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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에서의 삶 몬시노르 로버트 휴 벤슨 / 김효율 역 서 문 이 책을 통해 영계(靈界)에 대한 내용을 말해 주는 영계 저자는 지상에 생존시 '몬시노르 로버트 휴 벤슨(Monsignor Robert Hugh Benson)'이라고 불렸고, 영국 켄터베리(Canterbury)의 전(前) 주교였던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Edward White Benson)의 아들이었다. 수년 전 지상에서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는 명설교자로서, 그리고 명망 높은 작가로서 그 명성이 절정에 달해 있었을 때였다. 그리고 나서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나는 그렇게 명망 높은 생활을 영위했던 사람이 영계(靈界)에서는 무엇을 하며 생활하고 있을까 궁금해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그 시절 자주 영계와 교통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나와 가까이 교통(交通)하던 영인(靈人) 한 분이 그의 소식을 전해 주는 것이었다. 그 연인은 그가 영계(靈界)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머지 않아 나와 교통하게 되리라는 것까지도 알려 주었다. 그 후 드디어 그와의 영적(靈的) 교통이 이루어졌다. 그는 나와의 영적교통(靈的交通)을 통해 그가 영계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계속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전해 준 내용을 담아 책을 냈는데 첫 번째 책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의 생(生)(Life in the world Unseen)》인데, 이 책에서 그는 그가 실제로 세상을 떠날 때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가 임종 당시에 어떻게 옛 친우였던 에드윈(Edwin)을 만나게 되었고, 자기가 지상에서 살았던 집과 똑같은 집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어떤 절차를 밟아 인도되어 갔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 영계에 도착한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에드윈의 안내를 받으며 미지의 세계인 영계의 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서 이곳 저곳 여행하던 중 그들은 곧 바로 영계에 도착한 루스(Ruth)라고 부르는 미모의 젊은 여자와 만나 함께 동행하게 된다. 이렇게 인연된 세 사람은 그때부터 항상 행동을 함께 하게 되었고, 무슨 일을 할 때나 쉴 때도 계속 떨어지지 않고 함께 지내게 되었다. 몬시노르(Monsignor)는 그의 첫 번째 책에 이어 두 번째 책에서도 계속 다방 면에 걸쳐 영계(靈界)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 그가 생전에 신앙하고 설교하던 그의 신학(神學)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을 정도로 그의 생전 신학관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영계(靈界)에서의 그의 주된 임무는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 그들을 찾아가 영계로 인도해 가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의 가까운 친구인 에드윈(Edwin)과 루스(Ruth)도 그와 함께 그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의 대필자로서 계속해서 그의 메시지를 받아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더 나아가 큰 은혜라고 믿는다. 다른 여러가지 방법의 교신(交信)을 통하여서도 우리는 수백 회가 넘는 만남을 갖게 되었고, 이런 회합 때면 그는 많은 영계의 친구들을 함께 데리고 오기도 했었다. 이 책은 내가 1951년도에 그와의 교신을 통해 받아 기록한 내용으로써, 그가 루스(Ruth)와 함께 (이 경우 에드윈은 끼지 않았다) 어떻게 '18세 난 젊은 청년의 영인을 접수하여 영계로 인도하게 되는 임무'를 맡아 지상에 내려오게 되었는가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평시에는 일단 영계에까지 인도해 가면 그들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인도된 영인(靈人)은 맡아서 보살펴 줄 다른 영인(靈人)에게 인계(引繼)해 주는 것이 상례(常例)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젊은이들을 새로운 생(生)으로 깨어나게 하고, 그가 완전히 회복된 후에도 그들은 그 젊은이를 위해 미지의 새로운 세계로의 안내 임무를 맡고 나서게 된다. 그들 셋은 그들이 속해 있는 급수별 영계를 두루 시찰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경이(驚異)의 세계에 접하게도 된다. 세 영인들이 영계를 여행하면서 만나는 세계와 영계의 구조, 그리고 영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많은 감명과 깨달음을 줄 것이다. 역자의 변 영계(靈界)란 말에 대해 재고해 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잇을 것이다. 그러나 조용히 우리의 생(生)을 고찰 해 보고, 어떤 형태로든 미구에 직면하게 될 우리의 한 날을 두고 심사숙고해 보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궁금한 것이 영계(靈界)에 대한 존재 여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동안 나는 나름대로 영계(靈界)에 관한 책이라면 눈에 띄는대로 거의 모두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 책들은 서로 상충된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느 책의 내용을 믿어야 할지 당황한 적도 있었고, 각기 저자의 견해와 관점에 따라 똑같은 사실을 전하는 데도 서로 다른 점들이 없지 않았다. 여기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이 책은 1910년대에 세상을 뜬 영국계 천주교 신부(神父) 한 분이 자신이 평소 영계와 교통을 통해 경험한 내용을 사실 그대로 적나라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본 역자의 결론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세상에 소개된 수백 수천 권의 영계에 관한 책들이 나름대로 보여 주던 그 모든 내용들을 총종합하여 우리들에게 산지식으로 심어 주고 잇는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 역자가 이 책을 통하여 소개하고 설명해 주는 그 모든 영계의 사실에 대해 얼마나 믿느냐 안 믿느냐는 독자 여러분에게 달려 있겠지만, 신앙생활을 통해서 영계의 실존을 확신했던 신자로서 이 책을 읽고 영계가 살아 숨쉬며 나의 일상생활과 밀착되어 병존 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듯 실감했다면, 현재의 부족하고 깨어 있지 못한 역자의 지성 때문이었을까? 여기에 소개된 이 내용은 저자가 쓴 세 권의 책 중 제2권의 내용으로 세 권 모두 대동소이한 내용이지만, 이 제2권이 그 중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다루고 잇는 듯하여 먼저 소개한다. 독자들은 본문을 읽기 전에 저자의 서문을 읽고 이 책이 쓰여지게 된 배경과 내용에 대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영계의 실존을 믿는 사람이라면 필연코 읽어야 할 책이며, 영계를 믿지 않는 자라고 하더라도 끝까지 읽기만 하면 영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그렇지만 이 책이 쓰여진 연대가 1900년 대이고 보면 백여년 동안 영계에 대한 보다 깊고 광범위한 탐구가 있어서 새로운 내용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영계는 광대무변한 우주와 신비한 생명력, 무한한 사랑의 힘처럼 한 영인만을 통해서는 영계의 모든 실체를 볼 수 없기 대문이다. 그것은 한 인간이 전우주를 알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서 얼마간 영계를 바로 이해하여 각자가 더욱 깊은 신앙생활을 통해 자신의 영계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저자에 대한 소개가 불충분한 점이다. 다방면으로 알아 보았으나 저자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을 입수하지 못하여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는 바이다. 1985년 12월 12일 김 효 율 목 차 서문 임종과 영원한 생명의 탄생 지상에서의 삶의 종지부를 찍던 순간, 내(몬시노르 ; Monsignor)가 새로운 생(生)의 문턱을 넘어섰던 영계에서의 삶이 세상의 시간으로 벌써 40년이 다 되어 간다. 지난 10여 년 간을 통해 여러 인간들에게 영계에서 내가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음을 전해 줄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가지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영계에서 전개되는 삶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점이다. 도대체 그 규모가 얼마나 크고 웅대한 것인지는 여러분들이 직접 이 세계에 들어와서 우리 영인들과 함께 살아보기 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영계의 규모가 크고 웅대하다고 하여 복잡하고 엉망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상 누구든지 지상세계와 영계를 비교해 보면, 지상세계가 얼마나 더 복잡하고 뒤죽박죽인가 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지상의 사람들에게 이해가 잘 안 갈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여러분들과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더이상 서론적인 이야기는 그만두고 나의 얘기를 계속하기로 하겠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영계에서의 거주지를 의미함)에는 나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큰 건물이 한 채 있는데, 그곳은 상당히 중요한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기록문서 보존이나 청원 같은 문제들을 관장하고 있는것이다. 넓은 영계(靈界)에서는 무슨 분야나 무슨 일을 막론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무한정 열려있다. 이 모든 분야들 중 지금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지상세계에서 그 생(生)을 다 하고 영계로 넘어 오는 그 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이다. 내가 맡아서 수행하고 있는 임무 중의 하나가 이처럼 지상세계에서 육신의 종말을 맞은 사람들을 도와 안내하는 일이다. 대상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다. 남녀노소,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된다. 나와 함께 이 일을 돕고 있는 사람들은 나의 오랜 친구인 에드윈(Edwin)과 루스(Ruth)이다. 에드윈은 종종 우리와 함께 일을 안 할 때가 있지만, 루스와 나는 거의 언제나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아마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우리가 그 일을 맡게 되었는가를 알게 되며, 또 누가 그런 일을 총체적으로 관장하고 업무를 분담해서 적절한 사람에게 맡기는 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할 것이다. 해답은 간단하다. 기록과 조사를 담당하고 있는 사무실에서 이 모든 절차를 맡아 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그 사무실에서 어떤 방법으로 지상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지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루스와 나의 임무는 그 사무실에서 통고하는 일이며, 일단 통고를 한 뒤는 그 사무실에서 우리에게 확정된 일을 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느날 지상에서 내가 살던 옛 집과 아주 흡사한 나의 집에 루스와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때 본부 사무실로부터 들어오라고 하는 통고를 받았다. 곧장 사무실로 달려가니 지난 수년간 우리와 함께 친구로 지내고 잇는 한 분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이분은 성품이 온화하고 친절하며 이해력이 클 뿐만 아니라 그의 지시를 받고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지식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영인이다. 바로 그 엄청난 지식을 활용하여 그는 적재적소에 우리 같은 사람들을 보내어 특정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지상 인간들의 눈으로 보면 한 가지의 일이 다른 일과 거의 다름이 없이 똑같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볼 때는 그 차이점이 엄청난 것이다. 사실 그 일들의 차이란 지상 인간들의 성격의 차이 만큼이나 크다. 한 생명이 지상 생활을 끝낸다는 것은 그 생명의 소지자와 그의 생명을 돌보아준 사람에게는 새로운 생(生)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특정임무를 맡게 되고, 또 임무를 수행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은 그 새로운 생(生)에로 출발하는 사람의 성격에 달려 있다. 그가 영계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아니면 얼마나 무지한가가 중요한 조건이 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누구를 막론하고 죽게 되면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엄격한 필요요건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또 인도를 받는다. 그래서 우리가 일을 맡게 될 때는 마치 입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의 경험과 능력, 그리고 성품 등이 고려되어 배당된다. 에드윈과 루스와 나는 아주 흡사한 성품을 갖고 있고,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나오는 동안 우리의 능력과 경험은 점점 풍부해 지고 그 푝이 넓어졌다. 여러분들도 상상할 수 없는 바와 같이, 영계 생활의 현실이나 진실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얼토당토 않는 관념이나 믿음을 버리지 못한 채 끈덕지게 고집을 피우는 자들을 상대해야 할 때면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 그런 관념에 사로잡힌 채 도착한 자들은 정신적으로 문을 닫고 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퇴화해 가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데는 굉장한 힘이 든다. 따라서 영계에서 왜 그때그때의 상황과 성격에 적합한 자를 뽑아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가를 이해하리라 믿는다. 영계에서는 절대로 무슨 일을 얼렁뚱땅 해치우는 식이 통하지 않는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절차들이 육신을 쓰고 있는 여러분들에게는 번거롭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영계인(靈界人)들에게는 업무를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그런 것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무한정으로 시간이 있으며, 깊은 인내력으로 무장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적 도움을 언제나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설프게 일을 처리하는 법이 없고, 실수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그 어느 일도 미완성의 상태로 남게 되지 않는다. 본부 사무실의 본부장(本部長)은 우리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지상에서 사람들을 데려 온다든지 하는 일을 맡기기 위해 우리를 선발할 때는 우리가 그 일을 완전무결하게 수행해 낼 수 있을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반면에 우리로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이 절대로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일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친구처럼 지낸 그 본부장은 잠시 동안 우리와 인사를 주고받고 질의 문답이 있은 뒤 우리가 맡아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가 해야할 일을 단도직입적으로 전해 주었는데 전혀 특이한 점이 없는 예전과 같은 평범한 임무수행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임종(臨終)을 맞은 자가 있군요. 나이가 18세인 젊은이에요. 쾌활하고 정신이 똑바로 박힌 건강한 젊은이요. 특별히 당신 둘을 뽑아서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젊은이가 나중에 영계의 사정에 익숙해 지게 되면 당신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젊은이를 인도하여 당신 집으로 데리고 가지 않겠습니까? 아주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두말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본부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우리는 그 젊은이에 대하여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얻기 위해 그에게 몇가지 더 묻고 해답을 얻었다. 그런 중에 그 젊은이가 지상에서의 임종이 급속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그가 사후의 생에 대해 전혀 편견을 갖고 있지 않음도 알게 되었다. 그가 신봉하던 종교의 교리는 평벙한 종교의 내용을 벗어나지 않았고, 그에게 특별히 인상 깊은 내용을 심어 주지도 못했다. 그는 그의 부모와도 행복하게 살았으며, 그의 부모들은 그의 임종을 당하여 특별히 문제를 야기시킬 만한 감정적인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그가 젊은 나이로 타계하는 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하하는 듯했다. 우리는 이번 일을 간단리 수행해 낼 수 있으며 과거에 종종 보았던 것과 같은, 마지막 순간까지 질질 끌면서 진통을 겪게 되는 임종은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여러분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 영계의 첫 출발지로부터 사실상 죽음이 결정되는 그 지상 인간들의 최대의 슬픔과 애통이 들끓는 곳을 알고 가게 되는가에 대해 분명히 궁금해 하리라 믿는다. 지상 인간들의 임종에는 형언할 수 없는 침울함과 비통이 함께하는 것을 자주 보곤 한다. 사람들은 가장 서글프고 애통한 말들을 아껴두었다가 누군가가 임종을 당하여, 지상세계를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영계로 들어오려고 하는 순간에 몽땅 쏟아 놓는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란 기쁨이 넘치거나 즐거움에 들뜨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깨닫기만 한다면 지상세계는 온통 딴 세상이 될 것이다. 특히 죽는 그 순간까지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임종을 맞아 그 모든 슬픔과 애통을 나타내는 수사어(修辭語) 등이 필요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살고 잇는 세상의 현실을 보자. 임종을 당한 그 자체만도 슬픈데, 모두들 덩달아 애통해 함으로써 그 순간을 더욱 슬프게 만들지 않는가? 이야기가 약간 빗나간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우리가 책임지게 될 임종에 직면한 그 청년의 이름을 받았지만, 그의 주소는 받지 않았다. 이처럼 그 절차라는 것이 아주 간단하다. 이런 것만 보아도 내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듯이 영계(靈界)가 지상세계(地上世界)보다 훨씬 더 단순하다는 것을 알 수 잇다. 여러분들은 혹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에서 끝이 잇는 것처럼, 누군가가 임무를 띤 자에게 어떤 장소에서 누가 임종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예를 들면 지상계의 시간으로 쳐서 한두 시간 전에는) 암시라도 주고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영계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우리에게 알려주어 우리로 하여금 임종을 당한 자를 찾도록 하는 그런 절차가 아니다. 이 시점에서 내가 모든 사실들의 근거를 밝히자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엄격히 말해서 이처럼 지상계를 떠나 영계로 들어오는 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은 우리 같은 사람들로서는 조직의 세부적인 일까지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임종을 맞아 지상세계를 떠나는 영인에게 우리가 현현하는 그 자체로써 그런 절차상의 문제는 더이상 거론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영계는 이런 숙달된 실제적 직무 속행의 일면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현상들으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다. 정확히 누가 어디에서 언제 타계하게 될 것이라는 정보는 놀랍게도 사람들 간의 대화에 의해 얻어지는데, 보통 중요한 책임자와 개개인을 맡게 되는 영계 안내자와의 정보교환으로부터 시작된다. 안내자들은 지상세계를 떠나는 영인들을 영계에 있는 그들의 보금자리로 안내함으로써 그 임무를 끝내는 것이다. 지시를 하는 책임자와 일을 맡게 되는 안내자들 사이에는 교감신경 같은 영적 교통회로가 있다. 나의 느낌으로 얘기해 준 우리의 사고매체(思考媒體)를 통하여 정확히, 그리고 신속하게 정보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재 루스와 나는 본부 사무실의 친구 앞에 앉아서 우리의 목적지만을 전해 받으면 된다. 이러한 목적지 전달방식은 다음과 같다. 본부 사무실의 친구가 임종 현장에 대기하고 있는 영인에게 루스와 내가 이제 그 임종하는 영을 맡아서 적절한 곳으로 안내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물론 이 메시지도 영감(inspiration)으로 통한 전달이다. 이런 지시가 내리면 즉각적인 응답이 온다. 우리는 영감의 빛(光)이 그 메시지를 전하는 우리 친구에게 비쳐가는 것을 감지하게 되고, 이어서 우리도 그 '생각의 빛줄기'에 합류하게 된다. 이런 절차를 거쳐 우리는 이제 직접 그 임종 현장에 대기 중인 영인과 의사교환이 가능해 진다. 극히 초과학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몸을 솟구쳐 그 '생각의 빛줄기'를 따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곳으로 가기만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전혀 알 길이 없다. 루스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에 관한 것과 어떻게 그 일을 수행하는가에 관한 것일 뿐이다. 우리로서도 어떻게 그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잇는가는 설명할 수가 없다. 지상세계에 살고 있는 여러분의 경우는 어떠한가? 당신이 정확히 무엇을 하고, 언제 생각하고 하는 등의 것을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가? 설사 그렇다고 하자. 어떻게 해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 간단한 실험을 당신 자신을 중심삼고 한번 해 보라. 내가 왜 영계의 일에 대해 그 많은 현상들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고 하는 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본부장에게 이 일을 맡겨준 데 대해 감사를 표시한 후 그의 지시대로 임종이 임박한 사람에게로 떠났다. 루스와 내가 도착한 곳은 세상의 수준에서 보면 그리 크지 않고 검소하게 치장된, 그러나 부끄럽지 않게 사는 집의 한 침실이었다. 간호원 한 사람과 친척들이 곁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청년에게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있었고, 의사는 그 청년이 최후를 맞기까지 의사로서 할 수 잇는 최선을 다 했음이 확실했다. 가족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방금 그 방을 다녀간 흔적도 보였다. 담당목사가 기도를 통해 그 청년의 영이 신의 품안에서 안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신 앞에 간절히 애원한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그 애원의 기도 자체가 통속적인 신학적 용어의 애매한 표현들 뿐이었고, 더구나 이제부터 이 청년의 생을 중심삼고 전개된 새로운 상황에 비추어 보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내용들이었다. 그 임종 현장에 함께 참여한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무엇인가 막연한 안도감을 안겨준 것 외에는 그 목사의 기도 자체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접한 루스와 나는 책임진 입장에서 신속히 그 상황을 바로잡아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상부에 연락하여 우리의 힘과 능력을 보완시켜 줄 수 있는 추가 영력(靈力)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 영력은 영인들의 눈에 환히 보이는 발광체의 빛줄기 형태로 위에서부터 비쳐와 우리들의 주위까지 와서는 그 형체를 감추고 새로운 에너지로 화해 우리들 영인체 속으로 들어왔다. 그 젊은이에게는 임종이 닥쳐왔음이 보였고, 그는 몇 분 내에 지상세계를 하직하고 우리와 함류하게 될 것이 확실했다. 우리는 순서에 따라 우리로서 갖추어야 할 몇가지 준비를 서둘렀다. 루스는 그 젊은이의 머리에 쉽게 손이 미칠 수 있도록 침대밑에 가까이 자리를 잡고 그녀의 두 손을 그 젊은이의 눈썹 위에 얹은 다음 조심스럽게 관자놀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는 임종 당사자가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표시를 하기 전에는 우리로서도 과연 그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이번의 경우도 루스가 그 청년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확실했다. 루스가 두 손을 그의 이마에 얹자 그것을 감지한 그 청년은 두 눈을 위로 향해 움직이면서 어디로부터 이처럼 즐겁고 평안한 느낌이 오는가를 찾는 모습이었다. 사실상 이런 상황에서 그 청년은 루스를 직접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됐다면 여간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옛날 우리가 지상세계에서 입던 의복을 착용하고 현장에 내려갔는데, 루스는 산뜻한 기분을 주는 여름옷으로 정장하여 평범하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고 예뻐 보였다. 우리가 지상세계에 입고 내려가는 옷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대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천사와 같은 그런 인상으로 보여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에드윈이 나의 임종 때 입고 내려온 옷도 그가 평소 지상세계에서 입던 옷이었다. 그때 만일 에드윈이 영계에서 입는 의복을 착용하고 내려왔더라면 나는 세상의 종말이나 당한 것처럼 공포에 떨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 청년의 침대 끝에 자리를 잡고 시선을 그에게 집중했는데, 그가 나의 출현을 목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손을 흔들어 그를 안심시켰다. 모든 임종이 그러하듯이 이 단계까지의 모든 절차가 아주 평온하게 잘 진행되어 갔다. 그 청년의 생에 중대한 마지막 순간이 왔다. 나는 루스의 맞은편 침대 중간 지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청년은 조용히 수면상태로 빠져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영인체가 조용히 시들어져 가는 육신으로부터 빠져 나왔는데, 그 영인체에는 밝게 은(銀)빛 나는 실과 같은 줄ㅡ이 줄이 바로 생명선(生命線)ㅡ이 달려 있었다. 나는 공중에 부상하여 떠 있는 그의 영인체를 밑에서 두 팔로 받쳐주었다. 미미한 경련을 느끼는 듯하더니, 그의 생명선은 자동적으로 끊겨 움츠러 들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던 부모형제들에게는 '그는 벌써 딴 세상의 사람'이 되었고, 루스와 나에게는 '살아서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어린아이를 안듯이 그를 두 팔로 받들었고, 루스가 다시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를 어루만지자, 그가 평온하게 안정감을 느끼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그 청년의 영인체를 보호하면서 우리들의 보금자리로 향하는 고속(高速)여행을 따날 준비를 했다. 여행하는 중에 전여정(全旅程)을 통해 나는 계속해서 두 팔로 그를 떠받들었고, 루스는 그 청년의 한쪽 손을 꼭 붙잡고 계속해서 그에게 힘과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다. 다른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그 청년과의 여행도 곧 끝났다. 즉 그의 침울한 침실을 떠나 영계에 있는 아름다운 우리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청년을 아주 평안한 소파에 눕힌 후 루스는 그의 바로 곁에 앉았고, 나는 다른 의자를 하나 갖다가 그의 발끝 쪽에 놓고 그를 향해 앉았다. 루스가 아주 만족스러운 듯 말을 건넸다. "자,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이 청년이 잘 회복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우리로서 해야 할 일은 조용히 그가 깨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는데, 대개의 경우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이 상례다. 간단하나마 적절한 준비도 마쳤다. 즉 우리는 그 청년을 눕힌 소파를 활짝 열린 창문 바로 밑에 놓았다. 그것은 누운 채로 고개를 전혀 움직이지 않고도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 잘 가꾸어진 정원을 내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없이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 틈새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깨끗하고 오색 찬란한 아름다운 도시를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또 그의 바로 맞은편 벽에는 커다란 거울을 걸어두고 그가 눈을 뜨게 되면 눈동자 하나도 움직일 필요없이 거울에 비친 안락하게 꾸며진 방 전체의 모양을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멀리서 떠들고 노는 어린아이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소리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짧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새로운 젊은 친구가 단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이 우리로서는 즐거운 시간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제대로 깨어나는 그 순간이 우리들로서는 본격적인 업무 개시가 되는 것이다. 임종의 잠에서 깨어난 '로저' 그 청년이 눈을 떴을 때 먼저 말을 건낸 것은 루스였다. 그녀는 말했다. "자, 로저! 기분이 좀 어떠세요?" (본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친구를 통해 우리는 그 청년의 이름이 로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저는 루스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나, 점점 더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어디에선가 당신을 봤는데, 언제였지요? 그렇지! 조금 전에 봤군요. 그런데 당신은 누구세요?" "당신을 돕기 위해 온 친구랍니다. 루스라고 부르세요." "그리고 선생님은 내 발끝 침대 곁에 계시던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맞아요. 조금만 있으면 로저의 기억이 더 생생해 질 것입니다."고 루스가 대답했다. 로저가 똑바로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루수가 조심스럽게 만류하면서 다시 소파에 눕혔다. "로저, 오늘 당신의 할 일은 그 소파에 조용히 누워 있으면서 되도록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청년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경치지요?" 내가 창밖을 가리키며 한마디 했다. "불편하지 않아요…….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그저 어리둥절 하겠지요. 지금까지 당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세요? 기억이 아름아름 할 거예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 로저의 기분이 좋다는 것이지요. 모든 통증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로저는 내가 한 말들이 사실인 것처럼 느낀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런 것 같군요. 고마워요." 새로 친구가 된 로저는 신경질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 확실했으므로 더이상 진실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내가 루수에게 시선을 보내자 루스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해 주었다. 난느 얘기를 시작했다. "로저, 잘 들어요. 아주 기쁜 소식이 있답니다. 당신의 기억이 정확해요. 조금 전에 루스와 나를 본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침실에 갔었으니까요. 그때 당신은 굉장히 아파 있었지요. 의사까지도 당신을 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루스와 내가 당신을 이렇게 새롭고 아름다운 세계로 인도해 온 것이지요. 아시겠어요?" "그렇다면 내가 죽었단 말이군요, 그렇지요?" "맞아요, 무섭지 않아요?" "아뇨, 무섭지는 않아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그러나 이런 세계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그렇지요,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누구도 이런 세계를 생각해 보았을 리가 없지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는지 정직하게 말해 주지 않겠소?" "전혀 알지도 못했어요." "커다란 날개를 단 천사들, 엄한 얼굴을 하고 딱딱한 표정으로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은 그런 자들을 만났다고 가정해 보세요.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요? "……." "대답을 안 하니 내가 대신 대답까지 하지요. 당신은 아마 그들이 당신을 끌고가서 하늘 나라 어딘가에 있는 최고 법원의 근엄한 자판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평소에 죄지은 것이 었었다면 벌을 받게 될 것이고……. 그렇지요? 로저!" 루스가 명쾌하게 웃자 로저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그 뜻을 알겠는지 따라 웃었다. "로저, 내가 사실대로 얘기해 주겠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영계에는 판사들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흔히들 말하는 그 대심판관(大審判官)도 없어요. 누구나 심판을 받아야 할 일이 있으면, 자기 스스로 처리합니다. 아주 잘 하고들 있어요.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당신도 당신 자신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소위 끝날의 심판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든지간에 말끔히 지워 버리세요. 그런 날은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궁금하겠지요. 거기에 대한 답은 간단해요.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요. 적어도 얼마 동안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원기를 회복한 후에는 우리 모두가 몇 군데 돌아볼 수도 있겠지만요. 어때요, 구미가 당시지 않으세요?" "아주 흥미가 있습니다만, 그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로저는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서 말을 계속했다. "이 집은 도대체 누구의 집입니까? 그리고 선생님은 누구세요? 내가 보기에는 신부(神父)인 것 같은데 당신이 입고 있는 그 성의(聖衣)의 색깔이 지금까지는 전혀 본 적이 없는 생소한 것이군요." "이 집은 내 집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들의 집이지요. 루스가 거의 매일 나와 함께 이곳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자애로운 목사 한 분이 우리와 함께 지내고 있어요. 당신도 그 분을 곧 만나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성의(聖衣)는 내가 옛날에 지상세계(地上世界)에서 입던 것과 똑같은 것으로써 당신을 위해 특별히 입고 나선 것입니다. 내가 이곳에서 입는 영의(靈衣)는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루스와 내가 영의(靈衣)를 입고 당신의 임종(臨終) 현장에 나타났다고 가정한다면, 당신은 아마 우리를 근엄하고 판관 같은 천사들로 오해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제아무리 애를 써서 밝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고 해도 공포에 질린 로저를 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할 때는 지상세계(地上世界)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듯 하고, 당신 자신에 대해서도 조금 전 이곳에 오기 전까지 생각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십시오." 로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기 옷을 들여다보고는 자신이 융(絨)으로 된 바지와 갈색 상의를 입고 있고 신발까지 신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옷을 만져보면서 그것이 진짜 물질(物質)인가 아닌가 확인하는 모습이었고, 또 자신의 팔을 꼬집어 보면서 정말 자기의 몸이 진짜인가를 확인해 보기도 했다. 그러고도 모자란지 그는 한 발을 방바닥에 내려놓은 후 가볍게 마루를 차 보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진짜인 것이 틀림없지요, 로저 씨!" 루스가 테이블 위에 놓인 바구니에서 과일을 집어 로저에게 권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얘기를 꺼냈다. "이 과일들도 모두 진짜니 무엇이든 마음에 드는 것으로 드세요. 아주 맛있는 과일들이랍니다. 드시면 몸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지요.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 특별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우리 셋은 모두 제각기 과일을 하나씩 집어들었고, 로저가 먼저 먹는 것을 보려고 루스와 나는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집어든 과일을 자세히 들여다 본 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쪽 저쪽으로 뒤집어 보면서ㅡ그가 이처럼 관찰해 보고 있던 과일은 세상의 자두와 같은 종류다ㅡ어떻게 할까 하고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세상에서 잘 익은 자두가 있다면 서슴없이 먹는 것이 상례다. 특히 영계(靈界)에서 생산된 자두라면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루스와 내가 할 수 없이 먼저 먹기 시작했다. 로저는 우리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우리가 먹는 자두에서 즙이 흘러내려 옷을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일에서 즙이 진짜로 흐르는 것을 목격했음은 물론 그 흘러나온 즙이 우리의 옷을 버리기는 커녕 전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것을 목격하고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어떻든 우리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서야 그도 먹기 시작했는데 마술에 취한 것 같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 자두의 달콤한 맛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루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로저, 여기서는 전혀 낭비가 없어요. 무엇이든 남거나 필요치 않으면 그 물체를 형성하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파괴라는 것이 없어요.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무엇하나 부숴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더이상 필요치 않거나 소유하고 싶지 않을 때 그 물건은 모든 만물과 당신 눈 앞에서 쉽게 증발하듯 없어지고 말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그 물건 자체를 형성하고 있는 원자재(原資材) 형태로 화하여 원산지로 환원화 즉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집과 집안 물건들을 원치 않게 되면 모든 것이 잠깐 사이에 증발하고 말게 되며, 이 집이 서 있던 집터만 남게 되겠지요. 무엇이든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물건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이 법칙은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영계에서는 그것이 물건이든 자연물이든 모든 것이 다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무생물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 이 정도의 미미한 경험만을 통해서도 영계에서 사물을 다루는 방법이 지상세계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로저는 루스이 이와 같은 설명에 감사를 표명했다. 물론 루스가 아직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충고를 해서인지 그는 말하는데 자신을 못 갖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루스가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더니 나를 향해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지상세계에서 주교(主敎)나 아니면 그에 상당한 직책을 가졌었나요?" "천만에요." 나는 껄껄 웃고 말았다. "뭐, 그렇게 대단하고 고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성의(聖衣)의 색을 보고 그렇게 짐작한 모양이군요. 나는 지상세계에선 단지 몬시노르였을 뿐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몇몇 친구들은 지금도 나를 그 옛날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요. 그들은 아마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고, 또 나에게도 해될 것이 없지요. 그러나 영계에서는 그런 직함이나 격조 높은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도 나를 그 명칭으로 부르고 싶으면 염려 말고 그렇게 하세요. 그렇다고 이곳의 규범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또 용용한 목적으로 쓰일 수도 있겠지요. 루스도 항상 나를 그렇게 부릅니다." 여기쯤 해서 한 두 가지 나의 의견을 삽입하고자 한다. 내가 지금 여러분들을 위해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들은 영계에서는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일들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실과 실제 사건을 근거로 한 것이다. 젊은 청년 로저는 실제로 세상에서 존재했던 인물이며 내가 지금까지 설명한 바 대로 그러한 상황을 거쳐 영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여러분에게 지금까지 하나하나 예를 들어 설명한 대담 내용에 얼마간은 이론(異論)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의 얘기가 전체적으로 볼 때 극히 경박하고 하찮은 것들이어서 전혀 고려의 여지가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시시하고 천박해서 '영계'라고 불리우는 지역을 설명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이다. '영계'라는 개념이 영인들에게는 흔해빠진 추상적 용어가 아니고 보다 성스럽고 영적인 것이다. 따라서 한 인간이 삶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그 사망이 다시 영생(永生)으로 불가사의한 삶으로 옮겨지는 이와 같은 엄청난 변화를 맞는데 있어 보다 진지하고 중대한 내용들을 생각하고 토론해야지 나처럼 이렇게 대담이나 하는 식으로 자질구레한 얘기들을 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내 자신의 임종과 또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임종 과정을 보살피면서 얻은 경험에 의해, 한 인간이 지상세계에서 마지막 호흡을 마치는 순간은 영계에서의 새로운 생(生)이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에 누구든지 평소에 배우고 익힌 신학적인 용어를 빌어 그 순간을 생각하거나 경건한 표현으로 만족해 하는 경우를 전혀 보지 못했다. 영계에서의 생에 대해 전혀 사전 지식이 없이 도착한 사람들은 어느 급(級)에 속하게 되든 상관없이 모두들 한결같이 단 한가지,ㅡ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나?ㅡ에 대해 염려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영계의 백성이라고 하여 최고의 영적인 고찰을 논하는 길고 아름다운 문장이나 늘어놓는 그런 대단한 수사학자가 된 것은 아니다. 나의 경우도 아름다운 수식어 사용에 능통하지 못한 편이다. 천만 다행으로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평범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얘기하고 행동하며 사는 보통사람들이다. 로저의 안내를 책임지고 있는 루스와 내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심상치 않은 행동을 보였다고 가정해 보자. 로저가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으며 우리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은가? 그 젊은 로저는 보나마나 전혀 근거없는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상황이 전개되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영계의 백성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영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계인의 모습에 부응하기 위해 루스와 내가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나타나야 하고 행동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루스와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 같은가?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수행에 전혀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판정이 내려 수치심 속에 맡은바 직책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발생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처럼 우매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애당초 우리에게 그런 일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우리가 수행해 준 수천 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처럼 로저와 펑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대로의 우리들 자신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곳은 생명과 활동력, 그리고 진리의 세계이지 거짓이나 환영, 그리고 위선이 존재하는 세계는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세계 속에 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를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늘 나라'가 세상 사람들이 멋대로 생각하고 가정하여 믿고 있는 그런 '하늘 나라'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이제 다시 본 얘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로저가 소파에서 일어나고 싶어하는 충동을 보였는데 그것은 곧, 그가 힘과 원기를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우리가 예고했듯이 그가 먹은 과일이 크게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이런 일에는 전혀 오산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무리를 하면서까지 그가 회복도를 시험해 보도록 보고 있을 수만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좀더 소파에 머물러 있을 것을 권유했다. 그는 정말로 호감이 가는 친구였고ㅡ물론 지금도 변함없이 좋은 친구다ㅡ우리들의 권유도 곧잘 받아들였다. 이런 경우처럼 누군가가 새로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조그만 일이나 사건들이 굉장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머무는 곳이 자기 집처럼 느껴지고 주위의 물건들마저도 낯익은 것들로 느껴지게 하는 그런 사소한 일들이 그의 회복을 돕는데 큰 비중을 갖고 있으며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된다. 우리들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아주 하찮은 조그만 사건이나 일들이 새로이 도착한 자들에게는 수백 편에 이르는 최고급의 연구 논문보다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에게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안겨주는 것을 자주 보곤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부러 그와 같은 작은 일들을 먼저 그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로저를 중심삼고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 이상 더 좋은 예가 없다고 믿는다. 그 청년은 갑자기 창문에서 파닥거리는 새의 날개짓 소리에 시선을 창문 쪽으로 돌렸다. 그때 조그마한 새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와 그의 발끝에서 한 자도 되지 않는 아주 가까운 곳에 곱게 자리를 잡았다. 로저는 혹시라도 그 궈여운 방문객을 놀라게 하여 도망가 버리기라도 할까봐 꼼짝않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루스가 그 새를 부르자 즉시 날아와 내민 손가락 위에 사뿐이 앉는 것이었다. 그 새는 날렵하고 연한 잿빛 털들을 단장하고 있었다. 로저는 루스가 그 새를 자신의 손가락으로 얾겨주자 굉장히 흥미있어 했다. 내가 얘기해 주었다. "이 새가 우리를 자주 찾아오곤 해요. 그러나 사실 이 새는 내가 지상세계에서 사귀던 두 친구가 기르던 것이랍니다." "그렇다면 이 새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어요?" 라고 로저가 물었다. "내 친구들이 이 새가 갓난 새끼로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주워다가 치료해 주고 길렀지요. 그런데 이 새에게 슬픈 일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아마도 이 새가 대담하게 무리한 일들을 했던가 봐요. 갑자기 졸도를 했고 즉석에서 죽고 말았어요. 정말 딱한 일이었지요. 어떻게 보면 로저, 당신처럼 젊은 나이로서 인생을 제대로 시작도 못해 본 나이였지요. 이렇게 되어 그 새는 당신이 그러했듯이 이 아름다운 세계로 오게 되었고, 우리는 우리가 맡은 모든 새로운 영인(靈人)들을 돌봐 주듯 그 새를 보살펴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 작은 새는 세상에서 아주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존재였고, 또 저 새를 구해 주고 간호해 준 내 친구들의 적선도 아주 하찮은 것이었지만 그것들이 헛되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나의 친구들이 저 작은 생명체를 보고 느낀 그 사랑이 저 새에게 영원한 생명을 안겨 준 것입니다. 이제는 저 새가 나와 내 친구의 가족이 된 셈입니다. 내 친구는 또다른 새 한마리와 동물들을 기르고 있기도 하지요. 모두들 즐거운 가족들이예요. 언젠가 로저 당신과 함께 가서 그 친구와 동물들을 만나게 해 주겠습니다. 어때요, 저 새가 귀엽게 생기지 않았어요?" "정말 그렇군요. 그런데 무슨 종류의 새입니까?" "저 새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털 빛깔이 훨씬 더 짙은 샛빛이었고 조그마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당신도 보다시피 저렇게 컸고 털빛도 비둘기색처럼 저렇게 변했지요. 무슨 종류의 새냐고 물었던가요? 세상에 흔한 참새예요." 그러나 루스는 내가 흔한 참새라고 한 말에 대해 의아해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즉시 그 말을 취소했다. 내가 영계에 온 후로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로저는 여전히 그 새와 놀고 있었다. 그때 마침 루스가 우리집을 향해서 오고 있는 방문객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들은 정원을 거쳐 천천히 거닐면서 집 주위에 만발해 있는 꽃들을 만져보고 들여다 보기도 했다. 그들이 집 근처까지 다가왔을 때에야 우리는 그들이 다름아닌 우리의 오랜 친구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간혹 우리집에 들리는 친구들이었다. 둘 중 키가 큰 친구는 '갈데아' 출신이고, 다른 친구는 '이집트' 사람이었다. 나는 로저에게 그 두 사람이 들어와도 전혀 자리에서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일러두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들은 로저가 누워서 쉬고 있는 소파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새로 이곳에 도착한 수많은 영인들이 이 소파에서 쉬면서 회복된 것을 그들은 자주 보아온 것이다. 루스와 나는 문 밖에 나가 그들을 맞이했고 서로 친절한 인사를 교환했다. 갈데아 출신 친구의 이름은 '오마'인데 이곳에서는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아주 비범하게 생긴 사람으로서 특히 그의 가마귀처럼 새까만 머리칼은 약간 창백한 듯한 피부 색깔에 너무나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는 이 영계(靈界)에서 가장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며, 특히 그의 해박한 유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나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 들였다. "어서들 오십시오, 이 환자를 좀 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흔쾌히 응락하고 들어왔고, 우리는 의자 둘을 소파 곁으로 옮겨 놓았다. "자, 젊은 친구, 기분이 어때? 잘 쉬고 기분도 상쾌한가요?" 오마가 로저를 향해 돌아보면서 말했다. "로저는 내가 누군가 하고 궁금해 하고 있군요. 아마 내가 무엇하는 사람인가 궁금하기도 하겠지요!" "그렇군요, 오마! 로저로서는 영계(靈界)의 의복을 착용한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셈이지요. 그렇지요, 로저?" "예, 맞습니다. 나로서는 약간 정신이 얼떨떨 하군요. 이 분의 복장은 '몬시노르'와는 딴판이군요." "몬시노르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요. 저 사람은 일부러 당신이 놀랠까봐 영계의 의복을 입지 않았지요. 로저! 옷 때문에 내가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지요? 전혀 두려워 하지 마세요. 내가 절대로 악의가 없는 사람이란 것은 여기 나의 친구들ㅡ당신의 친구도 되는군요ㅡ이 보증할 것이니까요. 당신은 아마 내가 천사인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뭐 악마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다행한 일이지요. 지상세계에는 지금도 나는 물론 그 외 우리 모든 영인(靈人)들을 천사 혹은 악마라고 부르는 엉터리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아시죠? 루스가 뭐 특별히 천사처럼 보이던가요? 몬시노르, 보세요! 로저에게 지금 공포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죠? 우리가 이렇게 즐겁게 웃고 넘길 수 있으나 다행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죠. 사실 말이지 나는 내 자신이 조금도 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몬시노르도 더 말할 수 없는 죄인이지요." 오마가 나를 향해 돌아서면서 계속 말했다. "이제 그만 가야겠군요. 지상세계의 내 친구들에게 따뜻한 안부나 전해 주세요." 그는 로저의 손을 꼭 붙들고 잠시 동안 그의 뺨을 어루만져 준 뒤 말했다. "젊은 친구, 잘 있어요. 푹 쉬고 난 후 이분들과 함께 영계의 대장관(大壯觀)을 구경하세요. 이제는 이곳이 당신의 고향이 되었어요. 사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우리는 이곳을 우리의 고향으로 삼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답니다." 영계, 경이로운 실체세계 오마 일행을 배웅해 주고 돌아오니 로저가 소파에서 일어나 창문에 기대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손을 흔들자, 그도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가 루스에게 한마디 했다. "그가 이제는 원기를 회복한 듯 보이는군요." "당연하지요. 그리고 오마의 방문이 그가 원기를 완전히 회복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도 너무나 확실해요. 오마가 저 청년의 손을 붙들고 무엇을 하는지 보셨어요? 두 말할 여지도 없이 그에게 생기(生氣)를 불어넣었어요. 저것 보세요. 어쩌면 저렇게 오마같이 보여요?" 로저에게 대단하지 않지만 변화가 일아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우리가 문쪽으로 걸어가니 그는 벌써 젊음이 넘쳐 흐르는 모습으로 문곁에 서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언제나 그렇듯이 이제는 그에게서 환자 모습은 전혀 찾을 길이 없었다. 루스가 말문을 열었다. "자 로저! 이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모습이군요." "맞아요.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자, 몬시노르, 나의 뇌는 이제 깨끗이 청소되어 전혀 옛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우고 싶어요." 그는 기쁨에 겨워 우리들을 포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마디 했다. "당신이 이렇게 생기에 넘치는 것을 보니 오마가 힘을 넣어 준게 확실하군요." 로저는 나의 말에 유쾌하게 웃었다. 그가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로저가 자신을 스스로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임무도 훨씬 쉬워져 이제는 그에게 영계의 경이(驚異)한 풍경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우리로서는 이런 과정을 거쳐 영계를 안내해 주는 일을 수천 회도 더 했지만 언제나 즐겁고 기쁜 임무수행인 것이다. "자, 로저! 이리 와서 지붕 구경부터 하세요." "지붕요? 왜 하필이면 지붕부터 올라가야 하나요?" "로저, 그래요. 지상세계에서라면 우스운 얘기지요. 당신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는 내가 충분히 알아요. 그러나 너무 성급한 판단을 하지 말고 나를 따라 지붕으로 올라와 보세요. 어서요!" 우리는 이층까지 닿도록 사다리를 놓았다. 그곳에서 다시 조그만 방을 지나 몇 계단을 오른 후 평평한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지붕 꼭대기에 올라선 로저의 눈 앞에는 그야말로 황홀한 교외의 전경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자, 로저! 눈을 똑바로 뜨고 한번 바라보세요. 이런 절경을 지금까지 본 적이 있어요? 아니 이와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발끝으로나마 따라 갈 만한 경치라도 한번 본 적이 있어요?" 그는 한동안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않은 채 천천히 한 바퀴 주위를 돌아본 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천국이군!"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고 말고요." 루스가 맞장구를 쳤다. "만일 이 진풍경을 묘사할 수 있는 어휘가 있다면 그런 말밖에는 없을 거예요." "자 몬시노르나 루스, 어느 분이든 좋으니 도대체 이것이 무슨 조화인지 말씀을 해주세요. 예를 들어 저기 보이는 저 많은 사람들은 모두들 무엇을 하고 있는 중입니까?" 교외의 여기저기에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가까이 혹은 멀리, 크고 작은 군중의 모습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거나 걷는 모습들이었다. "여기 보이는 이 모든 사람들은 각자 할 일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지요. 어쩌면 일정하게 할 일 없이 쉬고 있기도 하겠지만요. 저기 저 큰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작은 무리들을 보세요. 그들은 아마 갖가지ㅡ작게는 친구들간에ㅡ유쾌하고 흥겨운 얘기를 나누고 있거나 아니면 지금 루스와 내가 하듯이 새로 온 영인(靈人)에게 영계(靈界)를 소개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어느 누구 하나 그들이 하는 일을 못하게 하지는 않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해서 추진하는 것이지요. 영인들이 게을러빠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절대적으로 유효한 일들입니다. 나와 루스가 지금까지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확인해 보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게으름을 피우는 그런 사람은 보지를 못했어요. 이곳 영계에는 게으름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어요. 영계에서는 우리 모두들 언제나 무슨 일인가를 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 영원한 안식에 상치되는 영원한 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곳에서는 누구에게나 휴식시간이 있고, 지상에서처럼 휴식시간이 긑났으니 일을 시작하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어요.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필요한 만큼 휴식을 즐기고, 자기의 일을 하기도 하며 오고 싶으면 오고, 또 가고 싶으면 가는 것입니다. 지금 루스와 내가 이 지붕 위에서 하고 있는 이 일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즐거운 휴식시간이 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우리의 주요 임무로부터 즐거운 기분전환도 되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우리도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이겠지요. 그렇지만 보세요, 로저! 수백만 명이 모여서 하나도 혼잡함을 느끼지 않고 일들을 처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몬시노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는 궁금하기만 합니다." 루스가 응수했다. "자, 로저, 너무 궁금하게만 생각지 말아요. 사실상 당신은 이제 갓 이곳에 도착했지 않습니까? 로저가 기다릴 만큼 기다리면 무엇인가 일을 맡게 되는데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루스, 당신은 이곳에 오신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40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몬시노르, 당신은요?" "나 역시 40년쯤 됩니다. 루스와 나와는 약 10분쯤 차이가 날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정말로 적기에 만난 인연 깊은 사람들이지요." "오마는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루스와 나는 서로 쳐다보고 크게 박장대소를 했다. "로저! 오마는 지난 2천년간을 이곳 영계(靈界)에서 살고 있어요. 내가 방금 말한 우리가 적기에 만난 인연 깊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취소해야 할까 봐요." 로저도 우리의 장난기 어린 농담을 가담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을 더 확인하면서 만족감에 젖어들어 갔다. "자, 루스! 로저에게 몇 군데 더 설명해 주지 않겠어요?" "그러지요. 로저, 공중으로부터 푸른 빛줄기가 내려 뻗치는 저 큰 건물이 보여요? 지상세계를 작별하고 갓 도착한 영인들이 쉬는 집입니다. 로저도 저곳으로 갈 수 있었어요. 아주 아름다운 곳인데 일단 그곳에 안내되면 세심한 보살핌이 있지요. 아마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친절함이 다 베풀어지지요." "그렇다면 나는 왜 이곳에 와 있습니까?" "여기 우리와 함께 와 있는 게 섭섭하세요?" "천만에요.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에요." "지상세계를 작별하고 영계(靈界)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도와서 안내하게 되는 각종 일을 지시하는 책임자가 있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제의하여 당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지요. 그분 생각으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했고, 우리는 그분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꿈도 꾸지 않았어요.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만도 아니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아래층에 있는 소파에서 몸을 회복하는 과정에 영계(靈界)의 첫 광경에 접하곤 했어요.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고 우리로서도 좋은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 집들은 누구의 것입니까?" 로저가 여기저기 보이는 많은 집들을 가리켰다. 어떤 집들은 우거진 나무들에 거의 가리다시피 했고, 또 어떤 집들은 활짝 트인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저 집들은 이곳에 사는 영인들 집입니다. 이곳에서는 일단 누구든지 집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조건도 소유권을 막지 못해요. 비록 집만이 아니고 모든 다른 물건도 마찬가지랍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영의(靈衣)까지도 이런 원칙에 의해 소유되지요.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알몸으로 거리를 거닐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운이 없어 의복을 소유할 수 있는 소유권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이곳에서는 자연법칙이 아주 합리적으로 작용되고 있어요." 내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로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집을 소유하는 것을 바라지만은 않아요. 더러는 귀찮게 생각하지요. 사실은 귀찮다는 말이 적합한 표현이 못 되지만, 어떻든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집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간단해요. 보세요, 이곳이나 다른 어느 곳을 막론하고 언제나 빛이 비치고 있지요. 매서운 바람이나 추위가 전혀 없습니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것처럼 이곳은 언제나 번함없이 쾌적한 날씨에 따뜻하기만 해요. 따라서 이곳에서는 우리가 지상세계에서 필요로 했던ㅡ환경에 적응키 위해ㅡ보호막이 전혀 필요없는 것입니다. 개인의 사생활 보장에 대해서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소가 준비되어 있어요. 여기서도 볼 수 있는 곳들이 있군요. 그런 곳이면 어디를 막론하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사적인 시간을 마음대로 만끽할 수 있어요." "저기 멀리 보이는 건물들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각종 학습관(Hall of Learning)들인데, 사실 저곳이 바로 도시에요. 저곳에서는 어떤 지식을 막론하고 습득할 수 있어요. 저 학습관들을 통해 수많은 일들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죠. 이곳 영계(靈界)의 생활을 영위하게 해주고 있는 어떤 분야든지 자기가 원하면 기술자가 될 수 있어요." 우리는 이처럼 로저에게 눈 앞에 보이는 많은 곳들을 가리키면서 설명했다. 또 그것들이 거기에 필요한 이유를 말해 주면서 지상세계를 떠난ㅡ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듯이ㅡ그의 젊은 마음 속에 영계(靈界)에 관하여 무엇이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묻는 점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시켜주었다. 로저는 그의 목전에서 지상세계의 시골에서 맛볼 수 있는 아침의 신선함과 탁 트인 공간이 눈 앞에 펼쳐져 극치를 이루며, 호수나 강물 위에 잔잔한 물결을 타고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또 잘 정돈된 정원들의 아름다운 꽃과 새들, 그리고 푸른 하늘과 조화되어 펼쳐진 자연의 모습들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내가 모두들 아래층으로 내려 가자고 제의를 했다. 로저는 아래층으로 내려 오는 도중에 깨끗이 정돈되고 안락하게 꾸며진 방들의 모습에 감탄을 했고, 이제는 친숙해 진 아래층 방에 도착하여 그간의 소감을 우리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제가 살 집은 어디인가요?" "로저, 우리들은 어느 특정 장소를 배정받아 살게 되진 않아요." 내가 대답했다. "당신 소유의 집은 없지만 어디든지 좋아하는 곳에 기거하세요. 만일 집을 갖고 싶어 한다면 소유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해드릴까요? 집을 소유하게 되면 방문객들이 많이 드나들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혼자 사는 느낌이 들거예요. 하기는 사실상 여기서는 외로워질 수가 없어요. 집이 생겨도 곧장 밖에 나가 외로움을 지워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을 사귀면 되는 것이니까요. 루스와 나는 당신이 무슨 뜻으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알고는 있지만, 당신의 의사에 맞는다면 다음과 같은 제의를 하고 싶군요. 우리와 함께 이 집에서 살고 싶지 않으신지요? 당신도 이 집의 크기를 보아서 아다시피 방들은 충분히 있어요. 당신이 원하는 한 얼마든지 쓰세요. 확실히 말해 드리겠는데 절대로 부담은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도 아마 짐작했겠지만 우리의 미래의 시간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예견을 할 수가 없고, 또한 그것이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아요. 루스와 나, 그리고 아직 당신은 만나보지 못한 에드윈, 이렇게 우리 세 사람은 다른 업무와 병행해서 이 일을 수년씩이나 계속해 오고 있어요. 아마 앞으로도 수년간 이 일에 싫증을 느끼지 못할 거예요. 혹시라도 우리가 일을 바꾸는 한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이 집에서 살고 싶답니다. 영적인 성취도 중요하니까요. 로저, 우리가 보다 높은 급으로 올라가면 우리의 거처를 옮기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 단계는 지금으로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우리의 가족의 일원으로 합류하세요. 즉 우리와 함께 이곳에 기거하세요. 가진 물건이나 가구 같은 집이 없는 몸이니 어려울 것도 없겠구요." 로저가 우리의 제의에 감사의 표현을 하려 했으나 우리가 만류했다. 그처럼 마음의 듯을 말로 표현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생각 자체로도 충분히 의사전달이 된 것이다. "그 문제는 이제 해결이 됐군요." 루스가 말했다. "그런데 로저! 이곳 영계(靈界)의 물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는 안락 의자에 앉은 채로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는 듯 상당히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하고 마침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지금까지 저에게 보여주신 이 모든 지식이나 사물들이 종교적으로 어떻게 설명되느냐는 점입니다. 내가 충분한 사전 교육을 받고 온 것도 아니고, 사실상 무엇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왔거든요." "로저, 그 점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만이 아닙니다. 영계(靈界)에 들어오는 수천, 수백만의 영인들이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요. 루스와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우리도 처음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당신의 입장보다 더 나은 입장은 아니였어요. 좀더 쉽게 말한다면, 우리가 지상세계에서 살 때는 이 전영계(全靈界)를 '사후의 세계' 내지는 '내세(來世)'라고 믿고 살지요. 그리고 극히 소술르 제외하고는 영계를 자기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적인 각도에서만 이해하고 있어요. 내가 말한 극소수의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영계의 진실을ㅡ부분적이기는 하지만ㅡ터득하여 알고, 스스로 위로를 받으면서 살고 있는 영통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상세계의 대부분의 종교들은 사실상 전혀 이 영계와 무관하면서 이영계에 대한 절대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한 인간이 지상세계를 떠나 영계로 들어오는 현상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순전히 본연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니까요. 지상세계에서 보람된 생을 사는 것도 종교적인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왜 종교와 결부시켜야 하나요? 당신도 이곳에 와서 어떤 종류든 그런 종교적인 글귀가 붙어있는 것을 보셨어요? 그렇다고 어떤 사람이 감히 우리의 생활을 선하고 보람된 생(生)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지상계(地上界)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종교가 있는지 한번 꼽아 보세요. 기독교 자체만 해도 서로 다른 교리를 믿는 수천 개의 교파가 있지 않습니까?" "몬시노르, 내가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만, 어느 한 종교도 절대적인 진리 전체를 가르치지 못하지만 수많은 종교들이 어느 분야에서든지 약간씩은 진리를 터득하여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모든 종교들의 가르침을 함펴보면 진리 전체를 갖고 있는 셈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으시는지요?" "그렇게 말하는 자도 있지요. 나도 그런 이론 전개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아요. 문제점들이 있어요. 첫째로, 어느 일정한 종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종교의 수많은 가르침 중에서 그 어떤 분야만을 진리라고 점찍어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 그 진리 부분이 발견되었다 해도 우리가 그 일부분 밖에 안 되는 진리로 만족하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지상세계에 산재해 있는 그 모든 종교에 몸을 담고 연구하여 흩어진 모든 진리의 파편들을 주워모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모든 종교들로부터 거짓 양(羊)과 진짜 양을 선별해 내는 대작업을 해야겠군요." 로저는 크게 웃었다. "여보, 젊은 친구! 그렇게 웃는 건 좋지만 사실상 끝장에는 그런 문제점에 봉착하고 마는 게 기정사실이 아니오?" "실지로 영계에 와서 이 방, 바로 이 의자에 앉아 생각해 보니 옛날에 내가 주일날 가끔 교회당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보던 때에 비추어 보면 정말 아득한 느낌이 드는군요." "아니, 가끔이라니요?" 루스가 끼어 들었다. "로저는, 독실한 교인이 아니었군요!" 내가 거들었다. "로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알고 있어요. 지상세계에서의 주일예배는, 담당목사의 기도, 그리고 찬양대의 송가, 이어서 목사의 설교, 어김없이 돌려지는 헌금함……. 특히 그 목사들의 설교 내용이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전혀 거리가 먼 설교였지요. 그러나 어떻게 일개 평범한 인간인 목사로부터 진리를 기대할 수가 있겠어요? 어떻게 평범한 인간ㅡ아니 목사라도 좋아요ㅡ이 다른 사람들의 특정한 문제점이나 그 외 여타의 관심사에 대해서 바른 가르침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 설교자가 그러한 문제점들이나 관심사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을 때 말입니다. 정작 문제점은 거기에 있어요. 무지(無知), 또는 진리의 결핍(缺乏),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목사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지요. 진리를 먼저 터득 해야 할 자는 성직자예요. 내 자신도 이 점을 알았어야 하는 건데 몰랐었으니까요. 지상세계에서 나처럼 성직자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루스나 로저, 당신 같은 일반 교인들에게 지금 우리가 이곳 영계에서 알고 있는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해요. 그들이 하려고만 들면 이 정도의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렇지 못한 지상세계의 현실들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고 슬프기 그지없어요. 우리는 지금 이처럼 영계에 살고 있는데, 지금도 지상세계에서는 이 영계를 장막으로 덮어 놓고 거짓된 신앙생활을 강요하고 있어요. 저마다 성직자들이 자꾸만 영계의 실상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놓고 있어요. 세상의 종파들은 서로 물과 기름처럼 화해나 통합이 전혀 불가능하지요. 물이나 기름은 화학약품을 통해 함께 융합도 가능하겠지만, 그들은 자체적으로 하나가 되어지지 않아요.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참 딱하기 한이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서 지상세계에 존재하는 종교들이 영계에 있는 우리들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다스리기라도 하는 양 생각한단 말입니까? 그들은 우리 영계와 영인들을 생각할 때 완전한 실체상, 합리적인 삶(生), 실질적인 활동, 상호간의 사랑과 협조 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믿고 있어요. 그들은 당신이 안고 있는 그 새를 두고도 영계에는 있을 수도 없는 비상식적이고 터무니 없는 생각이라고 일축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 잿빛으로 빛나는 아주 아름다고 귀여운 새를 보세요. 지상세계의 인간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기르는 것처럼 우리도 중요한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면서 기르고 있지 않습니까? 영계에서 맡은 바 자기의 일을 하는 영인들이 수천 수만 명도 넘겠지요. 그런데도 그와 같은 일이 이곳 영계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은 믿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들을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어요. 이런 일들은 인간들이 영계에서 추구하는 일로 간주조차 않아요. 그들은 그런 일은 신께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동물들을 기르고 아끼고 사랑하는 일들은 너무나 사소한 일이고, 또 성스러운 일이 못 되니까요. 한가지 생각나는 군요. 로저, 당신이 이곳에 도착한 후 그 소파에 누워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보았던 선악의 심판관으로 느낀 천사 얘기 말입니다. 로저, 요약해서 말하자면 지상세계에 산재해 있는 종교들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영계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해요. 우리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지요. 적어도 그들의 의식 구조로는 과연 영계가 어떤 곳일 것이라는 상상이나 환상을 가져볼 수도 없도록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들이 한가지 확신하다시피 하고 있는 점은 영계가 '결코 이런 곳은 아니다!'라고 결론지어 믿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들이 그처럼 판단하고 믿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그와 같은 두려운 생각 그 자체 때문에 사람들은 공포에 떨게 되고, 또 그러한 심판당하는 상황하에서는 살고 싶지도 않다고 믿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그 누구도 나무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자, 로저! 이젠 밖에 나가서 잠깐 돌아다녀 볼까요? 그 새도 함께 데리고 오세요. 우리가 없을 때, 그 새가 길을 안내할 수도 있으니까요. 자, 따라 오세요. 영계의 첫 나들이 우리와 함께 교외길로 걷던 중 로저는 또 한차례 경이감(驚異感)에 접하게 되었다. 교외의 아름다운 경치와 매혹적인 풍경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어디를 가도 모두 친절한 인사를 교환해 주는 그 살실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이었다. 이런 친절한 인사들은 주로 우리가 걷는 도중 마주쳤던 전혀 낯선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들이었는데 로저는 우리와 다정히 인사를 나누는 그들이 모두 우리와 오래 사귀어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고, 로저가 혼자서 걷다가 그들을 만났더라도 지금과 똑같은 친절한 인사를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설명해 주었다. "로저, 영계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소개가 전혀 필요 없지요." 우리는 로저가 영계의 새로운 생에 있어서 많은 흥미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침내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극치의 미(美)를 이루고 있는 많은 정원들 중앙에 자리 잡은 비교적 거대한 저택이었는데 주위는 잘 가꾸어진 화단과 맑은 물이 반짝이며 빛나는 연못,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갖가지의 수목들로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그 저택은 정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중앙에 정문과 넓고 큰 창문들이 있는 건물이었으나 외모는 별로 눈길을 끌 만한 건축학적 치장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외관상으로는 가정과 작업장의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지은 건물같이 보였다. 그러나 건물에 쓰인 자재(資材)는 지상세계에서 건축에 사용하는 무겁고 우중충한 벽돌과 석회와는 너무나도 달라서 석재의 색상과 배열이 완전무결하게 조화된 그야말로 영계에서나 있음직한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로저는 이처럼 가까이서 큰 저택을 관찰할 수 있게 된 것이 처음이었고, 그 건물에 쓰인 아름다운 돌들을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기분인 것 같았다. 로저는 가까이 가서 손으로 아름답게 깎아 쌓아 올린 돌벽들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렸다. "로저, 이제 그만 됐어요." 루스가 말했다. "예, 그런데 돌이 따뜻해요." "아니, 적어도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사실은 우리가 새로 도착한 영인들을 안내할 때마다 수없이 경험한 바이기는 하지만, 로저처럼 새로 영계에 들어온 사람들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의 열의를 보면서 무언가 새삼스러움을 발견하곤 한다. 우리의 도착을 벌써 알아차리고 집주인이 정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큰 키에 위엄이 있고 당당한 체구를 가진 미남의 미국 인디언(American Indian)이었다. 우리가 로저를 그에게 인사시키자 그는 아주 다정하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그에게 로저가 이제 갓 도착한 친구라는 것과 우리들은 그의 안내원으로서 그를 이 지역까지 수행해 왔다는 점을 설명해 주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리고는 "나까지 견학 프로 속에 포함시킨 것이구요." 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는 즉시 그런 불손한 뜻이 없었다고 얘기했으나 우리가 우리의 입장을 밝히면 밝힐수록 그는 더 즐겁게 웃어대는 것이었다. 한가지 밝혀둘 것은 주인인 인디언은 그의 임무수행을 위해서 영어를 배워 우리와의 대화에서 영어를 충분히 구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 그의 말을 적는 데는 약간의 언어학상의 미숙도는 접어두기로 했다. 사실 그의 그런 언어 구사의 완전하지 못함이 지상세계에서 그를 가까이 하던 친구들에게는 대단한 기쁨을 안겨 주는 촉진제가 되기도 하며, 또 그 자신도 그들에게 얘기를 할 때 그 점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즐거움을 맛보곤 했다. 그와 우리는 오랫동안 사귀어온 친구이므로 대부분의 대화는 생각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우리는 그가 학식이 있고, 교양이 있는 전문가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인디언들이 그렇듯이 그도 이름을 약간은 영계의 상황과 조건들에 맞게 고쳤지만 그래도 본래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과 다른 급(級)의 영계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를 래이디언트 윙(Radiant Wing)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름의 첫 부분인 래이디언트(Radiant)가 바로 내가 방금 설명했듯이 이곳의 분위기에 맞추어 붙인 이름이다. 물론 그 이름 자체가 부르는 사람들에게 무슨 뜻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지만, 그가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 끝에서 비춰지는 빛의 발산을 목격하노라면 더욱더 그 이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지상세계에 있는 여러분들은 왜 영계에서까지 그가 깃털로 된 모자 같은 것을 써야 하는가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무엇이든지 아름다운 것은 보전된다. 어떤 용모나 형태가 지상세계에서 아름답게 비춰진다면 이곳 영계라고 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을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착용하는 데는 누구도 반대를 못하며, 또 우리도 설사 그것이 지상세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반대는 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상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안 하고 하는 등의, 제멋대로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우리는 절대로 그와 같은 하급(下級)의 그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영계에서는 그 누구도 그가 옳다고 인정하지 않는 한 복종을 강요당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자기의 신념이나 감정이 손상되는 것을 피하고 싶으면 자유롭게 자기의 적성이 맞는 곳을 찾는다.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자신의 판단이 옳지 못했다고 생각되면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지내놓고 보면 후자의 쪽이 우리들의 처지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 주인이 머리에 쓰고 있는 장식모야말로 아주 훌륭하고, 극도로 섬세한 색상의 강약에 맞추어 오색찬란한 무지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자를 만드는 데 쓰는 깃털은 진짜 새에게서 뽑은 것들이 아니다. 만일 진짜 새에서 뽑은 깃털이라면 살아 있는 새들에게서 뽑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죽은 새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모든 깃털들은 전적으로 영계의 자재(資材)로 만들어진 것들이며, 아주 정교한 숙련공들의 손에 의해 다듬어져 진짜와 전혀 다름없는 물건들이 된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부연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장식모(Head dress)는 언제나 쓰는 것이 아니고 보다 공식적인 모임 등에만 사용된다. 우리가 미리 로저에게 설명해 준 바 있지만 래이디언트 윙(Radiant Wing)의 주임무는 지상세계의 협조자와 함께 병든자를 치료해 주는 것이다. 그 외에도 그는 또 위대한 실험가로서 그의 재량으로 수많은 다른 화합작용을 통해 영계에 존재하는 많은 자원의 응용법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우리를 안으로 안내하면서 벌써 우리가 이곳 영계에서의 생활에 대한 자료나 정보를 얻고 싶어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우리가 그의 부서에서는 어떤 일들이 처리되고 있는가를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그가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아주 산뜻하게 꾸며진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그는 주임무인 환자치료 외에도 로저처럼 젊은 사람들에게 기술을 지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그를 따라 실험실로 들어서니 그의 지도하에 환자치료법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과 견습생들이 있었다. 실험실은 꽤 넓은 방이었는데 한쪽에는 각양각색의 실험용 기구들, 작은 약병들, 작은 용기들이 쭉 진열되어 있었고 그것들은 각각 다채로운 색을 띠는 물질들로 채워져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인간의 구조를 각 분야별로 잘 묘사해 놓은 도표가 걸려 있었는데 다른 쪽에 진열되어 있는 해부용 총천연색 모델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우리 일행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들도 이해하다시피 우리로서는 인체의 구조와 각 기능에 대해, 그리고 인간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그 모든 병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자세히 알지 않고는 병을 치료할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상세계의 의사들과 우리의 역할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치료방법은 그들과는 전혀 다르지요. 우리는 이곳에서 지상세계 의사들이 사용해 보지 못한 우리 특유의 재료들과 권능을 쓰고 있습니다. 영계에서만 가능한 방법들이지요. 우리의 방법들이 훨씬 더 간단해요. 하나의 예로, 저기 선반 위의 유리병들을 보세요. 그 속에는 수많은 병들을 고칠 수 있는 가지각색의 연고가 들어있지요. 실질적인 치료 효과를 논하는 데는 색깔은 무슨 색이든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서로 용도를 구별하기 위해 각 연고마다 다른 색을 갖고 있고, 그들을 함께 배합하여 어떤 특정한 연고를 제조할 때면 마치 화가가 그림 물감들을 섞을 때처럼 아주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색들의 조화를 보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처럼 연고를 서로 배합할 때면 그 배합된 연고의 색을 보고 즉각 어떤 연고가 얼마 만큼 들어갔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쉽게, 치료를 받는 환자의 병에 따라 어떤 연고든지 배합량을 더 늘리거나 줄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배합된 연고의 색들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상당한 전문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조제해 낸 연고들은 거의 무한한 색상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치료법의 기본을 익히는 것 외에도 내가 지도하고 있는 학생들은 새로운 조제법을 창안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기도 하고, 이와 같은 새로운 조제법을 통해 지상세계에서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고칠 수 있는 치료약을 발명하기도 합니다. 저 선반 위에 있는 것들은 단지 영계에서 쓰는 재료들의 표본(Sample)들일 뿐입니다. 어디서 무슨 환자를 치료할 때라도 우리가 쓰는 약 재료들은 언제나 새롭게 조제된 것들입니다. 사전 실험과 지식을 통해 우리는 무슨 색의 연고나 어떤 조제약을 사용해야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배합된 약품들은 언제나 정량이 들어 있는 우량품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설명한 것은 우리들의 치료방법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또다른 치료방법을 소개하자면 광선치료법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치료에 흔히 쓰고 있는 광선(Light Ray)들은 유리병이나 약그릇에 담아 선반 위에 올려 놓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는 보여 줄 수가 있어요. 그는 로저를 향해 돌아서면서 말을 계속했다. "젊은 친구, 당신이 몬시노르 집에 있을 때 공중으로부터 밝고 푸른 빛줄기가 내려 뻗쳐지는 커다란 건물을 본 적이 있지요? 바로 그 푸른 빛줄기가 지상 세계의 병자들에게 원기를 불어넣어 주고 또 여기 사는 우리들에게도 치유의 원동력이 되고 있어요. 자, 모두들 내 곁으로 가까이 와서 둥그렇게 서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보여 줄 것이 있어요." 래이디언트 윙을 중심으로 우리는 작은 원을 그리며 둘러 섰다. 잠시 후 우리는 밝고 푸른 광선이 우리 모두에게 내리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고, 즉시 펀안해 지면서 최상의 안정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래이디언트 윙이 그 빛줄기를 작은 연필 정도의 크기로 줄여 가지고 차례차례 우리들의 손바닥에 비춰 보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자, 보세요. 이 광선을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 비출 수 있지요. 또 얼마든지 그 굵기나 크기도 조절할 수 있어요. 우리가 치료하는 그 병세의 정도에 따라 조절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자유자재로 그 광선을 조절 처리하면서 원하는 곳에 내려 쪼이게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보세요, 이것은 또다른 종류의 광선입니다." 그 푸른 빛줄기는 자취를 감추고 이제는 그 자리에 밝고 붉은 빛이 내려 쪼이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이 빛은 촉진제 빛(Stimulating Light)입니다. 이 빛은 힘(Energy)을 공급해 주고 병이나 상처가 치료된 후 그 치료 부위만 촉진시켜 주는 것이 아니고 몸 전체에 촉진제 역할을 합니다. 지상세계에서 지금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치료방법이지요. 이러한 치유광선이 달리지 않을까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지요." 그 붉은 빛에 쪼이자 확실히 몸에 따뜻함이 배어드는 것이 느껴졌고, 로저가 빛이 따뜻하다고 한마디 했다. "그래, 젊은이, 당신의 느낌이 맞아요. 그 붉은 빛을 쏘이면 보통의 경우 그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특별히 열치료가 필요할 때 쓰는 열선(Heatrays)이 있어요. 이처럼 구별하는 게 그 목적이기도 하지만, 그 색깔의 변화가 직접적인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치유력은 그 빛줄기 자체에 있는 것이지 색깔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 여러분! 보실 수 있는 것들은 다 보신 셈이군요. 우리가 직접 작업하는 현장을 제외하고는……. 그런데 여기서는 그 작업현장을 보여드릴 수가 없으니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이제 나를 따라 정원으로 나오세요. 내 가족들에게 여러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래이디언트 윙이 정원으로 직접 통하는 문을 열어 주어 우리는 모두들 정원으로 나갔다. 왼쪽을 보니 아름답고 정교하게 꾸며진 정원이 있었다. 그 정원은 넓게 뻗쳐 있었고 양쪽은 긴 담벼락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주인의 설명에 의하면 긴 담들은 땅의 소유권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사람들이 정원을 보게 될 때에 첫눈에 땅을 보게 되는 것을 피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도 그 담들은 비로 앞에서 자라고 있는 키가 큰 화초들과 꽃이 피어 있는 수목들의 의지가 되고 있기도 했다. 그 담들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제법 크게 아치(Arche)형의 구멍들이 뚫려 있어 아주 고전적인 맛을 더해 주고 있었다. 정원에는 또 크고 우람한 나무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나무들은 모두 하늘의 정기를 마음껏 펼쳐보이는 듯, 지상세계의 나무들이 비바람 때문에 정상적인 모양으로 자라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말 흠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훌륭한 저택의 중앙에는 지면보다 훨씬 낮은 곳에 연못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연못의 변두리에 포장된 공터가 있어 넓게 만들어진 계단을 몇 계단 내려가야만 그곳에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소개시켜 주겠다던 가족은 어디서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신호를 하니 우리들이 서 있던 넓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한 마리의 큰 개와 푸마(Puma)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주인의 실험실에서 나오는 순간 로저가 그때까지 그의 손에 안고 있었던 그 작은 새는 큰 나무를 향해 날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 작은 새가 바로 까마귀 한 마리와 잉꼬새 한 마리를 데리고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래이디언트 윙이 그의 두 팔을 앞으로 내밀자 까마귀와 잉꼬는 즉시 그의 팔 위에 앉았고, 그 작은 새는 곧장 로저에게로 날아갔다. 래이디언트 윙이 물었다. "내 가족에 대해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이 개와 까마귀, 그리고 잉꼬새는 나의 소유로 되어 있지만 젊은 친구 당신이 안고 있는 그 작은 새와 저 귀여운 푸마는 지금도 지상세계에서 나의 보조원 역할을 해주고 있는 친구들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연녹색의 잉꼬새와 짙은 검정색의 까마귀, 그리고 연한 잿빛을 띠고 있는 참새와는 생생할 정도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로저는 눈에 뜨일 정도로 푸마에 대해 약간 겁을 먹고 있는 눈치였다. 지상세계에서 그런 종류의 동물을 대하던 기준에서 본다면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즉시 주인이 그를 안심시켜 주었다. "젊은이,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보세요. 저 푸마는 사나운 기색이 전혀 없지 않아요?" 루스가 허리를 굽혀 그 귀여운 푸마를 쓰다듬으며 함께 노는 모습이 양처럼 순해 보였다. 주인이 다시 설명을 계속했다. "물론, 그런 종류의 동물이 그 암컷 푸마 한 마리 뿐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면한 것은 영계의 모든 동물들이 다 양순하고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기 살고 있는 동물들에게는 지상세계의 둥물들처럼 생존을 위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투쟁이 필요 없고, 또 동물들끼리나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근본된 문제들은 그들 자신들에게도 그렇지만 인간들에게도 커다란 기쁨의 대상이지요. 한번 만져 보세요." 로저도 루스의 곁에서 허리를 굽혀 푸마를 쓰다듬어 주기 시작하니 어느새 두려운 생각 같은 것은 잊어 버리고 푸마의 푹신한 털의 촉감에 넋을 잃고 말았다. "이 푸마야말로 말괄량이지요. 그녀는 다른 친구들에게 언제나 익살맞게 굴곤 해요. 저 작은 새와 어떻게 지내는지 자세히 보세요." 로저가 손을 쳐들자 그 위에 앉아 있던 참새가 훌쩍 뛰어 땅에 닿을 정도로 낮게 날았다. 그러나 푸마가 뛰어도 잡을 수 없을 만큼의 높이를 유지하면서 일정한 방향성이 없이 이곳저곳으로 약간 변덕스러울 정도로 날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푸마가 즉시 몸을 솟구쳐 참새의 뒤를 쫓아 나는 모습을 지그재그로 열심히 흉내내고 있었다. 그들의 날고 뛰는 모습을 보고 있던 우리들은 땅 위에서 민첩하고 날렵하게 움직이는 푸마의 모습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어찌나 그의 모습이 우스운지 박장대소를 했다. 푸마가 깜짝 놀랄 만큼 높이 뛰어 참새의 날개를 물었는가 했는데 어느새 참새에게 속아 불과 1인치나 2인치를 두고 상하좌우로 따돌림을 당하곤 했다. 참새와 푸마의 놀이를 보고 로저가 물었다. "만일 푸마가 정말로 저 참새를 물게 되면 어떻게 하지요?" "설혹 저 둘이 친한 친구가 아니더라도 서로를 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이곳에는 원수가 없어요." 그 참새가 급강하하여 푸마를 희롱하는 것 같더니 사뿐히 그녀의 머리 위에 앉자 그들의 게임은 끝났고, 푸마가 성큼성큼 뛰어와 잔디 위에 누우면서 그녀의 재롱을 만족해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상 세계와 영적 교통 래이디언트 윙과 작별을 하고 나서 계속 걷는 도중 로저가 이제 갓 보고 온 그 집과 정원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놓고 무언가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충격을 받은 사실은 이와 같은 영계의 현실들이 세상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하여 그 많은 지상세계의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처럼 엄연한 영계의 현실이 전개되고 있느냐 말입니다.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일입니다." "로저, 이와 같은 현실이 지상계 사람들에게 모두 얼려져 있지는 않지요. 그러나 수백억이 넘는 지상세계 사람들 중 극소수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영계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나와 루스가 꼭 그런 일을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우리도 그 분야에 공헌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요." 이와 같은 사실의 전달은 오랜 기간 행해져 내려오고 있어요. 지상세계를 버려둔 채 이러한 사실의 전달을 중단해 온 역사가 없어요. 최근에 들어 계시를 받는 자가 더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세상을 떠난 후로 지상세계에서 계시받은 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더이상 괄목할 만한 신령역사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후로는 사실상 영적 침묵시대였지요. 어때요, 지금까지 이곳에서 보고 느낀 점에 비추어 보아 내가 하는 얘기가 맞는 것 같아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 듯하군요." "이것이 오늘날 지상세계가 처한 현실입니다. 대다수의 대중은 지금도 사후(死後)의 일에 대해서 알고 있거나 심지어는 알아 보려고 하는 것까지도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난 것으로 믿고 있어요. 그래서 또하나의 종말이 있는 셈이지요. 소위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영계나 사후의 삶에 대하여 인간들은 알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자가 없겠느냐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인즉 그들에게도 여러 경로를 통해서 다 가르쳐 주었지요. 그들이 영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도록 가르친다고 믿고 있는 그 성서 속에 영계에 대한 가르침이 들어 있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요? 성서를 경건한 자세로 읽는 그들은 그 성서 속에 영계에 대한 모든 지식이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신령역사에 관한 내용에 접하게 되면, 요즘에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의 하나로 간주하고 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로 처리해 버리고 맙니다. 만일 그러한 신령역사가 아득한 옛날에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면ㅡ사실은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ㅡ지금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맞는 게 사실이지요.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러한 사실을 아는 데 아니면 적어도 알아 보려고 하는 데 관심을 갖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로저!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지상세계의 일반적인 태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두 교파 중 한 교파는 확신을 갖고 교리적인 차원에서 주장하기를, 누구든지 신령역사ㅡ어떤 종류의 신령역사를 막론하고ㅡ를 부인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지만 대부분의 신령역산느 악마의 농간이거나 아니면 악마의 부하들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라고 설파합니다. 오마가 했던 말이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한 것이지요. 지상세계에 살고 있는 종교지도자란 사람들이 영계의 우리를 그저 악마(Devil)라고 부른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이런 개념이 그저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터무니 없고 엉터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영계가 인간 삶 가운데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길이 없을까요?" 루스와 나는 젊은 친구인 로저의 건전하고 패기에 찬 의욕을 보고 미소를 보냈다. 루스가 입을 열었다. "로저, 당신의 그와 같은 깨달음들이 영계의 삶에 있어 당신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당신이 어떤 기분인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아요. 몬시노르와 나도 당신과 똑같은 경험을 했으니까요. 우리도 그때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머리통들을 붙들고 모두들 한꺼번에 박치기라도 시켜서 그들에게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그런 우리의 태도에 우리보다 지혜로운 분들의 만류로 자재하고 말았답니다." 내가 다시 거들었다. "자, 이제 내가 말했던 그 중요한 두 교파 중 다른 한 교파에 대해서도 들어 보세요. 그 교파에서는 대주교의 직권으로 영계와 지상세계 사이의 교통(交通)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조사와 심사숙골르 거쳐 그들 나름대로의 조사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그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대다수의 교직자들이 그와 같은 영계와 지상계 사이의 영적 교통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러한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조사 보고였지요. 그런데 문제는 로저, 당신도 농담 좋아하지요. 한바탕 크게 웃어 버릴 준비나 하고 들으세요. 그 보고서 전체가 공식적으로 발표 금지를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참 이상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들은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되지 못한 자들은 '만일 그 보고서가 영계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이었다면 그것은 승전고가 울려퍼지듯 책으로 출판되어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보고서에 대한 계속편은 아직 얘기 못했군요. 그 조사 결과 보고서를 세상에 알리지 못하도록 명령했던 대주교가 이제는 이곳 영계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로저, 누구나 일단 한번 저질러 놓은 실수를 없었던 것처럼 뒤바꿔 놓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나는 그 성직자를 많이 동정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나의 지상세계 시절을 돌이켜보면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런데 정말 다행하게도 나는 그것들을 많이 바로잡아 놓았어요.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거의 흠이 없도록 바로잡아 놓기는 했지만 완전하지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상세계에서 열정적으로 얘기를 했던 곳에서는 틀린 내용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두 배로 더 열정적인 얘기를 하여야 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제 내 마음 속에 옛날에 갖지 못했던 대단한 평온함과 만족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내가 실수했던 지상세계 생활 시절에 대한 책을 보여 주겠습니다. 지금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엉터리였지요." 루스가 나를 보며 웃으면서 위로의 말을 했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지상세계에는 당신이 쓴 그 책보다 훨씬 더 형편 없고 엉터리 같은 것들이 많아요." "아까 얘기한 그 두 교파는 종교적인 이유이기는 하지만 영계에 대한 묘한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 어느 교파도 사후세계(死後世界)의 길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고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사후의 생은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에서 그들의 근본적인 종교생활과 합치되는 것을 찾을 수가 없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주장은 지상세계에서의 생은 실제로 물질적인 삶이요, 사후의 생은 모종의 성령에 의해 영위되는 생이라는 것입니다. 확실히 영계의 삶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인간들이 지상세계에서 익숙해졌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경건하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것처럼 이곳의 생활은 지상세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그러나 그들이 설명하는 뜻과는 또 다릅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된다는 말이겠습니까? 교회들이 종국에는 진리를 찾게 됩니까? 교회들이 지금과 같은 제도하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들은 지금 그 상태로 완전히 만족해 하고 있어요. 두 교파 중 내가 언급했던 그 첫 교파는 그들이야말로 정통교파요, 전혀 틀림이 없는 교파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교파에는 크게 기대를 걸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두 번째로 언급했던 교파는 권위 행사를 전혀 앞세우지 않습니다. 개혁을 통해 정해진 교리 안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 신자들이 좋아하는 대로 생각하고, 믿고 따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적인 문제를 놓고는 대주교조차도 소속되어 있는 성직자들에게 전혀 권한 행세를 안 합니다. 어떤 성직자들은 영계의 실상 그대로를 믿고 진심으로 후원하기도 하는데 그들이 바로 우리로부터 직접 영계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는 자들입니다. 이 특정교파가 공식적으로는 영계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목회자와 일반 교인들이 똑같은 입장에서 행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계에 대한 내용을 배워 알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교파으 이상한 교리를 따라 교회를 받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두 길을 동시에 걸어 보려고 하고 있지요. 그러나 그들도 일단 이곳에 오게 되면 궁극적으로 한 길만 택하게 됩니다. 로저, 영계의 생활에 대한 참된 태도와 실상을 놓고 공식적인 인정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진리는 평신도들이 더 찾기 쉬운 법입니다. 당신의 간단한 제의가 얼마나 값진 진리를 유발시켰는지 보셨겠지요." 루스가 모두에게 잠깐 앉기를 권했다. 우리는 평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서 있는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멀리서 반짝거리며 빛나는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루스가 입을 열었다. "로저, 수억을 헤아리는 지상세계 인간들이 이 아름다운 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니 정말 측은하기 짝이 없지 않아요? 설상가상으로 그들에게는 그 어처구니 없는 바보 같은 교리(敎理)인지 무엇인지 때문에 알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살고 있으니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지요. 사후세계에 대해, 우리의 이곳 생활에 대해 알게 된다고 해서 그들에게 과연 무슨 해(害) 될 것이 있단 말입니까? 혹자는 우리가 필요악 같은 존재요, 해괴망칙한 자들이니 상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런 사고를 가진 자가 있다는 것만 생각해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내가 다시 거들며 한 마디 했다. "루스,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그들의 이와 같은 도매값의 무지는 뭐 새로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수천년간 내려오는 치유불능의 고질이지요. 정말 큰 일이기는 해요. 이렇게 너무 오랫동안 무지(無知)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다 보니 사람들이 대부분 그들 자신의 종교적 내지는 신학적인 외골수의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어요. 로저, 그러나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여 진실에 접하게 되면 마치 신풍(神風)처럼 돌아다니면서 마침내는 그들이 뒤에 남겨놓고 떠나온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이 모든 진리를 소리쳐 가르쳐 주겠다고 애원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가 보지만 결과는 양쪽이 다 실망스런 결과 뿐이지요. 이쪽에서 외치는 소리를 지상세계에서는 바로 듣지 못하고 그들이 종전에 했던 대로 해석해 듣고 말아요. 로저! 루스와 내가 당신을 인도하여 지상세계의 어느 일정한 장소에 나타나 우리의 오랜 친구들에게 현현했다고 해봐요. 우리는 당신을 그들에게 소개하고 그들에게 당신의 소식을 당신 가족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해봅시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여기서 당신이 기억해 두어야 할 점은 당신과 우리 친구들과의 관계가 생면부지의 낯선 관계라는 것과, 짐작건대 당신 가족들은 두 세계간의 영적 교통(靈的交通)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門外漢)이라는 점입니다. 설혹 당신의 가족들이 이런 분야에 대해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이 가능하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 뻔하지요. 우리 친구들이 당신 가족들을 찾아가서 그들 자신을 소개하고 로저로부터 소식을 받아가지고 왔노라고 했다고 합시다. 무슨 결과가 벌어질 것 같습니까? 당신이야말로 당신 가족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이므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쉽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로저, 그 결과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는군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로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했다. "나의 가족들은 엄하기는 해도 정중하게 대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 친구들이 모두 미치지 않았다면 병들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로저, 그들은 환자처럼 보이지 않아요. 따라서 그들을 무슨 병든 사람들처럼 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미쳤다고 하는 데는 아마도 그들이 미친 사람들이라고 보일 증거나 오해를 받을 만한 짓을 하지 않을지라도 그럴 듯해요. 그 다음은요?" "그들은 아주 기분 나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오, 그렇자면 소화하기 힘들겠군요. 우리 친구들이 당신과 가족들의 사별(死別)의 상처를 건드려 기분 나쁘게 만든 결과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당신의 친구들은 그만 쫓겨날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그들을 쫓아 보낸 뒤 나의 가족들은 그들끼리 이 문제를 의논하고, 결국은 담당목사를 찾아갈 것입니다. 목사는 그들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은 뒤 그는 예전에도 그런 비슷한 얘기들을 들은 적이 있지만 전혀 신경쓰지 말고 잊어버리는 게 더 좋다고 충고할 것입니다. "바로 그거예요. 로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똑같은 결과로 끝난다는 얘기입니다. 이곳에 도착하는 수천 수억의 사람들, 다시 지상세계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들에게 우리가 거듭거듭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이 그 얘기입니다. 교단들이 안고 있는 근본된 문제점은 그들의 신학으로써는 영계의 실상을 수용할 능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물을 처리하는 방법이 틀렸다는 점을 깨닫지 못해요.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이 믿는 신학이 진리가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무엇을 막론하고 그들의 신학과 일치하지 않으면 도매금으로 쓸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들은 실체보다는 환상을 더 중시하며 교리, 신조, 계율만을 쫓고 있습니다. 사실주의자와는 아주 먼 거리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원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쉽게 있는 그대로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로저도 보았다시피 한때 지상세계에서 살았던 우리 세 사람이 여기에 있지요. 우리는 모두 죽음을 경험했고, 지금은 이렇게 영계에 와서 멀리 몇마일이나 뻗쳐 있는, 그야말로 산고수려한 전원 가운데 미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듯한 아름다운 나무 밑의 부드러운 이 잔디 위에 앉아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의심할 여지도 없는 영계의 실제요, 확실한 불변의 사실입니다. 그들이 소위 종교적인 뜻으로 논하는 영적인 경험이 아니에요. 우리들이 매일매일 겪는 지극히 평범한 삶의 실제 현상입니다. 우리 세 사람 모두가 다 여기에 와 있는 것은 우리들의 영적인 운명에 의한 것이요, 우리들의 정당한 권리일 뿐, 결코 우리가 지상세계에서 가졌던 믿음 때문도 아닙니다. 루스에게 물어 보세요. 그녀는 교회를 다니다 그만 두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기 우리와 함께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또 그녀가 원래 다녔던 교회로부터 형편없는 이방인으로 몰리기도 했답니다. 다른 교단에서는 그녀를 이단자, 또는 교파 분리자 등으로 부르면서 그녀가 죄가를 치룰 길 없어 그들이 생각하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나 자신의 경우만 해도 그래요. 나는 교회의 신부(神父)였지요. 신부라면 많이 알았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를 못했답니다. 로저, 그대는 아직 젊어요. 따라서 당신의 교회에서 중진교인은 아니었겠지요. 보세요, 우리들끼리니 말입니다만 엄격히 신학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당신 두 사람은 여기에 올 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이곳은 나처럼 성직자의 생활을 오래한 사람이나 올 수 있도록 예약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이 급(級)의 영계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신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나와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루스, 당신은 당신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지상세계에 살면서 교회와 인연을 끊어버렸지 않았습니까? 또 로저, 당신도 교회는 건성으로 다닌 것이구요. 그런고로 당신 두 사람을 놓고 누가 더 죄가 많은지 판결하기가 정말로 어렵군요. 두 사람 다 세상에서 선행이 아주 형편없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신들은 나와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이 못 되고, 또 나는 당신들과 하등의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엄격한 사실은 당신 둘이 다 여기에 와 있고, 나도 이렇게 이곳에 와서 함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입니까? 단 하나! 세상의 종교를 지도하는 그 신학(神學)이라는 것이 틀렸다 이겁니다. 이 말을 지상세계의 신학자 및 교회인들이 들었다면 모두들 발끈 하겠지만 신학이 실제에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좀더 얘기를 해봅시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약간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로저, 그대는 지상세계에 사는 동안 매일의 일과를 정말 경건한 마음으로 보냈나요?" "아닙니다. 몬시노르,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그런 생활만을 할 수는 없었겠지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누구나 즐겁고 행복한 생각을 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그의 일과와 행위 모두가 경건한 것이라고 할 수 만은 없지요. 더구나 그가 아름답고 행복한 생각을 추구했다고 성스러워지거나 전적으로 부당해지는 것만도 아니지요.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의 느낌은 어때요? 무언가 다른 게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게시판을 세워 다음과 같이 발표해야 하겠군요. '로저의 마음 속에는 전혀 변화가 없으며 그의 건강은 지금 완전할 정도로 양호하다. 그의 얼굴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는 지금 더할 수 없이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그 자신 최상의 기쁨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그는 기꺼이 그 자신 털끝 만큼도 경건하다거나 성스럽다고 느끼지 않고, 단지 있는 그대로의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알고 느끼게 된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고 지상세계의 모든 신학자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로저! 나의 이와 같은 발표문에 동의하겠어요?" "동의하고 말고요, 몬시노르, 내가 살던 지상세계를 전부 준다고 해도 지금의 나의 위치를 바꿔치기 않겠어요." "로저, 교환(Exchange)이요. 지상세계를 떠난 영혼은 바꿔치기라는 용어를 더이상 사용하지 않아요. 이곳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며 자연과 사물에 적합한 말들만을 사용하고 삽니다. 방언이나 상소리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지상세계 인간들도 바로 우리에 대한 기대가 그렇지 않습니까?"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점은, 이곳에서는 경건, 신성 또는 종교성을 느낄 만한 확실한 흔적을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여 서로 성서나 교훈적인 책에 관해서 묻고 응답하고 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상황에서나 자연스러운 행동 외에는 하지를 않아요.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전체적으로 어떤 종교단체나 아니면 종교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건전하고 지각있는 인격적인 세계입니다. 지상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곳이지요. 웃고 싶으면 웃고, 특히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디든지 가고 싶으면 가고, 그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지상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어떤 곳에 사로 잡혀 있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영계 여행 우리는 천천히 한가롭게 걷고 있었는데 로저가 나를 향해 돌아서면서 물었다. "어디를 가려면 걷는 방법 외에는 교통수단이 없습니까? 아무리 보아도 길이 없고, 또 이처럼 전원이 몇 마일씩 펼쳐져 있는데요." "몇 마일씩이 아니라 수백 마일도 넘게 펼쳐져 있지요." "이런 크기의 평원이 수천 개도 넘어요. 로저, 그대가 묻는 것은 어디에 교통수단이 있으며 또 무엇이 교통수단으로 쓰이느냐는 말이겠지요. 거기에 대해 말하지요. 이곳에서는 누구나 각자 자신의 교통수단을 지니고 다니는데, 그 교통수단이야말로 전우주에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것입니다. 물론, 걷는 방법 이외에 말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영계로 인도해 온 후 지금까지는 우리 모두 두 다리에 의지해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에게도 우리가 여기서 실제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야 할 때가 온 것이 분명합니다. 개인적인 이동(Personal Locomotion)은 생각매체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누구든지 한번 배우기만 하면 그렇게도 쉬울 수가 없어요. 일단 익혀만 놓으면 제2의 천성(天性)이 됩니다. 모순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일단 익숙해지기만 하면 생각매체(Thought Process)를 이용하여 이동하는 데는 거의 생각이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로저, 지상세계에서 처음으로 걷기를 배울 때가 기억나세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때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요. 그러나 누구에게나 어느땐가부터 넘어지지 않고 서서 움직일 수 있는 때가 있었지요. 그 순간부터 로저 당신도 수백, 수천 리를 걸었고 또 이렇게 영계에 와서까지 먼 거리를 걸었지요. 이런 사실에 대해 생각이라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지금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저쪽 방으로 가려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단순히 의자에서 일어나 걸어가면 되는 것인지, 어떻게, 어떤 근육이 당신의 다리를 조정하여 움직이게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딘가 그러한 생각이 있어 작용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의자에 앉은 채 움직이지를 못 할 테니까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도 당신은 걷는 것입니다. 걸어야만 하는 것, 일어서고 싶어하는 것, 그리고 방을 가로질러 저 방으로 가는 것, 이런 사실들은 무슨 명령계통의 생각을 필요로 할까요?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당신의 생각은 이 방을 가로질러 걷는 것이고 따라서 목적지는 건너방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각매체를 이용하여 당신 자신을 이동하는 데는 그것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생각을 해야 하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조금만 연습하고 나면, 생각하자마자 당신이 생각한 그 목적지에 당신이 이동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재미나는 얘기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것 같아요." "이런 사실을 놓고 의심많은 지상세계의 친구들은 놀리고 조롱하곤 합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최상의 만담거리 소재가 될 수도 있는 거지요. 배꼽을 잡고 웃을 수 있는 얘기겠지요. 그러나 그들도 성경을 꺼내놓고 보다 진지하게 읽어 보고 정신을 차려서 읽은 내용이 정말 무엇을 뜻하는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활방법 중 많은 것들이 육신을 쓰고 지상세계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들은 지상세계를 모든 것의ㅡ인간의 생명 그 자체까지도 포함시켜ㅡ표본으로 간주하고 그것보다 더 우수한 것, 그 밖의 다르 것들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하늘 나라는 완성된 곳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들은 진정 그 완성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정말 진지한 부탁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우리 영계와 우리의 생활방식보다 더 뛰어난 그 무엇을 보여 줄 수 있는 자신이 없는 한 우리를 비웃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삼가해 달라고 말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단 한 가지라도 그것이 법(法)이거나 현상이거나 어느 것이라도 좋으니 우리의 것보다 월등하고 나은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나요? 있다면 이곳에 있는 우리들 모두가 기꺼이 들어 보고 채택하여 활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 볼 것입니다. 물론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여기에 도착한 후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은 언제라도 자기들이 원하는 곳으로 떠나고,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변함없이 즐길 수 있으니까요. 자기들끼리 어딘가에 자리잡고 황량하고 음침한 공허 속에 자청해서 살게 되겠지요." 나의 두 동반자인 루스와 로저가 얼마나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재미있게 듣는지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미소를 보낸 루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로저, 몬시노르께서는 어떤 분야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어요. 그가 신부로 재직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을 강론을 통해 감동 감화시켰고 이곳에 온 후에도 그 방법은 다를망정 많은 영인들을 위해 그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어요. 사람들을 설득시켜 케케묵고 잘못된 그들의 믿음을 버리게 하고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잘 알고 계시면서도 그 괴로움을 자청해서 받고 계신 것입니다. 아마도 지상세계와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갖고 사시기 때문에 받은 벌인지도 모르지요. 나도 종종 몬시노르를 수행하여 지상계를 방문해 보곤 하지만 나는 그저 구경이나 하고 그곳 친구들을 만나서 인사나 하는 정도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해 나갔다. "생각은 의식세계의 형상이지만 정말로 실제지요. 지상세계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우리들 셋이 여기서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정도로 쉽게 우리에게까지 상달될 수 있답니다. 그들이 항상 우리가 보내는 생각을 감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의 생각도 물론 쉽게 지상세계에 전달될 수 있습니다." "아마 내가 영계에 와서 가끔 가졌던 느낌이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어떻게 말로 설명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딘지도 잘 모르는 어느 곳을 향해 내가 끌려가는 듯한, 자꾸만 어디를 향해 가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검증할 수 없는 애매한 얘기같습니다만, 그럴 때면 나는 특별히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면서도 안절부절을 못하고 곤혹스런 의식세계에 빠지곤 했습니다." 루스가 나의 말을 다시 거들고 나섰다. "오, 가엾은 로저! 그때의 현상을 쉽게 진단해 낼 수 있어요. 그런 현상은 대개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편편(片片)의 슬픈 생각들을 띄워 보낼 때 생깁니다. 당신이 그들을 뒤에 남겨 두고 떠났기 때문에 그들이 당신과의 이별을 생각하고 애석해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물론 그들의 슬픔이 깊은 것은 아니겠지만요. 만일 그들의 슬퍼함이 짙은 것이면 당신도 깊이 체휼하게 되고, 심하면 당신에게 고통을 심어 주기도 한답니다. 내가 보기에는 당신의 그런 느낌이 더이상 짙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만일 그런 경우가 생기면, 지체없이 우리에게 얘기해요. 로저, 우리가 도와서 그런 느낌을 쫓아버릴 테니까요. 그대가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 같은 것은 없지요?" "전혀 없어요. 루스, 감사합니다." "좋아요. 그렇게 한다면 로저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우리가 로저의 질문에서 약간 곁길을 걷고 있었군요. 루스, 우리가 여기 도착하자마자 천사들이 날개를 갖고 있다고 하는 등의 지상세계의 편협한 영인의 개념에 대해서 얘기했던 것이 기억나세요? 그것은 지상세계 인간들의 잘못된 견해 아닙니까, 로저? 단 한 가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먼 옛날 사람들 특히, 미술가들이 과연 천사들은 어떻게 여행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긍금해 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두 다리로 걸어다녔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고 저속한 생각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두 다리로 걷는다는 것을 제외시켜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지요. 그래서 미술가들에게 떠오른 것이 그 날개라는 기발한 아이디어였겠지요. 천사들도 움직여야지요. 그들이라고 해서 한 장소에 영원히 정착 해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바로 이러한 개념들이 어느 누군가가 천재적인 예술가를 자극시켜 나온 걸작품으로, 영계의 모든 사람들은 커다란 날개를 갖고 있다는 그럴 듯한 얘기였겠지요. 아마도 사탄(Satan)에게까지도 날개를 한 쌍 하사했을 것입니다. 사탄이야말로 소위 그들이 기도에서 자주 얘기하는 것처럼 전혀 부담없이 신속하게 어디든지 날아다니면서 영혼의 파멸을 획책하고 다녀야 하니까요. 당신의 어깨뼈 어딘가에 거창한 날개 둘을 달고 살아야 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것처럼 불편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겠군요. 천사들이 크게 때를 지어 날아다닐 땐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겠군요." 로저는 자신이 이야기해 놓고 겸연쩍게 웃어보였다. "로저, 천사들이 때를 지어 날아 다닌다고 얘기하는 것을 보니 신성한 표현을 안 쓰는군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을 묘사하는 데 적합한 어휘를 찾는 게 쉽지 않겠지요. 아마도 시적(詩的)으로 표현할 수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대가 천사들을 때(Flock)라고 표현한 것보다는 천사들의 집단(Concourse), 이말이 더 고상해요. 그들이 대기권의 균형을 방해할 것이라는 말은 대단히 실질적인 표현이며 옛날 예술가들로서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말일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어떻게 해서 천사에 대한 그런 어처구니 없는 개념이 굳어져 오늘 현재까지도 그렇게들 믿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그들은 그릇된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 영계 사람들ㅡ사실 그들은 아직도 우리를 온전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지만ㅡ은 두 날개를 달고 살고 있다고 보니까요. 설사 그것이 상징적인 차원에서의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너무나 궁색한 아이디어입니다. 개인적인 이동(Personal Locomotion)의 수단으로 날개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어서 그들의 말을 따르자면 우리가 괴물처럼 변신해야 할 것입니다. 영계의 경이와 신비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상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환상적인 날개를 갖고 있는 천사들을 믿는다는 것은 영계에서 행해지는 실제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오해들 중 한 가지일 뿐입니다. 그들이 어떤 식의 오해들을 하고 있는가를 알고 나면 지상세계 사람들이 우리들을 미완성 인간쯤으로 간주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다고 느껴질 정도이니까요. 우리가 고급 영계로 영전되면 괼수록 그들의 눈엔 실제인간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로 보이고 더더욱 근엄한 모습으로 비치는가 봅니다. 두 분께서는 땅에서 천사의 사진이나 조각을 본 적이 있는지요? 특히 공 동묘지 같은 곳에 예술가들이 조작해 놓은 미소짓는 얼굴을 보셨는지요? 미소 자체만으로는 하늘의 성스러움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어떻습니까? 미흡한 표현 같지 않아요? 로저, 현실이 그대로 실제일 뿐 그 어느 누군가의 손끝으로 조작된 예술품 속의 현실이 아닌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기쁜 일이 아닙니까?" "몬시노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 점에 대해 크게 아멘!"하고 루스가 동감을 나타냈다. "로저, 나의 논리가 틀렸다면 우리는 모두 집의 문들을 더 크고 넓게 고쳐야만 하겠군요. 그 큰 날개를 달고 드나들려면 지금의 문 크기로는 어림도 없을 테니까요. 진실은 거짓보다 위대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로저, 생각매체를 이요하여 우리가 이동을 한다는 그 진실 자체가 가장 훌륭하고 또 간편한 방법입니다. 로저도 한번 시도해 보겠어요?" "무엇을 어떻게 하는데요?" "약간의 생각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누구든지 한 번씩은 겪는 과정이니까요. 루스와 나도 처음으로 이것을 시도했을 때 다소 긴장하기도 했지만 그 결괄르 보고 기뻐했었지요. 당신도 아마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때 우리는 잔디밭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로저에게 건너편 4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나무 밑에까지 이동해 보고 싶은 욕망을 가져 보라고 제의하며 부추겼다. "무슨 대단한 의지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단순히 확실한 생각을 품어 보세요. 저기 있는 저 나무 밑까지 이동해 보고 싶다고, 아니면 어디든지 그대가 가 보고 싶은 곳을 생각하세요. 내가 저 나무를 제외한 이유는 그리 먼 곳이 아니고 또 그대가 그곳까지 이동되고 나면 쉽게 여기있는 우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아요? 루스와 나도 똑같은 생각을 당신과 함께 할게요. 자, 생각하고 이동해 보세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는 우리가 예상한 대로 곁에서 사라졌는가 했더니 바로 그 나무 아래 서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도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곧장 그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루스가 물었다. "그래, 생각과 동시에 순간 이동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느낌이 어때요?"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기에 생각해 볼만한 무엇이 없었던 것 같아요. 금방 저쪽에 있었는가 했는데 여기 와 있었어요. 어쨌든 놀라운 일입니다. 실수할 수가 없겠어요. 정말 영인들의 독존력을 심어주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지상세계에서도 이렇게 자율적 이동을 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만약에 그랬더라면 나의 어머니께서는 기절초풍 하셨을 거예요." "이런 현상이 지상세계에서도 가능할 수도 있고 불가능하기도 하지요. 가능하다면 그들의 생활에 혁명이 오겠지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것이 영계가 생긴 이래 줄곧 생활의 한 방편으로 실습되어 온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요." 로저가 말했다. "내 자신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것이 가능한지요? 즉 내가 루스나 당신과 연락이 안 된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되죠?" 내가 대답했다. "로저의 말은, 만일 루스가 그대를 어딘가 이곳에서 먼 곳까지 데리고 갔다가 그대만 혼자 놔두고 우리가 종적을 감추어 버릴 경우를 뜻하는 건가요?" "예, 그런 경우도 해당됩니다." "로저, 그런 경우가 있다면 당신 자신의 의지력이 쉽게 문제를 해결해 줄 겁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기 쉬운 말로, 우리는 절대로 당신을 어느 집 문 밖에다 놔 두고 누군가가 데려가기를 기다리는 식의 망상은 하지 않아요. 만일 당신이 찾아가야 할 집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 세 사람 사이에는 연결선이 있어요. 따라서 정말로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런 최악의 경우가 온다 할지라도 당신이 마음을 모아 루스나 나를 깊이 생각하면 즉시 우리가 보내는 응답을 보고 느낄 수 있게 된느 것이지요. 어떤 곳에 버려져 있더라도 우리가 있는 곳으로 즉각 올 수 있게 되지요. 그러나 당신을 오지 못하게 하여 그곳에서 기다리게 해놓고 우리가 다른 누구를 보내어 함께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하겠어요. 로저, 아직 그대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루스와 나는 이곳 영계에서도 아주 기분 나쁜 지역ㅡ지상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지옥 같은 곳ㅡ까지 내려갈 때가 있어요. 그래서 만일 우리가 그런 지역에 내려가 있을 때 당신이 협조를 구하면 당신을 그런 저급한 곳으로 오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루스와 내가 어느 곳에 가 있을지라도 우리 셋은 언제나 마음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요. 물론 우리집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어떻게 생겼고, 주위에는 무엇들이 있고……. 따라서 사실상 우리가 방금 가정해서 얘기한 상황은 발생할 수가 없어요. 만일 당신이 정말 우리집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래이디언트 윙의 집과 그의 친절한 가족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여기서 본 것을 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정신 이상이 되어 기억이 없어졌을 때가 생겼다고 해도 그가 돌봐 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하고 넘어갈 점은, 아마 우리가 그 점에 대해 집에서 설명은 안 했습니다만 여기서는 기억력 상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만하면 당신이 추측해 본 그 문제점은 완전히 해결된 셈이지요. 우리집과 집안 물건들에 대해 혹시 기억을 못 하는 건 아니지요?" "천만에요, 모든 것을 정말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기억은 영원히 간직될 겁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기억력 자체에 절대로 이상현상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 누구든지 그런 식의 갖가지 어려움과 혼란을 상상해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전혀 사실과는 상관없는 추측들이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방향감각을 잊어버린다는 가정, 무엇인가를 생각해 낼 수 없다는 추측, 이런 것들은 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로저, 잠시 전에 교통수단에 대해 얘기를 꺼냈는데 지상계에서처럼 기차, 비행기, 자동차 등의 일반적인 교통수단을 생각하시고 꺼낸 얘기인 것이 틀림없겠지요. 그러나 당신도 지금 목격하다시피 이곳에서는 사람들을 수송하기 위한 그런 종류의 교통수단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네, 그렇지만 만일 이사를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그 모든 물건들을 수송하겠어요?" "전혀 어려울 것이 없지요. 로저, 여기 사는 우리들은 거인은 아니지만 힘(Power)이 있습니다. 언제라도 쓰고 싶다 생각하면 쓸 수 있는 힘이지요. 우리 둘이서 우리 집에 있는 모든 가구들을 아주 힘 안 들이고 쉽게 옮길 수 있음은 물론, 작업이 끝난 후에도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아요. 지상세계에서 같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전혀 소동을 피우거나 집기의 파손도 없이 우리는 열두 번도 더 그 물건들을 옮겨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곳에서 어딘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싶으면 이사를 합니다. 우리라고 해서 어떤 일정한 장소에서만 살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사를 하는 데는 전혀 절차 같은 것을 거치지 않아요. 그러나 사실 한번 어딘가에 살겠다고 결심을 하고 자리를 잡으면 우리는 대체로 그곳에 살다가 때가 되어 소속된 급(Realm)을 떠나게 될 때에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각이 무디어지거나 또는 주위 환경에 대해 갈증을 느끼게 되지는 않아요. 우리들의 거주지역을 개선하거나 변화를 느끼게 하기 위한 크고 작은 환경미화 작업이 언제나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지금 우리집도 내가 처음에 입주했을 때에 비하면 많이 변했습니다. 여러가지 일들을 하다보니 일을 위해서도 더 큰 집이 필요하게 되어 별관을 한 채 지어서 늘린 것입니다. 우리가 그대에게 보여준 꽤 큰 아파트가 그것인데, 그 방은 벽에 수놓은 융단들이 걸려 있는 것이며, 긴 식탁 주위에 의자들이 놓여 있는 것 등은 옛날 지상세계의 대 영주의 거실 같은 풍을 띠고 있지요. 이것이 하나의 변화된 예가 되겠습니다. 정원들은 때에 따라 변화하고 미화되어 있습니다. 원예와 조경을 담당한 예술가들로서는 그와 같은 정원미화가 그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는 일이지요. 따라서 가재도구를 옮기는 일은 전혀 문지가 되지 않습니다. 화물을 나르는 트럭이나 짐차가 필요가 없어요. 단 혼자서도 약간의 노력으로 산처럼 큰 가구를 옮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서는 모든 물건들도 다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까도 말했듯이 자력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자, 로저, 이제는 도시를 한번 직접 구경해 보고 싶지 않으세요? 우리 집에서 멀리 바라다 보기만 했지 않아요. 자, 다라 오세요. 걷겠어요, 아니면 순간적인 개인 이동의 방법을 택하겠어요? 좋아요, 이번에 걷지 말고 개인이동으로 합시다." 영계의 도시풍경 우리 셋은 각기 개인 이동의 방법을 통해 도시 여행을 시작했다.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던 로저가 말을 했다. "급히 서두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야 바쁜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게 보이지요." "오,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요." "그렇 테지요, 로저." "만일 누구든지 급히 서둘러서 어디에 가야 할 필요가 있다면 생각하자마자 그가 원하는 곳에 가 있게 될 터인지라 서두르지 않을 수밖에요." 우리가 도시의 풍경을 둘러보면서 도착한 곳은 로저에게 한눈에 그 도시의 전경을 상세히 소개해 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평지보다 약간 높은 둔턱이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그는 장엄하게 서 있는 빌딩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빌딩들은 모두 아름다운 연못과 정원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큰 중앙 건물로부터 마치 수레바퀴 살처럼 빛줄기를 받고 있었다. 도시에 길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었고 대신 양질의 잔디로 덮힌 넓은 통행로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또 그 중앙 건물의 둥근지붕 위에 휘황찬란한 빛줄기가 내려 비치는 것을 목격하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로저, 저 둥근지붕을 가진 빌딩은 우리가 좀더 공식적인 모임을 갖고 보다 높은 급의 영계에서 내려오는 위대한 분들을 만나는 장소이지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사원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적당한 이름이 없으면 그렇게 불러도 되겠지요. 그렇다고 지상세계에서 부르는 예배당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예배를 보는 것은 아니니까요. 우리는 보통 그 방문자들보다 약간 일찍 그곳에 도착하여 편안히 자리에 앉아 기다리게 되고, 관례대로 그 위대한 분들은 우리를 위해 잠깐 얘기를 해주고 떠나면 잠시 후 그들의 뒤를 따라 우리도 그 빌딩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과의 만남이 짧기는 해도 상호간 필요한 모든 일들을 완수하게 됩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형식적인 의식절차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지요. 그대가 본 바와 같이 그 둥근지붕 위에 비치는 밝은 빛줄기는 영원히 그렇게 비치게 됩니다." "이처럼 밝은 낮에도 똑똑히 보이는 것을 보면 그 빛줄기야말로 엄청나게 강하고 밝은 것이겠군요?" "강하고 밝은 빛줄기인 것만은 틀림이 없지요. 그러나 그 빛줄기가 어디서부터 내려오는 빛인가를 알고 나면 이해가 갈 겁니다. 로저, 그 빛줄기야말로 만우주의 가장 위대한 원천이신 창조주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하고 밝은데도 눈이 부셔 바라볼 수 없거나 하지는 않지요?" "로저, 우리가 맨 처음 도시에 대해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지요?" 루스가 로저에게 물었다. 그녀는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약간 싱거운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당신도 무엇인가 뚜렷하게 기대하고서 도시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요?"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왔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지상세계의 어떤 도시와 같으리라고 생각해 왔을지도 모르지요." "신비한 것은, 지상계가 생활방식을 대폭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이곳 도시는 지상세계의 도시에 비해 훨씬 간편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저, 생각해 보세요. 지상세계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많은 물건이나 차량들이 이곳에서는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잠깐이면 지상세계와 비교해 이곳 영계에서 필요없는 물건들의 목록이 잡화상의 물건 목록 만큼이나 길게 작성될 것입니다. 집안 살림에 필요한 물건들부터 살펴보세요. 예를 들어 이곳에서는 음식이 필요없어요. 따라서 무엇이든 먹고 마시는 것에 관계 된 그 거창한 산업들이 자동적으로 필요없게 되고, 음식을 담는 그릇들과 부엌 세간들을 제조하는 산업도 제외됨은 물론 요리 자체도 필요없고, 음식을 날라다 주고 시중드는 서비스 분야까지도 전혀 필요조건에서 제외되고 맙니다. 우리들의의복은 자연법칙의 식용에 의해 공급이 됩니다. 따라서 의복 제조하는 산업도 필요가 없게 되지요. 교통수단도 당신이 지금 본 것과 같지요. 전혀 차량이 필요없어요." "차량들과 포장된 도로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만큼 눈에 띄는군요." "로저, 분명하게 보았어요. 모든 종류의 상거래(商去來)나 직업을 특히, 이곳 영계에서 소용이 없는 것들을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 장의사(葬儀社) 직업 같은 것 말입니다." 루스가 웃으면서 거들고 나섰다. "그리고 정치인들도요." 루스가 덧붙였다. "신부들과 목사들, 그리고 주교들도 빠지면 안 되죠." "너무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안 되겠군요. 장의사들도 이곳에서는 즐거운 직종이고 정치인들도 훨씬 더 유용하게 쓰이고 있지요." 루스가 설명했다. "로저, 당신이 보다시피 여기서는 가게나 상점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종류를 막론하고 상거래가 전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만일 무엇인가를 원할 때는 어떻게 하나요?"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창조본연의 법칙에 의해서 자동공급이 됩니다. "로저, 지금 무엇이 갖고 싶은가요." "저ㅡ."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당장 무엇이라고 꼭집어 말하기가 어렵군요."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는 오히려 우리들보다 더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크게 웃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그렇지 않아요. 로저? 그대는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니 말이에요. 지금 그대가 입고 있는 옷들은 여기에 오면서 입고 온 옷들이지요? 그러나 언제든지 영계 의복으로 갈아 입고 싶으면 즉각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지금 그 복장을 보면 누구나 그대가 이제 갓 도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만일 이곳에 정착한 주민으로 보이고 싶으면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버리고 새것으로 갈아 입어야 해요. 그렇게 보면 적어도 그대가 원하는 것은 영계의 의복이겠군요." "아니, 가게나 양복점도 없는데 어떻게 의복을 구합니까?" "로저, 그렇다면 한번 벗어 봐요." "어떻게 이루어 진느지 말해 줄 수가 없어서 안 됐군요. 로저, 자신을 한 번 바라 봐요. 그대의 눈 앞에 있는 것이니 좀더 가까이 잘 들여다봐요." 그는 일러준 대로 그가 입고 있는 옷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입고 있었던 지상세계의 옛 복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밝고 헐렁하며 움직이기 편하면서도 주위와 완전하게 구색을 맞춘 영계 의복이 입혀져 있었던 것이다. 루스와 나도 영계 의복으로 즉시 갈아 입었다. 로저로서는 우리가 영계 의복을 입은 모습을 처음으로 보는 셈이었다. "자, 로저, 이제는 알겠지요. 만일 우리가 그대를 데리러 그대의 침실에 내려갔을 때 옛날 우리가 입던 지상세계의 복장을 하고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대의 눈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것인가를, 아마 그대는 놀라서 겁을 잔뜩 집어 먹었을지도 몰라요."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는 그의 옷의 접힌 곳을 들어올려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확인했다. 그리고는 곧, 그 옷들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로저, 이 옷이 만들어지는 데는 어떤 그 누구의 손길도 거치지 않은 것이 확실해요. 그러나 루스와 내가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어떤 창조적 자연현상이 발생하고 작용하여 이 옷들을 만들어 내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일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우리로서는 그때그때에 따라 알게 되는 대로 소화하고 있어요. 그대가 지상세계에서 살았을 때를 한 번 생각해 봐요. 그대의 생활 속에서 접하게 되는 모든 생물들에 대해 어떻게 해서 접하게 되었고, 그것들이 만들어졌는가를……. 수천 수백 가지가 넘는 생존의 이유를 놓고 분석해 본 적이 있어요? 모르면 몰라도 그렇게 해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루스와 나도 마찬가지구요. 우리들 생활자체의 일부가 된 많은 사물의 존재문제를 놓고 세심한 조사를 해보아야 할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더 알려고 하면 할수록 미심쩍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입는 의복도 그처럼 자연적으로 생산되는 종류들 중의 하나인 셈이지요. 약간 오른쪽에 있는 저 큰 빌딩이 보입니까? 저것은 직물의 전당이라고 불립니다. 저곳에는 수천 가지의 최고로 아름답고 훌륭한 직물과 천들이 있지요. 그 중 어떤 것들은 지상세계에서 수백년간 사용되었던 각양각색의 직물들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도안이나 짜임새가 모두 독특하게 만들어져 영계에서만 쓰이는 것들입니다. 우리 집 벽에 걸려 있는 수놓은 융단들을 기억하겠지요? 여기 있는 루스가 혼자서 저 직물의 전당에서 만든 것들입니다. 우리가 처음 저 직물의 전당을 방문했을 때, 루스는 그곳에서 행복한 모습으로 융단을 짜고 있는 많은 영인들을 만났고 그녀도 당장 해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대가 우리 집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겠지만 루스는 이제 그 방면에 전문가가 되었어요." "융단에 수를 놓는 일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루스가 대답했다. "로저, 당신도 원한다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분야의 일이든 전문가의 수준에 도달하려면 먼저 당신의 마음 속에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곳 영계에서 실행되고 있는 중요한 작용의 하나입니다." "로저, 그러나 저 직물의 전당이 우리들의 영계 의복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이곳의 수많은 전당들이 모두 지식들로 꽉 차 있다니 내가 얼마나 무식한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로저,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20여 권 되는 대백과사전 앞에서 느끼는 감정과 대동소이한 것이 아니겠어요? 말하자면 우리는 그처럼 엄청난 지식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만, 루스와 나도 처음으로 이 모든 지식의 경이(驚異)를 소개받았을 깨는 로저처럼 느꼈었지요. 우리 모두가 다같은 배를 타고 있어요. 로저, 따라서 우리 모두 적당히 무지해 봅시다!" "여기 사람들은 적어도 그런 점에 관해서는 속상해 하거나 자존심 상하지 않는 게 확실하군요." 내가 다시 설명해 주었다. "이 지식의 전당들은 대부분 지상세계에서 말하는 예술 분야를 위해서 있지요. 즉 미술, 음악, 문학 등 말입니다. 굉장히 열심히들 하고 있어요. 물론 다른 전당들도 많이 있고요. 지상세계에서는 예술이 생활의 필요에서 있기보다는 부수적인 차원에서 간주되지요. 정말 그렇게 된다면 지상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단조로운 곳이 되겠지만, 예술을 없애 버릴 수도 있는 곳이 지상세계지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예술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고 크게 장려되고 있습니다. 보세요. 우리가 방금 세어 보려고 했던 불필요한 직종들이 없게 되니 거기에 상대해서 다른 분야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많아지고 훨씬 더 즐거운 마음으로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술의 전당들이긴 하지만 당신이 이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이 한가지 있지요. 그것은 바로 괴상한 음악과 염세적인 미술로서 그것들이 가끔 지상세계에서는 위대한 걸작품인 것처럼 가장을 하고 나타나지만 여기에서는 쫓겨난 것이 아니고 애초에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을 수조차 없다는 것이에요. 앞으로도 전혀 이곳에서는 그와 같은 예술은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협잡이 통하지 않는 세계가 바로 이곳입니다. '영계에 들어오는 자들이여, 가식(假飾)을 버려라!'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어요." "몬시노르, 저 지식의 전당들에 입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해요.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면 되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곳에서는 굉장히 친절하게 맞아 줄 것이며, 무엇이건 당신이 해보고 싶었던 것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루스도 그녀의 융단가공 일을 그렇게 시작했지요. 그녀도 무조건 정문으로 걸어 들어가서 융단을 짜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고 얘기하고 바로 배우기 시작했지요. 전혀 형식적인 절차 같은 것은 거치지 않았으니까요." 루스가 거기에 대해 한 마디 했다. "내 일생에 그렇게 기쁜 날이 없었을 정도였지요. 그들은 매력적이고 참을성 있으며 친절해요. 특별히 나처럼 초보자로서 일에 전혀 서투른 사람에게는 최대한의 지도를 베풀어 줍니다. 그런가하면 몬시노르는 원하는 책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중앙도서관에서 보내지요. 그곳이야말로 한번 맛을 들여 놓으면 발을 빼기가 어렵지요. 지상세계를 막론하고 세상 어느 곳 어느 분야의 책이든 다 비치되어 있습니다. 수백만 권도 넘을 정도이지요. 로저, 그림이나 사진 등으로 잘 꾸며진 백과사전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해본 적이 있습니까?" "있었지요. 그러나 대개의 경우 시간이 많이 낭비되는 따분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따분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겠군요. 만일 후에 몬시노르가 어딘가로 가버려서 찾을 길이 없어지면 저 도서관을 아마 가장 먼저 뒤져봐야 할 겁니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저 빌딩들을 구경해 봅시다." 내가 제의했다. "우리가 마음대로 그냥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로저, 허가라는 게 필요없고 문을 열고 닫는 시간도 없이 온 종일 열려 있어요. 여기는 밤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이 전혀 없지요." "그렇다면 언제나 같은 사람들이 일을 보게 됩니까?" "오,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건 '영원한 안식'이 아니라 영원한 일이 될 테니까요. 엄격히 말한다면 우리들이 하는 일은 영원성을 갖고 있지요. 그러나 한 가지 일을 놓고 같은 사람이 교대도 없이 얽매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밤과 낮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일을 놓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끼리 조직이 잘 되어 있어 쉴 때와 일할 때, 그리고 교대할 때 등이 모두에게 다 만족하도록 짜여 있습니다." 로저는 빌딩들이 지상세계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 그렇게 높은 것들은 아니라고 피력했다. "여기서는 2층 집 정도의 높이면 충분하지요. 공간이 좁거나 장소의 제약을 받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으니까요. 왜 높이 지을 필요가 있겠어요? 공간은 무한히 원하는 대로 확장할 수가 있어요. 그 결과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들인지 한번 보세요." 로저는 빌딩들과 더불어 뒹굴고 싶을 정도의 고운 잔디로 덮인 넓은 통행로들, 수없이 널려 있는 꽃밭들, 나무들, 그리고 이처럼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크고 넓은 건물들의 배치를 더욱 정교하게 꾸며주고 있는 수정처럼 맑은 연못들의 아름다움에 경이를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로저, 이런 내용을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지상세계의 사람들이 그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영계의 아름다움을 놓고 오히려 조소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이처럼 눈부신 아름다움에 비하면 지상세계는 아주 형편없고 보잘 것 없는 곳에 지나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대부분의 지상세계 인간들은 자기들끼리 판단하고 평가하고 감정하여 지상세계야말로 진정한 미(美)의 세계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상의 그 더럽고 매연에 뒤덮인 도시나 마을들은 아름다운 곳이고, 영계의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도시들은 소위 그들의 눈에는 조롱의 대상이 아니면 경멸해도 되는 정도의 보잘 것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루스와 나는 번갈아가면서 즐비하게 서 있는 건물들의 용도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고, 마침내 로저는 그들 중 공학관에 들어가서 좀더 깊이 관찰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 공학관은 화학제품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우리가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그 공학관에서 수천 수만 가지의 귾임없는 연구와 작업을 책임 맡고 있는 분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가 물었다. "몬시노르, 루스, 어쩐 일들이십니까?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 정말 반갑습니다.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로저를 소개하고, 도시를 여행하던 중 로저가 이 과학관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해 동행했다고 설명했다. "잘 오셨습니다. 젊은 친구, 정말 잘 찾아오셨어요." 우리는 그의 반가운 인사에 미소를 보냈다. 사실 그 많은 건물들 중 어디를 들려도 이처럼 적당히 위신을 지키면서도 반가이 맞아주는, 거의 전통과 비슷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또 그 많은 학술관들 중에서도 이 공학관이야말로 공학과 화학분야를 취급하면서 지상세계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곳은 없다. 왜냐하면 지상세계에서의 그 수많은 공업분야와 화학분야의 신발명(新發明)들이 바로 이 공학관의 힘을 입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물질들은 대부분 영계에서 먼저 발명이 되어 지상세계로 전수된 후 전인류를 위해 공헌하게 되는 것이다. 즐비하게 늘어선 방들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는 많은 화학자들과 그들을 돕는 조수들이 머지않아 그 목적에 맞도록 새로운 물질을 생산하게 될 실험들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물질원소로 합성작용을 통해 지상세계의 물질들을 그대로 복사해 내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 그런 물질들은 전적으로 영계에서 필요로 하는 물질들을 발명하는 경우에는 하등의 쓸모가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계의 과학자들은 영계교육의 방법으로 지상세계와 보조를 맞추면서 함께 일을 해야 되는 것이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영계로부터의 간단한 힌트가 지상세계 과학자들로 하여금 10여 가지 이상의 발견이나 발명으로까지 연결시켜 주는 예가 허다하다고 했다. 이곳 과학자들이 심혈을 쏟아 집중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근본적인 발견이나 발명이고, 일단 그들이 연결해 주면 그 뒤는 지상세계의 과학자들이 완결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또 집들이나 큰 빌딩들을 짓는 데 쓰이는 새로운 건축재를 볼 수 있었다. 새로운 신소재의 합성체가 연구되고 있었는데, 그 물질은 어떤 종류의ㅡ가볍고 무거운 것에 관계없이ㅡ직물도 짜낼 수 있는 것으로써 머지않아 우리들의 옷이나 커텐 같은 것을 만드는 재료로도 쓰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기계학의 분야에서는 옛날에 발견된 원리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응용하면서 보다 좋고 안전하며 편리한 방법으로 수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우리가 본 그 많은 발명품들은 작게는 가정에서 쓰는 간단한 용구로부터 크게는 산업계에서 쓰는 커다란 기계들까지였다. 현재의 지상세계의 생활이 너무 복잡해집으로 인해 사람들은 물질의 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영적인 면은 망각한 채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종국에는 지상세게의 생활도 더 간편하게 바뀌어야겠고,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더욱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어야 될 것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이곳 영계에서 지상세계에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상세계가 먼저 수용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지구상에서 전쟁을 없애야겠고 평화의 목적을 위해 전달받은 새로운 발명품들을 악을 위해 도용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겠다는 말이다. 악용하면 재난에 빠지고 선용하면 행복이 기약되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선택은 지상세계에서 사는 인간 자신들이 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영계에도 교회는 있다 우리는 그 도시를 떠나 숲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로저가 멀리 보이는 건물 하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 저 건물은 교회당과 정말 흡사하군요." "그래요, 교회입니다. 그러나 지상세계의 교회와는 다르지요." 루스가 대답했다. 내가 물었다. "한 번 들어가서 보고 싶어요?" 로저는 꼭 한번 보고 싶다고 대답을 했고, 우리는 그 교회당이 있는 곳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찾아간 그 교회는 지상세계의 시골교회와 똑같아 보였으나 연혁만은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교회 건물은 오색이 창연했으나 지상세계의 오래된 건물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낡은 모습이나 부분적인 파손 등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이제는 로저에게도 왜 이곳에서는 지상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자연발생적인 건물의 파손이나 낡음을 볼 수 없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곳 영계에서는 어떤 상황에서건 건물의 훼손이란 있을 수가 없다. 처음 그 건물이 세워졌을 대나 지금이나 그 모습에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 교회만 해도 지상세계의 시간으로 볼 때, 세운 지 수백년이 넘었지만 이제 각지은 건물처럼 보였다. 그 교회도 영계 자연법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교회 건물의 부수적인 여건에 대해 충분한 암시가 숨어있는 것을 로저가 간과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가 그 교회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나는 로저에게 무언가 약간 생소한 것을 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로저는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있어 금방 그 질문의 핵심을 파악하고서 대답했다. "그렇군요. 교회의 외모는 지상세계의 것들과 비슷한데 주위환경이 이색적이어서 전체적으로 볼 때 많이 달라 보입니다." "잘 보았어요, 로저." "당신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아직도 지상세계에 대한 기억이 생생해요. 따라서 당신의 비교능력이 훨씬 더 정확하지요.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교회는 지상세계에서도 노력만 하면 지을 수 있도록 새워 놓은 표본적인 교회입니다. 이 건물은 여기에 쓰인 자재까지 포함시켜 한정된 공간에서도 어떻게 교회를 세울 수 있는가를 정확히 보여 주고 있어요. 보시다시피 건물 주위가 넓고 여유있게 보입니다만 사실은 지상세계의 현실을 충분히 참작하여 협소한 공간을 이용하여 교회를 세워야 하는 입장을 반영시켜 일부러 축소하여 지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건물에 가까이 가보니 지상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웃집과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나지막한 벽돌담장이 교회터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담장은 단조롭고 평범한 듯했지만 잘 정돈 되고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대문을 지나 넓은 보도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그 보도는 아스팔트 포장도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여러가지 물질을 혼합하여 만들었는데, 그것은 지상세계의 것을 그대로 복사하기 위한 목적에서였고 또, 실용적인 견지에서도 그 도로를 잔디로 덮어 놓으면 금방 닳아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영계에서는 꽃이 사시사철 한결같이 만발하므로 이곳에는 부득이 여름철의 풍경과 겨울철의 풍경을 절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회건물 주위는 많은 사철나무와 관목들로 조경되어 있었다. 화단 뜰에도 계절을 대표하는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어 원예가들의 시대착오적인 판단을 피할 수 있도록 짜여 있었다. 화단 중에는 꽃이 전혀 없는 빈 터로 보존되어 있는 곳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지상의 혹심한 겨울 추위에 옥외에서 필 수 있는 꽃이 거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교회 터를 따라 한쪽애는 조그만 개울이 있었는데, 그 개울은 똑바로 흐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설계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울의 수원(水源)은 조그만 폭포로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개울 양쪽 둑은 꽃들로 아름답게 덮여 있었다. 여기에 연못도 보였고 모두 다 좋은 수못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따라서 누구나 지상세계에도 그와 같은 정도의 조경을 갖추고 무한한 미를 살리는 교회를 세울 수 있겠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계획이 있고 또 그 계획들이 이곳에서 달성되는 이상 지상세계에서도 그 볼품없고 불필요한 묘사들ㅡ교회 주위에 흔히들 만들어 놓은ㅡ이나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두어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교회 부지들을 개발하고 미화하여 영계의 것에 필적할 만한 아름다움을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로저는 지상세계에서 그처럼 중요시하고 있는 묘지와 교회 게시판조차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로저, 루스가 이곳 교회는 지상세계의 것들과 다르다고 한 얘기가 기억나지요? 외모만이 아니라 교회 내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 교회는 지상세계의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약간 변형을 해서라도 쓸 수 있도록 전형적인 표본으로 지어놓은 이름과 건물뿐의 교회입니다. 지상세계 사람들에게 보고 참작하라고 제공하는 분야는 교회 외모와 주위환경 뿐이지요. 왜냐하면 이곳은 지상세계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무슨 예배를 보거나 한느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곳에서는 예배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갖는 집회는 지상세계의 교회들이 연중무휴로 드리는 예배보다 훨씬 더 값진 것입니다. 생각의 힘을 빌리지 말고 걸어 들어가서 보시지 않겠어요?" 들어가 보니 안은 텅비어 있었다. 교구교회 모양을 본딴 상당히 큰 건물이었으나 엄격히 말해서 교회가 아니어서 교회당에서 흔히들 볼 수 있는 눈에 띠는 장식물들도 없었다. 예를 들어 세례반과 설교단조차 보이지 않았다. 특히 로저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성찬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성소(聖所)는 설치되어 있어서 어디서나 볼 수 있듯이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가장 위의 계단에는 넓은 공간이 있어 성스러운 의자들이 몇 개 놓여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가운데 놓인 의자는 다른 의자들보다 한층 더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의자들 위로는 아주 정교하게 천연색 유리로 장식된 뾰족한 창문이 하나 있었고, 그 창문 유리들은 눈에 익은 종교적인 그림들 대신 벽에 거는 융단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호감이 가는 전원풍경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의자들 바로 뒤에 있는 벽에는 모자이크(Mosaic)로 된 두 줄의 문구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로저가 그 문구들에 관심을 보이면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저 두 줄기 빛이 벽에 새겨진 문구들에 내려 비치고 있습니까?" "빛줄기가 위에서 내려 비치는 것이 아니에요. 로저, 사실은 그 빛이 저곳으로부터 비춰 올라가 밖으로 뻗쳐 나가는 것입니다." 로저는 라틴어로 된 그 문구들을 소리내어 읽었다. 'Glora in excelsis Deo, et in terra pax hominibus bonae Voluntatis.' "로저! 미안한 얘기지만 당신의 라틴어 발음은 많이 고쳐야 되겠군요." "배우기를 그렇게 배웠는걸요." 그는 웃었다. "물론 그렇겠지요. 나의 사랑하는 친구,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지상세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관습적인 예배 의식의 좋은 본보기이기도 해요. 가능한한 자극적인 것을 택하는 것이 그들의 상투적인 방법이지요." "아무려면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몬시노르! 그처럼 형펀없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별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그 문구들의 뜻을 알고 있겠지요? 만일 모르고 있다면 그들이 제멋대로 번역을 한 탓이지요. "천상의 신께 영광이 함께 하시고, 지상의 선한 자들에게는 평화가 충만하소서! (Glory to God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to Men of good will) 끝부분을 주의 깊게 들어봐요. 로저, 지상세계에서 당신이 배웠던 것과는 다르지요. 이 번역이 훨씬 더 잘된 것입니다. 더 깊고 넓은 뜻을 표현해 주고 있으니까요. 나의 사랑하는 젊은 친구, 지상세계 사람들이 먼저 선한 사람이 되기 전에는 평화가 그들과 함께 할 수가 없어요. 만일 그곳에 우주적인 선이 있다면 우주적인 평화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지 못하겠으면 한번 실험해 보게 하세요. 당신이 보고 있는 저 빛줄기는 아마 상하 양면으로 흐른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위로 비추어 올라가고 있어요. 처음부터 시작이 그렇게 되었었지요. 이 교회 건물과 정원들은 본래 이 근처에 살고 있던 분이, 종종 고급영계(高級靈界)에서 내려와 우리들 생활 전반에 걸친 지도를 해주고 가르쳐 주고 하시는 선생닙들을 모시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보통 같으면 제단이 있어야 할 저곳에 의자들이 놓여 있고 그 중앙 의자에는 연사로 오시는 분이, 그리고 주위의 의자들에는 수행원이 앉게 됩니다. 한번 죽 둘러보시고 무엇들이 있나 살펴보세요. 아니, 무엇들이 빠졌는지 보세요." 로저가 돌아본 후 몇가지를 지적하고 나섰다. "벽에 새겨져 있어야 할 연대기도 볼 수 없고, 종교적인 성화도 없고, 성가대도 없으며, 성초와 그 외 다른 장식품들도 없군요. 요컨대 속이 빈 교회당 건물인데 딱딱한 의자들 대신 푹신한 안락의자들이 놓여 있는 것이 이색적이군요." 좌우 측면의 창들도 천연색 유리들로 치장이 되어 있었는데 양쪽에서 비추어 들어오는 빛살이 함께 교차하면서 창조해 내는 무지개 빛 색상의 아름다움은 정교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저기 보이는 저 두 줄기의 원문은 이 건물을 세우신 분이 뜻에 감사하는 의미로 새겨 놓은 것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고급영계의 분들도 전쟁에 대한 크나큰 우려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침내 그분들은 저 귀절을 인용하여 벽에 새기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방문했을 때 앉는 바로 위쪽 뒷벽에 새겨 놓고 누구든지 이 건물에 틀어서자마자 눈에 띄게 배려한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그들은 모자이크 방식을 이용하여 아주 정교하게 글씨를 새겼고 밝은 색들을 사용, 생각의 힘을 통해 그 귀절을 영원한 기도로 책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보시다시피 빛줄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영원히 약해지거나 희미해 지지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 빛줄기는 항상 밝게 빛날 것입니다. 광대한 생각의 바다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한 방울의 물방울처럼 그 자체로서는 힘이 있습니다만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중지시킬 정도의 힘까지는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로저, 당신도 이제는 보아 알겠지만 이 영계에서는 그 어느 것도 단지 시도를 위한 목적 때문에 미완성 상태로 남겨두지는 않습니다. 무슨 계획에 대해서든 그 성과가 처음부터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여도 시도하면 아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도 물론 실패가 있고 성공도 있습니다. 로저, 전쟁에 관한 화제가 당신처럼 영계의 즐거움에 대해 닥가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너무나 크고 어두운 화제가 되겠군요. 루스와 나는 당신을 우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몬시노르, 설사 그런 화제가 즐거운 것들이 못 된다 할지라도 알고 싶습니다." 건물의 서쪽 끝면에는 움푹한 자리가 있었고 그곳에는 커다란 오르간이 한대 놓여 있었다. 오르간은 현대식 디자인을 따라 제조된 것도 아니었고 파이프들도 재래식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저 오르간은 보기보다는 훌륭한 악기지요. 로저, 누구나 원하면 마음대로 쳐도 됩니다. 자, 이층으로 올라가 한번 시험해 봅시다. 어쩌면 루스가 우리를 위해 한 곡 쳐 줄지도 몰라요." 계단을 올라가 보니 그곳에는 의외로 큰 방이 자리잡고 있었다. "루스, 이곳에는 전기가 있을 수 없을 테니 내가 대신 오르간의 펌프질을 해드릴까요?" 로저가 제의하고 나섰다. "고마워요, 로저. 그러나 그러실 필요가 없어요. 전기가 없다고 한 말은 맞아요. 그런데 여기엔 전기보다 훨씬 더 좋은 에너지가 있답니다." 그녀는 오르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조그만 상자처럼 생긴 콘센트를 가리켰다.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이 저기에 들어 있어요. 저 작은 기계를 작동하기만 하면 필요한 만큼의 공기를 파이프를 통해 공급해 줍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저 기계를 작동시켜 줍니까." "영력이에요! 생각에서 영력이 니오게 되어 만사에 해결돼요." 루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생각에 의한 영력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당신은 아직도 잘 모를 겁니다." "저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군요." 루스가 오르간 악보 앞에 앉아서 대음악가ㅡ우리들의 친구ㅡ가 특별히 그녀를 위해 작곡한 짧은 한 곡을 쳤는데, 그 곡은 경쾌하고 신바람이 나는 듯한 해학적인 곡이었다. 그녀는 연주를 마치자마자 일어서서 로저의 팔장을 끼고 소리쳤다. "자, 나를 따라와서 우리가 무얼하고 있었나 보세요." 우리는 빌딩 밖으로 걸어나갔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 나온 로저는 루스와 내가 지붕 위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으니 그대로 따라했다. 그는 지붕 꼭대기로부터 위로 뻗어오르면서 빙글빙글 도는 커다란 구형의 기포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기포들은 우아하게 푸른색과 분홍색을 띠고 각기 그 색상을 잃지 않으면서도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었다. "약간 더 뒤로 물러나서 봅시다." 내가 제의했다. "그러면 로저가 더 잘 볼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너무 가까워요." 우리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훨씬 더 잘 관찰할 수 있도록 4백미터쯤 뒤로 물러섰다. 눈에 보이는 받침대도 없이 그와 같은 연약한 형태의 기포들이 공중에 뻗쳐오른다는 사실에 로저는 일종의 경악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어떤 종류를 막론하고 음악을 연주하면 모종의 아름다운 기포들이 형성되지요." 루스가 말했다. "악기의 종류에 관계없이 오색찬란한 기포들이 창조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내가 방금 친 곡을 파이프 오르간이 아닌 피아노를 사용하여 연주했더라면 저처럼 큰 기포들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저렇게 아름다운 것들은 아니었겠지요. 그러나 사실상 난느 저 곡을 피아노를 쳐서 연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형태의 기포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형성될런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저 곡은 파이프 오르간 연주용으로 작곡되어 음량의 크기와 다양성이 최대한 활용된 것이지요. 정말 아름다운 광경 아닙니까?" 로저가 대답했다. "루스, 사실상 저 광경이야말로 내가 이곳에 온 후 보고 경험한 것들 중 가장 놀란 사실입니다. 물론 나쁜 의미에의 두려움은 아니지요." "물론 그렇겠지요. 차라리 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무엇이라고 표현하든 정말 독특한 느낌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루스와 나도 처음으로 저 아름다운 음악의 율동을 목격했을 때는 그처럼 느꼈고 또 지금까지도 완전히 그러한 느낌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으니까요. 아마 영원을 두고 그처럼 경이적인 느낌은 잊어버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잊지 않길 바라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기도 하고요. 저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경험하면서도 첫경험이 아니라고 하여 뜨거운 그 무엇을 느끼지 못한다면 음악 자체에 결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자신에게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언제라도 이처럼 훌륭한 움악가들이 작곡한 음악을 들을 때면 무언사 깊은 정서적 감동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로저는 루스가 마치 굉장한 공훈을 세운 여걸이나 된 것처럼 깊은 존경심을 보이면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루스로서는 로저의 그와 같은 따뜻한 정감에 전혀 동요되지 않고 그저 즐거워할 뿐 그녀 자신이 세운 공적이나 실적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로저, 누구든지 오르간을 칠줄 아는 자라면 똑같은 효과를 기대하지요. 기계로 조작된 악기가 그와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악기가 그러한 음악을 작곡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공적은 작곡가에게 있는것이 아니겠어요?" "유명한 음악가 한 분이 당신을 위해 저 곡을 특별히 작곡해 주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니까요, 로저. 깜짝 놀랄 만한 일이라고 느껴져 그러세요? 사실은 놀랄 만한 일도 못 되지요.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 지상세계에 살다간 그 모든 유명한 음악가들이 여기 어딘가에 와서들 살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예, 물론 그렇겠군요. 이렇게 아둔하니, 저는 아직까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지를 못했습니다." 내가 거들었다. "짐작 건대 사람들이 음악가라고 하면 온전한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겠군요. 그래서 그들은 지상세계의 생활을 하면서 반쯤 굶고 살지요. 그러나 마침내 그들이 지상세곌르 떠났을 때 사람들은 갑자기 그들의 작품들을 높이 평가하면서 동상을 세운다, 기념비를 세운다고 하며 야단들이지요. 요즘은 지상세계의 사정도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요. 또 작곡가들이 굶을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러면서 만일 좋은 작품을 창조해 낸다면 그들이 지상세계를 떠난 후 그 작품은 대단한 가치를 갖게 되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최근에는 지상세계에 괄목할 만한 음악의 천재들이 보이지 않아요. 유명한 음악의 대가들은 모두 이곳에 와 있어요. 바로 이 음악이 그와 같은 천재 음악가인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가 되겠지요. 만일 저 아름다운 미를 음악과 더불어 함께 즐길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겁니다." "공중에 떠 있는 저 기포들이 얼마나 더 저렇게 떠 있게 됩니까?" 로저가 물었다. "보통……." 라며 루스가 대답했다. "잠깐 떠 있다가는 사라져요. 그러나 오늘은 몬시노르와 내가 우리의 생각의 힘을 저곳에 투입하여 좀더 오랫동안 떠 있게 했지요. 저 아름다움을 당신에게 흠뻑 보여 주고 싶은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나 다른 악기들과의 협주 때 저렇게 한 악기에서 창조된 기포가 오랫동안 떠 있으면 연이어 뒤따라 연주되는 악기들의 기포와 어울려 범벅이 되고 저처럼 독특한 미를 잃게 되겠지요." 영계에서 나이는 무의미하다 로저가 말했다. "저로서는 아직도 한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있어요." "그게 단 한 가지뿐이란 말이오?" 내가 반문했다. 로저는 천성이 착해서 우리가 이처럼 약간 놀려대도 전혀 기분나빠 하지 않았다. 우리는 교회에서 루스의 오르간 연주를 즐긴 후 집으로 돌아와서 로저가 영계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던 그 아래층 방에 편하게 앉아 있는 중이었다. "로저, 납득키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어디 속시원히 변호사가 열변을 토하듯 설명을 해보아요. 루스와 내가 어쩌면 그 궁금증을 풀어 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 되어 이곳에서는 모두들 젊어 보입니까? 늙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만나보지를 못했으니까요." "오, 그렇지 않아요. 로저, 늙은 사람들을 당신도 벌써 수없이 만나 보았어요. 물론 당신이 생각하는 지상세계의 시간 관념에 입각한 그런 늙은 사람은 아니지만요." "몬시노르, 제가 너무 사적인 걸 묻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도대체 당신은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요?" "남의 나이를 묻는데 사적인 질문이라고 마음쓸 것까지는 전혀 없어요. 남자들만이 아니고 루스라고 해도 나이에 대한 질문에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아요. 지상세계 여자들은 나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약간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러나 이곳 영계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모두들 나이에 대해 더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이나 나, 그리고 루스처럼 그 연령 문제에 대해 흥미를 갖고 좀더 생각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는 것은 아니지요. 내 나이에 대해서라면, 내가 처음 이곳 영계에 왔을 때 마흔 셋이었고, 그 후로 이곳에서 다시 삼십칠년을 살았으니 이것도 다 그동안 내가 지상세계(地上世界)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몇 년 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그 둘을 합하면 쉽게 답이 나오겠지요?" "뭐라구요? 당신이 팔십세란 말인가요?" "그래 맞아요. 젊은 친구! 아직도 팔십이랍니다." "아니, 몬시노르. 팔십세의 나이가 어떻게 이렇게 젊게 보입니까? 내가 보기는 삼십대의 완숙한 나이 같은데요."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지요. 사실 내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것이 없어요. 변화가 있었다면 더 젊어지기 위해 치룬 약간의 교정이 있었을 뿐일 거예요." "나는 몇 살이나 되어 보여요, 로저?" 루스가 물었다. "조심해요, 로저." 내가 끼어들었다. 그는 섣불리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만일 당신이 나를 일백 살이라고 보았다고 해도 나느 전혀 기분나빠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아직 그렇게까지 나이를 많이 먹지는 않았지요. 약 육십이세쯤으로나 보았다면 절확하고요." "스물 다섯에서 한 살도 더 늙어보이지 않는데요!"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바로 스물 다섯이었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저는 몇 살이나 되어 보입니까?" "젖먹이 때를 못 벗어난 모습 같군요." 루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염려말아요, 로저. 나이에 관한 한 당신이 지상세계를 떠나던 때 그대로의 모습이라오. 그러나 건강상태에 대해서 말하자면 당신이 지상세계에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던 그 마지막 날들의 모습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지요. 불쌍한 로저, 당신은 그때 중병에 걸려 있었고, 건강상태는 말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만일 당신의 모친이 지금 이처럼 건강한 당신의 모습을 본다면 당신이 평소에 건강하던 때의 모습을 기억하게 되겠지요." "이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아요?" 내가 물었다. "이곳 영계에서는 지상에서 말하는 나이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어요. 누구에게나 자기 일생에서 가장 절정기였다고 생각되는 그때의 모습으로 영원히 이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만일 누군가가 그러한 인생의 절정기에 도달하기도 전에 지상세계를 떠나 이곳에 들어오면, 사실은 당신도 그런 케이스고 다른 많은 사람들, 예를 들면 갓난 아기들도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데 그들은 이곳에 도착한 후 점차적으로 그들의 인생의 절정기까지 발전한답니다. 일단 그러한 절정기에 도달하면 그 상태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영원히 생을 향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인생의 절정기를 훨씬 지나서, 예를 들어 팔십세 구십세까지 살자가 온 사람들은 거꾸로 그들의 절정기까지 거슬러 내려가지요. 쉽게 말해서 다시 젊어진다는 말입니다." "지당하신 말씀 같아요." "몬시노르 설명이 지당하고 말고요.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고 이곳 영계에서 거론되는 얘기들은 다 정확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끼리 이처럼 자신이 느끼고 확신한 영계의 나이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된 사실을 놓고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내가 계속해서 설명했다. "로저, 이러한 모든 현상을 가능케 해주는 천리원칙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무슨 일이든 이 원칙에 의해 처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상세계에서 너무 오래 살다가 온 사람들, 어린 시절 아니면 갓난아기의 상태로 영계에 온 사람들, 아니면 당신이나 루스처럼 꽃다운 젊은 나이에 온 사람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분명히 얘기해 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나이를 알아 맞추기가 정말로 어려울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살았던 그 햇수를 더하여 이곳 영계에 온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가를 알아 맞춘다는 것이 무척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이곳 영계에서 오래 살면 살수록 지상세계에서의 생(生)이 짧아 보이게 되지요. 영계에서의 생(生)과 비교해 볼 때 말입니다. 예를 들어 래이디언트 윙을 보세요. 그가 이곳에 얼마나 오랫동안 살고 있는지 알아 맞출 수 있는 자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여기서 살다보면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지혜를 동원하여 바라보면 대충 그 연령을 짐작해 낼 수 있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곳에 사셨는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가 지금 가장 원기왕성한 인생의 절정을 살고 있는 듯했으니까요. 그런데도 그가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부로는 늙었다거나 나이가 많다는 것을 전혀 볼 수 없는데도 무엇인가 그 깊고 심오한 지혜의 비중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요. 로저, 그런 경우가 허다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났다고 가정합시다. 당신 혼자 생각으로 '오, 저 사람은 젊은이가 아니구나'하고 단정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 보이는 무슨 주름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체적인 장애나 지상세계를 떠났을 때의 흔적, 햇수 같은 것 등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나이를 추측하거나 확인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랍니다. 하여튼 래이디언트 윙이 몇살쯤되었다고 봅니까?" "저로서는 도저히 짐작도 할 수가 없군요." "그분은 육백 살이 되었어요." "정말 대단하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만도 않아요. 기억하세요? 오마(Omar)가 이천 살이니 되었다는 것을, 그의 일급 보좌관은 그보다 더 나이가 들었지요. 아마도 오천 살 정도는 되었을 거예요. 성경에 뭐라고 했던가요. 오래 살수록 현명해진다고 했지요? 이곳이야 말로 나이를 먹지 않는 세계입니다. 로저, 하여튼 우리들도 동년배로 보일지도 모르지요. 주름 투성이의 얼굴, 성성한 백발, 체중 초과로 겪던 지상세계에서의 고생, 아니면 늙어 쪼그라들던 현상,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활동이 부자연스러워지는 현상, 목소리조차 늙어보리던 현상, 나아가서는 생의 활기조차 잃어버리는 그러한 모든 부정적인 현상들을 이곳에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다시 어린애 같은 그런 생활이 이곳에서는 반복되지 않아요. 울적한 생각일랑 버리세요. 그리고 당신이 있기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기에 당신이 있다는 점도 잊지 마세요. 우리는 다시 어린애와 같은 시절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우리의 생애에 있어 최상의 시기로 새로히 복구되어 살제 되는 것입니다." "몬시노르, 도대체 이곳 영계는 정말 얼마나 나이를 먹었다고 보시나요?" "나의 똑똑한 친구, 그것은 참으로 멋진 질문이에요. 그러나 당신도 내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알고 있지 않소? 영원이란 시작이 없는 법이지요. 그리고 영생이란 또 어떤 방법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조사해 보면 자동적으로 우리가 모두 공통된 의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영생을 다함께 즐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절대적인 영원성을 느끼고 삽니다. 우리들의 생이 영생이 아니라면 이 모든 부질없는 생각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더이상 계속해서 번민하며 살아야 할 이유도 없게 되지요. 젊은 친구, 이곳의 모든 사물은 영생하게 되어 있고 누구나 이 영광된 생을 만끽하고 살고 있지요. 오늘보다 더 즐겁고 화려한 내일이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이 급(級)의 영인들은 가장 높은 급의 위대한 분들로부터 확약을 받고ㅡ사실은 확약을 받을 필요도 없지만ㅡ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 주지 않고 있다면,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로저, 그러나 우리이게도 우리 자신의 힘이 있어요. 자랑할 만한 우리의 능력이 있어요. 창조성의 힘이 있는 것이지요. 당신은 아직 우리가 맡은 바 일을 수행해 내는 데 우리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현장을 목격해 보지 않았지요? 전문가들이 누군가를 위해 집을 지어 내는 것을ㅡ왕궁도 좋고 그보다 더 큰 집이라도 좋아요ㅡ볼 때까지만 참으세요. 이와 같은 모든 건물들이 신께서 주신 창조의 능력에 의해 우리들 손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당신은 질문하겠지요. 만일 그 신께서 우리들에게 내리신 창조의 능력을 거두어 버리시면 어떻게 되느냐고요. 그렇게 생각한다는 자체가 터무니 없는 것이지요. 그 위대한 힘은 이 영계와 더불어 영원을 두고 우리 인간들에게 부여되고 있는 것입니다. 납득이 가리라고 믿습니다. 숫자에 얽매여 살던 사람들에게도 숫자에 큰 의미가 없다고 알게 되는 때가 옵니다. 국가의 재정문제를 놓고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천문학적 숫자를 가지고 논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수십억 단위로 돈을 계산하게 되고 급기야는 그와 같은 천문학적인 숫자가 평범한 서민들에게는 영계의 생활을 통해 이제 그와같은 헤아릴 수도 없는 숫자들에 무감각해져 버렸고, 따라서 설사 우리가 우주적인 숫자로 나이를 논해도 놀라지도 않는 정도가 되었어요. 로저, 영계의 나이가 얼마나 되느냐는 당신의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은, 영계가 적어도 지상세계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는 우리도 고급영계(高級靈界)로부터 배워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만일 지상세계가 우리가 배워 알고 있듯이 30억년 내지 50억년 전에 생성되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엄청난 숫자를 얘기하고 있는지 실감이 나겠군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실감이 날리가 없겠지요. 나에게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거든요. "나도 실감을 못 느껴요." 루스가 맞장구쳤다. "그래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숫자놀음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아요. 만일 영계가 그처럼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면ㅡ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지만ㅡ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이 영계 만큼이나 나이가 든 사람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차원에서 우리들의 나이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무한정 펼쳐지는 영계의 실체세계 위에 보잘 것 없이 뒹구는 한 알의 모래에나 비교할 수 있을런지요?" "몬시노르, 이것은 너무 정신이 아찔한 정도의 얘기입니다." "로저,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닐 거예요. 그러나 사실인즉슨 그렇게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고 있습니다. 수십억년을 살아온 그분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숨이 막힐 정도인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크게 나를 사로잡고 경악시키는 것은 그분들이 체득하신 전우주(全宇宙)에 관한 지혜입니다. 로저는 그런 급의 분들을 아직 한 분도 만나보지 못했지요. 그러나 루스와 나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그 최고 위치에 계신 분을 만나 보았답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이 기거하시는 만유의 극상이라는 곳까지 가 보았습니다. 로저, 당신에게도 언젠가는 그렇 수 있는 기회가 오겠지요. 아마 우리와 함께 이 집에서 사는 동안에 그런 영광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오마는 바로 유일하신 그 한 분을 직접 모시고 사는 그분의 오른팔과 같은 일을 하고 있지요. 당신이 던진 간단한 질문 하나가 얼마나 엄청난 사실을 당신에게 안겨주었는지 신기할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생각해 보니 어리석은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요?"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문제는 정확한 대답을 얻는 것이지요. 무엇에 대해서든지 의문이 생기면 가능한 한 정확한 대답을 얻어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아마 짐작이 가겠지만 지금도 이곳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실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우리가 알면 안 되는 깊은 비밀이 많다는 얘기가 아니고 먼저 배워 익혀야 할 내용이 엄청나서 한꺼번에 모두 체득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달성한 정도의 지식과 이해력으로는 소화할 수 없는 내용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학교에서 배우던 교과서와 마찬가지지요. 로저, 처음부터 단곌르 밟아 차근차근 배워야지 무조건 성질 급하게 그 교과서의 마지막 장을 읽는다고 해서 무슨 뜻인지 잘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곳 영계에서 의문나는 점을 질문하고 또 대답해 주고 하는 과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꾸준히 노력하며 살고 있지요. 설혹 우리가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 나와도 당황해 하지 않아요. 이 영계에서는 모든 만사가 분수에 맞게 자리잡고 있어요. 우리가 어떤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지식이 충분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 때문에 보다 높은 급의 영계로 진급하는 데 자격상실을 당한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어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지식과 지혜는 최선을 다하는 삶 속에 때가 되면 정확히 우리를 찾아오게 되지요. 그런 동시에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듯이 우리들 사이의 자유토론은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대답할 수 없는 분야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보다 높은 급에서 정확한 지식을 전해 줄 수 있게 되어 있으니까요. 로저, 벌써 느꼈겠지만 이곳이야말로 자유롭게 교감하는 세계지요. 지상세계에는 지금도 이처럼 완벽하고 빈틈없는 영계를 놓고 전우주(全宇宙)에서 가장 불필요하고 재미없는 곳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거나 또 그렇게 믿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지금 이곳에서 당신의 생활을 지상세계에서 경험했던 일상적인 주일(主日)의 그것과 바꾸겠느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하겠어요?" "나로서는 절대로 바꾸지 않겠어요." "우리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지상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처럼 당엄한 주일예배의식을 지키면서 사는 생(生)이 영적(靈的)으로 극치에 이르는 것인 양, 그 생활 자체가 낙원이나 되는 양 믿으며 살고 있어요. 영계의 연령과 인간의 절정기 생에 대해 한 가지 더 부언할 게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지상세계에서 오래 살다가 늙은 육신을 갖고 영계에 들어오게 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외모가 점점 더 젊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점입니다. 그와 반면에 루스와 나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곳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외모의 변화가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로저, 당신의 경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신이 절정기에 이를 때까지 점점 더 성장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큰 변화는 없겠지만 조금은 바뀔 것 같아요. 남자의 경우라면 잔존해 있는 지상세계의 유행이나 형식이 약간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때 지상세계에서는 턱수염을 곱게 길러야만 신사축에 끼일 대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당신도 보아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제 그런 식의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염을 기를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요.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대주교들이 기르는 식의 턱수염을 당신 배꼽에 닿을 정도로 길게 기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모양의 수염을 길러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의 수염 기르는 자유를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그런 식의 수염을 길러 유지하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는 하겠지요. 그러나 수염을 기르지 말라는 법이나 규정이 재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경우, 만일 내가 나의 용모를 약간 바꾸거나 맵시를 내면 아마 내 친구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나도 한 마디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 같군요." 루스가 얼른 받아 대꾸했다. "남들이 하니까 샘이 나서 한 것이라고 즉시 골려 줄 거예요. 로저, 당신도 짐작하시겠지만요. 개인의 특성을 상실해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외모의 변형에 의해 약간 달라 보일 수는 있겠지요. 예를 들어, 한 남자나 여자가 나이가 들어 늙으면 젊었을 때의 모습에 비해 크게 달라보이는 것이며 특히, 어떤 사람이 턱수염을 길렀다면 외모가 몰라 볼 정도로 달라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를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쉽게 지상세계에서 지녔던 신체적인 특성을 제거해 버리고 이곳 영계의 새로운 특성을 지닐 수도 있게 됩니다. 그리고는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그 특성을 지니고 사느냐 하는 데는 전혀 자유입니다. 오마와 그의 보좌관 사이의 나이를 한번 비교해 봅시다. 적어도 지상세계의 나이로 따진다면 삼천년은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을 볼 때 누가 더 나이를 들었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어요?" "천만에요, 몬시노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예요." "수백, 수천만의 영인들 경우가 그와 같은 상황이지요." "지상세계에서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 "역사적인 인물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현대 인물들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를 다 말하는 겁니다." "역사적인 인물들에 관한 얘기라면 수많은 종류의 사실적 요건들이 개입되어 있어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지상세계에는 그러한 역사적 인물들을 정확히 묘사한 초상화조차도 없는 것이 현실이지요. 후세의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뿐이니까요. 그들은 먼 옛날의 기록을 통해 미비하나마 그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을 묘사해 놓은 것뿐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초상화들이 전혀 실물과 다를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이곳 영계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중 지상세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역사적 인물인 것을 전혀 모르고 대화를 하게도 되지요. 외모를 보아서는 전혀 그들의 신원을 알 길이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 인물이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더 많은 발전과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들에 대해 지상세계의 옛날 화가들도 최선을 다해서 그렸지요. 적어도 그들이 그린 초상화가 그사람으 모습이었음은 틀림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원본들은 거의 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날가버렸지요. 현대의 화가들이 다시 재생하여 그리긴 했지만. 도대체가 지상세계에서 유명해 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무슨 일로 유명해 지느냐가 중요하지요. 오늘날 지상세계에는 전적으로 보잘 것 없고 엉터리 같은 일로 그 유명인이라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위 '유명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들의 잘못만도 아닙니다. 골이 빈 엉터리 같은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유명인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런 반면에 지상세계에서 아주 불미하고 명예롭지 못한 평판과 이름을 갖고 살다가 온 사람들도 많아요. 그러나 그들이 새로운 빛의 영역으로 영전되어 올라왔을 때는 그들을 묘사해 놓은 지상세계의 초상화들이 아주 형편없이 틀린 데 대해 안도의 숨을 쉬기도 하지요. 쉽게 말해서 외모로 과거의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 이곳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지상세계와 영계는 실제로 어떻게 다른가 내가 로저에게 물었다. "이 집과 집 안의 모든 물건들, 더 나아가서는 이 창문들을 통해 볼 수 있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순수한 것들로 보이나요? "그렇고 말고요. 그건 왜 물으세요?" "나의 착한 친구여, 왜냐하면 지금도 지상세계에 사는 사람들 중 이 모든 것들이 생각에 의해 이루어진 조건적인 환상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 모든 것들이 실질적인 존재물들이 아닌 것입니다. 영계에 대해 무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로저가 대답했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영계와 무형 실체세계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무지한 현상입니다. 나도 처음에 당신이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 그것이 꿈이 아닌가 했었으니까요." "그런 뒤 무슨 일이 생겼나요?" "당신은 의자 끝에 앉아 있었고 루스는 내 곁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앗지요. 당신은 또 조리에 맞는 얘기를 했어요." "고마운 말씀이시군요." "내가 무슨 뜻으로 한 얘기인지 잘 아시잖아요." 우리는 로저가 당황해 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렇고 말고요. 로저, 당신은 그 모든 상황이 지각있는 것이었고 꿈에서 겪었던 그런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단 말이겠지요." "바로 그겁니다. 즉시 그 모든 것이 실제임을 알 수 있었어요. 기억하세요, 내가 발로 바닥을 쳐보던 일을? 그 후로는 지금까지 그 어느 때도 이곳의 사물이 실제가 아니거나 순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로저, 실제성과 순수성,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요. 문제는 지상세계의 인간들이 아직도 그 생각의 힘에 대한 진짜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에 있어요. 정해진 한도 내에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하지만, 나의 견해로는 그들이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영계에 대해 자신 있게 실증해 보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나와 루스가 지상세계의 당신 침실로 찾아갔을 때를 다시 한번 상기해 보세요. 우리는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갔었고, 어느 것 하나 순수한 것이 없었지만 우리 두 사람도 그 당시 당신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존재들이었어요. 심지어 당신이 우리 두 사람을 보았을 때도 우리의 존재는 실제와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던 셈이지요. 우리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영계로의 출발이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영계는 당신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당신의 침실에서, 좀더 정확히 말해서 당신의 침실이 있었던 그곳에서 당신은 한 생(生)을 마쳤고 또하나의 새로운 생을 출발했지요. 그때에 우리 두 사람이 잠시 당신을 맡았던 것입니다. 루스가 당신을 편안히 쉬도록 재워서 그렇지, 그 당시 당신이 우리와 함께 깨어 있었더라면 당신도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그 안개 속에 덮힌 듯한 방에 비탄에 잠기거나 공허한 모습의 사람들이 모여 있던 것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지상계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하듯 그 당시 우리도 그 방에서 모습은 실제라기보다는 조건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어요. 당신의 임종을 위해 모여 있던 가족들에게는 그 침실이 실제요, 순수한 것이었습니다. 단지 당신의 상태가 지상세계의 생에서 영계의 생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당신 자신을 공허한 것에서 실제로 바꾸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또 우리들이 당신을 그렇게 바꾸어 준 것도 아닙니다. 내 얘기가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 당시 당신은 미래의 생(生)에 관한 무슨 아이디어라도 갖고 있었나요? 아니지요, 당신은 우리에게 얘기했어요. 당신 자신이 평소에 품고 있던 영계에 대해서, 어떤 선입관에 의한 영계를 구상해 본 적이 없다고요."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실제나 조건 속의 상태에서 나 자신을 발견해 볼 수는 없었을까요?" "젊은 친구, 맞는 말이요. 정확히 그런 일이 일어난 셈이었으니까요.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당신이 발견한 그곳이야말로 실제요 현실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경험할 수도 있으며 즐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계와 지상세계의 다른 점이 어디에 있나요?" "우리들의 생활이나 사고 속에 개입하고 들어올 수 있는 지상세계의 실제나 현상이 없다는 그 사실이 다른 점입니다. 지상세계에서 무엇을 하나 창조하거나 만들려면 반드시 생각의 과정을 거쳐 계획을 세우고 때로는 설계도를 작성하여 그것이 기존 물건보다 더 좋은 것인가를 확인하고, 그리고 나서야 손으로든 기계로든 그것을 제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생각 자체가 훌륭하게 모든 일을 처리해 냅니다. 여기서는 생각 자체가 직접적인 행위입니다. 그 점이 실질적인 면에서 어려운 점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생각 자체가 그처럼 직접적인 행동력을 수반하고 있지만 지상세계 사람들은 그와 같은 생각의 결과들도 실체적인 것이 아니요, 꿈과 같은 것으로 약간의 자극만 가해져도 쉽사리 분해되고 말거나 없어져버린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계에서의 생각의 힘은 지상세계에서보다 엄청나게 강하고 방대한 것입니다. 지상세계에서는 무엇인가 실제물건을 만들려면 반드시 생각의 과정을 거치지만 그것은 결과를 가져오는 출발의 한 계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생각의 단계가 시작이요, 끝입니다. 더이상 행동의 구체적인 과정이 필요가 없어요. 생각이 구체화되자마자 거기에 따른 실제물건이 창조됩니다. 그렇다고 단순하고 산발적인 생각에 따라 그때그때 원하는 것이 생긴다는 것은 아닙니다. 즉 '돈 나와라 뚝딱'하는 마술사 같은 방법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로저, 이 집만 해도 그래요. 신중하게 생각한 후 토목공과 건축가들이 함께 뜻을 모아 완성을 본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일도 생각의 작업이었지요. 자재를 조달하는 데도 전혀 중간 매체가 필요없고, 공사현장의 임시 계단 등을 세우는 데도 아무런 도움이 필요없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구상을 했고 그들의 생각이 이처럼 실질적인 집을 지어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집은 이곳에 오래오래 건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공간 위에 앉아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안락 의자에 앉아 있고 의자는 마루 위에 이처럼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환상적인 생각의 세계가 아닙니다. 영계는 무형으 세계이지만 분명한 실체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몬시노르,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원하기 전에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야겠군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믿으면 틀림없어요. 지금 당장 저기 보이는 저 식탁과 똑같은 것을 만들 수 있겠소?" "아직 저의 영계의 지식으로는 어림도 없는 얘기지요." "루스나 나도 마찬가지지요. 당신도 우리 집에서 봤겠지만 루스는 벽에 거는 융단들을 만들고 있지요. 그러나 그녀는 전문가들에 의해 제작된 기계를 이용하여 그 융단들을 만드는 기술을 익혀 만들었고, 또 그 융단가공에 쓰이는 재료들도 전문가들에 의해 생산된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실제와 거리가 먼 것이 아니지요. 로저, 꽃과 같은 것들은 어떻게 창조될 것 같아요?" "전혀 알길이 없군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한번 볼래요?" "볼 수만 있다면 보고 싶군요." "그렇다면 꽃 창조를 담당하고 있는 분을 만나봅시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 우리는 로저에게 우리가 만나 보러 가는 사람은 지상세계의 화원 같은 것을 이곳에서 운영하고 있고, 그가 지상세계에 살 때도 비슷한 일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로저가 말했다. "내 짐작으로는 지상세계에서와 거의 같은 방법으로 꽃을 재배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만……. 즉 꽃씨를 심고, 싹이 나면 일정 기간 가꾸어 꽃을 피게 하는 방법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얘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 감을 주는데요. 어떻게 재배하나요?" "궁금하더라도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 봐요, 로저. 우리 친구가 잘 설명해 줄 겁니다. 저기를 보세요. 정원들이 보이지 않아요." 우리는 전면에 펼쳐진 무한히 넓은 화원들, 곳곳마다 다른 색들의 꽃이 휘황찬란하게 피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크고 작은 각각의 수목들이, 작게는 묘목들로부터 크게는 아름드리 거목들까지 수없이 들어 서 있었다. 우리는 조그만 길을 따라 화원 중앙에 자리 잡은 큰 집에 도착했다. 내가 벌써 그 황원의 주인에게 연락을 해놓았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우리를 맞이하는 인삿말 속에 벌써 우리의 갑작스런 방문을 알고 있었다는 내용의 얘기가 나오자, 로저가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루스가 로저에게 간단히 어떻게 해서 생각매체를 이용한 소식 전달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로저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자기로선느 좀더 시간을 두고 깊이 연구해 보아야 알 것 같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그 주인에게 로저를 소개했고 새로이 도착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 로저는 지금 이곳 저곳을 직접 방문하면서 영계에 대해 익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 젊은 친구, 꽃이 어떻게 창조되는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그렇다면 정확히 찾아왔어요." 그는 즐거운 듯 반짝이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로저도 이제는 옛날에 가졌을지도 모르는 부끄러움 같은 것과는 완전히 상관없는 입장에서 알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해 진지한 질문들을 하는 단계에 와 있었다. 그는 화원 주인에게 즉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전영계에 꽃들을 공급하고 계십니까?" "오, 천만에요! 단지 이 지역에만 공굽하고 있어요. 다른 지역에도 나처럼 꽃을 재배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이곳도 그와 같은 화원들 중 하나일 뿐이지요. 자, 어디서부터 보실까요? 먼저 나를 따라 오세요. 이미 완성된 작품들을 좀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의 주위에는 수백 개의 화단들이 널려 있었는데 각각 다른 종류의 꽃들로 만발해 있었고, 그 모든 화단들이 질서정연하게 잘 배열되어 있었다. "알아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는 이처럼 여분으로 보관하고 있는 꽃들을 놓고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미적인 배열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꽃들이 지니고 있는 그 색깔들과 한없이 널려 있는 꽃과 수목들의 배열이 보는 사람들에게 경탄을 금하지 못하게 하지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 그리고 그 다양한 색들의 조화, 그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답니다. 저기 보이는 정원들에는 보고 즐기는 목적으로 배열해 놓은 화단들이 있지요." 우리들은 한줄기에서 피어난 수많은 꽃송이들이 여기저기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저기를 보세요." 정원 주인은 설명했다. "지상세계에서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꽃들이 자연히 시들고 씨가 여물게 되지요. 즉 대개의 경우 한쪽에서 꽃이 씨가 맺히면 다른 쪽에서는 새로 줄기가 나고 꽃이 피고 하면서 그래도 상당 기간 꽆의 아름다움을 공급하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당신들도 보시다시피 지상세계에서와 같은 그런 현상을 거치지 않고 줄기들은 모두 적당한 크기로 그 위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 있어요.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을 정도지요. 꽃들이 이처럼 아름답게 자랄 수 있는 곳은 이곳 영계를 빼놓고는 그 어디서도 가능하지가 않아요. 저기 접시꽃들을 좀 보세요. 저처럼 많은 꽃들이, 꼭대기서부터 땅에까지 만발하게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접시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더구나 저 꽃들은 한번 피면 지거나 죽지도 않지요. 원래 우리가 꽃을 만들 때에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저렇게 만발한 채 영원히 살게 되지요." 육신을 쓴 인간이라면 도저히 구경할 수 없는 완전무결하게 핀 꽃들이 꽃밭들마다 무궁무진하게 만발해 있었다. 루스와 나는 그전에도 이 아름다운 곳을 자주 방문했었지만 로저로서는 첫나들이있고 충경이 어찌나 컸던지 감히 입을 열지 못할 정도였다. 지상세계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꽃들이 다 있었고 심지어는 아주 옛날 사람들이 좋아했던 꽃들ㅡ소위 말하는 구시대의 꽃들ㅡ, 즉 접시꽃(Hollyhocks), 팬지꽃(Pansies), 금어초(Snapdragons), 풍경초(Canterbury bells), 계란풀(Wallflowers), 자라난화(Stocks) 등 수백 종의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아마 짐작했겠지만 그 다양한 꽃들로부터 풍기는 향내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그렇다고 하여 향기가 너무 짙은 것도 아니었고 알맞게 풍겨서 주위 사람들이 상쾌한 기분으로 즐겁게 맡으며 그 맛을 만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상세계에서 이 정도 크기의 화원을 운영하려면 말할 수 없는 노력과 작업량을 필요로 할 텐데, 여기서는 그저 휴일에 놀면서 여가로 즐기는 정도의 작업으로 충분히 운영해 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지상세계에 이처럼 큰 화원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이 화원도 영계에서는 제일 큰 화원이 아니지요. 그러나 이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꽃들은 무슨 꽃이나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내가 얘기했듯이 이곳 화원의 일은 공휴일에 여가를 이용하는 취미 정도의 일입니다. 지상세계의 화원들이 겪는 어려움이나 문제점들이 전혀 없으니까요. 먼저 기후에 대한 염려가 없지요. 사실 이 기후가 가장 중요한 조건이지요. 그 다음은 토양도 언제나 적합한 것이어야 되고, 무슨 조건이든 다 꽃들을 재배하는 데는 절대적인 상태로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지상세계에서는 꽃씨를 심어 싹이 트고 자라서 꽃이 피어 그 꽃을 시장에까지 내눃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천만다행으로 무슨 종류의 꽃이나 나무를 막론하고 우리가 직접 나무와 꽃을 창조하기도 합니다. 원하면 꽃을 한줄기에 한 송이 만들 수도 있고 두 송이로 만들 수도 있어요. 또 꽃의 색깔이나 모양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하여 일단 창조의 작업이 끝나면 내다 심게 되는데 그 뒤로는 전혀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그저 빈둥거리며 게으름만 피우는 것은 아니지요. 이처럼 손님들께 구경을 시켜 주는 것도 우리들의 할 일이거든요." "로저 당신은 이 정원사가 정말 할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판단하지 말아요. 저 분이야말로 이 모든 정원들을 창조하신 천재적인 분이며 이곳 영계의 전체의 조경을 책임지고 계시니까요. 비단 이곳의 정원들 말고도 우리가 지금까지 이곳 저곳에서 본 그 많은 아름다운 정원들이 모두 저분과 그의 조수들, 함께 일하는 형제 같은 분들에 의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인을 따라 화단들 사이사이로 부채살처럼 펼쳐져 있는 사이길로 걸었고 꽃들 외에도 울창한 수목들과 관목들도 구경했다. 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고 무진장한 화초와 수목들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고, 주인은 그 모든 수목과 화초 하나하나가 귀하게 요소요소에 쓰일 것이며 단지 구경시켜 주기 위해서 창조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자상히 설명해 주었다. 로저가 화원의 주인에게 물었다. "당신의 말대로 이 모든 꽃과 나무들이 일단 창조되면 절대로 시들거나 죽는 법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이처럼 많이 만들어야 합니까? 이 모든 수목과 화초들이 전부 필요에 의해 창조되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수요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존 정원을 더 확장하기도 하고 새로운 화단을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도시에도 정원들이 많이 꾸며져 있고요. 더구나 그러한 정원들이 자주 필요에 따라 다시 만들어지거나 아니면 모양을 바꾸어 단장을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화초와 수목들을 그때그때 전부 공급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경우에는 자기집 정원에서 가꾸고 기르던 화초나 수목들을 갑자기 다른 종류로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에도 그들이 원하는 새로운 것들을 그들에게 제공하고 그 화단에서 버림받은 화초나 수목들은 이곳에 가져다가 가꾸기도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알겠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화단을 얼마든지 꾸밀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고 또 기존 화단들에도 새로운 화초나 수목을 수용할 만한 여유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 이제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아름다운 보물들을 보지 않겠어요?" 우리가 안내되어 들어간 곳은 넓은 아파트식 방이었고 수많은 선반이 벽들을 메우고 있었는데 선반마다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주인이 무심코 책을 한권 꺼내 손 가는 대로 아무데고 한번 펴 보았다. 아주 정교하게 천연색으로 그려 놓은 튜립이 그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미술 작품이라기보다는 식물학상의 작품이었고 뒷배경은 삽입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그 그림은 꽃의 꽃잎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부분을 잘 묘사해 주고 있어서 누구나 그 그림을 보면 어떻게 해서 그 꽃이 창조되었는지를 한눈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특히 그 꽃의 색상에 관한 한은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잘 조화되어 있었다. "이곳 견습생들은 실제로 화초를 창조하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이러한 그림을 통해서 먼저 자기들이 창조할 화초에 대한 모든 것을 익히게 됩니다. 완전한 사전 지식이 없이는 누구든지 원하는 그 꽃을 정확히 재창조해 낼 수 없으니까요. '거의 완전'한 것은 완전하다고 할 수가 없지요. 절대적으로 완전무결한 것만이 통과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은 완전무결한 작품을 창조해 내기 위해서 만들고자 하는 꽃의 꽃잎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 구부러지고 어디가 두껍고 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보통 초보자들이 흔히 그렇듯 이 그림만 한번 관찰해 보고서도 직접 실화창조에 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다시 돌아와서 그림을 놓고, 아니면 실화를 놓고 충분한 공부를 한 뒤 자신을 갖고 실화창조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는 합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이 책들 속에는 우리가 지상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꽃들과 더 나아가서는 오직 영계에서만 볼 수 있는 꽃까지 전부가 총천연색으로 묘사되어 있고, 이 그림을 참고하여 우리는 언제나 필요로 하는 꽃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들 외에도 다른 방에 가 보시면 벽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꽃의 그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일일이 책을 뒤져 보지 않고도 쉽게 꽃의 구조와 미를 감상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지요. 이 복도 끝의 방으로 들어갑시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굉장히 큰 강당과 같은 곳이었고, 벽에는 이곳 영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정원들의 모습이 섬세하게 묘사된 장엄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아름답고 어느 그림이 더 웅장한지 전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주인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 그림에서 보시는 이 대부분의 정원들은 실제로 이 지역 어딘가에 그대로 꾸며져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창조의 조화에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몇몇 작품들은 사실상 다른 곳의 원예원에서 우리에게 보내 온 것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도 어떤 특별한 작품이 나오면 다른 원예원에 보내기도 하지요. 이렇게 정기적인 교환을 통하여 발전하고 있습니다. 젊은 친구, 이곳 영계에서는 어떤 물건이나 생명체를 막론하고 빈번히 옮겨지게 됩니다. 한 군데 처박아놓고서 잊어버리는 그런 일이 없답니다." 그리고 그 정원사는 어느 조그만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 방에는 원예예술을 공부하고 익히느라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젊은 원예사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로저는 어디에서 무엇을 보아도 매번 푹 빠질 정도로 흥미진진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더 심했다. 지금까지 어디를 데리고 가더라도 싫증을 내는 등의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지만, 이곳 원예원 방문은 그야말로 그에게 무엇인가 충격적인 것으로 보였다. 나는 물론이려니와 루스와 안내하는 주인의 눈에도 로저가 이런 원예예술에 몸을 담고 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읽을 수가 있었다. 안내하는 친구가 드디어 원예원 방문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는 꽃을 실제로 창조하는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먼저 우리를 그의 주위에 둘러 앉게 하고 테이블 위에 평범하게 보이는 화분 하나를 갖다 놓았다. 흙을 약간 부어 넣고 그는 우리에게 그 화분을 주시해 보라고 일렀다. 첫눈에는 별다른 변화를 볼 수는 없었고 단지 뿌연 빛이 그 화분 주위에 감도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로 형태를 이루어 가면서 급기야는 꽃송이가 달린 줄기로 변화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것은 윤곽이 뚜렷한 꽃으로 등장했고 약간 어슴프레 하기는 했지만 색상까지 갖추어 가고 있었다. 어쨋든 그렇게 순식간에 창조된 꽃이지만 그 형태나 색상이 너무나 뚜렷해서 누구나 쉽게 그것이 튜립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원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화분을 들고 잠시 관찰한 후 만족한 듯이 우리들에게 좀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돌려 주었다. 섬세함녀서도 아름답게 핀 꽃잎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내가 다시 그 화분을 원예사에게 돌려 주었다. 그는 화분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후 다시 한번 최후의 손질로써 그 꽃의 창조를 완성시키기 위해 함축된 생각의 힘을 꽃에 불어 넣었다.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 작업이었다. "자, 로저, 이 아름다운 꽃은 당신을 위해 만든 것이오. 어디 다르게 보이는 곳이 있는가 봐요." 로저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구석이 없다고 대답했다. "당신에게는 아직 얘기를 안 해주어 모르지만 몬시노르와 루스만은 이 꽃에 어딘가 미숙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로저는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그 튜립을 자시헤 관찰해 보았으나 역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음을 자백했다. "그저 감상하는 목적만을 생각한다면 그 튜립은 꽃으로서 전혀 흠이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아직도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어요. 이 꽃이 꽃으로서의 생(生)을 누릴 생기(生氣)가 아직 들어가 있지 않은 것입니다. 단지 이 튜립만이 아니고 어느 꽃을 막론하고 우리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분야가 바로 그것입니다. 창조된 생물에게 생기를 부여하는 일은 이곳보다 더 높은 최상급의 영계에서 주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해 내는 꽃이나 수목이 완성품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도 물론 실수할 때가 있어요. 특히 이곳 견습생들은 실패작을 만들어 낼 때가 많지요. 견습과정에서는 그런 정도의 실수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설사 실패작을 만들었을 때도 우리는 사용된 모든 물질이나 원료를 원상(原狀)으로 환원시킨 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전혀 손해가 나는 것은 아니지요.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어떤 꽃잎이 제대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을 발견할 대가 있습니다. 즉 꽃이 활짝 피어 있는 데도 꽃잎의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우중충하다든가 혹은, 그 꽃잎의 색상이 우리가 원했던 만큼의 아름다운 빛을 발하지 못한다든가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내가 지도하고 있는 견습생들은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도 대단한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극치의 만족감을 맛볼 때는 그들이 배우고 익힌 실력과 기술을 활용하여 실제로 모형도와 똑같은 완전무결한 꽃이나 수목을 창조해 냈을 때입니다." "그 생기라는 것이 어떻게 하여 생물에 불어 넣어지나요? 그와 같은 생기를 받아 넣기 위해서는 모종의 의식을 거쳐야 하나요?" "종교적인 의식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예! 뭐 그런 식의 의식 말입니다." "천만에요! 전혀 그런 형식적인 의식은 없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보다 상급(上級)인 영계에 우리가 완성한 작품에 대한 상신을ㅡ물론 생각의 힘을 빌어서ㅡ하게 되면 누군가가 그것을 접수하게 되고 그런 다음에 즉각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생기가 그 목적물에 투입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힘은 근본적으로 만유의 근원되시는 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같은 에너지를 생기의 형태로 받을 때는 누군가 중간에서 그 일을 맡아서 하는 분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원리적인 단계요, 현상이며 우리가 꽃이나 수목을 창조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과분한 축복입니다. 어떻게든 우리의 뜻대로 생기도 완전히 투입되었으니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 아닙니까? 어떻게 설혹 우리의 창조물이 완전무결한 작품이 못 된다고 느껴지더라도 상급영계(上級靈界)에게 요청하여 필요로 하는 생기를 공급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예술적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치 않아요. 이곳의 견습생들이 작품을 완성하면 내가 일단 검사를 합니다. 만일 어떤 작품에 약간의 교정이나 손질이 필요한 정도라고 판단이 갈 경우는 그대로 두고 손질을 하여 완성품을 만들어 내게 하지만 결정적인 실수가 보이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지시합니다. 물론 그럴 경우 사용된 물질이나 원료는 원상환원되어 다시 쓰여지는 것이지요. 절차만 알게 되면 어려울 것은 전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그렇겠지만요." 내가 한마디 했다.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요. 내가 내 실력을 잘 아는 터이므로 하는 얘기지만, 나더러 꽃을 한송이 창조해 내라고 한다면 아마 모르면 몰라도 역사상 예전에도 볼 수 없었고 또 장래에도 보지 못할 괴상한 꽃이나 한 송이 만들어 놓는 게 고작일 거예요." "몬시노르, 그렇지 않을 거예요. 몬시노르가 인간으로 탄생되는 순간 예술적 창조성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상당히 훌륭한 꽃을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이렇게 세 분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특히 내가 무슨 실수를 하는가 하고 주시하고 있는 이런 분위기에서는 주눅이 들고 말 것이 틀림없습니다." 모두들 나의 이처럼 솔직한 고백에 한바탕 웃었다. "사실상 그런 식으로 견습생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누구든 처음으로 견습생이 되어 들어오면 나와 함께 내 서재에 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첫 실험모형을 창조해 봅니다. 따라서 부끄러워하거나 창피를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그 점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어쩐지 꽃 창조자로서 성공할 수가 없을 것만 같은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내가 이렇게 나의 느낌을 단호히 표명했다. "혹시 문하생으로 들어갈 자리가 없을런지요? 만약에 그런 자리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고 로저가 물었다. "원예 예술사로 영계생활을 시작하고 싶다는 말씀이겠지요?" 내가 로저의 말을 받아 이야기 했다. 정원사가 로저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자리야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이논하기 전에 이 튜립꽃을 완성시켜 놓습니다. 금방 끝날 것입니다." 그가 그 튜립을 손에 들고 일어서자 즉시 한 줄기의 빛이 그 꽃 위에 내려 비추이는 것을 목격했다.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언제 그 빛이 내려 비추기 시작하여 언제 끝났는지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순간적인 현상이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 이것이 이제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생명을 가진 꽃이 되었어요. 향기를 맡아 보세요." 그가 튜립을 우리들 얼굴 가까이 가져와서 가벼히 흔들어 대자 즉각 그 은은한 향기가 우리를 사로잡고 말았다. "로저, 두 손으로 그 꽃송이를 살며시 안아 보아요." 로저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다 "왜요?" 성급하게 묻자 원예사가 다시 소리쳐 말했다. "로저, 이유는 묻지 말고 두 손으로 그 꽃송이를 살며시 안아 보세요." "이 꽃이 살아 움직여요!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걸요. 무엇인가 전기 같은 게 내 팔을 따라 전해 오고 있어요." "전기가 아니에요. 일종의 생명체의 에너지이지요. 지금 당신이 전기처럼 느끼는 그 에너지가 바로 생기이며, 특별히 그 꽃이 당신을 위해 자신의 생기를 조금 나누어 주는 겁니다. 아직도 이 꽃의 창조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지요. 그 화분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세요. 그리고선 그 꽃의 줄기를 두 손으로 살며시 붙들어 주시겠어요? 이제 줄기를 살짝 흔들어 보세요. 꽃잎에 맺힌 물방울을 떨쳐버리려는 듯 조심스럽게……맞아요, 그런 식으로." 로저가 시키는 대로 조심스럽게 따라서 움직이자 마치 조그만 은방울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처럼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굉장히 놀랍고 즐거운 듯 로저는 몇 번씩이나 그와 같은 실험을 반복해 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약간 흔들기만 하면 모든 꽃들에게서 이처럼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까?" "물론이지요. 꽃에서만이 아니고 다른 생물에게서도 마찬가지랍니다. 옐르 들어 물에서도 가능합니다. 물을 한번 첨벙 때려 보세요.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올 겁니다. 그러나 이 튜립에서 생기가 부여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요. 자, 로저! 여기 와서 견습생이 되어 보겠어요?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면 오세요. 우리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지금은 몬시노르와 루스가 당신을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고 있으니 마음놓고 충분히 즐기세요. 시간은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더 자세히 배우고 관찰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몬시노르?"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 당장부터 견습생으로 입문하여 배우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당장이란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우리와 함께 영계 여행을 계속하면서 좀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운 뒤 이곳에 오면 이 선생님께서 언제든지 당신을 받아 문하에 두고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원예사 선생님의 시간을 절약해 드리는 의미에서라도 그동안 무엇이든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내가 대신 설명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로저가 원하는 것은 모두가 만족해 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고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어둠의 땅에서 부활한 사람 로저가 입을 열었다. "몬시노르, 언젠가 저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이곳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보다 고통을 받으며 지내고 있는 곳들이 있다고 하신 말씀 말입니다." "그런 곳들이 있지요." "어디에 있습니까?" "정확한 장소를 말하라고 한다면 쉬운 일이 아니군요. 당신도 아마 느꼈겠지만 동서남북 사방을 따져서 어떤 장소를 찾는다는 게 이곳에서는 전혀 무의미한 짓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물었던 말이 기억나겠지요. 이곳 영계에서도 길을 잃는 수가 있느냐고. 그것과 같은 뜻으로 보아야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곳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그러한 곳으로 안내할 수 있어요. 그런데 로저, 정말로 그런 곳이 보고 싶은가요?" 로저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서 있다가 말을 이었다. "두 분 선생님들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느껴지는군요." "로저가 우리의 제의를 따를 용의가 있다면 좋아요. 루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으리라 믿어 하는 얘기지만, 당분간은 당신이 그런 어둠의 지역에 가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몬시노르가 하신 말씀이 너무나도 사려깊은 말씀이세요. 로저, 그런 곳에 아직은 가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로저도 아시다시피 당신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떠한 일도 할 용의가 있어요.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와 같은 어둠의 지역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지가 않아요. 후일 언젠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우리들의 말을 믿으세요. 어느 누구에게 물어 봐도 우리의 말이 옳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일단 그런 곳을 가보고 나면 기분이 여간 나빠지는 게 아니거든요. 지상세계에서도 그런 경험을 해봤지 않아요? 보고 나면 후회할 걸 빤히 알면서도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부득부득 어떤 사물이나 현장을 보고 싶어 했던 심리, 결국은 보고 나면 불유쾌한 첫인상이 남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와 똑같은 입장이 지금 당신이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로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말해 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어둠의 지역이란 지상세계에서 생각하는 그런 신학적인 용어의 지옥ㅡ한번 저주받아 떨어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ㅡ이 아닙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설사 지금은 그런 소름끼치는 곳에 떨어져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그들이 마음을 바로 잡고 허물을 벗을 수 있다면 그런 영역을 벗어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있는 이곳에서 좀더 아름답고 숭고한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열심히 우리의 생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둠의 지역에 떨어져 살고 있는 그들도 그들의 진보를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계의 천법은 어디서나 동등하게 적용되니까요. 내가 한 얘기를 실증해 줄 수 있는 분이 여기 살아계십니다. 로저, 저기 큰 나무 밑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오두막집이 보이지요? 이건 무슨 비밀을 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저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 분도 한 때는 처참한 어둠의 지역과 비슷한 급의 고통스럽고 참담한 지역에서 살다가 그곳을 빠져나와 지금은 이렇게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분이 벌써 우리를 보았군요." 그 오두막집의 주인은 정원에 앉아 있다가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로저를 저분에게 소개해 줄까요. 몬시노르?" 루스가 말했다. "로저가 저 사람 얘기를 듣고 싶어 한다면 아주 좋은 일이겠지요. 너무 지루하다거나 무서운 그런 종류의 얘기는 아닐 테니까요. 로저,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어요. 루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 사람은 그 참담한 세계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도 대충 짐작은 하겠지만 적어도 저분에게는 루스가 천사장 다음가는 사람쯤으로나 위대한 것입니다." 루스가 유쾌한 듯 웃었다. 로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몬시노르의 말씀이 전적으로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훌륭한 안내자이며 심판관인 것 같아요. 이처럼 짧은 기간이지만 두 분께서는 저를 위해 너무나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저도 이제는 저 오두막집의 주인이 루스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오, 그렇지가 않아요. 로저! 당신을 위해서 우리가 특별히 한 일은 없어요. 그러나 루스가 친창을 받고 무안해 하는 정도는 눈감아 주어야겠지요. 로저 당신이 저 오두막집 주인의 얘기를 잠자코 들어만 주어도 그를 위해 큰 일을 해 준 셈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남으로부터 받아온 도움에 대해 갚지도 못하고 큰 빚만 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는 자기가 재생의 길을 개척해 나온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 주는 것만으로도 조그마하나마 자기의 고마운 마음을 알리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축복해 주세요. 그도 이제는 맑은 정신을 갖고 살아가고 있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답니다. 로저는 최선을 다하는 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자학하는 그를 보게 될 거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루스가 놀랜 듯 말했다. "로저, 무슨 실례의 말씀을……. 만일 몬시노르가 그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그 말이 책을 통해 알려진다면 지상세계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런 건 다 부질없는 걱정들이요." 내가 대답했다. "여하튼 로저, 내가 한 얘기 때문에 저 오두막집 주인이 고리타분한 얘기나 늘어놓는 노인이라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실은 전혀 반대이니까요. 저 분의 흥미있는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무엇을 물어 볼 필요도 없이 의문난 점들에 대한 모든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만일 그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여러분께서 힘들게 설명해 주시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로저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대답 한 번 멋지게 했어요. 로저! 몬시노르에게도 그런 대답이 필요해요." "로저가 '여러분'이라고 한 것은 당신을 두고 한 말이라고 믿는데요, 루스." 내가 응수했다. 이렇게 서로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우리는 벌써 그 오두막집 근처까지 당도했는데 주인도 우리를 맞기 위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크게 기쁜 듯 소리쳤다. "루스ㅡ, 몬시노르!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두 분을 함께 뵌 지가 정말 오래된 것 같습니다. 오늘 동행하신 젊은 친구분은 누구신지, 아직 보지 못했던 분 같습니다만?" 우리는 로저를 그에게 소개해 주었고, 더불어 우리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그를 찾아오지 않았던 것은 로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탐방시켜 주느라고 바빴기 때문임을 설명해 주었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루스가 물었다. "안녕하다 마다요. 내 일생에 이처럼 기분 좋게 살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기분이 좋게 느껴질 날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 점이라면 저도 굉장히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로저도 덩달아 물었다. "그렇고 말고요. 젊은 친구! 젊은이의 궁금해 하는 점이 어쩌면 그렇게 나와 같단 말이요. 자, 저 현명한 선생님의 고견을 들어볼까요?" 루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한 가지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기분보다 더 좋은 기분은 못 느낄 것 같아요. 아마 비교를 해서 우열을 가릴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게 틀림없어요. 옛날에 내가 느꼈던 기분과 비교를 해보면 지금 나의 기분은 완전하다고나 할까요. 낙원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입니다. 만일 나에게 그러한 낙원이 있었는데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하여튼 모두들 안으로 드십시오. 우리의 새로운 친구에게 영계의 오두막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 주고 싶습니다." 이 조그만 집은 외부가 그렇듯 내부도 아주 단정하게 꾸며져 있었다. 집 안의 모든 집기와 가구도 정결하고 아름답게 배열해 놓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과 만족을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가 정원으로부터 들어간 첫 방중에는 고풍을 띠면서도 훌륭하게 짜여진 가구들이 놓여져 있었다. 가구는 윤이 나게 잘 손질되어 있어 여기저기 놓여 있는 아름다운 꽃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래층과 이층에 있는 다른 방들도 비슷하게 꾸며져 있어서 집 전체에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정성들인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로저, 루스나 몬시노르 에드윈께서 설명해 주겠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집은 내가 처음 영계에 왔을 때 머무르던 곳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납니다. 전혀 숨김 없이 얘기할 수 있어요. 에드윈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서 함께 못 오신 건가요?" 루스가 대답했다. "그 분은 요즘 너무 바쁘십니다. 우리도 잠깐씩 보는 것 외에는 뵐 수 없을 정도예요. 로저가 우리에게 배당된 케이스지요. 그런데 로저, 우리가 당신을 동반하여 여기저기 안내하는 일을 '케이스'라고 불러도 괜찮겠지요." 로저가 루스를 바라보고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께서 당신과 몬시노르를 위해서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당신들이 이제는 로저를 위해 해주고 있군요. 두 분께서 처음으로 저를 방문했던 일을 기억하세요? 물론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나는 그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인상 깊은 일이었다면 로저에게 들려 주시면 어떨지요?" 그 사람은 잠시 추억을 더듬는 듯했다. "이야기를 하지요, 하고 말고요." "그러나 로저가 먼저 들어야 할 얘기는 내가 어떻게 해서 그런 처참한 곳으로 떨어지게 되었던가 하는 점입니다. 로저, 나는 지상세계에 사는 동안 크게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나에게는 사업이 인생의 전부였으며, 다른 것에는 전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업을 했으며, 사업이 번창하는 동안 그 무엇도 나에게는 두려을 게 없었습니다. 따라서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자비한 사람이 되었고 수완가가 되어 사업에 성공한 것이지요. 가정생활에서도 나 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지요. 집안 식구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내가 명령한 대로 그저 따라야 했었습니다. 그런반면 나는 언제나 자선 단체에 큰 헌금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는데, 그런 헌금마저도 나에 대한 신용이나 명성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때에만 했던 것입니다. 무기명으로 아무도 모르게 헌금을 한다는 게 나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으니까요. 항상 계산을 하며 산 셈이지요. 만일 어느 단체나 기관에 기부금을 내려고 계획할 때는 언제나 내 이름이 크게 보도되어야만 내주곤 했던 것입니다. 물론 내가 속한 교회도 많이 도왔지요. 내가 돈을 대서 교회를 증축하기까지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일마저도 내가 헌금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주위 사람들에게 충분히 과시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소유하고 살던 집마저 지상세계에서 내 신분과 지위에 맞추어 호화롭게 지은 집이었습니다. 로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내 자신이 절대자나 된 것처럼 으시대고 살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영계에 들어와 보고서야 위선과 독선적인 생을 살아온 내가 얼마나 비열하고 부끄러운 자신이었던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병에 걸려 지상세계를 하직해야 했을 때 나는 중년을 갓넘은 나이였지요. 내가 죽자 장엄하고 화려한 전통적인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인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진심으로 나의 죽음에 대해 애석해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사람들은 내가 죽어 떠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악마가 돌아와서 자기 부하를 데려갔다고 수근거리기까지 했고, 나야말로 지옥이 실존하는 것을 증명해 주는 좋은 증거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떠남으로 말미암아 지상세계가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와 같은 지워버릴 수 없는 추억을 심어 놓고 나는 지상세계를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만의 화려한 지상생활을 떠난 후 내가 떨어진 곳이 어디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수많은 나날들을 비통과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어디에서 지냈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음에서 깨어나 보니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더럽고 비참한 곳에 와 있었습니다. 로저, 지금이라도 당신이 원한다면 그곳을 보여 줄 수 있어요. 소위 나의 진나생활의 거처라는 곳은 가축 우리 같은 곳으로 아주 작고 협소했지만 내가 지상세계에서 크게 떠벌리고 살던 그런 모습을 재현한 듯한 모습의 장소였습니다. 그 집이라는 곳의 주위에는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었고 황량하고 몸서리쳐지는 곳이었습니다. 내부도 외부와 마찬가지로 전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불결했습니다. 처음 그와 같은 정경을 대하면 혹자는 내가 빈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말이 맞기도 해요. '영혼의 빈곤', 바로 그것입니다. 지상세계에서 사는 동안 남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는 손톱 만큼도 없었고 전생애를 줄곧 나만을 위해 살았으니 말입니다. 어둡고 움침한 영계의 밑창에서 내가 입고 있었던 옷들은 혐오감이 들 정도로 형편없는 누더기들이었고, 그 지하 감옥 같은 소굴에서 내 자신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처절하게 절규하기도 하고 비열한 자신을 학대하며 살고 있었씁니다. 나는 그곳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영영 헤어날 수 없는 자신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면 죽음만이 날린 황폐한 땅뿐이요, 그나마도 안개 같은 것이 가려 제대로 볼 수도 없었습니다. 영계에 이곳처럼 아름다운 경치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어쩔줄 몰라 하며 나날을 몸부림을 치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에드윈께서 나를 발견해 주는 행운을 맞게 된 것입니다. 어느날 우연히 그분께서 나를 찾아오셨어요. 그런데 나는 그분을 내가 지상세계에서 내 수하의 사람들을 대하듯 몸에 밴 거만한 태도로 맞았던 것입니다. 알고 보면 내가 그런 당치도 않은 식으로 남을 대한 것이 에드윈이 마지막이 된 셈이입니다만. 로저, 당신도 에드윈을 만나 보았어요? 아주 조용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니셨지만 강직한 분이랍니다. 그는 그와 같은 나의 어처구니 없는 태도를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나는 나대로 절대로 그에게 굽힐 용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당시 그러한 처절한 입장에 떨어지게 된 사실에 대해 누군가 원망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처절한 자책감 때문에 그저 분노에 휘말려 있던 상태였지요. 그곳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결과에 대해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아도 원망할 사람은 내 자신뿐이란 것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푸라기도 붙잡아야 했던 나로서는 드디어 내가 그런 비참한 지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데 대한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상대를 찾게 된 걸로 믿게 되었지요. 일부나마 그 책임은 내가 몸담고 다녔던 그 교회가 나를 올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데 있다고 공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으며, 또 헌금을 할 때마다 목사로부터 사후에 가게 될 영계는 좋은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자신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둥으로 믿고 살아온 내가 이처럼 비참한 상황으로 떨어져 내가 지은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그 교회가 나를 똑바로 가르치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믿게 되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내가 어떤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어요. 다시 말해서 나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죽은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된거죠. 그러나 그런 단순한 나의 판단은 그곳 생활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전혀 나를 돕지 못했어요. 에드윈 씨가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은 아마도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심사를 생각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띄웠던 모양입니다. 동기야 어찌 되었건 나는 내가 머무르고 있는 헛간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분을 발견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에드윈이었습니다. 그 역사적인 첫 방문 후에도 그 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들을 나를 찾아오셨지만 언제나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조금도 굼혀들지 않았고 무례한 언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에드윈은 전혀 동요되거나 기분나빠 하는 기색도 없이 언제나 나보다 더 친절한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터무니 없이 불평을 이아기하고 날뛰게 되면 그는 조용히 일어나 그곳을 떠나고는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두 사람의 친구를 함께 데리고 나를 찾아왔습니다. 사실은 두 친구 외에도 또 한 사람 같이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도 언젠가 이 근처에서 다시 뵌 적이 있지요. 그런데 그 두 분 친구라는 분들이 바로 당신을 돌봐주시는 몬시노르와 루스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분들이 에드윈을 따라왔던 바로 그날이 나에게는 지상세계에서 잘못된 일들에 대해 인정하고 그 결과를 겸허하게 수용하게 되는 전환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에드윈이 나와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이 두 분은 방 뒤쪽에 정중한 자세로 서 있었씁니다. 나는 분노가 약간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무엇인가 한 줄기 빛이 어렴풋이 나타나는 가 했는데 자꾸만 루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루스를 통해서 나는 지상세계에 살고 있는 내 딸ㅡ내가 그곳에 살 때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대해 주었지만 그래도 많은 애정을 준 딸아이였습니다ㅡ을 생각하기 된 것이지요. 외모로 보아서는 내 딸과 루스 사이에 전혀 닮은 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그 둘의 품성이 비슷한 것 같았어요. 어쨌든 나는 이미 무언가 달라져 가는 내 자신을 느끼기 시작했지요. 그 외에 수많은 날들을 에드윈이 나에게 얘기해 준 그러한 내용들이 또 크게 작용했지요. 그들이 떠난 후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고독감에 휩싸이게 되었고 처절한 비애 속에 허덕여야 했습니다. 얼마나 고독하고 슬펐던지 나는 에드윈에게 당장 와 달라고 소리치며 울어댔습니다. 허구헌날 그가 찾아왔을 때마다 모욕을 주다시피 하여 쫓아버렸던 내가 이제는 무언가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처럼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울게 되자 지체없이 나의 처소를 다시 찾아오시는 에드윈을 봤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래고 기뻐했는지 아마 로저는 상상조차 못할 것입니다. 문간까지 달려나가 그를 맞이했으며, 그는 즉시 내가 변모하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남에게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제대로 안 해 보고 살아왔던 내가 에드윈이 다시 나를 찾아오는 것을 보자 지체하지 않고 나를 위해 와준데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그분에게 한 모든 무례한 언동에 대해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그와 같은 말들을 재치있게 미소로 받아넘기고 내가 처음 영계에 도착했을 때의 그 터무니없이 이기주의적이고 망나니 같은 언행으로부터 무엇인가 크게 변모해 가고 있음을 느끼시고 나의 영혼을 자애로운 미소로 맞아주었어요. 또한 변모하기 시작한 나를 대하는 기쁜 모습이 그의 얼굴에 역락했습니다. 에드윈은 즉시 자리에 앉아서 내가 어떻게 해야 그와 같은 참담한 곳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충고를 따라 행동지침을 결정했지요. 에드윈이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기로 했고, 나는 그의 지시대로 그곳에 당분간 더 머무르면서 지난 과거를 회개하는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지 그가 당장 달려오기로 그렇게 결정을 본 것입니다. 그가 떠난 후 나는 다시 한번 내가 거처하던 숙소를 둘러봤는데 웬일인지 전에 없이 더 밝고 아늑하며 깨끗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냄새도 덜 났고 내가 입고 있었던 그 누더기조차도 더 깨끗해 보여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 것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뼈를 깎는 참회의 생활은 시작되었고, 모든 고통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내하면서 죄악의 사슬을 끊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이제 다 지나간 나의 그 뼈저린 고생담만 늘어놓아 로저를 싫증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척 힘든 생활이었지요. 그러나 나에게는 언제나 잊지 않고 찾아주는 훌륭한 분들이 있었어요. 그분들이 누구였는지, 적어도 그들 중 두 사람은 이 방안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까요. 로저, 당신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나'는 그 당시에 비하면 밤이 낮으로 변한 만큼이나 달라져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기쁘게 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요? 에드윈이 나를 위해 해주었던 것처럼 나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도와 주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그런 역경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 나왔기 때문에 그들을 올바로 설득시키는 데 유리한 점이 없지 않아요." 그는 이 대목에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한 가지 위로가 되는 점은 그들이 내가 과거에 지상세계에서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거의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지금도 나의 과거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면 나더러 스크루지(Scrooge)보다 더 못한 자라고 할 테니까요. 스크루지 영감은 적어도 죽기 전에 개과천선하여 선량한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회개를 못 하고 떠나 왔었으니까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만 그들은 또 나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여기에서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훗날 그들이 이 모든 사실을 듣고 나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세상을 현혹시키는 철학자들 "로저,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영계의 여러 층의 급(級)이 지상세계의 계층사회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물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사람이 단 하나 뿐이라고야 할 수 없겠지만 내가 아는 한 사람은 지금도 지상세계에 살고 있는데 주위의 친구들이나 사귀는 사람들로부터 철학자라고 인정을 받고 살고 있죠.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소위 철학자라는 친구는 아는 것은 조금 뿐인데도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그의 친구들이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적당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모두들 그가 완전한 성인(聖人)이나 된 것처럼 우러러 보게 되고 그가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숨을 죽이곤 합니다. 그는 지상세계에서 전개되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독단적인 선언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조만간 지상세계와는 관계가 없는 문지점들이 대두되고 누군가가 그에게 묻게 되겠지요. 과연 그가 영계의 실존을 믿고 있으며, 또 믿는다면 과연 영계는 어떤 곳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그에게는 수난이 시작되는 순간이 될 겁니다. 그 위대한 철학자야말로 어떤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데도ㅡ그 사실은 그 사람만이 아니고 따지고 보면 얼토당토 않은 논리를 전개하면서 철학자인 척 행세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ㅡ전혀 낯도 붉히지 않고 자기는 읽어 본 적도 없고 그 언젠가 누구에게서 슬쩍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책들이나 문헌을 이용하여 얘기하지요. 그의 설명들 중 가장 엉터리 같은 대답의 하나가 내가 방금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요. 즉 영계는 지상세계의 단순한 모조품과 같고 영계보다는 지상세계가 훨씬 더 차원이 높은 곳이라는 형편없는 그의 생각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논리들 말입니다. 또 한 가지 그가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말은 종종 이곳 영계로부터 지상세계에 내려 보내지는 영계의 가르침에 대한 진실과 정확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로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그 성경의 가르침을 당신도 기억하고 있겠지요?" "기억하고 말고요. 교회에 다닐 때 주일날이면 성경을 바탕으로 한 설교를 들은 적이 많아요." 로저와 루스가 함께 웃었다. 우리가 주고받는 농담섞인 대화가 고상하고 재치가 번득이는 그런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런 목적을 두고 주고받은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지상세계의 생활을 회상해 보면 천지간이나 이웃간에는 서로들 적당한 농담을 한다. 예를 들면 '그럴 겁니다. 그래요……'하며 대화를 한다. 마찬가지로 이곳 영계에서도 서로 친근한 사이의 생활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우리는 적당히 농담을 하면서 살고 있다. 사실상 농담은 우리들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기분이 좋아서 웃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상대적으로 기쁨을 느끼고 산다. 다시 말하자면 지상세계의 사람들이야 뭐라고 하건 우리도 영인체 사람인 것이다. 내가 지금 얘기하는 내용들이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찮은 것들로 받아들여 질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적어도 지상세계에서 그 유명하다는 철학자들이 영계나 영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 대해서 연구해 거창하게 발표하는 내용보다도 이곳은 훨씬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곳이라고. 그처럼 알지도 못하면서 속단하고 떠들고 다니던 그 무리들이 일단 지상세계를 떠나 이곳에 살러 오게 되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자, 로저! 지상세계에서 그처럼 형제간의 사랑을 강조하는 설교를 들을 때면 의심할 여지없이 만인을 위한 진리의 가르침이라고 믿었겠지요?" "그렇고 말고요." "당신의 믿음이 맞았어요. 그와 같은 가르침의 근본은 진리를 터특한 분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소위 그 철학자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등의 진리에 대해서는 두말할 여지없이 찬성했을 겁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이 그런 중요한 가르침을 쉬지 말고 계속해서 가르쳐야지요. 지상세계가 존속하는 한 그 귀한 가르침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 같은 고귀한 영계의 가르침에 대한, 소위 그 유명하다는 철학적인 비평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전혀 짐작도 못하겠는데요?" "기만적인 종교 선전이라는 것입니다. 멋진 표현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로저? 그와 같은 진리가 전파되는 데는 위대한 어떤 분의 뜻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강단에 서서 이웃사랑을 설파하는 분은 진심으로 그리고 철저한 믿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가르침이 기만적인 종교선전으로 둔갑을 한단 말입니다." "로저, 몬시노르가 그 문제에 대해서 다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은 우리 모두도 동감이랍니다. 생각해 보세요. 조만간 그 유명하다는 철학자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들 중 누군가가 그들을 맡아서 그 굳을 대로 굳어버린 그들의 사고를 바로잡아 주기 위한 따분하고 힘든 일을 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루스가 계속해서 설명했다. "로저, 그러나 문제는 그 잘났다는 철학자들로만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의 그와 같은 부정적이고 악질적인 견해가 멍청한 제자들에 의해 읽히고 받아들여져서 그것이 심오한 진리나 되는 양 믿게 되고 누군가가 그들의 잘못을 잡아 주지 않는 한 마침내는 그들도 그들의 선생처럼 독선자가 되어 영계에 들어오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지상계에서 저질러진 과오가 이곳 영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군요." "정확한 판단입니다. 로저, 당신 같은 경우는 루스와 나에게는 최상의 휴가를 즐기게 해준 케이스가 된 셈이지요. 가장 골치 아픈 케이스는 영계에 들어오는 당사자들이 이곳 영계에 대해 전혀 사전 지식이 없을 때랍니다. 더구나 그들 나름대로 얼토당토 않은 엉터리 관념에 사로잡혀 살다가 온 자들을 대할려면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러나 로저, 당신의 경우는 물론 당신도 영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들어왔지만 다행히도 당신은 그 엉터리 관념의 노예가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당신의 인격에 대한 비판을 가하자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곳에 들어올 당시 당신이 가지고 온 귀한 것은 물들지 않은 깨끗한 마음이었고 세상의 그 쓰레기 같은 관념이나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티없이 맑은 모습이었습니다. 소위 철학자라고 자처하는 그들의 주장 중 가장 어처구니 없고 말문이 막히는 것은, 지상세계와 교통하는 모든 영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영어나 히브리어만 사용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류의 언어는 전혀 허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자기 나라 말만을 강요하게 된다고 주장하겠네요?" "맞아요, 예를 들면 불란서 사람들은 전영계가 불어만을 사용한다고 주장하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그들과 교통하는 모든 영인들은 불어만을 쓰고 있으니까요. 그와 똑같은 주장과 현상이 전지상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가정하에서 소위 철학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극도로 회의적인 그런 철학자들이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각 나라들로부터 모였다고 합시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물론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되겠지요. 각자가 애국심에 입각하여 자기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될 것이고, 급기야는 서로들 영계는 자기 나라 언어를 통해서만 교통 한다고 선포하고 나설 것입니다. 마침내는 서로들 공통적이고 유사한 현상들만을 중심으로 토의하는 한도 내에서 충돌을 피하게 될 것이지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경로를 밟겠지요?" "로저, 당신 말이 맞아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을 놓고도 소위 그 현자(賢者)라는 무리들에게는 확실히 보이지가 않는 거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은 영계의 영어권(英語圈)에 속하나요?" "눈으로 보이는 상황만을 생각할 때 당신이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어요?" "이곳과 지상세계와의 상이(相異)한 내용을 놓고 얘기하자면, 가장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전원의 풍경이 그 옛날 지상세계의 영국의 풍경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렇겠지요. 뿐만 아니라 집 모양들도 유사하지요. 우리가 아직도 여기저기 두루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당신은 높은 언덕과 깊은 산들을 볼 시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도 그런 산과 언덕들이 있어요. 사람들에 관한 얘기라면……, 지금까지 누구를 만나 봤지요?" "아시다시피 루스와 몬시노르 당신, 그리고 에드윈은 직접 만나 보지는 않았어도 당신에게서 많이 들어 알고 있고요." "그 외에도 래이디언트 윙은 미국 인디언이고, 오마는 칼데아 사람이며, 그의 친구되는 사람은 애굽인이랍니다. 그 세 사람만 해도 국제적인 규모의 모임이지요. 그런데 그 오두막집의 사나이는 빠뜨렸네요. 물론 그도 또다른 하나의 영국인이기는 합니다만 하여간 내가 묻는 점은, 방금 우리가 들먹인 나라들 중 어느 나라권에 당신이 속하게 될 것 같아요? 물론 지상세계를 떠난 다음 말입니다." "왜 이제까지 저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물론 나야 영국권에 속하게 되겠지요?" "모국어인 영어 외에 다른 나라 말을 할 수 있는가요?" "전혀요. 학교 다닐 때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배운 라틴어를 약간 알 뿐입니다." "만일 당신이 영계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중국인들만이 살고 있는 곳에 누워 있는 당신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봐요. 당황하고 어색한 입장이었겠지요?" "아마도 기절초풍이라도 했을 겁니다." "하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중국인들은 언제나 명랑하고 친절하며 사려가 깊어서 누구든지 잘 도와 주는 사람들인것요. 잘 생각해 봐요, 로저, 당신이 지금 한 말은 그 잘났다는 철학자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과 마찬가지이니까요. 영계가 어떻게 영어권(英語圈)일 수만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방금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느끼고 있지요. 루스와 나는 여러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한결같이 그들은 자기들의 모국어인 영어를 듣게 될 때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란서인들은 불어를, 중국인들은 중국어를 듣고 말할 수 있게 될 때 기뻐하기 마련입니다. 알고 있겠지만, 생각을 통한 의사소통을 하는 데는 언어상의 장벽을 벌써 초월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국적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처음으로 영계에서 깨어날 때면 모두들 발성기관을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들도 지금까지 쓰고 있고요. 이 모든 것들이 다 자연적인 현상이니까요. 당신이 그 방의 열려 있는 창가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무슨 인상을 받았었는지 기억이 나세요?" "한 가지 확실했던 것은 내가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는 점입니다. 그 방은 내가 평소에 낯익은 방의 모습이었고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전경마저도 전혀 낯설어 보이지가 않았으니까요." "그렇겠지요. 그게 정상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현상과 일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근거와 원칙이 있지요. 그 현명하다는 지상세계의 학자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천리가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소리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나라 사람들도 이곳 영계의 어딘가에서 따로 모여 살고 있겠군요? 뭐, 물어 보나마나 뻔한 얘기 같기는 합니다만……." "로저, 그렇고말고요. 지상세계의 모든 인간들이 여기서도 어딘가에 나름대로 함께 정착하여 살고 있습니다. 같은 언어와 풍속을 지닌 사람들끼리 자연히 함께 모여 살게 되기 마련이고, 또 그렇게 하면 안 될 이유도 없지요. 서로 언어와 성격이 다른 국민들을 함께 섞어서 살도록 강제로 배치한다면 좋은 결과가 초래괼 것 같습니까? 적어도 처음 얼마 동안은 현명한 정책이 못됩니다. 전원풍경도 그렇지요. 누구든 자기가 살다 온 시골 풍경 같은 것을 선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필요조건들이 이곳에서는 원하는 대로 충족되는 것이지요. 또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요." "오마와 그의 친구 관계는 어떻게 된 경우입니까?" "그들의 경우는 보다 높은 차원의 관계에 있지요. 그들이 살고 있는 급의 영계는 국가에 대한 관념이 전혀 필요없는 곳이지요. 왜냐하면 그 급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벌써 국가나 언어들을 초월해서 생활하고 있는 분들이니까요. 래이디언트 윙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분이고요. 그 급에서는 그도 국적을 초월한 상태에서 지내고 있지만 인종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는 인디안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갑니까?" "글쎄, 잘 모르겠군요." "당신 잘못이 아니지요. 알고 보면 내 잘못입니다.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점은, 래이디언트 윙은 인디안들의 특유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ㅡ오마도 마찬가지고ㅡ그가 지상계에서 어느 나라 국민이었던가 하는 점은 전혀 개의치 않고 살고 있다는 뜻이지요. 즉 그들에게는 국적이 없다고들 볼 수 있고, 또 모든 나라의 국적을 전부 소유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위 지상세계의 그 철학적인 천재들이 영계의 실제에 대해 제기하는 이론(理論)을 일일이 설명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오마와 그의 친구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러한 사실도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론(理論) 중의 하나에 속합니다. 오마와 그의 친구가 영어를 구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영어가 아니고 다른 나라 말이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입니다." "그가 원한다면 다른 나라의 언어들을 못할 이유야 없겠지요." "그래요. 그가 원한다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저, 또다른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가 맡은 일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언제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사실인즉 오마는 지상세계에 친구들이 많이 있지요. 그들과 교통(交通)하는 데는 영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지요. 그런데다 그의 친구들도 갈데아어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오마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상세계의 친구들이 갈데아어를 배울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현실이었고, 따라서 오마가 이처럼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 영어를 배우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전혀 어려움을 겪을 필요도 없이 영어를 익힌 것입니다. 로저, 기억력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아세요? 무엇이나 한 번 듣거나 보거나 하면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지상세계의 친구들이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 오마는 영어에 숙달하게 되었지요. 기억나겠지만 래이디언트 윙도 그가 지상세계를 상대로 교통하는 일을 위해서 영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마도 그의 친구들에게 그으 의사를 정확히 전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충분한 지식을 갖고 설명할 수 있도록 영어를 깊이 파고들어 정복한 것입니다. 그런 점은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지요. 로저! 당신도 어떤 언어든지 배우고 싶다면ㅡ대화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정도까지든지 아니면 문학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든지ㅡ그 어느 누구도 못 하게 막을 자가 없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하겠다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나라 말을 배우거나 하지 않아요. 전혀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지요. 로저, 이곳에서는 급이 높은 곳일수록 국적이나 언어 등이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러나 당신이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지상세계의 특정언어를 습득해야 할 경우에는 다르지만요." "이곳에서는 그럼 어떻게 다른 나라를 찾아가 볼 수 있나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두 다리 자가용'을 사용하는 것도 그 중의 한 가지 방법이겠지요." "흐흐……, 몬시노르, 농담마세요. 당신이 그와 같은 말을 쓰면서 어떻게 로저의 말씨를 바로잡아 준다고 할 수 있겠어요?" 루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로저, 당신과 얘기하다가 꾸중만 들었군요. 내가 지상세계 친구들과 교통할 때는 사용하는 어휘나 내용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답니다. 자칫 잘못하면 종교의회 같은 곳에서 하는 연설처럼 듣는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어쨋거나 고운말을 쓰지 않으면 품행까지 의심을 받게 되는 게 영계의 원칙인 것은 틀림이 없어요. 여기서는 다른 나라로 여행하는 게 아주 쉽지요. 좀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다른 나라가 아니라 다른 민족들이 함께 모여서 사는 곳이 되겠군요. 그런데 당신은 주로 시골 산촌 같은 국경지방을 염두해 두고하는 소리 아니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이곳에는 그와 같은 국경지방이 없답니다. 누구나 가고 오는 것이 자유롭고 어디를 가든지 그곳 주민들로부터 언제라도 환영을 받게 됩니다. 사실 이곳저곳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느라면 집의 구조나 전원풍경에서 약간 차이를 느낄런지 모르지만 그 외에는 어디를 가나 차이가 없어요. 그러나 이곳에도 단 한 가지 장벽이 있지요.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급끼리는 엄연한 경계가 있어요. 설명을 해보자면 빛의 강약(强弱)에 의해 구별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만일 그러한 구분이 없다면 아주 불쾌한 요인 등이 한 급에서 그보다 높은 상위급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분수에 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처럼 싸여져 운영되는 것은 모두 천리원칙에 의한 현상이며, 모든 다른 분야의 자연법칙과 마찬가지로 전혀 부작용이나 충돌이 없이 잘 운행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이 훌륭한 것입니다. 의견 충돌이 있을 수 없고 권리 주장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리원칙에 의해 운행되는 이 세계에 그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지상세계에서도 지금까지 그 누구 하나 자연법칙의 하나인 중력(重力)현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설사 누군가 시도를 한다고 해도 일방적인 항의뿐이죠. 결과는 너무나 뻔한 사실 아닙니까? 우리의 생활반경인 이 급들의 영계에 관한 한 이곳은 마치 모든 정당성이 총집합한 국제 도시 같은 곳이며, 태양 아래 실존하는 모든 국민들을 다 만나 볼 수도 있고 끊임없이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아니면 이곳에 정착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은 납득이 가지만 어떻게 머무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실제로 증명을 해보여 주는 것밖에 없겠지요. 사실은 당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현실을 한번 보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제가요?" "그럼요, 우리 친구인 래이디언트 윙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이 급에 속하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까?" "아니고 말고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인데요!" "몬시노르가 당신을 일부러 애태우게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로저, 더이상 묻지 말아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다 알고 있어요. 자, 나를 따라서 다른 곳에 가 봅시다." 무엇인지 이해가 안 가는 듯한 표정을 짓는 로저를 데리고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다른 곳을 방문하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영계의 악성, 숲속의 음악가 "자, 몬시노르! 아까 말씀하시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다른 급(級)에 와서 정착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속시원하게 설명을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럼요, 로저, 단단히 붙들고 물어 보세요?" "설명해 주다마다요. 젊은 친구, 무슨 불가사의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뭐 내가 한 얘기는 다른 뜻에서 한 얘기가 아니고 이곳 영계의 어떤 급에서 살던 사람들이 그들의 영급이 밝아지고 높아짐에 따라 높은 급으로 올라가서 살제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지금도 이곳에 머무르고 있나요?" "로저,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에게는 아주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지금도 이곳에 거주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이유 즉 누군가의 곁을 떠날 수가 없어서 남아 있기도 하지요. 다시 말해서 서로 뗄래야 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급에 속하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 봐요. 그런 경우 더 높은 급에 속한 사람이 보다 낮은 급에 내려와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기다리며 지내다가 그 낮은 급에 속한 사람의 영급(靈級)이 발전하여 영전하게 되었을 때 함께 데리고 올라가서 헤어질 필요없이 함께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또 다른 경우는, 사실은 이 경우가 보다 많은 케이스기는 합니다만 그들이 맡아 수행하고 있는 일에 너무 열중하다 보니 자기가 속한 급보다 낮은 급의 영계라 할지라도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우리들의 친구 래이디언트 윙도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와 함께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들은 지금도 지상세계의 뭇 창생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고, 따라서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속한 상급 영계의 집에도 자주 왕래하곤 합니다. 두 군데 다 소속된 셈이지요. 이중세계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요." "조금 지나친 표현이 되긴 하겠지만요." 루스가 말했다. "지상세계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중생활을 하고 있지요. 즉 깨어 있는 시간은 지상세계에 가서 보내고 잠들어 있는 시간은 영계엥 ㅘ서 지내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통해서 친지나 가족들을 만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그 문제는 또다른 분야에 속하는 얘기입니다만." 우리가 이렇게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벌써 상당한 거리를 걸어 어느새 소나무가 울창하고 아름답게 우거진 숲에 다달았다. 숲길을 걸어 한참 들어가 보니 앞이 확 터진 넓은 곳이 나타났고 그 중앙에는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아주 넓게 자리를 잡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이 한 채 있었다. 주위에는 수많은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피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나 전혀 의식적으로 정원을 꾸미기 위해 단장해 놓은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질서한 모양은 아니었고 어딘지 모르게 원시적인 천연 그대로의 맛이 풍기고 있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안한 안식처처럼 느끼게 해주었지만 다른 곳에 비해 특별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복잡하다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고 원하는 대로 휴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이곳 영계의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루스와 나는 벌써 여러 번 이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로저에게는 첫 방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집주인이 벌써 문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몬시노르, 그리고 루스, 아주 좋은 때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아니 적어도 루스에게만이라도 보여주고 싶으느 것이 있거든요." 우리는 로저를 그에게 간단히 소개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견학해 온 과정과 목적을 더불어 설명해 주었다. 집주인과 로저가 서로 다정히 인사를 나누었고, 이어 우리는 그의 안내로 집안으로 들어 갔다. 내가 로저의 귀에 대고 그 사람에 대해 간단하게 알려 주었다. "저 분은 '피터 일리취'라고 불러요. 무엇인가 우리를 놀라게 해줄 것이 있을 겁니다." 그가 우리들을 안내해 들어간 곳은 넓은 방이었는데, 거실과 작업실을 겸해 쓰고 있는 방이었다. 넓은 창문 곁에 커다란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책상 위에는 여러 장의 오선지들이 널려 있었다. 그 중 몇 장은 벌써 작곡을 해놓은 악보들이었다. 주변에 깨끗한 오선지들이 놓여져 있어 그가 방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또 거기에는 우리와 오랫동안 사귀어 온 영계의 훌륭한 음악가의 한 사람인 프랜즈 조셉이라고 하는 친구가 벽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로저의 관심을 끄는 것은 프랜즈와 함께 있는 식구들이었다. 소파 위쪽에는 이미 낯이 익은 푸마가 자리를 잡고 프랜즈와 장난을 하고 있었고, 소파 난간 위에는 잿빛 참새 한 마리가 앉아 열심히 무어라고 지저귀고 있었던 것이다. "로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지요? 아주 좋은 친구들입니다." 피터 일리취가 이렇게 말했다. 참새가 날아와 로저의 펴진 손가락 위에 사뿐히 앉았다. 우리는 피터에게 그 푸마와 참새가 그의 집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답니다. 어느날 내가 저 친구들의 거처에 일이 있어 가보았는데 서로 어울려 장난을 하며 노는 모습이 여간 재미있어 보이지 않더군요. 내가 그들이 어울려 노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불현듯 그들의 뛰고 노는 모습에 꼭 어울리는 음악이 떠올랐습니다.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음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되는 래이디언트 윙에게 그들을 빌려와 이곳에 나와 함께 기거하게 하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저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보곤 한답니다. 래이디언트 윙은 내가 저 친구들을 얼마든지 함께 데리고 있어도 좋다고 특별한 배려를 해준 것이지요. 저들이 어울려 뛰고 장난하는 모습은 언제라도 새로운 모습들입니다. 로저,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만, 래이디언트 윙은 저 친구들의 관리자요, 친구인 셈입니다. 지상세계에 살고 있는 두 친구를 대신해서 이들을 보호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 두 장난꾸러기들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신들이 도착했을 때 나는 저 장난꾸러기 친구들을 위한 작곡을 하고 있던 중이었죠." "우리가 작업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천만에요, 루스. 내가 아까 당신에게 무언가 보여 줄 것이 있다고 했지 않아요? 바로 이 음악을 두고 한 이야기였답니다. 피아노 곡으로는 벌써 완성했는데 원하신다면 연주해 드리지요. 지금은 오케스트라 곡으로 작곡하고 있는데 완성이 되면 대단한 작품이 될 것입니다. 피아노 곡과는 약간 다르게 되어 있지요. 더 웅장하고 장식음악이 첨부되어 있으니까요. 로저도 이런 분야에 흥미있어 하는가요?" "그렇고 말고요. 내가 당신이 작곡해 준 그 해학곡(諧謔曲)을 오르간으로 연주했더니 창공으로 솟아오르는 그 기포들을 보고 얼마나 신기해 하고 질문을 해대는지 귀찮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그로하여금 당신을 만나 인사를 드리게 하는 뜻도 있었지만, 그가 보여 준 음악에 대한 관심 때문에 오늘 이렇게 일부러 이곳까지 온 것이랍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가 지금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짐작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몬시노르가 무언가 깜짝 놀랄만한 무엇을 보게 될 것이라고 미리 일러주었는 데도 말입니다. 그에게는 저 푸마와 참새로도 깜짝 놀랄 사건이 된 셈이기는 하지만요. 그는 프랜즈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이 확실해요." 무리가 아니지요. 이곳에 들어온 후 우리의 모습이 변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로저는 우리의 대화에는 아랑곳 없이 그저 프랜즈와 푸마, 그리고 참새와 더불어 마음껏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루스가 그를 불렀다. 로저, 내가 지난 번 교회를 방문했을 때 오르간으로 연주했던 그 곡 기억나세요? 그 곡은 피터가 나를 위해 한곡 작곡해 준 것이랍니다." 그제야 로저도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와 합류한 후 피터 일리취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급기야는 탁자 위에 자리잡고 있는 흉상 하나를 발견하고 눈길을 떼지 못했다. 중년기의 남자로 잘 자듣어진 턱수염을 기르고 있는 신사의 흉상이었다. 피터는 로저가 무엇인가 두 사람 사이의 유사한 점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에 미소를 금치 못해 하면서 입을 열었다. "로저! 무언가 서로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정확히 봤어요. 저게 바로 내가 지상세계에 살 때의 모습이니까요. 무슨 허영심 때문에 저 흉상을 내가 이곳에 진열해 놓고 있는 게아닙니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처럼 지상세계에 살고 있을 때의 모습을 잘 알고 있는 친구 한 사람에 의해 제작된 작품인데, 한사코 이처럼 주름살을 넣겠다고 하여서 보시다시피 이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피터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로저! 내 현재의 모습이 저 흉상에서 보는 것보다 더 좋아 보이지 않는가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주 어렵고 힘든 대답을 요구하고 계시는군요. 내가 만일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저 흉상에서 보는 당신의 모습에 무엇인가 부족한 면이 있다는 뜻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여기에 들어오셔서도 전혀 외모에 발전적 변화가 없었다는 뜻이 될 테니 큰일났군요." 로저의 당황해 하는 모습에 우리는 모두 한바탕 유쾌하게 웃어댔다. 그 중에서도 피터가 제일 재미있다는 듯이 박장대소를 금치 못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프랜즈도 그랬듯 이제 피터는 청춘의 절정기에 되돌아와 팽팽한 젊은이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로저는 그가 이것 저것에 대해 너무 호기심이 많은 것 같아 미안하다고 심심한 사과를 하면서도 선반 위에 즐비하게 꽂혀 있는 그 크고 많은 책들이 다 무엇인가를 피터에게 묻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교향악단용으로 작곡한 악보들은 보통 것들보다 훨씬 악보의 부피가 커서 약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그처럼 크고 많은 책들이 전부 피터가 작곡한 음악을 담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난 로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 대단한 것도 못 된답니다. 내가 여기 살게 된 지도 벌써 꽤 오래 되었지요. 그 많은 허구헌 날들을 그저 놀고만 지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지금도 지상세계에서는 '이 곡은 그 유명한 음악가 P씨가 생전에 작곡한 마지막 곡입니다.'라고 방송에 자주 소개를 하곤 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재미있어요. '마지막 곡!'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서 들을 땐 우습기 짝이 없지요. 특히 오늘처럼 저렇게 많은 작곡집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런 방송을 들으면 더욱더 그렇지요. 그들은 우리가 일단 지상세곌르 떠난 후에는 작곡마저도 못하게 된느 줄 믿고 있는 모양이더라구요. 나는 그것이 지상세계에서의 현실이라고 그의 말에 얼른 맞장구를 쳤다. 프랜즈 조셉도 그의 말을 지지하면서 한마디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들을 위해 동상을 세우거나 기념비를 세우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지요. 적어도 그들의 생각으로는 우리는 지상세계를 떠남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단 한 줄의 악보마저도 우리에게는 상관없는 것이 되어 버린 것으로 믿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들은 이제 우리가 지상세계에 살 때에 작곡한 크고 작은 곡들을 어떤 동기에서 작곡했으며, 무엇을 기대했었는지를 완전히 이해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당시 그러한 작곡들을 하게 된, 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가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고 실토를 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제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언가 신비로운 예술적인 맛이 없어져 버리거든요. 이것이 오늘날 지상세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요, 현실이랍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로서는 더이상 그의 이와 같은 설명이 토를 달 필요도 없이 정확한 얘기임을 시인했다. 프랜즈가 말했다. "그런데 피터, 새로 작곡한 곡을 한번 들려 주시지 않겠어요? 나도 한번 더 듣고 싶고, 이분들을 위해서 좀 수고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피터는 즉시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장엄한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연주가 얼마나 감동적이며, 훌륭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의 필력이 달려 설명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말이나 글로 예술세계 대가들의 음악을 논하고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며, 설사 시도해 보아도 독자들에게는 아묵서도 전해 주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 뻔한 것이다. 단지 가능한 면이 있다면 연주가의 연주 기법에 관해서나 설명을 할 수 있겠고, 그 멋있고 아름다운 율동을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우리를 만족시킨 점은 푸마와 참새의 몸 동작을 묘사해 주는 음악으로써 우리가 래이디언트 읭을 방문했을 때 목격했던 것과 같은 그러한 그들의 몸놀림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들의 뛰어노는 모스처럼 멜로디가 높이 올라갔다가는 내려오기도 하고 서로 묘기를 경쟁하는 장면을 연상하게도 해주고, 때로는 갑자기 몸을 뒤틀기도 하며 방향을 바꾸어 함께 뛰는 모습도 묘사해 주었다. 그 이상 나로서는 더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오로지 내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점은 그 곡이 생동감 넘치는 곡조로 되어 있고 또 그런 풍의 곡이 이 경우는 적합하겠다고 생각한 점이다. 연주가 끝나자 우리 모두는 물론 루스는 얼마나 즐겁고 훌륭한 곡이었는지를 극구 찬양했고, 특히 프랜즈는 형제지간과 같은 예술가로서의 진정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루스가 말을 했다. "오케스트랄용으로 작곡하셨다는 그 곡은 언제쯤 들려주실 수 있을런지요?" "거의 다 완성되었어요." "그 작품은 물론 다른 곡들도 포함되어 있지요. 작곡이 다 되면 연락을 드릴까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로저는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책장에 등을 돌리고 서서 뒤에 꽂혀 있는 책들의 이름을 훑어보고 있었다. 루스와 나도 그와 합류했다. 무언가 흥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작품들은 그 특징에 따라 분류되어 있었고 피터가 지상계에 사는 동안 작곡한 작품들도 모두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로저는 둘째 손가락으로 작품들의 이름을 따라 읽어 가다가 피터 씨의 교향곡 제6번을 발견했다. 그 때 피터가 설명해 주었다. "지상세계의 사람들은 지금도 그 곡이 나의 마지막 작품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나 그 작품 외에도 얼마나 더 많은 작품을 내가 여기에 온 후 완성해 놓았는지 볼 수 있잖아요?" 그가 지상세계에서 완성한 작품들과 영계에 온 후로 작곡한 작품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피터가 이어서 설명했다.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이지요. 프랜즈 조셉의 경우를 보세요. 그도 수없이 많은 작품들을 작곡했으니까요. 아마 수천 곡도 넘을 거예요. 로저, 만일 우리가 좋은 기억력을 소유할 수 있는 복이 없다면 얼마나 많은 곡을 작곡했는지조차 모를 정도일 거예요." "지상세계와 영곌르 비교해 볼 때 어느 곳이 더 작곡하기에 좋은 곳인가요?" 로저가 물었다. "그야 물어 볼 필요도 없이 이곳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작곡활동에 몰두할 수가 있는 환경인가를……. 예를 들어, 아까 프랜즈가 먹고 살기 위해 작곡을 했던 지상세계 시절을 들먹였습니다만 벌써 동기와 목적이 다르지 않습니까? 쉽게 말해서 이곳에서는 지상 세계에서처럼 육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지요. 그 외에도 대중의 냉담성이라고나 할까요. 즉 우리가 흔히 경험하던 사회적인 무관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지요. 식장을 구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물론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고요. 누구든지 어딘가에 자리 잡고 살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이곳처럼 풍경이 수려한 산속에 아담한 집을 짓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프랜즈를 보세요. 로저, 당신도 벌써 느꼈겠지만 그는 훌륭한 집에서 행복한 나날을 하루가 얼마나 긴가를 잊은 채 작곡에 심취해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요?" "음악평론이라는 게 없지요." 프랜즈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행히 나는 지상세계에서 작곡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도 별로 심한 평을 받아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음악이 완전한 것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단지 내가 살던 때는 지금의 지상세계 풍토와 달라서 음악펑론이라는 것이 고개를 들기 전이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당신들의 지상세계의 조국인 영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음악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편입니다." 그는 책장 앞에 서 있는 우리 세 사람을 향해 이와 같이 말했다. 피터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죽어버린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요. 프랜즈, 그렇지 않아요? 이곳에 살고 있는 모든 음악가들을 전부 소집하여 지상세계의 음악회 같은 곳에 대거 출동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볼 만한 구경거리가 될 것입니다. 아마 음악의 대폭풍이 불어 닥치겠지요. 누군가는 우리들의 출현으로 억만장자가 될 거구요." "그렇겠군요. 남 좋은 일 시키는 격이 되겠지요." 프랜즈가 대답했다. "그런가 하면 소위 음악평론가라는 사람들도 제철을 만난 듯 평론작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교향곡이든 아니면 평범한 곡이든 그들은 우리들의 음악을 갈기갈기 찢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어떤 점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보완해야 하고, 무엇이 동기가 되어 그런 음악을 창작해 냈다는 등을 주장하고 나설 것입니다. 물론 대중은 그들이 하는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게 뻔하고요. 특히 평론갈르 자처하는 그들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떠들어 댈 것이니까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평에 만족해 하면서 마치 자기네들이 음악계에서는 특권층이나 되는 양 으시댈 것입니다. 그러니 설사 우리가 그곳에 가서 연주를 한다고 해도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여기가 좋지요. 이곳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친구요, 어떤 누구의 간섭이나 방해도 받지 않고 살 수 있으며, 특히 그 평론을 쓴다는 낮도깨비 같은 평론가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지요. 우리는 언제나 원하면 자유롭게 서로의 음악을 들을 수 있도 있고, 우리를 이용하여 횡재나 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생각도 없는 저자세를 보일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언제나 이렇게 음악가들끼리 함께 지낼 수 있는 것도 큰 복이고요. 우리끼리는 서로 기쁜 마음으로 전혀 상대방에게 불쾌한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서로의 음악을 놓고 의견을 주고받곤 한답니다. 한 가지, 지금 현재의 지상세계에는 괄목할 만한 음악가가 없는 것이 애석한 일입니다."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프랜즈가 물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단 한 명도 우리와 합류하지를 못했거든요." "몬시노르는 이 점에 대해 이떻게 보십니까?" "글쎄요……." 내가 대답을 늦추자 루스가 재빨리 받아 대신 대답했다. "피터, 당신도 아시다시피 몬시노르도 입만 열었다 하면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가 당신들을 처음 만나서 사귀게 되고 여러가지 실질적인 면에서 음악공부를 하게 되면서부터 그도 지상세계의 작곡가들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왔었으니까요." 내가 루스의 짖궂은 농담을 가로막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나더러 지상세계의 음악계를 얘기하라면 솔직히 말씀드릴 수밖에 없지요.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표헌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현재 지상세계에는 이렇다할 만한 작곡가가 전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결론을 내릴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보아도 이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곳에서 지금 작곡가로 행세하는 음악인들은 많지만 사실 말이지 그 이름이 아까울 정도예요. 피터가 한 말이 정확해요. 지난 수십년 동안 작곡가 다운 작곡가가 단 한 명도 여기에 들어오지를 못했으니까요. 물론 작곡가들이 끊임없이 영계에 들어오고는 있지요. 그러나 일단 이곳에 들어오면 그들은 그 작곡가라는 탈을 벗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의 수준 미달급 작곡가들입니다. 아직 이곳에 들어오지 않고 지상세계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작곡가들도 마찬가지의 길을 걷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벌써 들으셨겠지만, 지상세계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이제는 영적인 계시 현상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물어봐도 순수음악 작곡가가 바닥이 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얘기를 듣기는 했습니다만, 음악계가 그토록 황폐화되었단 말입니까?" "그렇다니까요. 제 말씀이 전혀 과장된 게 아닙니다. 루스에게 물어보셔도 제가 괜한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는 걸 듣게 될 것입니다. 그녀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로저는 지상세계를 최근에야 떠나온 사람이니까 한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만, 지상세계 사람들이 소위 떠들어대는 '현대음악'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요." "들어 본 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역사가 긴 것 같지는 않아요. 저로서는 난해해서 전혀 좋아할 수 없는 음악이었기도 하고요." "우리도 이곳에서 종종 그런 얘기를 들을 수가 있었지요." 피터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당신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음악의 부재시대인 줄은 미처 짐작조차 못했군요. 사실이 그럴진대 그 똑똑하다는 음악평론가들은 무엇이라고들 하나요?" "극구 찬양을 하고 있지요. 마치 위대한 천재들이 작곡한 음악이나 되는 양 입이 마르도록 추켜 세우면서 일반대중들을 현혹하고 있고, 그들이 논평하는 곡들에 대해서는 사랑스러운 곡조가 시종일관 흘러 넘친다는 등, 수박 겉핡기식의 얘기들이지요. 그러나 사실인즉 그러한 곡들을 제대로 보려면 탐조등이라도 켜놓고, 아니면 현미경을 들이대고 보아도 그들이 떠들어대는 그런 훌륭한 음악성은 찾아볼 길이 없을 정도인 것입니다. 없는 것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미술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엉터리 같은 그림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고 호화로운 전시회 같은 곳에 출품되어 나오는 것을 여러분들은 생각도 못해 보셨을 것입니다. 예술의 부재시대라고 해도 과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형편없는 졸작들이 판을 치는 오늘 지상세계의 현실을 어떻게 해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두 가지 면에서 풀어 볼 수 있겠지요. 모두들 정신이 나간 거짓 음악가들의 소행이거나 아니면 어처구니 없는 장난꾸러기들이 저지른 과오일 것입니다. 이 점은 미술계나 음악계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하여튼 이처럼 치졸하고 추악하며 역겨운 예술가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오늘날 지상세계의 현실임을 부정할 길이 없습니다. 독소가 예술계에까지 파고든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프랜즈가 지상세계의 예술계가 큰일났다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몬시노르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런 엉터리 투성이의 세계를 일찍 떠나와 버린 것이 다행이군요." 우리는 프랜즈의 말을 실감나게 들었다. 사실 그는 지상세계에서 그와 같은 퇴폐풍조가 예술계를 부식하기도 전에 벌써 영계에 와 있었던 분이다. 물론 피터 일리취도 이곳에 온 지가 상당히 오래된 분이다. 피터가 다시 음악책들의 제목을 훑어 보고 있는 로저 곁으로 다가서자 로저가 말했다. "한 권 꺼내 봐도 될까요?" "로저, 되고 말고요. 어떤 것을 좋아하세요? 이곳에서는 그처럼 형식을 차릴 필요가 없어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몬시노르와 루스께서도 항상 그 점을 저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몸에 배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 배워지게 돼요. 로저, 경험이 필요한 것이지요." 피터가 웃으며 대꾸했다. "대다히 훌륭하군요. 모든 것이 다 그래요. 이분들께서 지금까지 저를 이곳저곳 두루 견학시켜 주셨는데 어디를 가 보아도 감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일들 뿐입니다. 만나는 분들마다 친절하기 그지 없고요.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보든지 내가 제일 귀한 손님인 것처럼 느껴지게들 대해 주신단 말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나 루스와 몬시노르께서 저 때문에 이처럼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된 것을 생각하면 죄송하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이기는 합니다만……." "시간을 빼앗기다니요? 그렇지 않아요, 로저." 피터가 말했다. 내가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면서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 "저 분들은 절대로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이곳에서는 시간 낭비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아요. 낭비할 시간이 없는 곳이니까요. 이렇게 말하니 무슨 마인지 어리둥절한가요? 그러나 그게 사실입니다." "로저, 한 가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게 있어요. 악보를 읽을 줄 아세요?" "엉터리로 조금은 읽을 줄 압니다……." "괜찮아요. 이 곡이 무슨 곡인가 들어 봐요." 내가 조용히 콧노래로 한 곡을 들려주자 피터가 빙긋이 웃으며 바라다 보았다. "오! 그 곡이라면……." "그래요. 지금 몬시노르께서 들고 있는 책에 있는 곡이라오." 피터가 말했다. 내가 그 책을 로저에게 건네주자, 그는 책과 피터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첫장을 넘기고 작가의 이름과 곡명 등을 확인하더니 숨이 막힌 듯 한참 동안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 프랜즈는 소파에 앉은 채 조용히 전개되는 상황을 주시하고만 있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로저, 마침내 저 분의 엄청난 비밀을 알아냈군요. 그래, 그대가 보기에도 피터가 그런 대가로 보였나요? 아니면 그런 대음악가라면 훨씬 더 잘 생기고 훌륭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었나요? 적어도 나 만큼은 말입니다." "아니, 쏙 빼어난 미남이 언제 천재적인 것 봤어요?" 피터가 응수하고 나섰다. "보고 말고요." 프랜즈가 다시 대꾸했다. "어디 다른 데 가서 그런 분을 만나 봐야 한다고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군요. 스스로 잘 판단해 보시면 알 테니까요. 뭐ㅡ,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끄러워질 필요가 없을 거구요." "자, 로저, 아까 우리가 얘기한 몇가지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이 있다는 것은 이제 무슨 뜻이었는지 더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어때요, 이곳 방문은 이 정도로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가 보면 좋을 듯 싶습니다. 나에게 지금 연락이 오기를, 누군가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고 있다는군요. 우리의 거처로 가서 그분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피터에게 그가 베풀어 준 호의에 심심한 감사를 드렸고, 특히 루스는 그분이 현재 작곡하고 있다는 오케스트라곡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잊지 않았다. 그분은 곡이 완성되어 오케스트라로 연주될 때에 우리에게 잊지 않고 통고하여 대중을 위한 첫 공개연주회를 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로저는 시종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지상세계나 영계, 어디를 막론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한 음악가와 함께 얘기하면서 농담까지 주고받을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이 그저 꿈만 같은 모양이었다. "프랜즈 조셉도 피터에 못지 않게 유명한 분인 것을 잊지 말아요." 루스가 말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단한 분이지요. 그가 지상세계에 살 때에 작곡한 심포니만 해도 백 곡이 넘으니까요." 지상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두 영인과 만나다 "영계에서는 모두들 성씨(姓氏)를 사용하지 않고 이름만 부른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몬시노르, 당신의 성(姓)이나 루스의 성도 모르고 있을 정도니까요." 로저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숲속의 음악가의 집을 떠나 곧장 우리들이 거처하는 짐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젊은 로저의 마음 속에는 피터와 프랜즈를 난나서 예술세계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에 새삼 감동을 받은 여운과 보고 들은 얘기들로 꽉 차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로저의 말을 받아 주었다. "로저, 이곳 사람들도 모두들 성씨(姓氏)를 갖고 있기는 해요. 단지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뿐이지요. 무슨 정해진 법이나 절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 갓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을 보면 흔히 성과 이름을 놓고 이것저것 바꾸어 부르는 경우들을 보게 되지요. 그러나 영계에서 중요시 하는 것은 그가 누구인가 하는 그 개인의 모습이지, 결코 그가 속해 있던 가족이 어떤 가문이었느냐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면 이름들에 대해 전혀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적으로 영계의 천법과 질서에 의해 정해지는 것들이 있지요. 각 이름마다 독특한 의미를 갖고 있고 전혀 지상 세계의 언어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또 그러한 이름들은 그저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갖추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나 그런 이름을 마음대로 지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가장 높은 급의 영계에 계신 분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으로 되어 있으니까요. 개개인의 신분에 관한 얘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루스의 경우를 보세요. 우리가 속한 급(級)의 모든 사람들은 물론, 다른 급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도 그녀는 단지 루스일 뿐이에요. 그 이름이야 말로 지상세계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의 이름도 다 마찬가지이지요. 여러분들이 나를 부를 때 사용하는 몬시노르라는 이름은 사람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명칭이지요. 지상세계에서라면 성스러운 칭호가 되겠지만 이곳에선 그런 게 전혀 상관없는 것이지요.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만, 내가 언젠가 이곳 영계에는 직위나 신분의 구별이 없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따라서 내가 몬시노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다고 해서 무슨 영계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지상계에서 쓰던 명칭이기 때문에 주위에서들 그렇게 부르는 것 뿐이지 나의 실명(實名)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상 지상세계에 살고 있는 나의 친구들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던 게 그만 이곳에서도 그냥 몬시노르로 통용되고 말았지요. 그들은 때로 내가 교회에서 받았던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요.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몬시노르라는 이름은 개성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명칭일지라도 내가 하는 일 때문에 붙여진 칭호라는 점입니다." 로저가 말했다. "당신들은 나의 성도 물어보지 않으셨지요?" "그렇군요. 그렇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죠. 당신은 벌써 로저라는 이름으로 족해요. 성씨가 왜 필요합니까?" "프랜즈 조셉과 피터 일리취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마찬가지이고 말고요. 우리는 단지 그들을 당신에게 소개할때만 성씨까지 포함해서 알려 준 것 뿐이지, 다른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그 누구도 이러한 이름에 관계된 지도나 습관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며, 모두들 만족해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로저, 당신도 우리가 연령문제와 신분문제를 놓고 한참 동안 토론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일단 영계에 들어오면 점진적으로 자기 생애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청년기의 모습으로 다시 환원해 돌아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외모의 차이가 보인 답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옛날에 자기가 익히 보아왔던 그 어떤 분의 모습을 얼른 알아 보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름 때문에 똑같은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고요. 완성급영계의 사람들이 가끔 지상세계의 친구들에게 내려가면 지상세계 사람들은 그들이 특별히 선정하거나 지은 이름을 사용하여 그 고급영계인들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실례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피터와 프랜즈를 방문하고 있었을 때 내가 그들에게 누군가가 우리들을 만나러 오고 있게 때문에 그만 돌아가야 하겠다고 했던 얘기가 생각나는지요?" "기억이 납니다. 저는 당신이 그곳을 떠나기 위해 일부러 드리는 인사치례로나 생각했었는데요." "로저!" 루스가 약간 말을 높이며 로저를 불렀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살면서 그렇게 입에 바른 거짓 인사치례나 하여 사교적 방문을 끝낼 정도의 사람들로 생각했다는 말씀인가요? 사실은 그들에게 우리가 떠나야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전혀 실례가 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만일 누군가를 만났다가 더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아 떠나야 할 때라면 어떻게 처신합니까?" "그런 경우는 발생할 수가 없겠지요. 그런 곤경에 빠졌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루스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혹시 그런 얘기 들어 본 적이 있는지요?" "전혀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런 곤란한 상황이 일어날 수가 없어요." "이유가 간단하지요. 지루함을 느낄 수도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 누구도 찾아온 손님이나 방문객이 너무 오래 머무른다고하여 싫은 기색을 보이거나 하는 법은 없으니까요. 로저, 아마 당신은 우리가 피터와 프랜즈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기 위해 내뱉은 겉치례 인사가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어서 그런 질문을 했나본데, 그러나 사실인즉 우리가 그곳에서 대화를 즐기고 있는 동안 메시지가 전달되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화급을 다투는 것은 아니었지만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이처럼 농담을 하면서 걷고 있겠어요? 그 메시지는 누차에 걸쳐 지상세계를 방문하면서 많은 친구들에게 영계의 얘기를 해주는 한 분으로부터 온 것이었는데, 우리도 마침 무슨 심각한 업무관계로 매어 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즐거운 나들이었던 터이므로 기꺼이 그의 메시지를 받고 만나보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만일 이런 메시지가 루스와 내가 당신을 위해서 했던 것처럼 새로운 한 생명을 영계로 안내해야 하는 그런 임무수행의 내용이 도착했다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그들에게 알렸을 것임은 물론 그 누구도 어떤 상황도 우리의 일을 방해하도록 허용치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임무수행 기간에 자리를 뜬다거나 하면 큰 일이 날 터이니까요. 이처럼 모든 일이 이곳 영계에서는 건전한 상식과 분별력에 의해 하등의 부작용 없이 저절로 처리 진행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늘날 지상세계는 그렇지를 못하니 세상사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로저가 냉담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로저, 내가 말한 그 방문객이란 분은 완성급 고급영계에서 오시는 훌륭한 분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신분은 단순하면서도 직분 때문에 푸른별(Blue star)이라는 이름 속에 가리워져 있었는데, 그 이름은 사실 그분의 개인기장(個人記章)에서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섬세하면서도 솔직한 면을 표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기장(記章)이야말로 지상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느 보석도 감히 따를 수 없는 휘황찬란한 보석들로 만들어졌는데, 그 귀하고 아름다운 보석들은 빛나는 푸른색을 띠면서 성좌와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분이 도착하시면 그 보석을 당신에게 한 번 보여주라고 부탁드려 보지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거처하는 급의 영계로 내려오실 때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걸고 다니지 않는 것이 보통이랍니다." "우리들이 창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우리를 찾아오는 그 방문객이 앞뜰 잔디밭에 그 모습을 나타내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로저는 우리가 손님을 맞이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자리에 앉는 것을 눈치챘는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이처럼 먼 곳에서 찾아오시는 분들은 생각의 힘을 빌어 직접 방안에 출현하는 것보다는 정원을 걸어 들어오는 것이 상례인가보죠?" "그렇지요, 로저. 우리들도 지금까지 몇 군데 방문할 때마다 그렇게 했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단지 방문객으로서 겸손한 예의를 보이는 것이 되겠기에 그러는 것이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생각의 힘을 빌어 지체하지 않고 목적하는 현장에 출현하기도 합니다. 긴급한 일이 벌어졌을 경우가 좋은 예가 되겠지요. 어떻게 예의를 지킨답시고 시간을 지체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간과 거리에 제약을 받지 않고 즉각 원하는 곳에 출현하여 일을 해결합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두 다리로 걸어서 방문하고자 하는 현장에 들어가게 되며, 필요하다면 정문에서 노크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실인즉 지금까지의 내 경험에 의하면 노크를 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로저, 그대도 이제 이곳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본능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 그대로 따라하게 될 겁니다.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했다고 해서 걱정하지 말아요. 지상세계의 친구들을 찾아가 방문하는 일은 또 별개의 분야지요. 우리가 로저 당신을 데리러 갔을 때만 해도 우리는 전혀 지체하지 않고 즉각 당신이 누워있던 방으로 내려갔지요. 문을 노크해야 한다거나 하는 번거로움이 전혀 필요없는 방문이었지요. 만일 우리가 당신 방에 들어가기 전에 노크라도 했다고 가정해 봐요. 방안에 있던 가족들이 듣고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겠어요?" "그렇기도 하겠군요. 아마도 나는 불안하고 공포감 속에 임종을 맞게 되었을 것이고, 그 소름끼치는 낫을 들고 있는 노인보다도 더 무서운 자에 의해 끌려갔겠지요?" "오, 이제 손님이 당도하셨군요. 누군가와 함께 오셨군요." 두 분의 손님들이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것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다른 한 분은 누구일까요?" 루스가 창문께로 다가가면서 물었다. 그분들은 곧 우리가 눈으로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거리까지 당도하였다. "휠리스군요." 루스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정원으로 뛰어나갔다. "루스와 휠리스는 아주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입니다." 난느 이렇게 로저에게 설명해 주고 그들을 맞으러 나갔다. "나의 사랑하는 그대들이여!" 푸른별이 나를 보자 말했다. "우리는 사실 지상세계의 친구들을 만나 무엇인가 약간 도와 주어야 할 일이 있어 가던 중이었는데, 이 젊은 아가씨 휠리스가 이곳을 들러 가자고 졸라서 이렇게 여러분들을 만나러 오고 말았구려. 내가 이곳에 온다고 메시지를 보냈을 때 그대들은 집에 없었더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마침 그때 이 젊은이를 데리고 프랜즈와 피터를 방문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요. 아주 잘 하셨군요." "제가 수차에 거쳐 말씀드린 바있는 그 청년인 로저를 한번 만나 주실 수 있을런지요?" "나에 관한 숨겨진 비밀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면야 만나 보지요." 푸른별은 유쾌한 듯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 어서 들어와서 로저를 만나 주십시오." 루스가 휠리스에게 말했다. "정말 좋은 청년이에요. 우리가 최근에 지상세계에서 인도해 온 사람인데, 요즘은 그를 데리고 이곳저곳 구경이나 다니면서 이처럼 휴가를 즐기고 있지요." 루스와 휠리스에게서는 뚜렷한 차이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휠리스는 검은 머리를 갖고 있었고 루스는 밝게 빛나는 금발의 여인이었다. 우리가 방에 들어서자 로저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그를 푸른별과 휠리스에게 인사시켰다. "오, 나의 친구! 만나서 반가워요." 푸른별이 말했다. "그대는 아주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는군. 우리의 만남이 뭐, 놀랄만한 사실도 아니지, 젊은 친구, 그렇지 않아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로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를 푸른별이라고 불러요. 모두들 그렇게 부르는데 괜찮아요. 이제는 그것이 내 이름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내 이름들 둥 하나가 된 것이지요.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내가 알기로는 지상세계에서는 누군가가 여러 개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의심을 받게 되는데 이곳 사정은 완전히 달라요. 나는 지상세계에서 상요했던 이름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받았었지요. 그러나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지요. 잘못은 내 이름을 너무나 자기들 편한 대로 사용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푸른별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음성은 차분히 안정되어 있었고 조심스럽게 한마디 한마디 성의껏 전해 주었다. 외모로만 보아서는 한창 젊은 모습에 틀림이 없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적어도 수십년을 이곳 영계에서 사신 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지상세계에서의 시간에 대한 개념이 종적을 감춘지 오래된 이곳에서 그분이 말씀하시는 목소리만 듣고도 그분의 영계생활의 연조를 헤아려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나처럼 경험이 많은 사람만이 갖는 특권이기도 한 것이다. 이곳에 도착 즉시 나는 사람들이 나이를 외모로만 보고서 짐작해 본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이어서 내가 말을 꺼냈다. "푸른별 선생님, 뭐 한 가지 부탁해도 될런지요? 여기 있는 이 젊은이를 위해서 말입니다." "되고 말고요, 몬시노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드리고 말고요. 자, 무엇인지 말씀해 보세요." "우리가 지금 로저에게 이름에 관한 설명을 해주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이름의 근원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더러 어떻게 해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실제로 증표를 보여달라는 말이지요?" 푸른별은 입고 있던 도포 소매를 약간 들쳐 보였는데, 속에 입고 있는 옷에 새겨져 있는 푸른별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우리가 그때까지 로저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던 바로 그 푸른별이었다. "가까이 와서 이 별을 자세히 보아요. 참 아름다운 별이지요. 아마도 지상세계에서는 이처럼 아름다운 별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푸른별 선생님." "로저, 어때요. 이제 영계보석이 얼마나 훌륭하다는 것을 보았지요? 이 보석들은 조명등이 필요없어요. 광택과 광채가 그 보석들 자체에서 발산해 나오니까요. 여기 보이는 이 별이나 아니면 어떤 보석이라도 좋으니 캄캄한 곳에 놓아 보세요. 그 보석들 자체의 아름다운 색상과 광택이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몬시노르께서 이미 설명해 주셨겠지만 이처럼 보석에서 발산하는 광채를 살아 있는 빛(Living Light)이라고 하지요. 전혀 잘못된 표현이 아니에요. 지상세계의 보석들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보석들 자체로는 광채를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 탈이지요 예를 들어 수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큰 다이아몬들르 캄캄한 밤에 보면 전혀 그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젊은이, 잘 들어두세요. 이곳 영계에는 지금 그대가 보고 있는 이 별 외에도 수없이 많은 값진 보석들이 있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보석들이 다 살아 있는 빛을 띠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리라 믿지만, 이곳에서는 이와 같은 보석들을 사고 팔고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네, 푸른별 선생님. 저도 몬시노르와 루스에게 들어서 그 점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거나 팔 수 없는 대신 상으로 받아야만 소유할 수 있지요. 그것이 더 공평한 방법이 아니겠어요? 이런 원칙 때문에 누구나 평등한 기회와 작겨이 주어지지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열심히 일하면 이처럼 아름다운 보석들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몬시노르께서 이러한 보석들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해주던가요?" "아닙니다, 선생님. 전혀 설명해 주지 못했습니다." 내가 재빨리 받아서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이와 같은 보석문제를 설명해 주시려고 한다는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약간 운을 띄웠을 뿐입니다." "뭐, 다른 뜻이 있어서 물어 본 것은 아니에요. 미리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반복할 필요가 없겠기에 물어 본 것 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들어 보지 못했다니, 젊은이, 그대는 아마 이러한 보석들이 무엇을 상징하나 궁금하겠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보석들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가치 외에 다른 무엇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지요. 보석들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우리 생활에 따르는 일종의 상징적 부속물인 것입니다. 각 분야에서 우리가 공헌하는 만큼 부상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지상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등급을 대변하게 되나요?" "그렇다고만 말할 수도 없어요. 보석들끼리는 특별한 가치척도나 등급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지상세계와는 전혀 다르지요. 누구에게나 어떤 종류의 보석이든지 모두 소유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어요. 지상세계에서는 돈 있는 사람이 비싼 보석을 구입해선 과시하거나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영계에서는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 다시 말해서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사람만 훌륭한 보석을 상으로 받아서 소유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유 증명서나 증표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좋은 제도지요. 우리들으 이름이 그와 같은 증서에 오를 필요가 없어서 좋고, 또 그런 증표를 누구에게 보여야 할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이니까요. 젊은이, 그대도 다만 이 한가지의 보석을 보고 그처럼 무아지경에 빠져 그 황홀함에 탄복하는 것을 보니 아름다운 것을 퍽 좋아하는군요. 프랜즈와 피터가 소유하고 있는 보석들을 볼 기회가 없었나 보군요? 미리 알고 보여달라고 부탁하기 전에는 안 보여 주는 분들이지요. 그 두 사람과 또 함께 예술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이 갖고 있는 보석은 정말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아요. 이곳에 와서 우리에게 들려준 그 훌륭한 음악의 댓가로 받은 상들이지요. 그러고 보니 나 혼자서만 얘기를 하고 있는 듯싶군요. 몬시노르, 이게 좋은 버릇일까요, 아니면 나쁜 버릇일까요?" "푸른별 선생님! 그건 나쁜 습관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지상세계에서 특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알지도 못하는 얘기, 틀린 말들을 설교단상에 서서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히 나쁜 습관입니다." 푸른별이 껄껄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지금 지상세계에서라면 상당히 말을 많이 하고 있는 셈이군요.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곳 영계에서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비평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저, 그대의 경험은 어땠나요? 이것은 짐작인데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여기 친구분들이 여기저기의 경이로움을 구경시켜 줄 때마다 감히 입을 열러 말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요?" "정말 그랬습니다, 선생님. 대부분의 경우 나는 혀가 굳어져 버린 것처럼 느꼈고 따라서 입은 다물어 버리고 눈과 귀만 열러 놓고 따라다녔습니다." "정말 재치있게 상황에 대처했군요. 젊은이, 우리가 모두 지상세계에 살고 있었을 때를 돌이켜보면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훨씬 좋을 상황에서 입을 열어 필요없는 얘기를 하고, 그와 반대로 꼭 발언을 해야 할 때 입을 봉해 버리곤 하는 것을 보곤 했지요." "저의 경우는 두 가지 다 해당합니다. 선생님!" "몬시노르, 정말 그런가요?" 푸른별이 조용히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사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서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었다오. 자, 로저! 이제 우리가 떠나야 할 시간이 다 되어 오는데 휠리스와 내가 어디로 가려는지 알아 맞출 수 있습니까? 놀란 듯한 모습이군요. 떠나야 할 시간이 오다니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이곳 시간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곳이 지상세계이기 때문에 시간을 들먹인 것이오. 몬시노르도 이번은 아니지만 우리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는 했었지요. 우리는 이제 지상세계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영력으로 그들을 격려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상세계 전체가 너무 침체되어 있어서 용기를 불어 넣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만약 그들이 정말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만 준다면 상황은 쉽게 전환될 수도 있을 텐데. 이곳처럼 이렇게 아름답고 밝음 속에서 지내다가 지상세계에 내려가 보면 정말 고리타분하고 어두운 곳이라는 것이 느껴져 슬프답니다." "언젠가는 로저, 당신도 한번 지상세계의 친구들을 만나보러 데리고 갈게요. 어때요! 한번 가 보고 싶어요?" 휠리스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전혀 생소해서 겁이 나는군요." 로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그런 일에 대해 알 리가 없지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배울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지상세계에 가게 된다고 해도 당신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중 누구와 함께 짝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휠리스가 아마도 어느 누군가와 함께 짝이 되어 가고 싶은 모양 같은데ㅡ" 푸른별이 웃으면서 말했다. "프랜즈, 피터, 그리고 다른 음악가들도 자주 우리와 함께 지상세계 여행을 하고는 하니까요. 래이디언트 윙 등 다른 많은 사람들도 참여하고요." "이처럼 늙은 푸른별은 말할 것도 없고요." 푸른별이 웃으면서 얘기했다. "푸른별, 늙었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휠리스도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주어 고맙군. 그러나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과 비교해 보면 꼭 젊었다고만 할 수도 없지 않소?" "그렇지만 선생님도 우리들처럼 젊게 느끼시지 않아요." 로저가 말했다. "물론 그야 그렇지요. 그대 말이 맞는구먼. 자, 이젠 정말 떠나야 할 때가 왔군요. 여러분들과 이처럼 잠시 동안 여담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 무척 기쁜 일이었오. 지상세계 사람들이라면 얼토당토 않은 문제들을 놓고도 심각하게 토론했어야 한다고 주장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었더라면 교훈적인 것은 되었을 망정 전혀 재미가 없었을 게 틀림없어요. 우리들처럼 즐기며 대화하는 게 훨씬 더 좋아요. 우선 흥미가 있어 좋고 결과적으로 크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손을 흔들어 전송하는 가운데 두 분 방문객들은 드디어 지상세계를 향해 떠났다. 전영계의 위대한 통치자와 만남 로저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 가지 크게 놀란 것은 어디를 가 보아도 통치하는 정부(政府)기관 같은 것을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는 것입니까, 좋다고 찬양을 하는 것입니까?" "몬시노르, 제가 감히 어떻게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영계와 영계의 구조에 대해 불만을 갖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곳 영계의 제도를 칭찬하는 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로저, 당신의 관찰이 정확했습니다. 아무리 두 눈을 부릅뜨고 어느 구석을 살펴보아도 통치기관 같은 것은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기능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십중팔구 당신의 생각은 정부 형태를 삼권분립 체제인 입법기관, 사법기관, 그리고 행정기관 등으로 우리 생활에 있어 압력을 넣고 통치하는 곳으로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한 가지 물어 볼 테니 솔직히 대답해 보세요, 로저, 이곳에 도착한 이래 어디에서든 안내판이나 근무 시간표, 무단출입자 엄벌에 처함, 잔디를 밟지 마세요……. 등등의 표지판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전혀 구경도 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런 표지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으니까요. 정말 재미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정말 그래요." "당신도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 느꼈겠지만……." 하며 루스가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훌륭하게 스스로의 언행을 자율원칙에 따라 다스리면서 살고 있답니다." "젊은 친구,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정부란 것은 천리법칙에 의한 운영입니다. 따라서 전우주를 통털어 최상의 통치제도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인간의 머리로부터 나온 어떤 형태의 어떤 정부보다 수억 수천만 배의 좋은 제도인 것입니다. 천리원칙은 강요가 없어요. 스스로 절차에 따라 운행 집행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상세계에서도 자연법칙은 쉽게 눈에 띄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끼리 서로간의 생각이 이심전심으로 교통하는 천리원칙에 대해 터득하고 있는 자가 극소수에 달할 정도니까요. 그러나 이곳 영계에서는 누구나 확실히 알고 있고 또 충분히 활용하고 있지요. 이처럼 완전한 자연법칙들이 거의가 지상세계에서는 전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로저 만일 당신이 지금처럼 생각의 힘을 활용할 수 있는 처지에서, 생각의 힘을 빌어 당신의 몸을 위기에서 모면해 나올 수 있도록 이동서켰더라면 당신은 아마 지금도 지상세계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리원칙만이 영계의 유일한 정부형태의 통치 방법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또 지켜야 할 법규들이 있습니다." "제가 정부에 관한 질문을 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법규에 관한 것 때문입니다." 영계는 이제 당신도 알다시피 여러 계층의 급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급마다 통치자가 따로 있습니다. 사실 통치자라고 하면 표현이 되지 않지만 그냥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그 통치자들이 통치를 하는 게 아닌가요?" "맞아요, 그냥 명칭이 통치자일 뿐 실질적인 통치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지상세계에서 사용하는 통치에 대한 개념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얘기가 되겠지요. 영계의 급은 빛의 강약에 따라 구별지어진 인격적인 급이며, 지상세계에서 말하는 빈부의 격차, 권력구조 등에 따른 계층간의 소속이나 지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도 경험했듯이 이곳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즐겁고 편리합니까? 한 정권이 무너지고 또다시 힘을 바탕으로 하는 권위적인 정권이 들어서는 그런 부조리가 영계에서는 있을 수 없으니까요. 정치가랍시고 얼토당토 않은 힘의 주의나 주장을 부르짖고 나오는 그런 독선자도 없고, 더구나 자격도 실력도 없이 권세를 부리기 위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그런 부도덕한 행위도 전혀 존재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지상세계 사람들이 그들의 당면하고 있는 최악의 문제점들을 진실로 제기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 영계에서 그 해결방법을 알려 줄 수가 있습니다." "몬시노를께서는 지금 그가 옛날 지상세계에서 설교하던 그런 설교단상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루스가 얼른 이렇게 한마디 했다. "정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고 가정해 봐요. 과연 몇 사람이나 내가 한 말을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들은 전(全) 영계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분들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도 알고 있다시피 우리는 지상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이나 사건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로저, 더구나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급영계(高級靈界)의 선생님들이 지상세계의 상황이나 현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쉽게 추리할 수 있는 일이고, 지상세계 사람들이 깨어 있기만 하다면 언제든지 그들이 원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상세계의 교회들이 정말 하찮은 작은 일들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딱하기 그지없으면서도 한편으로 보면 답답하고 두려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저, 당신은 그래도 이제까지 이곳 영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약간은 터득한 셈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젊고, 더구나 지상세계를 떠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두 세계를 비교해 볼 때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지상세계의 방법이 틀렸고, 영계의 방법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어떻습니까?" 몬시노르! 당신의 말씀 그대로 입니다. 이곳에서 바라보고 비교해 보면 두 세계의 모습이 확실히 보입니다. "내가 지상세계에 살던 때와 비교해 보면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의 이 짧은 경험만으로는 확실히 단정해서 말할 수가 없군요. 몬시노르." 로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몬시노르,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지상세계에 살고 있었을 때는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사람들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옛날에 비해 여러 분야에서 가치기준이 훨씬 떨어진 상태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들 하긴 합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도 제3차 세계대전을 운운하는 그 세계가 발전했다고 해보았자 뻔한 얘기 아닙니까? 그리고 또 교회들은 어떻구요?" "아직도 교회들끼리 교리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당신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던 이곳의 정부 형태가 계기가 되어 대화가 여기까지 왔군요. 내가 아까 이곳의 각급의 통치자들은 그 위치를 고수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그 통치자들의 대부분은 적어도 이곳에서 수천년씩을 살아온 분들이지요. 그런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누구도 추종을 불허하는 정도의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성과 동정, 이해력, 사려깊음, 인내력, 친절함, 그리고 개개인의 정신적 상태 등에 관한 지식이지요. 또 만유의 창조주이신 절대자께 충심으로 심정의 대변자가 되고, 그분이 경영하시는 섭리를 위해 희생의 생애를 산 분들입니다.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지만 이것들이 몇가지 자격조건 중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상세계 사람들은 통치자의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고 있지요. 그러나 로저, 당신도 알다시피 이곳 영계에서는 깨달음과 기억력 또한 절대적이지요. 한 번 듣거나 보면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느 급(級)의 영계를 막론하고 통치자들은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해박한 지식이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른 점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각급의 통치자들은 그들이 통치하고 있는 급의 영계보다 더 높은 급에 속하는 분들이지요. 통치자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낮은 급에 내려와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아아야 할 것은 이 모든 통치자들 위에 군림하여 전영계를 지휘하고 다스리는 최고의 유일한 통치자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앉아 있던 곳은 뒷방이었는데, 갑자기 누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오마의 목소리예요." 루스가 먼저 말했다. 우리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께로 달려갔다. 물론 오마가 그으 수행원인 애굽인과 함께 문 앞에 서 있었다. "정말 뜻밖이군요, 오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면 지나는 길에 들리셨습니까?" "그냥 내친 걸음에 들렸습니다. 일이라면야 항상 하는 것인데, 오늘은 공부를 떠나 이렇게 여유를 갖고 즐기러 나온 것이지요. 아마 이게 언제나 젊게 살 수 있는 비결인지도 모르구요. 그런데 로저는 잘 지냈습니까?" "기분이 만점입니다." 로저가 이번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보기에도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천만다행이요. 영계의 약효가 제대로 났던 모양이지? 환자가 이젠 완전히 회복된 것처럼 보이니 말이요. 그런데 사실은 오늘 여러분들을 찾아온 진짜 목적을 말해야 할 것 같군요. 내가 모시고 있는 선생님(Master)께서 근간에 당신들 급(高級靈界)의 영계를 방문하시게 되는데, 여러분들만 원한다면 이곳에 잠깐 들리시어 당신들을 만나 보겠다고 하십니다. 이것 뿐입니다. 제가 이곳에 방문한 목적을 또 당신들의 대답도 내가 벌써 짐작했습니다. "짐작하실 필요도 없겠지요. 만일 그 선생님께서 이곳에 오신다면 사적인 방문이실 테니 말입니다." "오마! 이것은 최고로 기쁜 뉴스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뉴스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이곳 영계에 생소한 로저로서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서로 감격적인 인사를 주고받았고 곧이어 오마 일행은 떠났다. "로저, 정말 이런 영광이 당신에게 이처럼 빨리 안겨지리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하기야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몬시노르, 도대체 찾아오실 그분이 어떤 분입니까?" "당신이 언젠가 우리에게 영계가 과연 얼마나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요? 그때 우리가 대답하면서 적어도 어떤 분은 지상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에 계셨을 것이 틀림없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기억이 납니까? 바로 그분께서 이곳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야말로 바로 내가 조금 전에 설명했던 전(全) 영계의 최고 통치자이시지요. 로저, 지상세계에서는 지금도 영계의 최고급에 사는 분들은 그 급을 떠나서 낮은 급을 방문하는 일이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유인즉 그처럼 선하고 순수하고 티없이 맑은 최고급 영계를 떠나 하급영계로 내려간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요, 수치라고 믿는 까닭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지상세계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요. 최고급의 영인들도 언제라도 원하면 어디든지 방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들이 그런 고급영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 분들의 정체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라는 그 분이……." 로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렇지는 않겠지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잘 알겠어요. 로저,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우주의 창조자인 바로 그분이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기야 우리가 당신에게 들려준 얘기만 가지고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이니겠지요. 구분은 누구나 만나 보게만 되면 곧 알아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수천 수만 명의 오마(Omar) 같은 고급영인도 그분을 선생님(Reloved Master)으로 모시고 있으니까요. 그분은 그분 스스로 임명해 준 각급(各級)의 통치자들이 제대로 일을 해내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전영계를 다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영계의 모든 급을 하나로 묶어 방대한 천상세계를 형성하도록 작업을 하십니다. 물론 전존재세계는 만유의 어버이이신 신의 주관하에 있는 것입니다. 로저, 그분이 얼마나 엄청나고 어마어마한 권능을 소유하고 계시는가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분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누구보다도 인자하시고 관대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위치는 우리가 구태여 표현해 본다면 절대적 권한을 가지신 왕(王)이시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스스로 자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로저, 당신도 이제 그 선생님을 보게 되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그분의 무한한 지식과 영력 그리고 지혜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분의 이 세 가지 특성을 묘사하는 데는 청색과 흰색, 그리고 황금색이 사용되고 있지요. 그분이 입고 계시는 도포자락을 보면 그 세 가지 색상이 얼마나 잘 조화있게 배치되어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방금 당신도 직접 보아서 알았겠지만 오마의 도포자락에도 삼색(三色)이 크게 표가 나지 않으면서도 조화있게 어울려 있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선생님의 도포는 오마의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지요." "약간 겁니 나는데요. 지상계에서 살고 있었을 때 저는 무슨 일만 생기면 곧장 눈에 띄지 않는 뒷자석에 조용히 앉아 있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 습관을 반복해야 할 경우인 것 같군요. 그분이 도착하시기 전에 얼른 숨어버려야 편할 것 같은데요." "천만에요. 로저. 당신도 우리와 함께 그 선생님을 뵈어야 해요." "저는 방해가 될 것만 같아서……." "로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하며 루스가 나서서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의 충고가 틀린 것이 전혀 없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에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그분을 맞도록 해요." 이처럼 로저를 안심시키고 있는 동안 우리는 다행히도 오마 일행을 전송하고 그대로 밖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분 친구들, 다름 아닌 프랜즈와 피터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반가운 인사들을 주고 받았으며 오마가 방금 이곳에 다녀갔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두 분께서도 우리와 함께 여기서 선생님을 보도록 합시다." 프랜즈가 나의 말을 받으며 대답했다. "우리를 쫓아 보내려 해도 십게 물러가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로저!" 하며 피터가 계속해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무엇 때문인지 이제 이해가 가는군요. 내가 방법을 가르쳐주지요." "로저, 그분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 보세요. 그런 후 정말 몸이 굳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이곳 영계에 와서 배운 방법을 활용하여 조용히 어디론가 몸을 슴기도록 하세요. 그렇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그분을 보자마자 그분과 함께 있고 싶어할 것이 틀림없으니까요. 프랜즈와 나도 처음으로 그분을 보게 되었을 때는 그렇게 느꼈었으니까요. 물론 그 후로도 우리는 그분을 수차에 걸쳐 뵈올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얘기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지요. 더욱이 그분으로부터 시작되는 예술에 대한 영감(Inspiration)이 멀리 지상세계에까지 미쳐지니 말입니다. 우리 예술인들은 이곳 영계에 와 보고서야 비로소 우리가 지상세계에서 예술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 영계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프랜즈, 내말이 틀렸습니까?" "정확합니다! 우리가 지상세계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는 우리가 과연 어디에서 그 모든 아이디어를 찾았는지 전혀 깨닫지도 못했었지요." 우리들은 집 앞에 나와 서서 집 주위를 환하게 비춰주는 작고 밝은 빛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 빛은 바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고귀한 분이 벌써 우리집 근처까지 당도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전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곧장 아름다운 꽃들로 수놓은 넓은 길을 따라 그 손님들을 영접할 장소까지 걸어 내려갔다. 그분들은 막 그곳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 귀한 분은 오마와 애굽인을 양쪽에 대동하고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중 애굽인은 하얀 장미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그 꽃다발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러개의 작은 꽃다발들을 함께 묶어 만든 꽃다발이었다. 오마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 친구분들, 다시 보게 되었군요. 프랜즈와 피터도 여기에 계셨군요. 정말 잘 됐습니다." 그 귀한 방문객은 우리의 손을 잡고 친절하게 인삿말을 건네주셨다. 프랜즈와 피터가 로저의 양팔을 부추기면서 도와 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그 방문객의 눈에도 금방 띄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로저의 팔을 필요 이상으로 힘을 주어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위대한 선생님께서 웃으시며 말을 건넸다. "마치 그 청년이 나를 보고 도망이라도 갈까봐 붙들고들 있는 모습 같구먼." 루스가 얼른 말을 받아 가지고 이곳에 온 지 어마 되지 않아 이곳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지라 약간 겁을 먹고 있어서 그들이 로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다. "로저, 이리 가까이 와 봐요." 하며 그분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무엇이 겁이 나는가? 내가 무섭게 느껴지는가? 자! 손을 이리 내 보아라. 이제 네가 갖고 있었던 두려움이나 공포는 영영 네게서 떠났느니라.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게 될 것이다. 나의 말이 어떻게 들으면 다시 환생한 것처럼 들리곤 하지?" 로저는 즉시 두려운 생각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피터와 프랜즈는 이제 그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젊은이를 풀어 줘도 될거야." 그때까지 두 사람은 물론 로저까지도 그들이 여전히 로저를 붙들고 있었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다가 그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했다. 우리는 곁에 서서 이와 같은 광경을 지켜 보면서 재미있게 웃었다. 물론 순수한 동기에서의 웃음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광경을 통해 영계의 최고급에서 내려오신 분들도 우리들 처럼 울적해 보일수도 있고 딱딱하고 웃음이 없는 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막상 그분들을 상대해 보고 나면 그 진실하고 뜨거운 인간적인 정과 사랑이 충만하심을 대낮 태양빛을 보듯 밝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는 한다. 로저는 그 귀하신 분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이런 일은 그분이 가시는 곳마다 볼 수 있는 흔한 광경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분은 얇고 영롱한 천으로 만든 눈처럼 흰 도포를 입으셨는데, 도포는 휘황찬란한 황금색으로 단을 입혔고 그 도포 위로는 밝게 빛나는 푸른색 망또를 입으셨으며 허리에는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진주 같은 보라색으로 되어 있느 띠를 두르고 계셨다. 머리는 황금색이었지만 그분이 고급영계에 거하실 때는 그 황금색이 황금빛줄기가 되어 광채를 뿜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 로저를 황홀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분의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용안이었다. 우리가 로저에게 얘기해 준 것처럼 그분의 나이는 지상세계의 계산법을 빌린다면 수백만 살이 넘었을 텐데도 로저는 그분의 용안에서 전혀 세월을 읽을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분께서 로저에게 그처럼 영원한 젊음을 보여주시면서 대해 주신 그이면에는 수억년의 역사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모시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루스가 마련한 그 안락 의자로 손님을 안내하고 우리는 그의 의자를 중심으로 주위에 둘러 앉았다. 물론 우리의 이와 같은 행동은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즐겁기만 했다. 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차례로 말씀을 해주셨는데,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인간들처럼 얘기해 주셨다. 가끔 지상세계의 학교에서 보듯 엄하기 이를 데 없는 선생님 앞에 꿇어앉은 그런 학생들의 모습이 절대로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분이 말씀하고 계시는 도중에도 언제나 묻고 대답하고 하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얘기 조둥에 박장대소를 하고 웃는 일도 많았다. 오마가 있는 곳에 재미있는 농담이 없을 수 없는 데다가 피터와프랜즈까지 곁들였으니 어찌 즐거운 웃음이 없겠는가. 로저는 그들이 그 귀하신 손님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그렇게 자유로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데 대해 경이감을 금치 못했지만 그는 곧장 끼어들어 자유로이 얘기하면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그분은 피터와 프랜즈를 향해 함께 음악에 종사하는 모든 음악인들의 노고를 치하하셨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예술적 영감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시기도 했다. 로저로서는 그분과 두 분 음악가들이 함께 전문적인 음악용어를 써가면서 음악에 대해 열렬한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흥미있다 못해 신지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그분은 로저의 장래에 대해 말씀을 꺼내셨다. 물론 로저는 즉시 정신이 번쩍들 정도로 관심을 갖고 듣기 시작했다. "로저, 너에 대한 각양각색의 소식들이 각처로부터 들어온다." 그분이 말씀이 계속됐다. "오마와 몬시노르의 말에 의하면 너는 꽃을 생산하는 분야에 굉장한 관심을 보인다고 하더구나." 로저는 그분의 말씀을 받아 그가 화원을 방문했던 일과 그 화원 주인이 언제라도 로저를 받아 꽃제조에 관한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사실들을 설명했다. "그것 참 잘된 일이구나. 너도 직접 보아서 알고 있겠지만 이곳에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그런 일들을 통해 네 자신이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됨은 물론이요, 이곳 영계에서도 보다 높은 급의 영계로 진급한느 데 필요한 실적을 쌓게 되는 것이니라. 너도 이제 좀더 지내면서 보면 알 것이다만 이곳 영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맡은 바 일을 하면서 추호도 자신에게 돌아올 상이나 보수를 생각함이 없이 전체적인 목적을 위해서 헌신하고들 있다. 너도 그렇게 될 것이 틀림없겠지만 말이다. 어느 때라도 뛰어들어 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주저말고 시작하도록 하여라. 그렇다고 해서 네거 지금 즐기고 있는 이 영계탐방의 여행을 당장 중지하라는 말은 아니다. 네가 속하는 이 급(級)의 영계나 전영계 어느 곳에도 네가 계속하고 있는 이러한 탐방을 통해 지식과 경험을 쌓는 데 대해 제재를 가할 자는 없느니라. 그러나 때가 되면 네 마음이 너로 하여금 순방을 하면서 간접적으로만 배우는 것보다 직접 무슨 일인가를 하면서 봉사하는 것이 더 보람된 것이라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네 마음 속에도 지금 그런 생각이 싹트고 있을 것이다. 네게는 충고와 자문을 해줄 그런 친구들이 사실상 더 많이 필요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짧기는 하지만 이번 순방 기간을 통하여 너는 벌써 뗄래야 뗄 수 없는 친절한 사람들을 사귀었고, 또 이곳은 천리원칙상 서로 헤어진다거나 관계가 멀어지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없는 곳이다. 네가 여기 있으면 우리 모두가 언제나 너와 함께 이곳에 있는 것이다. 만일 네가 음악이나 미술에 뛰어들고 싶다면 지상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훌륭한 대가들을 언제라도 소개해 줄 수 있느니라. 음악으로 말한다면 지금 이곳에도 두 분이나 함께 있지 않느냐? 로저야! 언제라도 좋으니 무슨 일이 하고 싶거든 시작해 보도록 하여라. 무슨 일이건 하게 되면 절대로 버리거나 망치는 게 없는 것이 이곳 영계의 천리인 것이니까. 즉 뿌린 대로 거두는 원칙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니라. 자! 이제는 또 가 봐야 하는데, 떠나기 전에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기념으로 무얼 좀 주고 가야 하겠군. 옆에 있던 애굽인 수행원이 장미 꽃다발을 재빨리 그 분에게 드렸다. "내가 이 꽃다발을 나의 사랑과 축복의 뜻으로 여러분께 내리겠소. 로저! 그대도 이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꽃을 머지 않아 창조해 낼 수 있겠지. 그런 때가 오면 나의 이 말을 기억하도록 하여라. 큰 힘이 될 것이다.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바로 이 백장미이니라. 여기 있는 너의 선배들은 모두 이 아름다운 백장미가 내집 정원에 만발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오마! 이제는 돌아가도록 합시다. 여러분 모두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대들을 지켜주기를 바라노라." 그분은 이렇게 말을 맺고 떠나셨다. 내가 말을 꺼냈다. "어이, 로저! 도망가지 않고 그분을 만나 뵌 것이 기쁘지 않아요?" "우리가 로저를 도망가지 못하도록 붙들어 놓은 것이 천만다행이었지 않나요?" 피터와 프랜즈가 동시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로저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기쁘고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우리들의 손을 붙들고 춤을 추면서 온 방안을 뛰어다닐 정도였다. 피터와 프랜즈도 덩달아 흥이 나서 피아노 앞에 앉더니 즉흥음악을 듀엣으로 열렬히 연주해 주었고, 로저는 루스의 손을 붙들고 온 집안을 뛰어다니면서 계속해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얼마 후 우리들의 열기는 조금은 가라앉았고, 사실상 이러한 기쁨과 흥분들은 우리들의 생활 속에 크게 긍정적인 요소가 되어 작용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조금 전 맛본 그 기쁨과 흥분은 흔히 지상세계의 종교인들이 얘기 하는 그런 식의 영적인 도취가 아닌 것이다. 물론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기쁨과 흥분을 통해 얻은 영적인 가치도 엄청났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그 기쁨과 흥분의 감정은 밝고 신선하고 행복한 그런 감정이었지, 추호도 어떤 종교적인 의식에서 보는 그런 제도적인 성스러움이나 경건함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 개체에게 주는 그 기쁨의 전율이 더없이 충만하기만 했다. 그분 위대한 선생님께서도 우리의 영생을 위한 교훈이나 힘으로만 남아지는 그런 뜻에서만 사랑을 베풀어 주신 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을 위한 실적은 자연스러운 영적 현상과 과정에서 쌓아지는 것이지 인위적이고 제도적인 어떤 불가능한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보여준 것처럼 어떤 이유에서든 기쁨의 극치는 마음껏 표현해도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이다. 세 분의 손님이 떠나신 뒤에도 우리는 한참 동안을 서로 얘기를 주고받고 하다가 급기야는 로저가 화원에서 일하고 싶어한다는 데에 다시 초점을 모으고 의논을 했다. 로저가 화원에서 일을 시작한 후에도 틈틈히 그가 보고 싶거나 더 알아보고 싶은 분야가 있으면 함께 안내하여 영계 전역을 둘러 보기로 했다. 내가 아니면 루스가 꼭 동행할 것을 약속했고, 어디를 가더라도 안내를 해주기로 했다. 사실 프랜즈와 피터까지도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우리들을 대신해서 로저를 안내해 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이제는 화원의 책임자에게 새로운 문하생이 하나 찾아간다고 알리는 일만 남았다. 우리는 즉시 생각의 힘을 빌어 화원으로 찾아갔다. 화원 주인은 로저를 기쁘게 맞아 주었고 머지않아 훌륭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창조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가르쳐 주겠다고 다짐했다. 특별히 선생님께서 주신 선물로 인해 이제는 로저가 아끼고 사랑하는 꽃이 된 백장미를 창조하는 데 전력을 다해 지도해 줄 것을 몇 번씩이고 다짐했다. 맺음말 로저가 화원에서 일을 하게 된 후 우리들의 영계 여행은 한동안 종단되었다. 처음 얼마간은 그를 자주 만나 보지도 못했다. 그는 꽃창조의 기술을 재빨리 터득하여 이제는 우리집 정원의 산책길 양편에도 그가 창조한 백장미가 자라고 있을 정도다. 일단 백장미를 창조하는 단계까지 기술을 습듯한 로저는 이제 약간 숨을 돌린 즛 우리와 더불어 우리가 맡아서 수행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하곤 한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이층에 서재를 꾸미고 지금 그가 특별히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새로운 꽃의 형태에 관한 수많은 책들로 온 방을 장식해 놓고 있다. 그는 또 정원 조경에도 관심을 갖고 우리집 정원을 놓고 있다. 그는 또 정원 조경에도 관심을 갖고 우리집 정원을 세밀히 검토하고 연구하면서 분주히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우리 정원에도 큰 변화가 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쁜 마음으로 뛰어들어 성취한 사람의 열성 때문인지 날로 발전하고 있다. 로저와 알고 지내는 친구들은 이처럼 로저가 연구하고 익힌 새로운 기술로부터 많은 것을 얻기도 한다. 래이디언트 윙의 얘기에 의하면 로저의 도움으로 그의 정원에는 요즘 최고로 아름답게 완성된 꽃들이 수없이 만발해서 정원이 휘황찬란함은 물론이요, 그의 실력을 보고 정원 주인도 그저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고 한다. 프랜즈와 피터도 로저로부터 그들의 숙소를 더욱 빛내게 해주는 꽃들을 계속해서 공급받고 있다고 하며, 피터의 말에 의하면 최근에는 로저가 숲속에 있는 그들의 집 근처의 땅을 눈여겨 보면서 피터의 동의를 얻어 무언가 그가 이상시하는 작품을 만들어보겠다고 각오가 대단하다고 한다. 숲속의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 친구도 물론 소외당하고 지낸 것은 아니다. 로저도 그를 자주 찾아다니고 해서 둘은 이제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었다. 독자들의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저자가 된 나는 다음 사항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즉 내가 여러분들과 함게 했던 우리의 젊은 로저의 영계탐방기(비록 짧기는 하지만)는 전혀 가공 인물을 중심삼고 엮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실재의 인물을 중심삼고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소개한 것뿐이다. 로저는 실제의 인물로서 그가 지상세계를 떠나는 시점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의 모습을 그대로 적어 본 것이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수천 수만의 인간들이 이곳에 당도하여 겪는 과정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저의 얘기는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이상하다거나 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판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겪었고 또 겪어야 할 광범한 영계에서의 노정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젊고 씩씩한 청년이며 두고 두고 우리들이 좋아하며 지낼 친구라는 점이다. 그의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는 위트와 맑은 모습이 언제나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있으며, 그의 친절함 또한 누구 못지않게 깊고 크다. 강한 의지력과 깊은 사고를 통한 성찰력도 그의 보배가 되겠다. 그는 또 나이 어린 소년 소녀들과도 아주 잘 어울리는 좋은 친구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그는 나와 루스를 따라 어린이들의 영계를 다녀왔는데, 그곳은 루스가 언제나 즐겨 찾아가 음악을 지도해 주는 곳이고, 또 나는 옛날 얘기 선생님으로 소문이 난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 갈 때마다 로저는 주저함없이 그들과 섞여 하나가 되곤 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의 정열은 거기서만 만족하지 않아 요즈음은 루스와 나에게도 우리가 맡아 수행하고 있는 일 외에 자기처럼 원예에 관심을 갖고 배워 보라고 자뭇 성화이다. 만일 그의 노력이 허사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로저를 선생님으로 모시고 그로부터 그의 탁월한 화훼기술을 배우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부언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이 책이 기록한 영계의 경험과 대화들은 지극히 크고 방대한 영계생활의 규모에 비하면 지극히 보잘 것 없고 작은 분야밖에 되지 못한다는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최고로 중요하고 위대한 일들 만을 관계하고 사는 것이 영계인들이라고 믿는 지상세계의 소수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영계는 본래 창조 당시부터 인간들이 지상세계의 삶을 마치고 와서 기쁨과 행복 속에 살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우리들은 지상 세계에서처럼 끊임없는 기도와 찬송으로 지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 자체가 기도요, 찬송이기 때문이다. 영계의 다음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육신을 벗은 인간들이 영인으로서 절대자 신을 중심하고 영원토록 살아가는 심정세계요, 예술세계이다. 우리는 또 지상세계인들처럼 그 얼토당토 않은 신학문제를 놓고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없으며, 그런 시간이 있으면 훨씬 유용한 예술창조에 시간을 투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시간과 정력을 필요없이 낭비하는 대신 끊임없는 창조의 작업을 통해 기쁨을 얻게 되고, 또 영원을 두고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들간의 대화는 언제나 정답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또 평범하다. 종교적 이념이나 논리를 들어 남에게 얘기하는 일이 없으며 성서를 이용하여 얘기하는 법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영계에 들어오자마자 무한한 지혜와 혜안을 부여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영적인간들로서 남들이 기대하는 타율적인 우리가 아니고, 그저 자율적인 우리 자신들이라는 점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빠뜨릴 수 없는 한마디를 이미 지상세계를 떠난 독자 여러분들의 친구들이 함께 모두 무릎을 꿇고 나와 더불어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전하는 바이다. '절대자 신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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