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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11 본문

영성수행 비전/도마복음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11

柏道 2018. 12. 9. 19:59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The Mustard Seed)-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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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둘을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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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젖을 먹는 어린아이들을 보시고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젖을 먹고 있는 이 어린아이들이야말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자와 같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저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갑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밖으로 만들고 밖을 안으로 만들 때

위를 아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 때

그래서 남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는 여자가 아니게 될 때

그때 너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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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예수가 한 말 중에서 가장 깊은 의미를 가진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길을 찾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또한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이다, 만일 이것을

성취한다면 더 이상 성취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몇 가지를 이해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의 이 말 속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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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머리로 살면 결코 순진무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순진무구할 때에만 신은 그대에게 내려온다, 또는 그때 그대는 신에게 올라간다, 순진무구함 이 바로 그 문이다. 머리는 교활하다, 머리는 계산적이고 영리하다, 그리고 이 영리함 때문에 그대는 놓친다, 이 영리함 때문에 그대는 하느님 나라를 놓친다, 그대들은 머리를 통해서 이 세상의 왕국을 얻을는지는 모른다, 세상에서는 교활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교활해야만 한다, 교활해질수록 그대는 더욱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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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적일수록 세상의 길에서 더욱 유능한 인간이 된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그와는 정반대에 있다, 거기에 어떤 계산이나 영리함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머리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머리는 단지 계산이나 영리함을 위한 기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어떤 영리함이나 계산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면 머리는 쓸모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슴이 그대 존재의 근원이 된다, 가슴은 순진무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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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줄곧 영리해지려고 하는가? 왜 머리는 줄곧 어떻게 하면 속일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은 오직 그것뿐이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는 실패할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이 세상에서의 실패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대는 다른 세계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나는 세상적인 성공과 관련이 없다, 나는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 들일 준비를 할 때, 거기에 즉시 하나의 전환, 회심이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의식은 바깥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의식은 내면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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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순진무구함을 대단히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늘 어린아이들의 아름다움과, 들에 핀 꽃들, 백합꽃의 순수함을, 그리고 새들의 순진무구함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형태의 순진무구함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 다, 그대들은 이미 그것을 잃었다.

그러므로 그가 한 말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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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다시 어린아이가 될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일단 그대가 지식의 맛을 알았다면 돌이킬 수는 없다, 그대는 지식을 초월할

수는 있지만 되돌아갈 수는 없다,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그것을 넘어서 갈 수는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이전의 상태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대는 다시 보통

의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다, 어떻게 그대가 이미 안 것을 잊을 수 있겠는 가? 그것을 넘어갈 수는 있다, 그것을 초월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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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기억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어린아이의 흉내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한 모방은 교활한 것이며 계산적인 것이다, 예수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대는 어떻게 하면 어린아이 같아질까 하고 연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결코 연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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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는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는 자기가 어린아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순진무구함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그는 순진무구하지만 그것에 대한 자의식이 없다.

그러나 그대가 연습을 한다면 그대에게는 자의식이 있다, 그러면 어린아이다움은 가짜에 불과하다, 그대는 어린아이 같은 행위는 할 수 있어도 문자 그대로 어린아이가 되지는 못한다.

성자나 현자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어린아이와 같게 된다, 그는 머리의 헛됨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초월했다,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의 모든 무의미함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성공하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자 하는 욕망을 버렸다.

위대하고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은 욕망, 에고를 만족시키기 위한 욕망들을 다버린 것이다, 그는 이러한 욕망들의 무의미함을 완전히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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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해에서 초월이 일어난다,

그것을 이해하는 즉시 그대는 변형되어 하나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다.

그때 거기에 어린아이 시절이 다시 도래한다, 이것을 제2의 어린 시절이

라고 부른다, 힌두교에서는 이 단계를 두번째 탄생드위즈라고 불러왔다.

그대는 다시 한번 태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탄생이다, 이것은 그대 자신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 두 육체의 만남, 이원성으로부터의 탄생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자신을 통한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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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예수의 탄생 - 동정녀로부터 태어난 것 -의 의미이다, 그러

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를 놓쳐 버린다, 동정녀로부터라는 말은 하나로부터라는 뜻이다.

거기에 타인은 없다, 그러니 누가 그것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누가 그것을

침입할 수 있겠는가? 거기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처녀성은 완전히 순수하게 남아 있다, 만일 타인이 있으면 그대는 처녀성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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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마음속에 타인이 있으면 그대는 순진무구함을 잃는다, 그러므로 타인

에 대한 의식, 타인에 대한 욕망이 처녀성을 잃게 한다, 이 두 번째 탄생은 처녀성에서 나온다, 그러나 첫 번째 탄생은 섹스로부터 나온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도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섹스에 의해 태어났다, 그것은 온당한 일 이고 그럴 수밖에 없다, 예수도 씨앗의 상태에서는 그대들과 똑같다, 그러나

꽃 피어난 상태에서는 그는 완전히 다르다, 두 번째의 탄생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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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탄생시킨 것이다, 유대의 신비주의 공동체였던

고대의 에세네 종파에서는 사람이 변형되었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의 아버지가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그러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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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에게는 아버지가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예수 스스로가

자신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불합리해 보이지만 사실이다.

두 번째의 탄생은 처녀로부터의 탄생이다, 그대는 다시 순진무구해진다,

이 순진무구성은 어린아이의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이다, 어린아이는 그 순

수성을 잃어버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이 준 하나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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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가 획득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그는 순수성을 잃는다, 그리고 아이는 성장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자는 순진무구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제 이 순수성은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 그것은 성장의 절정이며 이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아직 성장이 진행 중이면 사물들 역시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초월하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 목표에 이르렀다면,

그때 비로소 사물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는 매일매일 성장해야 한다, 그는 순수함을 잃을 것이다, 그는 경

험을 쌓을 것이다, 그는 지식을 얻어야 하고, 영리해져야 하고, 계산적이 되 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의 계산적인 구조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면, 그대는 섹스로

부터의 탄생, 이원성으로부터의 탄생 상태 속에 머무르고 만다, 그리고 그대의 내부에는 항상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그대는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두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면 그대는 두 사람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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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안에는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단지 남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또한 여자이기도 하다.

여자는 단지 여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또한 남자이기도 하다,

사람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대의 아버지는 계속해서 그대 속에 존재한다, 그대의 어머니도 계속해서 그대 속에 존재한다, 두 사람은 모두 그대 내부에 합류해 있다, 두 사람이 그대의 육체 속에서 만나 흐르고 있다, 그대는 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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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해지기 위해서는 하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대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한 말이다, 니고데모가 예수에게 물 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가 말했다. “먼저 너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무엇

이든 일어날 수 있다, 지금의 너의 상태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나 또한 같은 말을 그대들에게 한다, 지금의 그대들의 상태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그대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대가 그대 자신의 아버지

가 되지 않는 한, 그대의 이원성이 사라지고 그대가 하나가 되지 않는 한, 아 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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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마음을 초월하지 못하면 그가 죽을 때 마지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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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내부에 있는 여성과 그대 내부에 있는 남성이 만나면, 그들은 하나의

원이 된다, 그들은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사라진다,

그들이 서로 합쳐지면 그때 양성은 사라지고 하나가 남는다, 이 하나가 바로 처녀성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한 말의 의미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라,” 이 말

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면 왜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하는 가?

아이를 임신하면 그 아이는 처음 몇 주 동안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생물

학자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그들은 아이는 그 시기에 아직 성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처음 몇 주 동안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아이는 그 둘 다이거나 아니 면 아무 성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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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분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오늘날 의학이 어린아이의 성을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몇 번의 주사로써 그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남성과 여성이 아이에게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균형은 곧 깨지게 되고 남성이 우위에 서든지 여성이 우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우위를 차지하는 쪽이 그 아이의 성이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균형을 유지한다, 양성이 모두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이제 호르몬에 의해 서 성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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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남성 호르몬을 주사하면 그 아이는 남자가 되고 여성 호르몬을 주사

하면 여자가 된다, 성은 바깥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할 수 있다, 성은 존

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주변적인 것, 육체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호르몬에 관계되는 육체적인 것이다, 존재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곧 분리가 일어나

아이는 여성이나 남성 둘 중 의 하나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처음에 아이는 합일체이다, 그러다가 태어나면 육체적으로 남자이거나 여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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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구별은 의식의 깊은 곳에는 아직 침투하지 못한 상태이

, 의식 속에서 아이는 아직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아이는 자기가 남자인

지 여자인지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다, 몇 달 정도 더 지나야 그 구별이 아이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각기 다른 외모를 가지면서

-성에 따라 - 즉시 자기 의식을 품게 된다.

처음에 육체는 하나였다, 그리고 육체는 분리된다, 그러나 육체가 분리되

어도 아이는 하나이다, 그 다음에는 아이도 역시 분리된다, 그대들은 나는

남자이다' 또는 '나는 여자이다' 라는 것으로 자기 정체성을 갖기 때문에 순 수한 인간 존재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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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이 일생 동안 계속된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그대들은 존재의 근

원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원은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자는 그 근원에 다시 도달하고 원은 완성된다, 먼저 분리가 마음에서 사라져 버린다,

역전환이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먼저 육체가 분리되고 그 다음에는 마음이 분리된다,

그러나 현자에게 있어서는 먼저 의식으로부터 분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육체

로부터 분리가 사라진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는 다시 한번 하나가 된다,

것이 바로 제2의 어린시절이다, 그는 다시 순진무구해진다,

그러나 이 순진 무구함은 매우 풍요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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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은 빈약한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시절의 순진무구함은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자의 순진무구함에는 그 부족한 것이 갖추어져 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삶의 형태들을 알고 있다.

그는 움직이면서, 경험해야 하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 그는 아주 반대쪽으로도

가보았다, 죄인이 되기도 했고 아주 깊숙이 탐구했으며 세상적인 것에 탐닉

하기도 했다, 그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경험들을 했으며,

그리고 이제는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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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순진무구함은 아주 풍요롭다, 그는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누구도 그것을 파괴할 수 없다, 그는 그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을 파괴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에게 더 이상 자극을 주지 못한다,

모든 자극은 사라진 것이다.

그대가 이 단계에 이르면 - 처음에 그대는 하나의 어린아이였고 마지막에

다시 하나의 어린아이가 된다 - 그대의 삶은 하나의 완전한 원이 된다, 이것 이 바로 완성이다.

그대가 존재의 근원에 다시 도달하지 못하면 그대의 삶은 미완성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두카, 즉 고()라고 불렀던 것이다, 만일 그대가 미완성인 상태라면 거기에는 고통이 있다, 그러나 완성된다면 그대는 충만하다. 현자는 충만한 상태로 죽는다,

그러면 이제 그는 더 이상 태어나는 일은 없다, 이 경험의 세계로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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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미완성인 채로 죽는다, 그리고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들은 다시 태어나야 만 한다.

그대들의 존재는 완성되기 위하여 몇 번이고 계속해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완성되지 못한다면 그대들은 탄생과 죽음 사이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오갈 것이다,

이것을 힌두교에서는 삶과 죽음의 수레바퀴라고 부른다, 현자는 이 윤회의

수레바퀴로부터 빠져나온다, 그 자신이 하나의 원이 되었고 이제 윤회의 수레 바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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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 분리는 그에게 아주 최후까지

남는다, 성은 아주 최후까지 남는다, - 육체는 약해진다 해도 정신은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섹스는 가장 근원이 되는 이원성이다, 그러므로 섹

스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하나’, 즉 비이원성인 브라마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기억하라 - 비이원적인 것, 아드바이타, 브라마, ‘하나’, 이것은 가설이 아니다, 이론도 아니고 하나의 교리도 아니다,

이것은 그대가 논쟁할 수 있는 어떤 철학도 아니며 신앙도 아니다.

그것은 성의 초월이다, 그것은 아주 깊은 생물학적인 현상이며 연금술적인 것

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육체 전체가 하나의 변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노인이 정원의 벤치에 앉아 자기들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노인들에게는 달리 할말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75세가 된 노인이

말했다. “내 귀가 점점 먹어가고 있어, 그래서 사람들이 크게 소리질러야만 들리고 그것도 정확하게 들리지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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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78세가 된 다른 노인이 말했다.

내 눈은 자꾸 침침해져서 잘 보이지 가 않아, 금발 머리와 빨간 머리조차도 구별이 안 돼!”

두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세 번째 노인에게 물었다.

물라 나스루딘, 당신의 문제는 어떤 거요?”

93세가 된 나스루딘이 말했다. “내 문제는 당신들보다 훨씬 더 심각하지,

어젯밤에 일어난 일인데, 우리는 저녁을 먹고 나서 포도주를 조금 마셨지,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쉬다가 잠이 들어버렸어, 삼십 분쯤 지나서 깨어보니

마누라가 침실에 들어가버렸더군.

그래서 나도 침실로 들어가 마누라한테 말했지. ‘나도 침대에 들어가게 내

자리도 좀 주구려, 그리고 우리 조금 즐겨야 되지 않겠나?’ 그랬더니 마누라가 말하는 거야, ‘뭐라구요? 바로 이십분 전에 즐겼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나스루딘은 매우 슬픈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여보게들, 내 문제는 바로 내 기억력이 잠자고 있다는 거야!”

섹스는 아주 최후까지 계속해서 그대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 에 대해서 생각해 본 일이 없겠지만, 사람이 마음을 초월하지 못하면 그가 죽을 때 마지막까지 마음속에 남는 것은 섹스이다, 태어날 때 맨 처음 있었던 것이니

최후의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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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한번 시도해 보라, 그대가 밤에 잠들기 전에 했던 마지막 생각,

들기 직전 가장 마지막에 했던 생각을 지켜보라, 그 생각을 한 다음에는 잠

들어버리는 바로 그 생각을 지켜보라,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라, 아침이 되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그 생각은 그대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과 일치할

것이다, 혹은 반대로 해보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을 관찰해서 기억해 두라, 그러면 밤에 그것은 마지막 생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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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순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섹스는 삶에 있어서 최초의 것이고 또 맨

마지막의 것이 된다, 그대가 그것을 초월하지 못하면 그대는 섹스의 희생자가 된다,

그대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교수형을 당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그대는 아는가?

남자가 교수형을 당하면 그는 그 즉시 정액을 방출한다, 이것은 교수형이 행해지는 감옥이면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교수형을 당하는 남자가 죽어 갈 때 마지막에 일어나는 것은 정액을 방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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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삶은 하나의 순환

이고 그것은 그 자체로 완성된다, 성은 최초의 것이었다, 그것을 통하여 사람은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 것이 되며 그것을 통하여 사람은 다시 또 하나의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현자는 성을 초월한다, 그렇다고 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기억하라, 억압은 초월이 아니다, 그대가 성을 억압한다면 그대는 아직도 성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대가 억압한다면 그대는 여전히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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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는 어느 것도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의 내부에 있는

남성 에너지와 여성 에너지는 합일을 이룬다, 이제 그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의 독신자이다.

힌두교에서 시바 신을 아르드하나리쉬바르, 즉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인

신으로 묘사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시바 신을 가장

완전하고 위대한 신, 마하데바라고 말한다, 왜 그들은 시바를 가장 위대한 신, 마하데바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그가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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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의식에 있어서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일 때 그 둘은 하나의 원이 되었다가 동시에 사라져버린 다, 이원성은 사라지고 그대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 하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르드하나리쉬바르,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이다, ‘하나일 때 그대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다, 그때 새로운 어린아이 시절, 2의 어린 시절이 시작된다, 그대는 드위즈, 즉 두 번 탄생한 자, 거듭난 자이다,

순진무구한 새 세계가 탄생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경전으로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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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그대들의 마음을 통과하면 존재는 여럿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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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젖을 먹는 어린아이들을 보시고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젖을 먹고 있는 이 어린아이들이야말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자와 같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저희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갑니까? 이렇게 제자들은 언제나 핵심을 놓치고 있다,

그들은 사물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예수의 말을 엉뚱하게 이해한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상징에 너무 집착하여 상징을 너무 고정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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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말하고 있는 상징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액체와 같이 유동적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주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 과 같다.

예수가 말한다. “젖을 먹고 있는 이 어린아이들이야말로 하늘 나라에 들

어가는 자와 같다.” 그러면 제자들은 즉시 자기들도 어린아이와 같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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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예수에게 묻는다,

그러면 저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갑니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다! 단순히 어린아이처럼 되어서는 소용이 없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밖으로 만들고 밖을 안으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 때,

그래서 남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는 여자가 아니게 될 때, 그때 너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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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그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한 말의 의미이다,

이모든 문장들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그대들의 마음도 하나의 프리즘처럼 작용한다, 세계는 하나이다, 존재는 순수한 백색이다,

그러나 그대들의 마음을 통과하면 그것은 여럿으로 나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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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통해서 보는 것은 무엇이든지 여럿으로 나뉘어진다.

만일 그대가 아주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개개의 정신적인

개념들 속에서 일곱 가지의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마음은 마치 프리즘처럼 분할을 한다,

일곱 가지로 분할을 한다.

우리가 일 주일을 7일로 나누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하비라는 바로 이러한 마음의 태도 때문에 그의 이론 전체를 일곱 단계로 나누었다, 그것을 논리의 일곱 가지 측면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대가 마하비라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한 다면 그는 일곱 가지의 답을 줄 것이다.

그대가 한 가지를 질문했는데 그는 즉석에서 일곱 가지의 답변을 준다,

이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일이다, 하나를 물었는데 일곱 개의 답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질문하러 왔을 때보다 더 큰 혼란에 빠져 자리를 뜨게 된다.

이 일곱 가지 대답 때문에 사람들은 마하비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정확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너희는 마음을 통해서 질문을 한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을 통해서 대답 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마음은 모든 것을 일곱 가지로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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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일곱 가지는 서로 모순이 있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오직 하나이지 일곱 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의 것을 일곱 가지 방법으로 말하려면

거기에 모순이 따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대가 마하비라에게 신이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그렇다, 신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한다. “아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와 아니다 그 둘 다이다, 신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한다. “양쪽 모두 아니 다.”이런 식으로 그는 일곱 개의 답을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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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프리즘처럼 분할을 한다, 그대가 모든 것을 마음을 통해서 볼 때

그것은 일곱이 된다, 민감하게 주시해 보면 일곱이다, 그러나 민감하지 않으 면 그것은 둘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신의 존재에 대해서 묻는다면 오직

두 개의 답변만이 가능하다, 신은 존재한다라고 말하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는 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두 가지 답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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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나머지 다섯 개를 놓치고 있다, 그의 의식은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답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일곱 개이지 두 개가 아닌 것이다, 그러

므로 둘은 많은 것의 시작이고 일곱은 많은 것의 끝이 된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예수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반면에 마하비라는 최고 수준의 학자나 논리가들에게 말하고 있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청중은 이런 차이를 가진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보통의 평범한 대중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하비라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하비라는 일곱 개에 대해서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예수는 둘 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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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마하비라는 말한다,

너희가 일곱을 하나로 만들 때, 일곱 개는 사라지고 하나가 남을 때 너희는 얻을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둘이 사라지고 하나가 남을 때 너희는 얻을 것이다.”

다른 것은 청중일 뿐이며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 둘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그대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마음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이 있다면 그 둘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무지개는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것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그대는 단지 프리즘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무지개는 사라진

,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을 제거하면 무지개는 사라진다, 마음을 통해서

보지 말라, 그러면 많은 것의 세계는 사라진다,

마음을 통해서 보면 많은 것의 세계는 늘 그대에게 존재한다.

마음을 통해서 보지 말라, 마음을 버리고 보라, 어린아이들은 마음을 가지

지 않고 세상을 본다, 마음은 발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육체가 먼저 오고 마음은 뒤에 온다,

실제로 그것은 몇 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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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나면, 첫째 날에 아이가 보는 세상은 하나이다, 아이는 어떤 구별

도 하지 못한다, 어떻게 구별이 가능하겠는가? 그는 이것은 파랗고 저것은 빨갛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붉은 색이 무엇이고 푸른 색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는 단순히 바라볼 뿐이다, 그가 보는 세계는 하나이다, 그가 보는 세계는 그렇게도 분명하게 하나이므로 그는 자신의 몸과 엄마의 몸도 구별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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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아제는 아이들의 정신 발달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

의 일생을 이 연구에 바쳤고 그것에 대한 많은 진실을 밝혀 놓았다, 즉 어린

아기는 자기의 몸과 사물을 분간하지 못한다

아기가 자기 발가락을 입에 넣고 빨아먹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에게는 구별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은 자신의 발가락이고 따라서 그것을 빠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구별 능력이 없다,

그는 어느 사물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발가락을 대할 뿐이다.

거기에 분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기는 똥을 싸고는 그것을 먹는다, 아기에게는 좋고 나쁨이 없다, 우리들이라면 더럽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전혀 구별이 없다, 그러니 어린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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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때문에 인도에서는 수세기에 걸쳐서 어린아이를 모방하려고 하는 사

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배설을 한 바로 그 자리에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들을 파라마한사, 즉 통달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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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저 아이들을 흉내내어 구별을 하지 않는 척한다, 그러니 그들은

구별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짓을 힐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은 구별을 한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구별하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슈나

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이 파라마한사들은 구별하지 않도

록 자기 자신을 강요한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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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대가 구별을 하든지, 구별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강요하든지

간에 여전히 마음은 작용하고 있다, 구별이 있고 그대는 그 구별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아이처럼 행동하지만 순진무구하지는 않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

면 그는 눈을 뜨고 본다, 그러나 생각은 하지 못한다,

먼저 이 있고 생각 하는 능력은 나중에 생긴다,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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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아이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까지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아이가 다른 아이의 손에서 장난감을 뺏는다, 그러면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좋지 않은 짓이다, 그 장난감은 네 것이

아니다!” 그대는 소유에 대해서 구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개인의 소유를 믿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러

나 아이에게 있어서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난감은 그저 장난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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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이 왜 자기의 것이 아닌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내 손을 뻗어서 잡을

수 있는 것은 나의 것이다.” ‘내 것네 것이라는 개념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아이는 꿈과 현실 사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아침에

깨어나면 혼자 울 때가 많다, 꿈속에서 가지고 놀았던 예쁜 장난감이 안 보

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장난감이 자기에게 즉시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는

꿈과 현실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그는 어떤 구별도 하지 못한다,

아이가 순진무구한 것은 그가 아직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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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종교는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면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


현자의 순진무구함은 그가 구별을 떨쳐버릴 때 생겨난다, 그가 푸른 색이

나 빨간 색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것은 빵이고 저것은

돌이라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는 마음을 버린 것이 다. 이제 그는 생각을 통해 살지 않고 을 통해서 산다, 이것이 바로 힌두교에서 자기들의 철학을 다르샤나(darshana)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다르샤나는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철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철학이란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철학 과 다르샤나는 서로 반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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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샤나는 본다(look)라는 뜻이고 철학은 생각한다(think)라는 뜻이다,

그들은 상반된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합쳐질 수가 없다, 다르샤나는 어린

이처럼 구별을 버리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밖으로 만들고 밖을 안으로 만들 때......” 역시 구별이 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밖을 떠나 안으로 들어가라, 밖을

버리고 내면으로 움직여라, 그러나 그대들은 모든 것을 오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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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외부를 버리게 되면 내면까지도 자동적으로 떨어져나가기 때문이다.

바깥이라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내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상대적

인 용어이다, 내면은 오로지 바깥의 반대로서 존재한다, 외부가 없으면 내부 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먼저 바깥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면 내면은 저절로 떨어져나간다,

거기에 이나 은 없다, 그대는 하나가 된 것이다, 그대에게 아직도 안과 밖이 존재한다면 그대는 여전히 둘이다, ‘하나가 아니다, 그대는 여전히 분리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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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들이 다음과 같은 아주 이상한 말을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계가 바로 신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일상적인 삶이 곧 종교라고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 좋다고 말한다, 변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변화라는 개념 자체가 둘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존재해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그 무엇으로 바뀌는 것이다, AB로 변해야만 하고, 그러면 둘이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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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들은 이 세상 자체가 신이라고 말한다, 신은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것

이 아니다, ‘어딘가에 따로라는 말 자체가 이원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신은 창조주가 아니며 그대는 창조물이 아니다, 그대 자신이 바로 신이다, 신은 창조주가 아니다, 이 피조물 자체가 신이다, 이 창조성 자체가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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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언제나 구별을 하려고 한다, 이것이 마음의 특성이다, 구별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 영리한 머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마음은 언제나

비주의자들은 약간 바보스럽다,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 것이 그들이 종교를 신비주의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들은 이 신비주의란 말을 좋은 의미에서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신비주의는 무언가 애매하고 안개와 같은 것, 뜬구름 같고 명확하지 않은 실체, 마치 꿈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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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가들에게 이들 신비주의자들은 바보처럼 보인다, 신비주의자들은 구별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별이라는 것이 그대들이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이다,

그대들은 무엇이 무엇인지를 구별해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논리상, 더 많이 구별할수록 실체에 더 가까이 접근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리 때문에 과학은 - 과학은 논리에 따른다, 과학은 논리를 응용하며

논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 원자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들은 구별에 구별을 거듭하고 모든 것을 분리시켜서 원자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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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분리하는 것이 아니고 합일시킴으로써, 경계선을 긋지 않고 경계

선을 없앰으로써, 궁극의 것, ‘하나에 도달했다, 과학은 원자에 도달했다,

그것은 많은 것’, 끝없이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종교는 하나’, 영원한 하나에 도달했다, 그 접근 방법은 이렇다, 과학은 머리를 사용한다, 그리고 머리는 경계를 만든다, 명확히 구분을 하는 것

이다, 그러나 종교는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면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일체가 된다, 모두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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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이 하늘과 만나고 하늘이 나무에게 내려온다, 땅이 하늘과 만나고 하늘은 땅에 닿는다. 그대가 삶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이들 신비가들이 옳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모든 경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실체 속에는 경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는 유용하고 실용적인 것이지만 진실은 아니다,

그것은 어느 특 정한 경우에는 도움이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장애가 된다.

구별이라는 것을 찾아보라, 예를 들어 지난 주에 그대는 불행했었다고

하자, 그대는 불행해지기 시작한 순간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가리킬 수 있겠

는가? 그 시점을 명확히 그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날 아침 정확히 아홉시 반에 불행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대는 정확한 선을 그을 수 없다, 그 시점을 정확히 찾자고 들면

갑자기 모든 것이 애매해질 것이다, 그대는 언제 불행해졌는지 말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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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그대는 다시 행복해진다, 다시 행복해졌을 때 잘 관찰해 보라,

과거에는 이것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놓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대는 불행하며 때때로 행복해진다, 마음은 한 가지 상태에만

동일하게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설령 그대가 불행한 상태로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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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잘 관찰해 보라, 정확하게 어느 순간에 그대가 다시 행복해지는가를, 그대는 다시 행복해지지만 다시 그 정확한 시점을 놓쳐버린다, 순간은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행복과 불행은 두 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래서 그대는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든다, 그것들은 서로 뒤섞이어 경계는 소멸된다, 거기

에 실제로 경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파도와 같으며 언덕과 골짜기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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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는 언덕과 이어지며 파도가 온 뒤에는 물결의 이랑이 뒤따른다,

언덕은 어디에서 시작하며 골짜기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아무 데도 없다,

그들은 하나이다. 그대들의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골짜기이고 저것은 언덕이다.”

언덕이 골짜기 없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골짜기가 언덕 없이 존재할 수 있 겠는가?

행복이 불행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만일 그대가 그렇게 하고자 시도한다면 그대는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것 이다, 그대가 행복해 본 경험없이 불행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행복과 불행은 더욱 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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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병은 육체적인 것이다, 잘 관찰해 보라, 정확히 언제 그대의 병이 시작 되었는가? 어디에 그 선을 그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정확히 언제 그대는 건강 해졌는가?

아무도 그 정확한 경계를 긋지 못한다.

병은 건강으로 바뀌고 건강은 다시 병으로 바뀐다, 사랑은 미움으로 변하고 미움은 다시 사랑으로 바뀐다, 분노가 자비로 변하고 자비는 분노로 변한다,

이런 현상들을 인정하기에는 불편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은 옳다.

그대는 어린아이였다, 언제 그대는 청년이 되었는가? 젊음이 언제 그대에

게 들어왔는가? 그대는 지금 젊지만 언젠가 노인이 될 것이다, 잘 보아라,

그리고 달력에다 이날, 나는 노인이 되었다라고 표시를 해보라, 그대 자신이 언제 늙었는지를 그대가 알지 못한다면 살아 있을 때와 죽음이 찾아오는 때를 그대가 어찌 구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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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마저 사람이 죽는 시점을 어느 때로 잡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것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단지 실용적인 것뿐 이지 진실은 아니다.

언제 사람이 사망했다고 선고할 수 있을까? 호흡이 끊어졌을 때? 그러나

어느 요가 수행자들은 과학 실험실에서 10분 동안 호흡을 완전히 멈춘 실험

을 해보인 일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호흡이 끊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사망의 기준이 되지는 못한다.

10분 동안이나 호흡을 하지 않고서도 살아 있을 수 있음을 실제로 보여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요가 수행자였던 그 사람은 어쩌면 다시 삶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사망했다고 선고할 권리는 그대들에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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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선고해야만 한다,

죽은 자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실제로 죽은 시점은 언제이겠는가? 심장이 멈추었을 때? 또는 뇌가

그 기능을 정지했을 때? 오늘날의 과학 실험실에서는 육체 없는 뇌가 실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 뇌는 기능을 한다,

그 뇌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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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뇌는 자기에게 육체가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체 없는 뇌를 관찰해 온 과학자들은 그 뇌가 사람의 뇌와 똑같은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뇌는 잠을 자기도 하고 깨어 있기도 한다, 그 뇌는 꿈을 꾸고 있는 징후를 보이기도 하고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징후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하고 있다는 징후를 보이거나, 때로는 화가 나서 흥분되어 있거

나 긴장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 상태에 있기도 한 다, 그 뇌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 뇌는 자기에게 신체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뇌의 정신까지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뇌는 기능을 잘 하고 있다,

도대체 신체의 어느 부분이 죽음을 선고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어느 순간이 죽음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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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중에 러시아에서는,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선고받았던 사람들이 의학 실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사망 선고를

받은 후 피를 펌프로 공급받아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들 중 여섯 사람은 아

직 생존해 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들은 삶을 다시 선고받 은 것이다!

삶이 끝나고 죽음이 시작되는 하나의 경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니다, 그렇지 않다! 삶과 죽음은 단지 하나의 파도 현상이다, 마치 하나의

파도 뒤에 이랑이 따르는 것처럼 삶 뒤에는 죽음이 따른다, 삶과 죽음은 분 리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이다, 하나의 리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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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지금의 상태로서는 그대들은 긴장 속에 머무를 것이며 비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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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자들은 그대들이 실용적인 목적을 위하여 구별을 하는 것은 좋으

나 실체는 구별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구별할 수 없는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구별하는 메커니즘인 그대의 마음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명상

이다,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라, 마음 없이 바라보라, 마음을 비우고 깨어있으라,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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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각각들이 그대와 우주 사이에 하나의 스크린처럼 끼어들지 않도록 하라,

구름이, 즉 생각들이 사라질 때에 태양은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로

빛을 발하고, 세계는 하나로 존재한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밖으로 만들고

밖을 안으로 만들 때, 위를 아래로 만들 때,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 때,

그래서 남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는 여자가 아니게 될 때,

그때 너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가장 크고 깊은 구별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구별이다,

그대는 자기가 만났던 사람이 남자였는지 아니면 여자였는지를 잊어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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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그 사람의 이름을 잊을 수는 있다, 그 사람의 종교도 잊을 수 있다,

그리고 만났던 사람의 얼굴 모습도 전혀 생각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것을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곧 그대의 기억 속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남자 와 여자의 구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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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에 만난 사람을 한번 떠올려보자, 그대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고 얼굴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는 기억하고 있다.

그 구별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성별의 구분이 그대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상대방에게서 가장 먼저 찾는 것은

그 사람이 남자인가 여자인가 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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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대가 최초에 보는 것이며 또 최후까지 남는 것이다.

그대는 그다지 의식적으로 그것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대의 머릿속 깊이 새겨지는 것은 그 사람이 남자인가 또는 여자인

가 하는 점이다, 만일 그 사람이 여자라면 그대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며

그 사람이 남자라면 또 다른 방식으로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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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여자라면 그대가 의식하든 안 하든 간에 그대의 내면에 있는 남성이 매혹당한다, 그대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대의 행동은 더 부드러워진다.

오늘날 상점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서

서히 점원들을 여자로 바꾸고 있다, 손님이 남자라면 여자 점원을 두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왜냐하면 손님은 그녀에게 남자 점원에게 말하듯이

간단하게 사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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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자가 그대의 발에 구두를 신겨주고 그 여자의 손이 그대의 발에

닿는다, 그때 그 구두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아마 구두는 발에 꼭 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그 구두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대는

그 구두를 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대는 구두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여자를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광고에서, - 합당하든 합당하지 않든, 관계가 되든 말

, 조화가 되건 말건 간에 - 팔아야 하는 상품 옆에 몸을 노출 시킨 여자의

모습을 놓는 이유이다, 그 광고에 있는 차가 팔리는 것이 아니다, 차 속에 있

는 여자가 팔리는 것이다, 섹스가 매매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모두 표면적 인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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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깊은 곳에서 그대들은 섹스를 찾고 있다, 모든 곳에서 그대들은 섹스

를 찾고 있다, 예수는 그대들이 이렇게 섹스를 찾아다니는 한 순수해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대는 분리되어 있다, 그대가 남자라면 여자를 찾는다,

그 대가 여자라면 남자를 찾는다.

그러한 찾는 행위는 계속해서 외부와 관련을 갖는다, 그것은 내면에 대한

탐구가 되지 못한다, 그대는 내면을 향해 움직일 수가 없고 명상적일 수가

없다, 여성이 그대를 혼란시키며 그대를 따라다닌다, 만일 그대가 그것에 저

항하고 싸우며 눈을 감아버린다면 그녀는 점점 더 아름다워진다,

그녀는 계속 해서 그대를 유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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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이러한 이원성을 초월할 수 있겠는가?

은 방법들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다,

사람들은 말한다. “모든 여자들을 너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라.”

그러나 그렇게 해보았자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것은 일종의 속임수이다,

모든 여성을 너의 누이라고 생각하라.” 그래도 별 차이가 없다, 그녀는 여전히 한 여성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녀를 누이로 생각하든 어머니로 생각하든 거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녀는 여전히 여자이고 그대는 남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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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추구는 계속되며 그것은 너무나 생리적인 것이어서 그대의 의식 아래에서도 끝없이 이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숨어 있는 흐름이 되고 만다. 한번 주의 깊게 보라,

그대가 방 안에 앉아 있는데 한 여자가 들어온다, 그대 자신을 지켜보라,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보라, 갑자기 그대는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녀가 아름다운 여자라면 그대는 더욱 변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 즉시 그대는 더 이상 그대 자신이 아니다, 단지 남성이 존재한다,

성 호르몬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그대를 옆으로 젖혀놓는다,

그대는 의식을 잃어버리고 거의 무의식 상태가 된다, 그대는 마치 술 취한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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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아직까지 섹스보다 강한 알코올을, 섹스보다 강한 마약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은 일순간에 모든 것을 변화시켜버린다,

그대가 만일 LSD에 취하면 사물들은 화려한 색채를 발하게 된다,

섹스는 인간에게 이미 내재 해 있는 LSD이다.

그대가 성욕을 느낄 때 사물들은 화려한 색깔을 발한다, 모든 것이 다른 모습을 갖고 다른 빛을 발한다,

그대는 더욱 생기가 넘친다, 그대는 걷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며, 그대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한다,

그대의 삶은 춤이 된다, 그대는 다른 차원에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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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가 사라지면 그대는 즉시 단조로운 세계로 돌아온다, 물질들의 세계,

거기에는 색깔도 없고 빛도 없다, 그대는 노래하지 않는다, 달려가지도 않는 다, 모든 것이 단조롭게 변한다.

그러나 여성이나 남성이 다시 그대의 삶 속으로 들어오면, 모든 것이 색깔을 갖는다,

모든 것이 낭만적으로 되고 시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무슨 일이 일어 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면 그대는 이원성 안에, 가장 깊은 이원성

안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원성은 그대로 하여금 실체를 보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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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는 지고한 축복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행복이나 불행이 아니다.

실체는 행복이나 불행을 넘어서 존재한다, 그것은 긴장해 있거나 이완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둠이나 빛도 아니다, 초월해 있다, 그대의 모든 이원성이 소멸할 때

그대는 지고의 축복 속에 있게 된다, 힌두교에서는 이것을 아난다(ananda)라고 불렀다,

그것은 둘을 초월하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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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현자는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이란

그 뒤에 불행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현자에 대해서 불행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현자는 지고한 축복 속에 있다, 그는 이원성을 초월했다, 이제 거기에 언덕이나 골짜기는 없다,

그는 대지를 걷는다, 그는 하나의 차원에서 움직인다,

거기에 위도 아래도 없다, ‘아래는 하나의 이원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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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는 말한다,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상승도 없고 하강도

없을 때, 그리고 둘이 아닐 때, 그때 너희는 선택하지 않는다, 너희는 단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는 하나의 차원에 있다, 거기에 파도는 없다, 바다는 침묵한다,

파도치지 않는다, 한 점의 물결도 없다, 위로 향하는 것도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바다는 마치 거울과도 같다, 이제 모든 흔들림은 멈추었다.

모든 흔들림은 이원성을 통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성은 모든 이원성의 기초이다,

그대는 다른 모든 것들은 쉽게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떠나야 할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섹스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섹스는 그대의 세포 하나하나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성적인 존재이다, 그대는 성적인 존재로서 태어났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소용이 없다.”

그러나 지금의 상태로서는, 그대들은 긴장 속에 머무를 것이며 비참함 속에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 때, 그래서 남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는 여자가 아니게 될 때,

그때 너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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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대의 내면에 하나의 원을 만들어야 한다,

예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밀들은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밀들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줄 수 있다, 예수는 그런 비밀들을 틀림

없이 제자들에게 전수했을 것이다, 단지 하나가 되라!”는 말만으로는 아무도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남자는 여자가 되어야 하고 여자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만으로는

그 누구도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목표이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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