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세 가지 세계 본문
세 가지 세계
1. 혼의 세계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찰해 보면 인간은 세 가지 세계에 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소재와 힘은 물질 세계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외적 감각을 통해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이 감각만을 신뢰하여 오로지 그 지각 능력만을 개발하려는 사람은 다른 두 세계, 혼과 영의 세계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사물이나 생물의 현실성을 확신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그것을 지각할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물론 여기서처럼 고차적 지각기관을 영적 감각이라 부르면 금방 오해가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물질" 관념을 거기에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은 "영적" 세계에 대립하는 의미로 물질계를 "감각적" 세계라 부르고 있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고차적 감각"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이 자리를 빌어 밝혀 둔다. 몸의 감각이 물질적 존재를 지각하듯이 혼과 영의 감각은 혼적이며 영적 존재를 지각한다. 오로지 "지각기관"이라는 의미로 "감각"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빛을 감지하는 눈이 없으면 소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의 철학자 로체의 말은 옳다.
"빛을 감지하는 눈과 소리를 감지하는 귀가 없으면 전세계는 어둠이며 침묵일 것이다. 아픔을 느끼는 신경이 없으면 치통이 존재할 수 없듯이, 빛과 소리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말을 올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몸의 표면 전체에 일종의 촉각만을 가진 하등생물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비교해 보면 충분할 것이다. 빛, 색, 소리는 이 생물에게는 귀와 눈을 가진 생물처럼 존재할 수 없다. 공기를 진동시키는 총성은 그 생물에게 어떻게 전달될까. 그 진동이 그 생물의 혼에 소리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귀가 있어야 한다. 에테르라는 미묘한 소재 속에서 어떤 과정이 빛과 색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각할 수 있는 감각 기관이 있어야 한다.
어떤 감각 기관으로 사물이나 존재의 작용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괴테는 인간과 현실세계의 이런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려는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나 하나의 작용을 느끼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런 작용 전체에 그 사물의 본질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의 성격을 기술하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쓸데없는 일이다. 그 사람의 성격을 기술하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쓸데없는 일이다. 그 사람의 행동들을 끌어 모아 비교해 보면 그 사람의 인물상이 뚜렷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색은 빛의 행위이다. 행위이며 수단이다. …… 색과 빛이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으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 전체 속에서 이 두 가지 현상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빛과 색을 통하여, 눈의 감각에게 자신을 밝히려 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연은 다른 감각에도 자신을 드러낸다. …… 이렇게 하여 자연은 거기서 더욱 깊은 곳으로 내려가 다른 감각에도, 즉 이미 알려져 있으나 인정받지 못하는 미지의 감각에까지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수많은 현상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우리와 대화한다. 주의 깊은 사람에게 자연은 어떤 경우에도 살아 숨쉬고 있고, 침묵하지 않는다."
만일 이 말로 괴테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부정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단지 사물의 작용이 지각될 뿐, 본질은 그 뒤에 감춰져 있다고 괴테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런 "숨겨진 본질" 따위는 전혀 문제삼을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은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이란 오히려 현상을 통하여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본질은 얼마든지 다양화될 수 있으므로, 다른 감각에 대해서는 다른 형태로 자기를 나타낼 수 있다. 그 경우에도 항상 본질적 부분이 나타나는 것이다. 단, 감각에 한계가 있으므로 그 본질이 전체적 본질이 아닐 따름이다. 이러한 괴테의 관점은 우리가 영학의 문제로 제기하는 내용과 똑같다.
눈과 귀가 물체의 양상을 지각하는 기관으로서 육체 속에서 성장하듯이, 우리는 혼계와 영계를 지각하는 기관을 육성할 수 있다. 혼계와 영계는 그런 고차적 감각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마치 귀와 눈이 없는 생물에게 나타나는 물질계가 그러하듯이 "어둠과 침묵"의 세계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고차적 감각과 인간의 관계는 물체의 감각과 인간의 관계와는 다르다. 물질 감각이 완전히 발달할 수 있도록 자연은 배려해준다. 인간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런 감각은 육성된다. 그러나 고차적 감각은 우리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인간을 위해서 물질적 환경세계를 지각하고, 거기에 충분히 작용할 수 있는 육체를 길러주는 것이 자연이라고 한다면, 혼계와 영계를 지각할 수 있도록 혼과 영을 길러주는 것은 인간 자신뿐이다. 자연이 발달시켜주지 못한 고차의 기관을 육성하는 것은 자연에 반한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차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이룩하는 모든 것은 자연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자연에서 독립한 바로 그 시점의 발전단계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만이 고차적 감각의 육성을 부자연스럽게 느낀다. 이런 사람들에게 고차적 감각기관은 괴테의 말처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인간의 모든 교육 행위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교육 또한 자연의 작업을 계승하는 것이므로, 나아가 눈먼 사람도 수술을 거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술로 인하여 눈이 보이게 되는 사람과 거의 같은 일이 본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술하는 방법으로 고차의 감각을 개발한 사람에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세계는 몸의 감각이 알 수 없었던 새로운 특성, 양상, 현실을 동반하면서 그의 앞에 나타난다. 이 고차의 기관을 통하여 제멋대로 무엇인가를 현실세계에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 기관 없이는 현실계의 본질적 부분이 가려진 채로 남게 된다는 것이 명료해진다. 혼계나 영계는 물질계의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물질계에서 구별되지 않는다. 수술로 눈을 뜬 사람에게 어둠의 세계가 빛과 색의 세계로 드러나듯이, 혼과 영의 눈을 뜬 사람에게, 이전에는 그냥 물체로서 나타나던 사물이 그 혼적 영적 특성을 밝힐 것이다. 이 세계에는 혼적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한 사람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 형태나 존재가 가득하다.(혼적 영적 감각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논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우성 이 두 가지 고차적 세계 그 자체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 이러한 세계를 부정하는 사람은 고차적 기관을 아직 개발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인류의 진화는 어떤 단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차의 기관"은 때로 육체의 기관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러므로 고차의 기관이란 영이나 혼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고차의 세계에서 지각되는 것이 안개처럼 희박한 물질적 소재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여기서 "고차의 세계"라 부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지각하려는 것이 어떤 미묘한 물체인 것처럼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않는다면, 물론 처음에는 지극히 기본적인 점에 한정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고차의 세계"에 대한 진실을 배우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영적 발전의 고차적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영계의 본질을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는 ㅡ 그리고 그 단계의 의미는 크다 ㅡ 혼적 영적인 것이 물질의 미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편견을 제거하려고 노력만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 외견만으로 그 사람됨을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우리의 주변 세계를 오로지 육체의 감각만으로 이해하려는 것도 무리이다. 그리고 한 인간과 친해져서 그 혼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그린 초상화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체의 세계 또한 그 혼적 영적 근거를 알았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먼저 고차의 혼적 영적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물질계를 영학적 관점에서 논해 볼 생각이다.
혀대라는 문화기에서 고차적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이 문화기는 무엇보다 물질세계를 인식하고 지배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는 처음부터 이 물질세계와의 관계에서 그 형태와 의미를 얻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사실을 실마리로 삼아 말해야 하므로, 이 관습화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외적 감각만을 신용하려는 사람의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몇 가지 사항이 비유적으로 이야기되다가, 그리고 암시에 그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유는 처음에는 인간을 고차적 세계로 향하게 하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 그 세계에 입문하도록 촉발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이런 입문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겠다. 혼적 영적 지각기관의 육성 방법도 그때 언급될 것이다. 지금은 우선 비유를 통해서라도 고차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이 세계에 대한 눈을 스스로 열어가려는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의 위, 심장, 폐, 뇌를 구성하고 지배하는 소재와 힘이 물질계에 속하듯이, 우리의 충동, 욕망, 감정, 정열, 바램, 감각과 같은 혼의 특성은 혼적 세계에 속한다. 인간의 혼은 육체가 물질적 세계의 일부분이듯이, 혼적 세계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물질 세계와 혼 세계의 가장 다른 점은 후자의 세계에 속한 모든 사물이나 본성이 전자의 세계 것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동적이며 자유롭게 형태를 바꾼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물질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다 조잡한가, 치밀한가를 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두 항목을 비교하기 위한 방편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물질 세계에서 추출한 언어로 혼의 세계를 말하려 하는 모든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을 전제로 한다면, 물질계에 있어서 물질적 소재나 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혼 세계의 존재자나 구성체도 혼적 소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혼의 힘에 지배받고 있다 할 수 있다.
물질계의 구성체가 공간적 퍼짐성과 공간적 운동성을 고유한 속성으로 가지고 있듯이, 인간의 혼에 속한 힘들도 나름의 속성을 가진다.(충동, 바램, 요구는 혼의 세계의 소재에 대한 이름이다. 이 소재적 부분은 "아스트랄적"으로 특징지워진다. 혼 세계의 힘 쪽을 언어로 표현하자면 "욕망존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혼 세계의 "소재"와 "힘"은 물질계에서처럼 엄밀하게 구별할 수 없다. 어떤 충동을 "힘"이라 할 수도 있고, "소재"라 할 수도 있다.)
처음으로 혼 세계를 본 사람은 물질계와 너무나 달라 혼란을 일으키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새로운 육체의 감각이 열렸을 때도 일어난다. 수술로 눈이 보이게 되었을 때, 여태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은 이전에는 촉각을 통해서만 느꼈던 세계 속에서 새로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마치 대상이 눈 안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다 점차 대상이 자기 눈 밖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대상은 마치 평면상에 그려진 것처럼 나타난다. 깊이나 사물간의 거리는 그 후 시간이 흐른 후에 서서히 파악된다.
혼의 세계에는 물질계와 전혀 다른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혼의 구성체 대부분은 당연히 다른 세계의 구성체와 결합되어 있다. 가령 인간의 혼은 육체와 결합되어 있고, 인간의 영과도 결합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의 혼 속의 행위는 동시에 몸이나 영의 세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혼의 세계를 관찰할 때는 반드시 이런 사실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세계의 움직임에 의한 것을 혼의 법칙인 것처럼 느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사람이 어떤 바램을 밖으로 표현할 때, 이 바램은 사고내용, 즉 영적 표상에 의해 장악되고 있고, 영의 법칙에 따르면서 물질계의 법칙에도 따른다. 우리는 거기에 아무 작용도 가하지 않고 물질계의 법칙을 고찰할 수 있듯이, 혼의 세계에 대해서도 똑같은 고찰이 가능하다.
혼적 사상과 물질적 사상의 차이점은, 전자의 상호작용은 본질적으로 내적이라는 것이다. 물리적 공간에는 "충격"의 법칙이 작용한다. 상아 공이 정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공에 부딪치면, 뒷 공은 앞 공의 운동과 탄성으로 계산될 수 있는 일정 방향을 향하여 이동한다. 혼의 공간에서는 서로 부딪치는 두 개의 구성체의 상호작용은 양자의 내적 특성에 의존한다. 서로 잘 맞으면 서로 녹아들어 하나가 된다. 만일 상반되는 특성을 가진다면 서로를 밀쳐낸다.
물리적 공간에서는 특정한 시각법칙이 있다. 멀리 있는 물체는 원근법칙으로 작게 보인다. 가로수를 보면, 원근법의 법칙에 때라 멀리 있는 나무는 가까운 것보다 그 간격이 좁은 것처럼 느껴진다. 혼의 공간에서는 그와는 달리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내적 본성과 관련된 간격으로 보는 자 앞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혼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물리적 세계의 규칙으로 그것을 보려 하면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다.
혼의 세계를 알려면 무엇보다 먼저 물질계에서 고체, 액체, 기체로 구별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 구성체를 구분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두 가지 힘을 알아야 한다. 즉, 공감과 반감이다. 혼적 구성체 속에서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는 그 구성체의 종류가 결정한다. 공감이란 혼적 구성체가 다른 것을 끌어당겨, 다른 것과 융합하려는 힘이다. 반감이란 그와는 반대로 다른 것을 물리치고 배제하며, 자신의 특성을 주장하려는 힘이다. 어떤 혼적 구성체가 혼의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는 이 두 가지 기본적인 힘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가에 따른다. 세 가지 종류의 혼적 구성체가 이러한 공감과 반감의 작용에 따라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상이성은 공감과 반감의 상호관계에 의지하고 있다. 두 가지 기본적인 힘은 어느 경우에서건 존재한다. 제1의 구성체를 살펴보자. 그것은 주위에 있는 다른 구성체를 공감 작용으로 글어당시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 속에 작용하고 있는 반감이 주위에 있는 것을 물리친다. 그 결과, 외부적으로는 오로지 반감의 힘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공감과 반감은 함께 존재하고 있고, 단지 후자가 우세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 반감이 공감을 이기고 있는 상태이다. 이 구성체는 혼의 공간 속에서 자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많은 것을 물리치고, 극히 작은 부분만을 자신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이 구성체는 변화하기 어려운 형태를 가지고 혼의 공간을 이동하고 있다. 그러한 공감의 힘은 탐욕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이 탐욕은 만족을 모른다. 왜냐하면 반감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것을 물리치기 때문에 혼이 가득 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혼적 구성체를 물질계의 어떤 것과 비교한다면, 고체가 거기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혼적 소재성으로 볼 때, 이 영역을 불타는 욕망이라 한다.
동물이나 인간의 혼에 깃든 이러한 욕망의 열기는 저급한 감각적 충동이라는 그들의 지배적인 이기적 본능을 결정짓는다.
혼의 제2구성체는 공감과 반감이 같은 정도의 힘으로 작용하며 균형을 이루는 경우이다. 이 구성체는 주위에 대해 일종의 중립성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끌어당기지도 않고 밀쳐내지도 않고, 다른 것들에 대해 유사성을 드러내며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과 주변 세계에 확실한 경계선을 그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위에 있는 다른 것들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작용시키므로 물질계의 액체에 대비할 수 있다. 이 구성체는 다른 것을 자신 쪽으로 글어당기는 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러한 작용의 한 예로서, 인간의 혼이 색채를 감지할 때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빨간색을 느낄 때, 나는 주위로부터 중화된 자극을 받고 있다. 이 자극에 빨간색을 보았을 때의 쾌감을 덧붙일 때, 혼에는 다른 작용이 나타난다. 중화된 자극을 일으키는 것은 공감과 반감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혼적 구성체이다. 혼의 이러한 소재는 유동적이어서 자유롭게 형태를 바꿀 수 있다. 그것은 첫 번째 것처럼 자기 본위로 혼의 공간을 이동하지 않고, 모든 곳에서 다른 것으로부터 인상을 받아들여, 만나는 많은 것들과 화해한다. 이러한 혼의 소재를 유동적 감응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혼의 제3구성체는 공감이 반감을 지배하고 있는 단계이다. 반감은 자기 중심적으로 자신을 주장하지만, 이제는 주위 사물에 대해 심하게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구성체가 혼적 공간 속에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주위의 대상에 영향을 끼치는 인력권의 중심이다. 이러한 구성체를 원망소재성이라 하자. 왜냐하면 반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움직임이 공감보다 약하므로 공감이 그 인력이 닿는 모든 대상을 자신의 영역 안으로 끌어당기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공감은 아직 자기 중심적인 기조를 가지고 있다. 원망소재성은 물질계의 기체에 비유될 수 있다. 기체가 사방으로 팽창하려 하듯이 그 원망소재성도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가려 한다.
혼의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르면, 반감이 완전히 사라지고 공감만이 본래의 작용자로 나타난다. 그럴 경우, 이 공감 작용은 처음에는 혼적 구성체 그 자체의 부분 내에서 나타난다. 이 부분들은 서로를 끌어당긴다. 어떤 혼적 구성체 내부의 공감력은 쾌감 속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 공감이 조금이라도 감소하면 불쾌하다. 추위란 열기가 극도로 적어졌음을 나타낸다. 불쾌감도 쾌감이 줄어든 것을 말한다. 쾌감과 불쾌감이란 인간의 감정세계의 활동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느낀다는 것은 혼이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활동함이다. 쾌감과 불쾌감의 존재방식에 따라 혼의 기분이 결정된다.
공감을 자기 자신의 내부 활동에만 국한하지 않는 혼적 구성체는 한 단계 높은 곳에 이른다. 이 단계는 이미 제4단계가 그러하듯이, 공감이 반감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차의 3단계와 구별된다. 이러한 고차의 혼적 소재에 의해 비로소 다양한 혼적 구성체가 하나의 세계로 어우러진다. 반감이 문제가 되는 한, 아직 그 혼적 구성체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고, 다른 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강화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과 관계하려 한다. 반감이 침묵할 때, 다른 것들을 어떤 계시를 주는 존재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고차적 형식의 혼적 소재는 혼적 공간 속에서 마치 물질계 빛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소재는 어떤 혼적 구성체가 다른 존재, 다른 본질을 이러한 존재, 본질 그 자체를 흡수하게 해 준다. 다시 말해, 다른 존재의 빛으로 자신을 비추게 한다. 혼은 이러한 고차의 영역들을 앎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혼의 존재방식에 눈을 뜬다. 혼은 어둠 속의 무거운 삶에서 해방되어, 바깥으로 열리고 빛을 발하고 스스로 혼적 공간 속에 빛을 비춘다. 저차원 영역의 혼적 소재만으로 존재할 경우, 반감 때문에 다른 존재로부터 자신을 감추려 하는 비활성적이고 음침한 내적 생활은, 이제 안에서 바깥으로 흘러가려는 혼의 활동성으로 바뀐다. 제2영역의 유동적 감응성은 구성체와 구성체가 만날 때만 활동한다. 물론 만남이 이루어지면 다른 존재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접촉이 필요하다. 고차의 제영역에서는 자유롭게 방사되고 자유롭게 유출된다.(이 영역의 존재를 "방사하는 것"이라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퍼져가는 공감은 빛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하실의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듯이, 활동을 촉진하는 고차영역의 소재가 없으면 혼적 구성체도 성장할 수 없다. 이러한 고차영역의 소재는 혼의 빛, 혼의 활동력, 그리고 좁은 의미의 혼 본래의 생명이다. 이러한 것들은 고차영역에서 나와 개개의 혼에 부여된다.
그 때문에 혼의 세계는 세 가지 저차원 영역과 세 가지 고차원 영역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제4영역과 세 가지 고차원 영역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제4영역에 의해 매개되므로 혼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불타는 욕망의 영역
2, 유동적 감응성의 영역
3. 바램의 영역
4. 쾌감과 불쾌감의 영역
5. 혼빛의 영역
6. 혼의 활동력의 영역
7. 혼의 생명 영역
처음의 3가지 영역에 있어서 혼적 구성체는 공감과 반감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제4영역에서는 공감이 혼적 구성체 자신 속에서만 작용한다. 고차의 3영역을 통하여 공감의 힘은 점점 자유로워진다. 빛나고 활기에 넘치는 이 영역의 혼적 소재는 혼의 공간 속을 바람처럼 불어 가, 혼자서 자기 존재 속에 매몰되어 가는 혼적 구성체를 각성시킨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혼적 영역의 구분은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다. 고체, 액체, 기체가 물질계에서 서로 침투하고 있듯이, 혼적 세계에서 불타는 욕망, 유동적 감응성, 그리고 바램의 힘은 서로 침투하고 있다. 그리고 물질계에서 열기가 물체를 꿰뚫고 빛이 그것을 비추어 내듯이, 혼적 세계의 쾌감, 불쾌감이나 혼 빛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나아가 똑같은 일이 활동적인 혼의 힘과 본래의 혼적 작용 속에서도 나타난다.
2. 사후의 혼
혼은 인간의 영과 몸의 결합부분이다. 공감과 반감의 힘은 상호관계를 통하여 욕망, 감응, 바램, 쾌감과 불쾌감을 일으키는데, 이러한 힘은 혼의 구성체와 구성체 사이에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계나 영계의 존재자들에게도 작용한다. 혼이 몸에 깃들어 있을 동안 혼은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관여한다. 몸의 물질적 조직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는 혼 속에 쾌감과 편안함이 일어나고, 그 조직활동이 방해받을 때는 불쾌감과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영의 작용에도 관여한다. 어떤 현상은 혼을 즐겁게 가득 채우고, 또 어떤 현상은 혐오감을 일으킨다. 올바른 판단은 혼을 즐겁게 하고, 잘못된 판단은 혼을 불쾌하게 만든다.
어떤 사람이 도달하는 경지도 혼의 경향이 어떤 방향으로 기울어지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어떤 사람의 혼이 그 사람의 영적 활동에 공감하면 할수록, 그것만으로도 그는 완성된다. 그 혼의 요구가 몸의 기능으로 만족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는 미완성인 채로 남는다.
영은 인간의 중심점이다. 몸은 이 영이 물질계를 관찰하고, 인식하고, 활동하는 데 필요한 매개자이다. 그리고 혼은 이 영과 몸의 매개자이다. 혼은 공기의 진동이 귀에 던져주는 물질적 작용에서 소리의 감각을 끌어내고, 그 소리를 쾌감으로 체험한다. 혼은 이것을 모두 영에게 전하고, 영은 그것을 통해 물질계를 이해한다. 한편 영 속에 나타나는 사고내용은 혼 속에서 그것을 실현하려는 바램으로 바뀌어, 그것으로 인하여 몸을 도구로 삼아 행위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활동에 영적 방향성을 주지 못하면 자신의 사명을 달성할 수 없다. 이른바 그 촉수를 물질이나 영, 어느 쪽으로도 뻗칠 수 있다. 물질계에 잠겨버리면 혼은 물질의 본성에 물들어 버린다. 그 경우, 영은 물질계 속에서는 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움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 혼의 존재방식에 따라 영 자신에게 물질적 지향성을 주게 된다. 영적 구성체는 그 혼의 힘에 의해 물질 쪽으로 끌려 간다. 미숙한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그의 혼은 몸의 기능에 집착하는 경향을 가질 것이다. 그는 물질계가 감각에 부여하는 인상에 의해서만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의 영적 생활 또한 물질 영역으로 하강할 것이다. 그의 사고내용은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기능한다.
영적 자아는 윤회전생을 거듭하는 동안 점점 영적인 것으로 인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인식은 영원한 진리의 영에 의해, 그 행동은 영원한 선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질계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죽음이란 몸의 기능이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죽은 몸은 혼과 영의 매개 역할을 정지하고, 그 기능은 물질계의 법칙에 따라 완전히 물질화하여 자기 속에 해소되어 버린다. 감각적으로는 그냥 몸의 이러한 물질적 과정만이 죽음으로 관찰된다. 그 다음 혼과 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몸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혼과 영을 감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경우는, 살아서 물질 과정 속에서 자신을 바깥으로 표현할 때뿐이다. 죽고 나면 이런 표현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육체적 감각에 의한 관찰과 그 관찰에 기반을 둔 학문은 사후의 혼과 영의 운명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혼계와 영계의 과정에 대한 관찰에 근거한 고차적 인식이 필요하다.
영은 몸을 떠난 다음에도 혼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지상에서 살아 있을 때의 몸이 영을 물질화와 연결시켰듯이, 지금은 혼이 영을 혼계에 연결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영의 본원적 모습을 이 혼적 세계 속에서 찾을 수는 없다. 혼은 다만 영의 창조의 장인 물질계와 연결시켜주는 존재일 따름이다. 영이 보다 완성된 형상으로 새로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계로부터 거기에 합당한 힘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상생활에서 영은 혼을 통하여 물질계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영을 구속하는 혼이 물질의 본성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영 또한 물질계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후에 혼은 몸을 잃고 오로지 영과 연결되어 있다. 혼은 혼 본래의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이 혼계의 힘만이 혼에 작용할 수 있다. 처음에는 영도 혼계의 생활에 포함되어 있었다. 영은 이 세상에서 몸과 결합되어 있었듯이, 지금은 혼의 생활과 결합되어 있다. 언제 몸이 죽는가는 몸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므로, 혼과 영이 몸을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몸의 힘이 인체조직 속에서 더 이상 작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이 몸이 혼과 영의 구속을 풀어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와 똑같은 관계를 혼과 영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혼의 힘이 인간의 혼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이 혼이 영을 고차원 세계 쪽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혼이 몸을 통해서 체험했던 모든 집착을 버리고, 영과 함께 체험한 내용에만 관계하려 할 때, 영은 해방된다. 몸 속에서 체험한 것이라도 혼이 그 성과를 영에 새겨 넣을 수 있다면, 그 체험 내용은 영계에서도 혼과 영을 하나로 묶어 줄 것이다.
사후의 혼을 알기 위해서는 그 해소과정을 고찰해야 한다. 혼은 영을 물질 쪽으로 이끄는 과제를 떠맡았다. 그 임무를 다한 순간, 혼은 영의 방향으로 향한다. 이 과제와의 관계에서 보면, 몸이 혼에서 벗어나서 혼이 더 이상 결합부분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혼은 영적 활동을 할 수 있다. 몸적 생활을 통해 몸의 영향을 받고, 몸에 집착하지만 않았더라면 혼은 순수한 영적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혼이 몸에 깃들어서 그 영향에 물들지 않았더라면 몸을 벗어난 다음 즉시 영적이며 혼적 세계의 법칙에 따라 감각체험을 갈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인간이 죽음에 임하여 지상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상생활과 관련된 욕망, 바램 등을 모두 충족시켰더라면,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통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혼에 달라붙는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다시 이 지상에 태어나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이 세상의 인연과, 사후의 혼을 생전의 특정 생활에 집착하게 하는 이 세상의 인연을 조심스럽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운명의 법칙, 즉 카르마를 통하여 해결되지만, 후자는 사후의 혼이 스스로 그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다.
사후의 혼은 오로지 스스로 영적, 혼적 세계의 법칙에 따름으로써 물질 존재에 대한 집착을 끊고 영을 자유롭게 활동하게 하는 일정한 시기를 거친다. 혼이 물질적인 것에 구속되면 될수록 이 시간은 연장된다. 물질생활에 대한 의존이 적은 인간은 그 시간이 짧고, 물질생활에 대한 관심이 강하여 사후에도 많은 욕망, 바램 등이 혼 속에 남아 있는 인간은 그 시간이 길다.
죽음 직후의 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될 것이다. 미식가의 예를 들어보자. 맛있는 음식을 갈구하는 것은 신체적 욕구라기보다는 혼적인 것이다. 혼 속에는 쾌락과 함께 쾌락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입과 혀라는 신체기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후의 혼은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충족시켜 줄 신체기관이 없다. 그 때문에 혼은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을 걸어가는 듯한 갈증과 비슷한 아픔을 느낀다. 쾌락의 결핍에 처해 혼이 겪는 불타는 듯한 고통은 혼이 쾌락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기관을 잃은 데서 비롯한다. 신체기관이 없으면 충족시킬 수 없는 혼의 욕구는 혼을 고통스럽게 한다. 이 결핍의 갈증으로 불타오르는 상태는, 혼 스스로가 몸이 없으므로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지속된다. 이 상태에서 보내는 시간을 "욕망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장소"는 문제가 아니다.
사후, 혼의 세계에 들어 간 혼은 그 세계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 그 법칙들이 혼에 작용한다. 물질적인 것을 지향하는 혼의 경향이 어떤 방식으로 소멸에 이르는가는 이 작용에 달려 있다. 이 작용은 혼이 속해 있던 영역의 소재의 힘과 그 종류에 따라 다르다. 그렇지만 종류에 관계없이 이 작용에 의해 순화하고 정화하는 감화력이 혼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모든 반감작용이 혼 속에서 점점 공감의 힘으로 극복되고, 공감 그 자체도 최고의 정점에 오른다. 최고의 공감이란 혼이 혼계 전체에 융합되고 혼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때, 혼의 이기적 경향은 완전히 사라진다. 혼은 이미 물질적 감각적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여 영은 혼을 통하여 해방된다. 혼은 완전한 공감의 영역에서 혼계 전체와 하나가 될 때까지 위에서 말한 혼계의 영역을 통과하면서 정화되어 간다. 만일 영이 해탈의 마지막 순간에서 이 혼과 연결되어 있었다면, 그것은 영이 지상생활을 하는 동안 혼과 완전히 동화되었음을 뜻한다. 이 동화는 몸과의 동화보다 더욱 철저하다. 왜냐하면 영은 몸과 혼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었지만, 혼과의 결합은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혼은 영의 개인생활로서 영위된다. 그러므로 영은 부패하는 육체가 아니라 점차로 해탈해 가는 혼과 결합되어 있다.
영은 혼과 직접 결합되어 있으므로, 혼이 혼계 전체와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영은 혼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자신을 느낄 수 있다.
사후의 인간이 최초로 머무는 장소가 혼의 세계일 때, 그것을 "욕망의 장소"라 하는데, 혼의 이런 상황을 알고 그것을 교의 속에 도입한 다양한 종교체계들은 이 "욕망의 장소"를 "연옥", "정화의 불"이라 불렀다.
혼계의 가장 낮은 영역은 타오르는 욕망의 영역이다. 사후 이 영역을 통과하는 사이에 물질생활에 관련된 조잡하고 이기적인 욕망이 소멸된다. 왜냐하면 욕망을 아직 버리지 못한 혼은 그야말로 욕망을 통하여 그 영역의 작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생활에 대해 아직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이 작용의 출발점이다. 이 혼의 공감은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에만 작용하려 한다. 그 외에는 오로지 반감만이 작용하고 있고, 그 반감이 혼을 압도한다. 이 경우, 욕망은 혼계 속에서는 충족될 수 없는 물질적 기호를 갈구한다. 따라서 욕망은 이 충족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충족 불가능성에 의해 욕망의 불을 끄는 작용이기도 하다. 불타는 갈망은 점차 재로 변해 간다. 그리고 혼은 타는 목마름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에서, 목마름과 고뇌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지상생활에서는 욕망을 충족시킬 가능성이 있었고, 바로 그것 때문에 불타는 욕망의 고통이 일종의 환상의 베일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사후, "정화의 불" 속에서 이 고통은 완전히 베일을 벗고 정체를 드러낸다. 그 결핍을 철저히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혼은 완전히 어둠에 감싸여 있다. 물론 이런 상태에 빠지는 것은 지상생활에서 조잡한 물적 욕망에 물든 사람뿐이다. 이런 욕망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은 아무 어려움 없이 이 영역을 통과한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 아무런 친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생활에서 불타는 욕망과 동화하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정화될 필요성이 크면 클수록 혼은 장기간에 걸쳐 이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이 정화를 오로지 고뇌로 느끼는 감각계와 같은 의미에서 고뇌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후,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 있으므로, 혼 자신이 이런 정화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공감과 반감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혼계의 제2영역이다. 사후, 이와 똑같은 상태에 놓인 사람은 이 제2영역의 작용을 받는다. 인생의 외적 사정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감각의 일시적인 인상에 즐거움을 구하는 성향이 이런 상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상태에 놓인 혼의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이 영역에 오래 오래 머문다. 이런 사람은 번잡한 일상에 일일이 신경을 쓴다. 그러나 그때 공감이 특별히 하나의 사물에만 향하지 않으므로 어떤 인상도 특별한 영향을 끼치지 않고, 빨리 지나쳐 간다. 게다가 이러한 사소하고 가치 없는 것 이외는 모두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혼이 사후에 이런 상태에 계속 머물기는 하지만 이러한 혼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데 필요한 감각적 물리적 사물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런 상태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혼을 점유하고 있는 결핍은 고통이지만, 이러한 고통스런 상황이야말로 인간이 지상생활을 보낼 때 집착하던 환상을 깨트리는 도량이 된다.
세 번째로, 혼계 속에는 공감과 바램이 지배하는 상황이 관찰된다. 혼은 사후에 바램의 분위기를 가진 모든 것을 통해 이러한 제3영역의 작용을 받는다. 이 바램 또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므로 언젠가는 소멸된다.
혼계의 제4영역인 쾌감과 불쾌감의 영역은 혼에게 특별한 시련을 준다. 몸에 깃들어 있을 때, 혼은 몸에 관련된 모든 일에 관계한다. 쾌감과 불쾌감의 작용은 몸과 결합되어 있다. 쾌감, 불쾌감, 만족감, 불만은 모두 몸이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상생활에서 자신의 몸을 자신의 자아인 듯이 느낀다. 자기감정이라는 것은 이런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감각적 경향을 강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그 자기감정은 이러한 특징을 강화한다.
사후에는 자기감정의 대상이 되는 몸이 없다. 이 감정의 주인인 혼은 마치 자신의 내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을 가진다. 자신이 잃어버린 듯이 느끼는 그 감정이 그의 혼을 덮친다. 이 감정은 육체적인 것 속에 진정한 인간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할 수 있을 때까지 지속된다. 따라서 이 제4영역의 작용은 육체 즉 자아의 환상을 타파하는 데에 있다. 혼은 육체적 본성을 더 이상 본질적인 것으로 느끼지 않는다. 혼은 몸의 본성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고 순화된다. 이렇게 혼을 물질계에 강하게 구속해 온 것이 극복되었으므로 혼은 외부로 퍼져 나가는 공감의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혼은 자기를 벗어 던지고 혼계 전체 속으로 자신을 쏟아 넣는 것이다.
이상의 관련성에서 반드시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은, 자살자의 문제이다. 자살자는 특별한 방법으로 이 영역의 체험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부자연스러운 수단으로 육체를 버렸기 때문에, 육체에 관련된 모든 감정은 그대로 그의 혼에 남아 있다. 자연사의 경우는 노쇠와 함께 육체에 결합된 감정들도 부분적으로 소멸되어 간다. 자살자의 경우는 갑자기 구멍이 뚫려 버린 것 같은 감정이 가져다 주는 고뇌 외에도 자살의 원인이 된 충족되지 못한 욕망과 바램이 고뇌를 산출한다.
혼계의 제5단계는 혼빛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다른 것에 대한 공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 저급한 욕망만을 충족시키려 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즐거움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혼은 이 단계에 친숙해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연에 몰입하려는 태도도 만일 그것이 감각적 성질을 가진 것이었다면, 이 단계에서 정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체험에는 보다 고차적인 영적 성격이 내재한다. 그것은 자연의 사물이나 그 활동 속에 나타나는 영을 체험하려는 경우이다. 이러한 자연 감정은 그 사람의 영성을 개발하고, 혼 속에 영속적인 부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감각적 향수를 목적으로 하는 자연체험은 이 자연감정과는 다르다. 혼은, 물질을 향한 욕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자연 체험도 정화해야 한다. 또한 대부분 사람들은 물질적인 복지를 가져다 주는 제도들, 예를 들면 쾌적한 생활을 달성하기 위한 교육제도 속에 어떤 이상을 발견하려 하고 있다. 물론 이 사람들을 이기적인 충동에만 따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혼은 감각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한, 혼계의 제5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공감의 힘에 의해 정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감의 힘에는 그러한 외적 충족 수단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혼은 다른 수단으로 이 공감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수단이란, 혼이 혼계의 환경에 공감함으로 해서 실현되는, 공간 속으로 혼이 스스로를 유출시키는 것을 말한다.
종교활동을 통하여 물질생활의 향상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혼도 이러한 영역에서 정화된다. 그 사람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지상의 낙원이든, 천상의 낙원이든 상관없다. 어느 경우에도 이런 사람들의 혼은 "혼의 나라" 속에서 이 낙원을 만나게 되겠지만, 그것은 결국 이러한 낙원의 허망함을 깨닫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물론 이 제5영역에서 일어나는 정화에 대한 개개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예는 끝도 없이 들 수 있다.
제6영역은 활동하는 혼 힘의 영역이다. 이기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행위의 동기가 감각적 만족을 위한 사업욕은 이 영역에서 정화된다. 활동 의욕에 불타는 사람은 일견 이상주의자인 것처럼 보인다. 희생 정신으로 가득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동기의 깊은 곳에는 감각적 쾌락을 고양시키려는 이도가 있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재미만으로 학문에 몰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부류에 속한다. 예술이나 학문의 존재 이유가 그런 재미에 있다는 믿음이 그들을 물질계에 속박시키고 있는 것이다.
본래의 혼이 살아가는 장소인 제7영역은 감각적 물질적 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최종적으로 인간을 해방한다. 지금까지 모근 영역은 혼 속에 있는 그 영역과 동질적인 부분을 혼에서 가져 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부분은 감각 세계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사고방식인데, 이것이 여전히 영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매우 뛰어난 인물 가운데서도 물질계의 사상 이외의 것은 별로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 신념을 유물론 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신념은 타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제7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이 영역에서 혼은 진정한 현실 속에서는 유물론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얼음이 햇빛을 받아 녹듯이, 혼의 이러한 신념도 이 영역에서 사라진다. 혼은 혼계에 전부 흡수되고, 영은 모든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 영은 지금, 그 본래의 자리를 향해 비상한다. 그러한 영역에서만 영은 자기 본래의 환경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혼은 생전에 이 세상의 과제에 대응해 왔다. 그리고 사후, 그 과제 가운데서 영을 속박하던 것이 해소된다. 혼은 지상생활의 이러한 잔재를 모두 버림으로써 그 본래의 영역 속에 환원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혼계의 체험들과 그것을 체험하는 사후의 혼의 상태가 그 혼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몸 속에 깃들어 있을 때 그 몸과 동질화되어버린 부분을 빠짐없이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혼은 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 주어진 조건에 따라 이들 영역 가운데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기도 하고 짧게 머물기도 한다. 혼은 동질적인 영역에 그 동질성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계속 머문다. 동질적인 부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혼은 그 영향권을 통과한다. 여기서는 혼계의 기본성질과 혼계에서 혼의 활동의 일반적 특징만을 다루었으나, 이런 점에서는 영계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영계와 영계의 특성을 보다 상세히 논하려면 도저히 한 권의 책으로는 불가능하다. 물질계의 공간 관계나 시간 진행에 비교되는 것에 한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물질계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매우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거기에 관련된 주요 내용은《신비학 개론》에서 다루었다.
3. 영계
이제 영이 어떤 여행을 계속하는가를 고찰하기에 앞서, 영이 들어서는 그 영역을 관찰해 보아야겠다.
이 영역을 "영계"라 한다. 이 세계는 물질계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물질적 감각만을 믿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이 공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혼의 세계"를 고찰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 영역 또한 비유를 통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감각적 현실을 표현하는 대부분의 언어는 "영계"를 직접 표현히기에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암시의 차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아두자.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너무도 물질세계와 다르기 때문에 비유로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계에 상응하는 언어 수단이 영계를 표현하기에 얼마나 불완전한지 필자 또한 처절히 의식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여기서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은, 영계가 인간의 사고내용을 구성하는 소재와 완전히 똑같은 소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여기서 말하는 "소재" 또한 하나의 비유이다.) 단, 인간의 사고내용 속에 살아 있는 소재는 이 소재의 진정한 본성의 그림자이며 도식에 지나지 않는다. 벽에 투영된 사물의 그림자가 그 사물과 갖는 관계처럼, 인간의 머리에 떠오르는 사고내용은 이 사고내용에 댕으하는 "영계"의 존재이다. 영적 감각이 눈을 뜰 때, 마치 우리의 눈이 책상이나 의자를 보는 것처럼 이 사고내용의 본성을 비로소 지각할 수 있게 된다. 눈을 뜬 사람 주변을 사고의 본성이 감싼다. 우리의 눈은 호랑이를 보고, 감각적 지각과 연결된 사고는 호랑이의 지각과 관련된 사고내용을 그림이나 그림자처럼 본다. 영적 눈은 "영계" 속에서 호랑이에 관한 사고내용을 눈으로 지각한 호랑이의 물질적 형상과 똑같은 정도로 생생하게 본다. 여기서도 영계를 위한 비유가 통용된다. 수술로 눈을 뜬 사람 앞에 세계가 새로운 색깔과 빛으로 나타나듯이,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은 살아 움직이는 사고내용과 영들의 세계를 볼 수 있다.
물질계와 혼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나 생물의 영적인 원래의 모습이 이 세계 속에 나타난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이미 그 마음 속에 그 그림의 구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원래의 모습이라는 말이 비록 비유적 표현이라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모습이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서서히 생겨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여기서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영계" 속에 모든 사물의 원래의 상이 존재하고, 사물이나 생물의 물질적 존재 형태는 이 원래의 상에 대한 모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적 감각만을 믿는 사람은 이러한 원상의 세계를 부정할 것이다. 그리고 원상이란 오성이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을 비교하면서 만들어낸 추상 개념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고차적 세계를 지각하지 못하고 있고, 사상의 세계를 추상적인 도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그 자신이 개나 고양이를 지각하는 것과 같은 생생한 느낌으로 견령자가 영의 존재를 지각한다는 것도, 원상의 세계가 감각적 물질적 세계보다 훨씬 더 현실성을 띤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렇지만 영계의 광경은 처음에는 혼계보다도 혼란스럽게 보인다, 왜냐하면 원상의 진실된 모습은 그 감각적 모상(模像)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원상의 그림자인 추상적 사고내용 또한 원상과는 너무도 다르다.
영계에서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고, 그칠 줄 모르는 창조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물질계에 존재하는 휴지나 정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조하는 본성이 원상이기 때문이다. 원상은 물질계와 혼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다. 원상의 형태는 급속히 번화한다. 어떤 원상에도 무수한 특수형태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 특수형태를 자기 자신 속에서 뿜언내다. 원상은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다가도 금방 다른 형태를 창출한다. 그리고 어떤 원상과 다른 원상 사이에는 많건 적건 친밀한 관계가 있다. 그것들은 고립하여 작용하지 않는다. 창조활동을 위해 서로 협력한다. 혼계와 물질계 속에 특정한 존재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무수한 원상이 공동 작업을 벌여야 한다.
"영계" 속에는 "영시" 되는 것 외에도 "영청"의 대상으로서 고찰되어야 할 다른 원상이 존재한다. "견령자"가 혼계에서 영계로 올라가면, 이윽고 그 지각된 원상은 울려 퍼지게 된다. 이 "울림"은 순수하게 영적인 사실이다. 그것은 물질계의 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은 소리의 바다 속에 있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 음향, 이 영적 울림 속에서 영계의 정령들이 자기를 이야기한다. 이 음향의 화성과 리들과 선율의 어울림 속에서 그들 존재의 원칙, 상호관계, 친화성이 명료히 드러난다. 물질계 속에서는 오성이 법칙이나 이념으로 인정하는 것이 "영적 귀"에는 영적 음악으로 표현된다.(피타고라스 학파가 영계의 이러한 지각내용을 "천체음악"이라 이름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영적 귀"를 가진 자에게 "천체음악"은 추상적이거나 우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현실이다.) 이 "영적 음악"에 관한 명확한 개념을 얻으려면 "육체의 귀"로 듣는 감각적 음악에 대한 모든 관념을 버려야 한다. 여기서는 그야말로 "영적 지각"이 문제이며, "감각적 귀"에게는 침묵에 지나지 않는 지각이 문제가 되므로. 그러나 "영계"를 간단히 기술할 필요성에 따라 앞으로는 "영적 음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따라서, "형상"으로서 "빛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동시에 "음향을 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색과 빛을 지각할 때, 영적인 소리가 동시에 들려온다. 여러 색이 결합되면서 동시에 화음과 선율이 들려오는 것이다. 또한 음향이 지배하는 곳에서도 "영적 눈"의 지각활동은 그치는 법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이런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울림에는 늘 빛남이 댕으한다. 따라서 "원상"에 대해 말할 때는 "원음"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비유적으로 "영적 미각"과 같은 지각내용에 대해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일들을 깊이 고찰할 수는 없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계"란 무엇인가에 대해, 영계 전체 속에서 추출된 몇 종류의 지각내용을 기반으로 하나의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당야한 종류의 원상을 서로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영계"에서도 올바르게 위치를 설정할 수 있도록 특정한 단계 또는 영역을 분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개의 영역은 "혼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층을 이루고 뚜렷한 상하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침투하고 뒤섞여 있다. 최초의 영역에는 물질계 속의 무생물의 원상이 존재하고 있다. 광물의 원상, 나아가 식물의 원상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경우는 생명이 고려되지 않는 순수 물질적인 식물의 원상이다. 여기서 동물이나 인간의 물질적 형태와도 만난다. 이 영역에 존재하는 것은 앞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 설명이 다 된 것은 아니다. 다만 명백한 예를 들어 설명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역이 "영계"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지구상의 육지에 비교될 수 있는 "영계"의 대륙 부분이다. 이 영역과 물질계의 관계는 비유적으로 밖에 말할 수 없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함으로써 하나의 관념을 얻을 수 있다. 어떤 한정된 공간에 모든 종류의 물체가 들어 있다고 하자. 지금 마음 속에서 이러한 물체는 지워버리고, 그것들이 점령하는 공간에 그러한 형태가 남긴 허공을 생각해 보자. 한편, 그때까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 부분이 제거된 물체들과 다양한 관계를 가지는 모든 형태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생각해 보자.
원상 세계의 최하위 영역은 거의 이런 양성을 띠고 있다. 거기에는 물질계 속에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사물이나 생물이 "허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허공을 둘러싸는 공간 속에서는 원상(그리고 "영적 음악")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물질계의 이러한 허공에는 물질 소재가 가득 차 있었다. 눈과 영적 눈을 동시에 작용시키는 공간을 관찰한다면 물체의 존재와 동시에 물체와 물체 사이에 창조하는 원상이 활발히 움직이는 양상도 보게 될 것이다.
"영계"의 제2영역에는 생명의 원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은 이 영역 속에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액체성분으로서 영계의 모든 곳으로 흘러 마치 혈액처럼 모든 곳에 이른다. 그것은 지구의 바다나 호수, 강과 같은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그 분포 방식을 보면 바다나 강보다는 동물의 몸에 흐르는 혈액에 가깝다. 사고내용을 소재로 한 유동하는 생명, 우리는 "영계"의 이 제2영역을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유동하는 생명이라는 활동영역 속에 물질적 현실에서 생명 있는 존재로 나타나는 모든 것의 근원적 창조력이 존재하고 있다. 이 영역 속에서 일체의 생명의 하나의 통일체이며, 인간 생명도 그 외의 일체의 생명과 동질적이다.
"영계"의 제3영역은 일체의 혼을 가진 것들의 원상이 문제가 된다. 이 영역은 앞서 말한 두 개의 영역보다 더 섬세하다. 비유적으로 그것을 "영계"의 대기권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물질계나 혼계에서 혼의 모든 활동은 이 영역에 그 영적 댕으물을 가지고 있다. 일체의 감정, 본능, 정념은 영적인 존재방식으로 이 영역 내에 나타난다. 이 영계의 대기권에서 일어나는 기상상황은 물질계나 혼계에서 느끼는 생물의 고통과 기쁨에 상응한다. 인간의 혼이 가지고 있는 동경은 미풍처럼 나타난다. 발작적인 격정은 폭풍처럼 나타난다. 이 영역의 관찰에 정통한 사람은 어떤 생명체의 울부짖음도 깊이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번개와 천둥을 동반하는 격렬한 뇌우를 본다고 하자. 그럴 경우, 사태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면, 지상의 전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념이 이러한 "영적 악천후"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4영역의 원상은 물질계와 혼계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이 원상은 어떤 점에서 하부 3영역의 원상을 통솔하고, 상호 연계를 가능하게 하는 본성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위의 3영역의 원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구분하는 일에 종사한다. 때문에 이 영역은 하위의 3역역보다도 포괄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제5, 제6, 제7영역은 지금까지 말한 영역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이러한 영역의 본성들은 하위 영역들의 원상에 원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원상의 창조력 그 자체가 그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 이 고차적 영역으로 올라 간 사람은 우리 세계의 근저에 존재하는 "의도"(이 용어도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언어표현상의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요하였다.)를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서도 사고존재로서 다양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 원상이, 살아있는 배아로 존재한다. 이 배아가 하위의 영역으로 옮겨가면 부풀어올라 다양한 형태를 드러낸다. 물질계에서 인간정신이 가지는 창조성의 원천은 이념이다. 그 이념은 고차 영역에서 이러한 씨앗 상태로 존재하는 사고의 그림자이며 잔영이다.
"영적 귀"를 가진 관찰자가 "영계"를 저차원 영역에서 고차원 영역으로 상승하면, 어떻게 음향이 "영적 언어"로 전환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영적 언어"를 듣게 되고, 사물과 생물의 본성을 음악으로서 뿐만 아니라 "언어"로서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본성은 영학에서 말하는 자신들의 "영원한 이름"을 그에게 고한다.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사고의 씨앗이 합성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고체계의 성분으로부터 배아가 추출된다. 그리고 이 배아가 본래의 생명의 핵을 감싸고 있다. 이 생명의 핵과 함께, 우리는 "세 가지 세계"의 한계에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핵은 세 가지 세계보다도 훨씬 더 고차적 세계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인간을 그 구성부분에 따라 기술할 때, 인간 생명의 핵을 "생명령" 또는 "영 인간"으로 불렸다. 인간 이외의 세계(우주) 존재에게도 같은 생명 핵이 존재한다. 이러한 핵은 보다 고차적 세계에서 유래하고, 자기의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의 세계로 옮겨간 것이다.
이제 죽은 다음, 다시 태어나기까지 인간의 영이 영계에서 어떤 편력을 하는지 말해야겠다. 그러면 "영계"의 상태와 특징이 다시 한번 명료해질 것이다.
4. 사후의 영
인간의 영은 새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혼계"를 편력하고 "영계"로 들어가 새로운 육체를 얻을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왜 이런 "영계"에 머무는가를 이해하려면 윤회전생의 의미가 올바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물질계에서 창조적 활동을 한다. 그는 물질계의 영적 존재로서 창조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의 영이 고안하여 형성한 것을 물질 형태와 소재와 그 힘 속에 새겨 넣는다. 그는 영계의 사자로서 영을 물질계에 동화시킨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물질계에 작용할 수 있다. 그는 육체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야 물체를 통하여 물체에 작용할 수 있고, 물체도 그에게 작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육체적 본성에 작용하는 것은 영이다. 물질계에서 작용하려는 의도, 방향성 모두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영이 육체 속에서 작용하는 한 영의 진정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다. 물질존재의 베일을 통하여 빛을 발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인간의 사상생활은 영계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물질적 존재 속에서 행해지는 사상생활은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의 사상생활은 그것이 본래 속해 있는 영적 존재의 영상이며 반영이다.
이렇게 물질생활을 하는 영은 육체를 기초로 하여 지상의 물체 세계와 서로 작용한다. 윤회전생을 거듭하면서 물체 세계에 작용을 가하는 것이 인간의 영이 가진 사명의 하나라 하더라도, 육체 존재에 머무는 한 인간의 영은 그 사명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주택 설계가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과제와 의도와 목표는 이 세상에 태어난 후에 획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계가 건축가의 사무실에서 완성되듯이, 지상의 생활 목표와 의도는 "영들의 나라에서" 형성된 것이다.
인간의 영은 죽을 때마다 이 영들의 나라에서 살아가야 한다. 거기서 새로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할 일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벽돌이나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건축학이나 그 외의 법칙에 따라 설계도를 작성하듯이, 인간의 창조활동의 건축가인 영 또는 고차의 자아는 "영계" 속에서 영계의 법칙에 따라 능력을 보유하고 목표를 설정하여 지상세계를 위해 일한다. 육체에 깃든 인간의 영은 반복해서 자신의 세계(영계)에 머물지 않으면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영적 존재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이 세계의 무대에서 물질의 성질과 힘을 배운다. 이 무대 위에서 창조활동을 하면서, 물질계가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경험을 축적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구체화하기 위한 소재의 성질을 배운다. 사상이나 이념 그 자체는 소재에서 흡수될 수 없다. 이렇게 지상세계는 창조의 장인 동시에 학습의 장이기도 하다. "영계"에서는 이 학습의 성과가 영의 활발한 능력으로 변화된다. 문제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 비교를 계속해 보자. 건축가는 설계를 한다. 이 설계가 시공으로 옮겨지는 동안 그는 수많은 경험을 한다. 이 모든 경험은 그의 능력을 고양시킨다. 그가 다음 설계를 행할 때, 이 모든 경험이 활용된다. 때문에 이 제2의 설계는 제1의 것과 비교할 때, 시공 때에 습득한 풍성한 경험을 나타낸다. 똑같은 일이 윤회전생을 거듭하는 인생의 과정에 대해서도 일어난다. 죽음에서 다음 생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영은 자기 고유의 영역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동안은 영적 생활 속에 몰두할 수 있다. 영은 몸적 본성에서 해방되어 모든 방향으로 자기를 형성해 나가고, 그리고 생전의 지상 경험들을 이 형성 속에 작용시킨다. 때문에 사후의 영은 늘 자신의 과제를 달성해야 할 지상으로 향하고 있으며, 자신의 활동영역이 될 지구의 필연적 발전과정을 따라 간다. 영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마다 그 시점의 주변 환경에 적응하여 힘을 다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는다.
이와 같은 서술은 인간의 윤회전생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과 이 관념은 결코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사정에 따라서는 전세보다도 현생이 더 불완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윤회전생을 거듭하는 인간에게 이러한 불규칙적인 일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조정된다.
"영계"에서 영의 성숙은 그런 영역들의 사정에 통달함으로써 달성된다. 영 고유의 활동은 자신에게 알맞은 방식으로 여러 영역에서 경험을 쌓아 가는 동안 그 영역들의 활동과 융합한다. 영은 그때마다 그런 영역의 각기 다른 성격을 익힌다. 그 결과, 이러한 영역의 본질이 영의 본질 속에 침투되므로, 영의 본질은 이러한 영역의 본질에 의해 강화된다. 그래서 지상에서 새로운 활약이 가능한 것이다.
"영계"의 제1영역에서 인간은 사물의 원상에 둘러싸인다. 이 세상의 생활에서는 사고를 통하여 이러한 원상의 그림자만을 알 수 있다. 지상에서는 단순히 상상만 가능했던 것이 이 영역에서는 실제로 체험된다. 이 영역에서 인간은 사고내용 속을 편력한다. 그러나 그 사고내용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살아있는 존재이다. 지상생활에서는 감각으로 지각되는 것이 여기서는 사고내용의 형식으로 그에게 작용해 온다. 게다가 그 사고내용은 사물의 배후에 숨은 그림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산출하는 생명으로 가득 찬 현실로 다가온다. 간단히 말해 인간은 지상의 사물을 형성시키는 사상의 공장 같은 곳에 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모든 것이 생명으로 가득 찬 활동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상체계는 창조하고 형성하는 살아 있는 존재의 세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상에서 체험한 것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본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감각적 사물을 현실로 체험하는 것처럼, 지금 영으로서의 인간은 영을 형성하는 힘들을 하나의 현실로 체험한다. 영계의 사고 존재 속에는 그 자신의 육체적 본성에 해당하는 사고내용 또한 존재한다. 우리는 이 육체적 본성을 떠난 자신을 느낀다. 영적 존재만이 자신에게 속해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죽은 몸을 물질로 보지 않고, 마치 기억을 떠올리듯이 사고 존재로 볼 때, 그 몸은 우리 눈앞에 명백히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육체를 외계에 속하는 물질로 고찰하는 법을 배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육체적 본성을 자아와 친화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외계의 다른 사물과 구별하려 하지 않게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던 육체를 포함한 외계 전체에서 어떤 통일성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살아가던 신체도 주위 세계와 하나로 융합된다. 이렇게 물질적 신체적 현실의 원상들을, 그 자신이 거기에 속해 있던 통일체로 바라봄으로써 사람은 환경과 자신의 친화와 통일을 배워 간다. 우리는 자신을 향하여, 지금 내 주변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예전에는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것은 고대 인도의 베단타의 예지의 근본사상과 같다. "현자"는 이 세상 생활에서 다른 사람이 사후에나 체험하는 삼라만상과 나 자신이 동일하다는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다. 이 사상은, 지상에서는 사고생활의 노력목표이지만 "영들의 세계"에서는 영적 경험을 통하여 뚜렷이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계 속에서 자신이 본질적으로 바로 거기에 속해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자신이 영들 속의 영이며, 원령(原靈)의 하나임을 지각하고, 그리고 "나는 원령이다"라는 원령의 말을 듣는다.(베단타의 예지가 말하는 "나는 브라흐만이다"라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삼라만상을 가능하게 하는 그 원 존재의 한 갈래임을 뜻한다.)
지상생활에서는 모든 예지의 목표가 그림자 같은 사상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그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영적 존재에게 그것이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지상생활 속에서 사고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영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때, 지상생활의 상황을 고차적 견지에서, 즉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때 "영계"의 최하위 영역에 있는 인간은 물질적 신체적 현실과 직접 관계를 가지면서 지상적 상황과 마주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족이나 민족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그는 정해진 토지에서 생활한다. 인간의 지상생활은 이러한 조건들로 규정된다. 이 세상의 상황이 명하는 대로 친구를 사귀고 특정 직업에 종사한다. 이 모든 것에 의해 인간의 생활 상황이 규정된다. 이 모든 것은 "영계"의 최초 영역에서 살아있는 사고 존재로 나탄나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을 일정한 방식으로 활동하는 영의 입장에서 다시 체험하게 된다. 그가 품었던 가족 사랑이나 우정은 그의 내면에서 되살아나고 그 능력이 강화된다. 인간 정신의 내부에서 가족 사랑이나 우정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강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 능력에 있어서 보다 완전한 인간이 되어 지상에 다시 태어날 것이다.
"영계"의 최하위 영역에서 이룰 수 있는 성과는 지상생활의 일상과 관련된 것이다. 오로지 일상적 상황에 몰두해 온 영적 부분은 죽음에서 재생에 이르는 영계생활의 주요 기간 중에 이 영역에 친근감을 가지게 된다.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 온 사람들은 영계에서 다시 만난다. 육체를 통하여 획득한 모든 것이 혼에서 떨어져 나가듯이, 지상생활에서 혼과 혼을 하나로 이어주던 인연도 물질계에서만 의미와 효력을 가진 제약들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나 사후, 영계에서도 지상생활에서 혼과 혼을 이어주던 관련성은 존속된다. 물질적 상황을 표현하는 말은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겠지만, 지상에서 함께 살아 온 혼들은 영계에서 다시 만나 예전의 공동생활을 영계에 맞는 방식으로 계속해 나간다.
제2영역은 지상의 일반적인 생명 현상이 사고 존재의 형태를 띠고 "영계"의 액체성분으로 흐르는 장소이다. 육체의 눈으로 세계를 관찰하면 생명은 생물체의 개별적 존재와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영계에 이르면 생명은 개개의 생물체에서 분리되어 생명의 피로서 영계 전체를 순환한다. 그것은 영계의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통일체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 존재를 언뜻 비쳐나는 정도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인식을 통해 우리는 이 세계의 전일성, 통일성, 조화에 대해 경외감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종교 생활도 여기서 유래한다. 존재의 포괄적 의미가 무상한 개개의 사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상한 것을 영원한 조화의 비유이며 영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전체적 조화성, 통일성을 경외감으로 우러러 보며, 그 조화와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종교적 제사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언뜻 비쳐나는 영상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고존재로서 그 현실적 형상이 나타난다. 비로소 우리는 지상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 통일성과 진실로 하나가 된다. 종교생활과 관련된 모든 성과가 이 영역 속에서 나타난다. 영적 체험을 통해 개인의 운명과 공동체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운다. 자신을 전체의 일원으로 인식하는 능력은 이 영역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종교적 감정들, 고귀한 도덕을 갈구하는 순수한 노력은, 영계의 중간 상태에 속하는 이 시기의 이 영역에서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인간은 이 방향을 따라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켜 가면서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제1영역에서 인간은 생전에 이 세상의 인연으로 맺어졌던 혼들과 함께 하지만, 제2영역에서는 같은 신념 하에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모든 혼들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그가 이미 통과한 영역의 영적 체험은 다음 영역에서도 존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2, 제3의 영역에 들어간 다음에도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인연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모든 영역은 서로 침투되어 있다. 어떤 방법으로 새로운 영역에 들어왔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영적 체험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내적 능력을 얻었기 때문에 여태 지각할 수 없었던 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영계"의 제3영역은 혼계의 원상을 포함하고 있다. 혼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 제3영역 속에서 살아 있는 사고존재로 나타난다. 욕망, 바램, 감정 등의 원상이 여기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영역에서는 어떤 종류의 이기적 욕구도 그 혼에 부착되어 있지 않다. 제2영역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제3영역에서도 모든 욕망과 바램, 모든 쾌감과 불쾌감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타인의 욕망, 바램과 자신의 욕망, 바램이 구별되지 않는다. 대기가 지구를 감싸고 있듯이 모든 존재의 감정과 정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공통 세계이다. 이 영역은 "영계"의 대기이다. 여기서는 지상 생활에서 사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무사무욕의 태도로 봉사할 때의 모든 행위가 결실을 맺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봉사에 의해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영계"의 제3영역의 영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위대한 자선가, 헌신적 인물, 공동체에 큰 봉사를 한 인물은 전생에서 이 영역과 특별한 친화관계를 만들었고, 이 영역에서 그런 능력을 획득한 사람들이다.
"영계"의 3영역은 그 아래에 존재하는 혼계와 물질계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두 세계 형태와 혼의 원상인 살아있는 사고존재가 이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순수 영계"는 제4영역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이 영역 또한 아직 완전한 이미로 그렇지 않다. 제4영역은 하위의 3영역과 구별되는 데, 그것은 3영역에서 만나는 것들이 인간이 물질계와 혼계에 간섭하기 이전에 이미 이 두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는 사물이나 생물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은 처음부터 이세상의 사물이나 생물과 연관되어 있다. 이 세상의 무상한 사물은 인간의 눈을 영원한 세계의 근거로 향하게 한다. 인간이 진심으로 애정을 기울이는 부모형제들은 그 인간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술, 과학, 기술, 국가 등 인간 정신의 소산들은 모두 인간에 의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여 없이는 인간 정신의 물질적 모상은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인간적 창조물의 원상이 "영계"의 제4영역에서 발견된다.
이 세상에서 획득한 과학적 성과, 예술의 착상과 형식, 기술은 이 제4영역의 결실이다. 예술가, 학자, 대발명가는 "영계"에 머물고 있을 동안 이 영역에서 창조활동의 힘을 받아들여, 소질을 고양시킨 후 지상에 다시 태어나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계"의 제4영역이 특별히 뛰어난 인물에게만 의미 있는 곳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모든 인간에게 의미를 가진다. 일상적 생활, 바램, 의욕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이 노력한 모든 것은 이 영역에서 비롯한다. 만일 인간이 죽음에서 재생에 이르는 사이에 이 영역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좁은 개인적 생활 공간을 넘어 보편적 · 인간적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영역을 "순수 영계"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왜냐하면, 예전에 살았던 시대의 문화상황이 사후의 이 영역에서 그의 영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 영역에서는 자신의 소질이나 자신이 속하는 민족, 국가가 이룩한 업적만을 누릴 수 있다.
"영계"의 가장 고차적 영역에 이르면 인간의 영은 어떠한 지상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인간의 영은 "순수 영계"에 이르렀을 때, 영계가 지상의 생활을 위해 세운 목표나 의도가 무엇인지를 체험할 수 있다. 지상에서 이미 실현된 것은 그 어떤 것도 최고의 목표와 의도의 무력한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결정체, 수목, 동물의 형상이라도,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인간정신의 창조물이라 해도 모두 영이 의도하는 것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거듭 이 세상에 태어나 완전한 의도와 목표의 불완전한 모조품과 관계한다. 나아가 그 인간 또한 수많은 윤회전생의 한 부분적 삶만으로는 영계가 의도한 인간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영계"에 있어서 인간의 본래적인 영적 모습은 죽음과 탄생의 중간 상태에서 "영계"의 제5영역까지 상승했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이 영역의 인간이야말로 본래의 인간 그 자체이다. 그것은 윤회전생을 거듭하면서 그때마다 외적 존재로 현현하는 자아의 진정한 모습이다. 제5영역의 진정한 자아는 모든 방향으로 마음껏 자유를 구가한다. 늘 새로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 자아는 태어날 때마다 반드시 "영계"의 하위 영역에서 획득한 능력을 가지고 나타나며, 그것으로 인하여 전생에서 얻은 성과를 다음 인생 속에 이입시킬 수 있다. 자아는 지금까지 축적한 삶의 성과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영계"의 제5영역을 살아가는 자아는 의도와 목표의 왕국에 있는 셈이다. 건축가가 작업현장에서 드러난 결함을 반성하고, 다음 작업에서 보다 완전을 기하듯이, 제5영역의 자아는 전생의 성과 가운데서 물질계와 혼계의 불완전한 부분으르 제거하고, 그 경험을 통해 지금 자아가 살아가는 "영계"의 의도를 성숙시킨다.
자아가 이 영역에서 퍼 올리는 힘은 자아가 생전에 목표의 세계 속에 가져오기에 합당한 성과를 얼마나 이룩하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생전에 활발한 사상생활과 통찰을 행하고 사랑에 넘친 행동으로 영의 의도를 실현시키려 했다면, 그 자아는 이 영역에서 많은 것을 얻을 권리가 있다. 일상적 상황 속에 매몰되어 오로지 무상한 사물 속에서만 살았던 자아는 영원한 우주질서의 의도에 어울리는 역할을 다할 씨앗을 뿌리지 못한 셈이다. 단지 일상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살아 온 소수의 자아만이 "영계"의 상위 영역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지상의 명성"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좁은 생활공간 속의 사소한 일들 속에서 생명의 영원한 생성발전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영역에서는 이 세상과 평가 기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이 제5영역과 동질적인 영성을 조금만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내세와 운명(카르마) 속에 이 결함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 올 충동이 일어난다. 그 결과, 다음 인생에서는 고통스런 삶이 주어진다. 그가 아무리 고통스러워 한다 해도 "영계"의 이 영역에 있을 때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운명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제5영역의 인간은 본래의 자아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 세상에서 그를 감싸고 있던 저차원의 모든 요소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윤회전생을 통하여 늘 동일한 존재였고, 앞으로도 동일한 존재일 것이다. 그는 지상생활을 위해 스스로가 자아 속에 내포시킨 의도에 다라 살아가고 있다. 그는 자신이 과거를 회고하며, 지금까지 체험해 온 미래에 실현될 의도 속에 포함될 것임을 느낀다. 지금까지 살아 온 기억과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예견적 전망이 일순 명백해진다.
본서에서 "영적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이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제각기 발전 단계에 댕으하여 나름대로 적합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여 영적 자아는 성숙하고, 자신의 새로운 인생에서 지상의 현실 속에 영적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영계"의 제영역에 머무는 "영적 자아"는 영계를 완전히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하면, 이 영계에서 진정한 고향을 갈구할 것이다. 영적 생활은 지상의 인간에게 물질적 현실 생활이 그러했듯이, 영적 자아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그때부터 영계의 관점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후의 지상생활의 기준이 된다. 자아가 스스로를 신적이며 우주질서의 한 갈래라고 느끼는 순간, 이미 지상의 제약과 법칙이 자아의 내적 본성을 침범할 수 없게 된다. 자아가 활동하는 힘은 모두 영계에서 온다. 또한 영계는 하나의 통일체이므로, 영계에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것이 어떻게 과거에 창조를 행했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영원한 것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의 방향성을 결정할 수 있다. 과거로 향하는 눈은 끝없이 확대된다. 이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내세에 수행할 목표를 스스로 설정한다. 그는 자신의 미래에 영향을 주고, 미래가 영적 의미에서 진실한 길을 걸을 수 있게 한다. 이런 사람은 죽음과 생의 중간상태에서 신적 예지를 직접 볼 수 있는 숭고한 신령들 앞에 서 있다. 그는 이러한 숭고한 영들조차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서 있는 것이다.
"영계"의 제6영역의 모든 행위를 우주의 진정한 실재에 맞게 해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이 우주질서의 순리에 맞게 이루어지기를 바랄 것이므로.
"영계"의 제7영역은 인간을 "세 가지 세계"의 긑까지 이끌어 간다. 인간은 이 영역에서 한층 고차적 세계에서 우주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세 가지 세계에 이식된 "생명 핵"과 마주하게 된다. 세 가지 세계의 긑에 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명 핵을 인식한다. 그렇게 하여 세 가지 세계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리고, 그는 이러한 세계의 모든 흐름과 의미를 꿰뚫어 본다. 이 세상의 보통 생활 속에서는 영계에서 이런 체험을 가진 혼의 능력은 의식되지 않는다. 이러한 능력은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물질계의 의식을 성립시키는 육체의 기관들을 작동시키고 있다. 왜 이러한 능력이 물질계에서 지각될 수 없는가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눈은 자신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눈에는 다른 것을 가시화하는 능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이 얼마나 전생의 성과를 나타내는가를 알 수 없는 것은, 지상생활 그 자체에 내재하는 관점이 이런 이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왜 지상 생활이 고통스럽고 불완전한 것인가는 이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상생활의 바깥에 서면, 이 모든 지상생활의 고통과 불완전성이 전생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본서의 마지막 장에서 다룰 인식의 좁은 길을 걸었을 때, 혼은 육체생활의 조건에서 해방된다. 그것을 통하여 혼은 죽음과 탄생 사이에서 체험하는 일들을 하나의 상으로 지각할 수 있다. 이러한 지각이 지금 여기서 논하는 "영계"의 진실을 기술하게 해주었다. 혼의 전체적인 존재방식이 육체에 깃들 때와 순수한 영적 체험에 깃들 때와는 다르다. 이것을 잊으면 본서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5. 물질계 및 혼계, 영계와 물질계의 관계
혼계와 영계의 구성체는 외적인 지각 대상이 아니다. 감각적 지각 대상은 혼계, 영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인간은 신체적 존재일 때도 동시에 이 세 가지 세계 속에 있다. 그는 감각적 세계의 사물을 지각하고, 그 사물에 작용을 가한다. 혼계의 구성체는 공감과 반감을 통하여 그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리고 그 혼도 애착과 반발, 바램과 욕망을 통하여 혼계 속에 파문을 던진다. 한편, 사물의 영적 본성은 그의 사고세계 속에 자신을 비추어내고 있고, 그 자신도 사고하는 영적 존재로서 영계의 시민이며 영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와 동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감각적 세계는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전체적 환경 가운데서 이 부분만이 독립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이 부분만이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고, 혼적이며 영적 부분은 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면 위의 얼음 덩어리가 물과 같은 성분이면서도 물로부터 독립되어 있듯이, 감각적 사물도 그 주위의 혼계, 영계와 같은 소재로 되어 있지만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특정한 성질에 의해 그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감각적 사물이란 농축된 혼적, 영적 존재이며, 그 농축이 있었기에 감각이 그것을 지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얼음이 물의 한 존재형식이듯이, 감각적 사물도 혼적 영적 구성체의 한 존재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물이 얼음으로 바뀌듯이, 영계가 혼계로, 그리고 이 두 세계가 감각세계로 바뀔 가능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관점에 서면 어떻게 인간이 감각적 사물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지도 밝혀진다.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돌에 대한 사고내용과 그 돌 자체가 어떤 관계를 갖는가, 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영적 눈으로 외적 자연의 내부까지 깊이 통찰할 수 있다면, 이 의문은 저절로 풀릴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체계와 자연의 구조, 조직과의 조화가 직관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는 이 조화를 아름다운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에게 천문학을 배우라 명하는 신의 목소리가 우주 속에 기록되어 있다.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개념과 감각이 천체와 천체의 위치 관련을 알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그 사링 자체에 깃들어 있다."
감각 세계의 사물들이 농축된 영적 본성이기 때문에 사고내용을 통하여 자신을 고양시켜 영적 본성을 직관하는 사람은 사고를 통해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 감각적 사물은 영계에서 비롯한 영적 본성의 다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사물에 대한 사고내용을 만드는 것은 그의 내면이 이 사물의 감각적 형식으로부터 그 영적 원상 쪽으로 방향을 틀었음을 나타내는 일이다. 사고를 통하여 사물을 이해하는 작업은 고체를 가열하여 액체로 바꾸어 화학적 분석이 가능하게 하는 일과 비교될 수 있겠다.
감각적 세계의 영적 원상은 영계의 다양한 영역에 나타난다. 이러한 원상은 제5, 제6, 제7영역에서는 살아있는 배아로 존재할 따름이지만, 하위의 4영역에서는 영적 구성체로 자기를 형성한다. 사고를 통해 감각적 사물을 이해하는 인간의 영은 이러한 영적 구성체의 영상을 지각한다. 이 구성체가 어떻게 자신을 농축시켜 감각적 세계로 나아가는지, 그것은 외계를 영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외계는 인간의 감각적 직관에 의해 네 가지 단계로 나뉘어진다. 광물적, 식물적, 동물적, 인간적 단계이다. 광물계는 감각에 의해 지각되고, 사고에 의해 이해된다. 광물에 대해 사고할 때, 우리는 감각적 사물이면서 사고내용이라는 이중적 존재에 관계한다. 그 감각적 사물을 농축된 사고존재로 생각하면 된다. 광물적 존재는 다른 것에 대해 외적인 방식으로 작용한다. 다른 것에 부딪쳐서 그것을 움직인다. 또는 그것을 가열하고 거기에 빛을 비추고, 그것을 용해하는 등. 이러한 외적 작용 방식은 사고내용을 통하여 표현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 광물이 외적 법칙에 따라 상호 작용하는가에 대한 사고내용을 만들 수 있다. 개개의 사고내용이 모여지거, 광물계 전체를 사고의 대상으로 할 때, 이 사고 상은 광물적 감각세계 전체를 나타내는 원상의 그림자가 된다. 그것은 영계에서 하나의 전체로 나타난다.
식물계는 사물이 사물에 가하는 외적 작용 외에, 자라고 번식하는 현상이 덧붙여진다. 식물은 자신을 기르고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생산한다. 광물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생명이 부가되어 있다. 이 사물을 솔직한 태도로 바라보면 하나의 지평이 열린다. 식물은 자기 자신에게 살아 있는 형태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산출한 존재를 살아있는 형태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광물계의 가스나 유동체처럼 특정한 형태를 가지지 않는 것과 살아 있는 식물 형태의 중간쯤에 위치한 것이 바로 광물의 결정체이다. 우리는 광물계의 결정체 속에서, 어떻게 특정 형태를 갖지 않는 광물계에서 식물계의 살아 있는 형성능력으로 전환되는지, 그 과정을 밝혀내야 한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과정으로 나타나는 광물계나 식물계의 형성은 영계의 상위 3영역의 영적 배아가 하위 영역의 영적 모습을 형성해 가는 순수 영적 과정이 감각적으로 농축된 것이다. 결정 과정에 댕으하는 영계의 원상은 형태가 없는 영적 배아가 남김없이 영적 모습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농축되어 감각이 그 결과를 지각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거기에 감각세계의 광물 결정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식물의 생활 속에도 영적 배아가 형태로 변한 영적 모습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영적 모습 속에는 여전히 살아있는 형성능력이 남아 있다. 결정체의 경우, 영적 배아는 그 결정화 과정 속에서 형성능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영적 배아는 영적 모습 속에서 그 생명을 소진해버렸다. 그러나 식물은 형태를 가질 뿐만 아니라, 형성능력도 가지고 있다. 영계의 상위 영역에 있는 영적 배아의 성질이 여전히 식물의 생활 속에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원 존재(영적 배아)가 가진 식물형태라는 형식 외에도, 상위 영역의 특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생산적 형식이 형태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형태 속에 생명을 소진해버린 형식을 통해서 감각적으로 식물을 지각한다. 이 형태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형성하는 본성들은 감각적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식물 내에 존재하고 있다. 작은 백합꽃을 보고 잠시 후 좀 더 큰 백합을 보았다고 해도, 우리의 눈은 처음 본 작은 꽃과 큰 꽃의 형성력을 볼 수 없다. 이 형성력의 본성들은 식물계 속에서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영적 배아는 형성계에 작용하므로 지하에 숨어 있는 셈이다. 여기서 영학에서 말하는 원소계가 문제로 부각된다. 아직 형태가 없는 원 형식을 제1원소계라 한다면, 식물 성장의 기술자로 활동하는 눈에 보이는 힘의 본성들은 제2원소가 될 것이다.
동물계에는 성장과 번식의 능력 외에 감각과 충동이 부가된다. 감각과 충동은 혼계의 표현이다. 이 존재는 혼계에서 인상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혼계에 작용하기도 한다. 동물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감각이나 충동은 모두 동물의 혼 저 깊은 곳에서 이끌려 나온다. 형태는 감각이나 충동보다도 지속적이다. 변화하는 식물형태와 고정된 결정 형식의 관계는 감각생활과 보다 지속적인 생명형태의 관계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겠다. 식물은 형태를 형성하는 힘 속에 매몰되어 있다. 식물은 성장을 계속하는 한 늘 새로운 형태가 부가된다. 뿌리를 내리고 잎을 펼치고 꽃을 피운다. 거기에 비해 동물은 자기 완결적인 형태를 만들어내고, 그 정해진 형태 속에서 변하기 쉬운 감각생활과 충동생활을 한다. 그리고 이 생활은 혼계 속에 그 존재의 근거를 가진다. 식물이 자라고 번식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동물은 감각을 가지고 충동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동물의 충동은 몰형상적이며 늘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한다. 충동의 원상은 영계의 고차적 영역들 속에 존재하지만, 그러나 그 활동은 혼계 속에서 행해진다. 이렇게 동물계에는 성장과 번식을 주재하는 비가시적 힘의 본성들 외에 그보다 더 깊은 곳의 혼계에 있는 다른 본성들이 덧붙여진다. 그것은 동물계에 감각과 충동을 만들어내는 기술자이며, 혼의 의상을 입은 형태 없는 본성들이다. 이 본성들이야말로 동물적 존재형식의 형성자이다. 영학에서는 이 본성들이 속하는 영역을 제3원소계라 한다.
인간은 식물과 동물이 가지고 있는 능력 외에 감각을 표상과 사고내용으로 바꾸고, 충동을 사고력으로 통어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식물에서는 형태로 나타나고, 동물에서는 혼의 힘으로서 나타나는 사고내용은, 인간에 이르러서는 사고내용 그 자체로 나타난다. 동물의 본질은 혼에 있고, 인간의 본질은 영에 있다. 인간의 경우, 영적 본성이 보다 한 단계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있다. 동물의 경우, 이 영적 본성은 혼을 형성한다. 인간의 경우, 감각적 소재 속에 들어와 있다. 영은 인간의 감각체 속에 나타나 있다. 단, 그 영은 감각적 의상을 걸치고 있기에 사고내용이 영적 존재를 표현할 때의 저 그림자 같은 영상으로서만 나탄나다. 영은 뇌 조직의 조건들을 통하여 인간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영은 인간의 내면적 본성이 되어 있다. 사고내용은 어떤 특정한 형태가 없는 영적 본성이 식물에서는 형태가 되고, 동물에서는 혼이 되었듯이, 인간에게는 내적 본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인 한, 자신에게 작용하고 자신을 기르는 원소계를 자신 외의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인간의 원소계는 그 육체 속에 작용하고 있다. 인간이 형태를 가지고 있고 감각을 가진 존재인 한, 식물이나 동물 속에 작용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원소적 핵심이 인간 속에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기관은 완전히 인간의 육체 내부에서 형성된다. 인간의 영적 기관으로서 뇌의 단계까지 진화한 신경조직은, 식물이나 동물에게는 비감각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어떤 힘의 본성이 가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동물이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데 비해, 인간이 그보다 높은 단계의 자기의식을 나타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물의 경우, 영은 자신을 영이라 느끼지 못한다. 다만 혼으로 느끼며 살 뿐이다. 인간의 경우, 영은 자신을 영으로 인식한다. 설령 그 영이 육체라는 제약 때문에 영의 영상인 사고내용으로서의 영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의미에서 3가지 세계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몰형상적인 원상적 존재계(제1원소계)
2. 형태를 창조하는 존재계(제2원소계)
3. 혼적 존재계(제3원소계)
4. 창조된 형태계(결정형태)
5.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형태와 그 형태를 창조하는 존재가 함께 작용하는 영역(식물계)
6.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형태와 그 형태를 창조하는 본성들 외에 혼적 생활을 하는 본성들이 작용하는 영역(동물계)
7.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형태와 그 형태를 창조하는 본성들과 혼적 생활을 하는 본성들 외에 영 그 자체가 사고내용이라는 형식으로 감성계에 나타나는 영역(인간계).
이로써 우리는 몸적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의 기본적 구성부분이 영계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감각적 혼체, 오성혼은 영적 원상이 감성계 속에 농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육체는 인간의 원상이 감각적 현상 수준까지 응축됨으로써 출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성계에서 가시적 수준까지 육체를 농축시킨 제1원소계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에테르체는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형태가 감성계에 작용하는 비감성적, 비가시적 본성에 의해 생생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 비감성적인 본성의 특질을 완전히 기술하려면, 그 근원이 영계의 최상위 영역에 있고, 그 제2영역 속에서 생명의 원상으로 형성되어, 그러한 원상으로서 감성계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감각을 가지는 혼체를 구축하는 본성도 그와 마찬가지로 영계의 최상위에 그 근원이 있고, 그 제3영역에서 혼계의 원상으로 형성되어 감성계에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성혼은 사고하는 인간의 원상이 영계의 제4영역에서 사고내용으로 형성되고, 직접 사고하는 인간 본성이 된 이 내용이 감성계에서 작용함으로써 생겨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은 감성계 내에 서 있고, 이러한 방식으로 영은 인간의 육체, 에테르체 및 감각을 보유한 혼체에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은 오성혼 속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의 세 가지 하위 부분에 대해서 원상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과 외적으로 대면하는 본성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오성혼에 있어서 인간은 자신에 대한 의식적 작용자가 된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에 작용하는 본성들은 광물적 자연을 형성하는 본성들과 동일하다. 인간의 에테르체에 작용하는 본성들은 식물계에 살아가는 본성들과 동일하며, 감각을 보유한 혼체에 작용을 가하는 본성들은 동물계에서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에 모두 작용하는 본성들과 동일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당야한 세계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이런 공동작용의 표현이다.
감성적 세계를 이렇게 파악한 사람은 상술한 네 가지 자연계의 존재 이외의 본성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본성들의 한 예로 민족령(민족정신)을 들 수 있다. 민족령은 감각적인 방식으로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감성, 감정, 경향 등, 민족의 공통 부분으로존재한다. 그것은 육체적 형상으로 나타나는 본성이 아니라, 혼계의 소재를 구사하여 자신의 몸을 혼체로 형성하는 본성이다. 민족령의 이 혼체는 구름처럼 민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혼은 이러한 혼체의 구름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구름은 하나 하나의 혼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민족령은 본질과 생명이 빠진 조식적 관념상, 하나의 공허를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대령(시대정신)에 대해서는 같은 말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 주위에 살아 숨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외의 다른 고차원적이고 저차원적인 본성들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 볼 때 비로소 영적 전망을 가진다. 그러나 직접 영시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존재를 지각하고 묘사할 수 있다. 견령자가 불의 정령, 바람의 정령, 물의 정령, 땅의 정령으로 묘사하는 것은 모두 저차원의 본성들이다. 당연히 이러한 묘사는 그 기초가 되는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세계는 영적 세계가 아니라, 조잡한 감각적 세계가 되어버릴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영적 현실을 밝히기 위한 방편으로 비유를 사용한 것이다. 감각적 현실만을 인정하는 사람이 이러한 본성들을 혼란스런 환상과 미신의 산물로 치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형체가 없으므로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 미신이란, 이러한 존재를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감각적으로 나타난다고 믿는 태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형태의 본성들이 우주 구성에 참여하고 있다. 육체적 감각에 대해 닫혀 있는 고차 영역에 들어가면, 우리는 즉시 이런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 영적 현실의 비유를 발견하는 사람은 미신가가 아니다. 비유적으로 표헌한 이러한 상이 감각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나, 그 감각적 실재를 부정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영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사람이 바로 미신가이다.
혼계까지 하강하지 않고 그 외피가 영계의 소재만으로 짜여진 본성들에 대해 말해 둘 필요가 있다. 영적 눈으로 보고 영적 귀로 들을 때, 우리는 그들 존재를 지각하고 그들 존재와 친구가 될 수 있다.
영적 눈으로 보고 영적 귀로 들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망연히 그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주위에는 빛이 밝혀진다. 그는 감각적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이해한다. 영적 눈 없이는 부정할 수밖에 없는, 또는 "이 세계에는 그대들의 학교의 지혜가 꿈꾸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있다"라는 말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을 그는 이해한다. 영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의 주위에서 감각적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예감하거나 어렴풋이 지각하면서 불안에 사로잡히거나, 눈먼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존재의 고차적 영역을 명료히 인식하고, 이해력을 가지고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 속으로 들어가야만 진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진정한 사명을 자각하게 된다.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일들을 통찰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존재를 확대한다. 그 결과, 확대되기 이전의 생활이 그에게 마치 "세계에 대한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6. 사고형태와 인간의 아우라
세 가지 세계의 존재형태는 그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지각기관이 없는 사람에게는 현실성이 없다. 건전한 시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공간상의 어떤 사물을 빛의 현상으로는 지각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얼마나 선명히 지각하는가는 그 사람의 감각 능력에 달려 있다. 결코 지각할 수 있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각기관이 없어서 지각할 수 없는 많은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혼계와 영계는 감각계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고차적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눈이 감정이나 관념을 볼 수 없어도 이러한 현실은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이 외적 감각을 통하여 물체계에 대한 지각내용을 가지듯이, 영적 기관을 통하여 감정, 충동 본능, 사고 등도 지각내용으로 삼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눈이 공간상의 사물을 색채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적 감각은 혼적, 영적 현상에서 색채를 느끼는 것과 같은 지각내용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다음 인식의 좁은 길을 통하여 내적 감각을 개발한 사람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 그 자신을 둘러싼 혼계의 현상과 영계의 현상을 초감각적으로 볼 수 있다. 타인의 감정은 빛을 발한다.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면 영적 공간을 뚫고 흐르는 사고내용이 보인다.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해 품는 사고내용도 지각할 수 있다. 사고내용 그 자체는 사고하는 사람의 혼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은 영계에 작용한다. 그리고 그 작용이 영적 눈에 지각 가능한 사상(事象)으로 나타난다. 사고내용은 어떤 사람의 본성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의 본성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이 사고내용이 다른 사람의 사고내용에 작용하는 방식은 영계의 사상으로서 체험될 수 있다. 이렇게 영감이 열린 사람의 눈에 비치는 몸은 인간의 전체 가운데 일부분이며, 혼적, 영적 흐름의 중심에 위치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견자" 앞에 펼쳐지는 혼과 영의 다양한 모습은 다음과 같이 암시될 수 있을 것이다. 듣는 사람에게 지적으로 이해된 말하는 사람의 사고내용은 영적 색채현상으로 나타난다. 그 색은 사고내용의 성질에 따른다. 관능적 충동에서 나온 사고내용은 순수한 인식, 고귀한 미, 영원한 선을 지향하는 사고내용과는 다른 색조를 띤다. 관능적 생활에서 나온 사고내용은 붉은 색조로 혼계에 침투되어 있다.
사색하는 사람을 고차적 인식으로 끌어올리는 사상은 아름답고 밝은 황색으로 나타난다. 귀의하는 감정으로 가득 찬 사랑은 멋진 장미색으로 빛난다. 이러한 사고내용과 함께, 사고내용이 얼마나 명석한가도 초감각적으로 나타난다. 사상사의 엄밀한 사고내용은 뚜렷한 윤곽을 가진 형태를 나타내고, 혼란스런 관념은 구름처럼 모호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인간의 혼과 영의 본성도 인간 존재 전체의 초감각적 부분으로서 이러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영적 눈"이 지각하는 이러한 색채 현상이 바로 인간의 아우라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몸 주위에서 빛나고 있고, 그 신체를 달걀 모양의 구름처럼 감싸고 있다. 아우라의 크기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신장의 두 배에서 네 배의 폭을 가진다.
아우라에는 매우 다채로운 색채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흐름은 인간의 내면생활을 충실히 비춰내고 있다. 인간의 내면생화이 그러하듯이 아우라 개개의 색조 또한 다양한 변화를 나타낸다. 그렇지만 특정한 영속적 성질, 즉 재능이나 관습이나 성격은 변화하지 않는 기본 색조를 띤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논하게 될 "인식의 좁은 길"의 체험과 전혀 무관한 사람은 여기서 말하는 "아우라"의 본성을 오해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색채"를 우리의 눈이 보는 색채와 같은 의미로 혼 앞에 존재하는 듯이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그 "혼의 색채"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영학은 "환각"적 인상과는 전혀 무관하다. 어쨌든 지금 말하고 있는 현상은 이러한 인상을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관념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혼은 물질적 색채의 인상을 감각적으로 체험할 뿐만 아니라, 혼적으로도 체험한다.
이 혼적 체험은 노란 표면을 볼 때와 푸른 표면을 볼 때와 각기 다르다. 이런 체험을 "노란색 속에 살아간다"라든지 "푸른색 속에 살아간다"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면, 인식의 좁은 길을 걷기 시작한 혼은 다른 사람의 활발한 혼적 체험을 앞에 두었을 때는 "노란색 속에 살아간다"는 체험을 가지고, 귀의하는 마음을 앞에 두었을 때는 "푸른색 속에 살아간다"라는 체험을 한다. "견자"에게 소중한 것은 타인의 혼적 체험을 물질계에서 "청색"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청색"으로 보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파란 커튼을 "파랗다"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혼적 표상을 체험하는 일이며, 나아가 이러한 체험을 육체의 구속을 받지 않는 체험임을 알고, 신체기관을 사용하지 않고 지각하는 세계에 혼이 살아가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아는 일이다. 이 점을 반드시 의식해야 한다. 여하튼 "청", "황", "녹" 등으로 나타나는 "아우라"는 견자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색채 현상이다.
그 사람의 기질이나 기분에 따라 아우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영성개발의 정도에 따라서도 다르다. 동물적 충동에 사로잡힌 인간은 풍부한 사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종교적 성향을 가진 사람의 아우라는 일상의 진부한 체험 속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의 아우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일체의 기분 변화, 좋고 나쁘고 기쁘고 슬픈 감정도 아우라로 표현된다.
이러한 색조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다양한 혼 체험을 아우라로 비교할 필요가 있다. 격정에 사로잡힌 혼 체험을 들어보자. 그것은 두 가지 다른 종류로 구별된다. 그 하나는 주로 동물적 충동에서 혼이 격정에 사로잡힐 경우이며, 또 하나는 세련된 형식으로 신중한 배려와 강력한 자제심 하에 있는 경우이다. 전자는 주로 갈색과 적황색의 뉘앙스를 띠고 아우라의 특정 부분에 흐르고 있다. 후자의 억제된 격정은 같은 부분에 한층 밝은 적황색과 녹색이 나타난다. 지성이 늘어나면 날수록, 녹색 기운이 점점 더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명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동물적인 충족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아우라의 녹색 부분이 항상 갈색과 적갈색으로 물들어 있다. 지성이 결핍된 사람의 아우라 대부분은 적갈색, 또는 거무스름한 피와 같은 색으로 흐른다.
침착하고 사려 깊은 혼의 아우라는 이러한 격정에 휩싸인 혼의 아우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갈색과 적색이 물러나고, 다양한 뉘앙스를 가진 녹색이 나타난다. 사색에 몰두하고 있을 때의 아우라는 기분 좋은 녹색을 나타낸다. 특히 어떤 경우에서도 멋지게 처신하고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의 아우라에 그런 색조가 나타난다.
푸른 색조는 경외감을 표현하고 있다. 어떤 일에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푸른 색조가 강해진다. 이렇게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고하는 데 익숙하지 않고, "선량한 마음"으로만 이 세상의 일과 대면하는 수동적인 사람이 있다. 그의 아우라는 아름다운 청색 미광을 뿜어낸다. 종교적인 귀의심을 가진 사람들도 그와 같다. 동정심이 강한 혼이나 즐겨 하나의 대상 속에 모든 호의를 쏟아 붓는 사람의 혼도 같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이 지성을 겸비하면, 녹색과 청색 흐름이 번갈아 나타나거나, 또는 그 청색이 녹색의 색조를 띤다. 수동적인 혼과는 반대로 능동적 혼은 청색 내부에 밝은 색조를 띤다. 창의성이 풍성한 사람이나 풍성한 내용의 사상을 가진 인물의 아우라는 내적인 한 점에서 밝은 색조가 빛을 발한다. 현자라 불리는 사람이나 풍요로운 생산적 착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활발한 정신을 나타내는 아우라의 형태는 모두 내부에서 빛을 발한다. 한편, 동물적인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불규칙한 구름 같은 형상을 띤다.
활발한 혼이 품는 상념이 동물적 충동에 휩싸이는가, 아니면 이상적이며 객관적인 관심에 휩싸이는가에 따라 아우라의 형태는 다양한 색채를 나타낸다. 창의성에 가득한 두뇌를 가졌지만 그것을 모두 감각적 충족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의 아우라는 보라색이 깃든 암적색을 띤다. 한편 몰아적인 태도로 사실에 즉한 사고활동을 하는 사람은 밝은 빨강색이 깃든 청색 색조를 나타낸다. 고귀한 귀의나 희생정신에 의한 영적 생활은 장미색이나 밝은 보라색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혼의 기본 상태뿐만 아니라 그때의 격정, 기분 그 외의 내적 체험도 아우라를 특정한 색으로 물들인다. 발작적인 격앙은 아우라를 붉게 물들인다. 갑자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의 아우라에는 암록색의 구름 같은 것이 나타난다.
그러나 색조가 불규칙한 구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뚜렷한 윤곽을 가진 규칙적인 형상을 가지기도 한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사람의 아우라는 위에서 아래까지 파도형의 푸른 줄무늬가 보이고, 그 줄무늬는 청자색의 미광을 발한다. 기대에 가득 차서 어떤 일을 기다리는 사람은 내부에서 바깥으로 방사상의 발깡이 깃든 푸른 줄기가 아우라를 꿰뚫고 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엄밀한 영적 지각능력은 타인이 감지하는 외적 지각을 모두 알아볼 수 있다. 바깥의 인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의 아우라 속에는 파랑이 깃든 빨갛고 작은 반점이 끊임없이 불타오른다. 감수성이 활발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작은 반점이 귤색이 깃든 황색이나, 때로는 아름다운 황색을 띠기도 한다. "주의력이 산만한" 사람은 많건 적건 그 형태를 바꾸면서 청색에서 녹색 방향으로 전이하는 반점을 나타낸다.
"영적 눈"을 한층 발달시키면 인간을 둘러싸고 유동하며 방사상으로 확산하는 이 "아우라" 속에 세 종류의 색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첫째, 불투명하며 밝게 빛나지 않는 성질을 가진 색채가 있다. 물론 눈으로 보는 색채에 비한다면 이러한 색채도 가볍고 투명하다. 그러나 초감각적 세계 속에서 볼 때, 이런 색으로 가득 찬 공간은 다른 공간에 비해 불투명하다. 그 색채공간은 안개가 모인 것 같다.
둘째, 완전한 빛으로 나타난다. 색채로 가득한 이 공간은 너무도 밝다. 이러한 색으로 인하여 빛의 공간이 된다.
셋째, 앞의 두 종류의 색채와는 전혀 다르게, 광선을 발하고 불꽃처럼 튀며 번쩍거리면서 나타난다. 공간이 그냥 밝은 정도가 아니라 공간 자체가 빛을 발한다. 이러한 색은 활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전자의 두 종류의 색이 정적이며 바깥으로 빛을 비추지 못하지만, 이 색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빛을 발한다.
앞의 두 종류의 색이 이루는 공간은 조용히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묘한 액체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세 번째 종류의 색 공간은 쉼없이 활동하고 끊임없이 안에서 솟구치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세 가지 색채는 인간의 아우라 속에서 병존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공간을 점유하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침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종소리를 들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우라의 같은 부분에 이러한 세 종류의 다른 색이 나타난다. 아우라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세 종류의 색채가 뒤섞인 복잡한 형상을 띠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종류의 아우라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면 개개의 형태를 밝혀 낼 수 있다. 감각적 세계 속에서 음악을 잘 감상하기 위해 눈을 감는 것 같은 행동을 초감각적 세계에서도 할 수 있다. "견자"는 이 세 종류의 색채에 대해 세 종류의 지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관찰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 이런 기관의 어느 하나만을 열어서 인상을 받아들이고, 다른 기관은 닫아 둔다. 어떤 "견자"의 경우는 위에서 말한 첫 번째 색채를 위한 기관만이 개발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그는 한 종류의 아우라만 본다. 다른 두 종류의 아우라는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견자는 세 번째 색채만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견령능력"의 고차적 단계에 들어 선 사람은 이러한 세 종류의 아우라 모두를 볼 수 있고, 그것도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리면서 아우라를 관찰할 수 있다.
세 종류의 아우라는 인간의 본성을 초감각적으로, 동시에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속에 몸, 혼, 영의 세 부분이 표현된다.
첫째 아우라는 몸이 혼에 끼치는 영향을 나타내는 영상이다. 둘째 아우라는 직접 감각을 자극하는 차원을 넘어 서 있지만, 아직 영원한 것에 자기를 바치지 않고 있는, 혼만의 생활을 표현하고 있다. 셋째 아우라는 영원한 영이 무상한 인간적 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비쳐내고 있다.
이런 방시으로 아우라에 대해 기술할 때는, 관찰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표현하기도 어려운 현상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기술은 시사 이상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견자"는 혼의 활동과 그 특성을 이러한 아우라 속에서 본다. 일시적인 감각적 충동이나 욕망에 빠지거나 외적 자극에 자신을 잃은 혼을 관찰하면, 제1아우라는 매우 야단스런 색조를 띠고, 제2아우라는 구성이 허약한 희미한 색조를 띤다. 그리고 제3아우라에 이르면 거의 형태다운 형태를 찾아 볼 수 없다. 감각적인 것에 억압되어 있으나 근본적인 소질로서 미약하게 존속하는 영원한 것이, 반짝이는 작은 불꽃으로 암시되어 있을 따름이다. 인간이 본능적인 충동에서 벗어나면 날수록 제1아우라의 지배력은 약해지고, 제2아우라는 점점 커지며, 인체를 감싸는 그 색채를 점점 더 완전하게 밫나게 한다. 인간이 "영원한 것의 종복"으로 살아 갈 수 있게 되면 될수록, 어느 정도까지 영계의 시민인가를 증명하는 제3아우라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신성한 그 영적 자아가 아우라의 이 부분을 통하여 지상계에 빛을 던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아우라를 통하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진실, 고귀한 미와 선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살아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다시 말해 어느 정도까지 우주의 위대한 제단에 자신을 바칠 힘을, 자신의 좁은 자아 속에서 발견해 낼 수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아우라는 인간이 윤회전생을 통하여 자신 속에 만들어 온 것을 표현하고 있다.
제3아우라 속에는 다양한 색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색채의 특징은 인간의 진화 정도에 따라 변한다.
적에서 청에 이르는 모든 색채 속에서 제1아우라는 성숙하지 못한 충동생활을 표현한다. 이런 색채는 거무스름하고 불투명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적색이 짙은 색채는 감각적 욕망, 육체적 쾌락, 미각의 탐욕을 나타낸다. 녹색 색채는 둔감하고 냉담한 인간의 모든 향락과 탐욕, 그리고 그것을 만족시키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저속한 인간에게 나타난다. 어떤 목표를 가진 열정이 그것을 달성할 능력이 결핍되어 있으면, 갈색이 깃든 녹색이나 황색이 깃든 녹색의 아우라가 나타난다. 현대인의 모든 생활태도는 이런 종류의 아우라를 배양하고 조장한다.
저급한 욕망에 뿌리내린 개인적인 자기감정, 즉 이기주의의 낮은 단계는 불투명한 황색에서 갈색에 이르는 색조를 나타낸다. 그러나 동물적 충동생활 또한 바람직한 성질을 가질 수 있다. 동물계 속에도 순수하게 본능적이며 고도의 자기희생 능력이 내재해 있다. 본능적인 모성애에서 동물적 충동은 그 가장 아름답고 완성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몰아적 본능 충동은 제1아우라 속에서 담홍색에서 장미색에 이르는 색채로 표현된다. 명백한 사실로부터 눈을 돌리는 비겁한 마음은 갈색을 띤 청색 아니면 회색이 깃든 청색으로 나타난다.
제2아우라 또한 매우 다양한 색채를 나타낸다. 무척 발달한 자부심이나 명예심 같은 자아 감정은 갈색이나 오렌지색의 구성체로 표현된다. 호기심은 적황색의 반점으로 표현된다. 담황색은 투철한 사고나 지성의 반영이다. 녹색은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이해의 표현이다. 손쉽게 지식을 습득하는 어린아이의 아우라의 이 부분은 녹색을 띤다. 기억력이 좋으면 제2아우라에 "황록색"으로 나타난다. 장미색은 선의와 사랑에 가득 찬 성질을 나탄내다. 청은 경건함의 표시이다. 경건함이 종교적 고양감에 접근하면 할수록 이 청은 보라색 쪽으로 움직인다. 고도의 이상주의를 가진 진실된 삶의 태도는 남색으로 나타난다.
제3아우라의 기본색은 황, 녹, 청이다. 담황색은 보편적이고 높은 이념에 가득 차고 개개의 사실을 신적 우주질서의 전체성 속에서 이해할 때 나타난다. 이 황색은 사고가 직관적인 사고형식을 띠고 이 사고와 결합되는 감각적 표상이 완전히 순수한 존재방식을 띨 때, 황금색으로 빛을 발한다. 녹색은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청색은 모든 존재를 위한 몰아적인 헌신 능력을 나타낸다. 이 헌신이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로 고양될 때, 청색은 엷은 보라색으로 투명해진다. 그도로 발달한 혼적 자질을 가졌지만 아직 거만함과 명예욕이라는 개인적 이기주의의 찌꺼기가 남아 있을 때, 황색과 함께 귤색이 깃든 색채가 나타난다.
이 부분의 아우라에 나타나는 색채가 감각계에서 보는 색채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지상 세계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숭고하다.
"아우라를 보는 것"이 물질계에서 지각의 한계를 확대하고,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일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우라"가 표현하는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지각의 확대야말로 감각적 현실 이외에 영적 현실을 가진 혼 본래의 존재방식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환각적으로 지각된 아우라로 인간의 성격이나 사상을 해석하는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우라를 보는 것은 인식을 영계의 방향으로 확대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혼을 아우라로 해석하려는 의심스런 기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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