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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카발라 - 6장. 인간의 실락과 회복 본문
6장
인간의 실락과 회복
에덴동산에 뱀이 있었다는 사실은 다른 피조물들이 아담과 이브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그곳에 존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피조물들은 특별한 미션을 가지고 지구에 보내진 천사 하이어라키에 속했다. 일단 그들이 사역을 완수하자 그들 중 일부는 신에게로 돌아가기를 거절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했고 신 없이도 잘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상에 머물거나 자신들이 온 곳으로 돌아가거나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머무는 쪽을 선택했다. 이것이 바로 반역의 천사들로 알려진 존재들의 죄인 것이다. 즉 신성한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거절하고 신과의 단절을 결심한 것이 그들의 죄이다. 이러한 분리, 신으로부터의 멀어짐 때문에 그들은 악마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모든 과학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성한 사랑과의 접촉을 상실했고 악의 피조물들이 되었다. 뱀에게는 손과 발이 없다. 보편적인 상징학에 의하면 발은 친절을, 손은 정의를 상징한다.
반역의 천사들은 에그레고어egregor(집단 상념체)를 형성했다. 그들의 심벌은 선악의 지식 나무를 감고 있는 뱀이다. 나무 그 자체 역시 하나의 심벌이다. 그것은 빛과 어둠의 두 흐름을 상징한다. 하나는 '위'로부터 흐르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 흐른다. '위'는 태양 또는 천상을 상징하고 '아래'는 지구의 중심 또는 지옥을 상징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임무는 동물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이 동물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동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들과 같은 영역에 속해 있었고 그들의 몸은 빛을 발했다. 신은 아담에게 그 동물들을 돌보는 임무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이름도 지어주도록 시켰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는 아담의 지식이 진실로 위대한 수준이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름을 짓는 것은 카발라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름은 문자(알파벳)로 구성되고, 각 문자에는 숫자값이 주어진다. 각 문자와 숫자는 특정한 우주력, 우주원리와 연결된다. 아담은 모든 피조물들의 진동을 알고 별, 행성, 우주 흐름과의 대응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물들에게 적절한 이름을 지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브에게는 식물들을 돌보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브는 식물들의 특성을 연구하는 일에 계속 몰두했다. 에덴동산의 식물들을 연구하던 그녀는 마침내 지식나무라는 미지의 식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강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그 나무를 지켜보고 연구하는데 소비했다. 그녀는 그 나무의 뿌리 저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힘들을 알려고 노력했다.
이 탐구 때문에 이브는 천국의 기쁨, 영감, 빛으로부터 등지게 되었고 물질의 심연 속으로 깊이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그녀는 마침내 지하 흐름의 거주자들, 즉 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한 타락의 피조물들에 대해 정통하게 되었다.
뭔가를 알고 그것에 익숙해지게 된다는 것은 서로 간에 주고받는 상호관계의 수립을 의미한다. 그것은 교환의 관계인 것이다. 이브는 천상의 흐름을 상징하는 생명나무와 교류하지 않고 타락 천사들의 리더인 뱀, 사마엘과 관계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저편 생명과의 접촉 때문에 이브의 '빛의 체Body of Light'에 엄청난 충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당장 파괴적인 힘에 의해 소유 당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서서히 고형화되기 시작했고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빛의 땅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발견한 것들에 매혹되었고 서둘러 아담에게 자신의 모험에 대해 말한다. 아담이 그 나무에 다가갔을 때 그는 카발라에서 릴리스라 부르는 여성 영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아담과 이브가 소위 원죄라는 것을 저지르게 된 경위이다. 비록 사실상 그것이 정말로 죄인지의 여부에 대한 문제는 많은 논의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성경에 적힌 모든 것은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생명나무(세피로트 나무)를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아담은 남성원리이고 이브는 여성원리이다. 아담이 예소드, 달에 거주한다면 아담은 티페레트, 태양에 거주한다. 이것은 이브가 지구의 영역인 말쿠트에 더 가깝고, 결과적으로 말쿠트 아래의 세계인 혼돈의 지하 영역, 클리포트 영역에 더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클리포트는 성경의 뱀에 의해 상징되는, 불균형상의 혼돈스러운 힘들을 일컫는다. 클리포트는 역전된 생명나무로, 세피로트의 어두운 측면이다. 뱀은 이 하계로부터 나무 위로 기어 올라와 이브를 유혹하는데 성공한다. 이브, 즉 예소드는 생명나무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고 그 전체 체계를 떠받치고 있다.
내가 이미 말한 바대로 예소드는 기초이다. 만일 이브가 아담(티페레트)에게 계속 매달려 있었다면 그녀는 생명나무의 전체 체계를 균형 있게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은 케테르, 즉 신에게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뱀에 의해 유혹 당함으로써 이브의 관심은 아래로 향하게 되었고 생명나무의 전체 체계를 더 이상 떠받쳐 주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아담의 관심까지 동일한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전체 체계가 붕괴되고 아담과 이브는 균형을 상실하고 클리포트라는 하계의 어두운 영역으로 던져지게 된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신과 단절된 모든 인간들 속에서 재연된다. 진정한 생명의 비밀은 신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체 조직을 흔들림 없이 공고하게 만들어 준다. 진실로 창조적이 되려면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있는 남성원리와 여성원리가 신성한 목적에 맞게 헌신해야만 한다.
비전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에게 영체를 다시 재건하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영체를 통해 소위 천국이라 불리는 지구의 에테르계로 돌아갈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사물에 대해 배우고, 노력해야만 하는가? 어째서 우리는 항상 희생을 해야만 하는가? 그 모든 것 없이도 우리는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지 않은가!" 맞다. 당신은 애쓰지 않고도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세상에서?' 이것이 문제다. 이것이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쫓겨나온 그 에테르계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체를 다시 재건해야만 한다.
과거, 인간이 영체 속에서 살 때 전체 자연은 인간에게 복종했고 동물들도 인간에게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았다.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을 우러러 보았다. 인간의 얼굴과 몸 전체로부터 빛이 방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빛을 잃은 이후 인간은 자연에 대한 힘도 상실하고 말았다. 모든 종교들에는 인간의 실락과 회복, 그리고 신의 품으로의 회귀에 대한 전설이 있다.
실락 후 인간은, 신성에 반역한 영들이 거주하는 영역과 훨씬 더 가깝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쉽게 그들과 접촉하고 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게 된 이유이다. 그리고 천계의 존재들과 접촉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게 되었다. 실락으로 인해 그들로부터 멀어져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다. 그 거리는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빛의 영들에게 기도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것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일 수 있다. 그 작업은 여전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계속 늘어나는 신의 자식들에 의해 지구가 말끔히 청소되고 정화될 때까지 말이다. 신의 자식들은 이 진리를 알고 있고, 그들의 가슴과 혼은 천상의 아버지의 의지를 수행하는 신성한 이상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이 신의 자식들에 의해 하늘, 물, 바위, 산 등 지구 전체에 퍼져있는 모든 악과 독들이 축출되어 지구의 중심 속으로 흡수되게 될 것이다.
일단 지구가 신의 자식들에 의해 지배되게 되면 모든 것들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악의 계획은 반대의 힘과 부딪히게 되고 그들의 계획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젖은 화약으로 대포를 쏘려는 것과 같은 일로, 불발에 그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달리 말해 악의 계획은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을 구족하지 못한 반면, 신성한 계획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자는 즉각적으로 성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미래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를 원한다면 일정한 양의 지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빛이 주어질 것이다. 모든 존재들은 알아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침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각자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흐름과 협력하거나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오는 흐름과 협력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복음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두 사람이 들에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 데려감을 받거나 버려지는 것은, 그들이 이미 내린 개인적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걸 이해해야만 한다. 하늘은 결코 독재적이지도 않고 불공정한 결정을 내리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이 하늘에 의해 선택되었다면 그것은 그 당사자가 이미 선을 위한 일에 경주함으로써 그 길에 스스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선을 위한 어떤 일도 시도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빛의 길을 따를 수도 없고 축복을 받을 수도 없다.
인간의 내적인 삶은 끊임없이 시험받고 테스트 받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의 자식들을 위한 긍정적 조건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그런 사람들이 충분히 많다면 어둠의 세력은 손발이 묶이고 심연 속으로 던져져 지구의 중심에 삼켜지게 될 것이다. 악의 세력은 인간들의 욕망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록에 나오는 용을 정복한 대천사 미카엘의 이미지는 이런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대천사 미카엘은 실재하는 존재이다.
미카엘은 대백색형제단(Universal White Brotherhood)의 비전가들과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에그레고어의 수장이다. 내가 대백색형제단의 제자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들이 어떤 종교적, 영적 조직에 속해 있는가, 와는 상관없이 빛을 위해 일하는 모든 자들을 의미한다. 선을 위해 일하는 모든 자들은 대백색형제단의 멤버이다. 지구를 정화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용에 의해 상징되는 어둠의 세력이 삼켜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지구는 언젠가 악으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신의 자식들이 지상에 나타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 무르익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성 요한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아가고 있다. 그는 또 다른 상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천상의 예루살렘이다.
일단 용이 제압되면 천상의 예루살렘이 강림하게 될 것이다. 성 요한은 계시록에서 이 성도聖都가 순금으로 이루어져 있고 12개의 진주문과 보석들로 지어진 기초들을 가지고 있고 햇빛이나 달빛이 아닌 신의 영광에 의해 빛나고 있다고 묘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완벽한 상징이다.
계시록에서 그리스도는 구름을 타고 오실 거라고 일컬어진다. 이것 역시 상징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인간들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구름은 공기를 상징하고, 공기는 멘탈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지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태초의 인류가 살았던 빛의 영역 속에 아직도 살고 있다. 그곳은 우리와 가깝고, 세계 모든 곳에 존재한다. 거기서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빛을 나누어주며 일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너무도 많은 악이 축적돼 있다. 온갖 거짓된 사상과 악마적 철학들이 전 세계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악은 인간의 지성에 작용한다. 오늘날 인간들은 가슴보다는 지성에 우선권을 준다. 지성은 인간들의 이해득실을 위해 작용한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부자가 되고, 권력을 얻고, 정적들을 몰아내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들을 제공한다. 친절도 자비도 없는 악한 인간들에게 지성은 지극히 강력한 도구이다.
태초의 인간들을 유혹했던 부정적 영들에게 있어서도 꼭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고도로 지성적이지만 사랑이 전혀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 그들은 동일한 태도를 취했다. 인간들의 지성 계발을 고무하고, 신으로부터의 독립과 자만심이라는 그들의 정신을 주입했다.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이러한 사상을 처음 퍼뜨린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고도로 지성이 발달된 사람들 사이에서 그러한 작업을 벌였다. 지성을 우선시하는 인간들은 주로 물질적 차원에서의 성공에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목표는 돈, 재산, 권력, 세속적 영화榮華를 얻는 것이다. 그들은 천상과의 합일이나 영체의 재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달리 말해서 그들의 태도는 정확히 신에게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반역의 천사들의 그것이다.
당신들 중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태초의 인간들이 지성적 존재들이라면 어떻게 그런 타락이 발생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어떻게 태초의 상태를 잊고 신에게로 돌아가려는 욕망을 상실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물질 속으로 얼마나 큰 속박과 예속이 쇄도해 들어왔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단 지상에 화육하게 되자 고도로 진보된 영들조차 자신들의 원 상태에 대해 전부 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스터를 만나거나 책 속에서 어떤 글을 읽었을 때 비로소 그들의 의식적 마음은 돌연 자신들의 신성한 근원의 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진창 속에서 노는 꼬질꼬질한 개구쟁이들과 같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왕좌의 상속자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전혀 무지했다. 그러다가 한 메신저가 와서 그들에게 왕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게 된다. 이렇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험과 고난을 인내해야만 하는지!
영이 육체 속으로 들어 올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대한 신비가 우주 속에서 재연된다. 물질은 십자가이다. 영은 그 십자가에 매달려 끊임없이 자신을 희생한다. 물질은 영이 지고가야만 하는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사대四大의 종합이다. 영이 육체 속으로 들어올 때 영은 이 물질의 십자가를 짊어진다. 연금술사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도가니로 상징된다. 연금술사는 도가니 속에서 모든 작업들을 실행해 나간다.
물질을 황금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영은 인간, 즉 도가니 속에서 작용한다. 금속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고 상이한 변환과 조합의 공식들을 소유하게 되면 연금술사는 해방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공간 속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알아야만 한다. 즉,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아야만 하고, 자기라는 질료의 상이한 성분들을 인식해야만 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다른 말로 이렇게 간단히 바꿀 수 있다. '너의 십자가를 짊어져라.'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의 존재 속에 포함된 모든 요소들을 공부하고 그것들에 정통해야만 한다. 신이 살아 있는 십자가, 신성한 말씀을 통해 우주를 창조하였듯이 우리는 그 모든 요소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결합하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마치 알파벳을 가지고 단어, 문장, 시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 있는 십자가를 가지고 작업해야만 한다. 만일 인간 그 자체가 십자가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목에 십자가를 두르고 교회와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인간이 십자가이다. 우리가 작업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그 십자가인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십자가는 항상 죽음, 부정과 연결돼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영이 십자가 속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생명의 시작이 된다. 비전가가 기도할 때 그는 우주의 사 방위를 향해 차례로 몸을 돌리면서 십자가 사인을 한다. 그 행위는 그의 영이 이제 막 물질에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방위 각각은 한 명의 대천사에 의해 지배된다. 동쪽은 미카엘, 서쪽은 가브리엘, 북쪽은 우리엘, 남쪽은 라파엘. 기도하기 전에 사방위를 향해 몸을 돌리는 이 의식은 가톨릭에서 십자가 사인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다. 가톨릭 교인들은 오른손의 검지로 자신의 이마, 태양신경총, 좌측 어깨, 우측 어깨를 터치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기도자가 자신의 상념과 사랑으로 이제 막 작용을 가하려는 공간과 물질의 네 차원과 교감하는 행위이다.
장미십자단의 심벌은 십자가와 그 중심의 붉은 장미로 구성된다. 장미는 심장을 나타낸다. 그것은 인간(십자가) 안의 심장 차크라의 완벽한 개화를 상징한다. 이 차크라는 오로지 장미로 상징되는 사랑에 의해 꽃피어난다. 이 때문에 장미십자가는 물질을 변화시키고 그것에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 신성한 사랑을 자신의 내면 속에 개화시킨 비전가를 나타내는 심벌이다. 장미십자단의 아데프트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와 장미의 모든 비밀들을 안다는 의미이다. 십자가의 중심에 있는 장미는 자기 존재의 모든 요소들과 우주 전체와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샘이 된 완벽한 인간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그는 장미십자인이 된다. 설령 장미십자단의 회원 명부에 적혀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십자가의 중심에 있는 장미는 심장 차크라가 활짝 개화된 완벽한 인간이다. 당신은 인간의 심장이 인체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심벌에는 왜곡이 없다. 아주 오래 전 고대에는 우리의 심장이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후대에 좌측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이동은 지축의 기울기와 관련된다.
우리는 또한 장미십자와 성배 심벌 사이의 유사성도 추론해 볼 수 있다. 성배는 그리스도의 피를 담고 있는 에메랄드 컵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피, 즉 신성한 제5원소가 가득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컵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피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정화시키게 되면 성배가 된다. 인간은 또한 십자가이기도 하다. 십자가와 컵은 항상 인간의 형상이다. 장미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이 꽃피어 나는 것은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인 것이다.
세브레, 1960년 4월 16일.
[출처] 비전의 카발라 - 6장. 인간의 실락과 회복 |작성자 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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