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인식의 좁은 길 본문
인식의 좁은 길
어떤 사람도 본서에서 언급된 영학적 인식내용을 스스로 얻을 수 있다. 이 저서 속에 시도된 논술 방식은 고차원 세계의 사상 상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견령 능력을 얻는 첫걸음은 이러한 사상 상을 파악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고하는 존재이며, 사고에서 출발할 때만 자신이 걸어가는 인식의 좁은 길을 스스로 발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고차적 세계의 사상 상에 접한 그의 오성에게 그것이 비록 영적 사실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고, 확인될 수 없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것은 무익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성에 부여된 사고 내용은 그의 사상세계 속에 작용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이 힘은 그의 내면에 작용하여 잠들어 있는 소절을 눈뜨게 한다. 그러므로 그런 사상 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자체를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 사고 내용 속에서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것밖에 보지 않는다. 그러나 사상의 근저에는 살아있는 힘이 존재하고 있다. 영시된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사고내용이 전하는 것은 그 내용을 전해 듣는 사람의 인식력을 꼬 피우는 싹이 될 것이다. 고차적 인식을 위한 사고작업을 경멸하고, 사고 이외의 힘에 의지하는 사람은 사고야말로 감각 세계의 능력 가운데서 최고의 힘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떻게 하면 역학의 고차적 인식 내용을 획득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우선 다른 사람의 인식에서 배우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이 본 것을 알고 싶지 않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인식으 첫 걸음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믿고 안 믿고가 문제가 아니다. 편견 없는 태도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 진정한 영학자는 결코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늘, 나는 영적 존재 영역에서 이러저러한 것을 체험했다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체험한 내용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체험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이야기한 내용을 그 사람의 사고내용 속에 침투시킨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영적 발전을 위한 살아 움직이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혼계와 영계에 대한 일체의 지식이 우리의 혼에 내재해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지식을 "인식의 좁은 길"을 통해서 알아 낼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혼의 깊이에서 이끌어 낸 것뿐만이 아니라, 타인이 그 혼의 깊이에서 이끌어 낸 것 또한 볼 수 있다. 인식의 좁은 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해도, 이런 관찰은 가능하다. 올바른 영적 관찰은 편견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 마음 속에 이해하는 힘을 눈뜨게 해줄 것이다. 내면의 무의식적 지식이 타인이 발견한 영적 사실에 반응한다. 그리고 이 반응은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의 정상적인 작용이다. 스스로 영계를 인식하는 데는 수상쩍은 신비적 "침잠" 보다 건전한 상식이 훨씬 더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 때로 우리는 건전한 상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영적 연구 성과보다도 신비적 "침잠"으로 얻은 성과를 보다 뛰어난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고차적 인식 능력을 획득하려 할 때, 신중하게 사고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늘날 "견자"가 되기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중하고 금욕적인 사고작업을 경시하고 있기에 이런 점을 더욱 더 강조해 두고 싶다. "사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감각", "감정"이라고.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겠다. 어던 사람도 사고생활에 정진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견자"가 될 수 없다고. 어떤 종류의 내적 나태가 부당하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덕성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들이 이런 안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추상적 사고", "쓸데없는 사변" 등의 경명적인 언어를 몸에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를 무의미하고 추상적인 사변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사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런 의미의 "추상적 사고"는 초감각적 인식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고는 초감각적 인식의 토대를 만들어 준다. 물론 사고작업을 하지 않고 고차적 견령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훨씬 편리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견령 능력에 필요한 내적 확실성과 부동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은 오로지 사고뿐이다.
사고 작용이 없으면, 제멋대로 일어나는 혼란스런 이미지와 혼의 움직임에 농락 당하고 만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즐거운 일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과 진정한 의미의 고차적 세계 입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고차적 세계에 입문할 때만 순수한 영계를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 문제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견자"는 그 혼 생활이 절대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진정한 사고 이상으로 이 건강을 관리해주는 것은 없다. 실제로 고차적 영 능력 개발을 위한 수행이 사고를 토대로 하지 않는다면 건강상 중대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다. 견령 능력은 건전하고 올바르게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을 생활에서도 건전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사고하는 수고로움을 피하면서 영 능력을 개발하려는 것은 인생에 대한 잘못된 태도나 몽상, 또는 공상에서 유래한다. 이 점을 염두해 두고 고차적 인식을 위해 노력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단 이러한 전제를 두어야 한다. 이 전제는 인간의 혼과 영에만 적용된다. 어떤 육체적인 건강을 해치는 작용은 이 전제 하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근거도 없이 불신하는 것은 해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반발력을 작용시켜 생산적 사고내용을 받아들이려는 행위가 방해받기 때문이다. 맹목적 신앙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영학적 사고 세계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오로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만이 고차적 감각을 열어주는 전제가 된다. 영학 연구자는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사고내용으로 삼아라. 그것만으로도 나의 사고내용은 그대의 내부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므로, 이제 그대는 그 진실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영학 연구자의 입장이다. 그는 시사를 던진다. 그 시사를 진실이라 인정할 수 있는 힘은 받아들이는 자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영학적 견해는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편견을 버리고 자신의 사고를 이러한 견해에 몰입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스스로 영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런 경지로 그를 착실하게 이끌어 줄 것이다.
바로 여기에 고차적 현실을 스스로 영시하려는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할 가장 소중한 미덕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생활이나 세계가 보여주는 것에 대해 편견 없이 귀의하는 태도이다.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경험에서 얻은 판단의 기준만으로 현실을 상대하는 사람은 그 판단 때문에 현실이 그에게 던지는 은밀한 작용에 문을 닫아버린다. 배우는 자는 어떤 순간에도 이질적인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완전히 청 빈 그릇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판단이나 비판을 모두 잠재우는 순간만이 인식의 순간이다. 어떤 사람과 만났으르 때, 그 사람보다 내가 더 현명한가 아닌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예의 모르는 어린아이라도 위대한 현자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자가 아무리 그의 현명함으로 어린아이를 비판한다 하더라도, 그 비판으로 인하여 그 현명함은 흐려져 어린아이가 그에게 열어 줄 진실을 가려 버린다.(오로지 귀의하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신의 판단을 버리거나 맹목적 신앙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다. 어린아이에 대해 그런 귀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과는 다른 세계가 보여주는 것에 내적으로 귀의해야 한다. 자신이 이러한 귀의를 어디까지 실천할 수 있는지 시도해 본다면 틀림없이 놀라운 발견을 할 것이다. 인식의 좁은 길을 걸으려 하는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편견을 지워버릴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버렸을 때만, 다른 것이 그의 내부로 흘러들어 온다. 자신을 무로 하고 대상에 귀의하는 순간, 모든 방향에서 인간을 감싸고 있는 고차적 영적 현실이 흘러 들어온다. 우리는 혼자 힘으로 의식적으로 이런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가령 주위 사람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는 시도를 해 보자. 좋다거나 싫다거나, 어리석다거나 현명하다거나 하는 일상적인 판단의 기준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런 척도 없이 인간을 순수하게 그 인간 그 자체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최상의 수행은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해 보는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혐오감을 억제하고,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또는 어떤 판단을 내리고 싶은 상황에 처했을 때, 판단을 보류하고 주어지는 인상에 마음을 내맡겨 본다.(이러한 편견 없는 귀의는 "맹목적 신앙"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맹목적으로 뭔가를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생생한 인상을 가지며, "맹목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사물이나 사건이 나에게 말을 걸게 해야 한다. 이런 자세를 자신의 사고체계에까지 넓혀야 한다. 자신 속에 어떤 사고내용을 만들어내려는 움직임을 억제하고, 오로지 외부의 사상이 사고내용을 만들어낼 때까지 조용하 기다린다.
열의를 가지고 엄숙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이런 태도를 유지할 때 비로소 고차적 인식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이런 수행을 경시할 것이다. 이런 수행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귀의와 편견 없는 태도가 진정한 힘의 원천임을 알고 있다. 증기 솥의 열기가 기관차를 움직이는 힘으로 변하듯이, 몰아적 영적 귀의의 수행은 영계를 인식하는 힘으로 바뀐다.
이 수행을 통하여 주위의 모든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용 능력에 올바른 평가 능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사람은 고차적 인식의 통로를 스스로 닫는 꼴이 되고 만다. 세상의 사물이나 일에 대해, 그것들이 주는 쾌락과 고통의 관점에서만 평가하는 자도 그런 과대평가의 태도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쾌락, 자신의 고뇌로서 그가 체험하는 것은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관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호의는 그와 나의 관계를 느끼게 할 따름이다. 만일 내가 판단하고 태도를 결정할 때, 오로지 쾌감과 공감에만 따른다면, 나는 자신의 성격을 전면으로 드러내는 셈이 된다. 나는 세상에 대해 나의 성격을 강요하고 있다.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 세상에 간섭하려 하고 있다. 세상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고, 또한 그 속에 활동하는 다양한 힘을 충분히 살려내려 하고 있지도 않다. 바꾸어 말해, 나는 자신의 성격에 잘 맞는 것에만 관용을 베풀고 있다. 그 외의 모든 것에 대해 나는 반발하려 하고 있다. 감각세계 속에 사로잡힌 사람은 특히 모든 비감각적 영향에 반발한다. 배우려는 사람은 사물이나 인간의 어떤 사소한 가치나 의미도 긍정할 수 있는 성격을 길러야 한다. 공감과 반감, 쾌감과 불쾌감은 전혀 새로운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런 감정들을 억제함으로써 자신을 감동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라는 말은 아니다. 정반대이다. 금방 공감, 반감으로 판단을 끌어내지 않는 능력을 기르면 기를수록, 우리는 점점 더 풍성한 감수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자신의 성격을 제어할 수 있을 때, 공감과 반감이 보다 차원 높게 작용하게 됨을 알 것이다. 처음에는 무척 불쾌하게 느껴지던 일에도 숨겨진 미덕이 있는 법이다. 이기적인 감정에 따르는 태도를 버릴 때, 그런 숨겨진 미덕이 나타난다. 스스로를 이런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관으로 감수성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성향은 주위 사물을 밝은 빛 아래 드러낼 수 없다. 자신의 성향에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것은 환경 속에 매몰됨을 뜻하며, 주변 사물과 솔직한 만남을 통해 그 가치를 절실히 느끼려 하지 않음을 뜻한다.
아무리 좋거나 괴로워도, 어떤 공감과 반감이 생겨도, 자기중심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때, 늘 변하는 외계의 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어떤 사물에서 느끼는 쾌감은 그를 그 사물에 의존하게 한다. 그는 그 사물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인상의 변화에 따라 그때마다 쾌감과 고통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영적 인식의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없다. 평정한 마음으로 쾌감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쾌감과 고통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 대신에 쾌감과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쾌감에 몰두하는 순간, 그 쾌감은 나의 존재를 소모시킨다. 중요한 것은 쾌감을 나에게 부여한 사물을 이해하는 일이며, 쾌감은 그것을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 사물이 나에게 쾌감을 부여하는 것이 소중한 일이 아니다. 내가 쾌감을 체험할 때, 그 쾌감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쾌감이란 그 사물 속에 쾌감을 느끼기에 적합한 어떤 성질이 있음을 표현하는 것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 이 성질을 인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일 쾌감에 머물면서 쾌감에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면, 나는 그냥 생활을 즐기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쾌감이 사물의 특성을 체험하기 위한 단순한 기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이 체험을 통하여 나의 내부는 보다 풍성해진다. 쾌감과 불쾌감, 기쁨과 고통은 길을 찾는 자에게 그것을 통하여 그가 사물에 대해 배우는 기회여야 한다. 길을 찾는 자는 그것을 통하여 쾌감과 고통에 대해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쾌감과 고통이 자신에게 사물의 본성을 밝혀주도록 쾌감과 고통에서 자기를 초월시켜야 한다. 이 방향으로 자기를 발전시키면, 쾌감과 고통이 얼마나 우리에게 좋은 선생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모든 존재와 함께 느낄 수 있게 되고, 그 존재의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길을 찾는 자는 "아,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정말 기분 좋아"라는 말을 할 대도, 이 고통, 이 기쁨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늘 생각해야 한다. 그는 외계에서 느끼는 기쁨과 고통을 자신에게 작용시키려 노력한다. 그렇게 할 때 사물과 자신 사이에 전혀 새로운 관계가 생겨날 것이다. 이전의 그는 특정한 인상을 받아들이면서 그 인상이 그를 기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쾌감과 불쾌감을 인식 기관으로 삼는다. 그리고 지금, 이 기관을 통하여 어떤 사물이 그 본성을 말하기 시작한다. 쾌감과 고통은 그의 내적 감정에서 외계를 지각하는 감각기관으로 변화한다. 눈이 무엇인가를 본다. 그리고 손이 행동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적 구도자의 쾌감과 불쾌감은 인식수단이 되어 아무 행동도 일으키지 않는다. 오로지 인상을 받아들이는 수단이다. 그리고 이 쾌감과 불쾌감을 이러한 통과기관으로 삼는 수행을 하면, 혼계는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열어 보이는 혼계 본래의 기관을 그 수행자의 혼 속에 형성시켜 줄 것이다. 눈은 감각적 인상의 통과기관이기에 육체적 삶에 유효하다. 쾌감과 불쾌감도 자신의 좁은 세계에 머물지 않고 외계의 혼을 열어 보여주는 인식기관일 때, 혼의 눈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인식의 길을 걷는 자가 자신의 성격에서 유래하는 걸림돌을 치우고 지금가지 말한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주변 사물들과 현상들의 본질이 자신에게 작용을 가해 올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영적 환경 속에 집어넣을 때도 올바른 방식으로 이렇게 행해야 한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이기에 이미 영계의 시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영계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인식의 길을 걸으며 진리의 영원한 법칙, 영계의 법칙에 맞는 방향으로 사고해야 한다. 영계는 그렇게 해야만 영적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마음대로 영계의 작용을 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갈구하는 대로 사고하고 그 사고를 통해 얻은 내용만을 믿으려 하는 사람은 진리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고내용은 육체적 존재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내용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뇌에 제약된 정신활동밖에 모르는 사람의 사고세계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 두뇌 속에서 어떤 사고내용이 일어나면 금방 조각나고 흩어져 다른 사고내용으로 바뀌어 버린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또는 자기 자신을 솔직히 관찰해보면, 도깨비불처럼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사고내용에 대해 하나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혼란스런 사고내용을 만들언내다 해도 감각생활의 과제에 따라 살아가면 현실이 거듭해서 그 잘못을 수정해 준다. 내가 아무리 혼란스런 사고를 해도, 일상생활은 나에게 현실법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어떤 도시에 대해 내가 가진 관념은 무질서하고 단편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도시에 간 이상 그곳의 현실에 나를 맞춰야 한다. 기술자가 아무리 혼란스런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해도, 일터에서 자신이 다루는 기계의 법칙에 따라 올바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감각세계의 내부에서 현실들이 사고의 오류를 끊임없이 정정해 나간다. 만일 내가 어떤 물질적 현상이나 식물 형태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현실이 나를 올바른 사고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러나 고차적 존재영역과 나와의 관계는 전혀 사정은 다르다. 고차의 영역은 내가 엄밀하게 규칙을 세운 사고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는 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고가 정확하게 나를 안내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올바른 길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계의 법칙들은 물질적 감정적 성질에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법칙처럼 나에게 강제적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영계의 법칙이 나 자신의 법칙과 일치할 때, 비로소 나는 영계의 법칙에 따를 수 있다. 고차의 영역에서는 나 자신이 정확한 지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식하는 자는 사고에 엄밀한 규칙을 주어야 한다. 그의 사고내용은 일상적인 삶과 보조를 맞추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는 이런 점에서 자신을 잘 관찰하고 자신을 잘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고내용이 제멋대로 다른 사고내용과 결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로지 사고 세계의 엄밀한 내용에 적절한 방식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어떤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넘어 갈 때도 엄밀한 사고법칙에 따라야 한다. 인간은 사상가로서 늘 이러한 사고법칙의 모상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법칙에 유래하지 않는 모든 것은 관념의 흐름에서 배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무리 바람직한 사고내용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고의 규칙적 진행을 방해한다면 회피해야 한다. 어떤 개인적 감정이 사고내용에 어떤 다른 방향을 취하도록 강요한다면, 그것 또한 억제해야 한다.
플라톤은 배우러 오는 학생들에게 먼저 수학을 가르쳤다. 현상계의 일상적인 흐름에 따르지 않는 수학의 엄밀한 법칙은 인식을 지향하는 자에게는 더 없이 좋은 훈련이 된다. 수학을 잘 하려면 개인적인 취향을 모두 버려야 한다. 인식을 갈구하는 자신의 과제에 응하고 싶다면, 제멋대로 일어나는 모든 사고를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고 사고 내용의 요구에 순수하게 따라야 한다. 이렇게 영적 인식에 필요한 사고에 맞춰 가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고생활 그 자체는 수학적 판단이나 추론처럼 엄밀한 법칙에 따라야 한다. 어디를 어떻게 걸어가든, 그런 엄밀한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영계의 합법칙성이 그의 내면으로 흘러들어 올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사고가 일상의 혼란스런 성격을 띠게 되면, 이 합벅칙성은 소리도 없이 그의 곁을 지나쳐 버릴 것이다. 질서잡힌 사고는 확실한 출발점에서 저 깊은 곳의 진리까지 이끌어 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사를 일면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수학은 사고 훈련에 무척 유효하지만, 수학을 배우지 않아도 건전하고 살아있는 순수사고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인식을 갈구하는 자는 사고를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행위를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즉, 자신의 개인적인 차원에 속한 걸림돌을 걷어치우고, 뛰어난 미와 불변의 진리 법칙에 따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와 진리의 법칙에 따라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옳다고 인식한 것을 실행했다면, 설령 그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번 내디딘 발검음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또한 그것이 미와 진리의 법칙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면,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 해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는 개인적인 감정에 만족을 주느냐 않느냐, 확실한 성공을 약속하는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행위가 결정된다. 그것으로 우리는 삶의 방식을 이 세상의 진행과 일치시킨다. 그래서 영계의 법칙이 가르쳐 주는 진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행하려 한다. 영계의 법칙을 따를 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 으미에서 활동할 수 있다. 단순한 개인적 성격에서 이루어진 일로는 영적 인식의 기초를 다질 수 없다. 인식을 갈구하는 자는 무엇이 내게 좋은 성과를 주는지,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를 물어야겠지만, 나는 무엇을 선한 것으로 인식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나 개인을 위한 행위의 성과를 묻지 않을 것, 모든 자의성을 버릴 것, 이것이 자신에게 부여할 제1의 계율이다. 이 계율에 따른다면 그는 이미 영계의 길을 걷고 있다. 그때, 그는 영계의 법칙에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는 삼각세계의 모든 강제로부터 자유롭다. 다시 말해, 그의 영 인간이 감각의 껍질을 벗어 던진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영적인 것을 향하여 전진을 계속하며, 자기 자신을 영화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뜻을 세우고 진리의 계율을 지키는 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진리를 찾다가는 오히려 방황만 하게 된다 라고.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력 그 자체이며,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방황하면서도 진리를 갈구하는 한,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방황 속에 있을 때도 이 힘이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준다. 올바른 길만 걸으란 법이 어디 있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비난 자체에 이미 불신감이 배어 있다. 그것은 진실의 힘을 신뢰하지 않음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기적 관점에서 목표를 정하는 태도를 버리고, 몰아적 태도로 영으로 하여금 방향을 정하게 하는 일이다. 진실된 것이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가는 이기적 인간의 의지가 하는 일이 아니다. 이 진실된 것 자신이 인간 속에서 지도적 위치를 점하고, 그에게 침투하여, 그 인간을 영계의 영원한 법칙의 모상이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 영원한 법칙을 생활 속에 흘려 넣기 위하여 자신을 그 법칙과 하나로 해야 한다.
인식을 갈구하는 자는 자신의 사고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도 엄중히 감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오만에 빠지지 않고 겸허한 자세로 진과 미의 세계를 위한 사자가 될 수 있다. 그것으로 그는 영계에 입문할 것이며, 그것으로 더 높이 오를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 생활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여 획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을 갈구하는 자가 이상의 법칙들을 지킬 때, 영계와 관계하는 그의 혼 체험은 전혀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는 이미 혼 체험에만 머물지 않는다. 혼 체험은 이미 자신의 생활에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차 세계의 지각내용으로 바뀐다. 그의 혼 속의 감정, 쾌감과 불쾌감, 기쁨과 고통이 인식 기관으로 성장한다. 마치 그의 눈과 귀가 그 자신을 위한 생명활동을 하면서 자신을 무로 돌리고 외부의 인상을 자기 속으로 통과시키듯이, 그리고 인식을 추구하는 자는 그것으로 인하여 평정과 확신이라는 영계 입문에 필요한 혼의 태도를 획득한다. 아무리 큰 기쁨도 그의 정신을 빼앗지 못하고, 그가 여태 간과하고 있던 세계의 특성들을 그에게 전해 준다. 어떤 큰 기쁨도 그의 마음을 흐트려 놓을 수 없다. 그런 평정을 통하여 기쁨을 가져다 주는 일의 본질적 특징이 그에게 드러난다. 고통도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우울하게 할 수 없으며,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그에게 말해 줄 것이다. 눈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단지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듯이, 쾌감과 고통은 혼이 올바로 나아 갈 수 있게 인도한다. 이것이야말로 인식하는 자가 이르러야 할 혼의 균형상태이다. 쾌감과 고통이 인식하는 자의 내면 생활 속에서 파도를 일으키지 않으면 않을수록, 초감각적 세계를 위한 눈이 형성된다. 기쁨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기쁨과 고통을 통해 인식을 얻을 수 없다. 기쁨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그것으로부터 자기 감정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인식을 위한 지각기관이 되어 줄 것이다. 인식하는 자의 혼이 기쁨도 슬픔도 모르는 차가운 인간이 되라는 말은 아니다. 기쁨과 고통은 분명 그의 내면에서 살아 있다. 그러나 영계를 탐구할 때 그것이 존재적 변용을 일으킨다. 그렇게 하여 인식의 "눈과 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와 개인적으로 관계하려 하면, 사물도 우리 성격의 일부분에 한해서만 관계한다. 그것은 사물의 무상한 부분이다. 그 무상한 것과 관계를 끊고, 자기 감정이나 "자아"를 영속적인 것 속에 살리고자 하면, 그 무상한 부분은 중개자가 된다. 그리고 이 중개자를 통하여 사물의 영원한 부분이 밝게 드러난다. 인식하는 자는 자기 속의 영원한 것과 사물 속의 영원한 것의 관계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미 말한 다른 수행을 실천하기 전에, 또는 그 수행 동안, 그는 이 영원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돌, 식물, 동물, 인간을 관찰할 때 이 모든 것 속에서 어떤 영원한 것이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상한 존재인 돌 속에서, 그리고 인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변해 가는 감각적 현상을 넘어서 지속되어 가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물어야 한다.
영을 영원으로 향하게 하면 일상의 번잡한 감각이나 거기에 대한 마음의 배려를 없애게 될 것이므로, 살아 있는 현실에서 자기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 반대이다. 한 장의 종이 조각도 한 마리 곤충도 그냥 바라보지 않고, 눈을 통하여 영을 그 대상으로 향하게 할 때, 수많은 비밀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일순간의 불꽃, 미묘한 색채, 목소리의 억양 같은 것을 생생하게 느낄 것이다.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오로지 새로운 생활이 옛 생활에 더해질 따름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하고 진부한 것일지라도 눈길을 던지는 그 행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퇴색한 사상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며, 영시 능력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방향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이 방향으로 얼마나 멀리까지 걸어 갈 수 있는가는 우리의 능력에 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행하고, 다른 것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처음에는 우리의 감각을 지속적인 것으로 향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 수행을 통하여 영시에 의한 지속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일어날 것이다. 그 인식이 주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수행을 하는 자는 적절한 시기에 반드시 그것을 얻는다.
이러한 수행을 계속해 가면 이윽고 눈부신 변화가 일어난다. 어떤 사물에서도 지속적인 것, 영원한 것과의 관계를 인식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로부터 중요한 점과 중요하지 않은 점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제 그는 세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의 감정은 주변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된다. 무상한 것은 이전처럼 그것만으로 마음을 끌 수 없다. 그것은 그에게 영원한 것의 일환으로서, 하나의 비유로서 의미를 가질 따름이다. 모든 사물 속에 활동하는 영원한 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전에는 무상한 것이 그러했듯이, 지금은 이 영원한 것이 그에게 친화력을 가진다. 이것 때문에 생활에서 소외되는 법은 없다. 그는 단지 모든 사물에 대해 그 진정한 의미에 따라 평가하는 법을 배운다. 무의미한 잠꼬대를 들어도 그는 결코 그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잠꼬대에 매몰되지 않고, 거기에서 한정된 가치를 인식한다. 그는 그것을 올바른 빛 아래서 본다. 구름 위를 걸으며 일상 생활을 망각하는 자는 인식을 달성한 자가 아니다. 진정한 인식자는 모든 것에 대해 투철한 통찰과 정확한 감수성을 가지며, 그것으로 사물 하나 하나에 정당한 위치를 설정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의지를 사방으로 휘두르는 예측 불가능한 외적 감각 세계의 영향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인식을 통하여 사물의 영원한 본질을 보았다. 내면 세계가 변화한 지금, 그는 이 영원의 본질을 지각할 가능성을 늘 자기 속에 가지고 있다. 인식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내적 요구에 따른 행위는 사물의 영원한 본질에 따른 행위이다. 왜냐하면 사물이 내 속에서 그 본질을 이야기하므로. 그러므로 내 속에 살아 있는 영원한 것에 따라 나의 행위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나는, 영원한 세계질서의 의미를 실펀하고 있다. 나는 이미 사물에 떠밀려 무작정 흘러가는 존재가 아니다. 사물 그 자체에 내재해 있고, 지금은 나 자신의 존재법칙이 되어 있는 그 법칙에 따라 나는 사물에 작용하고 있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추구하고 노력해야 할 이상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목표의 달성이 요원한 일이라 하더라도 인식자는 이 목표로 나아가는 길을 뚜렷이 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자유의지이다. 자유란 자신의 행위이다. 영원한 것에서 그 동기를 이끌어내는 사람만이 스스로 행위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은 사물 그 자체에서 벗어난 동기로 행동한다. 이런 사람은 세계질서를 벗어나게 된다. 그러면 세계질서가 그를 압도할 것이다. 즉,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의지가 본래 가지고 있는 과제를 다할 수 없다. 그는 자유로울 수 없다. 개별적 존재의 자의성이 제멋대로의 행동을 부추겨 결국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말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내면생활에 작용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 인식의 길을 한 걸음 전진한 셈이다. 이 수행의 결과로서 초감각적 세계에 대한 지각이 열린다. 그는 초감각적 세계에 대한 진실이 어떠한 것인가를 배운다. 그리고 경험을 통하여, 이 진실들에 대한 확증을 가지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이 길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그에게로 다가온다. 지금 처음으로 그에게 의미를 드러내는 비의(Initiation)가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의 힘"에 의해 그에게 전수된다. 그는 "예지의 제자"가 된다. 이 비의는 거기서 외적 인간관계를 고려하지 않을수록 올바르게 파악된다. 인식하는 자는 그때 일어나는 일을 암시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새로운 고향을 발견한다. 그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초감각적 세계의 주민이 되었음을 의식한다. 영적 통찰력의 원천이 지금 어떤 고차적 영역에서 그에게로 흘러들어 온다. 인식의 빛은 외부에서 그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인식의 광원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가 제시하는 수수께끼는 그의 내면에서 새로운 빛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영에 의해 형성된 사물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하는 영 그 자체와 대화를 나눈다. 영적 인식의 순간에는, 개인의 사적 생활은 영원한 것의 비유로서 의식된다. 영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회의가 일어나는 것은 사물이 그로 하여금 내면에 작용하는 영에 대한 거짓 관념을 가지게 할 대뿐이기 때문이다. "예지의 제자"는 영 그 자체와 대화할 수 있으므로, 영에 대해 품었던 거짓 이미지를 모두 벗어 던진다. 영에 대한 거짓 이미지를 미신이라 한다. 비의에 입문한 자는 미신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이 진정한 영의 모습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개인, 회의, 미신에 의한 모든 편견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야말로 인식의 좁은 길을 통하여 예지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는 표시이다. 개인과 보편적 영성과의 이 일체성은 개성을 파멸시키는 "만유령" 속의 개인이 자기를 해소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소멸"은 개인의 진정한 발전이 있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개인이 영계와 관계를 맺을 때에도 개인은 여전히 개인이다. 개성의 극복이 아니라, 개성의 향상이 문제이다. 개개의 영과 보편적 영의 합일을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여러 가지 원이 하나의 원과 합동이 되고, 그 원 속에 자기를 해소시키는 그런 그림이 아니라, 각각이 나름대로의 색깔을 가진 많은 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대채로운 원환은 서로 겹쳐지는 경우에도, 각 색깔은 전체 속에서 그 특질을 잃지 않고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 어느 색깔도 그 독자적인 색채 가치를 잃지 않는다.
"좁은 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본서의 속편인《신비학 개론》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영적 인식의 좁은 길은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생생한 기쁨이나 건강한 생활체험에서 벗어나기를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오해에 대해서는, 영적 현실을 직접 체험하기에 적합한 혼의 분위기는 생활 전반으로 확대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영적 현실의 탐구자는 자신의 혼을 감각적 현실에서 분리시킬 필요가 있고, 또 그것을 강력하게 수행할 필요가 있지만, 이 현실로부터의 유리는 생활 전반에 걸치는 것이 아니므로 결코 세상을 벗어난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영계를 인식하는 행위는 여기서 말한 인식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행위뿐만 아니라, 편견에 흐려지지 않는 건전한 이해력으로 영학상의 진리를 파악하려는 행위에 있어서도 고도의 도덕적 생활태도를 함양시켜 주고, 감각적 존재를 진실에 즉하여 인식하는 것을 가르치며,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태도와 내적 혼의 건전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보충 설명
1. 최근까지 "생명력"은 비과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서서히 "생명력"이라는 이념이 즐겨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어떤 방향으로 진보되고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오히려 "생명력"을 문제로 삼지 않는 입장이 보다 논리적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자연의 힘 속에 "생명력"을 포함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현대과학의 사고 습관과 관념을 넘어서 보다 고차적 관점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생명력"에 대해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 "영학"의 사고방식과 전제에 설 때 비로소 논리적으로 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순수 자연과학적인 기초 위에 자신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세운 사상가들 또한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무생물 속에도 작용하는 힘들만 적용시키려는 19세기 이래의 신앙을 이미 버렸다. 뛰어난 자연과학 오스카 헤르트비흐의 저서《유기체의 생성 ㅡ 다윈의 우연 이론 비판》는 이 문제를 폭 넓게 다룬 역작이다. 그는 생명이 단순한 물리화학적 법칙에 의해 형성된다는 가설을 반박하고 있다. 이른바 신 생기론(Neo Vitalism))에 있어서 "생명력"을 논하던 예전의 과학자들이 구사한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생명체 내부에 작용하는 고유하고 특수한 힘을 논하는 과학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비유기적 힘을 넘어 선 생명활동은 초감각적인 영적 지각 없이는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학문적인 도식적 추상성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비유기적 대상을 다루는 자연과학의 인식 방법을 그냥 그대로 생명 영역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그와는 다른 인식 방법을 얻을 수 있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2. 하등생물의 "촉각(觸覺)"에 대해 말할 때도 이 말은 통상적 의미의 "감각론"에서 다루는 촉각과는 다르다. 촉각이라는 표현은 영학적 관점에서 많은 비판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촉각"이라는 것은 외적 인상의 일반적 지각이며, 그 특수한 지각이 시각과 청각이다.
3. 인간 존재의 분류는 통일된 혼의 활동을 자의적으로 구별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여 무지개의 일곱 색깔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통일된 혼의 활동을 분류했다는 사실을 강조해 두고 싶다. 물리학자가 프리즘을 통과한 굴절과 함께 나타나는 일곱 가지 세상을 통하여 빛을 연구하듯이, 같은 방식으로 영학자는 혼의 본질을 해명한다. 혼의 7구분은 오성에 의한 추상적 구별이 아니다. 빛을 일곱 가지 색깔로 구분하는 것이 추상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구분은 사물의 내적 본성에 기초해 있다. 다른 점은 오직 빛의 7구분이 외적 장치에 의해 가시화되는 데에 반해, 혼의 7구분은 혼의 본질을 영적 눈을 통하여 지각한 것이다. 혼의 진정한 본질은 이 구분을 영적 눈을 통하여 지각한 것이다. 혼의 진정한 본질은 이 구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세 가지 부분, 육체, 생명체, 혼체를 통하여 혼은 무상한 세계에 속하고, 다른 네 가지 부분을 통하여 영원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한 혼"에도 무상한 것과 영원한 것이 무차별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혼의 이러한 구조를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혼과 세계 전체의 관계를 알 수 없다. 또 다른 비유를 하자면, 화학자는 물을 수소와 산소로 나눈다. 이 두 원소는 "당일한 물" 속에서는 관찰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소나 산소는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제각기 다른 원소들과 결합할 수 있다. 그처럼 죽음에 임하여 분리된 세 가지 "혼의 하위 부분"은 무상한 세계존재와, 네 가지 상위 부분은 영원한 존재와 결합한다. 혼을 구분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물을 수소와 산소로 나누려 하지 않는 화학자와 다름없다.
4. 영학상의 표현은 정확히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표현이 정확히 이념을 나타낼 수 있어야 영학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것(감각들)은 그 경우(즉, 동물), 독립된 직접적 체험을 넘어 선 사고 내용"이라는 구절을 살펴보자. "독립된 직접적 체험을 넘어 선"이란 말을 무시하는 사람은 동물의 감정이나 본능 속에는 사고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영학은 동물의 모든 내적 체험이 사고내용과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단, 동물의 사고 내용은 동물의 "자아"가 독립적으로 사고내용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부터 개개의 동물을 지배하는 동물의 집합적 자아의 사고내용인 것이다. 이 집합적 자아는 인간의 자아처럼 물질계 속에는 존재하지 않고 혼계 속에서 개개의 동물에 작용하고 있다.(여기에 관해서는 나의 저술《신비학 개론》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인간의 사고내용은 독립된 존재이며, 간접적인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사상으로서 혼에 의해 체험된다.
5. 어린아이는 "철수는 착한 아이", "순이는 이걸 좋아해"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때 어린아이가 알마나 빨리 "나"라는 말을 사용하는냐가 문제가 아니다. 언제 어린아이가 "나"라는 말을 듣고 어린아이가 "자아"의 관념도 없이 그냥 이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사용하게 될 이 말은 희미한 자아 감정에서 점차로 자아 관념이 형성되는 소중한 성장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6. "직관"의 의미는 나의 저서《초감각적 세계인식》과《신비학 개론》에서 자세히 논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본서에서 말하는 직관과 두 저서의 직관이 서로 모순되는 것 같다. 그러나 영적 인식에서 영계가 직관을 통하여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은 영적 자아의 가장 차원 낮은 형식에 있어서 물질계의 외적 사물이 감각에 작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이 점을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7. "영의 재생과 운명" 이 장은 다른 장과는 달리 초감각적 인식 내용을 다루지 않고 인생의 과정 그 자체를 이론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현세의 생활과 그 운명이 윤회전생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논하고, 그 사고방식의 군거를 밝히려 하였다. 물론 이런 사고방식은 인생은 한번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수상쩍은 논리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선입 관념으로는 삶의 근거를 인식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그 사고의 기초를 다지려 하였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일견 모순처럼 느껴지는 사고방식을 동시에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다른 사고방식은 혼의 내적 체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현상에 대해 물질계의 현상에 대한 것과 같은 이론적 고찰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부정하는 경우, 탐구할 길이 없어지고 만다. 이런 부정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예를 들면 자아가 겪는 어떤 우면적 타격에 의해 기억 속의 체험내용과 공통되는 어떤 체험을 하고 있다는 감정이 일어났을 때도 이런 감정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타격을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 체험을 운명과 자아의 살아 있는 관계를 무시하고 외계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의 생각과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주장은, 운명의 타격이란 우연 아니면 외부에서 규정된 조건들에 의한 것이다. 이 인생에서 처음 나타나 미래에 이르러서야 그 결과를 드러내는 운명의 타격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운명만을 일반화하고, 다른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 하는 유혹도 클 것이다. 그러나 인생경험을 거듭하면서 괴테의 친구 크네벨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되면, 다른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크네벨은 한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잘 관찰해 보면 대부분 사람들의 생활에는 어떤 의도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성격이나 환경을 통하여 처음부터 그들을 규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생활 상황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결국은 서로 호응하는 어떤 전체에 의해 통일되는 것입니다. 운명을 이끄는 손은 처음에는 살짝 숨어 있지만 언젠가는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것은 외적 작용이나 내적 활동이 되어 나타납니다. 때로 서로 모순되는 이유들이 이 움직임 속에서 발견됩니다. 운명의 진행이 아무리 혼란스런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뚜렷한 근거와 방향성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이러한 관찰은 이 관찰의 기초가 되고 있는 혼의 체험들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필자는 윤회 전생과 운명에 대한 논증을 통하여, 인생 형성의 여러 가지 근거를 어디까지 밝힐 수 있는가,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정확히 규정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으로 이끌어 낸 직관 내용이 여기서는 "그림자 그림" 정도의 수준밖에 표현되어 있지 않다는 것, 이 논증이 영학으로 획득되어야 할 단순한 이론적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밝혀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준비 작업 또한 하나의 내적 혼의 행위로서, 유효한 범위를 스스로 착각하지 않고, "증명" 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실천을 희구한다면, 이러한 혼의 행위는 이론적 준비가 없으면 어처구니없게 보일 인식 내용에 대해 편견 없이 마음을 열게 해 줄 것이다.
8. 본서의 마지막 장인 "인식의 좁은 길"에서 "영적 지각기관"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였다. 상세한 내용은《초감각적 세계인식》과《신비학 개론》에서 다루었다.
9. "물질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일정 장소에서의 휴식과 정체"가 영계에 없다고 해서, 그곳을 쉽 없는 변화의 세계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원상을 창조하는 존재"가 있는 곳에는 분명 "일정 장소에서의 휴식"이란 있을 수 없지만, 활발한 움직임과 결합된 영적 안식은 존재한다. 그것은 무위 속에서가 아니라 행동 속에 나타나는 정신의 평온한 만족감과 행복감에 비교될 수 있다.
10. "의도"라는 말은 세계발전의 힘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인간의 의도와 같은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원래 인간 사회의 영역에서 유래하는 말의 뉘앙스에서 인간적 제약 모두를 제거하고, 그 대신에 인간이 이른바 자기 자신을 넘어 선 생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덧붙인다면, 비로소 이런 단순화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11. "영적 언어"에 대해서는《신비학 개론》에서 다루었다.
12. "영원한 것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의 방향성을 결정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죽음에서 생에 이르는 인간 혼의 특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현세의 인간을 덮치는 운명적 타격은 이 세상의 혼에게는 인간의 의지에 반하는 사건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한편 죽음에서 생에 이르는 생활에는 이러한 운명의 타격을 체험하려는 의지와 유사한 힘이 혼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혼은 어느 정도까지 이전의 지상생활이 자신의 내면에 불완전한 부분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불완전성은 추한 행위나 추한 사고내용에서 유래한다. 죽음과 재생 사이에 이런 불완전성을 청산하려고 하는 의지와 비슷한 충동이 일어난다. 그 때문에 혼은 다음 지상생활에서 자신을 불행에 빠뜨리고 그 고통을 통하여 청산하려는 성향을 자신 속에 만들어 둔다. 그러나 육체 존재로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면, 이전의 순수 영적 존재였던 시기에 스스로 자신에게 부과했던 것을, 혼은 기억하지 못한다. 지상생활의 관점에서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도 초감각적 관념에서 보면 혼 자신이 바라던 일이다. 영원한 것을 기준으로 삼아 인간은 자신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13. "사고형태와 인간의 아우라에 관하여"는 가장 오해받기 쉬운 부분이다. 적의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장이야말로 비난받기에 마땅한 부분일 것이다. 견자의 표현내용을 자연과학적 관찰 방법으로 실험을 통하여 증명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우라의 영적 내용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모아 두고, 어떤 사람을 앞에 세운 다음 그의 아우라를 보고 설명해 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아우라에서 어떤 사고내용이나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를 견자라 자칭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게 한다. 만일 그들의 말이 서로 일치하고 진정으로 그 사람이 견자들이 말하는 감정과 사고내용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사람이 아우라의 존재를 믿게 될 것이라 말할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자연과학적인 증명 방법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영학 연구자가 영시 능력을 위해 행을 통하여 자신의 혼에 작용하는 것은 그 능력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개개의 경우에 그가 영계에서 무엇을 지각하는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지각하느냐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영계의 선물로서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억지로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자신에게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각을 얻으려는 그의 의도가 그 지각을 얻는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연과학적 사고가 실험을 위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도이다. 그러나 영계는 명령받지 않는다. 만일 실험을 행해야 한다면, 그것은 영계의 의지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사고내용을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견자가 읽어내기 위해서는 영계 속의 어떤 존재가 그런 의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 경우, 견자들은 "영적 충동"에 촉발되어 관찰하기 위해 모여들 것이다. 그때는 그들의 관찰 결과는 일치할 것이다. 이것이 아무리 자연과학적 사고에 맞지 않는다 해도 사실임에는 어쩔 수 없다. 영의 실험은 물리 실험처럼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견자가 낯선 사람의 방문을 받을 때, 그는 이 사람의 아우라를 금방 관찰할 수 없다. 그러나 영계의 내부에서 그것을 볼 필요가 일어나면, 그는 그것을 본다. 앞에서 말한 비난과 오해의 가능성에 대해 이런 간단한 말로 설명해 둔다. 영학이 해야 할 일은 어떤 길을 가면 아우라가 보이고, 어떤 길을 가면 아우라의 존재를 체험할 수 있는지 말하는 것이다. 보기 위한 조건에 자신의 혼을 맞추면, 그것을 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자연과학적 방법이 통용된다면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요구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영학상의 가장 초보적인 사실도 모르고 있음을 고백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아우라"의 기술은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흥미 위주의 태도에 영합해서는 안 된다. 감각적 세계의 현상과 구별되지 않고, 따라서 안이하게 이 감각적 세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을 "영"으로 규정한다면, 그런 흥미 위주의 태도로 만족을 얻을 것이다. 아우라의 색체가 나타날 때의 특별한 체험을 기술하는 부분이 이런 오해를 막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우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얻으려면, 인간의 혼이 영적 체험을 가질 때는 당연히 아우라적인 것을, 감각적으로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직관하고 있다는 것을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직관이 없으면, 영적 체험은 무의식에 머물 것이다. 구상적인 직관을 영적 체험 그 자체로 혼동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 구상적 직관 속에는 영적 체험 그 자체가 적확한 표현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이 표현은 직관하는 혼이 자의적으로 행하는 표현이 아니라, 초감각적 지각 속에서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다. 지금 시대는 모리츠 베네직트 교수의 저서《펜듈럼 점과 수맥찾기》와 같은 방법으로 자연과학자가 일종의 "인간의 아우라"를 논하는 것을 인정하려 하고 있다. 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수이지만 어둠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 이 사람 가운데 대부분은 어둠 속에서도 색채를 구별하거나 물체를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극소수는 물체의 색채조차 구별핸내다. 다수의 학자와 의사가 나의 암실에서 내가 아는 두 사람의 전형적인 어두 적응자를 관찰하였다. 학자들은 두 사람의 정확한 식별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색채를 지각하는 어둠의 적응자들은 얼굴과 머리 전면에 푸른색을, 우측 뇌에도 같은 청색을, 그리고 좌측면에 빨강, 때로는 오랜지색이 깃든 황색을 보았다. 배후에도 같은 구분으로 같은 색이 있었다." 그러나 영학자가 "아우라"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리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현대 자연과학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에 속하는 베네딕트의 이런 논증에 대해 여기서 나의 태도를 밝히려는 것도 아니고,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자연과학으로 영학을 옹호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어떤 경우에는 자연과학자도 영학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강조해 주어야 할 것은 본서가 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아우라와 베네딕트가 물리적 방법으로 연구하고 있는 아우라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영적 아우라"가 외적 자연과학적 수단으로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한 착각이다. 영적 아우라는 인식의 좁은 길을 걸은 자의 영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다. 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현실성이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현실성과 같은 방법으로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1. 필자는 이 책을 집필한 후에도 얼마간 이 에테르체 또는 생명체를<형성력체>라 하였다.(예를 들면 잡지《왕국》제1권 4호 1917년 1월호에서) 이렇게 이름붙인 것은 에테르체라는 말이 예전의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생명력"과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의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생명력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 자연과학은 이 힘을, 유기체 내의 비유기적 힘의 작용으로 설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비유기적 힘이 유기체와 비유기체에 각기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유기적 자연의 법칙은 유기체에 대해서건, 광물 결정체에서건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다. 그러나 유기체에는 유기적인 뭔가가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생명 형성력이다. 이 생명의 근저에는 에테르체, 또는 형성력체가 존재한다. 이렇게 가정한다고 해서 자연과학적 사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 연구자가 비유기적 자연의 힘이 작용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방법은 그대로 유기적 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 힘의 작용이 유기체에서는 특수한 생명력을 통하여 변화된다는 사고방식을, 영학은 거부한다. 영학 연구자는 유기체에 무생물과는 다른 작용이 나타날 때에 한해서, 에테르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쨌든 필자는 여기서 "에테르체"라는 표현을 "형성력체"로 바꿀 생각은 없다. 이 책의 내용과 개념들을 서로 연관시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오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해는 이 책의 내용과 관계없는 곳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뒷부분의 '보충설명' 항목에서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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