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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카발라 - 5장. 세계의 창조와 발출 이론 본문

천지인 공부/카발라

비전의 카발라 - 5장. 세계의 창조와 발출 이론

柏道 2018. 9. 12. 11:45


 비전의 카발라 - 5장. 세계의 창조와 발출 이론



5장

 

세계의 창조와 발출 이론

 

 

 

세계의 창조가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높이 올라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는데 성공한 자들, 그 해답들에 대한 탐구로 깊은 통찰력을 얻은 모든 위대한 존재들은 한결같이 세계가 생기기 전에 비활동의 상태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휴식 또는 잠에 비유하곤 한다. 이 비활동 상태는 하나의 강력한 힘에 의해 활력이 불어넣어지게 된다.

 

분명 이에 대해 정확히 정의내리거나 묘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볼 때 그것은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원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인도의 위대한 리쉬들은 이 상태를 프랄라야Pralaya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무한 속 휴식 상태에서 신이 나타나 성경의 창세기에서 말하는 '빛'이라는 원질을 투사함으로써 세계가 창조되었다.

 

그러나 모든 창조는 일정한 한계를 전제로 한다. 이 말은 신이 스스로에 대해 한계를 부여했다는 의미이다. 신은 세계, 즉 그릇을 형성시키기 위해 무한(설명하기는 어려워도 무한 역시 미묘한 존재의 상태이다.)으로부터 나타났다. 그리고 신은 그 그릇 속에 그의 발출물들을 쏟아 부었다. 바로 이렇게 하여 첫 번째 세피라 케테르가 탄생하게 되었다.

 

절대자, 미지자,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신, 아인 소프 아우르Ain Soph Aur는 자신의 반영을 투사했는데, 이 반영이 바로 현현된 신, 이른바 아버지 하나님이다. 이번에는 아버지 하나님(케테르) 또한 자신으로부터 한 원질을 발출하였고, 그렇게 하여 아들, 세피라 호크마(지혜)가 형성되었다. 케테르로부터의 이 발출은 호크마의 그릇을 흘러넘칠 만큼 꽉 채웠다. 다시 호크마는 다음 세피라 비나(법과 엄정의 영역)를 채웠다. 비나 또한 그렇게 흘러넘쳐 다음 세피라 헤세드(자비의 영역)를 가득 채웠다. 이런 식으로 흐름이 계속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창조과정 상의 매우 흥미로운 특성에 대해 주목하기 바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신성의 발출이 한 세계로부터 흘러서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할 때마다 그 극성이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즉 그것은 다음 단계에서 다른 속성, 양상 하에 자신을 현현시킨다는 점이다.

 

호크마 속에서 신성의 발출은 우주적인 조화를 나타낸다. 이 호크마로부터 비나로 흐름이 이어지는데, 비나 속에서 그것은 가차 없는 엄격함, 정의로 나타난다. 그것은 비나로부터 헤세드로 흘러간다. 헤세드 속에서 그것은 자비, 관대, 용서로 현현한다. 다시 흐름이 이어져 게부라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 헤세드의 자비와 관대는 투지, 강력한 의지, 타오르는 불로 변화된다. 게부라는 마르스Mars의 영역이다.

 

각 단계에서 신성의 발출이 흘러넘치고 새로운 세계를 형성할 때마다 그것(신성의 발출)은 점점 더 응축되게 된다. 그 핵심 에센스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러나 그 농도는 더욱 더 짙어지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에너지, 새로운 색깔, 새로운 형상들이 창조되는 것이다.

 

게부라를 떠난 신성의 발출은 태양의 영역, 티페레트, 미美의 세계로 흘러들어간다. 카발리스트들은 생명나무 상에서 마르스(화성)의 영역을 태양의 영역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시켰다. 당신은 이점에 대해 의아한 생각이 들 것이다. '태양계에서 태양은 행성들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그 말은 맞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의 상이한 차원에 속한 두 체계를 서로 비교해서는 안된다. 천문학자들이 연구하는 태양계는 일단의 물질적 천체들인 반면 세피로트 나무는 일련의 영적 영역들이기 때문이다. 세피로트 나무상의 화성은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물질 혹성이 아니다. 심지어 점성학상의 행성도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원리이다. 화성은 게부라 속에 거하는 영적 힘들의 물질적 표상, 압축인 것이다. 게부라 안에 있는 원리는 사실 티페레트 안의 원리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

 

티페레트는 미의 영역이다. 지성의 미, 빛의 미, 순수의 미. 빛보다 순수한 것은 없다. 그러나 티페레트의 순수는 예소드의 순수보다 더 정제된 특성을 지닌다.

 

 

티페레트는 상위의 영역으로부터 신성한 생명을 받아 그것을 다시 네차흐, 금성, 사랑의 영역에 쏟아 붓는다. 네차흐의 신성한 발출이 넘쳐흘러 호드를 채울 때 그 극성은 다시 한 번 변화된다. 호드는 지성의 영역이다.

 

호드는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지식, 학문, 이성의 영역이다. 호드가 흘러넘치면 신성의 발출은 세피라 예소드, 생명의 영역을 채운다. 여기서 예소드가 생명의 영역이라고 해서 상위의 영역에 생명이 없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상위 영역에도 분명 생명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차원의 생명이다. 즉 인간은 볼 수도, 알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형태의 생명인 것이다. 그것은 대천사들과 신들의 생명이다.

 

세피라 예소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이 현현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조직과 생체의 형성에 필요한 원형질을 공급한다. 예소드는 생명과 순수의 영역이다.

 

신성한 원천으로부터 발출된 이 흐름은 예소드에서 넘쳐흘러 마지막 세피라인 말쿠트를 형성한다. 먼저 물질의 가장 정묘한 측면인 에테르 차원이 형성된다. 그리고 차츰 이 에테르 질료가 응고, 가촉화 되어 우리가 아는 물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쿠트의 본질이다. 그것은 창조의 원시 물질 용재鎔滓이다. 그것은 신성한 에센스가 응고화된 형태다. 따라서 만일 그것의 본래 상태를 회복시킨다면 케테르의 질료처럼 순수하게 밝게 빛날 것이다.

 

언젠가 우주는 본래의 순수하고 투명했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신으로부터 발출돼 나와 물질화 될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신으로부터 발출된 것은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에센스이다. 이 신의 에센스가 응고되어 물질이 되는 것이다. 신 안에는 어떠한 물질 입자도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물질이 형성된 것은 바로 그로부터이기 때문이다. 물질은 영의 활동의 열매이다. 물질은 영의 점진적 응고이다. 영과 물질은 신 자신의 두 속성이다. 물질은 영이 신성한 만큼 신성하다. 왜냐하면 물질은 영의 딸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신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다고 씌어 있다. 그것은 신이 영과 물질을 창조했다는 의미이다. 신은 아담(영)을 창조했고 아담의 갈빗대로부터 이브(물질)를 지었다. 물질의 근원은 영이다. 물질은 영으로부터 태어났다. 물질은 무로부터 나타날 수 없다. 그것은 신이 활동의 열매이다. 신은 모든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가 창조한 것이다. 그가 물질을 창조한 방법은 신비 중의 신비이다.

 

가장 조악한 형태의 물질도 영의 지배를 받으면 변형되어 그 근원의 순수를 회복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이해해야 할 것은, 만일 우리가 물질에 가해지는 영의 효과를 볼 수 없다면 그 영의 힘을 측정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만일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의 힘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담은 이야기 책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그는 신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존재, 아담 카드몬, 우주적 인간이다. 우주의 별, 성좌, 성운들은 그의 육체이다. 신은 피조된 우주를 초월해 존재한다. 그는 세피라 케테르보다도 더 위에 있다. 케테르는 아담 카드몬의 머리이다. 호크마는 그의 우측 눈과 우측 얼굴이고 비나는 좌측 눈과 좌측 얼굴이다. 헤세드는 우측 팔, 게부라는 좌측 팔, 티페레트는 심장과 태양총, 네차흐는 우측 다리, 호드는 좌측 다리, 예소드는 생식기관, 말쿠트는 발이다.

 

소위 창조라고 하는 것은 사실 호크마(지혜)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잠언에서 지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느니라.'

 

호크마는 신(케테르)으로부터 최초로 발출된 빛의 영역이다. 태초에 신은 이렇게 말한다. '빛이 있으라.' 따라서 최초의 피조물, 만물의 시작, 기원은 빛이었다. 빛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태양이다. 어째서 그리스도의 영은 티페레트(태양) 안에 거한다고 일컬어지는가? 사실상 우리는 여기서 한 영의 두 가지 상이한 특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이 영과 태양 영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물론 이 문맥 속에서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역사상의 특정 시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살았고 지상에서 특별한 미션을 수행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은 창조 이전에 존재하였다. 그는 말씀, 로고스이며 그를 통해 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리고 내가 태양의 영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물질적인 태양, 천문학상의 태양이 아니라 특별한 문명을 지닌 존재들이 거주하는 영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태양의 영은 대천사 미카엘이다. 그리스도와 대천사 미카엘은 성 삼위일체 중 제2 원리를 표현하는 두 개의 상이한 방식이다. 우리가 미카엘이라 부르는 태양의 엔터티entity는 그리스도, 신의 말씀과 연결된다. 그리스도의 영은 태양의 영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일곱 금촛대 사이에서 본 멜기세덱 또한 빛과 말씀에 대한 표현이다. 이름들은 다르지만 그것들은 동일한 원리를 말하고 있다.

 

태초에 정적인 상태(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정적인 상태는 아니다.)에 거하던 신은 물질을 통하여, 물질 속에서 동적인 상태에 있게 되었다. 신은 식물, 동물, 인간을 통해 자신을 현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느린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창조주가 물질 속으로 깊숙이 삼투해 들어오는 데는 지극히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그가 물질로부터 다시 현현되는 데에도 오랜 시간(어쩌면 앞서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그는 공간의 차원뿐만 아니라 시간의 차원에 의해서도 제한되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던 불멸의 영원을 떠나 스스로에게 시간의 구속을 부과하였다.

 

인도의 경전들에 의하면 신이 자신의 원초 상태로 돌아오면 모든 피조물은 용해돼 사라지고 수면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주의 낮이 되면 신이 깨어나 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미래의 언젠가 그는 다시 잠을 자게 될 것이다. 그러면 밤이 오고 그의 피조물 전체가 그와 함께 수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새로운 날이 동터올 것이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창조가 어떤 것이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떤 종류의 피조물들이 나타날지,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물질 속으로 하강해 오는 과정에서 신은 움직이지 못하는 돌을 취하는 시점에 왔다. 신을 담고 있지 않은 피조물은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지상의 돌들조차 그 안에 신성한 에센스의 단편이 포함돼 있다. 이렇게 신이 돌로부터 시작하여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을 갖춘 피조물들을 창조하는 데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겠는가? 장인이 새로운 물건을 만들 때는 처음부터 항상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종종 그것을 허물고 녹이고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하기도 한다. 자연 역시 꼭 마찬가지 방식으로 일한다.

 

자연은 끊임없이 시험한다. 개별적 형태들을 완성하기 위해 거친 모델들을 계속 시도한다. 우리는, 자연이 인간의 얼굴과 오감과 장기들을 완성시키기에 앞서 수많은 실험들을 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조개, 꽃, 벌레 등의 형태와 기능들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자연은 얼마나 많은 실험들을 했던가.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자연이 얼마나 많은 힘든 과정을 거쳐왔는 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최선의 인간 형상을 만들기까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종들이 생기고 사라졌는가? 도공은 명품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잘못 만들어진 도자기들을 얼마나 숱하게 깨뜨려버리고 다시 새로 만들곤 하는가?

 

사실 이것이 카르마의 본질이다. 카르마는 단지 불완전한 행위, 조화롭지 못하고 공평무사하지 못한 행위의 결과이다. 카르마는 아직도 더듬거리며 실수를 하는 사람이 행한 행위의 결과이다. 더듬거리고 모색하며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 정도든 두들겨 맞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카르마이다. 원인과 결과의 링크인 것이다. 인간은 창조를 위해 태초의 평화롭고 행복한 수동성의 상태를 포기했다.

 

하지만 인간은 아직 그렇게 완벽하게 행동할 수 없다. 바로 이점이 인간에게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행위를 포기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행동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실수를 하게 되고 그 결과 고통을 겪어야만 하지 않는가?' 물론 우리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배울 것이고 진보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더 이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일단 실수하지 않고 일하는 법을 알게 된다면 우리 앞에는 더 이상 고통스러운 카르마는 없게 될 것이다.

 

 

 

봉팽, 1963년 9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