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루돌프 슈타이너] 신지학 본문
[루돌프 슈타이너] 신지학
루돌프 슈타이너 / 양억관, 타카하시 이와오 역
차 례
제3판 머리말
신판 머리말
서론
인간의 본질
1. 몸의 본성
2. 혼의 본성
3. 영의 본성
4. 몸, 혼, 영
영의 재생과 운명
세 가지 세계
1. 혼의 세계
2. 사후의 혼
3. 영계
4. 사후의 영
5. 물질계 및 혼계, 영계와 물질계의 관계
6. 사고형태와 인간의 아우라
인식의 좁은 길
보충 설명
제3판 머리말
제2판에서도 그랬듯이, 보다 명확히 뜻을 전하기 위해 중요한 부분을 가필 수정하였다. 이미 초판과 제2판에서 언급한 내용 가운데 본질적으로 바뀐 부분은 없다. 또한 본서의 과제에 대해, 초판에서 언급한 것과 제2판 머리말 속에서 첨가한 말에 대해서도 손을 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 한 번 그 내용을 설명해 두자.
나는 이 글을 통하여 초감각적 세계에 대한 약간의 시사를 던져 둘 생각이다. 감감적 세계만을 유일한 존재로 믿는 사람은 이 말을 공허한 상상의 산물로 취급할 것이다. 그러나 감각계를 넘어 서는 길을 추구하는 사람은 또 하나의 세계를 통찰해야만이 인간생활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본서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길을 간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듯이 현실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길을 통하여 우리는 살아가는 자세를 배우기 때문이다. 이 길은 인생의 여러 가지 요인들을 인식하도록 가르친다. 이 길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맹인처럼 인생의 결과들 속을 더듬으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초감각적 존재가 인식될 때, 감각적 "현실" 또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초감각적 인식을 가진 사람이 인생을 더 잘 살아갈 것임은 너무도 당연하다. 인생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실제적" 인간일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체험하고 인식한 것만을 말했다. 특히 이런 분야의 글은 자신의 체험만이 표현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독서 방법으로 잘 읽힐 수 있게 쓰여져 있지 않다. 어떤 구절이라도 독자 자신의 정신적 작업으로 해석되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썼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때서야 비로소 독자의 소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통독하는 데 그친다면 이 책을 읽지 않은 것과 같다. 진실된 내용은 체험되어야 한다. 영학은 이런 의미에서 가치를 가진다.
일반적인 과학적 입장에서 본서를 평가하고 싶다면, 그 평사의 관점 또한 이 책을 통하여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이 책으 내용이 진정한 과학정신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필자는 단 한 마디도 나의 학문적 양심에서 벗어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른 길을 통하여, 여기서 내가 말한 사실들을 추구하고 싶다면, 나의 다른 저서《자유의 철학》에서 그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자유의 철학》과 다른 방법으로 그 길을 제시하였다. 한 쪽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다른 쪽을 볼 필요는 없지만, 양쪽 길을 다 걷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이 책에서 궁극적인 진리를 찾으려 하는 사람은 아마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역학의 전 영역 가운데서 기본적인 사실만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의 시작과 끝, 존재의 목적, 신의 본질을 알고 싶어한다. 그런 오성을 위한 언어나 개념보다도 인생을 위한 진정한 인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영적 인식의 기본을 다루는 이 책 속에서 예지의 고차적 단계에 속하는 일들을 언급하지 못하는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을 인식해야 비로소 고차적 문제 제기의 방법이 밝게 드러날 수 있다. 이 책의 뒤를 이을 저자의《신비학 개론》속에 여기서 다루지 못한 영역들이 서술될 것이다.
제2판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첨가되었다.
오늘날 초감각적 사실들을 표현하는 사람은 두 가지 점을 명백히 알아 두어야 한다. 첫째, 우리 시대가 초감각적 인식의 육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 둘째, 오늘날의 정신생활 속에는 이러한 표현을 터무니없는 환상으로 치부하는 감정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현대가 초감각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일반적인 방법으로 세계와 인생을 경험할 때, 그 체험내용이 그 사람 안에서 초감각적 진실을 통해서만 대답할 수 있는 무수한 문제의식들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정신과학의 흐름 속에서 존재의 기초에 대해 깊이 사고하는 혼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세계와 인생의 수수께끼를 해결해 줄 단서가 있다고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이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들어가야 할 깊이에 이르면, 처음에는 해답처럼 보이던 것이 진정한 문제를 위한 문제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은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충실한 혼 생활과 내적평정은 바로 이러한 해답 여하에 달려 있다. 노력하여 그 해답을 발견하는 것은 지적 충동을 만족시켜 불 뿐만 아니라, 일에 유능하고 인생의 과제에 대처할 수 있는 인격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해결책이 발견되지 않으면 혼뿐만 아니라 육체마저 위축되고 만다. 초감각적 존재의 인식은 단순한 이론적 요구로서만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유익하다. 이러한 현대 정신생활의 실상 때문에 영적 인식은 우리 시대에 필요 불가결한 인식 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가장 필요한 것을 더 강하게 뿌리치는 경향이 있다. "확실한 과학적 경험"의 기초 위에 세워진 강제력을 발휘하는 견해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을 근거도 없는 넌센스로 취급해 버린다. 초감각적 인식 내용을 논하려는 사람은 어떤 환상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이 현실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의 주장에 대해 "아무도 비난할 수 없는" 완벽한 증명을 해 보이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사실들 속에 내재하는 증명 그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인정하고 싶은 것을 무의식적으로 요구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현대의 자연 인식을 기반으로 삼는 사람들이 긍정할 수 없는 어떤 냉요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자연과학의 모든 요청에 응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정녕 그렇기 때문에 초감각적 세계에 관한 본서의 서술은 그 서술 방식 속에서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이야말로 본서의 표현 방법에 친화성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연과학적 방법론 위에 서는 사람은 괴테의 "거짓 가르침은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짓이 진리라는 확신에 기초해 있으므로"라는 말이 의미하는 그 방식으로 누군가가 논쟁을 걸어오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자신의 사고 방식 속에 있는 논거만을 통용시키려는 사람끼리 벌이는 논쟁은 불모 그 자체이다. "증명하는 것"의 본질을 잘 아는 사람은 인간의 혼이 진실된 것을 발견하는 것이 논쟁과는 전혀 다른 길 위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 책은 제2판이나 지금이나 이런 기본적 태도로 독자에게 던져져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
신판 머리말
1918년 제9판 출간을 앞두고 이 책에 대해 나는 많은 추고를 가했다. 그 이후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인지학적 세계관과 상반되는 분야의 많은 책들이 세상에 나왔다. 1918년의 개정판에서 많은 부분을 가필하였으나 이번 신판에서는 그리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저술들의 여러 부분에서 가능한 비난을 나의 입장에 서서 그 비난의 무게를 가늠하여 무력하게 만들어 왔다. 그런 문장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반대편의 문헌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18년 이후 4년 간, 인지학적 세계관이 많은 측면에서 확대되고 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신판을 내면서도 개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4년 간의 확대와 심화가 본서의 내용을 변경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인식해 온 일들에 비춰보아도 이 책의 내용에 본질적인 변화를 줄 필요성이 없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슈투트가르트에서 1922년 11월 24일
루돌프 슈타이너
서론
1813년 가을, 피히테(1762~1814)는 진리 탐구에 바친 자신의 삶을 결산하는 저서《지식학》에 대해 강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의 학설은 전혀 새로운 인간의 내적 기관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기관을 통해 우리는 일상적인 감각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감각 표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사람을 향해, 하나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세계를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의 앞에는 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가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느끼는 색채와 다른 사실들을 이야기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 그것은 실재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금방 자신이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없는 이상, 그게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가를 알고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피히테가 암시하려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또한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색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지고한 목표와 관련된 문제이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라는 태도는 인류의 미래에 관계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우리는, 누구든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을 단 한 순간이라도 망각하지 않는 올바른 의지를 가져야 한다.
외적 감각에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인식케 하는 "내적 기관들"을 느끼는 사람들은 올바른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말해 왔다. 그래서 "숨겨진 예지"에 대한 이야기는 오랜 옛날부터 면면히 전해져 온 것이다.
이러한 예지를 얻은 사람은, 건강한 눈이 색채를 느끼듯이 자신의 내면에 살아 숨쉬는 예지를 생생히 느낀다. 이미 그에게는 "숨겨진 예지"에 대한 어떤 증명도 필요없다. 그리고 "고차적 감각"이 열린 다른 사람도 자신과 똑같은 체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이야기할 것이다. 마치 미국 여행을 다녀와서, 언젠가 미국에 한번 가 볼 생각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사람에게 여행담을 들려주듯이.
그러나 초감각적 세계를 관찰하는 사람은 앞으로 영계를 탐구하려는 사람에게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을 향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관련한 이야기이므로 그리고 이런 초감각적 세계를 모르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일 수 없다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을 향해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어떤 사람도 어느 정도까지는 영적 사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영적 탐구와는 거리가 먼 사람도, 그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진리를 향한 감정과 이해력이 있는 법이다. 그는 모든 건전한 혼 속에서 빛을 발하는 그런 이해력을 믿고, 이야기한다. 그 이해력 속에 고차적 인식으로 가는 힘이 숨어 있다. 진리를 향한 감정을 가졌다 해서 예지를 얻은 사람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영적 눈"을 뜨게 하는 마술사이다. 그 감정은 어둠 속에 숨쉬고 있다. 혼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감정을 통하여 혼은 진리의 힘을 손에 넣는다. 그러면 진리 쪽에서 혼 쪽으로 접근해 온다. 진리가 그 혼을 위해 "고차적 감각"을 열어줄 것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나, 누구든 언젠가는 체험할 수 있다. 인내심을 가진 사람만이 그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영적 눈을 열 수 있다. 다만 그 눈을 열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학식이나 과학적 교육은 이런 "고차적 감각"을 여는 조건이 될 수 없다. 소박한 인간이건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건, 이 감각에 대해서는 공평하다. 우리가 신봉하는 현대과학은 오히려 영적 눈을 뜨는 데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과학은 일상의 감각에 통용되는 것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현실 인식이 인류에게 많은 편리를 제공했지만, 자신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만을 모든 지식의 기준으로 삼는 과학은 고차적 감각에 이르는 통로를 가로막는 무수한 편견을 낳고 있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인식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그 한계를 넘어 설 수 없다. 그래서 그 "한계"를 무시하는 모든 인식 행위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 한계를 넘어 선 것으로 판단되는 어떤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면, 제 주제를 모른다고 빈나한다. 그 사람은 고차적 인식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인식의 한계를 넘어 선 것으로 보이는 것들로 고차적 인식 능력을 개발하면 우리의 인식 범위에 들어 올 수 있다.
물론 다음과 같은 타당한 견해도 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보통 사람의 인식 능력이 이르지 못하고 일상적 감각으로 알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말하려 하는가.
그러나 이런 의문은 타당하지 않다.
어떤 필요한 것을 찾아내려면 거기에 합당한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발견된 어떤 것을 일반에게 전달하면, 공정한 논리와 건전한 진리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열린 사고와 자유로운 진리 감정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런 사고와 감정의 힘만으로 인간 생활이나 세계현상의 수수께끼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만일 여기서 제시하는 나의 말들이 사실이라면, 삶의 의미를 해명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일단 그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삶이 스스로 대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고차적 세계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이르는 감각이 열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상세계를 가르치는 선생이 과학을 알아야 하듯이, 이 역시 하나의 "과학"이 필요하다. 현실 세계에 대한 건전한 감각만으로 "학자"가 될 수 없듯이, 영적인 눈만 열려 있다고 해서 영계를 통달할 수 없다.
모든 현실 세계, 물질적 현실계와 고차적 영적 세계는 같은 존재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실계에 무지한 사람은 고차적 세계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영적 소명을 받아 존재의 영적 영역에 대해 이야기할 의무를 느끼는 사람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는 겸허하고 진솔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런 자세는 결코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의 의욕을 꺾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또한 현실적인 학문 연구의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욕을 꺾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식물학, 동물학, 수학과 같은 과학을 전혀 몰라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지만, 초감각적 사실을 통해 밝혀진 인간의 본질과 사명에 관계하지 않고서는 진실한 의미에서 "인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높이 우러러보는 지고한 것을 "신"이라 부른다. 인간의 사명은 이런 신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 때문에 감각적 존재를 넘어 선 예지, 인간의 사명과 본질을 밝히는 예지를 "신의 예지", 즉 신지학(神智學)이라 하는 것이다. 우주와 삶의 영적 활동을 고찰하는 학문을 영학(靈學)이라 한다. 여기서는 영학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의 영적 본질의 핵심에 관련된 문제를 다룰 경우 "신지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말은 수세기에 걸쳐 그런 관점에서 사용되어 왔다.
이 책은 신지학적 세계를 묘사하게 될 것이다. 눈과 귀와 오성으로 세계를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사실만을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마지막 장 "인식의 좁은 길"을 걸어가려는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체험내용만을 다룰 것이다. 건전한 사고와 건전한 감수성만 있으면 고차적 세계에서 다가오는 모든 인식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 이해를 바탕으로 확고한 토대를 쌓았을 때, 이미 영적인 눈을 열 준비가 되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받아들일 때 당신은 올바르게 초감각적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다른 무엇을 더하지 않으면 초감각적 체험을 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서술한 기본적인 태도를 무시하고 다른 방법으로 고차적 세계로 나아가려 할 때, 인식의 문은 굳게 닫혀버릴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고차적 세계를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태도는, 보는 행위 그 자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 이것은 하나의 원칙이다. 앞으로 보게 될 사실을 건전한 사고로 미리 이해하려는 의지를 가질 때, 당신은 보다 빨리, 높이 오를 수 있다. 그런 의지가 "견자의 직관력"을 길러주는 중요한 심적 능력이다.
인간의 본질
인식의 길을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괴테의 말을 들어보자.
"인간은 대상을 금방 자기 자신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대상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 매력이 있는가 없는가, 유용한가 해로운가, 그런 것들이 자신의 운명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런 태도로 사물을 관찰하고 판단해 버린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태도 때문에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고, 그 오류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다.
자연의 대상들을 그 자체로, 또는 상호 관계로 고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런 활발한 인식 충동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사물을 자신과의 관계로 고찰할 때 사용하는 척도 자체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므로, 자연에는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 마음이 끌리는가 반감을 느끼는가, 유용한가 해로운가, 하는 척도가 없다. 그런 판단 기준을 버리고 평등한 관점, 이른바 신적인 태도로서 존재하는 그 자체를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실한 식물학자처럼, 식물의 아름다움이나 유용성이 아니라, 식물의 형성, 다른 식물과의 관계를 탐구하고 모든 식물이 태양 앞에 평등하게 드러나듯이 조용한 눈길로 관찰하고 음미하며, 모든 판단의 척도를 자신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세계에서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괴테의 사상을 통해 볼 때, 인간은 대체로 세 가지 방향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끊임없이 정보를 보내는 대상이다.
둘째, 이런 대상들이 주는 인상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호감을 가지거나 반감을 느끼고, 유용한가 해로운가, 마음에 드는가 안 드는가를 따지며, 욕망을 느끼고 혐오감을 갖기도 한다.
셋째, "신적 태도"를 통해 대상에서 얻은 인식 내용이다. 그것은 그 대상이 그에게 밝힌 작용과 존재의 비밀이다.
이 세 가지 영역은 인간 생활 가운데서 뚜렷이 구별된다. 그래서 인간은 세 가지 방식으로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첫째로, 인간은 눈앞에 주어진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둘째로, 인간은 세계를 그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무엇으로 삼는다.
셋째로, 인간은 그것을 끝없는 노력의 목표로 삼는다.
왜 세계는 인간에게 이런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꽃이 핀 들판을 걸어간다고 하자. 꽃들은 내 눈을 통하여 그 색체를 내게 전한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하나의 사실이다. 나는 그 화려한 색채를 즐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다. 나는 감정을 통해 꽃들을 나의 존재와 연결시켰다.
일 년 후에 다시 그 들판을 지나간다고 하자. 거기에는 다른 꽃들이 피어 있다. 다시 한 번 기쁨의 감정이 솟구친다. 작년의 기쁨이 기억으로 떠오른다. 그 기쁨은 내 속에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이미 없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꽃들은 작년과 같은 종류다. 그것들은 작년과 같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피어난다. 만일 내가 그 꽃의 종류와 법칙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작년의 꽃들 속에서 발견했듯이 오늘의 꽃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일 년 전의 꽃들은 사라졌다. 그 꽃들을 보고 느낀 기쁨의 감정은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고, 그 감정은 나와 관련되어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나 작년에 내가 꽃을 보고 인식한 것, 오늘 다시 인식한 것은 꽃들이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 앞에 드러나는 것이긴 하나 나의 감정과는 달리 내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다. 내가 기뻐하는 감정은 내 속에 있다. 꽃들의 법칙과 본질은 내 밖에, 세계 속에 있다.
이처럼 인간은 늘 세 가지 방식으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일단은 아무런 해석도 하지 말고 이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이것을 통하여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는 일단 몸, 혼, 영의 세 가지 용어로 이 세 가지 측면을 암시하는 데 그치기로 하겠다. 이 세 가지 용어에 대해 어떤 선입견이나 가설을 가진다면, 앞으로 내가 할 말을 이해하기가 곤란해질 수 있다.
몸이란, 위에서 예를 든 들판의 꽃처럼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바로 그것이다.
혼이란, 사람이 사물을 자기 자신과 관련시켜 마음에 들고 안 들고, 싫고 좋고, 기쁘고 슬프고를 느끼는 주체이다.
영이란, 괴테의 표현을 빌자면, 사물을 "신적 태도"로 볼 때 그에게 제시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몸, 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을 통하여 인간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사물과 연결시킬 수 있다. 혼을 통하여 사물이 던져주는 인상을 받아들인다. 스리고 영을 통하여 사물 스스로가 말을 걸어온다. 이 세 가지 측면으로 보아야 비로소 인간의 본성이 해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측면은 인간이 세 가지 방식으로 세계와 같은 존재임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몸의 인간은 외부 세계가 감각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는 사물과 같다. 물질적 소재가 몸을 구성한다. 외부 세계의 힘이 그 몸에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외계의 사물을 감각으로 관찰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몸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법으로 혼을 관찰할 수는 없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다. 내가 즐거워하는지, 싫어하는지, 괴로워하는지, 나는 물론이고 타인도 내 몸을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없다. 혼의 세계는 몸을 관찰하는 방식으로는 알 수 없다.
몸은 모든 사람의 눈에 드러나 있다. 혼은 자신의 세계로서 내면에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영에 의해, 외부세계는 고차적인 방식으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의 비밀은 인간의 내면에서 밝혀지지만, 영적 존재인 인간은 자신을 벗어나, 사물 자신이 스스로를 말하게 한다. 그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 본다. 혼에서 일어나는 감동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영으로 파악하는 별들의 영원한 법칙은 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별들에게 속한다.
이렇게 인간은 세 가지 측면에서 세계의 시민이다. 그 몸을 통하여 인간은 몸이 지각하는 세계에 속하고, 그 혼을 통하여 그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영을 통하여 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 세 가지 세계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이 세 가지 세계 및 거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밝히려면, 세 가지 다른 방법에 따라야 한다.
1. 몸의 본성
우리는 감각으로 몸을 지각할 수 있다. 그것은 감각으로 다른 사물을 지각하는 것과 똑같다. 광물, 식물, 동물을 관찰하듯이 인간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광물, 식물, 동물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광물처럼 인간의 몸은 자연적 소재로 되어 있다. 식물처럼 인간은 자라고 번식한다. 동물처럼 인간은 대상을 지각하고, 그 인상을 바탕으로 자기 내면에 체험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인간 속에는 광물적, 식물적, 동물적 요소가 모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광물, 식물, 동물의 구조상 차이는 존재의 세 가지 형식에 상응한다. 그리고 그 구조와 형태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몸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동물의 그것과는 다르다. 아무리 동물과 인간이 유사하다 하더라도 차이가 있다. 혼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극단적인 유물론자라 해도, 카루스《자연 인식과 영 인식을 위한 교육》속에서 주장하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경조직, 특히 뇌의 세밀하고 내적인 구조는 생리학자나 해부학자도 밝히기 힘든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그 조직의 집중성, 통일성이 다른 어떤 동물도 달성하지 못한 수준에 이르렀음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의미심장하다. 또한 이런 사실 자체가 인간의 영적 발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어 준다. 그 때문에 뇌의 구조가 발달하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두개골이 적거나 백치와 같은 사람은 발육이 부진한 성기를 가진 사람이 번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창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거기에 반해, 아름답고 힘차게 발달한 몸, 특히 두뇌의 구조는 그것만으로 천재라 할 수야 없겠지만, 고차적 인식을 위한 필요조건을 갖추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몸에는 존재의 세 가지 형식, 광물적, 식물적, 동물적 형식이 갖추어져 있고, 나아가 네 번째의 독자적인 인간형식이 덧붙여져 있다. 그 광물적인 형식으로 인간은 모든 가시적 존재와 같고, 그 식물적 형식으로 성장하고 번식하는 모든 생물과 같고, 그 동물적 형식으로 환경을 지각하고 외적 인상을 기반으로 내적 체험을 하는 모든 것과 같다. 그 인간적 형식으로, 인간은 몸의 차원에서 이미 그 독자적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2. 혼의 본성
혼의 본성은 고유한 내면세계이며, 그런 점에서 몸의 본성과 구별된다. 이 고유한 세계는 단순한 감각적 지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나타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도 나 자신과 똑같은 방법으로 이러한 단순한 감각적 지각을 체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다. 색맹의 눈에는 모든 사물이 회색을 띄고 있다. 또는 특정한 부분의 색을 지각할 수 없다. 그 눈이 전하는 세계상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의 세계상과 다르다. 다른 감각기관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이 가능하다.
이로서 아무리 단순한 감각적 지각도 내면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몸의 감각으로 타인도 지각할 터인 빨간 테이블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타인이 가지는 색채 감각을 지각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감각적 지각은 혼적 내용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면, 내적 체험을 단순한 뇌의 작용 또는 그와 유사한 것으로 치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감각적 지각에 이어 감정이 더해진다. 어떤 지각체험은 좋은 기분을, 어떤 지각체험은 나쁜 기분을 가지게 한다. 그것은 혼의 내적 운동의 결과이다. 인간은 감정을 통하여 외부에서 그에게 작용해 오는 세계에 대해, 제2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나아가 제3의 세계, 즉 의지가 더해진다. 의지에 의해 인간은 다시 외계에 작용한다. 그것으로 그는 자신의 내적 본질을 외부세계에 새겨 넣는다. 인간의 혼은 그 의지 행위를 통하여 밖으로 흘러나간다. 인간의 행위는 내면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외적 자연의 일들과 구별된다. 이렇게 혼은 인간 고유의 세계로서 외계에 대치하고 있다. 인간은 외부로부터 다양한 자극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극에 응하여 하나의 고유한 세계를 형성한다. 몸의 본성은 혼적 존재의 기반이 되고 있다.
3. 영의 본성
혼은 몸으로 규정될 수 없다. 인간은 방향이나 목표도 없이 감각인상에서 감각인상으로 그냥 방황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지각내용이나 행동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지각내용을 생각함으로써 그는 사물을 인식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그는 이성적으로 생활한다. 그리고 그는 인식이나 행동에서도 올바른 사상을 따를 때만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혼은 두 가지 필연성과 마주한다. 몸의 법칙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규정되고, 동시에 그 자신을 올바른 사고로 이끄는 필연적인 법칙들에 따른다. 인간은 자연의 신진대사 법칙에 지배되는 한편,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는 법칙에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몸의 질서보다 고차적인 영적 질서에 속해 있다. 몸이 혼과 구별되듯이, 혼 또한 영과 구별된다. 몸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탄소, 수소, 질소, 산소 분자만을 주목하는 한, 혼은 보이지 않는다. 혼의 생활은 맛을 느끼거나 쾌감을 가져다주는 지각내용이 나타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외부세계와 몸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혼적 체험만을 보아서는 영을 발견할 수 없다. 몸이 혼의 기초라 한다면, 혼은 영의 기초이다.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은 몸을, 혼을 연구하는 사람(심리학자)은 혼을, 그리고 영을 연구하는 사람은 영을 주제로 삼는다. 사고 작업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자는 스스로를 고찰하여 몸, 혼, 영을 명료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4. 몸, 혼, 영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성에 속하는 사고의 의미를 밝혀야 한다. 뇌는 사고하는 신체기관이다. 정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 색체를 보듯이, 건강한 뇌를 가진 사람만이 올바르게 사고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전체는 영적 기관인 뇌에 의지하도록 형성되어 있다. 뇌의 구조는 기능과 관련시켜 고찰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사고하는 영의 몸적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그 기능이다. 동물세계와 비교 관찰해도 알 수 있다. 수륙양서류의 뇌는 척추에 비해 작다. 포유동물은 비교적 크다. 인간의 뇌는 몸 전체와의 비율로 볼 때 동물 가운데서 가장 크다.
사고에 대한 어떤 편견이 있다. 어떤 사람은 사고를 과소평사하고 "내적 감정생활", "감수성"을 보다 높이 평가하려 한다. "차가운 사고"가 아니라 감정의 열기, 싱싱하고 힘찬 감수성을 통하여 인간은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오를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투철한 사고가 감정을 둔화시킬 것을 두려워한다. 유용한 사물에만 관계하려는 일상적인 사고로 볼 때, 그렇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끄는 사고내용의 경우, 전혀 그와는 다르다. 열기, 아름다움, 고양감은 말할 것도 없고, 고차적 세계와 관련된 순수하고 수정처럼 맑은 사고내용이 불러 일으키는 기분과 비교할 수 있는 감정이나 감격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의 감정은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정열적인 사고행위를 통하여 얻어진다.
몸은 사고에 알맞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광물계에도 존재하는 소재와 힘은 몸 속에서 사고가 충분히 활동할 수 있도록 구성되고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과제에 어울리게 형성된 광물적 구조가 바로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중심에 놓인 뇌를 향하여 조직되어 있는 이 광물적 구조는 번식을 통하여 생겨나고 성장하여 완전한 형태를 이룬다. 번식과 성장이란 동식물과 공유하는 부분이다. 번식, 성장을 통하여 살아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광물이 구별된다. 살아 있는 것은 씨앗으로 번식한다. 자손은 조상으로부터 나왔다. 광물을 만들어내는 힘은 그 광물을 구성하는 소재에 작용한다. 수정은 규소와 산소에 작용하는 힘에 의해 형성되며, 그 힘은 수정 속에서 통일된 힘으로 존재하고 있다. 참나무를 형성하는 힘은 좀 먼길을 돌아서, 씨앗을 통해 아버지 나무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참나무의 생김새는 번식을 통해 조상에서 자손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여기에는 생명체의 본래적인 내적 조건들이 존재하고 있다.
옛날에는 물고기를 비롯한 하등동물은 진흙에서 발생한다는 자연관이 통용되었으나, 생명체의 형태는 유전에 의해 전해진자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떤 생명체가 어떻게 자라나는가는 어떤 조상에서 비롯하는지, 다시 말해 어느 종에 속하는냐에 따른다. 그것을 구성하는 소재는 끊임없이 바뀌지만, 종은 생명이 존재하는 한 존속하고 자손으로 유전된다. 그러므로 종이 소재의 결합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종을 형성하는 힘을 생명력이라 한다. 광물의 힘이 결정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듯이, 생명 형성력은 동식물의 종 또는 형태 속에서 자기를 표현한다.
우리는 광물의 힘을 몸으 감각으로 지각한다. 그리고 그런 감각을 가지고 있을 때만 지각할 수 있다. 눈 없이는 빛을 지각할 수 없고, 귀 없이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하등생물은 인간이 가진 감각 가운데 촉각만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생물들은 인간의 감각에 빗대어 말하면, 촉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광물의 힘만을 가지고 있다. 고등동물이 다른 감각들을 가지고 있기에 환경은 보다 풍성하고 다양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계에 존재하는 것이 생물에게 지각될 수 있는가 없는가는 그 생물의 감각기관에 달려 있다. 공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은 인간에게 소리로 들린다.
인간은 보통의 감각으로 생명력의 작용을 지각할 수 없다. 그는 식물의 색을 보고 향기를 맡는다. 생명력은 그렇게 관찰될 수 없다. 그러나 눈먼 자라고 해서 색채를 부정하지 않듯이, 보통의 감각으로 생명력을 부정할 수 없다. 눈을 가진 사람에게 색채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동식물의 개체뿐만 아니라 생명력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종 그 자체도, 인간이 그것을 지각할 수 있는 기관을 가진다면 엄연한 지각내용이 될 것이다.
그런 기관이 열리면 세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 앞에 나타난다. 그는 생물의 색, 냄새 등을 지각할 뿐만 아니라, 생물의 생명 그 자체도 지각한다. 모든 동식물 가운데 물질 형태 이외에 생명으로 가득 찬 영적인 모습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런 영적인 모습을 에테르체, 또는 생명체라 표현하기로 한다.1
영적 생명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에테르체는 물질적인 소재나 힘이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소재나 힘을 생명체로 바꾸는 독립적이며 현실적 본성이다. 영학적 관점으로 말하자면, 광물 결정체와 같은 물체는 무생물 속에 내재하는 물리적 형성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형성력은 살아 있는 몸 형태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이 떠나는 순간, 우리 몸의 형태는 무너져 버리므로, 생명체는 살아 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분해되지 않고 몸의 형태를 유지한다.
존재 속에서 그 생명체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각성된 "영의 눈"이 필요하다. 물론 논리적 근거만으로 생명체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눈으로 색채를 보듯이, 그것을 보려면 "영의 눈"이 있어야 한다.
"에테르체"라는 표현에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에테르"는 근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에테르와는 다르다. 오직 여기에 기술되는 의미로 받아들여주기 바란다.
인간의 몸 구조가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의 본뜸이듯이, 인간의 에테르체의 구조도 그런 본뜸이다. 그것은 사고하는 영과의 관계에서 에테르체를 고찰할 때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의 에네르체는 사고하는 영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동식물과 다르다.
인간은 몸을 통하여 광물계에 속하듯이, 에테르체를 통하여 생명계에 속한다. 죽으면 몸은 광물계로, 에테르체는 생명계로 흩어진다. "몸"이란 존재에 어떤 종류의 "형태", "모습"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몸"을 물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혼이나 영으로 형성되는 것에도 적용된다.
생명체는 인간에게 외적인 것이다. 감각이 무엇을 느낌과 동시에, 내적인 것이 외적인 자극에 반응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감각과 외계는 만날 수 없다.
빛이 눈에 들어가서 망막에 이르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그 자극은 신경을 통해 뇌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물리적 과정이 일어난다. 만일 우리가 그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외계에서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과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에테르체를 관찰할 수 있다면, 뇌의 그러한 물리적 활동이 생명 작용임을 지각할 것이다. 그러나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청색에 대한 지각은 결코 그런 방법으로는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의 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만일 빛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육체, 에테르체만 가지고 있다면 그런 지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지각 작용은 생명 형성력과 전혀 다르다. 내적 체험을 가져다주는 그 작용은 생명형성 작용에서 이끌어져 나오는 것이다. 만일 이런 내적 작용이 없다면, 식물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생명 과정만이 남게 될 것이다.
모든 방향에서 인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상상해 보자. 그는 모든 방향에서 주어지는 인상을 만들어내는 주체이다. 사방에서 다가오는 자극에 감각이 반응한다. 이런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감각혼이라 한다. 감각혼은 몸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이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몸의 존재로만 생각하고 감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마치 유채화를 캔버스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
감각혼의 지각에 대해서도 앞에서 말한 에테르체와 똑같은 말이 가능하다. 몸의 감각기관으로는 감각혼을 볼 수 없다. 생명을 생명으로 지각할 수 있는 기관도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기관으로 에테르를 볼 수 있듯이, 보다 고차적 기관으로 감각의 내적 세계도 특수한 초감각적 지각 내용이 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물질계와 생명계의 인상들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 체험 그 자체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감각기관을 가진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감각 세계는 외적 현실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자신의 내면에서 감각세계를 체험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감각체험을 보는 것은 다르다. 자신의 감각체험을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감각세계는 "영의 눈"이 열린 사람만이 볼 수 있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속한 감각세계만을 알 수 있다.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내면이 마치 외적 현상처럼, 영적 풍경으로 눈앞에 선명히 펼쳐진다.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각세계가 경험하는 내용을 똑같이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감각 체험을 그 자신의 내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눈이 열린 자는 감각세계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지각한다.
감각혼의 그런 작용은 에테르체에 이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감각혼은 자신의 감각내용을 에테르체에서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테르체는 몸 안의 생명이므로, 감각혼은 몸에도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눈이 건강해야 올바르게 색채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몸은 감각혼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그러므로 감각혼의 작용은 몸에 의해 규정되고, 한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몸의 본성이 원하는 범위 안에서 살아간다.
때문에 몸은 광물의 소재로 만들어져 에테르체에 의해 생명이 되고, 그리고 감각혼에 대해 범위를 설정해 준다. 앞에서 말한 고차의 기관을 가진 사람은 감각혼이 몸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감각혼의 경계는 몸의 경계와 겹치지 않는다. 감각혼은 몸을 넘어선다. 몸보다 그 작용 범위가 넓다. 그러나 그 감각혼에 경계를 설정하는 힘은 몸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몸과 에테르체, 다른 한편으로는 몸과 감각혼 사이에 인간 본성의 특별한 부분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혼체, 또는 감각체이다. 다시 말해 에테르체의 일부는 다른 부분보다 더 미묘하다. 그리고 그 미묘한 에테르체 부분은 감각혼과 하나가 되어 있고, 한편 그보다 더 거친 부분은 몸과 하나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감각혼은 혼체를 꿰뚫고 우뚝 서 있다.
여기서 감각이라 부르는 것은 혼의 본질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감각혼은 간단하게 표현하려고 선택한 말이다.) 감각에는 기분 좋음과 기분 나쁨, 충동, 욕정이 결합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감각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고, 몸의 본성에 의존하고 있다.
감각혼은 몸, 그리고 사고(영)와 상호 작용한다. 먼저 사고가 감각혼에 봉사한다. 인간은 자신의 감각내용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그것을 통해 외부세계를 이해한다. 화상을 입은 아이는 "불은 뜨겁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충동, 본능, 욕정에 맹목적으로 따르지만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만들어낸다. 물질문명이란 이런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그것은 사고가 감각혼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활동이다. 거대한 사고의 힘이 이 목표를 향하고 있다. 배, 철도, 전신, 전화도 사고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감각혼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생명 형성력이 몸에 침투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의 힘은 감각혼에 깃들어 있다. 생명 형성력은 몸에 의해 조상에서 자손으로 이어지고, 그것으로 인하여 단순한 광물적 존재가 가질 수 없는 법칙성을 몸에 부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고의 힘은 혼에, 단순한 감각혼만으로는 불가능한 법칙성을 부여한다.
감각혼의 작용에서 인간은 동물과 같은 종에 속한다. 동물도 감각, 충동, 본능, 욕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물은 거기에 종속되어 있을 뿐, 직접적 체험을 넘어 선 독립된 사고내용과 그것을 연결시킬 수 없다. 미개인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러므로 감각혼은 고도의 사고를 하는 고차적 혼과 다르다. 사고 능력을 가진 보다 고차의 혼을 오성혼이라 한다.
오성혼은 감각혼에 침투되어 있다. 혼을 볼 수 있는 기관을 가진 사람은 오성혼 속에서 단순한 감각혼과는 다른 특성을 본다.
인간은 사고를 통하여 개인의 영역을 벗어난다. 그는 자신의 혼을 넘어 선 뭔가를 손에 넣는다. 사고의 법칙이 우주 질서와 일치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을 우주의 주민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일치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혼 내부에 진리를 구하며, 그 진리를 통하여 혼과 사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고를 통해 진리로 인정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혼뿐만 아니라 세계의 사물과도 관련된 하나의 독립된 의미를 가진다. 별을 보고 감동을 느끼는 것은 나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별의 운행법칙을 파악한 나의 사고는 다른 사람에게도 통용된다. 그것은 객관적이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나의 감동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나를 벗어난 사고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한 진리내용은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와도 진리일 테니까. 내가 어떤 것을 알고 기쁨을 느꼈다면 그 기쁨은 내 속에서 살아 있을 동안 의미가 있다. 그런 진리를 파악할 때, 인간의 혼은 가치 있는 뭔가에 자신을 결합시킨다. 그리고 그 가치는 감각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그 가치는 감각과 함께 생겨난 것이 아니다. 진리는 태어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의미를 가진다.
세상의 여러 가지 "진리"가 한때는 가치를 가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부분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오류였음이 판명된다 해도, 이런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령 인간의 사고란 것이 영원한 진리가 순간적으로 나타난 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진리는 자기 자신 속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싱처럼, 완전하고 순수한 진리는 신만이 가지므로 자신은 영원히 노력하는 데 만족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진리의 영원한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를 확인하고 있다. 영원의 의미를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는 자만이 영원히 노력할 생각을 할 수 있으므로, 만일 진리가 독립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면 진리는 모든 인간의 유일한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진리를 향하여 노력하는 행위 자체가 진리의 독립된 본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
진리와 마찬가지로 선도 그렇다. 선이 욕정이나 어떤 성향에 지배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지배하는 한, 독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 바라고, 미워하는 것은 개인의 혼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의 의무는 그것을 넘어 선 곳에 있다. 인간의 의무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로 깊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성향이나 기호를 교화하여, 강제와 굴종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인식이 제시하는 의무에 따르면 따를수록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 할 수 있다. 선은 진리처럼 영원한 가치를 스스로 간직하고 있다. 결코 감각혼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이런 독립된 진리와 선을 발견하면 감각혼을 넘어 설 수 있다. 영원한 영의 빛이 감각혼을 비춘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빛이 일어난다. 혼이 이 빛 속에 살아가면 영원의 존재를 간직하는 것과 같다. 혼은 자신을 이 영원한 존재에 결합시킨다. 혼이 간직하는 진리와 선은 혼 속에서 결코 죽지 않는다.
혼 속에서 영원히 빛을 발하는 그것을 의식혼이라 부르기로 하자. 차원 낮은 혼도 의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어떤 일상적 감각도 의식에 속한다. 동물에게도 의식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혼은 인간의식의 핵심, 혼 속의 혼이다. 의식혼은 오성혼과 구별된다. 오성혼은 감각, 충동, 격정에 휩쓸린다. 인간은 누구 할 것 없이 처음에는 감각으로 느낀 것을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감각 속에 포함된 싫고 좋고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한 것만이 영원한 진리이다. 진리는 설령 모든 개인적 감정이 반발할 때도 진리다. 이 진리가 살아가는 혼의 부분을 의식혼이라 한다.
이렇게 몸과 마찬가지로 혼에도 세 가지 부분이 있다. 감각혼, 오성혼, 의식혼, 그리고 아래에서는 몸의 본성이 혼을 묶어두려 하고, 위에서는 영성이 혼을 확대시키려 한다. 왜냐하면 혼이 진리와 선으로 가득 차면 찰수록 영원한 것이 그 속에서 더욱 커지고 세력을 넓혀가기 때문이다.
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눈에 비치는, 영원한 것을 확대시켜가는 인간으로부터 비쳐 나오는 빛은, 우리의 눈이 불꽃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이다. 견자에게 몸이란 인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몸은 인간의 모든 부분 가운데서도 가장 거칠고 조잡하다.
몸을 생명형태로 만든 것은 에테르체이다. 이 에테르체를 넘어 혼체(아스트랄체)가 퍼져 나간다. 그 혼체를 넘어서 감각혼이 펼쳐지고, 그 위에 오성혼이 퍼져 있다. 오성혼은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커진다. 진리와 선은 오성혼을 키우는 힘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오성혼은 감각혼과 경계가 일치한다. 몸 주변에 구름 같은 구성체를 아우라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방식으로 아우라를 관찰하면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 수 있다.
어린아이는 성장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생각할 때가 있다. 감수성 풍부한 아이에게는 아주 소중한 체험이다. 시인 장 폴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난 자의식이 발생하던 그 순간을 결코 잊지 않을 수 없다. 그 시간과 장소도 뚜렷이 기억한다. 어느 날 아침, 어린 나는 현관 문 앞에 서서 장작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나는 "나"다라는 의식이, 마치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 이후로 그 빛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나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기억의 착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가장 성스러운 부분에 내려 와, 나를 둘러싼 풍경을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하는 그런 체험을 아무도 이야기해 준 사람이 없으므로."
어린아이는 자기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철수는 착한 아이야."
"영희는 이걸 갖고 싶어 해."
아이는 자신의 독립된 본성을 아직 작가하지 못하며, 아직 자의식이 없으므로 자신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부르기도 한다. 인간은 자의식을 통하여 자신을 모든 다른 것과 구별하며, 자신을 "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몸과 혼으로 체험하는 모든 것을 "나" 속에 통합한다. 몸과 혼과 함께 내가 있고, 몸과 혼 속에서 "나"는 활동한다. 몸의 중심이 뇌이듯이 혼의 중심은 "나"이다.
외부세계는 인간의 감각을 자극한다. 감정은 외부세계의 작용이 있었을 때, 거기에 따라 일어난다.
의지는 자신을 외부세계와 관련짓는다. 의지란 외적 행동을 통해 나를 표현하므로.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 때문에 장 폴은 그런 "나"의 발견을, 인간의 가장 성스러운 부분에 번개처럼 내려오는 체험이라 하였다.
"나"는 혼자다. 그리고 "나"는 인간 그 자체다. 이것이 "나"가 인간의 진정한 본성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몸과 혼을 "나"가 살아간느 외피이며, "나"가 활동하기 위한 조건이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외피를 "나"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다.
"나"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말과 다르다. 이 말뜻을 잘 생각하면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다른 모든 말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모든 책상은 책상이고, 모든 의자는 의자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아무도 "나"를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나"라 할 수 있다. 나에 대한 "나"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들을 수 없다. 단지 내면에서, "나"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때름이다. 그래서 "나"라고 할 때, 외피를 비롯하여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뭔가가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나"를 몸과 혼의 지배자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아우라 속에 표현된다. "나"가 몸과 혼의 지배자가 될수록 아우라는 더욱 분화되고 당야화되고 다채로워진다. 견자는 아우라에서 "나"의 작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나" 그 자체는 볼 수 없다. "나"는 "인간 존재의 가장 성스러운 부분"에 존재하고 있다.
"나"는 영원한 빛을 자신 속에 받아들인다. "나"는 몸과 혼의 체험을 통합하고, 진리와 선에 관련된 사고를 "나" 속에 부어넣는다. 한 쪽에서는 감각이, 다른 한 쪽에서는 영이 "나"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몸과 혼은 "나"에게 봉사하고, "나"에게 의지하지만, "나"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영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나"는 몸과 혼 속에서 살아가고, 영은 "나"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나" 속의 영은 영원하다. 그것을 통하여 "나"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의 본질과 의미를 알게 된다. "나"는 몸 속에서는 광물의 법칙에, 에테르체를 통하여 번식과 성장의 법칙에, 감각혼, 오성혼을 통하여 혼계의 법칙에 따른다. 그리고 영적 존재를 "나" 속에 받아들임으로써 영의 법칙에 따른다. 광물의 법칙, 생명의 법칙을 형성하는 것은 생겨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영은 생성되거나 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혼 속에 살고 있다. "나"의 가장 고차적 표현이 의식혼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나"는 의식혼에서 빛을 발하여 혼 전체를 가득 채우고, 혼을 통하여 몸에 작용한다고.
"나" 속에는 영이 살고 있다. 영은 "나"를 밝히며, "나"라는 옷을 입고 살고 있다. "나"가 몸과 혼을 옷 삼아 그 속에 살듯이, 영은 안에서 바깥으로, 광물계는 밖에서 안으로 "나"를 떠받치고 있다. "나" 속에서 살아가는 영은 "나", 자아, 또는 자신으로 나타나므로 "영적 자아(靈我)"라 할 수 있다.
영적 자아와 의식혼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별된다. 의식혼은 모든 공감과 반감에서 독립된 자기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진리에 관계한다. "영적 자아" 또한 그 진리를 끌어안고 있으며, "나"에 의해 발견되어 "나" 속에 내장되며, "나"에 의해 개체화되고, 독립된 본성이 된다. 영원한 진리는 이렇게 독립하여 "나"와 결합한 하나의 본성이 된다. 그것을 통하여 "나"는 "영적 자아"가 되어 영원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영적 자아"는 "나" 속에서 영계를 표현한다. 그것은 마치 "나"의 감각적 지각이 물질 세계를 표현하는 것과 같다. 빨강, 녹색, 밝고, 어둡고, 강하고, 부드럽고, 따스하고 차가움으로 물질세계는 표현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선하고 진실된 것 속에서 영적 세계의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 물질세계의 표현이 감각이라면, 영계의 표현은 직관이다. 우리는 사고 내용을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단순한 생각 속에도 직관이 들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나"와 결합한 영을 통하여 파악해야 한다.
같은 식물을 앞에 두고도, 성숙한 인간과 미성숙한 인간은 전혀 다른 직관을 가진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감각적인 지각은 같다. 두 사람의 차이는, 그 식물에 대해 한 쪽이 더 완벽한 사고 내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감각으로만 대상을 파악한다면, 영적 진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미개인도 자연을 지각하지만 자연의 법칙은 문명화된 인간의 직관 속에서 형성되는 사고로 나타난다. 어린아이는 외부 자극을 받아 행동한다. 그러나 도덕적 선은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영적 생활을 배우고 그 표현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눈이 없으면 색깔을 볼 수 없듯이, "영적 자아"의 고차적 사고 없이는 직관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각이 형형색색의 식물을 만들어낼 수 없듯이, 직관 또한 영적 실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 직관은 단순히 정보를 줄 수 있을 따름이다.
자아는 직관을 통하여 영계에서 전해 오는 정보를, 감각을 통해 물질세계의 정보를 혼의 생활 속에 끌어들인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영계와 물질 세계를 자기 고유의 혼적 생활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혼, 또는 그 속에서 빛나는 "나"는 영적 차원과 물질 차원이라는 두 방향으로 문을 열어 두고 있는 것이다.
물질계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물질적 소재와 힘, 그리고 물질계에서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계 또한 영적 소재와 힘을 가져야 인식할 수 있다. "나"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영적 육체를 가지고 있어야만 직관을 통하여 영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영적 소재니 영적 육체니 하는 말은 모순이다. 다만, 물질 소재, 인간의 몸에 댕으하는 영적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개개인의 몸이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듯이, 영계 속의 영적 육체는 각각 다르다. 물질계와 마찬가지로 영계에도 안팎이 있다. 우리 몸이 외부에서 영양분을 섭취하듯이, 영적 자아도 영적 자양분을 섭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영적인 것은 인간의 영원한 자양분이다. 인간은 물질계에서 태어나지만 진실과 선이라는 영원의 법칙을 통해 영적 인간으로도 태언나다. 인간은 독립된 존재로서 물질계와 분리되어 있듯이, 영계와도 분리되어 있다. 이렇게 독립된 영적 존재를 "영 인간"이라 한다.
우리의 몸에는 물질계의 소재와 힘이 작용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 인간에게도 영계의 소재와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인간은 피부로 물질계를 지각한다. 그처럼 영 인간도 피부로 둘러싸여 영계에서 독립된 개체로 살아간다. 그리고 직관으로 영계를 지각한다. 이러한 영적 외피를 "영적 피부" 또는 "아우라의 외피"라 한다. 이 "영적 피부"는 인간의 진화와 함께 끝없이 확장되며, 거기에 따라 인간의 영적 개성도 무한히 확장된다.
"영 인간"은 이 영적 피부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몸이 생명의 힘으로 구성되어 있듯이,영적 생명의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테르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에테르령이 영 인간에게 작용하고 있다. 에테르령은 생명령이라 부를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의 영적 본성은 세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영 인간, 생명령, 영적 자아.
영계를 볼 수 있는 자에게, 이러한 영적 본성은 보다 고차적인 영적 아우라로서 지각할 수 있는 현실이다. 견자는 영적 피부에 감싸인 생명령으로 나타나는 영 인간을 볼 수 있고, 그것이 영계에서 자양분을 받아들여 끝없이 성장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양분을 섭취하여 영적 피부가 확장되고, 영 인간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공간적으로 확대되므로, 물론 그것은 현실의 상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혼이 영적 현실과 대응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인간의 육체적 본성은 한정되어 있지만, 영적 본성은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영적 자양분은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아우라는 서로에게 침투되는 두 가지 다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쪽의 형태와 색깔은 육체적 존재에 의해, 다른 쪽은 영적 존재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자아는 이 둘 사이에 서 있다. 물질 요소는 물질의 원리에 따라 그 속에서 혼이 살아 갈 수 있게 육체를 구성한다. 또한 "나"가 영에 순종하여, 혼이 영계에서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한다. 혼은 몸을 통해서 물질계 속에서 살아 갈 수 있다. 그리고 영 인간에 의해 영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날개를 달게 된다.
전인(全人)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몸은 물질 요소로 구성되어 사고하는 자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있다. 거기에 생명력이 깃들어 에테르체 또는 생명체가 형성된다. 몸은 감각기관으로서 외부를 향해 자신을 열어 두고, 그렇게 함으로써 혼체가 된다. 이 혼체에는 감각혼이 깃들어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감각혼은 외부의 자극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작용에 그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감각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사고를 통해 성숙하여, 오성혼이 된다. 감각혼이 오성혼으로 성숙될 수 있는 것은 위로는 직관을 향하여, 아래로는 감각을 행하여 자신을 열어 두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혼은 의식혼으로 성숙된다. 이것은 몸이 혼을 위해 감각기관을 만들어낸 것처럼, 영계가 혼을 위해 직관 기관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혼체를 통하여 감각이, 직관 기관을 통하여 영의 작용이 혼에 전달된다. 이렇게 하여 영 인간은 마치 몸이 혼체 속에서 감각혼과 하나가 되듯이, 의식혼과 결합된다. 의식혼과 영적 자아는 하나다. 그 하나됨 속에서 영 인간은 생명력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마치 에테르체가 혼체를 위해 몸의 생명력을 형성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몸이 피부에 감싸여 있듯이, 영 인간은 영적 외피에 감싸여 있다.
이렇게 볼 때 전인은 다음과 같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몸
에테르체 또는 생명체
혼체
감각혼
오성혼
의식혼
영적 자아
생명령
영 인간
혼체와 감각혼은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 속에서 하나가 되어 있다. 의식혼과 영적 자아는 하나이다. 따라서 인간은 일곱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1. 몸
2. 에테르체 또는 생명체
3. 감각을 가진 혼체
4. 오성혼
5. 영으로 충만한 의식혼
6. 생명령
7. 영 인간
혼 속에서 "나"는 빛을 발하고 영의 작용을 받아들여 영 인간의 매개체가 된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물질, 혼, 영이라는 세 가지 세계를 살아간다. 인간은 몸, 에테르체, 혼체를 통하여 물질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영적 자아, 생명령, 영 인간을 통하여 영계에서 꽃을 피운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나무 둥치는 어디까지나 혼이다.
인간을 이와 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보다 간결하게 설명할 수도 있다. 비록 "나"는 의식혼 속에서 빛을 발하지만, 그 빛은 혼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혼은 몸의 구성 요소처럼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되어 있다. 오성혼과 의식혼이 "나"에 속하고, 그것이 "나"라는 핵을 둘러싼 표피라 할 때, 우리는 인간을 몸, 생명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나"로 구분할 수 있다. 아스트랄체란 혼체와 감각혼을 통합하는 말이다. 아스트랄체라는 말은 옛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에 두루 두루 적용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감각혼은 어떤 면에서 "나"에 의해 힘을 가지게 되지만, 혼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므로 아스트랄체라는 하나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나"가 영적 자아로 충만해지면, 혼 속에서 변화한 아스트랄체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아스트랄체 속에는 그 자신이 느끼는 인간의 충동, 욕망, 정욕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감각적 지각도 활동하고 있다. 감각적 지각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요소로서 혼체를 통해 나타난다. 충동, 욕망, 정욕 등은 영적 자아에 따르지 않는 감각혼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나"가 영적 자아로 충만할 때, 혼이 아스트랄체를 영적 자아로 가득 채울 때, 충동, 욕망, 정욕은 "나"가 영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을 통하여 밝게 드러난다. "나"는 그렇게 영적 세계에 관여함으로써 충동과 욕망의 지배자가 된다. "나"가 얼마나 지배력을 가지는가는 아스트랄체 속에 나타나는 영적 자아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스트랄체는 그 영적 자아에 의해 변화되기 때문이다. 아스트랄체는 변화한 부분과 변화하지 않은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나타나는 영적 자아는 변화한 아스트랄체라 할 수 있다.
"나" 속에 생명령을 받아들일 대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생명령을 받아들이면 생명체가 변화한다. 생명령을 받아들이면 생명체는 이미 과거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생명령이란 변화한 생명체라 할 수 있다. "나"가 영적 인간을 받아들이면, 몸은 거기에 맞게 강한 힘을 얻는다. 물론 이렇게 변화한 몸은 감각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 인간으로 인하여 몸 그 자체가 영적으로 변화하였으므로, 몸은 물질적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변화한 몸은 영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비록 영적인 변화를 겪었다 하더라도 몸은 어디까지나 외적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날 따름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인간의 구성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몸
생명체
아스트랄체
나 ㅡ 혼의 핵심
영적 자아 ㅡ 변화한 아스트랄체
생명령 ㅡ 변화한 생명체
변화한 몸 ㅡ 영적 인간
영의 재생과 운명
혼은 몸과 영 사이에 살아간다. 혼이 몸으로 느끼는 것은 일시적이며, 몸이 외부세계로 감각을 열어 둘 때에 한해서 지속될 뿐이다. 내 눈앞에 장미가 놓여 있고, 또 눈이 장미를 향해 열려 있을 때, 그 색깔을 지각할 수 있다. 인상, 감각, 지각은 외부 세계와 그것을 감지하는 몸의 기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영이 인식한 진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장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내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령 내가 한번도 장미를 본 적이 없다 해도 진리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한 영의 인식은 몸과는 상관없는 요소가 혼 속에 존재하고 있고, 그것이 우주 내용과 혼을 연결시켜 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의식에 나타나는 우주 내용이 불변하는 것이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혼에 나타나는 이것이 항상 변화하는 몸적 요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혼 속의 이러한 지속적인 부분은 무상한 요소에 제약되지 않는 혼적 체험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관찰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체험들이 항상 변화하고 일정하지 않는 몸 조직의 기능에 의해 비로소 의식될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니라, 혼 속에 존재하면서, 게다가 무상한 지각의 활동으로부터 독립된 무엇인가를 그 체험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혼이 현재와 지속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은 영과 몸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런 혼은 현재와 지속을 매개하기도 한다. 지금 일어난 일을 기억 속에 입력시킴으로써, 혼은 무상한 현재를 영적 지속성 속에 편입시킨다. 또한 혼은 시간 속에서 늘 변화하는 존재를 늘 똑같은 모습으로 지속되게 한다. 그것은 혼이 일시적 자극에 매몰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외부로 나아가 행위 속에서 외부세계와 자신의 본질을 하나로 통합하기 때문이다. 혼이란 기억을 통하여 어제를 지속시키고, 행위를 통하여 내일을 예비하는 것이다.
만일 장미의 붉은색을 기억할 수 없다면, 혼은 늘 새롭게 그것을 지각해야 할 것이다. 외부에서 인상으로 남는 것, 혼에 의해 지속되는 것은 단순히 외적 인상으로 남지 않고, 독립하여 언제든 우리의 의식에 떠오를 수 있다. 이런 표상 능력 덕분에 외부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옮기고, 그 내부 세계를 기억력으로 떠올릴 수 있게 지속시키며, 인상에 좌우되지 않고 그 내부세계와 더불어 독립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혼의 생활은 늘 변화하는 외부세계의 지속 효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도 외부세계에 무언가를 새겨 넣으면 지속성을 띠게 된다. 내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 하자. 그것은 내 혼의 작용에 의해 외부세계를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만일 내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지 않았더라면 그 나무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행위에 의해, 내가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어떤 결과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오늘 행한 일이 내일에도 지속되는 셈이다.
보통 우리는 행위에 의한 지속화와 기억에 의한 지각체험의 지속화를 다르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는 행위의 결과로 일어난 외부세계의 변화와 인상으로 얻은 기억을 같은 차원에서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자아는 새로운 인상을 받으면 자신의 기억 내용에 따라 다른 판단을 거기에 첨가한다. 그리고 "나"는 행위에 따라 세계와 다르게 관계한다. 세계와 "나"의 관계는 어떤 행동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주변에 어떤 인상을 준 후로는 세계와 "나"의 관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
어떤 기억을 가짐으로써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에 주목하지 못하는 것은 기억이 형성되는 순간, 그것이 자신에 속한 것처럼 느끼는 혼이 작용에 의한 것일 뿐이다. 외부에 작용하는 행위의 결과는 혼의 작용과 동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므로, 기억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행위가 일어나면 이 세상에 "나"의 흔적이 새겨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생각해 보면, 이런 의문이 일어난다.
"나"에 의해 외적 세계에 새겨진 흔적은, 마치 기억이 어떤 외적 계기를 통해 "나"에게 상기되듯이, 다시 "나"에게로 다가오려는 경향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 마치 기억이 그러하듯이, 외부 세계에 새겨 넣은 나의 행위의 결과도 어떤 계기로 인하여 "나"에게 다가올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여기서는 일단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치기로 하자. 자아의 본성이 배어 있는 행위의 결과가 그 혼과 만날 기회가 전혀 없는 경우도 있을 터이므로.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결과가 존재하고 있고, 그 존재함을 통하여 세계와 "나"의 관계가 결정된다 라는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가능성이 인간의 삶 속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나는지를 고찰해 볼 때가 됐다.
먼저 기억을 살펴보자. 기억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분명 기억은 감각이나 지각과는 다른 길을 따르고 있다. 눈이 없으면 "청(靑)"을 지각할 수 없지만, 눈만으로는 "청"을 기억할 수 없다. 눈이 청의 감각을 가지기 위해서는 눈앞에 푸른 무엇이 놓여 있어야 한다. 이런 지각행위를 통해 현재의 이미지를 가지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외부세계와 나의 관계를 새로이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몸적 본성은 모든 인상을 망각 속에 지워버릴 것이다. 이것은 처음에 이미지가 일어났던 과정을 내적으로 반복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혼적 활동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늘의 이미지를 어딘가에 저장해 두었다가 내일 다시 불러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잘 알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진 이미지는 "지금"이 흘러가면서 같이 사라져 버리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와 나의 어떤 관계의 결과로서 내 속에 새로운 과정이 일어난다는 것으르 말한다. 그러므로 기억을 통해 의식의 전면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늘 새로운 이미지이다. 기억이란 창고에 저장한 이미지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에 다시 나타난다는 것은 예전의 이미지와는 다른 무엇이다.
영학은 이처럼 보통의 삶이나 보통의 학문보다 더 엄밀하게 개념을 다룬다.
기억한다는 것은 이미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의 체험을 지금의 생활과 결합시킨다. 어떤 기억에 대해서는 이런 말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어제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가정하자. 만일 어제 내가 지각을 통해 만들어낸 이미지를 오늘의 인상에 결합시킬 수 없다면, 그는 나에게 미지의 인간이다. 나의 지각, 즉 감각조직을 통해서 그에 대한 오늘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누가 어제의 이미지를 내 혼 속으로 불러내 주는가? 그것은 어제의 체험에도 작용하고 있고, 오늘의 체험에도 작용하고 있는, 내 속에 있는 동일한 존재이다. 앞에서도 나는 그것을 "혼"이라 하였다. 과거의 체험을 이렇게 충실하게 간직해 주는 존재가 없다면, 어떤 외적 인상도 늘 새로운 것이 될 것이다. 혼은 마치 기호를 새기듯이, 기억이 될 과정을 몸에 새겨 넣는다. 그러나 혼은 이러한 인상을 새겨 넣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외적인 것을 지각하듯이 그것을 지각한다. 이렇게 하여 혼은 기억의 보존자가 되는 것이다.
과거의 보존자로서 혼은 끊임없이 영에게 필요한 체험을 끌어 모은다. 내가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사고하는 인간으로서 진리를 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영원하므로, 설령 내가 과거를 그때마다 망각하고 늘 새로운 인상밖에 가질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물을 통해 나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내 속의 영은 지금 나타나는 인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혼이 영의 시계를 과거까지 넓혀주고, 혼이 과거에서 가지고 온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점점 더 영의 시계는 풍성해진다. 그처럼 혼은 몸을 통해 받아들인 것을 영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은 어떤 경우에도 그 속에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진, 선의 영원한 법칙을, 둘째로, 과거 체험들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영은 이 두 가지 요소의 영향 하에 행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간의 영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먼저, 얼마만큼 영원한 것이 그에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과거의 체험이 그 속에 얼마나 축적되어 있는가.
이러한 체험들은 결코 영에게 불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체험에서 얻은 인상은 이윽고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간다. 그러나 그 열매는 사라지지 않는다. 글쓰기를 배우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사라졌다. 그러나 기억이 없다 하더라도, 그 열매로서 나타난 글쓰기 능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영이 기억에 가하는 변환 작용이다. 영은 개개의 체험들이 하나의 영상으로 남는가 않는가는 그 자체의 운명에 맡겨 버리고, 그 가운데서 능력을 고양시키는 힘만을 끄집어낸다. 이렇게 하여 어떤 체험도 그냥 지나쳐 가게 하지 않는다. 혼은 체험을 기억에 보존하고, 영은 능력을 고양시키며, 거기서부터 생활을 풍성하게 할 무엇을 받아들인다. 인간의 영은 이렇게 받아들인 체험들을 통하여 성장하는 것이다. 설령 과거의 체험들이 영 속에 창고 속의 물건처럼 보관되어 있지 않다 해도, 그 체험들은 인간이 획득한 능력 속에 깃들어 있다.
이상으로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영과 혼을 관찰해 보았다. 물론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몸을 그 범위 안에서만 고찰하려는 것과도 같다. 그 범위 안에서도 탐구해야 할 많은 과제가 있지만,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는 결코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으 몸은 단순한 물질적 소재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몸은 생식 작용의 결과로서, 똑같은 몸의 형식을 가진 것으로부터 태어난다. 물질적 소재나 힘은 그것이 살아 있을 동안에만 인간의 몸을 형성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 생식력에 의해 하나의 몸에서 똑같은 형태의 생명체를 가진 다른 몸이 발생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조상의 복제품이다. 아무렇게나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유전된 형태를 가지고 태어난다. 나라는 인간의 모습을 가능하게 한 힘은 나의 조상에게도 작용하였다.
인간의 영 또한 특정한 형태를 가지고 나타나며, 그 영의 모습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두 사람이 같은 영적 모습을 나타내는 법은 없다. 물질계와 마찬가지로 냉철한 눈으로 영의 세계를 관찰해야 한다. 그 관찰을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본 인간의 차이점이 환경이나 교육 등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교육을 받아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자질을 가지고 삶을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면 인간의 본성에 빛을 비출 수 있는 중요한 사실에 직면하고 있다. 물질적인 측면으로만 본다면, 인격으 개인차는 태아의 물질적 구성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멘델이 발견하여 그 후에 발전을 거듭해 온 유전법칙의 관점에서 그런 주장은 과학적으로 타당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인간과 그 체험들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따름이다.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몸의 발육과는 직접적으로 상호 관련이 없는 무엇인가를 통하여 외적 상황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영역을 엄밀하게 탐구한 사람이라면, 물질적인 것에 유래하는 것과 인간과 체험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한 것은 다르다는 것, 그리고 이 상호작용은 혼에 의해 행해진자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혼은 외부세계의 어떤 것과 관계하지만, 그것은 그 본성상 태아의 물질적 구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인간은 그 몸의 모습으로 보아도 지구상의 다른 동물과 다르다. 그러나 인간 서로는 어떤 범위 내에서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의 인간 종밖에 없는 것이다. 인종, 민족, 씨족,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의 몸적 동질성은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의 그것보다 현저하다.
인류의 특징은 조상에서 자손으로 유전된다. 인간의 모습은 이 유전과 때어 설명할 수 없다. 호랑이가 그 조상을 통하여 그런 모습을 이어받듯이, 인간도 그 조상으로 통하여 그 몸의 모습을 이어받는다.
눈으로 인간의 몸적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듯이, 인간의 영적 모습의 차이점도 편견 없는 영적인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인간의 전기이다. 만일 인간이 단순한 종의 한 구성체에 지나지 않는다면 전기란 존재할 수 없다. 한 마리 사자, 한 마리 비둘기는 그 사자나 비둘기라는 종에 속함으로 의미가 있다. 그 종이 설명되면 각 개체의 본질도 파악된다. 아버지인가, 아들인가, 손자인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종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개체이기에 의미를 가진다. 아무리 그의 아버지, 아들에 대해 설명했다 해도, 그것은 밤골에 사는 영희의 개성을 설명한 것이 아니다. 밤골에 사는 영희의 전기를 알아야만 한다. 전기의 본질을 잘 아는 사람은 영적 관계성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종족과도 같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물론 전기를 인생에서 일어난 단순한 사건들의 집합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개의 전기도 인간의 전기처럼 쓸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전기 속에 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기술하는 사람은 그 속에 동물의 종 전체에 대응하는 무엇이 있음을 알 것이다. 어떤 동물, 특히 현명한 동물에 관한 것이라면 전기에 해당하는 어떤 기술이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전기란 그런 현명한 동물의 전기가 아니라, 동물의 한 종의 기록에 상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같은 종류의 동물이라 해도 하나 하나가 얼마나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서커스의 사육 담당자의 감각으로 위와 같은 사고를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개의 존재적 차이와, 개성에 의해 발생하는 차이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육체적 의미에서 종(種)과 유(類)는 유전과의 관련 하에서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지만, 영적 본성은 영적 유전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나의 체형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혈통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나는 나의 전기 속에 기록되는 그런 것을 어디서 얻을까. 육체적 존재로서, 나는 조상의 체형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영적 존재인 나는 무엇을 반복하고 있을까. 나의 전기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면 딱히 알 필요도 없지 않는가,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산처럼 쌓여 있는 원료 덩어리가 저절로 뭉치더니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다"라고.
몸을 가진 나는 몸을 가진 인간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인류와 공통되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유의 특성은 유의 내부에서 유전을 통하여 전해진다. 한편, 영적 인간으로서 나는 나만의 전기, 나만의 형상을 가진다. 그러므로 나는 나 이외의 누구로부터도 이 영적 형상을 물려받지 않았다. 나는 불특정 다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의 혼적 소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소질을 통하여 전기가 나타내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므로, 나 자신에 대한 나이 작용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영적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조상 가운데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상들은 영적 인간으로서 나와는 다른 존재이므로. 나의 전기는 그들의 전기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영적 인간으로서 나는 그 전기로 나의 전기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존재의 반복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나의 전기 내용을 만들어낸 것은 태어나기 이전의 영계 생활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의 혼에 물질적 환경이 작용하는 것과 영계에서 획득한 것이 같은 종류라고 가정할 때만 성립할 수 있다. 이런 가정은 엄밀한 관찰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물질적 환경으로부터 인간의 혼에 작용하는 것은 이전에 경험했을 때나 앞으로 경험할 때나 한결같이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올바르게 고찰하기 위해서는 인간 생활 속에서 새로이 뭔가를 시작했을 때, 이미 이 세상에서 배우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인생에서 실제로 습득한 능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는 혼의 선천적 소질을.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이 인생에 앞서 몇 번이 다른 인생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현재의 지상생활 이전에는 오로지 순수하게 영적인, 영계의 체험만이 있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시인 쉴러의 체격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것이 흙덩어리에서 생겨나지 않았듯이, 쉴러의 영적 본성도 그렇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쉴러의 육체적 형상이 인간의 생식작용으로 설명되어야 하듯이, 그의 영적 본성 또한 그의 전기에서 그의 전기가 설명하는 바의, 어떤 다른 영적 본성의 반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 형상이 늘 인간이라는 유의 본성을 반복하는 것이며 재생인 것처럼 영적 인간은 같은 영적 인간의 재생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영적 인간으로서 자기만의 유일한 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반론을 펼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자연과학에서처럼 외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그러나 영적 인간의 재생은 물질적 세계에 속하지 않는 완전히 영적 분야의 일이며, 이 분야에서는 우리의 정신적 능력 가운데서도 사고력 외에는 어떤 힘도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고력을 신뢰하지 않으면 고차의 영적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명할 수 없다.
영의 눈이 열린 사람에게 이런 사고 과정은 육체의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과 다를 바 없는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보통의 자연과학적 인식 방법으로 "증명"하는 쪽이 전기가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내가 논한 것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일반적인 의미에서 위대한 과학자일 수는 있겠으나 진정한 영적 탐구의 길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
어떤 사람의 영적 특질을 부모나 조상에게 물려받는 유전으로 설명하는 것은 하나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괴테의 본질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전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유도 설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올바른 관찰에 대한 깊은 반감이 있기 때문이다. 유물론의 그림자가 모든 관련성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우리의 능력을 방해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생과 사를 넘어 인간을 탐구할 몇 가지 전제가 마련된 셈이다. 생과 사 사이에 한정된 인간은 육체적, 혼적, 영적인 세 개의 세계에 속해 있다. 혼은 몸과 영의 중간부분을 이루고 있고, 몸의 제3의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혼체에 감각능력을 주고, 영의 제1부분인 영적 자아를 의식혼 속에서 활동하게 해 준다. 혼은 살아 있을 동안 몸과 영에 관련된다. 이 관련은 혼의 존재 전체로서 표현된다. 감각혼이 어떻게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가는 혼체의 조직에 따라 결정된다. 다른 한편, 영적 자아가 얼마나 혼 속에서 발달할 수 있는가는 의식혼이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감각혼은 혼체가 잘 발달되면 될수록, 외부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가진다. 영적 자아는 의식혼으로부터 영양분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보다 풍요롭고 힘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살아 있을 동안 체험과 체험의 성과를 통하여 영적 자아에게 이러한 영양분이 공굽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혼과 영 사이에 이러한 상호작용은 당연히 혼과 영이 서로 침투하고 뒤섞이는 상태, 즉 "영적 자아와 의식혼"의 합일상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먼저 혼체와 감각혼의 상호작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혼체는 몸적 본성이 가장 세밀하게 형성된 것이면서 동시에 몸적 본성에 속해 있고, 거기에 의존한다. 몸, 에테르체, 혼체는 어떤 관련성 하에서 하나의 구조물이 된다. 그러므로 혼체도 육체에 형상을 부여하는 유전 법칙에 따르고 있다. 또한 혼체는 몸의 본성 가운데서도 가장 유동적인 형태이므로 유전에 있어서도 매우 유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 때문에 몸은 인종이나 민족, 그리고 부족 내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에테르체도 개개인 모두 다르기는 하지만 인종, 민족, 부족 내부에서 어떤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혼체는 거기에 관계없이 개개인의 차이가 매우 크다. 외적 분위기에서도 개인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즉, 혼체는 개인적인 특징 가운데서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인 부분의 주재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혼 그 자체는 완전히 독자적인 생활을 한다. 그것은 좋다 싫다와 같은 감정이나 욕망을 가진 완결된 존재이다. 그와 동시에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도 조화롭게 활동하고 있으므로 감각혼에도 그 전체성이 명백히 새겨져 있다. 이 감각혼이 혼체에 침투하여 가득 차게 되므로, 혼체는 혼의 전체성에 따라 형성되며, 또한 유전의 주재자로서 성향, 욕망 등을 조상으로부터 자손에게로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괴테의, "아버지로부터 체격과 성실한 생활태도를, 어머니로부터 쾌활한 성격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물려 받았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괴테의 천성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인간이 어떤 혼의 특질을 육체적인 유전 속에 이입시키는지 이해할 수 있다.
몸의 성분이나 힘은 외적 자연계 속에 균등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런 성분들은 자연계에서 끊임없이 섭취되고 배설되어 나간다. 몇년만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성분은 모두 새것으로 바뀐다. 이 성분이 인체라는 형태를 이루고, 인체 내에서 새로운 것으로 교체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에테르체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형태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결정될 뿐만 아니라, 탄생과 죽음을 넘은 유전의 법칙에도 의존하고 있다. 혼의 특질도 유전을 통해 전해질 수 있다. 육체의 유전 과정에 혼이 개입될 수 있는 것은 혼체가 감각혼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혼과 영의 상호작용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살아 있는 동안 영은 혼과 결합되어 있다. 혼은 진과 선 속에 살아가는 능력과 성향, 충동, 욕망이라는 혼 독자적인 활동 속에 영을 표현하는 능력을 영으로부터 받아들인다. 영적 자아는 "나"에게 영계로부터 진과 선의 영원한 법칙을 이끌어낸다. 이 법칙은 의식혼을 통하여 혼 독자적인 체험 내용과 결합된다. 체험 그 자체는 사라져 간다. 그러나 그 성과는 남는다. 즉, 영적 자아는 이러한 체험과 결합되어 있음으로 해서, 거기서부터 지속적인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 한번 체험한 것과 비슷한 어떤 다른 체험에 인간의 영이 결합되기 시작할 때, 영은 그 체험 속에 어떤 친화성을 느끼고 처음 대하는 것과는 다른 태도로 그것을 체험한다. 모든 학습은 이런 능력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학습 성과가 바로 능력의 획득이다.
이렇게 하여 변화해 가는 삶의 결실이 영원히 영 속에 새겨져 가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 결실을 지각하고 있는 것일까? 영적 인간의 특성으로 지금 말한 소질은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는가. 지상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능력에 기초하고 있을 것이다. 이 능력은 어떤 점에서 생존 중에도 획득할 수 있는 능력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한 인간의 천부적 자질을 예로 들어보자. 어린 시절의 모짜르트는 한 번 들으면 아무리 긴 곡이라 해도 기억만으로 악보에 옮겨 적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전체를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정한 범위 내에서라면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전체를 조망하고 그 관련성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확대하여 그 결과로 새로운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레싱은 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적 통찰력을 통하여 천재에 필적하는 무엇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질에 기반을 둔 능력을 기적이라고 그냥 감탄하고만 있고 싶지 않다면, 그런 능력은 영적 자아가 혼을 통하여 획득한 체험들의 성과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 능력은 영적 자아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새겨진 것이 아니라면, 전세에 새겨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의 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를 이룬다. 그리고 하나의 유라 할 수 있는 몸적 존재가 그 특징을 유 속에 유전하듯이 영은 영의 유 속에, 다시 말해 자기 자신 속에 그 특징을 전하는 것이다. 어떤 인생 속에서 인간의 영은 자기 자신의 반복으로서, 전세의 체험들의 성과를 가지고 나타난다. 그 인생은 이전의 인생의 반복이며, 영적 자아가 전생에서 배워 얻은 것을 필연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영적 자아는 체험들을 자신 속에 섭취할 때, 자신을 생명력 속에 스며들게 한다. 생명체가 종에서 종으로 그 형태를 반복하듯이, 생명령은 혼을 개인적 존재에서 개인적 존재로 반복하는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인간의 특정 생활의 근거를 윤회전생 속에서 탐구하는 사고방식이 타당성을 얻게 된다. 이 사고방식은 본서의 끝 부분에 있는 인식의 길을 걸음으로써 얻게 되는 영적 통찰에 의해 비로소 그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여기서는 단지 사고를 통하여 올바른 방향성을 가진 일반적인 관찰 방법으로도 그런 사고 방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데 만족하기로 하자. 물론 이런 사고방식은 처음에는 흐릿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엄밀하지도 않고, 잘못된 사고와 관찰에 근거를 둔 비난에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찰을 통하여 이러한 사고방식을 획득하는 것 자체가 초감각적 관찰에 이르는 준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무엇인가를 관찰하려면 건강한 눈이 있어야 한느 것처럼, 초감각적 관찰을 위해 필요한 무엇인가가 반드시 형성된다. 이런 사고방식이 초감각적 관찰 그 자체에 암시를 걸지도 모른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유롭게 사유하며 현실에 관계하려는 태도를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비난을 통하여 스스로 그 비난에 암시를 걸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혼의 체험들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만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계속된다. 그러나 혼은 혼 속에서 빛나는 영에 그러한 체험을 새겨 넣을 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하여 외계에도 그것을 새겨 넣는다. 내가 어제 행한 일은 오늘도 작용하고 있다. 이런 인과관계는 잠과 죽음에 빗대어 표현할 수 있다.
죽음과도 같이 깊은 잠이란 말이 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난다. 나의 일은 밤에 중단된다. 보통 우리는 아침에 자신의 일을 바로 시작할 수 없다. 생활의 질서와 관련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제 한 일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어제의 행위는 오늘의 행위의 전제가 된다. 내가 어제 행한 것은 오늘도 작용하고 있다. 한때 나는 일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나 이 일은 나에게 속해 있고, 거기서부터 떨어진 나를 일 쪽으로 끌어당긴다. 나의 과거는 나와 결합되어 있고, 나의 현재 속에 살아 움직이며, 미래에도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제 한 행위의 결과가 오늘 나의 운명이 아니라고 한다면, 오늘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 새로이 태어난 것이다. 만일 내가 집을 다 지어놓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집을 비워 둔다면, 그 집을 지은 이유가 없어지고 만다.
인간이 오늘 아침에 새로이 창조되지 않았듯이, 인간의 영 또한 이 지상의 생활을 시작할 때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명백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유전법칙에 따라 새로이 형태를 얻은 육체가 나타난다. 육체의 형태는 이전의 생을 반복하는 영을 새로이 보존하는 자이다. 그 육체와 영 사이에 그 자신의 고유한 생활을 해 나가는 혼이 있다. 사랑, 혐오감, 바람, 욕망이 혼의 생활을 형성하고 있다. 혼은 자신을 위해 사고력을 사용한다. 혼은 감각혼으로 외계의 인상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거기서 얻은 성과를 영속적으로 흡수하기 위해 그 인상을 영에 새겨 넣는다. 혼은 이른바 중개자 역할을 하고, 그 역할을 다함으로써 자기의 사명을 완성한다. 몸은 혼을 위해 인상을 형성하고, 혼은 그것을 감각내용으로 바꾸며, 기억 속에 표상내용으로서 보관하고, 영에게 그것을 제공하고, 그리고 영이 그것을 영속적으로 유지해 나간다. 혼은 본래 지상생활의 주역이다. 인간은 몸을 통하여 생물학적인 인류에 속한다. 우리는 그 몸을 통하여 인간이라는 유의 일원이 된다. 영으로서 인간은 보다 고차의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 혼은 일정 기간 이 두 세계를 연결시켜 준다.
그러나 인간의 영이 발을 들여 놓는 물질세계는 그 영에게 전혀 미지의 세계는 아니다. 거기에는 그의 행위가 남긴 흔적이 새겨져 있다. 그 무대의 모든 것은 그에게 속하고, 그의 본질을 형성하고, 그와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혼은 외계의 인상을 이 영에게 넘겨줌으로써 그 인상을 영속시키는 한편, 그와는 반대로 영의 기관으로서 영이 보내는 능력을 행위로 전환하여, 그 작용이 물질계에 영원히 작용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혼은 행위 속에 흘러 들어간다. 행위의 결과 속에서 인간의 혼은 독립된 제2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어떻게 운명의 작용이 인생에 관련되는가, 라는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를 주는 것이다.
뭔가가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런 "관련"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이러한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마흔에 이른 사람이 인생을 돌이켜 보고, 자신의 혼의 본질을 단순한 추상적인 자아 표상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고 싶지 않다면, 다음과 같이 반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까지 운명적으로 나에게 관련되어 온 것을 통하여 지금의 나가 형성되었다. 만일 내가 스무 살 때 겪은 체험들 대신에 다른 체험을 가졌더라면, 나는 다른 존재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단순히 "내부에서" 오는 성장충동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형성되어 인생에 관계하려는 것 가운데서도 "나"를 찾을 것이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 속에서 그는 자신의 자아를 인식한다. 만일 이 인식이 진실로 가능하다면,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명 체험을 통하여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것 가운데서 과거의 체험을 밝음 속에 드러내는 기억이 내적 자아에게 작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외부에서 자아로 작용해 오는 것을 본다. 인간은 이렇게 하여 혼의 행위가 어떻게 자아의 길을 걸어가는지를 운명 체험 속에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외적인 계기를 통해 기억 속에서 이전의 체험이 의식화되는 것과 똑같다. 행위의 결과가 그 행위의 주체인 인간의 혼 앞에 다시 나타날 수 있다. 단 한 번뿐인 이 세상의 생활이라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행위의 결과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생활이란 새로운 행위를 위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험의 의미는 행위의 완성 속에 있다. 마치 체험하고 있는 도중에는 그 체험을 기억해 낼 수 없는 것처럼, 그 행위의 결과는 혼 앞에 나타날 수 없다. 이러한 체험에서 문제가 되는 행위의 결과는, 그 행위를 하는 "나"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질에는 전혀 관계가 없는 행위의 결과이다. 전생의 생활에서 유래하는 행위의 결과만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외부에서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운명 체험이 마치 자아에 의해 "내부에서" 만들어져 자아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어, 이 운명체험과 전생의 행위 결과가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생갈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하여 사고의 빛에 비추어진 친밀한 인생관을 통하여, 이 세상의 운명 체험이 전생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상식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가설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초감각적 인식에 의해서만 충분한 내용을 가질 수 있고, 그 인식이 없다면 흐릿한 그림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렇지만 일상 의식만으로 이러한 가설에 이르는 것은 진실로 초감각적 관찰을 통하여 그 진실을 볼 수 있는 준비작업이 된다.
내 행위의 한 부분은 외부에 있고, 다른 부분은 내 안에 있다. 자아와 행위의 이 관계를 단순한 자연과학상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원래는 시럭을 가지고 켄터키의 한 동굴에 들어 간 동물이 오랜 동안 동굴 생활을 하다가 시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둠 속의 생활이 눈을 활용할 기회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따라서 눈에 의한 시력활동에 동반되는 물리화학적 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작용을 위해 소모되던 영양분은 다른 기관 쪽으로 흘러 갈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동물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만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이 동물은 동굴로 이주하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미래의 생활 조건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이주는 이 동물의 운명의 한 부분이 되었다. 예전에는 작용하던 하나의 능력이 행위의 결과와 결합하여 다른 능력으로 변화하였다. 똑같은 일이 인간의 영에도 적용된다. 혼은 행위를 통하여 영에 특정한 능력을 부여할 수 있다. 인간의 영이 어떤 능력을 가지는가는 그 혼이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달렸다. 혼의 행위를 통하여 이런 행위의 결과로서 다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의 소질이 혼 속에서 일어난다. 다른 행위가 이루어지는 동안 혼은 비로소 행위의 성과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행위를 통하여 혼은 이 행위의 결과를 청산하려는 필연성을 스스로 가지게 된다.
이렇게 인간의 영은 행위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불러온다. 그는 지금도 전생의 행위 결과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인간의 영이 예전에 살았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이런 의문은 운명의 연쇄를 외적 생활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면,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셈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생활은 예전에 살았던 유럽 생활에 의존해 있다. 유럽에서 기계공이었던 경우와 은행원이었던 경우에 따라 미국의 생활이 다르게 형성될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예전 생활이 지금의 환경을 결정하고 있다. 예전의 생활이 새로운 환경 전체 속에서 자신에게 친숙한 것을 가려내어 그것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영적 자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적 자아는 새로운 인생에서도 필연적으로 자신의 주위를 전생에서 친숙했던 것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리고 잠이 죽음의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잠 속의 인간이 운명의 무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잠을 잘 때도 이 운명의 무대에서는 사건이 진행되어 간다. 잠시 동안 우리는 그 진행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의 우리 생활은 어제의 행위의 결과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행위 세계 속에서 실제로 아침이 될 때마다 새로운 육체에 깃든다. 잠들어 있을 동안 우리를 떠나 있던 것들이 아침이 되면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전생의 행위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마치 어두운 동굴이 그 동굴에 들어 온 결과 시력을 잃어버린 동물의 생활과 결합되어 있듯이, 전생의 행위들도 운명이 되어 인간과 결합되어 있다. 그 동물이 스스로 이주해 온 환경 속에서만 살아 갈 수 있듯이, 인간의 영 또한 스스로의 행위를 통하여 만들어낸 환경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상태에 놓일 수 있는 것은, 상황 그 자체의 자연적인 흐름이며, 나의 영과 주변 사물의 유사관계가 다시 태어난 나에게 전생의 행위 결과에 어울리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혼이 어떻게 인간의 본질에 결합되어 있는가에 대해 하나의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육체는 유전법칙을 따른다. 한편, 인간의 영은 거듭 거듭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윤회전생의 법칙은 인간의 영이 전생의 성과를 다음 삶 속에 가지고 들어오는 데에 있다. 혼은 전생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현세의 생활은 전생의 생활로부터 독립된 것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는 영이 전생으로부터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운명이 인생을 규정한다. 혼이 어떤 인상을 가질 수 있고 어떤 바램을 충족시킬 수 있고, 어떤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는 모두가 영의 윤회전생 속에서 어떤 행위를 했는냐에 달려 있다. 한 인생에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을 다음 인생에서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혼만이 아니라, 이 혼과 연결된 다른 사람의 혼들 또한 같은 시대에 다시 태어나려고 노력할 것이다. 혼의 행위는 이렇게 인간의 영이 스스로 만들어낸 운명의 한 결과이다. 세 가지 사항이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일생을 규정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인간은 탄생과 죽음을 초월하고 있는 요인에 세 가지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다.
육체는 유전 법칙에 따른다. 혼은 스스로 만들어낸 운명에 따른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 운명을 카르마(업)라고 한다. 그리고 영은 윤회전생의 법칙에 따른다.
그러므로 영, 혼, 몸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영은 멸하지 않는다. 탄생과 죽음은 물질계의 법칙에 따라 신체를 지배하고 있다. 운명에 따르는 혼의 행위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이 양자에게 관련성을 부여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더 이상의 인식을 얻으려면 인간이 속해 있는 "세 가지 세계" 그 자체를 알아야 한다. 다음 장에서는 이 세 가지 세계를 다루도록 하겠다.
인생의 현상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인생의 진실에 응하여 얻은 사상을 마지막 순간까지 두려움 없이 밀고 가면, 사고의 논리만으로도 우리는 윤회전생이나 운명법칙의 관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 눈"이 열린 견자에게 과거의 인생이 펼쳐진 두루마리처럼 하나의 체험으로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듯이, 이 진리가 사색하는 이성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 또한 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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