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2 (1)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2
신과 나눈 이야기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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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은 1993년 부활절인 일요일이다. 나는 지시받은 대로 이곳에 있다. 연필을 손에 쥐고 종이철을 앞에 놓고 시작할 준비를 갖춘 채, 나는 여기에 있다.
먼저 당신에게 신이 나더러 이곳에 있으랬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만날 약속을 했다. 신과 나와 당신이 함께 체험하고 있는 삼부작의 두 번째 권인 2권을 오늘부터 시작하기 위해서.
그러나 나로서는 이 책이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아니 우리가 건드릴 주제들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른다. 그건 내 머리 속에 이 책을 어떤 식으로 꾸려갈지 아무런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한 것이, 이 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신이니 말이다.
일년 전 오늘인 1992년 부활절에 신은 나와 대화를 시작했다. 나도 내 말이 황당하게 들리리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은 진짜로 일어났다. 그 긴 대화가 끝난 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나는 좀 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오늘 이 대화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당신들 역시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으며,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은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나는 이 책이 나만이 아니라, 나를 매개로 당신들을 향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음을 확실히 안다. 분명히 당신들은 아주 오랫 동안 신과 ‘신의 말’을 찾아헤맸을 것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오늘 우리는 함께 신을 찾아낼 것이다. 함께 하는 이것이야말로 언제나 신을 찾아내는 최상의 방법이다. 우리는 따로 떨어져서는 절대 신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건 양방향이란 뜻이다. 내 말은 우리가 서로 별개인 한 우리는 결코 신을 찾아내지 못하리란 것이다. 우리가 신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는 첫걸음은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고, 우리 모두가 ‘하나’임을 알고 깨달을 때까지는 우리와 신이 ‘하나’임을 알고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은 지금까지 한번도 우리와 떨어져 있지 않았다. 우리와 신은 별개의 존재라는 건 단지 우리 생각일 뿐이다.
이것은 누구나 흔히 범하는 실수이다. 또 우리는 우리가 서로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을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발견한 바로는, 우리가 서로를 찾아내는 것, 서로에게서 숨는 짓을 그만두는 것, 그리고 물론 우리 자신에게서 숨는 짓을 그만두는 것이다.
숨는 걸 그만두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항상 말하는 것이다.
이제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라. 그리고 결코 멈추지 마라. 먼저 자신에게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는 것에서 시작하라. 그 다음엔 다른 사람에 대한 진리를 당신에게 말하고, 그러고 나서는 다른 사람에게 당신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라. 또 그 다음엔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에 대해 진리를 말하라.
이것이 ‘진리를 말하는 다섯 단계’이다. 이것이 자유에 이르는 5중의 길이다. 그러면 진리가 당신을 자유케 할 것이다.
이 책은 진리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내 진리가 아니라 신의 진리에 대해.
우리, 즉 신과 나의 첫 대화는 정확히 한달 전에 끝났다. 내 생각엔 이번 책도 첫 번째 책과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듯싶다. 즉 나는 묻고 신은 대답하는 식으로. 자, 이제 내 이야길 멈추고 신에게 물어볼 때가 온 것 같다.
신이시여-앞으로 진행될 방식이 이런 식인 게 맞나요?
그렇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네가 묻지 않더라도 내가 직접 제시할 몇몇 주제는 빼고. 너도 알다시피 나는 첫 번째 책에서는 거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죠. 그런데 여기서는 왜 그런 식으로 바꾸는 겁니까?
이 책을 적는 건 내 요청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앞에서 말했다시피, 나는 너더러 이곳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반면에 첫 번째 책은 네 스스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너는 첫 번째 책에 대해서는 나름의 일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내 의지를 따르는 것말고는 너는 아무런 일정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요. 맞는 말씀입니다.
닐, 그곳(1권을 말함-옮긴이)은 머물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나는 너와 다른 사람들이 자주 그곳에 가보길 바란다.
하지만 전 당신의 의지가 곧 제 의지라고 생각했는데요. 당신의 의지가 제 의지와 같다면 어떻게 제가 당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건 미묘한 문제인데, 시작하기엔 그리 나쁜 지점이 아니다. 우리가 이 대화를 시작하기엔.
몇 걸음 뒤로 돌아가보자. 나는 한번도 내 의지가 곧 네 의지라고 말한 적이 없다.
아니요! 했습니다. 1권에서요. 당신은 제게 분명히 “네 의지가 곧 내 의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이다-하지만 그건 같은 게 아니다.
아니라고요? 절 놀리시는군요.
내가 “네 의지가 곧 내 의지”라고 할 때, 그건 내 의지가 곧 네 의지라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다. 만일 네가 항상 내 의지대로 행동한다면, 네가 깨우침을 얻기 위해 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 과정은 끝날 것이며, 너는 이미 그곳에 있을 것이다.
내 의지 외에는 어떤 다른 일도 하지 않는 날이 올 때, 너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만일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내내 내 의지대로 살아왔다면, 너는 지금 이 순간 이 책에 말려들 필요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내 의지에서 따라 살아오지 않은 건 확실하다. 사실 너는 대개의 경우 내 의지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제가 모른다고요?
그러다, 너는 모른다.
그럼 왜 당신은 당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제게 말해주시지 않는겁니까?
나는 말해준다. 단지 네가 듣지 않을 뿐이다. 설사 네가 듣더라도, 너는 진심으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네가 귀 기울이더라도, 너는 네게 들리는 것을 믿지 않는다. 또 설사 네가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믿더라도, 너는 어쨌든 내 지시대로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 내 의지가 곧 네 의지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정확하지 않다.
반면에 네 의지는 곧 내 의지이다. 첫째, 네 의지를 내가 알기 때문이고, 둘째, 네 의지를 내가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셋째, 그것을 내가 칭찬하기 때문이고, 넷째, 그것을 내가 사랑하기 때문이며, 다섯째, 그것을 내 것으로 삼고 ‘내 것’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뜻이며, 내가 조건 없는 사랑으로 네 의지를 내 것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이제 내 의지가 네 것이 되도록 하려면 너 역시 나처럼 해야 한다.
첫째, 너는 내 의지를 이해해야 하고, 둘째, 너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셋째, 너는 그것을 찬양해야 하고, 넷째, 너는 그것을 사랑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너는 내 의지를 너 자신의 것이라 불러야 한다.
너희 인간 종족의 역사 전체에서 일관되게 이렇게 해온 사람은 정말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줌 정도의 사람들은 거의 항상 이렇게 했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했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때때로 이렇게 했으며, 사실상 모두는 드물게만 이렇게 했다. 비록 그 중 일부는 그렇게 한 적이 전혀 없긴 하지만.
저는 어느 범주에 들어가나요?
그게 중요한가? 너는 이제부터 어느 범주에 포함되길 원하는가? 그게 더 적절한 질문이 아닐까?
그렇군요.
그렇다면 네 대답은 무엇이냐?
저는 첫 번째 범주에 들길 바랍니다. 항상 당신의 의지를 알고, 항상 그에 따라 행동했으면 하거든요.
그건 기특하고 칭찬받을 만한 일이긴 하나,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왜요?
네가 자신을 그런 것으로 내세울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엄청 많이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게 말하노니, 네가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얼마든지 자신을 그렇게 내세울 수 있으면, 신성(神聖)으로 옮아갈 수 있다. 성장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렇담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까?
그러게. 왜 그랬느냐? 너는 뭘 기다리고 있느냐? 혹시 너를 붙들고 늘어지는 게 나라고 믿는 건 아니냐?
아닙니다. 저 자신을 붙들고 늘어지는 건 바로 저라는 걸 명확히 압니다.
좋다. 명확함이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저는 깨달음을 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이 책을 계속 읽어라.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데려가고 있는 지점이다.
2
전 이 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시간을 잡도록 하자.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합니까? 이 책의 첫 장(章)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이미 다섯달이나 걸렸습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 모든 내용들이 중간에 끊기거나 하지 않고 똑같은 흐름으로 적혔을 거라고 생각할 텐테요. 그들은 이 책의 32번째 단락과 33번째 단락 사이에 20주라는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영감을 받는 순간들 사이의 간격이 때로는 반년이나 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거라구요. 그런데 우린 더 많은 시간을 가져야 합니까?
내 말뜻은 그게 아니다. 내 말뜻은 우리의 첫 주제, 시작할 지점으로 “시간”을 잡도록 하자는 것이다.
아, 그랬군요, 그런데 그 주제를 다루는 건 좋은데, 간단한 단락 하나를 완성하는 데 종종 몇 개월씩이나 걸리는 이유는 뭡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긴 간격을 두고 찾아오십니까?
사랑스럽고 멋진 내 아들아, 나는 긴 간격을 두고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는 적은 한번도 없다. 문제는 네가 그것을 항상 알아차리는 건 아니라는 데 있을 뿐이지.
왜요? 당신이 항상 이곳에 있다면, 어째서 제가 알아차리지 못합니까?
네가 삶의 다른 일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 봐라, 너는 지난 5개월 동안 상당히 바빴다.
그랬지요. 예, 그랬습니다. 많은 일들이 벌어졌지요.
그리고 너는 그 일들을 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여주마. 너는 자신의 물질 삶에 푹 빠져 있었다. 너는 네 영혼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무척 힘든 시기였어요.
그렇다. 그럴수록 더 그 과정 속에 네 영혼을 포함시켜야 했다. 내 도움을 받았더라면 요 몇 개월 동안이 훨씬 더 순탄하게 굴러갔을 것이다. 그래서 나와의 접촉을 잃지 말라고 내가 충고하지 않았더냐?
당신 곁에 있으려고 노력했지요. 하지만 나 자신의 드라마에 빠져서, 아니 당신 표현대로 사로잡혀서 그만 당신을 놓치고 만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당신을 위해 시간을 내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명상도 하지 않았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쓰지도 않았구요.
알고 있다. 우리 사이의 연결이 가장 필요할 때, 너희가 되려 거기서 멀어지는 게 삶의 역설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하는 걸 그만둘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걸 그만두어라.
그건 제가 방금 했던 말이고요. 그런데 어떻게요?
네가 그렇게 하길 그만두면 그렇게 하는 걸 그만두게 된다.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그건 간단하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진짜로 그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네 바램은 곧 내 명령이기에. 내 소중한 자여, 기억하라. 네 바램이 곧 내 바램이며, 네 의지가 곧 내 의지라는 걸.
예,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이 내년 3월 경에는 끝났으면 하는데, 지금이 벌써 10월입니다. 이 자료가 5개월의 공백을 갖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될 것이다.
좋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만 빼고.
맙소사, 우리가 이런 놀이를 꼭 해야 됩니까?
아니. 하지만 그게 바로 네가 삶을 꾸려갈 때 결정하는 방식이니, 난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너는 계속해서 마음을 바꾸고 있다. 삶은 계속되는 창조 과정임을 잊지 마라. 너는 시시각각 네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너는 오늘 내린 결정이 내일 내리는 결정과 다를 때가 자주 있다. 하지만 선각자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 모든 선각자들Masters의 비밀이 있다. 그들은 항상 같은 것을 선택한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요? 한번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네 의지가 현실로 확실하게 드러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선택하라.
그렇게 되기까지 몇 년씩 걸리는 사람도 있고, 몇 달씩 걸리는 사람들도 있다. 또 몇 주면 되는 사람들도 있다. 깨달음에 근접한 사람이라면 며칠이나 몇 시간, 혹은 몇 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각자들에게 창조는 즉석에서 이루어진다.
의지와 체험 사이의 간격이 줄어가는 것을 볼 때, 너는 자신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중임을 알 것이다.
“너는 오늘 내린 결정이 내일 내리는 결정과 다를 때가 자주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당신 말씀은 우리가 마음을 바꿔선 안된다는 뜻입니까?
원한다면 언제든지 마음을 바꿔라. 하지만 마음이 한번 바뀔 때마다 우주 전체의 방향 역시 바뀐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네가 어떤 것에 대해 “마음을 정할” 때, 너는 그에 맞추어 우주를 작동시키고 있다. 너희가 이제야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복잡한 역할들로 이루어지는 그 과정 속에는, 너희의 이해능력을 넘어서는 힘들,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한 일들이 개입된다.
이 힘들과 이 과정 모두가 소위 삶이라는 존재 전체를 구성하는 에너지들이 상호작용하여 짜낸 경이로운 옷감의 일부이다.
그것들은 그 본질에서 나다.
그렇다면 제가 마음을 바꾸면 그게 당신을 곤란하게 한다는 뜻입니까? 그런 건가요?
나에게는 어떤 것도 곤란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너 자신에게 아주 곤란한 상황을 만들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일을 대할 때 한 가지 마음과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갖도록 하라. 그리고 네가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낼 때까지는 마음이 거기서 떠나지 않도록 하라. 초점을 맞추고, 중심을 잡고, 거기에 머물러라.
이것이 전심(傳心)한다고 할 때의 의미이다. 뭔가를 택할 때에는 네 온힘과 네 온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택하도록 하라. 겁먹지 마라. 계속 가라! 그것을 향해 계속 가라. 단호하게.
아니No란 말을 하지 마라.
바로 맞혔다.
하지만 아니다가 맞는 대답이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죠? 우리 자신의 선(善)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가장 이로운 게 아니면요? 그러면 당신은 그걸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 거죠? 그렇죠?
틀렸다. 나는 너희가 불러내는 것이면 무엇이든 “줄” 것이다. 그것이 너희에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없이. 너는 최근에 네 삶을 살펴본 적이 있느냐?
하지만 저는 바라는 걸 항상 가질 순 없다고 배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고선(善)을 위한 게 아니라면 신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 거라고요.
그건 사람들이 네가 어떤 결과를 놓고 실망하지 않기를 바랄 때 네게 해주는 말이다.
먼저, 우리 관계를 다시 한번 명확히 해보자. 나는 네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것을 불러내는 건 너다. 나는 1권에서 네가 어떤 식으로 이렇게 하는지 꽤 자세히 설명했다.
둘째로, 나는 너희가 불러내는 것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것을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너희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너희는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꼴로 만들어진, 창조하는 존재다. 너희는 선택하는 것 모두를 가질 수도 있지만, 원하는 걸 전혀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너희가 충분히 그릇된 방식으로 원한다면 너희는 원하는 어떤 것도 갖지 못할 것이다.
저도 압니다. 그 점에 대해서도 1권에서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것을 원하는wanting 행동이 오히려 그것을 우리에게서 밀쳐낸다고 하셨지요.
그렇다. 그럼 너는 그 이유도 기억하고 있느냐?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어서, 뭔가가 모자란다는wanting 생각이 우주를 향해 보내는 진술, 즉 진리 선언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나면 우주는 그것을 우리 현실로 만들어내기 때문이고요.
맞다! 정확하다! 너는 배웠구나. 이해했어. 훌륭하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네가 뭔가를 “원한다want”고 말하는 순간, 우주는 “정말 그렇군”이라고 하면서 네게 바로 그 체험, 즉 그것이 “모자라는wanting” 체험을 준다!
“나는”이란 말 뒤에 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곧 네 창조 명령이다. 호리병 속의 요정인 ‘나는’은 오로지 복종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나는 네가 불러내는 것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네가 불러내는 건 네가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바 그대로이다. 그것은 이처럼 간단하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선택한 현실을 창조하는 데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너는 네가 선택한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또 너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너는 계속해서 무엇이 네게 “최선”인지 알아내려 한다. 또 너는 네 모든 선택이 “좋은 것”이길 미리 보장받고 싶어한다. 게다가 너는 계속해서 마음을 바꾼다!
제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떤 게 제게 최선인지 알아내려 하면 안되나요?
“최선”이란 건 오만가지 변수에 좌우되는 상대적인 용어다. 이건 선택을 대단히 어렵게 만든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는 오직 한 가지만 고려하면 된다. 이것이 ‘내가 누구인지’ Who I Am를 진술하는지, 이것이 ‘내가 되고자 선택하는 존재’ Who I Choose to Be를 선언하는지만.
삶 전체가 그런 선언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삶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 너는 그런 선언을 우연히 할 수도 있고 네 선택으로 할 수도 있다.
선택으로 사는 삶은 의식하는 행동으로 사는 삶이다 우연으로 사는 삶은 의식 없는 반응으로 사는 삶이다.
반응reaction이란 단어 그대로 너희가 이전에 취했던 행동이다. “다시 행동할re-act” 때(반응할 때-옮긴이), 너희는 들어오는 자료를 평가하고, 같거나 거의 비슷한 체험을 찾기 위해 너희의 기억은행을 뒤지고, 그런 다음 이전에 했던 식으로 행동한다. 이 모든 일을 하는 주체는 너희 영혼이 아닌 정신mind(마음으로도 번역-옮긴이)이다.
하지만 너희가 어떻게 해야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진실로 순수하게 체험할 수 있을지 알아보려 했다면, 너희 영혼은 너희더러 자신의 “기억”을 찾아보게 시켰으리라. 이것이 너희가 그토록 자주 들어왔던 “자기 찾기”soul searching라는 체험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너희는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가야” out of your mind 한다.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 알아내려고 시간을 들이는spend 동안, 너희는 말 그대로 시간을 소비하는spend 짓을 하고 있다. 쓸데없이 자신의 시간을 소비하기보다는 절약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정신이 나가면 엄청나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너희 영혼은 과거의 만남들을 검토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 없이 현재의 체험으로만 창조하기 때문에, 결정은 쉽게 이루어지고 선택은 빠르게 현실화된다.
이 점을 기억하라. 영혼은 창조하고 정신은 반응한다.
영혼은 자신의 지혜로-너희가 그것을 의식적으로 알아 차리기도 전에-‘지금 순간’에 겪는 체험이 신이 너희에게 보내준 체험임을 알고 있다. “미리 보내진” pre-sent(현재-옮긴이) 체험이라고 할 때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찾고 있는 동안에도 그것은 벌써 너희에게 가고 있다. 왜냐하면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내가 대답해주리라고 말했기에. 모든 ‘지금 순간’이 신이 주는 영광스런 선물이다. 그것을 선물present이라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영혼은 ‘참된 자신’Who You Really Are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치유하고, ‘참된 자신’에 걸맞는 체험을 너희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지금 필용한 완벽한 상황과 환경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영혼의 바램은 너희가 신에게 되돌아가게 하는 것, 너희에게 나(神)를 절실히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영혼이 의도하는 바는 자신을 체험으로 알고, 따라서 나를 아는 것이다. 영혼은 너희와 내가 ‘하나’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이 진리를 부정하고, 몸이 이 부정을 행동으로 옮긴다 할지라도.
그러므로 위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라면 정신에서 벗어나, 대신 자기 찾기를 하라.
영혼은 정신이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가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 알아내려고 애쓰면서 시간을 소비할 때, 그 선택은 조심스러울 것이고, 그 결정에는 영원한 시간이 걸릴 것이며, 그 여행은 기대의 바다 위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너희는 자신의 기대 속에 빠지고 말 것이다.
휘유! 굉장한 대답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제 영혼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제가 듣고 있음을 알 수 있을까요?
영혼은 느낌feelings으로 말한다. 네 느낌에 귀를 기울이고, 네 느낌대로 따르며, 네 느낌을 존중하라.
왜 제게는 느낌을 존중하는 게 흡사 애당초 말썽을 일으킬 상황에 자신을 빠뜨리는 것처럼 여겨지는 걸까요?
너희가 성장은 “말썽”이고, 가만히 있는 건 “안정”이라고 이름붙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에게 이르노니, 느낌은 결코 너희를 “말썽”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느낌은 너희의 진실이기에.
만일 네가 절대 느낌을 따르지 않는 삶, 모든 느낌을 정신이라는 여과장치로 걸려내는 삶을 살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정신이 행하는 상황분석에 따라 네 판단들을 내리도록 하라. 하지만 그런 책략에서는 기쁨도, ‘참된 자신’에 대한 축하도 구하지 마라.
잊지 마라, 참된 축하는 정신 나간mindless 짓임을.
자신의 영혼에 귀 기울일 때, 너희는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 알 것이다. 자신에게 맞는 진실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진실인 것만을 따라 행동할 때, 너희는 너희의 길을 따라 바른 속도로 달리는 중이고, “과거의 진실”에 근거한 체험에 따라 반응하지 않고 “지금의 진실”에 근거한 체험을 창조할 때, 너희는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네가 선택한 현실을 창조하는 데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느냐고? 그것은 네가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달아라, 그러면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니.
그런데 일단 네 진실을 깨닫고 나면, 그걸 두고 마음을 자주 바꾸지 않도록 하라. 이렇게 되는 건 네 정신이 무엇이 “최선”인지 알아내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걸 그만둬라! 정신에서 벗어나라. 네 감각으로 되돌아가라!Get back to your senses!
“분별력을 되찾아라”Get back to your senses고 할 때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는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네 생각은 말 그대로 생각일 뿐이고, 정신의 구조물, 네 정신이 “만들어낸” 창조물일 뿐이다. 하지만 네 감각이라면-그것은 지금 이 순간 실재하는 것이다.
감각은 영혼의 언어이고, 네 영혼은 네 진실이다.
자, 이제 그 모든 게 아귀가 딱딱 들어맞지 않느냐?
당신 말씀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느낌들까지도 표현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느낌은 부정적이지도 파괴적이지도 않다. 그건 그냥 진실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너희가 자신의 진실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이다. 너희가 자신의 진실을 사랑으로 표현할 때, 부정적이고 위험스런 결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행여 그런 결과들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대개 다른 누군가가 부정적이거나 위험한 방식으로 너희의 진실을 체험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라면 너희로서는 그런 결말을 피할 방도가 별로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진실을 표현하지 못하는 건 명백히 그다지 적절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한다. 그들은 불쾌한 일을 일으키거나 그런 것에 직면할까봐 무척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진실을 철저히 감춘다.
잊지 마라. 메시지를 얼마나 잘 받는가는 메시지를 얼마나 잘 보내는가만큼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네 진실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지는 네 책임이 아니다. 너는 단지 그것이 얼마나 잘 전달되는지만 보장할 수 있다. 여기서 얼마나 잘이라는 게 단지 얼마나 명확하게란 뜻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얼마나 사랑으로, 얼마나 자비롭게, 얼마나 예민하게, 얼마나 용기 있게, 얼마나 완벽하게란 뜻이 들어있다.
여기에는 반(半)만의 진실이라든가 “잔혹한 진실”, 혹은 “평이한 진실”조차 들어설 여지가 없다. 여기에 존재하는 건, 하늘이 너를 굽어살피사 진실과 진실 자체와 오직 진실 뿐이다.
사랑과 자비라는 신성(神性)들을 들여오는 게 “하늘이 너를 굽어살피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청한다면, 나는 언제나 너희가 이런 식으로 교류하게끔 도울 것이기에.
그렇다. 소위 가장 “부정적인” 느낌들까지 표현하라. 하지만 파괴적으로 하지는 마라.
부정적인 느낌들을 표현하지(즉 밀어내지) 않으면, 그것들을 사라지게 만들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 느낌들을 가두게 된다. “갇힌” 부정은 몸을 해치고 영혼에 짐을 지운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 대해 품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그 사람이 몽땅 듣는다면, 그런 생각들이 아무리 애정을 가지고 전달되더라도, 그건 그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나는 네 부정적인 느낌들을 표현하라(밀어내라, 제거하라)고 했지, 어떻게 혹은 누구에게 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모든 부정을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이런 느낌들을 그 사람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는 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 순수성이 손상되거나 다른 사람이 거짓을 믿게 되는 경우뿐이다.
부정은, 설사 그 순간에는 그것이 네 진리처럼 보이더라도, 결코 궁극의 진리를 나타내는 표식이 아니다. 그것은 치유되지 않은 네 부분에서 생긴 것일 수 있다. 아니, 사실 그것은 항상 그렇다.
이 부정들을 밀어내고 그것들을 풀어놓는 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들을 풀어놓을 때, 즉 그것들을 밖으로 밀어내어 네 앞에 놓을 때에야, 비로소 너는 자신이 정말로 그것들을 믿는지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명확하게 그것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추한 것이라도 일단 말로 표현되고 나면, 너는 그것이 더 이상 “진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발견할 것이다.
두려움에서 분노에 이르기까지 표현된 모든 느낌들에서, 너는 그것들이 일단 표현되고 나면, 그것들은 더 이상 네가 진실로 어떻게 느끼는지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발견한다.
이런 식으로 느낌은 농간을 부릴 수 있다. 느낌은 영혼의 언어이긴 하지만, 그것이 네 마음이 만들어낸 어떤 모조품은 아닌지, 네가 과연 자신의 참된 느낌에 귀 기울이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맙소사! 그래서 이젠 제 느낌조차 믿을 수 없게 됐군요. 전 그게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구요! 당신에 제게 가르쳐준 게 바로 이거라고요.
사실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건 지금 네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니 잘 들어야 한다. 어떤 느낌들은 참된 느낌들, 즉 영혼에서 태어난 느낌들이지만, 어떤 느낌들은 모조(模造) 느낌들이다. 이것들은 너희 정신 속에서 만들어진 느낌들이다.
달리 말해 그것들은 전혀 “느낌”이 아니다. 그것들은 생각이다. 느낌으로 변장한 생각들.
이런 생각들은 너희의 이전 체험과 너희가 남들을 관찰한 체험에서 나온다. 누가 이빨을 뽑을 때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고 나면, 너희도 이빨을 뽑을 때 얼굴을 찡그린다.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어쨌든 얼굴을 찡그린다. 너희의 이런 반응은 현실과는 무관하다. 단지 남들의 체험이나 예전에 너희에게 일어난 일에 근거해서 너희가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과 관련된 것일 뿐이다.
인간 존재로서 겪는 가장 위대한 도전은 ‘지금 여기가 되는 것’, 상황을 꾸며내길 그만두는 것이다! 지금pre-sent 순간(너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도 전에 자신에게 “보낸” sent 순간)에 대해 생각하길 그만두어라. 그 순간 속에 있어라. 기억하라, 너희는 이 순간을, 엄청난 진실의 씨앗을 품고 있는 그 순간을 하나의 선물로 자신에게 보냈다는 걸. 너희가 기억해내고 싶어하던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도 그 순간이 도착하면 너희는 당장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속에 있는 대신, 너희는 그 순간 밖에 서서 그것을 판단하고 한다. 그러고 나서 너희는 다시 반응한다re-acted. 다시 말해 너희는 예전에 했던 식으로 행동한다.
이제 이 두 단어를 잘 살펴보라.
REACTIVE (반응하는)
CREATIVE (창조하는)
이 둘은 같은 단어이다. 단지 “C”만 움직였다! 그러니 너희가 매사에 정확하게 “C”를 놓을 때 너희는 ‘반응하지’ 않고 ‘창조하게’ 될 것이다.
정말 현명하시군요.
음, 신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다.
어쨌든, 보다시피 내가 지적하려는 바는, 각각의 순간을 그에 대한 사전 생각 없이 깨끗한 상태로 만날 때, 너희는 예전의 자신을 재연(再演)하는 대신 지금의 자신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삶은 창조 과정이다. 그런데 너희는 줄곧 그게 마치 재연 과정인 것처럼 살고 있다.
하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어느 누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 순간에 자신의 이전 체험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에 관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불러내고, 그에 따라 대응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정상normal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자연스러운natural 것은 아니다. “정상”이란 건 일상적인 것을 뜻한다. “자연스러운” 건 애써 “정상”이려고 하지 않을 때의 너희 상태이다.
자연스러움과 정상은 같은 게 아니다. 특정 순간에 너희는 정상인 일을 할 수도 있고, 자연스런 일을 할 수도 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떤 것도 사랑보다 더 자연스럽지는 않다.
사랑에 차서 행동한다면 너희는 자연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하고 화내고 분개하면서 반응한다면, 너희는 정상으로 행동할 수는 있지만, 결코 자연스럽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제 모든 이전 체험들이 특정 “순간”이 고통스러울 거라고 비명을 지르는 판에 제가 어떻게 사랑에 차서 행동할 수 있습니까?
네 이전 체험을 무시하고 그 순간 속으로 들어가라. ‘지금 여기’에 있도록 하라. 자신을 새로이 창조함에 있어 지금 당장 할 일이 무엇인지 살피도록 하라.
기억하라, 이것이 너희가 이곳에서 하고 있는 일임을.
너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되고자 하는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 이런 식으로, 이 순간, 이곳에.
모든 삶의 목적이 이것이다. 삶이란 끝없이 계속되는 재창조의 과정이다. 너희는 가장 고귀한, 다음 단계의 자신에게 대한 관념을 그려보면서 계속해서 자신을 재창조해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자기가 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고층빌딩에서 뛰어 내린 사람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자신의 “이전 체험”과 “남들을 관찰한 체험”을 무시하고 빌딩에서 뛰어내렸지요. 떨어지는 동안 계속해서 “나는 신이다!” 외치면서요. 이건 그다지 멋져보이지 않는데요.
그렇다면 네게 말해주마. 인간은 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결과들을 이루어냈다. 인간은 병을 고쳤으며, 인간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웠다.
한 사람만 그랬죠.
너는 단지 한 사람에게만 물질 우주를 지배할 그런 권능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느냐?
단 한 사람만이 그런 권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지 않다. 홍해를 가른 건 누구였는가?
신이요.
사실이다. 그런데 신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건 누구였느냐?
모세요.
맞다. 그러면 병자를 치유해주고, 죽은 자를 일으켜 달라고 내게 부탁한 사람은 누구냐?
예수요.
그렇다. 그런데 너는 모세와 예수가 한 일을 너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그들이 그런 일을 한 게 아니죠! 그들은 당신에게 청했어요. 그건 다른 문제죠.
좋다. 우선은 네가 세운 틀을 따라가보자. 자, 너 자신은 이와 똑같은 기적을 내게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 요청들을 들어줄 것 같으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게 바로 너와 모세의 차이다! 그게 바로 너와 예수의 다른 점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청한다면 당신이 자신의 청함을 들어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그들은 자신에게는 아무 권능도 없지만 예수의 권능은 보았다고 믿는다(혹은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을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청한다. 예수가 “왜 그렇게 놀라느냐? 너희 역시 이런 일, 아니 이보다 더한 일들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도.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못한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너희 모두는 자신이 가치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너희는 예수의 이름으로 청한다. 혹은 성모 마리아나 이런저런 “수호성인”이나 태양신이나 동방 신들의 이름으로, 너희는 항상 누군가의 이름을-그게 누구의 이름이든-내걸 것이다. 자신의 이름만 빼고!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찾아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빌딩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날 것이다.
공중부양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음,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벽을 걸어서 지나간 사람들도 있고, 자기 몸을 벗어난 사람들까지 있다.
그래요, 그래요. 하지만 저는 벽을 걸어서 지나간 사람을 실제로 본 적도 없다구요. 게다가 누구더러 그렇게 해보라고 하지도 않지요. 또 저는 우리가 빌딩에서 뛰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아마 당신 건강에도 그리 좋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이 떨어져 죽은 건 그가 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올바른 존재상태였다면, 그는 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너희와 다른 존재로 과시하고자 했기에, 결국 신성(神性)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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