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14 본문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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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기독교인들은 그를 잘못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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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사람은 순진무구하게 움직일 수가 없다, 움직이기 전에 그는 생
각을 한다, 때로는 너무 지나치게 생각을 하다가 그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한
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결코 많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다, 그들은 행동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머리로만 사는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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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행동하기 전에 결론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결론에 이르러
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행동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행동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리고는 기다린다, 그러나 삶이란 그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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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그대는 무조건 믿기만 하는 사람, 장님이 된다, 그렇게 되면 정치
가이든, 미친 사람이든, 교황이든, 성직자이든, 그 어느 누구라도 그대를 어
느 곳으로도 데리고 갈 수 있다, 사실은 그들 스스로가 장님이다, 장님이 장
님을 인도할 때 거기에 당연히 파멸이 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
인가? 보통의 논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절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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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B.F. 스키너는 기억해 둘 만한 실험을 한 가지 한 적이 있다, 흰
쥐 한 마리가 이 실험의 대상이었다, 그는 이 흰 쥐를 이삼 일 동안 굶겨서
몹시 배가 고프게 했다, 실제로 그 흰 쥐는 너무나 배가 고파서 먹을 만한 것이 있으면 어디라도 뛰어내릴 태세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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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쥐는 받침대 위에 올려졌고 그 받침대 바로 밑에는 같은 크기에 같은 색깔의 상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상자 속에는 음식이 들어 있었다, 그 흰 쥐는 왼쪽이나 오른쪽 상자 어느 쪽으로든 뛰어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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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틈도 없이 그 흰 쥐는 즉시 뛰어내렸다, 그러나 오른쪽 상자로 뛰
어내리자 쥐는 전기 쇼크를 받았다, 더구나 거기에는 함정이 있었으므로 함
정에 빠지게 되면 먹이에 닿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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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왼쪽 상자로 뛰어내리자 전기 쇼크도 함정도 없었다, 그래서 쥐는 먹이에 닿을 수가 있었다, 이삼 일 정도 실험을 계속하자 쥐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다, 쥐는 왼쪽 상자로만 뛰어내리게 되었고 오른쪽 상자는 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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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스키너는 상자의 위치를 바꿨다, 쥐는 왼쪽 상자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거기에 전기 쇼크가 있음을 알았다, 이제 쥐에게는 혼란이 왔다, 무
엇을 해야 좋을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좋을지 쥐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뛰어내리기 전에 쥐는 몸을 떨면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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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철학자의 태도이다, 그는 마치 흰 쥐와 같다, 몸을 떨면서 무엇을 해
야 할까 하고 의심을 한다, 왼쪽 상자일까, 오른쪽 상자일까,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아무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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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흰 쥐는 다시 요령을 익히게 되었다, 스키너는 다시 상자의 위치를 바꿨다, 그러자 그 쥐는 너무나 혼란에 빠져서 심한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이 상자 저 상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몸을 떨며 망설이게 되었다, 어떻게 결정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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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쥐는 그대들이 결정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는
두 상자 사이로 뛰어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먹이는 없었고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이 실험을 한 지 몇 주가 지나가 그 흰 쥐는 미쳐버렸고 노이로제에 걸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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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그대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대는 혼란 상태에 있다,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 그리고 유일하게 머리에 떠오
르는 것은 “이것을 선택하는 것도 어렵고 저것을 선택하는 것도 어렵다, 그
러니 타협점을 찾아 중간에 뛰어내리면 된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먹이가 없다, 물론 전기 쇼크도 없지만 먹이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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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중간으로 뛰어내린다면 그대는 삶을 놓치게 될 것이다, 만일 흰 쥐에
게 두 개의 상자 모두를 선택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면 그 쥐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추측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든지,
아니면 중간으로 뛰어내리든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날카로운 지성,
아주 예리하게 깨어 있는 지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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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해결책은 없다, 나는 그대들에게 어떤 결론을 줄 생각이 없다, 예수 역시 누구에게도 어떤 결론을 주지 않았다, 단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해답이다, 그대가 이 문제를 이해하면 이 문제는 사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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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타협하지 않고 사
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 왜냐하면 타협은 독이 되기 때문이다, 신뢰
와 의심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의 전체 삶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모순이 있는 곳에는 분열이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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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정신은 분리가 된다, 그 최종적인 결과는 정신분열증이다, 혹은 그대
가 만일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부정한다면, 그 다른 하나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 또한 버려지게 된다, 의심은 착취로부터 그대를 보호한다, 믿음
은 그대에게 확신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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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버리면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 또한 떨어져나간다, 만일 그대가 양쪽 모두를 선택하면 그대는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는 셈이 된다, 만일 그대가 타협한다면 그대는 그대의 존재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그대는 둘이 된다, 그것은 더욱 많아져서 군중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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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 문제를 이해하고 두 마리의 말에서 내려오라, 어떠한 타협도 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완전히 다른 형태의 존재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질이 그
대의 의식에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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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그대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가? 그 질에는 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질에는 완전히 깨어있는 의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게 된다, 그대는 단지 충분히 깨어 있는 상태에 있기만 하면 된다, 그대의 자각은 착취로부터 그대를 보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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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깨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속일 수 없다,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그
대는 무기를 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만일 그대에게 착취를 당하면 그것은
그대가 교활하게 그를 속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자비의 마음으로
그대가 하는 짓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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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을 속이지 못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그대를 꿰뚫어 본다, 그의 눈에 그대는 투명하게 비친다, 그는 그대가 투명하게 보일 만큼의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만일 그대가 그를 속일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그의 자비로운 마음 때문이다, 그대는 그를 속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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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대들은 불가능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
이다, 그대들은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결코 가
능했던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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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그것이 쉬워보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쪽을 택한다, 타협은 언제나 쉬
워보인다, 그대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대는 타협을 한다, 그러나 타
협은 결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타협이라는 것은 두 개의 모순되는 것이 그대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두 개는 항상 긴장 상태에 있으며 그대를 분리시킨다, 그리고 분리되어 있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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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예수가 한 말의 의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를 잘못 이
해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완전히 놓치고 있다, 언제나 예수를 머리로 해
석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해석해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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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예수가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마리의 말만을 선택하라! 이 세상이든지 아니면 저 세상이든지 하나만 선택하라! 두 마리의 말을 타지 말라, 그것은 불가능하며 그대는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한 마리의 말만을 선택하라.” 이것이 바로 그들이 결론짓고 해석해 온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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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밤 물라 나스루딘의 아내는 배가 고파서 밤
참을 먹으려고 부엌으로 갔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었고 있는 것이라고는 개
가 먹는 비스킷 뿐이었다, 그래서 시험 삼아서 하나를 먹어보았더니 맛이 괜
찮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그 개 비스킷이 너무 괜찮았
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 그녀는 나스루딘에게 그것을 더 많이 사오라고 부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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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루딘은 상점으로 가서 많은 양의 개 비스킷을 샀다, 그러자 상점 점원
이 물었다, “웬일이십니까? 댁의 개는 작은데 이렇게 많이 살 필요가 있나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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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루딘이 말했다, “개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아내가 먹으려고 해서 사
는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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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이 말했다. “꼭 알려드릴 것이 있는데, 이 비스킷은 개먹이용으로 만
든 것이라서 만일 댁의 부인이 잡수시면 죽게 될 것입니다, 독이 들어 있으
니까요.” 그리고 육 개월 후 나스루딘의 아내는 정말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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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나스루딘이 가게에 들러 점원에게 말했다. “내 아내가 죽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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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이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비스킷은 댁의 부인
을 죽게 할 것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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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루딘이 말했다. “그 비스킷이 아내를 죽인 게 아니라네, 아내는 자동
차에 치여서 죽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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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마음은 언제나 자신이 내린 결론에 집착한다, 한 가지 결론을 잃
으면 자신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 있던지 그대는 자신
의 결론을 고집한다, 그것은 그대의 에고와 그대의 정신이 설 수 있는 기반
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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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물라 나스루딘이 자신이 짚기에는 너무 긴 지팡이를 가지고 걷고
있었다, 한 친구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나스루딘, 지팡이의 밑 부분을 조
금만 잘라내면 좋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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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나스루딘이 말했다. “그렇게 해봐야 소용없어, 너무 긴 것은 밑부분
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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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의 생각은 때로 그대들을 죽게 할 수도 있다, 그대는 그것을 이유라
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유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속임수일 뿐이
다, 그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이 설 수 있는 기반을 잃
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감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머리를 통해서
오는 자신감은 허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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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그대에게 자신감을 주지 못한다, 머리는 그대에게 허위적인 것들만
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허위만을 안겨 준다, 그것은 진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머리란 단지 헛된 생각들이며, 그림자들이다, 그 안에 본질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이유를 만들고 합리화한다, 그러면서 그대는 만족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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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선택에 의하면 그대는 결코 전체적이 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선택하라!” 고 말한 것
으로 생각한다, 예수는 절대로 선택하라고 말했을 리가 없다, 예수는 “선택
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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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대가 선택한다면 마음은 아주 강해져서 파괴되지 않는다, 선택하는
마음은 선택을 통해서 더욱더 단단해진다,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에 의해서 그대는 결코 전체적으로 될 수 없다, 그대는 어떤 것을
부정해야 되기 때문이다.
) -->
그대가 만일 믿음을 선택한다면 그대는 의심을 부정해야만 한다, 그러면
의심은 어디로 가겠는가? 그것은 바깥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대 내부의 깊은 곳에 있다, 그것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대는 단지 눈
을 감는 것에 불과하다, 그 뿐이다.
) -->
그대는 단지 그것을 그대의 무의식 속에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그것뿐이다,
그것은 그대의 내부에 있다, 마치 벌레처럼 그대의 의식을 갉아먹으면서 그대
의 내부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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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젠가 그것은 표면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할 것인
가? 어떻게 해야 그것을 떨쳐버릴 수 있겠는가? 만일 그대가 의심을 선택한
다면 그대의 믿음은 어디로 가겠는가? 그것은 그대의 한 부분이다, 그대는
타협점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온갖 것이 뒤섞인 합금이 된다, 그것
은 하나의 총체가 아니라 타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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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의미하는 바는 전혀 그 반대이다, 그는 “선택하지 말라!” 고 말하
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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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마리의 말을 탈 수 없으며
두 개의 활을 동시에 쏠 수도 없다.
그리고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만일 두 주인을 섬기면
한 주인은 공경하고
또 한 주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 -->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라, "만일 두 주인을 섬기면 한 주인은 공경하고 또
한 주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만일 하나를 선택하면 그대는 그 하나를 공경하고 또 다른 하나는 무시하게 된다, 그러면 무시당한 부분은 복수를 하게 된다, 그것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 -->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 과학은 의심에 의존한다, 전적으로 의심
에 의존을 하고 신뢰 같은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과학자들을 알고
있는가? 그들을 관찰해 본 일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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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밖에서 그들은 믿음이 매우 좋은 사람들이다, 과학자들보다 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속이기가 쉽다, 그들의 의심
하는 부분은 연구실에서 기능을 발휘하고 그들의 신뢰하는 부분은 연구실 밖
에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세상 물정에 관한 한 그들은 단순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연구실 속에서 그들은 매우 계산적이고 영리한 사람들이다.
) -->
그대는 과학자를 쉽게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종교인이라고 불리는 사
람들은 속이기가 쉽지 않다, 사원 안에서 그들은 깊은 믿음으로 살아간다,
사원 밖으로 나오면 그들은 아주 영리해진다, 소위 종교인들을 보라, 사원
밖에서 그대는 그들을 속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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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 밖에서는 그들을 속이고 착취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사원 안에
서는 그들은 아주 단순하다, 그들은 사원 안에서는 그들이 가진 신뢰의 부분을 사용하고, 세상 속에서는 그들이 가진 의심의 부분을 사용한다, 그들은 유능한 사업가들이다, 그들은 부를 축적하고 세상 전체를 착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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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는 결코 유능한 사업가가 될 수 없다, 그는 유능한 정치인도 되지
못한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의심하는 부분은 연구실 안에서 끝
나버리기 때문이다, 바깥에서는 신뢰의 부분이 기능을 발휘한다, 집에 있을
때의 과학자는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을 때와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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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도 그들의 방심 상태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어본 적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자는 그의
주의력을 연구실에서 사용한다, 그리고 연구실 밖으로 나오면 그의 주의력
은 사라진다, 그는 그 부분을 사용했고, 그것은 이제 끝나버린 것이다, 그러
므로 그는 이중적인 삶을 산다, 연구실 안에서 그는 아주 주의 깊은 사람이지만, 연구실을 나오면 방심하는 사람이 된다.
) -->
알버트 아인슈타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그가 친구의 집을 방문
하고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 일에 관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세상적인
이야기나 잡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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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말수도 적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친구는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 했다, 밤은 점점 깊어졌고 11시가 가까워오자 그 친구는 이제 아인슈타인이 그만 돌아가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인물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 -->
그래서 그 친구는 잠자코 기다리고만 있었다, 때때로 그 친구는 이런 암시적인 말도 해보았다. “이제 밤이 깊었군요.” 또는 “벌써 11시 반이나 되었네요.”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저 친구만 바라보고 하품만 할 따름이었다, 그 역시 졸리운 것이다, 12시가 다 되었을 무렵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하품을 하시는 것을 보니까 졸린 것 같군요.” 이것은 마지막 암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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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예, 몹시 졸립니다, 나는 당신이 집
에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야 나도 자러 갈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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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는 놀라서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당신은 지금 나의 집
에 와 있습니다!”
) -->
아인슈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거 참 실례를 했군요,
나는 줄곧 당신이 돌아가야 내가 잠을 자러 갈 텐데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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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안에서 그는 주의력에 관한 한, 그 안에서 진행되는 상황에 관한
한, 아주 완벽했다, 그러나 주의력은 그곳에서 다 소모되어 버린다, 연구실
밖에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완전히 반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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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소위 종교인들의 생활에서 그대가 모순되는 점을 발견한다
해도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사원 안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라,
그들의 얼굴을 보라, 그 모습은 그렇게 순진해 보일 수가 없다, 눈은 깊은 감
정에 젖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대는 그가 밖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 -->
어떤 모습으로 그가 자기의 점포에 앉아 있을지, 그대가 그의 점포에 갔을 때 어떤 행동을 그대에게 보여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감정적인 부분은, 그 믿음의 부분은 사원 안에서, 모스크 안에서, 교회 안에서 소진되어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나올 때면 그는 그 부분으로부터 놓여난다, 그러면 그는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깊이 의심하는 회의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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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타협이다, 예수는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대가 만일 하나를 무시
하고 다른 하나를 택한다면, 그대 존재의 그 무시당한 부분은 복수를 할 것
이다.
) -->
이것이 일을 어렵게 만든다, 그것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대가 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살려고 할수록 또 다른 한 부분은 그
대의 계획이나 생각 전체를 혼란시킨다, 그것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나타난
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 -->
그 방법이란,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대 존재가 지닌 모순 전체를 이해하는 일이다,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한쪽에 반대해서 다른 한쪽을 버리는 것이 아니
다, 왜냐하면 사물의 한 면만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 -->
그대가 1루피의 동전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 동전은 양면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한쪽 면만을 버릴 수는 없다, 그대는 한쪽 면만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다, 그대는 그 중 한쪽 면을 좋아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두 면
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
) -->
한 면만을 가지고 싶어도 두 면을 다 지녀야 한다, 그래야만 루피 전체가 그대와 함께 있게 된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대가 싫어하는 면은 숨기
고 그대가 좋아하는 면은 표면에 드러내는 것뿐이다, 그것뿐이다, 그것이
바로 의식과 무의식이 만들어지는 방법이다.
) -->
의식이란 그대가 좋아하는 부분, 그대가 좋아하는 말이다, 무의식이란 그
대가 좋아하지 않는 말, 싫어하는 부분이다, 의식은 그대가 선택한 부분이고
무의식은 그대가 선택하지 않은 부분이다, 이것들은 두 개의 교회, 그대가
다니는 교회와 다니지 않는 교회이다.
) -->
이와는 다르게 붓다 같은 사람의 내부에서는 의식과 무의식 모두가 사라진다,
그는 좋다고 해서 선택하지도 않고 싫다고 해서 버리지도 않는다, 동전 전체가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오직 동전 전체만이 떨어져나갈 수 있기 때문에 반쪽만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
의심과 신뢰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은 추위와 더위 같은 것이다, 그것들
은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에 속한다, 그것들은 하나의 전체 속에 속
하는 양쪽 극이다, 마치 전기의 양극과 음극, 남자와 여자 같은 것이다.
) -->
그것들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현상의 양쪽 극에 불과하다, 그대는 전기의 양극을 버리지 않고 음극만 버릴 수는 없다, 하나만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를 버릴 수는 없다.
) -->
그대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대 존재는 분리된다, 버려지고, 억눌려지고, 거부된 부분은 무의식이 된다, 받아들여지고 환영받은 부분은 의식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는 끊임없는 갈등이 존재한다.
) -->
그대는 여전히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탄 상태에 있다, 전체를 버리는 유일한
방법의 비밀은 버리지 않는 것이다, 버리는 것도 역시 하나의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이다, 그대는 버릴 수 있다. -
버리지 않음에 반대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이다.
) -->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전히 두 마리의 말은 거기에 존재한다, 아니다, 이것은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
) -->
67.전체적인 인간은 선택함이 없이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 -->
) -->
전체적인 인간은 선택함이 없이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동한다
모든 미치광이 같은 짓들을 이해하라, 그대 자신에 대해서 해온 것들,
그대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도록 허용해 왔는가를, 그리고 그대가 축적해 온 여러 가지 종류의 모순들을 이해하라, 그 전체를 꿰뚫어보라.
) -->
찬성이나 반대도 하지 말고, 비난도 하지 말고, 판단도 하지 말라, 단지 그대가 가진 전체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숨기지 말라,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 -->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라고 평가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라,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자가 되라,
그대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그대 존재의 전체를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그대가 아무리 복잡한 상황에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 -->
하나의 이해가 떠오르는 순간, 갑자기 그것은 떨어져나간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벽을 통해 들어오려고 하다가 “이것은 벽이고 문이 없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과 같다, 그렇다고 이제 그 노력을 포기할 필요가 있을까?
) -->
그대는 단지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단순하다, 좋고 싫은 것이 없다, - 그대는
단지 이것이 전혀 소용이 없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한 말의 의미이다, 그대는 단지 지켜본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움직인다, 거기에는 선택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그대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 -->
이해가 있을 때 그것은 무위가 된다, 그리고 무위적인 상태일 때 그것은 아름답다, 그것은 전체이기 때문이다, 노력이 있을 때 그것은 추함이 된다, 그것은 언제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전체가 되지 못한다, 노력이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대가 무엇인가와 대항해서 싸우고 있음을 의미한다.
) -->
왜 그대는 싸우고 있는가? 그대가 싸우고 있는 대상이 여전히 그대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적도 역시 의미를 갖는다, 친구와 마찬가지로, 반대이기는 하지만 적도 의미를 갖는다.
) -->
그대들은 그대의 적이 죽었을 때 그대의 내부에서 즉시 무언가가 죽는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들은 친구의 죽음만을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적의 죽음도 역시 괴로워한다, 그대는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 -->
인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모하메드 알리 진나와 마하트마 간디는 서로 적이
되어 오랫동안 싸웠지만 간디가 죽었을 때 진나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몹시 슬프다, 내 안의 누군가가 죽었다.”
) -->
이제 진나는 누구와 싸우겠는가? 누구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될 것인가?
누구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는가? 적이 없으면 에고는 떨어져나간다, 그대의
존재는 그대의 친구들과 그대의 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대는 모순 그 자체
이다.
) -->
오직 적도 없고 친구도 없는 사람만이 전체적인 인간이다, 그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저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선택함이 없이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움직인다.
) -->
그리고 삶이 그에게 무엇을 가져오더라도 그는 그것을 허용한다, 그는 헤엄
치는 것이 아니라 떠다닌다, 그는 투사가 아니다, 그는 자유로움 속에 있다,
그대가 만일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예수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
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마리의 말을 탈 수 없으며
두 개의 활을 동시에 쏠 수도 없다.
그리고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만일 두 주인을 섬기면
한 주인은 공경하고
또 한 주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 -->
보통의 의미로는 이 말이 “한 주인만을 택해야 하며, 두 주인을 택해서는
안 된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선택을 통해서 그대는 결코 전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두 사람의 주인 중 한 주인만을 선택하라는 문제가 아니다.
) -->
그렇게 되면 그대는 여전히 노예이고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오직 무 선택
만이 그대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선택하지 않으며 모든
노력을 버린다, 그대가 이해를 하면 그것은 저절로 떨어져나간다, 그때 그대
는 주인이다.
) -->
인도에서는 산야신을 스와미라고 불러왔다, 스와미란 ‘자기 자신의 주인’
이라는 뜻이다, 선택을 버린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이제 다른 사람을 주인 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 -->
그리고 이것은 에고이스트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만약 대립되는 두 개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면 그대는 희생자가 된다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 -->
대립되는 두 개 사이에서 그대가 선택한다면 그대는 그 대립되는 것 사이에서 분열된다는 깊은 이해를 함축한다, 산야신은 이 세계는 부정하고 저 세계는 긍정하거나 하지 않는다, 산야신은 찬성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친구나 적이 없이 단지 움직여간다.
) -->
선(禪)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의 산야신이 어느 날 아침
언덕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 언덕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는 그렇게 홀로 서
있었다, 마침 아침 산책을 하고 있던 세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다.
) -->
그들은 그 남자를 보고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말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저 중을 알고 있다, 때때로 그의 소가 길을 잃는데 그는 지금 저기에 서서 언덕 주위를 바라보며 소를 찾고 있는 중이다.”
) -->
두 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가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무엇을 찾고 있지는 않
다, 그의 눈은 거의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모습이 아
니다, 내 생각에 그는 틀림없이 친구와 아침 산책을 나왔다가 친구가 뒤에
처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 -->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게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
가를 기다린다면 가끔씩 뒤돌아보며 친구가 오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그런
데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다, 내 생각에 그는 기도를 하고 있
거나 명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 -->
그들은 이렇게 서로 의견이 달랐다, 그래서 그들은 호기심이 생겨 그가 무
엇을 하고 있는 중인지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그 언덕에 오르는 일은 힘들었으나 그래도 그들은 올라갔다, 그들이 그
남자가 있는 곳에 이르자 첫 번째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지금 소를 찾고 있는 중이지요? 나는 당신의 소가 가끔 길을 잃기 때문에 당신이 그 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 -->
그러자 그 남자는 눈을 뜨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소를 찾는 것도, 다른
무엇을 찾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 -->
두 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 생각이 맞을 겁니다, 당신은 뒤에 오
고 있는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지요?”
) -->
그 남자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말했다. “나에게는 적도 없고 친구도 없
다, 그러니 기다릴 친구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혼자이다, 아무도 뒤에 남아
있지 않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혼자다, 완전히 홀로이다.”
) -->
이번에는 세 번째 사람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 생각이 완전히 맞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으니까요, 나는 당신이 기도하거나 명상을 하고 있다고 생
각합니다.”
) -->
이 말을 듣고 그 남자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야말로 가장 어리
석다, 나에게는 기도할 대상이 없다, 그리고 성취해야 할 목표도 없다, 그러
니 내가 어떻게 명상을 할 수 있겠는가?”
) -->
이 말을 듣고 그들 세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 -->
그 남자가 말했다. “나는 그냥 서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
이것이 바로 명상이다, 이것이 바로 산야스라는 말의 의미이다, 단지 존재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자유를 얻는다, 친구와 적으로부터의 자유, 소유
와 비소유로부터의 자유,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물질과 정신으
로부터의 자유, 모든 선택과 분리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때 불가능은 떨어져
나가고 그대는 자연스러운 존재가 된다, 그대는 도(道) 그 자체가 된다, 그대는 흘러다닌다.
) -->
불가능한 것을 구하려는 노력이 없어지면 근심은 사라진다, 그러면 그대
는 더 이상 걱정 속에서 살지 않는다, 걱정 속에서 살지 않게 되면 환희가 솟아오른다, 환희는 성취해야 할 무엇이 아니다, 그대는 그러한 능력을 갖추기만 하면 된다, 근심 속에서 살지 않을 때 환희는 일어난다.
) -->
그대는 그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그대는 문을 열었고 햇살이 들어와 그대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대는 근심 속에 있고 분리되어 있으며 두 마리의 말에 올라타고 있다.
) -->
두 개의 활을 동시에 쏘려고 애쓰고 있다, 그대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있다,
그대는 병들어 있다, 그대는 흔들리고 있다, 아니면 기껏해야 그대는 타협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노이로제에 걸려버린다.
) -->
보통의 사람들은 어쨌든 자기 일을 수행한다, 노이로제는 그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순응하는 시민, 그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비록 그대가 순응하는 시민, 선량한 시민, 그저 보통 사람이라 할지라
도 어떤 환희감도 그대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 -->
그대는 슬픔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세상에서 성취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그대에게 더 깊은 슬픔을 가져다줄 뿐이다, 성공한 사
람들을 보라, 그대보다 앞서 달리고, 그대보다 먼저 정상에 도착한 사람들을
보라, 그대는 그들이 그렇게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제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 -->
68.자연스러운 것, 가능한 것, 쉬운 것을 생각해야 한다
) -->
어느 날 아침 물라나스루딘이 매우 슬픈 얼굴을 하고 시장을 향해 걸어가
고 있었다, 한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나스루딘이 말했다. “묻지 말게, 나는 지금 너무 슬프고 우울해서 울고 싶
은 심정이네.”
) -->
그러나 그의 친구는 거듭해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자네가 그렇
게 슬퍼하는 것을 여태껏 본 일이 없네, 자네는 지금까지 돈 문제라든지 그
밖에 어려운 일들을 너무 많이 겪어오지 않았나? 그래도 자네는 이렇게까지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었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 좀 해보게.”
) -->
나스루딘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주일 전에 나의 숙부 중의 한 사람이 죽
었다네, 십만 루피의 유산을 나에게 남기고 말이야.”
) -->
친구가 말했다. “나스루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숙부께서 십만
루피의 유산을 자네에게 남겼다면 기뻐해야지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
나스루딘이 말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런데 지난주에 또 한 사람
의 숙부가 돌아가셨다네, 나에게 이십만 루피의 유산을 남기고 말이야.”
) -->
친구가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자네는 춤추고 기뻐하며 잔치라도 벌여야할 걸세,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
지 않은가? 자네는 이 마을에서 최고로 행운아일세!”
) -->
나스루딘이 말했다. “나도 알고 있네, 그렇지만 이제 나에게는 숙부가 더
이상 없다네, 그것이 나를 슬프게 만드는 거야.”
) -->
이것이 성공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유산을 물려주는 숙부가 이제
더 이상 없을 때, 갑자기 희망은 사라지는 것이다, 실패한 사람은 여전히 희
망을 가질 수 있다, 숙부는 아직 남아 있고 가능성은 존재한다.
) -->
성공할수록 걱정은 많아진다, 성공이 그대에게 노이로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공이 그대에게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미국이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정신분열증 환자나 미치광이들이 더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은 많은 분야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 -->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토록 심한 광증은 없다, 사람들은 아직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희망을 가질 수 있을 때에는 아무 증상도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대는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릴 뿐이다, 목표가 성취되었을 때에는 그대는
조용히 서서 그대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 -->
그대가 자신의 존재 속에서 만들어 온 그 번잡스러운 것들과 혼란을 바라본다, 그때 그대는 갑자기 머리가 이상해질 것이다, 그대는 이전에도 언제나 그런 이상한 상태에 있었겠지만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대가 성공했을 때 이다.
) -->
왜냐하면 그대에게 더 이상 꿈꿀 대상이 없을 때 그대는 그대 자신과 마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대의 상태에서는 환희는 불가능하다, 행복은 불가능하다, 그대에게 가능한 것은 그것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에게 만들어온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참을 수 있을 뿐이다.
) -->
그러나 환희는 가능하다, 그것은 예수나 붓다 같은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그것은 그대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 -->
자연스러운 것, 가능한 것, 쉬운 것을 생각해야 한다,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것,
도전적인 것을 생각하지 말라, 에고는 항상 불가능한 것을 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러면 실패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
) -->
그래도 에고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 그대 자신이 특별
한 인물일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서 그
대는 위대한 투사가 된다.
) -->
종교는 쉽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말에 올라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마치 특정한 곳을 목표로 하지 않는 아침 산책과도 같
다, 그저 걷기만 하는 것, 그것이 목표이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단지 아침
의 미풍과 햇살, 그리고 새들의 소리를 즐기는 것 - 바로 그대 자신을 즐기는 것이다.
) -->
69.영원한 것을 선택하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높은 산 위에 견고하게
잘 세워진 성채는
무너질 수 없고 결코 숨겨질 수도 없다.
)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두 귀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거나
숨겨진 곳에 두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등경 위에 얹어놓아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도록 할 것이다.
)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두 사람 모두 도랑에 빠질 것이다.
) -->
인간의 모든 문제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그대가 만일 일시적인 것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대의 집을 모래 위에 짓는 것이다, - 그 집은 무너질 것이다, 그대가 만
일 영원한 것을 선택한다면 그때 그대는 무엇인가 아주 영원히 존재하는 것
을 성취하게 된다.
) -->
그리고 그 이외에 그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영
원한 것만이 그대를 만족시킬 수 있다, 일시적인 것은 그대를 만족시키지 못
한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그대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을 더해 주게 된다,
그것은 마치 타오르는 불을 끄기 위해 불 속에 버터를 던지는 것과 같다.
) -->
버터는 불의 먹이가 되어 불길을 더욱더 타오르게 할 것이다, 일시적인 것은
마치 그대 마음속의 욕망이라는 불에 던져지는 버터와도 같다, 그것은
불을 더 잘 타오르게 한다, 그것은 불의 먹이이다, 오직 영원한 것만이 그대
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줄 수 있다, 그밖에 다른 길은 없다.
) -->
그러나 내가 “그대가 만일 영원한 것을 선택한다면, 그대는 산 위에, 오래
견디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러면 그대의 노력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여기에서 ‘그대가 만일 영원한 것을 선택한다면’ 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 -->
영원한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선택을 한다 해도, 선택하는 것은 모두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선택 그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
그렇다면 내가 ‘영원한 것을 선택하라’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대가 만일 일시적인 것의 무의미함을 이해할 수 있다면 - 그대는 다시 목마르게 될 것이고, 그리고 이 물이 그대의 갈증을 없애주기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 그때, 일시적인 것은 떨어져나간다.
) -->
그것은 무의미해지고, 그대는 단순히 그 무의미함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그냥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영원한 것이 선택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대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 -->
일시적인 것이 떨어져나갈 때 영원한 것이 그대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은 전적으로 쓸모 없게 되어야 하고 무의미해져야 한다,
일시적인 것에 대한 그대의 실패는 전적인 실패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서 실패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이 예수의 산상수훈 속에 반드시 첨가되어야 한다.
) -->
이 세상에서 실패자가 되라! 그러나 그대는 그 반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
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 하고 있다, 그대가 만일 세상에서 성공한다면 그
야말로 진짜 실패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일시적인 것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 -->
그러나 그 누구도 성공한 적은 없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에게 행운이다, 아무
도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그대는 계속해서 실패를 연기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대는 그것을 다음의 생으로 연기할지도 모르고, 수없이
많은 생에 걸쳐 연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 -->
일시적인 것을 가지고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 위에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 위에, 실체로부터 벗어나 순간순간 흘러가 버리는 것 위에 어떻게 그대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겠는가?
) -->
집을 지을 준비가 될 무렵이면 그 순간은 사라져버린다, 그대가 언제나 좌절감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대는 역시 똑같은 짓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 -->
그대는 깨어 있지 않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민감하지 않
다, 그대는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 그대는 삶에 대해서
무지한 채로 남아 있다, 그대는 삶에 대해서 아무런 경험도 하지 못하고 있
다.
) -->
그대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집 짓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
른다, 그대는 기술자나 건축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일시적인 것 위에 집을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삶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첫 번째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높은 산 위에 견고하게
잘 세워진 성채는
무너질 수 없고 결코 숨겨질 수도 없다.
) -->
많은 의미가 이 속에 있다, 먼저 “높은 산 위에 잘 세워진 성채......”
) -->
그대들은 언제나 골짜기 아래에 무엇인가를 만든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
이다, ‘골짜기’란 어두운 밤을 의미하고, ‘높은 산’이란 보다 깨어 있고 보다 자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 -->
그대가 깨어 있으면 깨어 있을수록 그대는 더 높이 오른다, 그대가 완전히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에베레스트 산 위에 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는 시바
신을 구리샹카르(Gaurishankar), '가장 높은 산‘에 사는 신이라고 말한다.
) -->
시바는 가장 높은 의식이다, 시바는 사람이 아니다, 시바란 완벽한 의식을
의미한다, 완벽한 의식이 구리샹카르에 산다.
) -->
무의식일 때 그대는 어두운 골짜기로 굴러떨어진다, 그대의 밤은 골짜기
이다, 그대의 잠은 골짜기이다, 깨어 있을 때 그대는 높은 곳을 향하여 움직
이기 시작한다, 그대가 완전히 의식이 없을 때 그대는 존재의 가장 낮은 지
점에 있는 것이다.
) -->
사다리의 최하단에는 바위가 있다, 바위는 완전한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다, 바위는 성장한다, 바위는 나이를 먹게 되고 결국에는 죽는다, 그것은 그대가 통과하는 모든 주기를 통과한다.
) -->
그러나 바위는 의식이 없다, 그것은 사다리의 제일 아래 부분이다, 때로 그대는 하나의 바위와 같다,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그대와 바위 사이에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대에게 한 줄기의 의식도 없을 때 그대와 흙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대는 굴러떨어져 있는 것이다.
) -->
잠 속에서 그대는 골짜기를 향해 간다, 죄인이라는 말은 끊임없이 잠 속에
서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자란 잠 속에서도 자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 -->
크리슈나는 그이 제자 아르쥬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다 잠들어
있을 때에도 요기는 깨어 있다, 누구나 다 졸고 있을 때에도 요기는 절대로
방심하지 않는다.”
) -->
요기는 전적으로 깨어 있다, 언제나 주시하는 자가 되어 한 점에 머물러 있다, 그는 잠 속에서도 주시한다, 잠 속에서 그대는 굴러 떨어진다, 깨어 있을 때 그대는 높이 상승한다.
) -->
그대의 내부에서 아무것도 잠들어 있지 않을 때, 그대의 의식 전체가 빛으로
충만할 때, 단 한 조각의 무의식도 없을 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깨달은 사람이라든가 그리스도의 의미이다, 거기 무의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높은 정상이다, 이것이 바로 ‘높은 산 위에 잘 세워
진 성채’를 의미한다.
) -->
그대는 자신의 성채를, 자신의 집을 골짜기 아래에 세우고 있다, 그리고
보통의 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더 깊이 잠들기 위해 약까지 구한다,
그대는 더 깊이 잠들기 위해, 더 깊은 무의식 상태가 되기 위해 최면술 같은
방법들까지 동원한다, 왜냐하면 의식은 고통이며 고뇌이기 때문이다.
) -->
왜 그것이 고통인가? 붓다나 예수는 그것이 그대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그대에게는 의식이 고통이 되는가? 그리고 왜 그대는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하는가? 왜 의식하는 것이 고통스러운가?
) -->
그대의 1퍼센트만 의식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무의식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다, 그렇게 되면 그 1퍼센트는 나머지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며 고통 받는다, 남은 99퍼센트가 미친 상태에 있는 것을 보고 그 1퍼센트
의 의식은 괴로워한다.
) -->
그래서 그 1퍼센트의 의식은 자기 최면에 빠지기 위해 알코올이나 마약,
LSD나 마리화나 같은 것을, 또는 그밖의 다른 것 -- 섹스나 음악이나 만트라 같은 것들을 찾는다.
) -->
그렇게 해서 1퍼센트도 역시 뒤로 물러서 전체의 부분이 된다, 그렇게 되면
걱정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대의 내부에서 그것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고,
거기에 자각하고 깨어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라진
것이다.
) -->
이것이 바로 ‘타조의 논리’라고 불리는 것이다, 타조는 적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머리를 모래 속에 처박는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볼 수 없다, 그리
고 그의 논리는 이렇다. “나에게 적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적이 거기에 존재하겠는가?”
) -->
타조는 완벽한 무신론자처럼 보인다, 타조의 논리는 무신론자들이 해왔던
말과도 같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신을 볼 수 없다면 어떻
게 신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볼 때뿐이다.”
) -->
마치 그대가 보는 것에 의해서 존재가 결정된다는 논리이다, 그대가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
타조는 그의 머리를 처박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 즉시 그는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거기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은 그대의 논리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대는 눈을 감음으로써 적의 손 안에
들어가고 만다, 그대는 희생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 -->
그대는 달아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도망가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 적
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적이 없으므로 그대는 잠깐이나마 행복을 느낀다, 마약을 통해서 무의식 상태가 되면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맛보는 것이 바로 이런 식이다.
) -->
거기 아무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적은 사라지고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통을 즐기기 위해서 그대는 깨어 있어야 하고 자각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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