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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Q 1 】 서막 : 세례요한의 등장 본문
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 Q 1 】 서막 : 세례요한의 등장
章 | 말 씀 |
그 무렵에 하나님의 말씀이 유대광야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臨)하였다. 그는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 생각을 바꾸어라. 그리고 세례를 받아라. 그리하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 하고 전파하였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책에 기록된 말씀대로였다.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捷徑)을 평탄(平坦)케 하라. " | |
마태 3
|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
누가 3
| 2b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
클로펜보르크는 어록복음서도 하나의 문학양식이므로 도마복음서의 첫머리와 같은 도론(Incipit)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것은 살아있는 예수가 말하였고 다두모 유다 도마가 기록한 비밀스러운 말씀이다. " 이와 유사한 어떤 첫머리 말이 있었을 것이다. 상기의 제1장(Q1)은 서론(Introduction)에 해당된다.
서양학자들은 섹션(Section)이라는 말을 쓰고 장(章)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나는 Q복음서나 도마복음서나 가라사대파편의 분절을 모두 장(章)으로 규정한다. 『 노자도덕경 』이나 『 중용 』의 장개념을 생각하면 전혀 어색함이 없다. 특히 『 중용 』은 공자의 가라사대파편 하나를 한 장으로 삼을 때가 많다.
여기 제시된 " 생각을 바꾸어라 " 는 전통적으로 " 회개하라(Repent,)로 번역되었던 말인데, 그것은 단순한 오역의 결과이다. 원어가 " 메타노이아 " (metanoia)인데, 그것은 " 마음을 바꾼다 " (change of heart), " 생각을 바꾼다 " (change of mind)는 뜻으로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회향(回向)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회개 " 는 " 죄 " 를 전제로 하는 말이며, " 메타노이아 " 를 " 회개 " 로 번역한 것은 후대 교회의 이권과 결탁한 의도적, 관습적 오역일 뿐이며, " 메타노이아의 원의 " 와 관련이 없다.
예수도 " 메타노이아 " 를 말한다(막 1:15). 그러나 예수는 결코 성악론자가 아니다.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전제가 예수에게는 없었다. 그는 죄 짓는 사람들(sinful men)을 비판했을 뿐이며 인간의 본성을 죄로 규정한 적이 없다. 예수에게는 성론(性論, theory of human nature)이 없었다. 더구나 원죄(Original Sin)라는 개념도 그에게는 있을 수 없었다. 죄는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개별적 행위일 뿐이다. 예수에게는 사랑과 용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 용서 " (forgiveness)도 " 적당히 봐준다 " 는 뜻이 아니라, 신의 은총을 통해 새사람이 된다는 뜻이며,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적인 것이다. 전적으로 새사람됨을 선물하지 못하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마 3:2)와 같은 표현도 우리가 해석학적 오류를 상식화시키고 있는 대표적인 유례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 " 천국 " 은 장소(topos) 개념이 아니다. " 왕국 " (kingdom)이라는 상투적 표현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기 쉬운데, 왕국에 해당하는 원어는 " 바실레이아 " (basileia)이다. 그것은 장소 개념이기 보다는 " 지배 " (reign)를 뜻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마태는 " 하늘의 바실레이아 " (the kingdom of heaven, 마 3:2)라는 표현을 섰고, 마가는 " 하나님의 바실레이아 " (the kingdom of God, 막 1:15)라는 표현을 섰는데, 모두 " 하나님(하늘)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 " 라는 뜻이다. 전자는 요한의 언어로서, 후자는 예수의 언어로서 기록된 것이지만 양자의 표현에 특별한 구분은 없다. 마 4:17에 보면 예수의 말로서 " 하늘의 바실레이아 " 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요한의 천국개념과 예수의 천국개념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요한의 천국은 실체적이고 묵시적이고 미래적인 반면, 예수의 천국은 역동적이고 실존적이고 현재적인 " 하나님의 지배 " 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Q속에 이러한 분별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자료도 들어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Q는 세례요한과 예수의 사상적 공통성이나 유대감을 전제로 하고 있다. Q속에 " 하나님의 나라 " 는 예수 선포의 핵심주제로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예수의 독특한 세계인식을 나타내는 메시지로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 라는 선포는 죄를 회개하면 천당에 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생각을 바꾸면 곧 내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로 변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Q복음서 속의 예수는 초월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는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세계를 하늘의 질서로 변혁시키기를 갈구한 영적리더였다.
제1장부터 제5장까지의 내용은 마가에도 있는 내용이며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Q원경(原經)의 개념속에 안들어오는 범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이 마가도 Q를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와 요한의 관계를 암시하는 이 자료들은 마가 이전의 Q자료에 들어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공생애를 출발시키기 위한 영적 서막으로서 이 세례요한 자료를 활용하였으나 대부분의 Q1자료는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마가가 복음서를 쓰는 목적 자체가 수난설화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고 또 천국의 신념 때문에 박해받고 죽어가는 순교자의 영웅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것인데 Q1의 지혜담론은 그러한 목적으로 활용키에는 부적절했던 것이다. 예수의 지혜로운 가르침으로 인하여 유대교 당국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명분은 정당화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정당성을 지닐지에 관해서는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출처: 큐복음서 도올 김용옥 / 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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