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2 (2)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2 (2)
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빌딩 위의 그 사람은 자신이 나머지 너희와 다르다고 상상하는 자기 망상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나는 신이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는 거짓으로 자기 증명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더 크고 더 많은 권능을 지닌 존재로 구별하고 싶어 했다.
이것은 자기애ego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각기 분리된 자기애로 본래 ‘하나’인 것을 복제하거나 증명할 수 없다.
빌딩 위의 그 남자는 자신이 신임을 증명하려 함으로써 만물과 자신의 통일이 아닌 분리만을 증명했다. 결국 그는 ‘신성 아님’을 증명함으로써 신성을 증명하려 했으니,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예수는 통일성을 증명함으로써, 또 그가 바라보는 곳 어디에나(그리고 바라보는 사람 누구에게나) 통일성과 전체성을 봄으로써 신성을 증명했다. 이 점에서 그의 의식과 내 의식은 하나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불러내는 건 무엇이나 그 ‘성스러운’ 순간에 그의 ‘신성한 현실’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기적을 이루려면 “그리스도의 의식”만 있으면 된다! 그게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고.......
사실 그렇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단순하게 만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의식을 이루었다. 나사렛 예수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가 되었다.
너 역시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되고자 하면, 그렇게 되길 선택하면. 하지만 그것은 네가 날마다 순간마다 내려야 하는 선택이다. 그것을 네 삶의 목적 자체로 삼아야 하는 선택이다.
사실 그것은 네 삶의 목적이다. 단지 네가 그것을 모를 뿐이다. 하지만 네가 그것을 안다 해도, 네가 자신의 바로 그 절묘한 존재 이유를 기억해낸다 해도, 네가 왔던 그곳에 이를 방법을 알게 될 것 같지는 않구나.
그렇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어떻게 해야 지금 있는 곳에서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나요?
네가 다시 말해주겠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저는 35년 동안 “구하고” “두드려” 왔습니다. 제가 그런 식의 설교를 지겨워해도 용서해주시겠지요?
환멸을 느낄 만큼은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사실 네가 애쓴 데 대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해야겠지만, 말하자면 “노력 A”라고 해야겠지만, 나는 네가 35년 동안 구하고 두드려왔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그 말에 동의하진 못하겠다.
네가 구하고 두드리는 걸 35년 동안 했다 말았다 했다는 데는-대개는 말았다 쪽이지만-동의해줄 수 있지만.
이전에 네가 아주 어렸을 때는, 너는 문제거리가 생겼을 때라야, 뭔가가 필요할 때라야, 내게 왔다. 나이 들어 성숙해지자 너는 그게 신과 맺는 올바른 관계가 아닐 성싶다는 사실을 깨닫고, 좀 더 의미 있는 것을 창조하려 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나는 대개 소일거리일 뿐이었다.
더 시간이 지나서 신과의 영적 교류로만 신과의 결합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너는 교류를 도와주는 것들을 실천하고 행했다. 하지만 너는 이것들조차 산발적이고 일관성 없이 시도하곤 했다.
너는 명상에 잠겼고, 의식을 거행했으며, 기도와 찬송으로 나를 불러냈고, 네 속에 있는 ‘내 영혼’을 깨웠다. 하지만 네 마음에 들 때만, 네가 영감을 느낄 때만 그렇게 했다.
이런 식이라도 나(神)에 대한 네 체험이 영광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너는 네 삶이 95%를 분리의 환상에 사로잡혀 보냈다. 궁극의 실체에 대한 깨달음으로 깜박이는 순간들을 간신히 여기저기에 가지면서.
너는 지금도 여전히 차 수리와 전화요금 청구서와 네가 인간관계들에서 원하는 것들에 헌신하는 걸 삶이라 생각한다. 즉 너는 자신이 창조한 드라마의 창조자가 아니라, 그 드라마에 헌신하는 것을 삶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계속해서 드라마를 창조해내는 까닭을 깨달아야 하는데도, 너는 그 드라마를 연기해내느라 너무 바쁘다.
너는 삶의 의미를 깨닫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너는 네 깨달음대로 살지 않는다. 너는 신과 교류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너는 그 방법대로 행하지 않는다. 너는 자신이 그 길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너는 그 길을 따라 걷지 않는다.
그러 나서는 내게 와 자신이 35년 동안 줄곧 구하고 두드려왔노라고 말한다.
나는 네 환상을 깨뜨리긴 싫지만.......
이제 내게 환멸을 느끼는 건 그만두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할 때가 왔다.
자, 내가 말해주마. “그리스도가”가 되고 싶은가? 날마다 순간마다 그리스도처럼 행동하라. (너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가 네게 그 방법을 보여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처럼 되라. (너는 할 수 없는 게 아니다. 그가 네게 가르침들을 남겼다.)
네가 그것을 구하려고만 하면, 너는 이 점에서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내가 날마다 순간마다 네게 지침들을 주고 있으니, 나는 네게 어느 쪽으로 돌아야 하는지,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돌려야 할 방향과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대답과 행해야 할 행동과 해야 할 말들, 즉 네가 진실로 나와 교류하고 결합하려고만 하면, 어떤 현실을 창조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작고 조용한 내면의 소리이다.
그냥 내게 귀 기울이기만 하라.
전 그렇게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은데요.
천만에! 지금 이 순간에도 넌 그렇게 하고 있다! 다만 이제부터는 항상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렇다고 항상 노란 종이철을 끼고 다닐 수는 없지요. 모든 걸 그만두고 당신에게 편지 쓰는 일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 멋진 대답들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기 바라면서요.
고맙다. 그 대답들이 멋지다니! 그런데 여기 또 하나 멋진 대답이 있다. 아니다, 넌 할 수 있다!
내 말뜻은, 만일 누군가가 네게 신과 직접 연결될 수 있다고, 즉 직접적인 연결고리와 직접적인 연결선을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네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해봐야 잊지 말고 종이와 연필을 항상 곁에 두는 것뿐이라고 한다면, 너는 그렇게 하겠느냐?
음, 물론 그렇게 하죠.
그런데 너는 방금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니 “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어찌된 일이냐? 너는 뭘 말하고 있는 거냐? 어느 쪽이 네 진실이냐?
그런데 이제 ‘좋은 소식’은 너는 종이철과 펜조차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함께 있다. 나는 펜 속에 살지 않는다. 나는 네 속에 산다.
그게 정말이죠?........ 제 말은 그 말을 진짜로 믿어도 되냐는 겁니다.
물론 너는 믿어도 된다. 그것은 내가 태초부터 너희에게 믿어달라고 부탁해왔던 것이고, 예수를 포함하여 모든 선각자들이 너희에게 해왔던 말이다. 그것은 중심되는 가르침이며, 궁극의 진리이다.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시간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 이젠 믿습니다. 예전의 어느 때보다 더 그렇다는 얘깁니다.
좋다. 그렇다면 나를 써먹어라. 종이와 펜을 꺼내드는 게 도움이 되면(그리고 네게는 그게 상당히 잘 맞는 것 같다는 말도 해야 하리라), 종이와 펜을 꺼내들어라. 더 자주, 날마다, 그래야 하다면 시간마다.
내게 가까이 오라. 내게로 가까이!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라.
묵주 기도를 하고, 돌에 입맞추고, 동쪽을 향해 절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추를 흔들고, 근육을 움직여보라.
아니면 책을 쓰라.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라.
너희는 각자 나름의 틀을 지니고 있다. 너희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이해해왔고 나를 창조해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가 남자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가 여자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둘 다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느 쪽도 아니다.
너희 중 일부에게 나는 순수에너지이다. 또 일부에게는 너희가 사랑이라 부르는 궁극의 감정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너희는 그냥 ‘내가 ~ 이다’I Am고 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나는 ~ 이다.’
나는 네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이고, 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햇살이며, 네 얼굴 위에서 춤추는 비다. 나는 공기 속 꽃향기이고, 향기를 뿜어내는 꽃이며, 향기를 실어 나르는 공기이다.
나는 네 맨처음 생각의 시작이고 네 마지막 생각의 끝이다. 나는 네 가장 멋진 순간에 반짝였던 아이디어이며, 그것을 실현하는 영광이다. 나는 지금까지 중에서 네 가장 사랑스런 일을 추진케 한 느낌이며, 그런 느낌을 몇 번이고 다시 갈망하는 네 부분이다.
네게 잘 맞는 일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예배든 의식(儀式)이든 논증이든 명상이든 생각이든 노래든 말이든 행동이든 간에, 네가 “다시 연결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라.
나를 기념하며 그렇게 하라.
3
되돌아가 당신이 제게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해보면, 제 보기에 중요한 논지는 이런 것들인 것 같습니다.
*삶은 계속되는 창조과정이다.
*선각자라면 누구나 갖는 비밀은 마음을 바꾸길 그만두고, 항상 같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니no란 말을 하지 마라.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을 “불러낸다”.
*삶은 창조 과정일 수도 있고 반응 과정일 수도 있다.
*영혼은 창조하고 정신은 반응한다.
*영혼은 정신으로는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다.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가장 많이 얻고 가장 적게 잃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법)알아내려 하지 말고,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가에서 시작하라.
*네 느낌은 네 진실이다.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자신에게 최선이다.
*생각은 느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자신이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관념이다. 생각과 느낌을 혼동할 때 진실은 길을 잃고 모호해진다.
*느낌으로 되돌아가려면 정신에서 벗어나 감각으로 돌아가라.
*자신의 진실을 알고 나면 그것에 따라 살아라.
*부정적인 느낌은 절대 참된 느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제나 자신과 남들의 이전 체험에 근거한, 어떤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다.
*이전 체험은 절대 진리 지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순수 진리’는 재연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창조되는 것이기에.
*어떤 것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바꾸려면 지금present 순간(즉 “미리 보내진”pre-sent 순간)에 있어라. 자신에게 보내졌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상태인 순간에....... 달리 말해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어라.
*과거나 미래는 단지 생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단 하나의 현실’은 ‘미리 보내진’ 순간뿐이다. 거기에 머물러라!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신/여신/진리와 연결된 상태로 머물기 위해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 하라. 예배와 기도와 의식과 명상과 읽기와 쓰기와, 그리고 ‘존재 전체’와 접촉한 상태로 머물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면 뭐든” 멈추지 마라.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훌륭하다! 충분하다. 아주 좋다. 내 말을 이해했구나. 이제 너는 그것에 따라 살 수 있겠느냐?
이제부터 그러려고 합니다.
좋다.
그렇다면 이제 지난번 진도로 되돌아가서 시간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미리 보내진(pre-sent) 시간 같은 건 없다!
내가 단언하지만, 너는 예전에도 이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너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너는 이해하고 있다.
이 시간말고는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 순간말고는 어떤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지금” 뿐이다.
그럼 “어제”와 “내일”은요?
그것들은 네 상상이 빚어낸 허구이고, 네 정신이 지어낸 구조물이다. ‘궁극의 현실’에서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껏 일어난 모든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도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다.
이해를 못하겠는데요.
너는 이해할 수 없다. 완전하게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해하기 시작할 수는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필요한 것은 시작을 위한 이해뿐이다.
그러니....... 그냥 듣고 있어라.
“시간”은 연속체가 아니다. 그것은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존재하는 상대성의 요소이다.
시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개인들에게는 출생에서 죽음으로 달려가고, 우주에게는 어떤 유한점(有限點)에서 또 다른 어떤 유한점으로 달려가는 소위 시간줄로 시간을 생각하지 마라.
“시간”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다. 시간을 ‘지금이라는 영원한 순간’을 나타내는 물레가락으로 생각하라.
이제 그 물레가락 위에 여러 장의 종이가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라. 차곡차곡. 이것들이 시간 요소들이다. 하나하나의 요소는 뚜렷하게 구별되지만, 다른 것들과 동시에 존재한다. 물레가락 위의 모든 종이들은 한꺼번에 존재한다! 앞으로 일어날 이들도-예전에 일어났던 일들도.......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 이 순간, 영원한 지금 순간뿐이다.
모든 일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으며, 그래서 내 영광은 바로 지금 찬미받고 있다. 신의 영광을 기다리는 일 같은 건 없다. 내가 시간을 이런 식으로 만든 건 그냥 내가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인 것’이 너무 행복해서 그냥 그것이 내 현실로 드러나길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꽝’! 하고는 ‘그 모두가’ 여기에,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 있게 하였다.
여기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것은, ‘모든 것 전부’는 그냥 ‘존재한다’.
이 ‘있음’ 속에 너희 체험과 너희의 가장 위대한 비밀이 있다. 너희는 그 ‘있음’ 안에서 너희가 택하는 어떤 “시간” 어떤 “장소”로도 의식적으로 옮겨갈 수 있다.
우리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다. 너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다. 사실은 너희 모두가 그렇게 해왔다. 너희는 주로 꿈을 꾸면서 일상적으로 그렇게 한다. 너희가 그것을 자각하고 있을 순 없기에, 너희 대다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아교풀처럼 너희에게 달라붙어, 때때로 이 에너지에 민감한 사람들이 너희의 “과거”나 “미래”의 일들을 집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찌꺼기를 남긴다. 그들은 이 찌꺼기를 느끼거나 “읽는다”. 그래서 너희는 그들을 점장이와 영매라고 부른다. 때로는 한정된 의식 안에서나마 “전에 이곳에 있었음”을 너 자신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의 찌꺼기가 남는 경우들도 있다. “이 모든 일을 예전에 한 적이 있다”고 깨달을 때 네 존재 전체는 갑자기 덜컹거린다!
기시감(期視感)요!
그렇다. 또는 네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평생 알고 지냈던 것 같은, 그 사람의 영겁의 시간 동안 알고 지냈던 것 같은 멋진 감정!
그것은 장엄한 느낌이고, 경이로운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된 느낌이다. 너는 그 영혼을 항상 알고 지냈다!
항상은 바로 지금의 일이다!
그렇게 너희는 물레가락 위에 놓인 네 “종잇장”에서 자주 올려다도 보고 때로는 내려다도 본다. 또 다른 종잇장들도 보곤 한다! 너희는 그곳에서 자신을 보곤 한다. 종잇장마다 네 일부가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항상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 것이다. 지금껏 너희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은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잠깐만요! 나이 든 영혼들old souls이란 개념은요? 어떤 영혼들은 다른 영혼들보다 더 “나이 들지” 않았나요?
다른 것보다 더 “나이 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그것을 ‘한꺼번’에 창조했으며, ‘그 모두’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
너희가 말하는 “나이 든” 체험과 “젊은” 체험이란 건 특정 영혼의 자각 수준, 즉 ‘존재 측면’Aspect of Being과 관계가 있다. 너희는 오로지 ‘존재의 측면들’, 단지 존재의 부분들일 뿐이다. 각 부분은 자기 속에 새겨진 ‘전체’에 대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 모든 요소들이 다 이 각인을 지닌다.
“자각”awareness이란 이런 의식이 깨어나는 체험이다. ‘전체’의 개별 측면이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정말 글자 그대로 개별 측면이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 다음엔 차츰 남들others 모두를 의식하게 되고, 또 그 다음엔 남이란 없다는 것, ‘모두가 하나’임을 의식하게 된다.
그런 다음엔 결국 나를 의식하게 된다. ‘장대한 나’를!
이런! 당신은 정말로 당신을 좋아하시는군요. 안 그렇습니까?
너는 안 그런가-?
그래요! 전 당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다. 그리고 내 생각엔 너도 위대하다! 너와 내가 불일치하는 유일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너는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제 온갖 결점과 온갖 잘못들, 온갖 죄악들을 눈 앞에서 보는데 어떻게 자신을 위대하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너희에게 말하노니, 어떤 죄악도 없다!
그게 사실이었으면 좋겠군요.
너희는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그것도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이다! 묘목이라고 해서 그 나무가 덜 완벽한 건 절대 아니다. 조막만한 아기도 어른과 똑같이 완벽하다. 그것은 완벽 자체이다. 어떤 일을 할 수 없고, 어떤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게 그 아기를 좀 덜 완벽한 존재로 만들지는 않는다.
어느 아기나 실수를 저지른다. 일어서서 뒤뚱뒤뚱 걷다가는 넘어진다. 아기는 엄마 다리에 매달려 흔들거리면서 다시 일어선다. 이것이 그 아기를 불완전하게 만드는가?
완전히 그 반대이다! 아기의 그런 모습은 완전히 통째로 반하게 하는 완벽 그 자체이다.
너희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그 아기는 나쁜 일을 저지르진 않았다구요! 일부러 반항하고, 사람을 해치고, 자신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았지요.
그 아기는 옳고 그른 걸 알지 못한다.
바로 그겁니다.
너희 역시 그렇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저는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짓이고, 다른 삶을 사랑하는 건 옳은 일이며, 해치는 건 나쁜 짓이고, 상황을 더 낫게 만들려고 치유하는 건 옳은 일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닌 걸 가지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솔직하지 못한 건 나쁘다는 것도 압니다.
나는 그 “나쁜 짓들”이 옳은 일일 수도 있음을 하나하나 다 예로 들어보일 수 있다.
지금 저를 놀리시는 군요.
절대 아니다. 그냥 사실이 그러할 뿐이다.
만일 당신이 모든 규칙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도 동의합니다.
규칙에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규칙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히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는 게 나쁜 일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그것은 너희가 무엇을 하려는가에 따라 다르다.
좋습니다. 좋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착한 일이 되는 건 아니죠. 누구나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쁜 일을 해야 할 때가 종종 있죠.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 “나쁜 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느냐? 그것들은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니죠. 절대 그렇지 않죠.
그렇다면 그걸로 좋다.
너는 여기서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느냐?
너희는 발길 닿는 대로 규칙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다른 건 보이지 않는다고? 그거야말로 아주 잘된 일이군.
그것이 바로 너희가 지금 하기로 되어 있는 일이다!
삶의 모든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체험하는 과정이다.
자신의 시야를 넓혀감에 따라, 너희는 시야를 포괄할 규칙들을 새로 만든다! 자신에 대한 관념을 키워감에 따라, 너희는 그 관념을 감싸안을 수 있는 새로운 할 것과 말 것, 돼와 안돼를 창조한다. 이것들은 붙잡아둘 수 없는 것을 “붙잡아두는” 경계들이다.
너희를 “너희” 속에 붙잡아 둘 순 없다. 왜냐하면 너희는 ‘우주’처럼 끝없는 존재이기에. 하지만 너희는 경계들을 그려보고, 그 다음엔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자신의 끝없음에 대한 개념을 창조할 수는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너희가 특정한 어떤 것으로서 자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끝없는 것은 그냥 끝없는 것이다. 한없는 것은 그냥 한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기에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느니, 특별히 어딘가에 있을 수 없다.
신은 어디에나 있다. 따라서 신은 특별한 어딘가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특별히 어딘가에 있으려면, 신은 다른 어딘가에는 있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은 신에게 불가능하다.
신에게 “불가능한” 일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신이 신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신은 신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신이 신답지 않을 수는 없다. 신은 자신을 “신이 아니게” 만들 수 없다.
나는 어디에나 있으며, 신에게 존재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나 있기에,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어디에도 없다면’ NOWHERE 없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여기에’ NOW HERE.
전 그 말이 좋아요! 당신은 1권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더랬죠. 하지만 저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당신이 계속하도록 놔둘 참입니다.
참 친절하구먼. 그렇다면 너는 이제 그 말도 더 잘 이해하느냐? 너희가 “옳음”과 “그름”의 관념을 창조해낸 것은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기 위해서란 걸 알겠느냐?
이런 규정들, 즉 경계들이 없었다면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이해하겠느냐?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너희의 관념을 바꿀 때마다, 너희도 나처럼 계속해서 그 경계들도 바꾼다는 사실을 이해하겠느냐?
음,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경계들-저 자신의 개인 경계들 말입니다-을 그렇게 많이 바꾼 것 같지는 않는데요. 죽이는 건 제게 언제나 나쁜 짓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도 언제나 나쁜 것이었지요.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 자신들을 다스리는 주된 개념들은 항상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이 그 개념들에 동의했고요.
그렇다면 너희는 왜 전쟁을 하느냐?
언제나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어떤 상자에도 썩은 사과는 있기 마련이죠.
지금부터 내가 뒤이은 구절들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지금 너희의 사고체계에서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들 중 상당수를 깨뜨릴 것이다. 하지만 이 대화가 너희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자면, 나로서는 너희가 이런 식의 사고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 두 번째 책에서 이런 개념들 중 일부를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로 가자면 당분간은 꽤 덜컹거릴 것이다. 준비되었느냐?
예, 그걸 것 같습니다. 미리 주의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지금부터 하시는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 극적이고 힘듭니까?
나는 이제부터 어디에도 “썩은 사과”는 없다고 말하려 한다. 단지 세상사에 대한 너희의 관점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세상형(型)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그들의 세상형에서 볼 때, 온당치 못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도 말하려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형”이 뒤죽박죽인 게지요. 저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압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하지 않는데 내가 한다고 해서, 그게 나를 미친 사람으로 만들진 않습니다. 미친 쪽은 그 사람들입니다!
그게 바로 사람들이 전쟁을 시작할 때의 태도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게 유감이구나.
압니다, 저도 압니다. 저는 일부러 이런 이야길 하는 겁니다. 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것을 여기에 그대로 옮기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어떤 식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까?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너는 그 사람들에게 “옳음”과 “그름”에 대한 관념은 문화마다, 시기마다, 종교마다, 지역마다....... 심지어 가족마다, 개인마다 다르고, 달라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너는 그 사람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한때는 “옳다”고 여기던 일이, 예들 들면 마법처럼 보이는 일을 한다고 해서 사람을 화형에 처하던 일이, 오늘날에는 “잘못된” 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 된다.
너는 그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은 시간상으로만이 아니라 단순한 지리상의 차이로도 달라지는 규정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 된다. 너는 그 사람들에게 너희 행성에서 몇몇 행위들은(예컨대 매춘) 한 곳에서는 불법이지만, 길을 따라 겨우 십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다른 곳에서는 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면 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는지 여부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그 일을 저지른 곳이 어디인가의 문제이다.
이제 나는 1권에서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하려 한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 말을 납득하고, 이해하기가 대단히 대단히 힘들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히틀러는 천국으로 갔다.
사람들이 이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 책과 우리가 만들고 있는 3부작의 나머지 책의 목적은 준비readiness를 갖추게 하는 데 있다. 새로운 틀, 새로운 이해, 더 넓은 시야, 더 위대한 관념을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는 데.
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고 싶어할 겁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냐고요? 세상 모든 종교들이....... 제가 보기엔 모든 종교가 다 말입니다. 유죄를 선고하고 곧장 지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선언한 인간인데요.
첫째, 지옥은 존재하지 않으니, 당연히 그는 지옥에 갈 수 없었다. 그러니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논점을 피하는 것이고. 진짜 쟁점은 히틀러의 행위가 “잘못”인가 아닌가에 있다. 그러나 나는 우주에는 어떤 “옳음”도, 어떤 “그름”도 존재 하지 않는다고 이미 몇 번이나 말했다. 어떤 것도 그 본질에서 옳거나 그르지는 않다. 어떤 것도 그냥 어떤 것일 뿐이다.
그런데 히틀러는 극악무도한 자라는 너희의 생각은 그가 몇백만명의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내 말이 맞는가?
그럼요. 당연하죠.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소위 “죽음”이란 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너희는 지상에서의 삶이 천국에서의 삶보다 낫다고 생각하느냐? 너희에게 말하노니, 죽음의 순간에 너희는 지금까지 맛본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유와 가장 위대한 평화와 가장 위대한 기쁨과 가장 위대한 사랑을 실감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토끼 브레어를 찔레덤불 속으로 집어던졌다고 여우 브레어를 벌해야 할까?(미국 동화작가 린다 헤이워드의 작품 속에 나오는 두 주인공-옮긴이)
당신은 죽음 뒤의 삶이 아무리 멋지다 해도, 이곳에서의 우리 삶이 우리 의지를 거스르면서 끝나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이루고, 뭔가를 체험하고, 뭔가를 배우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광기 어린 관념에 젖은 몇몇 미친 불량배들 때문에 우리 삶이 잘려나가는 건 옳지 않다구요.
무엇보다 너희는 뭔가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게 아니다.(1권을 다시 읽어라!) 삶은 학교가 아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너희의 목적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시 구성하는re-member(기억하는-옮긴이)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더 넓은 시야에서 본다면 삶은 종종 여러 가지 것들....... 태풍, 지진....... 따위로도 “잘려나간다”.
그건 다른 겁니다. 당신이 지금 이야기하는 건 ‘신의 행위’입니다.
모든 사건이 ‘신의 행위’이다.
너는 내가 일어나길 원치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만일 내가 너희가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면 너희가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내가 반대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우선은 “잘못된” 죽음이라는 이 관념을 함께 더 파 들어가보기로 하자. 한 삶이 질병으로 잘려나간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냐?
“잘못된”은 이런 데 적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자연스런 원인들입니다. 이런 건 사람을 죽이는 히틀러 같은 인간과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사고라면? 황당한 사고라면-?
마찬가지죠. 그런 사고는 운 나쁜 비극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신의 의지’입니다. 우리가 신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우린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신의 의지는 바꿀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신성한 수수께끼’를 풀려는 건 인간종(種) 너머에 있는 지식을 욕심내는 것이지요. 그건 죄입니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
만일 신이 우리가 이 모든 걸 이해하길 바랐다면, 우린 이해했을 거니까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해하지 말라는 신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지요.
알겠다. 너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신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고, 그것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신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란 말이지. 흐으음.......
아무래도 제가 그다지 잘 설명한 거 같지 않군요. 하지만 저는 제가 무엇을 믿는지 알고 있습니다.
너는 신의 의지, 즉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사실을 믿느냐?
그렇습니다.
히틀러와 관련된 지점만 빼고 말이지. 거기서 일어나 일은 신의 의지가 아니란 거군.
맞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히틀러는 신의 의지를 거슬렀습니다.
그런데 내 의지가 전지전능한다면, 그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지요.
내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면, 그가 그렇게 해야 했던 건 내 의지였다.
그렇긴 합니다만.......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에게 ‘자유선택권’을 준 것은 당신의 의지이지만, 그런 일을 저지른 건 그의 의지입니다.
너는 이 문제의 핵심에 아주 가까이 다가섰다. 아주 가까이.
물론 네가 옳다. 히틀러에게, 그리고 너희 모두에게 자유선택권을 준 것은 내 의지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너희를 벌받게 하는 건 내 의지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너희의 선택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리란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어찌 너희가 진실로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겠느냐? 그건 대체 무슨 종류의 선택권이냐?
그건 벌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그냥 ‘자연법칙’입니다. 그냥 귀결의 문제라고요.
너희가 나를 복수하는 신-나더러 책임을 지게 하지는 않으면서-으로 여기게 만드는 그 모든 신학체계에 익숙해지도록 교육받아왔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연법칙들을 만든 게 누구인가? 자, 이런 자연법칙들을 세워야 했던 게 나라는 사실에 우리가 동의한다고 할 때, 그렇다면 왜 나는 그런 법칙들을 세웠을까? 그러고 나서는 왜 너희에게 그 법칙들을 거스를 수 있는 힘까지 주었을까?
너희가 자연법칙들로부터 영향받길 내가 원하지 않았고, 멋진 내 존재들이 결코 고통받게 하지 않겠다는 게 내 의지였다고 할 때, 그렇다면 왜 나는 너희가 그렇게 될 가능성을 창조했을까?
그러고 나서는 내가 설정한 이 법칙들을 깨뜨리라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너희를 유혹하기까지 할까?
당신이 우릴 유혹하는 게 아니죠. 악마가 그러는 거죠.
거기서 너희는 다시 내게 책임을 지우지 않는 쪽으로 가는구나.
너는 너희 신학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나를 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임을 모르겠느냐? 너는 내 체계를 의미 없게 만드는 게 너희 체계를 의미 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식임을 이해하겠느냐?
너는 정말로 그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피조물을 창조하는 신이라는 관념에 만족하느냐?
저는 당신이 악마를 통제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죠. 당신은 신입니다! 단지 당신은 그러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거지요. 당신은 악마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 영혼을 지배하게끔 내버려둡니다.
하지만 왜? 너희가 내게 돌아오지 않는 걸 내가 바라는 게 아니라면, 왜 내가 그렇게 하겠느냐?
'영성수행 비전 > 신과 나눈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과 나눈 이야기 2 (4) (0) | 2018.02.07 |
---|---|
신과 나눈 이야기 2 (3) (0) | 2018.02.07 |
신과 나눈 이야기 2 (1) (0) | 2018.02.07 |
신과 나눈 이야기 1 (5) (0) | 2018.02.07 |
신과 나눈 이야기 1(4) (0) | 2018.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