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본문
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도론(導論)
기독교는 유대인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유대인 문화전통 속에서 자라난 것이긴 하지만 유대인 전통 속에서 보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이단일 뿐이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할 신념체계일 뿐이다.
기독교는 유대인의 배척 속에서 예수교(Teachings of Jesus)로부터 그리스도교(Christianity)로 변모되었고 성장하였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 이방인의 종교 " (a Gentile religion)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유대인혈통 외의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기 때문에 기독교인 스스로 기독교를 이방인의 종교라 부를 수는 없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공동체운동 속에서 피어났지만 그 공동체들의 계한(界限)을 넘어 인류보편의 신념체계로 발전한 것이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인류의 종교라고 규정해버릴 수만도 없다. 인류는 기독교 외로도 많은 종교를 신앙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를 인류의 종교로서 단순하게 규정해버리는 것은 그 자체 내에 제국주의적 독단을 내포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20세기를 통하여 특이하게 만연된 전도주의적 신념 속에서 기독교가 " 땅끝까지 " 선교되어야만 할 것으로 알지만(" 땅끝까지 " 라는 말은 4복음서 속에도 없는 말이다), 이슬람교, 불교, 유교문화권만 해도 기독교가 뚫기 어려운 자체의 광대한 신념의 울타리를 가지고 있다. 인류는 다양한 신념 · 신앙을 공존시키고, 공유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떠한 종교인가? 기독교는 기독교를 발생시킨 그 뿌리에 대한 로얄티를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라는 추상적 신념에 관한 확신은 이미 어떤 구체적 시공의 제한성을 초월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를 발생시킨 어떤 연원에 대한 로랼티의 정도에 따라 기독교적 신념에 대한 정통과 이단의 구분을 설정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나의 결론은 매우 단순하다. 우리에게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 한국인의 기독교 "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한국인 " 이란 특수한 문화적 공동체의 소속감을 보지하는 동시에 보편적 인간(Universal Man)이다. 기독교는 한국의 기독교일 수밖에 없다는 나의 주장은 너무도 현실적인 명제인 동시에 너무도 보편적인 명제이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이 간파하셨듯이 " 풍류 " (風流)를 사랑했다. 풍류란 " 우주적 기의 흐름 " (Cosmic Flow)이요, " 신기(神氣)의 발로 " (Divine Dance)이며 " 생명의 약동 " (Elan Vital)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신명이요, 신바람이요, 프뉴마(πνεύμα)다. 『 동이전 』의 저자들은 한국땅에 와서 한국인들의 행태를 목격하고, " 음식가무 " (飮食歌舞)를 즐길 줄 아는 민족이라고 기술하였는데, 이 음식가무야말로 풍류의 다른 표현이다.
한국인들은 이 풍류의 심성의 바탕 위에서 모든 외래문명을 수용하였다. 불교도 풍류의 불교가 되었고, 도교도 신선도가 되었고, 유교도 풍류의 유교가 되었다. 물론 기독교도, 한국의 기독교는 " 풍류의 기독교 " 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한국인들처럼 기독교 집회를 통하여 음식가무를 즐기는 민족도 드물다. 한국의 교회처럼 그토록 대규모의 성가대가 빠지지 않고 존속하는 교회도 드물다. 아무리 작은 개척교회라도 성가대가 없는 교회는 없다. " 음식가무 " 에서 음(飮과 무(舞)를 뺀다 해도, 한국의 교회는 분명 " 식가(食歌)의 교회 " 라 해야 옳다. 공동식사, 공동찬양, 연일대회(連日大會), 이런 말들은『 위지동이전 』에서부터 오늘의 한국기독교 문화현상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대축이다.
이러한 한국심성의 풍류기독교는 그 나름대로 허실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의 풍류적 성격은 한국의 기독교인구를 팽창시키는 데 놀라운 기능을 발휘하였다. 이 지구상에 지난 한 세기 동안 한 나라에서 기독교인구가 이토록 팽창한 유례가 없다. 기독교 에반젤리즘 역사의 한 기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기적의 내면에는 신바람과 더불어 피눈물 나는 고난의 엑소더스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왕조의 부패한 지배계급의 탄압으로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의 폭압으로 이어진 기나긴 수난의 역사속에서 조선민중의 가슴에 불을 지폈던 피세(避世)와 구원의 열망이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그 열망은 우리민족이 걸어야했던 전쟁과 독재의 마수 속에서 마냥 확대되어만 갔다.
그러나 고난의 역정이 반사적으로 선사한 기독교공동체의 확산은 그 고난의 진원의 진실이 옅어지면서 공동체 자체의 조직과 권력의 부를 유지하기 위한 세속적 운동으로 변질되어갈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여로를 노출시켰다. 한국기독교는 영혼 없는 육체, 생명력이 없는 형해, 신앙 없는 허세, 공동체유지의 필연성이 결여된 콘크리트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비판받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예수는 가혹한 비판자였다. 예수교(예수의 가르침)라는 것은 오로지 예수 당대의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당대인들은 그의 비판을 거부했다. 그 비판의 거부가 예수를 오늘의 예수로 만든 것이다. 기독교가 비판을 수용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만을 조장할 뿐이요, 독단의 벽을 쌓아 올리며, 자멸을 자초할 뿐이다. 더구나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를 건강하게 만들어온 역사적 환경을 상실하였다. 현세적 조직의 부와 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종교를 건강하게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없다.
더구나 민주의 가치가 일상화되고, 합리적 성찰이 보편화되며, 과학적 판단이 상식의 기준이 되며, 구원의 갈망이 옅어지는 사회가 되면 종교는 점점 묵시론적 환상과 같은 우치(愚癡)에 매달리게 되면서 편협하게 되기가 쉽다. 그리고 점점 일반인의 상식으로부터 고립화되어 소수집단화 되어가는 경향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팽창일로를 거듭하는 것 같지만, 이미 교계의 현실은 점점 일반인의 상식으로부터 격리되는 현상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우혹(愚惑)한 젊은이들만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국가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 속에서 종교조직에 헌신하는 인구는 더욱 급격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려를 탈레반선교로 상쇄시키려는 우행(愚行)은 건강한 상식인들의 빈축만을 살 뿐이다.
어찌 내우(內憂)를 은폐하고 외환(外患)을 자초할까보냐? 이러한 추세로 나간다면 유럽의 대형교회들이 중세기의 유물로만 남아있듯이,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그 건물 유지조차 어렵게 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교회건물들은 관광자원조차 될 가치가 없는 조잡한 모조품들일 뿐이다. 세계건축사에 우뚝 솟을 만한 건물이 한 개라도 있을까보냐? 기독교인구의 감소는 필연적 추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콘크리트 건물만 짓고 체조경기장에서 부흥회만 되풀이할 것인가? 나 도올은 말한다. 한국기독교는 재건되어야 한다!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그 해답은 결코 어렵지 않다. 기독교의 재건은 기독교의 본질을 항상 새롭게 구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가 메시아(" 메시아 "는 히브리어이고 그것을 희랍어로 번역한 말이 " 그리스도" 이다), 즉 구세의 주라고 하는 사도들의 믿음 이전의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일 수밖에 없다. 역사적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곧 역사적 예수의 말씀(로기아, logia)을 믿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그것은 신약성서 속에 있다. 신약성서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신약성서 중에서 4복음서에 들어있다. 4복음서 이외의 작품들은 예수의 사후의 사도들의 행전(전도여행 기록)이거나, 사도들의 편지나 묵시문학작품이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에 관한 간접적 방증자료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분명 그것은 예수 생전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의 사후에, 예수의 말씀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들에 대한 사도들의 해석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의 말씀이 아닌, 예수를 주제로 한 사도들의 말씀인 것이다.
4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말씀인가? 결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아무리 그것이 성령의 힘으로 쓰였다 할지라도 결국은 사람의 손을 빌린 것이며, 사람이 쓴 것인 이상 그것은 그 사람의 첨삭이나 창작이나 주관의 필터를 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복음서 중에서도 요한복음은 제4복음서로서 나머지 3복음서와 매우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나머지 3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통된 자료와 공통된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synoptic Gospels)라고 부른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는 그 기술양식과 형식과 주제가 사뭇 다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늦게 집필된 것이며, 그 저자가 공관복음서라는 자료를 손에 들고 그 자료의 한계를 초극하기 위하여 매우 새롭게, 그리고 자신의 주제의식(Logos Christology)에 따라 자유롭게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재구성한 것이다. 예수를 역사적 예수로서 현실적 지평위에서 파악하기 보다는 " 로고스의 지상에서의 육화 " 라는 매우 독특한 이념의 구현체로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도 지극히 이념화되어 있으며 장황하고 논설적이다. 물론 요한이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이 확보하지 못한 새로운 구전이나 자료들을 보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비록 후대일지라도 역사적 진실에 보다 접근하는 자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우리가 역사적 예수의 말씀을 고구(考究)한다는 측면에서는 일차적으로 배제되는 문학장르이다. 예수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공관복음서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태 · 마가 · 누가의 3복음서(공관복음서)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오리지날한 기술인가? 다시 말해서 어느 복음서가 가장 먼저 쓰여졌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쓰였다는 것이 입증된 것은 19세기 초엽의 사건이었다. 그 이전에는 항상 마태복음이 모든 복음서의 원형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마태복음의 기술은 매우 종합적이며, 편견이 적은 듯이 보이고, 완정하며, 또 사도들의 적통성과 유대교전통과의 연계성이 확보되어 있다.
1838년 크리스티안 빌케(Christian Wilke)는 " 마가복음의 원초성 " (the priority of Mark)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마가복음 자료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유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661절로 구성되어 있는 마가복음 자료 중에서 600절 정도가 마태복음에 들어가 있고 350절 정도가 누가복음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 원초적인 자료가 된다. 즉 마태와 누가는 이미 성립한 마가복음 코우텍스를 보면서 그들의 복음서를 집필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서는 " 복음서 " 라고 하는 전기문학장르의 효시가 된다. 마가라고 하는 어느 역사적 엣스(x)는 그리스의 비극장르에 필적하는 새로운 문학유형을 창안한 대문호였으며 영성으로 가득찬 대천재였던 것이다. 그 창작시기는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한 AD 70년 이후 몇년사이였다.
그런데 1838년 같은 해에, 라이프치히대학(University of Leipzig)의 철학 · 신학교수였던 크리스티안 헤르만 바이세(Christian Hermann Weisse, 1801~1866)는 마가복음서를 참고하면서 마태와 누가가 복음서를 썼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마가복음서 자료를 제외한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 부분 속에 또 하나의 공통자료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서 외로 또 하나의 필사자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내었다. 마태와 누가는 교류가 없었다. 둘이서 같이 한방에서 논의해가면서 복음서를 집필했다면 모르되, 서로 교류가 없는 상황에서 공통된 자료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구전(oral tradition)이 아닌 문서자료(written document)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서와 또 하나의 공통문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을 " 두 자료 가설 " (Two Document Hypothesis)이라고 부르는데 보통 신학계에선 " TDH " 라고 약어화한다. 이 또 하나의 공통자료를 " 자료 " 에 해당하는 독일어인 " 크벨레 " (Quelle)의 첫 글자를 따서 " Q자료 " 라고 불렀던 것이다. 크리스티안 헤르만 바이세는 Q자료 존재의 최초의 발설자였다(Christian Hermann Weisse, Die evangelische Geschichte kritisch und philosophisch bearbeiet, 2 vols, Leipzig: Breitkopf und Hartel, 1838).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마가자료와 Q자료를 제외하고 남는 부분은, 마태의 경우 마태 자신의 유니크한 자료가 될 것이므로 M자료라 부르고, 누가의 경우는 L자료라 부른다. 이상의 논의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마가를 제외한 마태와 누가에 공통된 Q자료를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Q자료는 어록(Record of Saying)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예수의 말씀, 그러니까 " 예수께서 가라사대(Jesus said,) " 로 시작되는 담화부분만 있는 자료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 가라사대 파편 " (Sayings fragments)이라고 부른다. 『 논어 』에는 공자에 관한 이야기(story-telling)가 없다. 오로지 " 공자 가라사대 " (子曰)로 시작되는 공자말씀만 적혀 있는데, Q자료는 예수의 논어(論語)인 셈이다. 논어에 해당하는 희랍어 로기온(logion, 복수는 logia)인데 Q자료는 " 로기온 크벨레 " (Logion-Quelle)인 것이다. 그러니까 마태와 누가는 매우 성격이 다른 두 개의 자료를 손에 들고 있었다. 하나는 예수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와 같은 자료였고, 하나는 예수의 말씀만을 적은 오리지날한 초기어록이었던 것이다.
자아! 한번 생각해보자. Q자료는 어디까지나 가설로 시작하여 가설로 끝나는 자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Q자료의 강력성은 현존하는 복음서 밖의 이상한 자료가 아니라, 정경복음서 내에 있는 또 하나의 권위있는 정경자료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니까 이집트나 팔레스타인의 폐허의 모래더미 속에서 캐어낸 고고학적 자료가 아니라, 공관복음서라는 자료더미 속에서 신학자들의 이성적 사유에 의하여 150년이라는 세월을 경유하면서 캐내어진 자료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 속에 내포되어 있는 자료를 발견한다는 사실이 뭐가 그렇게 새로울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Q자료의 발굴은 문지 그대로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것은 AD 70년 이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보장되는 확고한 문헌이며, 같은 문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놓여지는, 즉 편집되는 맥락에 따라 얼마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혀 다른 복음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유대교와 초기기독교의 " 미싱 링크 " (missing link)를 연결할 수 있는 원초적 자료였으며, 역사적 예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순결한 자료였다. 그것은 신약성서 내에 엄존하는 기독교 이전(pre-Christian)의 예수운동(The Jesus Movement)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 자료의 성립시기는 하한선이 AD 50년이 되며, 아마도 그 프로토텍스트는 예수 당대에 쓰였던 일종의 교훈지침서(instruction book)이었을 가능성까지도 논구되고 있다.
1907년 베를린대학의 교회사 · 신학교수인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Q자료를 희랍어 원문으로 재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 예수의 어록』(Spruche und Reden Jesu)이라는 책 속에서 Q희랍어 원문뿐만 아니라 Q의 어휘표, 문법, 문체, 구성양식과 원래의 순서까지 밝혀 놓았다.
하르낙은 예수의 복음은 교회의 법령이나 교리, 교조와 전혀 무관한 것이며, 복음이 현대사회에서 의미를 지니고자 한다면 " 하나님과 그리스도 " 라는 도그마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독교라는 종교는 오직 인간의 역사 속에서 발전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초기기독교사의 사가로서의 정직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Q자료야말로 그리스도 즉 메시아적 케리그마 형성 이전의 순결한 예수운동의 자료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후에 Q자료를 철저히 종말론적인 케리그마의 소산으로 보는 볼트만(Rudoff Karl Bultmann)의 입장과 대비되는 것이다.
하르낙의 연구가 나온 다음 해, 1908년에 뮐러(G. H. Muller)는 Q자료의 순서와 범위에 관하여 중요한 논의를 제공하였다. (G. H. Muller,Zynopse: Untersuchung uber die Arbeitsweisse des Lk und Mt und ihre Quellen). 하르낙과 뮐러의 중요한 연구 이래로, 호킨스(J. C. Hawkins, 1911), 하우프트(Walther Haupt, 1913), 스트리터(B. H. Streeter, 1911, 1924), 부스만(Wilhe Bussmann, 1929), 이스턴(Burton Easton, 1926), 슈미트(Josef Schimid, 1930), 맨슨(T. W. Manson, 1937), 키파트릭(G. D. Kilpatrick, 1946) 등의 학지들이 Q와 관련된 연구성과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Q자료는 전혀 일반인의 관심의 대상이 되질 않았으며,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두 자료 가설(TDH)은 대부분 용인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설로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가설에만 기초하여 어떤 심각한 논의를 하는 것을 꺼려했다. " 내러티브 가스펠 " (Narrative Gospel: 예수의 인생 드라마가 서술되는 복음서, " 설화복음서 " 로 번역된다)이 아닌 " 세잉스 가스펠 " (Sayings Gospel: 예수의 어록만으로 구성되는 복음서, " 어록복음서 " 로 번역된다)을 구태여 설정해야 할 필연적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설화복음서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모두 제거된 가라사대파편만의 어떤 공허한 텍스트의 존재를 구태여 실존하는 것으로 확정지을 자신이 없었다. 원래 기독교 신학계는 구 · 미를 막론하고 어느 곳이나 보수적인 성향이 우세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왜 Q와 같은 예수어록이 따로 편집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물증이 없이는 가설만의 전제로서 Q논의를 계속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천지를 굉동시키고도 남을 대사건이 벌어졌다. 1945년 12월, 이집트 나일강 상류의 나그함마디지역 게벨 알 타리프 절벽 바위밑에 숨겨져 있던 밀봉된 항아리 속에서 대량의 성서 고문서가 발견되기에 이른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사바크(sabakh)라는 광물비료를 캐러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13개의 코우덱스(가죽포장 파피루스책)에 포함된 책은 52종이나 된다. 이것은 쿰란 사해문서의 발견과 더불어 20세기 서구 문헌학의 최대 사건이었다.
사해문서는 주로 구약에 관련되지만, 나그함마디문서는 신약과 관련되는 것이다. 전자가 유대인의 관심이라면 후자는 기독교인들의 관심이 되어야만 하는 사건이다. 전자가 유대인의 경전에 관한 문헌학적 이해를 심화시키는 사건이라면, 후자는 기독교인들의 경전에 관한 문헌학적 이해를 혁명시키는 사건이다.
13개의 코우덱스 중 제2 코우덱스의 두 번째로 편집된 문헌이 관심있는 학자들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문헌의 말미에 " 도마복음서 " (Peuaggelion Pkata Thomas, Gospel According to Thomas)라는 책제목이 명기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도마복음서가 Q자료의 실존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이 나그함마디문서는, 사해문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여러 이권의 갈등과 그에 얽힌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일반공개가 지연되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만은 그 중요성 때문에 비교적 빨리 세상에 공개되었다. 쀠에쉬(Puech), 뀌스펠(Quispel), 귈로몽(Guillaumont) 등 학자들의 노력으로 1959년에 출판되었던 것이다. 1959년 이래, 도마복음서와 Q자료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는 신학계의 주요한 테마가 되었던 것이다. 도마복음서의 출현으로 Q자료는 Q복음서로서 승격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AD 50년경에 성립한 교회 케리그마 이전의 초기 복음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존재성과 권위가 확고한 문헌이었다.
Q복음서와 도마복음서의 관계를 생각하면 나는 서구 학문의 치열함에 눈물이 핑 돈다. 4복음서는 이미 AD 172년경 디아테사론(Diatessaron, " 넷을 통하여 " 라는 뜻)이라는 체제로 묶여 있었고, AD 367년경 아타나시우스가 정경목록을 발표한 이후에도 제롬을 비롯한 많은 성서 편찬자들이 4복음서를 다루었지만, 4복음서의 원래의 충실한 모습을 비록 서로 상충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조작적인 메스를 가하지 않고 남겨 두었다는 것이 일차적으로 놀라운 일이다. 성문헌이라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편견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하여튼 4복음서의 상호충돌과 상호모순의 편차를 용인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문헌학적 인테그리티를 의미한다. 공자의 『 논어 』만 해도, 노론(魯論) · 제론(齊論) · 고론(古論) 등 다양한 판본이 있었으나 현재의『 논어 』한 종(種)만 남아있는 상황에 비한다면, 훨씬 더 정직하고 창조적인 여백을 후세에 남겨놓았던 것이다.
근세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정직한 사실로부터 공관복음서가 문헌비평의 도마에 오르기 시작했고, 마가의 원형성이 확보됨과 동시에 " 두 자료 가설 " (TDH)이 등장하였다. 이 가설에 의하여 Q라는 가설적 문헌이 성립하였고, 그 가설적 문헌의 희랍어원형 복원작업까지 이루어졌다. 그런데 반세기 후에 그 문헌이 가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문헌이 코우덱스의 모습으로 우리의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서구 인문학의 승리라고 칭찬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 학문방법의 치열함을 우리도 배워야하지 않을까?
Q를 처음에 제시한 사람들은 단순히 마태 · 누가의 중복자료의 범위를 확정짓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했겠지만, 그들은 그 중복자료가 놀라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세례요한의 말도 약간 끼어있고 비유나 상황 설정이 가미된 " 선언문 이야기 " (아포프테그마)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 예수의 어록형식, 즉 예수가라사대파편만으로 이루어진 문헌이라는 사실이었다. " 가라사대파편 " 이라는 사실이 뭐 그다지 중요하냐고 묻겠지만, 가라사대파편만으로 이루어진 문헌에는 일체의 예수 이야기, 즉 예수 인생설화의 모든 언어가 사라진다는 엄청난 사실이 야기된다. 즉 예수의 탄생도, 가족이야기도, 갈릴리 사역도, 예루살렘 호산나 입성도, 성전전복이야기도, 수난이냐기도, 재판이야기도, 십자가죽음이야기도, 부활이야기도, 일체의 이적이야기도 다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탄생 ― 수난 ― 죽은 ― 부활의 모든 이야기가 빠져버린 기독교, 이런 이야기가 빠져버린 예수, 그러한 신화와 기적과 전혀 무관한 예수 자신의 복음서를 상상한다는 것은 성서 속에 엄연히 내재하는 또 하나의 성서를 제시하는 사건이었고, 그것은 공포였다. 그러나 하르낙 같은 Q를 복원한 사상가들은 이 Q야말로 진정한 예수의 모습이며, 마가가 제시하는 예수생애 내러티브는 희랍비극 장르를 종교적 수난설화로 변형시킨 픽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과연 예수가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았는가? 과연 요한복음이 기술하고 있듯이 그토록 상세한 빌라도 총독과 예수와의 대화가 재판기록으로 남아있었을까?
한국기독교인들은 이러한 Q의 어필이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게 하지 않을까? 예수를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전환시킨다는 사실이 예수를 지나치게 인간화시키고 그 신비감을 상실시킨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신앙한다고 하는 그 소이연이 과연 어디에 있을 수 있겠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문(愚問)에 지나지 않는다. Q속에도 예수는 자신을 " 하나님의 아들 " 로서 규정하는 자기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묵시적 암시를 내포하는 파편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의 신비스러움으로부터 신앙을 얻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탄생, 죽음, 부활, 이적과도 같은 신화적 이야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빌라도 총독 같은 무심한 로마관리의 재판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하찮은 신앙이다. 복음서를 읽는다는 것은 바로 복된 소식의 영혼을 전달받는 것이다. 그 메시지의 논리적 구조나 도덕적 명령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Q는 " 살아있는 예수 " 의 직접적 말씀이다. 살아있는 예수는 아직 죽지 않은 예수다. 이것이야말로 신비의 원천이며 신앙의 연원이며 산문이 아닌 시적인 영감이다. 그것은 논리적 분석의 대상이 아닌, 성스러움의 심연이다. 그 말씀을 총체적으로, 순수하고 순결하게, 그러니까 신화적 허세나 우회적 언어희롱을 뛰어넘어서 곧바로 예수의 삶의 진실과 맞부닥치는 체험을 얻을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크리스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가치를 전도시켜서 살아있는 예수를 곧바로 대면하고 직시하고 해후해야 한다. 그러한 해후야말로 신화적 안락에 안주하는 진부한 목회자의 설교를 역전시키는, 보다 고난에 찬, 보다 도전적인, 보다 창조적인 신앙역정인 것이다. 예수의 성스러움은 바로 그의 말씀에 내재하고, 우리는 그의 말씀에 허례허식을 거치지 않고 동참할 때만이 우리 자신의 삶의 성스러움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종교적 경이는 상투적 신앙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상황에 관한 천착과 가치역전에 내재하는 것이다.
도마복음서는 어떤 모습이었나? 그것은 놀라웁게도 Q자료의 가설과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일체의 내러티브가 없는 114개의 가라사대파편만의 모음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도마복음서 내용과 Q복음서 내용이 35%나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었다. Q처럼 도마복음서도 예수의 탄생, 수난, 죽음, 부활, 그리고 이적과 같은 일체의 허세가 없는 순결한 지혜의 담론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Q에는 볼트만이 그의『 공관복음서전승사 』에서 주장하듯이 종말론(eschatology)을 암시하는 언어들이 있으나, 도마복음서에는 일체 종말론적 암시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로빈슨(James M. Robinson)은 도마복음서를 " 로고이 소폰 " (logoi sophon), 즉 지혜자의 담론( " words of the wise,
" or " saying of the sages " )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그것을 유대교의 지혜문학(Jewish Wisdom literature)과의 연계선상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사실 " 로고이 소폰 " 은 인도로부터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희랍, 이집트에 이르는 헬레니즘문명권의 개방된 문화교류의 한 보편양식으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자아! 다시 한 번 우리의 논의를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정리해보자!
Q는 세 공관복음서의 문헌적 특성에 의하여 가설적으로 전제된문헌이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적 문헌(a hypothetical document)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혁명적 의미를 내포함에도 불구하고, 소수 신학자들의 연구영역에 묻혀있었을 뿐 그 이럴리티는 일반화될 길이 없었다.
그런데 1945년 12월 이집트 나일강 상류의 어린아이들의 곡괭이에 부딪혀 우발적으로 발견된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Q라는 문헌이 가설만으로 그칠 수 없다는 것을 실증시켜 주었다. Q는 가라사대파편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복음서였는데, 실제로 그와 같은 동일한 양식의 가라사대파편 복음서가 완정한 하나의 책으로서 우리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대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우선 가라사대파편만으로 이루어진 어록복음서(sayings gospel)가 마가로부터 시작된 설화복음서(narrative gospel) 이전에 실존한 하나의 복음양식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에 의하여 Q는 Q복음서로서 실존하였던 독립자료라는 것이 입증되고 따라서 역으로 Q복음서에 의하여 도마복음서의 가치가 입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Q복음서와 도마복음서는 모두 설화복음서 이전에 실존하였던 예수논어의 다양한 작품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Q가 Q복음서로서 새롭게 인식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Q자료가 단순히 가라사대파편들의 " 랜덤컬렉션 " (randon collection, 무작위적 모음)이 아니라, 주제별로 " 그루핑 " (grouping)이 가능하며, 또 그 그루핑된 파편들의 서열이 또 하나의 거대한 주제를 전하는 또 하나의 복음서란 말인가? 많은 학자들이 Q의 서열이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편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인가? Q복음서를 창출하낸 Q공동체가 있을 것이고 이 Q공동체의 어떤 신념체계가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념체게는 이미 후대의 설화복음서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Q를 이해하면 Q의 존재의미가 약화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Q복음서의 가치는 설화복음서 이전의 순결한 말씀모음집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인데, 오히려 후대의 설화복음서의 가치체계속에 다시 Q복음서를 파묻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Q공동체와 마태공동체를 연속된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는 시각에 대해서도 나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아무리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를 가지고 그러한 가설을 입증하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그칠뿐이며 대부분 그 논리는 견강부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여튼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서는 매우 복잡한 논의들이 있다. 이 복잡한 논의들, 다시 말해서 Q복음서의 성격과 주제를 접근하는 다양한시각들에 관해서는 클로펜보르크의 『 Q의 형성 』과 버튼 맥의 『잃어버린 복음서 』를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John S. Kloppenborg, The Formation of Q: Trajectories in Ancient Wisdom Collections. Harrisburg, P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9. Burton L. Mack, The Lost Gospel Q: The Book of a Christian Origins, N.Y.: HarperSanFrancisco, 1994. 김덕순 옮김, 『 잃어버린 복음서』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논의에 별로 크나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Q복음서는 그 나름대로 완정한 하나의 유기적 전체이며, 어떻게 접근을 하든지간에 그것은 예수의 말씀일 뿐이며, 그 말씀은 읽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무한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급적인한 후대의 케리그마나 기독교적인 가설에 의존치 않고 순수한 " 예수운동 " 의 반영으로 Q를 순결하게 읽으려고 노력했다. 말씀은 말씀으로서 그냥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우리는 Q복음서의 존재를 재인식하게 되면서 자연히 Q복음서를 생산한 Q커뮤니티를 상정하게 된다. Q커뮤니티가 어떠한 성격의 것이었는지, 그것이 엣세네 쿰란공동체와 같은 치열한 조직공동체였는지, 아니면 역사적 예수를 사모하는 상식적인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휴먼 네트워크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시나고그와 같은 구심점을 가진 집회조직이었는지, 도무지 확정적으로 규정할 길은 없다.
그러나 Q복음서를 생산한 사람들은 최소한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이나 이적 같은 이야기에 그들의 믿음을 근거하는 신앙공동체의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예수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인생의 교훈으로 삼고 살아가는 건강한 상식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생각이 없었으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인하여 나의 죄가 대속된다고 하는 황당한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운동(The Jesus Movement)의 낙관적 열망에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긴박하고도 비극적인, 존재상실의 비관적 색채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기독교가 아니었다.
우리는 예수 죽음 이후의 상황을 너무 설화복음서(narrative gospel)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역사적 진실은 추적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 12제자" 라고 하는 개념도 마가복음 저자의 창작으로부터 시작된 관념이 통념화된 것일 뿐, 역사적 진실일 수는 없다. 예수라는 사람이 12제자라는 좁은 동아리 속에서 행동한 사람일 수 없으며, 더구나 처음부터 12제자를 뽑아 그들에게 특별한 권위나 권능을 부여했다는 것도 예수 사상에 어긋나는 것이다. 12제자라는 것 자체가 볼트만의 말대로 종말론적 케리그마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볼트만은 Q자료의 범위를 잘못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12제자에 관한 에스카롤로지를 Q자체에 귀속시키는 그것은 설득력이 없다.) 12제자는 유대인 12지파를 상징한 것이고, 재림의 시기에 12제자가 12지파의 옥좌에 앉게 되리라는 파루시아 사상을 전제로 한 것이다.
더구나 사도행전은 그 제목이 사도행전일 뿐 실제로는 바울행전일 뿐이다. 바울의 전도여행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바울 전도여행의 강렬한 그림 때문에 아주 중요한 시기, 즉 예수 사후 직후로부터 전개된 기독교운동의 역사가 바울적 그림으로 도배질당해 있는 것이다. 30년대로부터 60년대의 기독교운동사가 모두 바울의 활약상이나 예루살렘교회, 안티옥교회의 특수한 사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너 바울은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로마시민권의 소유자이며, 정통적 희랍문화권의 소양에서 자라난 사상가로서 그는 매우 신화적 비젼의 소유자였다. 바울은 우선 역사적 예수를 모른다. 그에게는 갈릴리지평의 풍진 속에서 민중들과 헤매는 예수의 이미지가 전무하다. 그는 예수 개인신상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디서 성장했고 어디서 활약했는지에 관해 일체 몰랐을 수도 있다. 그가 만난 예수는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는 도중에 음성으로 들려온 부활의 예수며, 비젼의 예수며, 특별한 권능의 예수다.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말씀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화적 비젼 속에서 예수의 부활을 체험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철학적으로 실존적으로 해석했다. 그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실존적 의미에 매달리게 된 것은 아마도 그가 회심하기 전에 스테판(Stephen)과 같은 기독교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중 그들의 용감한 순교장면을 목격하면서 받은 충격과 그들의 설교에 대한 자기성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 도중의 회심사건 이후에도 그 회심의 정당성을 예수의 사도로부터 인가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최소한 3년 동안 아라비아사막에서 고독한 수행의 기회를 가졌다. 모세가 40년 시내광야를 방황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나, 예수가 40일 동안 유대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것과도 똑같은 어떠한 신적 비젼을 획득하는 고독한 실존의 비상을 체험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비젼은 철저히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것이다. 바울은 부활한 예수의 사도였으며, 예수 부활의 실존적 의미를 헬라철학적 맥락에서 전파하는 기독교의 이방사도였다. 그의 기독교는 헬라화된 기독교(Hellenistic Christianity)였으며, 그는 명실공히 기독교신학의 창시자(the founder of Christian theology)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예수의 천국 선포 대신에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를 선포했다.
바울의 전도여행시기와 겹치는 시기에 Q복음서를 만든 사람들은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울의 전도여행시기에도 Q커뮤니티, 그리고 그와 유사한 수많은 커뮤니티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성격의 예수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예수의 가르침만이 문제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심상 속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랑했던 것은 살아있는 예수가 삶에 예시한 실천의 도(道, the way)였다. 예수가 설파한 길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현자(賢者)의 길이었고 우자(愚者)의 길이었다. 그것은 좁은 길이었고 넓은 길이었다. 그것은 삶의 길이었고 죽음의 길이었다. 이 중에서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예수가 가르치는 천국을 우리가 얼마나 바르게 이해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죽음과 부활의 신화적 세계는 사실 헬레니즘의 미스테리컬트나 그 이전의 중동지역이나 이집트문명의 모든 신화양식에 만연되어 있는 진부한 상식이다. 그와 관련된 정화의 제식이나 성찬의식, 이 모두가 기독교라기보다는 기독교화된 이방문명이다. 기독교에서 이러한 신화적 이방문명의 컬트를 탈색시키고 나면 오히려 우리는 예수교(예수의 가르침)를 얻는다. 기독교로부터 바울의 케리그마를 탈색시킬 때 오히려 우리는 예수교를 발견한다. 볼트만이 갈망한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논구할 필요조차 없는 케리그마 이전의 순결함을 우리는 Q복음서나 도마복음서의 진면(眞面)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Q복음서나 도마복음서의 진실은 결코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험난한 현실을 견디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니까 마가라는 천재는 어록복음서(sayings gospel)와 바울의 케리그마적 흐름, 그리고 이적설화, 신화적 담론, 제식담론 등을 종합하여 새로운 설화복음서(narrative gospel)를 창안해내었던 것이다. 그것은 드라마적 감동과 함께 새로운 기독교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그것은 절망의 심연에 던져진 새로운 묵시론적 · 종말론적 희망이었다. 그러면서 예수운동은 예수교에서 기독교로 변질되어간 것이다. 기독교는 볼트만의 말대로 철저히 케리그마의 소산이다. 케리그마란 철저히 교회를 전제로 한 것이다. 교회란 부활에서부터 출발하는 사건이다.
도마복음서와 Q복음서가 초기예수운동의 실체에 가까운 리얼리티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기 이전에는, 공관복음서의 중심에는 암암리 마가복음이 그 원형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마태와 누가의 위치는 그것에 비한다면 아무래도 2차적인 것으로 마가복음의 개정증보판적인 성격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Q복음서의 등장으로 우리는 마태와 누가를 마가 이전의 진실한 자료의 담지자로서 새롭게 평가하게 된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의 자료에 가라사대복음서를 첨가시켰던 것이다.
일례를 들면, 타가와(田川建三)같은 사람은 그의 저서 『 原始그리스도硏究』에서 마가복음이야말로 갈릴리지평에서의 역사적 예수의 원래 모습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작품으로서 그 원형성을 높게 평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의 발견으로 인하여 리얼한 복음서로서 재평가된 Q복음서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태와 누가가 오히려 역사적 예수의 모습에 더 가깝게 간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마가야말로 그의 내러티브 속에서 신화적 예수의 픽션을 마음껏 발휘한 진정한 창작자일 수가 있는 것이다. 볼트만은 일찍이 이러한 문제를 그의 『 공관복음서전승사』에서 통찰력 있게 간파하고 있다.
우리가 본 바에 의하면 동시에 예수 생애 서술이기도 한 " 복음서 " (유앙겔리온)를 쓴 첫 시도자가 마가라는 사실은, 마태와 누가에 있어서보다 마가에 있어서 신화적 요소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마태와 누가에도 이적적인 것이 고조되고 새로운 신화적 요소가 끼어들었지만 역시 이들의 전체적 윤곽에서는 그리스도 신화가 지상에서 활동한 예수상(像) 뒤로 후퇴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마태는 대체로 예수를 지혜론운 선생으로 묘사했고, 누가는 처음부터 " 복음서 기자 " 이며 또 동시에 역사가로서 자기 사명을 파악했다. 마가가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유일한 그리스도신화의 주제는 예수의 선재설이다. 이 교리적 사상이 예수의 생애 서술과 쉽게 연결될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요한에게 와서 비로서 그것은 그 나름대로 가능하게 되었다.(루돌프 볼트만, 허혁 역, 『 共觀福音書傳承史,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1, p. 433).
Q를 사용한 자세도 마태와 누가가 각각 다르다. 마태는 Q의 어록자료를 분해하여 마가의 줄거리에 잘 맞는 장면 장면에 안배시켰다. 그러니까 마태는 자신의 복음사관 속에서 Q에다가 색깔을 입혔다. 그러나 누가는 마가의 줄거리를 근거로 적당한 곳에 어록자료를 삽입시킨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블록화 시켜서 두 자료를 교대 교대로 나란히 나열시켰다. 따라서 누가의 Q가 마태의 Q보다는 Q의 원래 모습에 대체적으로 더 충실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달란트의 비유파편이아 기타 파편에 있어서 마태의 Q가 더 담박한 원형을 과시할 때도 많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Q복음서 자체 내에는 도마복음서보다 더 다양한 성격의 말씀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Q복음서의 일차적 성격을 지혜담론으로 규정할 때, 그리고 초기기독교회의 케리그마 이전의 사태로 규정할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Q복음서 내에는 " 人子담론 " 도 들어와 잇으며 종말론적 암시를 나타내는 많은 어록이 포함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Q의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제1의 카테고리는 지혜로운 가르침(wisdom teaching)이다. 이것이야말로 Q의 본령이며 Q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인간이 이 현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길, 즉 도(道, the Way)를 예시하는 것이다.
제2의 카테고리는 충돌담론과 심판담론(conflict and judgment sayings)이다. 충돌담론은 그가 살고 있었던 시대의 가치관이나 특정 그룹들의 행동양식을 강렬하게 비판하는 문명비판론자적인 담론이다. " 이 세대 " (this generation)에 대한 저주와 책망이 그 주제를 이룬다. 그러한 책망은 당연히 종말론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고 예수는 매우 래디칼한 사회비판자였으며 부와 권력을 소유한 자들의 부패스러운 모습을 역겨워했다. 심판담론이란 하나님의 심판이 곧 다가오리라는 예언자적 협박이다. 이러한 에언자적 협박을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묵시론적 담론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어록의 텍스트를 단장취의하는 오류일 수가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곧 시간의 종말, 우주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종말론을 묵시문학의 종말과 반드시 일치시킬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주의 종말의 순간에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within history) 이루어지는 심판인 것이다. 그것은 히브리 바이블 속에서 면면히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 속의 인간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며, 그것은 인간의 끊임없는 자성을 요구하는 실존적 현재사건인 것이다.
제3의 카테고리는 예수가 자신의 체험을 스스로 고백하는 내러티브적 담론이다. 사탄의 유혹과 그에 대한 예수의 반응이 말씀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자기인식에 관한 담론이다.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인식하는 이러한 담론들은 대개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지닌다.
제3의 카테고리는 아주 소량의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제1의 카테고리의 지혜담론과 제2의 카테고리의 묵시담론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예수를 인식하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가 후대 기독교 교회의 묵시론적 성향이 이미 갈릴리의 예수라는 역사적 실존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 자체가 묵시론적 성향의 사상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Q복음서의 연구는 역사적 예수가 일차적으로 지혜담론의 사상가였을 뿐이며, 묵시담론은 후대의 발전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거의 확정짓는다.
다시 말해서 초기기독교의 형성사를 묵시담론에서 지혜담론으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해진다는 것이다. 역시 지혜담론에서 묵시담론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클로펜보르크(John S. Kloppenborg)는 제1 카테고리와 제2 카테고리를 상충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Q복음서 형성의 단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 역사성을 도입한다.제1 카테고리(Q1)가 AD 50년경에 성립한 프로토텍스트가 될 것이고 제2 카테고리(Q2)가 AD 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반에 성립한 호교론적 성격의 텍스트가 될 것이다. 제3 카테고리(Q3)는 그 이후의 첨가가 될 것이며 그것은새롭게 등장하는 기독론적 신념(emerging Christological beliefs)을 반영하는 층대가 될 것이다.
모든 고문헌이 다이내믹한 형성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사계의 정론일 수도 있지만, Q복음서를 이렇게 세 카테고리로 나누어 형성단계로서 안배한다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회의감을 던져준다. 나는 Q에 나타나는 예수의 말씀을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단계론적 전제가 없이 Q를 이해할려고 노력하였다. 칼 맑스의 역사발전단계론의 허구성을 우리가 인식할 줄 안다면 기독교형성사에 관해서도 그러한 구획적 개념의 정당성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는 회의를 던져야 한다. 그러나 물론 학문적 분석의 다양한 시각을 참고하는 것도 우리의 유기적 이해를 풍요롭게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지혜담론의 스승으로서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는 시각을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의 편견 속에는 갈릴리라는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을 망각하는 오류가 내재해있다. 당시 갈릴리는 어느체제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그리고 갈릴리는, 기독교인들이 설화복음서의 상식적 담론에 따라 전제하는 것처럼 " 이스라엘 " 이라고 하는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예루살렘 쪽의 유대사회에 예속된 연속체가 아니라, 드넓은 그리스 · 소아시아 · 페니키아 ·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 인도 지역과 시리아 지역, 트랜스요르단 지역, 그리고 남방의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연결하는 교차지였고, 완충지였으며, 온갖 문명과 인종이 혼합된 문명혼성지대였다.
그리고 이들은 왕이나 특정 신에 대한 예속감, 충성심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알렉산더대왕 이후에 이 지역은 희랍모델을 따라 만든 새로운 도시들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문명의 첨단을 흡수한 개명한 지역이었다. 예수가 활약한 시기까지 이미 300여 년 동안 헬레니즘문화가 휩쓸었던 것이다. 희랍식 도시, 극장, 김나지아, 스포츠 센터, 학교, 학원들이 성행했고, 헬레니즘학파, 견유학파(Cynics), 스토아학파(stoics), 에피큐리아니즘(Epicurians), 회의론자들(skeptics)과 같은 온갖 자유로운 사상가들이 나래를 폈다. 해몽가들, 신탁론자들, 점성술사들이 소피스트들처럼 갈릴리지역에서 활약했으며 이들은 카리스마를 지닌 영적 지도자들로서 끊임없이 방랑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레코 · 로망시대의 특색중의 하나가 다양한 친목공도체(koinoniai), 축제공동체(thiasoi)의 성행이었다. 그리고 철학과 문학에 대한 열렬한 관심들이 피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예수라는 지혜담론의 위대한 스승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이미 국제화된 민중이었다. 그가 단순히 감자바위 동네만 감도는 시골뜨기 천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와 갈릴리를 그렇게 파악하는 시선은 모두 예루살렘의 수난중심으로 예수인생을 드라마타이즈시킨 설화복음서의 영향이다. 갈릴리, 그리고 예수는 예루살렘 중심의 가치체계에 예속된 그러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Q복음서 텍스트 그 자체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Q텍스트는 마가자료를 제외한 마태와 누가 속에 공동으로 들어있는 자료이다. 그렇게 되면 마태와 누가 텍스트를 비교하여 문자 그대로 겹치는 부분(the verbatim and near-verbatim mattew-Luke agreements)을 척출하면 Q의 최소한의 텍스트가 나올 것이다. 이것을 Q의 미니말 텍스트(the minimal text of Q)라고 하자. 그러나 이 미니말 텍스트를 가지고는 텍스트구성이 어렵다. 문맥이 형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문법적으로 온전한 문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마태와 누가 텍스트가 편집 · 개정한 부분을 비교하여 가장 중성적인 어떤 문맥을 구성해내야 한다. 이 부분은 "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Q의 범위 " (the generally accepted extent of Q)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마태나 누가 한 편에만 나오거나, 마가 · 마태, 누가에 모두 같이 나오는 것 중에서도 학자들이 Q자료범위로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 가능한 Q의 범위 " (the probable and possible extent of Q)가 될 것이다. Q복음서 텍스트에 관해서는 국제Q프로젝트(IQP. The International Q Project)가 1989년에 결성된 이래 많은 연구가 진척되어 왔다.
대체적으로 Q에 관해서는 클로펜보르크가 확정지은 텍스트가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내가 참고한 책들을 소개한다.
1. John S. Kloppenborg. Q Parallels: Synoptic, Critical Notes, & Concordance. Sonoma: Polebridge Press, 1988.
2. James M. Robinson, Paul Hoffmann, John S. Kloppenborg, ed. The Sayings Gospel Q in Greek and English: With Parallels from the
Gospels of Mark and Thoma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2.
3. John S. Kloppenborg, Marvin W. Meyer, Stephen J. Patterson, Michael G. Steinhauser. Q Thomas Reader. Sonoma: Polebridge Pres
s, 1990.
그러나 나는 나 나름대로 희랍어원문과 영역텍스트 등, 그리고 우리말성경들의 다양한 판본들을 참조하면서 Q가 한국인의 일반대중에게 쉽게 인지될 수 있도록 새롭게 분장(分章)하고 텍스트를 재구(再構)하였다. 내가 Q텍스트에 관하여 기준으로 삼은 책은 하기의 것이다. 마크 파우웰슨(Mark Powelson)과 레이 리거트(Ray Riegert)의 작업은 나에게 주요한 지침이 되었다.
Thomas Moore Intro., Marcus Borg Consulting Editor, Mark Powelson and Ray Riegert Editors. The Lost Gospel Q: The Original Sayings of Jesus. Berkeley: Seastone, 1996.
나는 Q복음서를 번역하는데 대한성서공회의 개역한글판 신약성서와 공동번역판 성서를 참고하였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개역한글판의 우리말은 비록 의미전달이 어려울 때가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말이라는 것을 명기해 둔다. 그리고 나의 우리말 번역은 Q텍스트와의 축어적(逐語的) 일치성보다는 의미의 역동적 상응성(dynamic equivalence)을 중시하였고, 맥락적 일치를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 맥락이 현재의 한국인 독자들의 의미체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동 · 서를 막론하고 Q복음서가 일반에게 공개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학자들의 담론 내에서만 머물렀다. Q복음서가 지니는 가설적 · 혁명적 성격 때문에 일반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는 심리가 서구신학계에도 지배적이었다. Q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이야? 일반인들이 그것을 고구(考究)할 방도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도마복음서가 출현하면서 세상이 변했다. 그만큼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Q를 보다 자신있게 말하기 시작하였고 그 참 예수의 참 말씀을 일반에게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이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Q의 대중판(popular edition)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의 사건이었다.
나 도올은 Q복음서를 평범한 한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하는 사명을 지니게 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한 결실이라 생각한다. 하여튼 " 엄마생각 " 이 간절해진다. 나의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는 신앙인이었지만 나의 사상편력에 관하여 관용을 넘어서 사랑으로 대해주셨다. 내가 예상치 않게 스님 옷차림으로 불쑥 나타나도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나의 모든 정신적 방황을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역정으로만 파악하신 것이다. 도마복음서 제42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었다: " 방황하는 자가 되라. " Jesus said, " Be wanderers. "
출처:큐복음서 도올 김용옥/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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