를 창작한 작가들도 이 연약한 여인들의 의리있는 신념을 외면치 아니한 것이다. 식탁교제운동도 바로 이러한 여인들의 지원으로 현실적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요한은 단식하였고, 예수는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금욕하는 요한(fasting John)에게는 " 미친놈 " 이라고 험담을 마다하지 않았고, 잔치를 즐기는 예수(feasting Jesus)에게는 " 게걸스러운 먹보 " 요, " 술주정뱅이 " 요, " 세리와 부랑자의 친구 " 라고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 떡 " 과 " 포도주 " 는 마태에는 생략되어 잇으나 그 목적어가 있는 누가 텍스트가 Q에 더 가깝다.
" 신들렸다 " 고 내가 번역한 구절은 개역판 표현대로 " 귀신이 들렸다 " (He has a demon)는 뜻인데, 우리말로 하면 " 미친놈 " 이라는 뜻이다. 당대인들이 세례요한 보고 미친놈이라고 한 것이다.(He is crazy.)
예수가 세인이 규정한 말을 옮기는 맥락이지만, 자기 스스로를 지칭하여 " 먹기를 탐하는 먹보 " (pharos, a glutton), " 술주정뱅이 " (oinopotes, a runkard), 그리고 " 세리와 부랑자의 친구 " 라 말한 것은 성서라는 텍스트의 발랄함과 그 가식없는 표현력에 대하여 우리의 새로운 인식을 요청하는 것이다. 예수는 먹보, 술주정뱅이로 보일 정도로 가식이 없는 인간이었다. 예수는 부랑자와 쇠주를 마시고 취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의 번역, " 부랑자 " 는 " 죄를 짓는 사람 " (amartolon)이지만(개역판 번역은 " 죄인 "), " 죄인 " 이라는 번역은 원죄라는 개념에 물들어 있어 좋지 않다. 여기서는 죄를 짓지 않고서는 살아갈 길이 막막한 " 아웃캐스트들 " (outcasts), 즉 그 사회로부터 소외된 빈곤층이요 부랑민들이었다.
신란(親鸞, 1173~1262, 淨土眞宗의 開祖)이 " 들짐승이라도 잡아먹어야 살 수밖에 없는 굶주린 그대들이여, 살생할 수밖에 없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이야말로 해탈의 자격이 있다. " 고 절박하게 외쳤던 것처럼, 소외당한 자, 부랑하는 자, 굶주린 자들이야말로 예수에게는 " 친구 " 였다.
여기 " 인자 " (the son of man)라는 표현에는 특별한 해석이 전혀 필요없다. 인자라는 말만 나오면 종말론적 해석을 가하거나 특수한 맥락을 부여하려고 주석가들이 애쓰지만, 여기 " 인자 " 에는 전혀 종말론적 색채가 없다. 예수는 단지 " 사람의 아들 " 로서 자신을 인식했을 뿐이다. 그것은 아람어에서 유래한 아주 평범한 1인칭표현일 뿐이다. " 인자 " 담론에서 일관된 의미맥락을 찾으려는 시도는 허망한 노력이다.
미친놈으로 보이는 금욕적인 요한이나 술주정뱅이로 보이는 잔치 애호적인 예수나, 아무리 " 이 세대 사람들 " 이 악담을 퍼부어도, 모두 훌륭한 지혜의 구현자들이라고 예수는 선포한다.
제일 마지막 부분(눅 7:35)에 나오는 " 지혜 " (소피아)라는 말에 대해서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여기 " 지헤 " 는 의인화(인격화) 되거나 고유명사처럼 실체화 되어서는 아니된다. Q의 지혜는 구약의 지혜문학의 지혜가 아니요, 일차적으로 예수의 지혜다. 역사적 지평 속에 살아있는 예수의 지혜담론을 지나치게 죽어있는 유대교전통 속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예수의 발랄한 모습이 가려질 때가 너무 많다. 볼트만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수는 단지 요한과 자기를 아주 상식적인 맥락에서 " 지혜로운 사람들 " 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대인들의 왜곡에 대한 무섭도록 처절한 자신감의 과시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 지혜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지혜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구체적 행위(ergon, 마태의 표현)로써만 입증될 뿐이다. " 얼마나 자신있는 주장인가? 그 얼마나 정직하고 객관성이 있는 주장인가? 지혜는 또 하나의 미신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만 입증되는 형용사적 사태일 뿐이다.
이 장에서 세례요한과 예수의 이야기가 끝난다. 다음 장에는 예수를 따르려는 세 사람의 이야기(Three Followers of Jesus)가 이어진다. 예수의 제자됨에 관한 강렬한 규정(Discipleship and Mission)이 내려지고 있다.
출처: 큐복음서 도올 김용옥 / 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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