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1 (5)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1 (5)
그렇다면 살인 자체에 뭔가 잘못된 게 있다는 말씀인가요?
다시 돌아가자. 이 세상에 “잘못된” 건 하나도 없다. “잘못”이란 건 소위 “옳음”의 반대쪽을 가리키는 상대적인 용어다.
그런데 “옳다”는 건 뭐냐? 이 문제에서 너희가 정말로 객관적일 수 있는가? 아니면 “옳다”와 “그르다”는 너희의 판단에 따라 사건과 상황들에 뒤집어씌운, 단순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가?
그리고 말해보라. 너희의 판단 근거는 무엇이냐? 너희 자신의 체험? 천만에. 대개의 경우 너희는 다른 누군가의 판단을 받아들여왔다. 너희보다 먼저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과, 아마도 너희보다 더 잘 알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판단을. “옳음”과 “그름”에 관한 너희의 일상판단 중에서 너희 자신의 이해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일수록 특히 그러하다. 사실 문제가 중요한 것일수록 너희는 더 기꺼이 다른 누군가의 관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왜 너희가 삶이 어떤 영역에 대해, 인간으로서 체험하는 동안에 생기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 확실한 통제권을 사실상 포기하는지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흔히 이런 영역과 문제들 속에 너희 영혼에게 가장 핵심되는 주제들이 들어 있다. 예를 들면 신의 본질이라든가, 참된 도덕성, 궁극의 실체, 전쟁과 의학과 임신중절과 안락사를 둘러싼 생사관, 개인의 가치관과 그것의 구성 및 판단의 성격 같은 것들이. 너희 대부분은 이런 주제들을 벗어던지고는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버렸다. 너희는 그런 주제들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너희는 외친다. “누가 판단해줘! 나는 그 판단에 따를 거야, 따를 거라구! 누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만 얘기해달라구!”
인간에게 종교가 그토록 인기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종교가 단호하고, 일관성 있고, 추종자들의 기대를 명확히 해주고, 엄숙하다면, 신앙체계가 무엇인가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특성들을 고루 갖춘 종교가 이야기하는, 거의 모든 걸 무조건 믿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찾아낼 수 있다. 아무리 괴상한 행동과 믿음이라도 신의 뜻으로 돌릴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그들은 그게 신의 방법이요, 신의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걸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너도 알다시피, 그것은 생각할 필요를 없애주기 때문이다.
자, 이제 살인에 대해 생각해보자. 과연 뭔가를 죽여야 할 정당한 근거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네 스스로 한번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어떤 외부의 권위도, 자신에게 해답을 제공해주는 어떤 고차원의 근거도 필요없다는 걸 깨달으리라. 네 스스로 살인에 대해 생각해보고, 살인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바를 깊이 통찰한다면, 너는 명백한 대답을 얻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자신의 권위에 근거한 행동이다.
남들의 권위에 근거해서 행동할 때 너희는 혼란에 빠진다. 자신의 정치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국가는 꼭 살인이란 방법을 써야 하는가? 자신의 교리를 강요하기 위해서 종교는 꼭 살인이란 방법을 써야 하는가? 행동규범을 어긴 사람들에 대한 반응으로 사회는 꼭 살인이란 방법을 써야 하는가?
살인이 과연 정치적인 해결책이나 영적 깨우침, 사회문제의 치유책으로 적절한 방법인가?
거기다가 누군가가 너를 죽이려 들 때 너는 살인으로 대응해도 좋은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지키려 할 때, 너는 살인이라는 치명적인 폭력을 쓰겠는가? 네가 생판 모르는 사람일 때도?
다른 방법으로 살인하려는 사람을 막을 수 없을 때, 살인은 과연 적절한 방어형식인가?
살인killing과 살해murder는 서로 다른 것인가?
국가는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살인을, 완전히 정당한 것인 양 믿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사실 국가가 권력의 실체로서 존재하자면, 너희가 이 말을 믿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는 자신의 특정 진리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유지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살인을, 완전히 정당한 것인 양 믿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사실 종교가 권력의 실체로서 존재하자면, 너희가 이 말을 믿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는 특정 범법행위들(이에 대한 규정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왔다)을 저지른 사람들을 벌하기 위한 살인을, 완전히 정당한 것인 양 믿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사실 사회가 권력의 실체로서 존재하자면 너희가 이 말을 믿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너희는 살인에 대한 이런 입장들이 옳다고 믿는가? 너희는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들을 적이 있는가? 또 너희 자신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는 “옳음”도 “그름”도 없다.
하지만 너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초상을 그린다.
사실 너희 국가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이미 그런 그림들을 그려왔다.
너희 종교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오래동안 기억에 남는 인상들을 창조해왔다. 너희 사회들 역시 자신의 판단에 따라 나름의 자화상들을 그려왔다.
너희는 이런 그림들이 마음에 드는가? 너희가 만들고 싶은 인상들이 이런 것들인가? 이런 초상화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는가?
이런 의문들을 다룰 때는 신중해야 한다. 이런 의문들은 아마 네게 생각을 요구할 것이다.
생각하기는 힘든 일이다. 가치판단 내리기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것들은 너를 순수한 창조의 자리에 서게 한다. 왜냐하면 너희가 “난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구”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때가 무수히 많을 터이기에. 그럼에도 너희는 판단해야 하고, 그에 따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너희의 임의대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런 선택, 전혀 자신의 지식에서 비롯되지 않은 판단을 순수한 창조라고 한다. 그리고 너희는 그런 판단을 내리면서 자신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된다.
너희 대부분은 그처럼 중요한 일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대부분은 그런 일을 남들에게 맡겨버리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너희 대부분은 스스로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라 습관의 피조물, 다른 사람이 창조한 피조물이 되고 만다.
그런데 남들이 너희더러 이러저러하게 느껴야 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너희가 느끼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할 때, 너희는 깊은 갈등을 체험한다. 그럴 때면 너희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어떤 것이, 남들이 얘기해준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걸 가지고 어디로 가겠는가? 어떻게 하겠는가?
너희는 제일 먼저 종교인들에게 달려간다. 애초에 너희를 그런 처지에 빠트린 바로 그 사람들에게. 너희는 너희의 사제와 랍비와 목사와 선생들에게 달려간다. 그러면 그들은 너희 자신에게 귀 기울이길 그만두라고 말해준다. 그 중 가장 고약한 이들은 너희에게 겁을 줘서 자아에서 멀어지도록 만드는 사람, 겁을 줘서 너희가 직관으로 느끼는 것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귀와 악마와 귀신과 악령과 지옥과 저주를 비롯하여 자기네가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무시무시한 것들을 다 동원할 것이다. 너희가 직관으로 알고 느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어째서 너희가 위안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자기네 사상과 관념과 신학과 자기네 선악규정과 자기네의 ‘자아’ 개념 뿐인지 너희에게 납득시키려고.
여기서의 유혹은 너희가 그들의 말에 동의만 하면 즉각 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동의하라. 그러면 너는 당장 인정받으리니, 심지어 노래하고 소리치고 춤추고 팔을 흔들어대면서 할렐루야를 외쳐대는 사람까지 있다!
그런 유혹에, 즉 자신이 빛을 봤고, 자신이 구원받았노라는 그같은 인정과 그같은 환희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다.
인정과 시위가 내면의 판단을 동반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축하가 진실을 따르려는 개인의 선택을 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정반대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실상 너희를 조롱하기까지 할 것이다. 뭐라고? 너 혼자 힘으로 생각한다고? 스스로 판단한고? 너 나름의 척도, 너 나름의 판단, 너 나름의 가치관을 적용하겠다고? 도대체 넌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사실 너희가 대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질문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 작업은 철저히 혼자서 해내야 한다. 어떤 보상도, 어떤 인정도, 그리고 아마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면서.
그래서 너희는 이런 아주 좋은 질문들을 던진다. 왜 그런 일을 계속해야 하지요? 애당초 그런 길로 나서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런 여행을 해서 뭘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해야 할 동기나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스우리만치 간단하다.
그것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게 이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임이란 뜻이다. 다른 할 일은 없다. 사실 그것말고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너희는 태어난 이래 줄곧 그래왔듯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에도 계속할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너희가 그 일을 의식하면서 하느냐, 의식하지 않고 하느냐뿐이다.
알다시피 너희는 그 여행을 도로 물릴 수 없다. 너희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 길에 들어섰다. 너희의 탄생은 그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런 길로 나서야 하는 이유는 문제가 아니다. 너희는 이미 그 길로 들어섰으니까. 너희는 심장의 첫박동과 함께 그 여행길에 올랐다. 문제는, “이 길을 의식하면서 걷고 싶어하는가, 의식하지 않고 걷고 싶어하는가? 자각하면서인가, 아니면 자각하지 않고인가? 내 체험의 원인으로서인가, 아니면 그것의 결과로서인가?”이다.
너희는 삶의 대부분을 자신의 체험 결과에 따라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체험의 원인이 되라는 권유를 받고 있는 중이다. 의식하는 삶이란 게 바로 이런 삶이고, 자각하면서 걷는다는 게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너희 중 많은 이들은 내가 말했듯이, 꽤 먼 거리를 걸어왔다. 너 역시 적지 않은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니 자신이 그 많은 생을 거친 끝에 “고작” 여기까지 밖에 못왔느냐고 느끼지 마라. 너희 중 일부 사람들은 높은 단계로 진화하여 자신을 확연히 의식하고 있다. 너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알고 있다. 게다가 너는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방법도 안다.
그건 굉장한 징조이고 확실한 징후이다.
무슨 징후요?
이제 네게는 불과 몇생애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그게 좋은 일인가요?
지금의 네게는 그렇다. 그리고 네가 좋은 일이라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 불과 몇생애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네가 원하는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는 떠나는 것이 네가 하고 싶은 일의 전부가 되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징조다.
불과 몇생애 전까지만 해도 너는 온갖 것들을 죽였다. 곤충, 식물, 나무, 동물, 사람들을,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죽이지 못한다. 이것은 아주 좋은 징조다.
몇생애 전까지만 해도 너는 삶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는 듯이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삶에 부여한 목적을 빼고는, 삶에는 아무 목적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징조다.
몇생애 전까지만 해도 너는 진리를 보여달라고 우주에 간청했다. 그런데 이제 너는 자신의 진리를 우주에게 이야기 한다. 이건 아주 좋은 징조다.
몇생애 전까지만 해도 너는 부와 명성을 추구했다. 그런데 이제 너는 놀랍게도 그저 자신이 되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는 나를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를 네 동무라고 부를 정도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
이 모든 게 다 정말 정말 좋은 징조들이다.
후와....... 당신은 저를 기분좋게 해주시는군요.
당연히 좋아야지. 문장 속에 “후와”란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기분이 나쁠 리 없지.
당신은 정말 뛰어난 유머감각을 지닌 분이군요.......
유머를 발명한 게 바로 나라는 데도!
그래요,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댔죠. 아무튼 좋습니다. 요컨대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는 건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란 거군요. 바로 이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요.
바로 맞혔다.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쭤볼께요. 이 길을 가는 일이 앞으로 좀 더 수월해지긴 하는 겁니까?
오, 내 친애하는 친구여, 지금의 너는 삼(3)생애 전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그 일을 해내고 있다. 내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그렇고 말고, 그것은 갈수록 쉬워진다. 말하자면 네가 더 많이 기억할수록, 너는 더 많이 체험할 것이며,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더 많이 알수록, 너는 더 많이 기억해낸다. 그것은 일종의 순환이다. 그렇다, 그 일은 갈수록 쉬워지고, 갈수록 나아질 것이며, 갈수록 즐거워지기까지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의 어떤 측면도 진짜로 고된 적은 없었다는 걸 잊지 마라. 요컨대 너는 그 모든 걸 사랑했다! 순간순간마다! 아, 인생이란건 참으로 달콤한 것이다! 그건 굉장한 체험이다. 그렇지 않은가?
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구? 내가 인생을 이 이상 얼마나 더 굉장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 너는 모든 걸 다 체험할 수 있지 않는냐? 눈물, 기쁨, 고통, 즐거움, 환희, 극심한 우울, 승리, 패배, 무승부. 그 이상 또 뭐가 있지?
아마 고통이 좀 덜해지는 게 있겠죠.
지혜가 더 높아지지 않으면서 고통만 줄면 너희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그러게 되면 너희는 무한한 기쁨, 곧 나라는 존재를 체험할 수 없다.
참을성을 가져라. 너는 지혜를 얻고 있다. 그리고 이제 너는 점점 더 고통 없이도 즐거움을 누려가고 있다. 이 역시 아주 좋은 징조다.
너는 고통 없이 사랑하고, 고통 없이 떠나보내고, 고통 없이 창조하고, 고통 없이 우는 법까지 배워가고(기억해가고) 있다. 그렇다. 내 말뜻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너는 고통 없이 고통스러워할 수도 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인생드라마까지도 더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삶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도 있고요. 웃기까지 하죠.
바로 그거다. 그리고 너희는 이런 걸 성장이라고 하지 않느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계속 성장하도록 하라, 내 아들이여. 계속 되어 가라. 그 다음의 네 최고 자아상 속에서 네가 되고자 하는 바를 계속 판단하도록 하라. 계속 그것을 향해 작업해가라. 계속하라! 계속하라! 이것이 우리가, 너와 내가 해내고 있는 신의 일이다. 그러니 계속 나아가도록 하라!
10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도 아시죠?
알고 있다. 나도 너를 사랑한다.
11
전번에 열거했던 제 질문 목록으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저로서는 그 질문 하나하나를 좀 더 자세히 파고 들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관계 하나만 갖고도 책 한 권 분량이 되겠지요.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다른 질문들은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끝날 겁니다.
또 다른 시기,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른 책들에서 다룰 수도 있고.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그러니 계속 나아가도록 하라. 만일 그럴 여유가 있으면 이 책에서도 다시 그 문제로 되돌아갈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을 하죠. 왜 저는 한번도 생활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 수가 없는 겁니까? 저는 늘 이렇게 쪼들리면 살아야 할 팔자인가요? 돈과 관련된 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걸 방해하는 게 뭡니까?
그런 상황은 너 혼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빚어낸 것이다.
모두들 제게 그건 자기가치와 관련된 문제라고 합니다. 자기가치를 낮게 보기 때문이라고요. 열명도 넘는 뉴에이지 운동가들이 제게 말했지요. 뭔가가 부족한 건 항상 따지고 올라가면 자기가치를 낮게 보기 때문이라고요.
편리한 단순화로군. 이 문제의 경우에는 그 사람들이 틀렸다. 너는 자기가치를 낮게 보아서 고통당하는 게 아니다. 사실 네 전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자신의 에고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경우를 일러 자기가치를 너무 크게 본다고 하지.
음, 또다시 당황스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내가 너에 관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얘기하기만 하면 너는 늘 당황스럽고 억울하다고 하는군. 당황하는 건 여전히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마음쓰는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다. 그런 건 그냥 지나치도록 하라. 새롭게 반응해보라. 웃으려고 해보라.
알았습니다.
네 문제는 자기가치와 관련된 게 아니다. 너는 그건 충분히 넉넉하게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다. 너희는 하나같이 자신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러므로 대다수 사람들에게 문제는 자기가치가 아니다.
그럼 뭐죠?
문제는 넉넉함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판단과 관련이 있다.
네게 예를 하나 들어주마.
예, 그래 주십시오.
너는 돈이 나쁜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또 너는 신은 좋은 것이란 생각도 갖고 있다. 네게 축복이 깃들기를! 그러므로 네 사고체계에서 신과 돈은 어울리지 못한다.
음, 어떻게 보면 그 말씀은 맞는 것 같군요. 제 사고방식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게 일을 재미있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런 사고방식은 네가 어떤 좋은 일을 하더라도 돈을 벌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 말은 네가 어떤 것을 아주 “좋다”고 평가하면, 돈이란 면에서는 가치를 평가절하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좋은” 것일수록(즉 가치있는 것일수록) 그것의 돈 가치는 더 낮아진다.
이건 너 혼자만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너희 사회 전체가 이런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너희 선생들은 쪼들리고, 스트립쇼의 무희들은 돈을 번다. 너희 지도자들은 스포츠 스타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수입밖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그 차이를 메꾸려면 남의 걸 훔치기라도 해야겠다고 느낀다. 너희가 연예인들에게 동전을 던지는 동안, 너희 사제들과 랍비들은 빵과 물만으로 연명한다.
이 점에 대해 생각해보라. 너희는 본질상 높은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것들은 무엇이나 싼값에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이즈 치료법을 찾아내려고 외롭게 연구하는 과학자는 남들에게 돈을 구걸해야 하지만 섹스하는 수백가지 새로운 방법에 관한 책을 쓰고, 관련 테이프를 만들고, 주말마다 관련 세미나를 여는 여자는....... 떼돈을 번다.
이렇게 모든 걸 거꾸로 만드는 게 너희의 성향이다. 이런 성향은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다.
잘못된 생각이란 건 돈에 대한 너희의 사고방식이다. 너희는 돈을 좋아하면서도 돈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한다. 너희는 돈을 숭배하면서도 그것을 “부당이득”이라 부른다. 너희는 어떤 사람을 “졸부”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해서 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너희는 당장 그 사람을 의심한다. 너희는 그 일을 “나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의사들은 지나치게 많은 돈을 벌지 않거나, 그 문제라면 신중하게 처리하는 게 좋다. 그리고 목사의 경우라면 맙소사!이다. 그 여자는 정말로 돈을 많이 벌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롭다(너희가 여자 목사를 허용한다고 가정하고). 안 그랬다간 틀림없이 말썽이 생길 것이다.
보다시피 가장 중요한 소명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수입도 가장 적어야 한다는 게 너희 생각이다.
흐으음.
그래, “흐으음”이라고 하는 게 맞다. 너는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니까.
옳거나 그른 것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렇다. 그런 건 없다. 네게 도움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만이 있을 뿐이다. “옳음”과 “그름”이란 용어들은 상대적인 용어들이다. 나는 이 용어들을 이런 식의 의미로만 사용한다. 다시 말해 네게 도움이 되는가란 면에서, 혹은 네가 원하는가라는 면에서, 돈에 대한 네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음을 명심하라. 그러므로 만일 네가 돈은 나쁜 것인데 너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자, 이제 너는 그 갈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내 아들아, 너는 특히 이런 집단의식을 신주처럼 떠받들고 있다. 다른 대다수 사람들은 그 갈등관계가 너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그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그런 일로 돈을 버는 데 신경쓰지 않는다. 말하자면 “나쁜” 걸로 “나쁜” 걸 얻으니까. 하지만 너는 자신이 이날 이때껏 해온 일들을 사랑한다. 너는 그 일들 속에 채워넣은 네 활동들에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한 일의 대가로 많은 돈을 버는 건, 네 사고방식으로는 “좋은 것”의 대가로 “나쁜 것”을 받는 것이기에, 너로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너는 순수한 노동의 댓가로 “부당이득”을 취하느니 차라리 굶어죽으려 들 것이다....... 마치 그 노동의 대가를 받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순수성이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실제로 돈에 대해 이중감정을 갖게 된다. 즉, 네 일부는 돈을 거부하고 또 다른 네 일부는 돈을 갖지 못했다고 화를 낸다. 이제 우주는 네게서 두가지 상반된 생각들을 접수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에 빠진다. 그러므로 돈과 관련된 네 삶은 들쑥날쑥하게 흘러갈 것이다. 돈에 대한 네 생각이 그렇게 들쑥날쑥 흘러가고 있으니까.
네게는 분명한 초점이 없다. 너는 사실상 무엇이 자신의 진실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거대한 복사기에 지나지 않는 우주는, 네 생각들을 그저 무수히 복사해내기만 한다.
이제 이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딱 한가지 있다. 돈에 대한 네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무슨 수로 제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다는 거죠? 사고방식이란 건 그야말로 사고방식 아닙니까? 제 생각과 제 마음자세와 제 발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에 걸친 체험, 평생에 걸친 다양한 경험의 결과겠지요. 돈에 대한 제 사고방식은 당신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걸 어떻게 바꿉니까?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질문이 아마 그 질문일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보통 취하는 창조방식은 생각과 말과 행위, 혹은 행동을 포함하는 3단계 과정이다.
먼저 생각, 다시 말해 형태를 이룬 발상 혹은 최초의 개념이 떠오른다. 이어 말이 나온다. 대부분의 생각은 결국 말로 되어 나오는 법이다. 흔히 글이나 이야기로. 이것은 생각에 에너지를 보태주어 생각이 세상 속으로 밀고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이제 생각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띄게 된다.
마지막으로 말은 때때로 행동으로 옮겨져 소위 결과로, 즉 애초에 생각에서 시작된 것의 물질 표현으로 나타난다.
너희가 지은 세계 속에 있는, 너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이런 식으로, 즉 창조의 세 가지 중심들이 모두 사용되는 방식으로나 이것이 약간 변형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받침 생각을 어떻게 바꾸느냐는 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래, 이건 아주 좋은 질문이고,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받침 생각들 중 일부를 바꾸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뿌리 생각root thought 혹은 받침 생각을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은 생각-말-행동의 순서를 뒤집는 것이다.
어떻게요?
뭔가에 관해 새로운 생각을 갖고 싶으면 먼저 행동하라. 뭔가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고 싶으면 먼저 말을 하라. 충분할 만큼 자주 이렇게 하라. 그러면 너희는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끔 네 마음을 길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길들인다구요? 마인드 컨트롤 같은 건가요? 그건 단지 정신 조작일 뿐이잖아요?
네 마음이 어떻게 해서 지금의 생각들을 갖게 되었는지 아느냐? 지금처럼 생각하게끔 너희 세상이 네 마음을 조작해왔다는 걸 모르겠느냐? 세상이 네 마음을 조작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조작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
남들이 바라는 대로 생각하기보다는 네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는가? 반응하는 생각보다는 창조하는 생각으로 무장하는 편이 더 낫지 않는가?
하지만 너희의 마음은 반응하는 생각, 곧 남들이 체험에서 나온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너희 생각들 중에서 자신이 만든 자료에서 나온 생각은 극히 적다. 스스로 설정한 우선순위에 따르는 생각은 더더욱 적고.
너 자신의 돈에 대한 뿌리 생각이 그 전형적인 예다. 돈에 대한 네 생각(돈을 나쁘다)은 네 체험(돈을 갖는 건 멋진 일이다!)과 정면으로 대립하다. 그리하여 너는 자신의 뿌리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체험을 발뺌하고 그것에 대해 거짓말을 해야 한다.
너는 이런 생각에 너무 뿌리박혀 있어서 돈에 관한 자신의 관념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부 자료나마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뿌리 생각을 바꾸는 방법이며, 그것을 남들의 생각이 아닌 너 자신의 뿌리 생각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런데 네게는 돈과 관련된 뿌리 생각이 또 하나 있다. 내가 이미 언급했던 것이지만.
그게 뭔데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사실 너는 무엇에 대해서건 간에 이런 뿌리 생각을 갖고 있다. 돈이 충분치 않다, 시간이 충분치 않다, 사랑이 충분치 않다, 음식과 물이 충분치 않다, 이 세상에는 자비가 충분치 않다....... 설사 좋은 게 있다 하더라도 그걸로는 충분치 않다.
“충분치 않음”의 이 집단의식이 너희가 보는 대로의 세상을 창조하고 재창조하고 있다.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돈과 관련해서 두가지 뿌리 생각들, 받침 생각들을 바꿔야겠군요.
아, 최소한 두 가지란 거지. 아마 더 많을 걸. 어디 보자....... 돈은 나쁘다....... 돈이 부족하다....... 신의 일(네게는 이게 중요한 일이지)을 한 댓가로 돈을 받을 수는 없다....... 돈은 절대로 공짜로 얻을 수 없다....... 돈은 나무에서 자라지 않는다(사실은 그럴 때도 있는데)....... 돈은 부패시킨다.......
그러고 보니 할 일이 많군요.
그래, 돈과 관련된 현재의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 또 한편에서 돈과 관련된 현재의 상황을 네가 불만스러워 하기 때문에 돈과 관련된 현재의 상황이 불만스럽다는 걸 깨닫는 게 중요하다.
때때로 당신을 따라가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너를 인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원 참, 당신은 신이잖아요. 어째서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주지 않는거죠?
나는 그렇게 해왔다.
그럼 왜 제가 그냥 이해할 수 있게끔 해주지 않는 거죠? 당신이 참으로 그걸 원한다면 말입니다.
네가 참으로 원하는 건 나도 참으로 원한다. 그밖에는, 그 이상으로는, 원하는 게 없다. 너는 이게 바로 내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걸 모르느냐? 만일 내가 네게서 너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것을 원한다면, 그래서 네가 그것을 갖게끔 해주기까지 한다면, 네 자유 선택권은 어떻게 되는가? 만일 네가 어떤 존재가 될지, 어떤 행동을 할지, 뭘 가질지까지 내가 일일이 말해준다면 네가 어떻게 창조력을 가진 존재일 수 있겠는가? 내 기쁨은 네 맹종 속에 있지 않고 네 자유 속에 있다.
좋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말씀하신 건, 제가 돈과 관련된 제 상황을 불만스러워하기 때문에 돈과 관련된 제 상황이 불만스럽다는 건가요?
너는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존재다. 네 생각이 부정적일 때 그건 일종의 악순환이 된다. 너는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네 현재 체험의 상당부분은 네 이전 생각을 근거로 한다. 생각은 체험을 낳고, 체험은 체험을 낳는 생각을 낳는다. 받침 생각이 즐거운 것일 때 이 과정은 계속해서 즐거움을 낳을 수 있다. 받침 생각이 지옥 같으면 그것은 계속해서 지옥을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낸다.
비결은 받침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 나는 그렇게 하는 방법을 보여주려 한다.
계속하십시오.
계속하라니 고맙구먼.
맨 먼저 할 일은 생각-말-행동의 틀을 뒤집는 것이다. “행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라”는 옛 격언을 기억하느냐?
예.
그럼 그건 잊어버려라. 뿌리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너는 생각하기 전에 먼저 행동해야 한다.
예를 하나 들어주지. 네가 거리를 걷다가 25센트짜리 은화를 달라고 애걸하는 한 할멈을 만났다고 치자. 너는 그 할멈이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 순간 너는 가진 게 얼마 안되긴 하지만 그 할멈에게 줄 정도는 충분히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할멈에게 돈을 좀 주자는 게 네 첫 번째 충동이다. 네 마음 한구석에서 접혀있는 지폐를 찾아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일 달러짜리나 오 달러짜리 지폐를. 에라, 저 할멈을 한번 즐겁게 해주자. 기뻐서 펄쩍 뛰게.
그때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뭐라고, 미쳤어? 너한테는 칠 달러밖에 없어! 우리가 하루면 다 쓸 돈이야! 그런데 저 할멈한테 오 달러를 주겠다구? 그래서 너는 그 돈을 쥐었다 놨다 하기 시작한다.
다시 생각이 일어난다. 이봐, 이봐, 넌 남한테 마구 인심 쓸 만큼 많이 갖고 있지 않아! 저 할멈한테 동전이나 몇 개 던져주고 한시바삐 여기서 빠져나가.
너는 25 센트짜리 은화 하나를 꺼내려고 다른쪽 주머니에 재빨리 손을 집어넣는다. 네 손가락에는 십 센트 짜리 동전과 오 센트 짜리 동전들만 만져진다. 너는 당황한다. 보라구, 옷도 제대로 갖춰 입고 먹기도 제대로 먹으면서,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불쌍한 할멈한테 고작 오 센트, 십 센트 동전이나 주려는 네 꼬락서니를.
너는 25 센트짜리 은화 한두 개를 찾으려 하지만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아, 하나 있다. 주머니 제일 구석에. 그러나 이제 너는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를 지나치고 말았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할멈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너 역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제 너는 자신의 넉넉함을 깨닫고 남과 나누는 즐거움을 맛보는 대신에 그 할멈만큼이나 초라한 자신을 느낀다.
어째서 너는 그냥 할멈에게 지폐를 주지 않았는가? 네 맨 첫 충동은 그것이었으나 네 생각이 그걸 방해했다.
다음 번에는 생각하기 전에 행동하겠다고 결심하라. 그 돈을 주어라. 그냥 밀어부쳐라! 너는 돈을 갖고 있고, 그 돈을 주더라도 더 나올 데가 있다. 너와 거지할멈 간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너는 돈이 더 들어올 데가 어딘지 확실히 알지만, 할멈은 그걸 모른다.
뿌리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네가 가진 새로운 생각에 따라 행동하라. 하지만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안 그러면 네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네 마음이 그 생각을 죽일 것이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죽일 것이다. 그 새로운 생각, 새로운 진실은 네가 미처 눈치챌 틈도 없이 네 속에서 죽고 말 것이다.
그러니 기회가 오면 재빨리 행동하라. 그리고 이런 일을 충분히 자주 반복하다 보면, 얼마 안가 네 마음은 그 생각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네 새로운 사고가 될 것이다.
오,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건 바로 신사고(新思考)운동이 내세우는 거잖아요?
그게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해야겠지. 새로운 생각은 네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다. 그것은 네가 진화하고 성장하고 ‘참된 자신’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실제 기회다.
지금 네 정신은 낡은 사고들로 가득차 있다. 낡은 사고들일 뿐 아니라,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낡은 사고들로, 뭔가에 대한 네 마음을 바꾸자면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이 기회다. 이것이 바로 진화라는 것이다.
12
왜 저는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 수 없는 겁니까?
뭐라구? 삶의 재미도 누리면서, 거기다 생활비까지 챙기고 싶다는 건가? 형제여, 너는 꿈꾸고 있다!
뭐라구요.......?
아, 농담이다. 네 마음을 살짝 읽었을 뿐이다. 너도 알다시피 그게 바로 그 문제에 관한 지금까지의 네 생각이었다.
제 체험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자, 이쯤에서 돌아보면 우리는 이 문제를 벌써 여러차례 다뤄왔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비를 버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로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감히 삶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걸 못하게 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꼭 제기되어야 할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다룰 때 흔히 놓치곤 하는 것이 이 요소이다.
그게 뭡니까?
존재와 행동 간에는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행동 쪽에 역점을 두어왔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나요?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없다. 너희가 무엇을 선택하는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가질 수 있는가만이 있을 뿐. 너희가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선택한다면, 너희는 행동을 가지고는 그것들을 거의 얻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행복과 만족을 선택한다면, 행동과정에서는 그것들을 거의 찾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신과의 재결합, 최상의 앎, 깊은 이해, 끝없는 자비, 완전한 자각, 절대적인 성취를 선택한다면, 너희는 행동으로는 그것들을 거의 이루지 못할 것이다.
달리 말해 너희가 진화를, 영혼의 진화를 선택한다면, 너희는 자기 몸의 세속적인 활동들을 가지고는 그것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행동은 몸의 기능이다. 존재는 영혼의 기능이다. 몸은 항상 뭔가를 하고 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마다 몸은 뭔가에 매달려 있다. 몸은 결코 멈추지 않고, 결코 쉬지 않으며, 끊임없이 뭔가를 한다.
그것은 영혼의 지시에 따라 하는 행동이기도 하고, 영혼의 지시를 무시한 행동이기도 한다. 너희의 삶의 질은 그 균형에 달려 있다.
영혼은 영원한 존재이다. 영혼은 몸이 하는 일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뭘 하든 상관없이 존재한다.
만일 너희가 삶을 행동과 관련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희는 자신이 뭘하는지 모르고 있다.
너희의 영혼은 너희가 생존을 위해 뭘 하든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너희의 생이 끝나고 나면 너희 역시 개의치 않을 것이다. 너희의 영혼은 너희가 뭘 하든, 그걸 하는 동안 너희가 무엇이 되고 있는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영혼이 관심을 갖는 건 행동 상태가 아니라 존재 상태다.
영혼은 어떤 존재가 되려고 하는데요?
나.
당신이요?
그렇다, 나. 너희의 영혼은 바로 나다. 그리고 영혼은 그걸 알고 있다. 영혼이 하는 일은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은, 그런 체험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고 있다. 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무엇이 된다는 건가요?
네가 되고 싶은 건 무엇이나. 행복, 슬픔, 약함, 강함, 기쁨, 복수심, 통찰력, 몽매함, 좋음, 나쁨, 남성, 여성, 이제 네가 말해보라.
자, 어서 네가 되고 싶은 걸 말해보라니까.
대단히 심오한 말씀이군요. 하지만 그게 제 생계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죠?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남고, 생존하고, 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방법을 찾으려는 중인데요.
네가 되고 싶은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면 된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가 하는 일로 많은 돈을 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어째서 그런 차이가 생길까?
한쪽 사람들이 다른쪽보다 더 실력이 있겠죠.
실력은 첫 번째 척도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다루려는 것은 두 번째 척도이다. 실력이 똑같은 두 사람이 있다 치자. 둘 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둘 다 자기네가 하는 일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둘 다 뛰어난 솜씨로 자신들의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쪽이 다른쪽보다 더 낫다. 한 사람은 사업이 번창하는데 다른 사람은 허덕인다. 어째서 그럴까?
입지요.
입지?
예전에 누가 저한테 얘기하기를,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고려할 게 딱 세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도 입지, 둘째도 입지, 셋째도 입지라고요.
달리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에 자리 잡을 것인가?”란 말이냐?
바로 그겁니다.
그것도 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볼 순 있겠군. 영혼은 너희가 어디에 자리잡을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너희는 두려움에 자리잡으려는가, 아니면 사랑에 자리잡으려는가? 삶과 맞닥뜨릴 때 너희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오고 있는가? 똑같은 자질을 갖춘 두 사업가의 예에서 보면, 두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은 성공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한 여자는 개방적이고, 우호적이고, 자상하고, 인정많고, 쾌활하고, 자신감에 넘치고, 자기 일을 즐기기까지 하는 반면, 다른 한 여자는 폐쇄적이고, 냉담하고, 무심하고, 퉁명스럽고, 인정없고, 자기 일이 불만스럽기까지 한다.
그런데 너는 훨씬 더 높은 존재상태를 선택할 생각이 있는가? 너는 선과 자비, 연민, 이해, 용서, 사랑을 선택할 생각이 있는가? 신성(神性)을 선택하는 문제는 어떤가? 그러면 어떤 체험이 따라올까?
내 너희에게 얘기해주리라.
존재는 존재를 부르고, 체험을 낳는다.
너희는 자신의 몸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이 행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자신의 영혼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이 행성에 존재한다. 너희 몸은 그저 영혼의 도구일 뿐이고, 너희 마음은 몸을 움직이는 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너희는 일종의 동력도구(전기나 휘발유엔진의 힘으로 움직이는 도구-옮긴이)를 갖고 있는 셈이다. 영혼이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동력도구를.
영혼이 바라는 건 뭔가요?
참, 그게 뭘까?
전 모르죠. 제가 묻고 있잖아요.
나도 모른다. 나도 네게 묻고 있다.
이러다가는 영원히 서로에게 되묻기만 하겠군요.
그렇겠군.
잠깐만요! 조금 전에 당신은 영혼이 당신이 되려 한다고 하셨어요.
그렇다.
그럼 그것이 바로 영혼이 바라는 것이겠군요.
넓은 의미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영혼이 되고자 바라는 이 나는, 수많은 차원과 수많은 감각과 수많은 측면을 지닌 복잡한 존재다. 내게는 몇백만가지 측면들이 있다. 아니, 몇억, 몇조의 측면들이. 알겠느냐? 경박함과 심오함, 작은 것과 큰 것, 비천함과 신성함, 하찮음과 신성이 있다. 알겠느냐?
아, 예. 알겠습니다.......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 여기와 저기 전과 후, 선과 악.......
바로 그거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이 표현은 그냥 단순히 재치있는 말이나 근사한 개념에 불과했던 게 아니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진리의 표현이었다.
내(神)가 되기로 결정한 영혼은 엄청난 일거리들을 눈 앞에 갖게 된다. 선택할 존재라는 엄청난 메뉴를.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영혼이 하고 있는 일이다.
존재의 상태들을 선택하는 일 말이죠.
그렇다. 그러고 나서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는 적절하고 완벽한 조건들을 조성하는 일. 그러므로 너희에게는, 그리고 너희를 통해서는 너희 자신의 최고선에 맞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진실이다.
제가 하고 있는 일들뿐만 아니라 제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까지 포함하여 제 영혼이 제 모든 체험을 창조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영혼이 너희가 체험하고자 계획했던 것을 정확하게 체험할 수 있는, 적절하고도 완벽한 기회들을 너희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해보자. 그럴 때 너희가 실제로 무엇을 체험하느냐는 너희 자신에게 달려 있다. 너희의 실제 체험은 너희의 선택에 따라 애초에 체험하려던 게 될 수도 있고, 다른 어떤 게 될 수도 있다.
어째서 체험하고 싶지 않은 것을 선택하곤 합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너는 왜 그러느냐?
그러니까, 가끔 영혼이 바라는 바와 몸과 마음이 바라는 바가 다른 경우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생각은 어떠냐?
하지만 어떻게 몸이나 마음이 영혼을 지배할 수 있습니까? 영혼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 않을까요?
가장 큰 의미에서 볼 때, 너희의 영혼은 너희가 영혼 자신의 바램을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그 바램과 즐거이 하나가 되는 위대한 순간이 오기를 고대한다. 하지만 영혼은 결코 지금의 의식적이고 물질적인 너희 부분에게 자신의 바램을 강요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성부(聖父)는 아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건 성부의 본성 자체에 대립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다.
성자(聖者)는 성신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건 성자의 본성 자체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그것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다.
성신은 너희 영혼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건 성신의 본성이 아니기에, 그것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다.
불가능은 여기에서 끝난다. 마음은 아주 빈번하게 몸에게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고자 하며, 실제로 그렇게 한다. 마찬가지로 몸은 종종 마음을 통제하고자 하며, 그것은 자주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영혼을 통제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영혼은 어떤 욕구도 갖지 않기 때문에(몸과 마음이 욕구들에 얽매어 있는 것과 달리), 늘 몸과 마음이 자기네 뜻대로 하게 내버려둔다.
사실 영혼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너희 자신인 그 실체가 참된 자신을 창조하는 것으로 참된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그 과정은 의식하지 못하는 복종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하는 의지(意志)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복종은 창조가 아니며, 따라서 결코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복종은 반응인 반면, 창조는 명령받지 않고 요구받지 않은 순수한 선택이다.
순수한 선택은 지금 이 순간에 가장 고귀한 관념이 만들어낸 순수한 창조를 통해 구원을 가져온다.
영혼의 기능은 자신의 바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마음의 기능은 여러 가지 대안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몸의 기능은 그 선택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조화롭게 하나가 되어 함께 창조할 때, 신은 현실 속에서 구현된다.
그럴 때 영혼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다.
그럴 때 하늘은 크게 기뻐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너희 영혼은 너희가 ‘참된 자신’을 아는 데 필요한 것이 되고, 그것을 하고, 그것을 가질 기회를 창조하고 있다.
너희 영혼은 지금 이 순간에 너희가 읽고 있는 글들로 너희를 데려왔다. 예전에도 너희를 지혜와 진리의 글들로 데려갔던 것처럼.
지금 너는 무엇을 하려 하느냐? 어떤 존재가 되길 선택하려는가?
너희 영혼은 과거에도 무수히 그러했던 것처럼 기다리면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그 말씀은 제가 어떤 존재상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제 세속적인 성공 여부가 결정되리란(저는 여전히 제 성공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뜻으로 이해해도 됩니까?
나는 네 세속적인 성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너만 거기에 연연할 뿐이지.
너희가 장기간에 걸쳐 특정한 존재상태를 이뤄낼 때 자신이 하는 세상일에서 성공하지 않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러니 “생계를 꾸리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참된 스승들은 생계를 꾸리기 보다는 삶을 꾸리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특정한 존재 상태들에 이르면, 삶은 풍족하고 충만하며 장대하고 보상받을 것이기에, 세속적인 부(富)와 성공은 조금도 너희의 관심을 끌지 않을 것이다.
삶의 역설은 너희가 세속적인 부와 성공에 아무 관심이 없어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것들이 너희에게 흘러들어올 길이 열린다는 점이다.
기억하라, 너희는 원하는 걸 가질 수는 없지만, 자신이 가진 걸 체험할 수는 있다.
제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다구요?
그렇다.
전에도 이런 말씀을 하셨더랬죠. 우리가 대화를 막 시작하던 무렵에요. 그러나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당신은 제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해오신 것 같은데요. “네가 생각하는 대로, 네가 믿는 대로 다 이루어지리라”는 식으로요.
그 두 가지 진술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모순되지 않는다구요? 제게는 확실히 모순되게 느껴지는데요.
네 이해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건 전도 인정합니다. 제가 당신과 대화하는 것도 그 때문이니까요.
그럼 설명해주지. 너희는 자신이 원하는 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내가 전에 이 책 1장에서 말했다시피, 뭔가를 원한다는 행동 자체가 그것을 네게서 멀어지게 한다.
음, 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군요. 하지만 당신은 제게서 떠나고 있습니다. 빠른 속도로요.
붙잡고 있으려면 싸워라. 다시 좀 더 상세히 설명해줄테니 잘 기억해두도록 하라. 네가 이해하고 있는 대목으로 돌아가보자.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맞는가?
맞습니다.
말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이것도 이해하는가?
예.
행동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생각, 말, 행동은 창조의 세가지 차원이다. 아직 나와 함께 있는가?
예, 거기 있습니다.
좋다. 그럼 네가 줄곧 얘기하고 물어왔던 것이니, “세속적인 성공”을 지금의 주제로 삼기로 하자.
좋습니다.
지금 너는 “나는 세속적인 성공을 원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느냐?
가끔 가다요
그리고 너는 가끔 가다 “나는 더 많은 돈을 원한다”는 생각을 하느냐?
예.
바로 그 때문에 너는 세속적인 성공도 더 많은 돈도 가질 수 없다.
왜죠?
우주로서는 네가 생각하는 걸 그대로 실현시켜주는 것 외에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네 생각은 “나는 세속적인 성공을 원한다”이다. 너도 이해하다시피 그런 생각은 호리병 속에 든 요정처럼 창조하는 힘이 있다. 네 말은 요정이 명령이다. 이해하겠느냐?
그런데 왜 제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건가요?
이미 말했듯이 네 말은 요정의 명령이다. 그런데 네 말은 “나는 성공을 원한다”였다. 그럴 때 우주는, “알았다,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그래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라. “나”라는 말은 창조의 엔진에 시동을 걸어주는 열쇠다. “나는”이라는 두 단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 말들은 우주에 보내는 진술이며, 명령이다.
이제 “나”라는 말(이 말은 ‘위대한 나the Great I Am'를 불러들인다) 뒤에 따라오는 건 뭐든지 현실에서 그래도 실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나” + “성공을 원한다want”는 성공이 모자라는wanting 너를 만들어 내며, “나” + “돈을 원한다”는 돈이 모자라는 너를 만들어낸다. 생각과 말에는 창조력이 있기에 다른 결과를 나올 수 없다. 행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네가 성공과 돈을 원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서로 일치되고, 따라서 너는 확실히 이것들이 모자라는 체험을 갖게 된다.
맙소사! 정말로 그렇게 되나요?
물론이다. 너희는 강력한 힘을 지닌 창조주다. 그런데 너희가 예컨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서 딱 한번 한 생각이나 말이라면, 그것들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가끔 그러하듯이 “뒈져라!”거나 “지옥에나 가버려!”라거나, 그밖에 고상하지 못한 말들을 생각하거나 뱉었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거 고맙군요.
천만에. 그러나 너희가 어떤 생각이나 말을 자꾸자꾸 되풀이한다면, 한두번이 아니라 몇십번, 몇백번, 몇천번 되풀이한다면, 그것들의 창조력이 얼마나 엄청날지 생각해봤는가?
자꾸자꾸 되풀이된 생각이나 자꾸자꾸 표현된 말은 표현된 꼭 그대로 된다. 즉 생각하거나 말한 그대로 밀려나온다는 말이다. 그것은 외부로 나와 실현된다. 그것은 너희의 현실이 된다.
비극이군요.
그 말이 흔히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이것, 비극이다. 너희는 비극을 사랑하고 삶의 드라마를 사랑한다. 너희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을 때까지 너희는 그렇게 한다. 그러나 언제고 너희의 진화과정에서 드라마를 사랑하고, 너희가 살아온 “이야기”를 사랑하는 걸 그만둘 시점이 온다. 그때가 바로 너희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정하는 때, 꼭 바꾸기로 선택하는 때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 방법을 모를 뿐이다. 하지만 이제 너는 알고 있다. 네 현실을 바꾸려면 그냥 그런 식으로 생각하길 그만두면 된다.
네 경우라면 “나는 성공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도록 하라.
저한테는 그게 거짓말처럼 여겨집니다. 제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저 자신을 놀리는 게 됩니다. 제 마음은 “말도 안돼!”라고 소리칠 겁니다.
그럼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생각을 하도록 하라 “지금 성공이 내게 다가오고 있어”라거나 “모든 게 다 내 성공을 돕고 있어”라는 식으로.
뉴에이지식 긍정훈련의 배후에 깔린 수법이 바로 그런 건데요.
긍정이 너희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진술일 뿐이라면, 그것은 아무 효과도 없다. 긍정은 너희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아는 것에 대한 진술일 때만 효과가 있다.
소위 최고의 긍정은 감사와 인정의 진술이다. “신이시여, 제가 성공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말과 행동으로 옮겨진 그런 관념이나 생각은 그것들이 참된 앎에서 온 것일 때,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데서가 아니라, 결과가 이미 만들어졌음을 깨닫는 데서 온 것일 때,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예수는 이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예수는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그에 앞서 기적을 가져다 준 것에 대해 네게 미리 감사했다. 그로서는 감사하지 않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선언한 것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과 나의 관계를 굳게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그의 앎을 있는 그대로 반영했다. 너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너희의 앎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러니 이제 네가 삶에서 체험하고자 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을 “원하지” 말고 선택하라.
너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을 선택하려는가? 더 많은 돈을 선택하려는가? 좋다 그것들을 선택하라. 어중간하게 선택하지 말고 진심으로, 온마음으로 선택하라.
그러나 네가 이르게 될 발전단계에서 “세속적인 성공”이 더 이상 네 관심을 끌지 않는다 해도 그리 놀라지 않도록 하라.
그건 무슨 뜻인가요?
모든 영혼의 진화과정에는 더 이상 몸의 생존이 아닌 영혼의 성장이 주요관심이 되고, 더 이상 세속적인 성공 달성이 아닌 자기실현이 주요관심이 되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때가 아주 위험한 때이다. 특히 처음 시작 단계에서는,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실체가 바로 그거라는 것, 즉 자신이 몸의 존재가 아니라 몸 속의 존재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성장 중인 그 실체가 이 관점을 충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 전인 이 단계에서, 흔히 마음은 몸의 일들에 대해 더 이상 아무 신경도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 영혼은 드디어 자신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만 너무 흥분해 있다!
그럴 때 마음은 몸과 몸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내팽개친다. 모든 게 다 무시된다. 모든 관계들이 옆으로 제쳐지고, 가족들도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직업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청구서들은 그대로 방치된다. 몸은 오랫동안 먹지조차 못한다. 이제 그 실체의 모든 관심과 초점은 영혼과 영혼의 문제들에 집중된다.
이런 사태는 그 존재의 나날의 삶에서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비록 그 마음은 어떤 외상(外傷)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마음은 더없는 행복감에 젖어 있다. 이럴 때 다른 사람들은 네가 미쳤다고 말하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너는 미쳤을 수도 있다.
삶이 몸과 아무 관련도 없다는 진실을 발견한 것이 역으로 다른 식의 불균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실체는 전에는 몸이 존재하는 모든 것인 듯이 행동했지만, 이제는 몸이 전혀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얼마 안가 그 실체가 기억해내게 되듯이(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물론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너희는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3중의 존재다. 너희가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너희는 언제나 3중의 존재로 머물 것이다.
죽음이 닥치면 몸과 마음은 떨어져나간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몸은 가장 밀도가 높은 부분을 뒤에 남겨둔 채 형태를 바꾸긴 하지만, 그 외피(外皮)는 항상 유지한다. 마음(이것을 뇌와 혼동하지 마라) 역시 세 가지 차원 혹은 세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로 영혼 및 몸과 함께 결합하여 너희를 따라간다.
만일 너희가 다시 지상의 삶이라는 이 체험을 선택해야 한다면, 너희의 신성한 자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진짜 차원들을 소위 몸, 마음, 영혼으로 분리시킬 것이다. 사실 너희는 세가지 다른 특성을 지니긴 하지만, 같은 하나의 에너지이다.
너희가 이 지상에서 새로운 신체 속에 존재하기로 마음먹으면, 너희의 에테르성(性) 몸(너희 중 일부는 그것을 이렇게 부른다)은 그 진동수를 낮춘다. 즉,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 빠른 진동에서 질량과 물질을 낳는 속도로 낮춘다. 이 실제 물질은 순수한 사고의 창조물이다. 이것은 너희 마음이, 너희의 3중 존재 중에서 고귀한 마음의 측면이 이뤄낸 작품이다.
이러한 물질은 수천조 수천경의 각기 다른 에너지 단위들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 마음으로 통제할 수 있는 에너지 덩어리로 응고된 것이다. 너희는 진짜로 주(主)된 마음이고!
이 미세한 에너지 단위들이 자체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나면 몸은 그것들을 버린다. 그러면 마음은 새로운 에너지들을 창조한다. 마음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 속에서 그것들을 창조한다! 말하자면 에테르성 몸이 그 생각을 “포착해서” 더 많은 에너지 단위들의 진동수를 낮추면(어쩐 의미에서는 그 에너지 단위들을 “결정화[結晶化]하면”). 그것들은 다시 물질이 된다. 너희라는 새로운 물질이. 이런 식으로 너희 몸의 모든 세포들은 몇 년마다 한번씩 바뀐다. 너는 문자 그대로 몇 년 전의 너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만일 너희가 질병에 대해 생각한다면(혹은 계속 화내고 증오하고 부정적이라면), 너희의 몸은 이런 생각들을 물질 형태로 전환시킬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부정적이고 병적인 형태를 보고 “무슨 일이야What's the matter?(이 말을 직역하면, 그 물질은 무엇인가?가 된다-옮긴이)”라고 물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물어놓고도 자기네가 얼마나 정확한 질문을 던졌는지 깨닫지 못한다.
영혼은 너희에 관한 진실을 간직한 채, 이 모든 드라마가 펼쳐지는 걸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순간마다 지켜본다.
영혼은 그 청사진을, 원래 계획을, 맨처음 생각을, 생각의 창조력을 결코 잊지 않는다. 영혼이 하는 일은 너희에게 상기시키는remember 것. 즉 문자 그대로 다시 마음을 쓰게re-mind만드는 것이다. 너희가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고, 그리하여 ‘지금 되고자 하는 자신’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이런 식으로 창조의 체험, 영상화와 실현, 앎과 미지로의 성장 순환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휘유!
맞다. 휘유!라고 하는 바로 그 느낌이다. 하지만 설명할게 훨씬 더 많이 있다. 아주 많이. 한권의 책으로는, 아니 한평생을 다 써도 모자랄 만큼 많이. 하지만 너는 이제 시작했으니 그걸로 좋다. 단지 이것 하나만 명심하도록 하라. 너희의 위대한 교사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호레이쇼, 이 천지간에는 자네의 지혜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네.”(햄릿 제1막 5장-옮긴이)
지금 말씀하신 것에 관해 몇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제가 죽은 뒤에도 마음이 저와 같이 간다고 하셨을 때 그건 제 “개성”이 저와 함께 간다는 뜻인가요? 사후세계에서도 제가 누구였는지 알게 된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 네가 지금까지 어떤 존재였는지도. 너는 그 모든 걸 훤히 볼 것이다. 그 때는 그게 네 깨달음에 도움이 되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내세에는 현재의 삶과 관련하여 일종의 “계산서”나 개괄평가서, 일종의 대차대조표 같은 게 있습니까?
너희가 내세라 부르는 곳에는 어떤 심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너희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너희가 현생에서 자신에 대해 얼마나 엄하고 가혹하게 구는가를 생각하면, 거기서도 너희는 자신에게 낮은 점수를 줄 게 분명하니까).
아니다, 거기에는 계산서도 없고, “엄지를 올리거나 내리는” 사람도 없다. 심판하기 좋아하는 것은 인간들뿐이다. 너희가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도 그러리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위대한 진실이다.
하지만 내세에는 어떤 심판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이곳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너희가 말하는 ‘자신’과 ‘되고자 하는 자신’에 근거하여, 다시 선택할-만일 선택할 게 있다면-기회는 주어질 것이다.
동양에는 욕계(欲界)Kama Loca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신비주의 교리가 있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죽었을 때 우리는 이 생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들을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관점에서 다시 재현해볼 기회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달리 말해, 우리는 현생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했다고 느낀 모든 걸 이미 체험했고, 이번에는 이 각각의 순간에 남들이 느꼈던 것을 느끼는 체험을 하게 된다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다시 반복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이런 가르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생 이후 너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 자리에서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롭다. 그 체험은 다른 차원의 체험이고, 인간의 언어라는 지독히 제약된 도구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여기서는 그저 너희가 어떤 고통이나 두려움이나 심판받는 일없이 자신의 전생을 다시 조망할 기회를 가지며, 너희는 그것을 통해 이곳에서의 체험을 어떻게 느끼고, 그 다음에 어디로 가고 싶은지 판단하게 된다는 얘기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너희 중 상당수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로, 너희가 현재 수준에서 자신에 관해 내리는 결정과 선택들을 체험할 또 한번의 기회를 갖기 위해 이 고밀도의 상대계로 돌아오기로 결정할 것이다.
선택받은 소수인 다른 이들도 다른 사명을 갖고 이 세상에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밀도와 물질 속에서 남들을 건져 내려는 영적인 목적을 갖고 밀도와 물질의 이 세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지상에는, 너희 중에는 늘 그런 식의 선택을 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너희는 그들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은 할 일은 끝났다. 그들은 오로지 남들을 도우려는 목적 하나로 지상으로 돌아온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기쁨이요, 열광이다. 그들은 봉사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너희는 그런 사람들을 놓칠래야 놓칠 수 없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들의 숫자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너희가 그런 사람을 알 기회, 그런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을 기회는 항상 존재한다.
제가 그런 사람인가요?
아니. 너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로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그런 사람은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그에게는 물을 게 없다.
내 아들이여, 이번 생에서 너는 사자(使者)다. 예고하는 사람이고,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며, 진리를 추구하고 자주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한번의 생애가 그 정도면 대단한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라.
아, 그럼요. 하지만 누구나 그 이상을 바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리고 넌 그렇게 된다! 너는 항상 그 이상을 바라게 될 거야. 그게 네 본성이니까. 항상 더 나아지려고 하는 건 신성한 본성이지.
그러니 추구하라. 그래, 무슨 수를 쓰더라도 추구하라.
이제 나는 이번 장의 서두에서 네가 던진 질문에 분명히 대답하고자 한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 네가 진실로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하라! 그 외에 다른 건 일체 하지 마라! 네게는 시간이 거의 없다. 어떻게 생계를 위해 네가 좋아하지 않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슨 그 따위 삶이 있단 말인가? 그건 사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다!
만일 네가, “하지만, 하지만....... 제게는 딸린 식구들이 있습니다....... 먹여살려야 할 어린 것들이 있고....... 저만 쳐다보는 아내가 있습니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만일 네가 몸이 하는 일을 삶이라고 주장한다면, 너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너를 기쁘게 해줄 일,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일을 하도록 하라.
그러면 최소한 네 기쁨을 방해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에서는 벗어날 수 있으리라.
네 몸이 하는 일이 하찮다는 건 아니다. 그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식으로는 아니다. 몸의 활동은 어떤 존재상태에 이르고자 시도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떤 존재상태를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만사가 제대로 질서잡혀 있다면 사람은 행복해지려고 뭔가를 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행복하다. 그래서 뭔가를 하는 것이다. 자비로워지려고 무슨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비롭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결정이 몸의 행동보다 먼저 이루어진다. 의식 없이 행동하는 사람만이 몸이 하는 일을 매개로 영혼의 상태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네 몸이 하는 일이 삶은 아니다”란 내 진술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럼에도 네 몸이 하는 일이 네 삶의 현상태를 반영해주는 건 사실이다.
이것은 또 다른 신성한 이분법이다.
그러나 다른 건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은 알아둬라.
자식이 있건 없건, 배우자가 있건 없건 간에 누구나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찾아내라! 그러면 네 가족들은 네가 돈을 벌고 못벌고에 상관없이 기쁨에 찬 가족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기뻐하지 않고 일어나 네 곁을 떠나려 한다면, 그들 나름의 기쁨을 찾을 수 있게 사랑으로 그들을 떠나보내라.
한편, 만일 네가 몸의 일들에 아무 관심도 없는 정도로까지 성숙해지면, 너는 하늘에서 그러한 것처럼 이 지상에서도 훨씬 더 자유롭게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신은 행복한 건 좋은 일이라고, 자신이 하는 일에서 행복해하는 것까지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네가 이제까지 해온 일은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진술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는 왜 그런 일을 하는가?
그 일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이란 건 없다.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행복까지 희생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사내가 ‘자신’이라면, 네가 하는 일을 사랑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는 게 네가 창조하는, 네 자신을 생생하게 진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책임이 주어졌을 때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기가 싫어하는 일이라도 열심히 하는 여자가 ‘자신’이라면, 네 일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렇게 하는 게 네 자아 이미지, 네 자아 개념을 뒷받침해줄 터이니.
누구든 간에 자기가 무슨 일을, 왜 하고 있는지 깨닫는다면,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
스스로가 원치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3
제가 직면하고 있는 일부 건강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저는 평생토록 지속되기에 충분할 만큼 심한 고질병들을 앓아 왔습니다. 왜 저는 지금까지도 그런 병들을 갖고 있는 걸까요? 이번 생애에서 말입니다.
우선 한 가지 점을 분명히 해두자. 너는 그 병들을 사랑한다. 아무튼 그 병들 대부분을. 너는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남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그 병들을 놀라울 만치 잘 이용하고 있다.
어쩌다 네가 그 병들을 사랑하지 않는 때라고 해봐야, 그것들이 정도 이상으로 진전되었을 때, 애초에 네가 그 병들을 지어내면서 생각한 정도보다 훨씬 더 심할 때뿐이다.
아마 너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병은 스스로 창조하다. 고리타분한 의사들조차 지금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지 알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한다(그들은 자기네가 뭘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병이 들면 그들은 왜 병이 자신을 덮쳤는지 모른다. 마치 자기네 스스로 저지른 짓이 아니라 하늘서 뭔가가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느낀다.
대다수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비단 건강 문제와 그 결과만 그런 게 아니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면서도 자신이 왜 암에 걸렸는지 의아해한다.
사람들은 고기와 지방을 먹으면서도 왜 동맥경화가 일어 났는지 의아해한다.
사람들은 한평생 계속해서 화를 내면서도 왜 심장마비가 왔는지 의아해한다.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무자비하게 남들과 경쟁하면서도 자신한테 왜 뇌일혈이 일어났는지 의아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 걱정하며 살지만, 이것은 그리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걱정은 마음의 활동 중에서 미움 다음 가는 나쁜 것으로, 거의 최악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자신을 심하게 파멸시키는 형태이다. 걱정은 일정한 초점 없이 정신 에너지를 쓸데없이 허비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 몸에 해를 주는 생화학 반응들을 창조하여, 소화불량에서 관상통맥 폐색까지 온갖 병들을 일으킨다.
걱정을 그만두면 건강은 이내 좋아질 것이다.
걱정은 마음이 자신과 나(神)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보여주는 마음의 행동이다.
미움은 가장 위험스런 정신상태이다. 그것은 몸에 독을 퍼뜨려,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빚어낸다.
두려움은 ‘너희’의 모든 것에 맞서는 대립물이다. 따라서 그것은 너희의 정신 건강과 육체 건강에 대립하는 결과를 낳는다. 두려움은 걱정이 증폭된 것이다.
걱정과 미움과 두려움은, 그 파생물들인 불안, 애달픔, 성마름, 탐욕, 불친절, 심판하기, 비난 따위와 함께 어느 것이나 몸세포들을 공격한다. 이런 조건에서 건강한 몸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자만심, 방종, 욕심 같은 것들은 앞의 것들보다 다소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신체의 질병이나 불편을 가져온다.
모든 병은 무엇보다 먼저 정신에서 창조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남한테 옮는 것들은요? 예를 들면 감기라든지....... 그리고 에이즈같은 건요?
너희 삶에서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생각은 자석처럼 결과를 너희에게 끌어다준다. 때로는 생각이 명료하지 않아서, “나는 고약한 병에 걸릴 거야”라는 식의 확실한 원인제공자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은 그보다 훨씬 더 미묘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그리고 대체로 그렇다). 예를 들면 (“나는 살 가치가 없는 놈이야”), (“내 인생은 늘 엉망이야”), (“나는 실패한 인간이야”), (“신이 나를 벌하실 거야”), (“사는 것이 지겹고 신물이 나!”).......
생각은 대단히 미묘하면서도 엄청나게 강력한 에너지 형태다. 말은 그보다 덜 미묘하지만 더 짙은 에너지 형태이다. 행동은 둔중한 물질 형태와 둔중한 움직임 속의 에너지이다. 너희가 “나는 패배자야” 같은 부정적인 개념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너희는 엄청나게 강한 창조 에너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너희가 감기에 걸린다 해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감기에 걸리는 정도는 아마 가장 약소한 결과일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의 결과들이 일단 물질 형태를 띠고 나면, 그 결과들을 뒤집기는 대단히 어렵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단히 어렵다. 그것을 뒤집으려면 최고의 믿음이라는 행동이 필요하다. 우주의 긍정적인 힘에 대한 남다른 믿음이 있어야 한다. 너희가 이 힘을 신이라 부르든, 여신, 혹은 부동(不動)의 동인, 원동력, 최초원인, 혹은 그밖의 어떤 딴 이름으로 부르든 상관없이 말이다.
치유자Healers들이 바로 이런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것은 ‘절대 앎’에 전달되는 믿음이다. 치유자들은 너희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전체이고 완벽하고 완전한 존재들임을 알고 있다. 이 앎도 생각이다.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닌 생각이다. 그런 앎은 산도 옮길 만한 힘을 갖고 있으니 너희 몸의 분자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치유자들이 종종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치료해줄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생각은 거리에 구애받지 않는다. 생각은 세상으로 퍼져가며, 그 말보다도 더 빨리 우주를 가로지른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오 8:5-13-옮긴이).” 그래서 그 순간 그렇게 되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백인대장의 믿음은 그토록 컸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은 모두 문둥병을 앓고 있다. 너희의 마음은 부정적인 생각들에 먹혀버렸다. 그런 생각들 중에는 너희에게 주입된 것들도 일부 있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는 너희 스스로가 지어내거나 불러일으켰다. 그러고 나서 너희는 몇시간이고 며칠이고 몇주고 몇 달이고, 심지어는 몇 년이고 그런 생각들을 지닌 채 즐긴다.
.......그리고는 자신이 왜 병들었는지 의아해한다.
네가 표현했듯이 너는 “일부 건강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네 사고방식의 문제들을 해결한다면. 그렇다, 너는 새로운 큰 문제들이 발전해가는 걸 막을 뿐 아니라, 네가 이미 취득한(스스로 부과한) 조건들 중 일부를 치료할 수도 있다. 또 새로운 큰 문제들이 일어나는 걸 예방할 수도 있다. 그냥 네 생각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신에게서 나오는 말치고는 너무 속되게 들려 이런 말을 하기는 싫지만, 제발 자신을 잘 보살피도록 하라.
너는 자신의 몸을 함부로 굴린다. 몸에 뭔가 이상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기 전까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너는 예방 차원의 몸관리는 사실상 전혀 하지 않는다. 너는 몸보다는 차에 더 신경을 쓴다. 이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너는 정기 검진이나 연례 종합건강진단, 의사가 처방해준 치료법이나 약들을 사용하여(너는 의사가 제안하는 처방대로 따르지도 않으면서 뭣하러 의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가? 이 점에 대해 나를 납득시킬 건덕지가 하나라도 있단 말인가?) 돌발사고를 예방하지도 않고, 그나마 건성으로 들르는 예약진료일 사이 기간 동안에는 또 얼마나 심하게 몸을 학대하는가!
운동을 하지 않아 네 몸은 자꾸 늘어지고 있다. 그보다 더 나쁜 건 몸을 사용하지 않아 자꾸 약해진다는 것이다.
또 너는 몸에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않아 몸을 더 쇠약하게 만들고 있다.
거기다 너는 온갖 독소와 독극물들, 음식으로 가장한 가장 고약한 물질들로 몸을 채운다. 그런데도 몸은, 그 경이로운 엔진은 여전히 너를 위해 달리고 있다. 그런 맹폭격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칙칙폭폭 칙칙폭폭 용감하게 달려가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네가 자기 몸더러 이런 악조건들 속에서 살아남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끔찍한 일이고. 그러나 너는 거의 혹은 전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부분을 읽고 후회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그래 놓고는 곧장 몸을 함부로 굴리는 예전 습관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왜 그런지 아는가?
왜 그러냐고 묻기가 겁나는군요.
네게는 살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가혹한 기소장(起訴狀)처럼 들리는군요.
난 가혹하게 굴 마음도, 기소할 마음도 없다. “가혹하다”는 말은 상대적인 용어, 즉 네가 그 이야기에 대해 내린 판단이다. 또 “기소”는 죄를 암시하고, “죄”는 나쁜 짓이란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나쁜 짓도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죄도 기소장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나는 단지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진실한 말들이 다 그렇듯이, 그 말에는 너를 일깨우는 효과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깨어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로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잠자고 싶어한다.
이 세상이 이런 상태가 된 건 이 세상이 자면서 걷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야기한 것이 사실이 아닌 것 같은가? 네게는 살려는 의지가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물론 네가 “이제 막 마음을 바꿨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네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내 예언을 재고해볼 여지는 있다. 내 예언이 이전 체험에서 나왔다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또한 그 말에는 너를 깨우려는 뜻도 들어 있다. 이따금 어떤 사람이 너무 깊이 잠들어 있을 때는 좀 잡아 흔드는 게 필요하니까.
과거에 나는 네가 살려는 의지가 거의 없음을 보았다. 지금 네가 그 사실을 부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말보다 행동이 더 확실하게 말해주는 법이다.
너처럼 이십년 동안 하루에 한갑씩 피워댄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한번이라도 담배를 피운 적이 있는 사람은 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다. 너는 자신이 몸에 무슨 짓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전 벌써 십년도 더 전에 담배를 끊었는데요!
이십년 동안 몸을 잔뜩 혹사하고 나서야 끊었지.
그리고 한번이라도 자기 몸 속에 술을 들이붓는 사람은 살려는 의지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저는 아주 적당한 정도로만 마십니다.
그 몸은 술을 마시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그리고 술은 정신을 헤친다.
하지만 예수도 술을 마셨는데요! 그는 결혼식에 가서 물을 포도주로 바꿨다구요!
그래, 누가 예수가 완전하다고 말하던가?
오, 맙소사.
말해봐, 나한테 짜증이 나지?
신에게 짜증을 내다니요? 천만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말뜻은요, 그게 어느 정도는 그냥 단순화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 생각엔 우리가 이 문제를 좀 더 멀리까지 가져가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저한테 “뭐든지 적당히 하라”고 가르치셨죠. 술에 관한 문제에서 저는 이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적당히만 혹사당한 몸은 좀 더 쉽게 회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네 아버지의 가르침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애초의 내 주장을 고수할 것이다. 그 몸은 술을 마시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알코올 성분이 든 약들도 있는데요!
너희가 약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 내가 어찌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주장을 고수할 것이다.
당신은 정말 엄격한 분이로군요. 그렇잖습니까?
보아라, 진실은 진실이다. 누군가가 “약간의 술은 해롭지 않다”고 말하고, 지금 네가 그러하듯이 너희가 사는 대로의, 삶의 맥락 속에 그 주장을 놓는다면, 나로서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내가 말한 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단지 너희가 그 진실을 무시하는 걸 허용해주는 것일 뿐.
하지만 이걸 생각해봐라. 사람의 몸은 대체로 적으면 쉰 살, 많으면 여든 살 정도에서 완전히 소모된다. 일부는 그보다 더 오래 버티긴 하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또 일부는 그보다 더 빨리 기능을 멈추기도 하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동의하느냐?
예, 물론입니다.
좋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논의를 위한 좋은 출발점을 마련한 셈이다. 그런데 좀 전에 내가 “약간의 술은 해롭지 않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했을 때, 나는 “지금 너희가 사는 대로의 삶의 문맥 속에 그 주장을 놓는다면”이란 조건을 덧붙였다. 너도 알다시피 너희 인간들은 지금 사는 식의 삶에 만족하는 듯하다. 하지만 네가 이걸 알면 놀라겠지만, 너희의 삶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너희의 몸은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래 지탱하게끔 설계되었다.
정말요?
그렇다.
얼마나 더 오래요?
무한히 오래
그게 무슨 뜻이죠?
내 아들이여, 그건 너희의 몸이 영구히forever 지속되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영구히라고요?
그렇다. 그 말을 “오래 오래도록 for ever more”으로 읽도록 하라.
그러니까, 우리가 결코 죽지 않을 존재였고, 존재란 말씀인가요?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생명은 영원하다. 너희는 불면의 존재들이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는 그저 형태만 바꿀 뿐이다. 애초에 너희는 그것조차도 바꿀 필요가 없었다. 형태를 바꾸기로 결정한 건 너희였지, 내가 한 건 아니다. 나는 너희의 몸을 오래오래 지속되도록 만들었다. 너는 정말로 신이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작품, 내가 지어낼 수 있었던 최고의 작품이 고작 육칠십년이나 팔십년 정도 버티다가 스러질 몸이었다고 생각하느냐? 그 정도가 내 능력의 한계라 생각하느냐?
그 문제를 꼭 그런 식으로 생각한 건 아닙니다만.......
나는 너희의 장대한 몸을 오래오래 지속되도록 설계했다! 최초의 인간들은 사실상 고통도 없고, 오늘날 너희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모르는 몸으로 살았다.
너희는 종교 신화에서 이런 유형의 최초의 인간들을 아담과 이브라고 불러, 그들에 관한 단편적 기억을 상징화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는 단 두 사람만이 아니라 더 많은 수였지만.
내가 이 책에서 거듭 설명해왔다시피, 애초에 상대계의 물질인 몸의 모습을 하고 얻은 체험을 통해 너희 자신을 ‘참된 자신’으로 인식할 기회를 갖겠다는 발상은 멋진 너희 영혼들에게서 나왔다.
이 관념은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모든 진동(사고 형태)의 속도를 늦추어, 소위 몸이라는 물질까지 포함하여 물질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생명은 오늘날 너희가 수십억년이라 부르는, 눈 깜짝할 찰라의 순간에 일련의 단계를 거쳐 진화했다. 그리고 그 성스러운 찰라 동안에 너희는 생명의 물인 바다에서 나와 육지로 들어섰고, 이어 오늘날 너희가 지니고 있는 형상을 갖추었다.
그럼 진화론자들이 옳군요!
나는 너희가 모든 걸 꼭 옳고 그른 걸로 구분하려는 걸 볼 때마다 여간 재미있지 않다. 너희의 그 관행은 늘 나를 즐겁게 해준다. 너희는 물질과 너희 자신을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그런 꼬리표들을 지어낸 것이 바로 너희 자신임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너희는(너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제외하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이자 그른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오로지 상대계에서만 사물들을 옳은 것 아니면 그른 것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시간이 시간이 아닌 절대계에서는 모든 사물이 하나같이 모든 것이 된다all things are everything.
그 세계에는 남성도 여성도, 전도 후도, 빠름도 느림도, 여기도 저기도, 위도 아래도, 왼쪽도 오른쪽도, 옳음도 그름도 없다.
너희의 우주비행사들은 이것을 직접 느꼈다. 애초에 그들은 자기네가 외계로 가기 위해 위로 발사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외계에 이르고 보니 자신들은 지구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아니, 그랬었나? 어쩌면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태양은 어디에 있었지? 위? 아래? 아니! 저기, 왼쪽에. 그리하여 이제 갑자기 모든 것이 위 아래가 아니라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개념규정들은 사라져버렸다.
내 세계, 아니 우리 세계, 우리의 참된 영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모든 개념규정들이 사라져버려 명확한 용어들로 이 영역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종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걸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종교는 그 일을 그다지 잘해내지 못한다.
아니 내 아들이여,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창조론자들이 말한 꼭 그대로 성스러운 한 순간에 이 모든 걸 창조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꼭 그대로, 소위 수십억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소요된 진화의 과정을 통해 나타났다.
그 양쪽 다가 “옳다”. 우주비행사들이 발견한 것처럼 그 모든 건 너희가 그것들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성스러운 한 순간과 수십억년의 차이는 무엇인가이다. 너희는 삶의 몇몇 문제들은 그 신비가 너무 엄청나서 너희조차도 도저히 풀 수 없다는 사실에 순순히 동의할 수 있는가? 어째서 그 신비들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가? 어째서 신성한 것들을 신성한 것들로 받아 들이면서 그냥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좀처럼 만족할 줄 모르는, 앎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너희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이미 얘기해줬다! 그런데 너희는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는 식대로의 진리를 알고 싶어한다. 이것이 너희의 자각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다. 너희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희는 진리가 어떤 건지 이미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보고 듣고 읽은 것들 가운데 자신의 이해들과 부합되는 것들은 모두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모두 배척한다. 그러고 나서 너희는 이렇게 하는 걸 배움이라 부른다. 너희는 이걸 가르침에 마음을 연 것이라고 말한다. 아아, 너희가 자기식 진리를 제외한 모든 것에 마음을 닫고 있는 한, 너희는 결코 가르침에 마음을 열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바로 이 책을 신에 대한 모독, 악마의 작품이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들을 귀를 가진 사람들은 귀기울여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죽게 되어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너희의 물질 형상은 너희가 마음으로 창조해낸 현실을 체험하고, 너희가 창조해낸 자아를 영혼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더없이 훌륭한 이기(利器)이자 경이로운 도구이며 영광스런 매개체로 창조되었다.
영혼은 고안하고conceive, 마음은 창조하고 몸은 체험한다. 그 순환구조는 완벽하다. 그러고 나서 영혼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만일 영혼이 자신이 체험하는(느끼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무슨 이유에서인가 다른 체험을 바란다면, 영혼은 그저 새로운 자아 체험을 고안해내서, 문자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바꾼다.
그러면 몸은 이내 새로운 체험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한11:25-옮긴이]”는 이것의 가장 훌륭한 예였다. 너희는 예수가 어떤 식으로 부활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믿지 않는가? 믿어라. 그런 일은 일어났다!)
그러나 영혼이 결코 몸이나 마음을 무시하지 않으리란 것도 사실이다. 나는 너희를 삼위일체의 존재로 만들었다. 너희는 내 형상대로, 내 닮은꼴로 만들어진, 삼위일체의 존재다.
자아의 세 측면들은 결코 불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각자 한 가지 기능씩을 갖고 있으며, 어느 한 기능이 다른 기능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또 실제로 어느 한 기능이 다른 것들보다 먼저 작용하지도 않는다. 세가지 기능들은 한치의 차이도 없이 동등한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고안-창조-체험. 너희는 고안한 것을 창조하고 창조한 것을 체험하며, 체험한 것을 생각해낸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성립할 수 있다. 만일 너희의 몸이 뭔가를(예컨대 넉넉함을) 체험할 수 있다면, 너희는 곧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것에 대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고, 너희의 영혼은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즉 넉넉하다고) 그려볼 것이며, 그리하여 너희의 마음에 그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공해준다. 그 새로운 생각은 더 많은 체험을 가져오고, 몸은 새로운 현실을 계속되는 존재상태로 받아들이고 살기 시작한다.
너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하나이다. 이점에서 너희는 내 소우주, 신성한 전체이고, 성스러운 일체이며, 총체이자 실체이다. 이에 너희는 어떻게 해서 내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인지 알고 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궁극의 수수께끼, 즉 너희와 나의 정확하고 참된 관계를 설명해주겠노라.
너희는 내 몸이다.
너희의 몸이 너희의 마음과 영혼에 속해 있듯이 너희는 내 마음과 내 영혼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체험하는 모든 건 바로 너희를 통해서 체험하는 것이다.
너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이듯이, 내 몸과 마음과 영혼 역시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런 신비를 이해한 많은 사람들 중에 나사렛 예수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요한7:11-옮긴이)”고 말했을 때 그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 것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얘기해줄 것이다. 언제고 너희가 은밀히 알게 될, 이보다 더 엄청난 진실들이 존재한다는 걸. 왜냐하면 너희가 바로 내 몸일 때 나는 또 다른 존재의 몸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신이 아니란 말씀인가요?
아니, 나는 신이다. 나는 지금 너희가 이해하는 식대로의 신이며, 지금 너희가 이해하는 식대로의 여신이다. 나는 지금 너희가 알고 체험하는 모든 것의 고안자요 창조자이며, 너희는 내 자식들이다....... 내가 다른 존재의 자식이듯이.
신에게도 신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나는 궁극의 진실에 대한 너희의 이해(理解)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협소하고, ‘진리’는 너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협소하지 않다는 걸 말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무한과 무한한 사랑을 일별하게, 정말 눈꼽만큼 흘낏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의 기회를 줘봤자 너희의 현실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너희는 이 작은 기회조차 거의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잠깐만요! 제가 여기서 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진짜가 아니란 뜻인가요?
이미 네게 얘기한대로, 만일 너희 자신이 자기 몸의 창조자이자 주인인데도 불구하고, 신을 자신의 창조주요 주인으로 여긴다면, 나는 너희가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신이다. 그래서 네가 나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맞는 얘기다 이 대화는 아주 근사했다. 그렇지 않은가?
근사하든 근사하지 않든 간에 저는 제가 진짜 신, 신 중의 신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가장 높은 존재, 최고 우두머리하고 말입니다.
너는 그러고 있다. 내 말을 믿어라. 너는 그러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이런 계층구조 속에서 당신 위에 또 누군가가 있다고 말했잖습니까?
우리는 지금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하고 있다. 즉 말할 수 없는 걸 말하려는 불가능한 일을. 내가 말했다시피 종교가 하려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다. 자, 이 얘기를 요약할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나 알아보기로 하자.
항상forever은 너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다. 영혼eternal은 항상보다 더 긴 시간이다. 신은 너희의 상상을 넘어서는 존재이고, 상상은 신을 능가하는 것이다.
신은 너희가 상상력이라 부르는 에너지다. 신은 창조다. 신은 첫 번째 생각이며, 마지막 체험이다. 그리고 신은 사이between에 있는 모든 것이다.
너는 고성능 현미경을 들여다보거나, 분자의 활동에 관한 그림과 영화를 보고서, “맙소사, 저 밑에 완전한 우주가 존재하는군. 이 우주에게는 지금 이걸 들여다보는 내가 꼭 신처럼 느껴지겠지!”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너는 과거에 이런 말을 하거나 이런 종류의 체험을 한 적이 있는가?
그럼요. 좀이라도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적이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랬을 때 너는 내가 여기서 네게 보여주는 것을 너 스스로 일별한 셈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 스스로 일별했던 그 진실은 결코 끝이 없다고 말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설명해주십시오. 청컨대 제발 설명해주십시오.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우주의 가장 작은 부분을 예로 들어 보자. 아주 작고 작은 물질 입자를 상상해보라.
예.
이제 그것을 반으로 갈라라.
예.
그럼 무엇이 남든가?
그보다 더 작은 두 개의 반쪽들요.
맞다. 그럼 그것들을 반으로 갈라라. 이제 무엇이 남는가?
네 개의 더 작은 반쪽들이요.
그래. 그럼 다시 갈라라. 그리고 또 다시! 무엇이 남지?
더 더 작은 미립자들이요.
그래. 그 과정은 언제 끝날까? 물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려면 얼마나 많이 갈라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물질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는 뜻인가? 네가 할 수 있는 전부는 그것의 형상을 바꾸는 것에 불과한가?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너는 이제 막 삶의 모든 비밀을 배웠으며, 무한을 들여다봤다.
이제 네게 물어볼 게 있다.
좋습니다........
너는 어째서 무한이 한쪽 방향으로만 나갈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니까....... 아래로도 끝이 없듯이 위로도 끝이 없다는 거군요.
위나 아래라는 건 없다. 하지만 네 말 뜻은 이해한다.
하지만 작은 것에 끝이 없다면 큰 것에도 끝이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큰 것에 끝이 없다면 가장 큰 건 존재하지 않을 거고, 그렇다면 아주 넓은 시각에서 볼 때 신은 존재하지 않겠군요!
혹은 그 모든 게 다 신이고 신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도 되겠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나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이다.’ 너희는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희는 형상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때는 자신의 반만을 체험할 뿐이다.
그게 지옥이겠군요.
그렇지. 그러나 너희가 지옥행을 선고받는 일 같은 건 없다. 영원히 지옥으로 추방되는 일 같은 것도 없고. 너희가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즉 알지 못함에서 벗어나려면, 그저 다시 알기만 하면 된다.
너희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이나 공간들(차원들)은 많다.
너희는 지금 그런 차원들dimensions 중 하나 속에 존재한다. 너희의 이해방식에 따르면 그것은 삼차원이라 한다.
그럼 더 많은 차원들이 있나요?
내 왕국에는 많은 집mansion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나는 너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리라.
그럼 지옥은 정말 없는 거군요. 실제가 아니군요. 내 말은 우리가 영원히 저주받을 어떤 공간이나 차원 같은 건 없다는 겁니다!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너희는 항상 자신의 앎에 따라 규정되고 한정된다. 너희, 아니 우리는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너희에게 이런 삶이 주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자신의 체험 속에서 자신을 알도록 하기 위해. 그럴 때 너희는 ‘참된 자신’으로서 자신을 떠올릴 수 있으며, 체험 속에서 그런 자신을 창조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그 원은 다시 완성된다........ 크기만 좀 더 큰 원이.
그렇게 해서 너희는 끊임없는 성장과정 속에 있다. 혹은 내가 이 책 곳곳에서 표현했듯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거나.
너희가 될 수 있는 것에는 아무런 한계도 없다.
감히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제가 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바로 당신처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전 모르겠습니다.
네가 알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그 삼각형, 곧 영혼-마음-몸, 고안-창조-체험의 삼위일체를 기억하라. 너희의 상징화를 이용해서 다음의 사실을 새겨두어라.
성신=영감=고안
성부=부모=창조
성자=자식=체험
성자는 성신이 고안한 아버지의 생각이 창조한 것을 체험한다.
앞으로 언젠가 네가 자신을 신으로 생각할 날이 올 것 같은가?
제 마음에 아무 거칠 것이 없을 때요.
좋다. 나는 네게 너는 이미 신이라 말했기에. 네가 그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내가 얘기하지 않았던가? “너희는 신이라”고.
14
자, 이것으로 나는 네게 삶과 삶의 운동방식과 삶의 이유와 목적 자체에 대한 모든 걸 설명해주었다. 그밖에 또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는가?
이 이상 물을 게 없습니다. 제 마음은 이 놀라운 대화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합니다. 정말 광범위하고 정말 포괄적인 대화였습니다. 그런데 애초의 질문목록을 살펴보니 우리가 지금껏 다뤄온 건 처음의 다섯가지 질문들이군요. 삶과 인관관계, 돈, 직업, 건강에 관련된 질문들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 목록에는 그 외에도 더 많은 질문들이 들어 있습니다만, 왠지 그것들은 이 대화의 흐름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그렇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 네가 던진 물음들이니 하나씩 빨리빨리 다뤄보기로 하자. 자, 그럼 그 자료들을 지나 남은 질문들로 신속하게 옮겨가볼-
-무슨 자료요-?
내가 너희에게 보여주려고 이 책에서 제시했던 자료 말이다. 자 그럼, 그 자료들을 지나 남은 질문들로 신속하게 옮겨가보자. 그 남은 질문들은 그냥 간략하게 짚어가는 식으로 해보자.
6. 제가 이 생에서 닦아야 할 업장은 무엇인가요? 제가 터득하려고 애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여기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너희는 배울 게 없다. 너희는 그저 기억해내기remember만 하면 된다. 즉 나를 재구성하기re-member만 하면 되는 것이다.
네가 깨닫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너는 깨달음 그 자체를 깨달으려 애쓰고 있다.
7.환생이란 게 있습니까? 저는 얼마나 많은 과거생을 거쳤나요? 그 생들에서 저는 무엇이었나요? “업보”라는 게 진짜로 있는 겁니까?
아직도 이런 것을 의문스러워 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군. 정말 뜻밖이야. 과거생의 체험에 관해 철저히 신뢰할 만한 출처에서 그토록 많은 보고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말이야. 이 사람들 중 일부는 과거생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놀랄 정도로 상세히 묘사했으며, 연구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속이려고 그런 얘기를 엉터리로 꾸며내거나 지어냈을 가능성은 전혀 없어보일 만큼 완전히 신뢰할만한 자료들을 제시했다.
네가 자꾸 정확한 걸 주장하니 그렇게 해주겠다. 너는 647번의 과거생을 살았다. 이번 생은 네 648번째 생이다. 너는 그 과거생들에서 모든 것이었다. 왕이었고 여왕이었으며, 농노였다. 선생이었고 학생이었으며 스승이었다. 남자였고 여자였으며, 전사이기도 했고 평화주의자이기도 했다. 영웅이었으며 비겁자였고, 살인자였으며 구원자였고, 현자였으며 바보였다. 너는 그 모든 것이었다!
업보같은 건 없다. 이 물음에서 네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죄의 빚 같은 건. 빚이란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을 말하는데 꼭 해야 하는 것이 너희에게는 없다.
그러나 너희가 하고자 하는 것들, 체험하고자 선택하는 것들은 있다. 그리고 이런 선택들 중 일부는 너희가 과거에 체험한 것에 달려 있다. 즉 그런 선택을 하고 싶은 바램은 과거 체험에서 나온다.
이것이 너희가 업이라 부르는 것과 꽤 비슷한 것일 수 있다.
만일 업이 더 나아지고 더 커지려는 내면의 바램이라면, 진화하고 성장하려는 내면의 바램이라면, 그리고 그 방법으로 과거 사건들과 체험들을 돌아보려는 바램이라면, 그렇다. 업은 존재한다.
그러나 업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애초에 요구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는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듯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8. 저는 가끔 신들린 것 같은 기분을 강하게 느낍니다. “신들린 것” 같은 현상이 정말로 존재합니까? 제가 그런가요? 자신이 신들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은 “악마와 거래하는” 겁니까?
그렇다. 신들린 것 같은 현상은 존재한다. 너도 그렇고 너희 모두가 다 그렇다. 소위 영력(靈力)이란 걸 갖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영적 능력을 사용한다는 건 육감을 사용한다는 뜻과 같다.
이것이 “악마와 거래하는 게” 아닌 건 명백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너희에게 이 감각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너희가 말하는 악마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언제고-아마도 제2권에서-나는 너희에게 영적 에너지와 영적 능력이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설명해줄 것이다.
앞으로 제2권이 나올 거란 말씀인가요?
그렇다. 하지만 우선 이 1권부터 끝내기로 하자.
9. 좋은 일을 하고 돈을 받아도 될까요? 제가 이 세상에서 치유하는 일, 곧 신의 일을 하기를 선택한다 할 때 그 일을 하면서 재정적으로 부유해질 수 있을까요? 그 두 가지는 서로 배타적인가요?
이 물음에 대해서는 이미 대답했다.
10, 섹스를 해도 괜찮나요? 이 체험의 배우에 깔린 진정한 의미는 뭔가요? 성행위는 몇몇 종교에서 가르치듯이 순전히 생식을 위한 건가요? 참된 성스러움과 자각은 성에너지의 부정, 혹은 변형으로 얻어지는 건가요? 사랑 없이 성행위를 가져도 괜찮나요? 단지 육체적인 쾌감만으로 성행위를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섹스를 해도 “좋다”. 다시 얘기하는데 만일 너희가 어떤 놀이들을 하는 걸 내가 원치 않았다면 나는 너희에게 그런 장난감들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 자식들이 갖고 놀지 말았으면 하는 걸 자식들에게 주는가?
섹스를 즐겨라. 그걸 갖고 놀아라! 그건 굉장한 즐거움이다. 왜냐고? 엄밀하게 신체 체험으로만 한정해서 말하면, 섹스는 너희 몸으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즐거움과 거의 맞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발 섹스를 오용하여 성의 순수성과 즐거움을, 그 기쁨과 즐거움의 청순함을 망치지 마라. 권력 따위의 숨겨진 목적을 얻기 위해, 자기애를 만족시키거나 남을 지배하기 위해, 가장 순수한 기쁨과 더없는 황홀경을 느끼거나 함께 나누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섹스를 이용하지 마라. 그런 기쁨과 황홀경을 느끼거나 함께 나누는 것이야말로 사랑, 재창조된 사랑이며, 새로운 삶이다! 너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내가 아주 근사한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성에너지의 부정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얘기한 바 있다. 성스러운 그 어떤 것도 부정으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 그러나 너희가 더 큰 진실들을 얼핏이나마 보게 될 때, 너희의 바램은 바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행위나, 그로 인한 몸의 여러 가지 활동들을 전보다 덜 바라거나 전혀 바라지 않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영혼이 활동이 가장 중요하고, 훨씬 더 즐거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고 각자 내키는 대로 하라. 이것이 섹스의 좌우명이다.
네 물음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답은 너희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이유를 끌어댈 필요가 없다. 그냥 원인이 되어라.
너희 체험의 원인이 되어라.
체험은 자신에 관한 개념을 낳고, 개념은 창조를 낳으며, 창조는 체험을 낳는다는 걸 명심하라.
너는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없이 섹스하는 사람으로 체험하고 싶은가? 그럼 그렇게 하라! 너는 더 이상 그렇게 하는 걸 원치 않을 때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 너희가 이런 행동과 그밖의 행동들을 그만두게 되고, 그만둘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뿐이다.
그건 그처럼 간단하고, 그처럼 복잡한 문제이다.
11.우리가 가급적 섹스를 멀리해야 마땅하다면 당신은 왜 섹스를 그렇게 근사하고 황홀하고 강렬한 체험이 되게 하셨나요? 무엇을 주시려고? 그와 관련된 문제로 온갖 즐거운 일들을 어째서 “부도덕하거나 불법이거나 탐욕스러운” 걸까요?
이 물음의 마지막 부분은 내가 방금 전에 얘기한 것으로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모든 즐거운 일들은 부도덕하지도 않고, 불법도 아니며, 어리석지 않다. 그러나 너희의 삶은 즐거운 게 뭔지를 규정하는 흥미로운 연습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즐거움”이 몸의 느낌이나 감각들을 뜻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모든 건 ‘너희가 자신을 누구라 생각하는지’, 너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섹스에 대해 여기서 얘기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말들을 늘어놓고 있으나, 그 어떤 말도, 섹스는 즐거움이지만 너희 중의 많은 사람들이 섹스를 즐거움 이외의 다른 온갖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말보다 더 본질적이지는 않다.
섹스는 또 성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즐거움과 성스러움은 서로 잘 조화된다(사실상 그 둘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너희 중 상당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섹스에 대한 너희 태도는 삶에 대한 너희 태도의 축약판이다. 삶은 즐거움이요 축복이어야 하는데도, 너희 삶은 두려움과 근심, “충분치 못함”, 질투, 분노, 비극에 대한 체험이 되어왔다. 섹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너희는 섹스를 억눌러왔다. 너희가 자유분방함과 즐거움으로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는 대신에 오히려 삶까지도 억눌러왔던 것처럼.
너희는 섹스를 부끄러워했다. 너희가 삶을 최상의 선물이며 최대의 즐거움이 아니라, 사악하고 부정한 것이라 부르며 삶까지도 부끄러워했던 것처럼.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항의하기 전에, 삶에 대한 너희 집단의 태도를 돌아보라. 세상 사람들의 오분의 사 가량이 삶을 시련과 고난, 시험받는 시간, 갚아야 할 업보, 반드시 익혀야 할 혹독한 교훈들이 있는 학교 정도로 여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에는 삶을 죽음 뒤에 올 참된 즐거움을 고대하면서 참고 견뎌야 하는 혹독한 체험 정도로 여긴다.
너희 가운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을 생각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너희가 삶을 창조하는 행동 자체까지 부끄러워하는 게 놀랄 일은 아니다.
섹스에 밑줄을 긋는 에너지는 삶에 밑줄을 긋는 에너지다. 그게 삶이다! 끌리는 느낌과 서로에게 다가가거나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강렬하면서도 종종 절박한 바램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원동력이다. 나는 모든 존재에게 이것을 심어줬다. 그것은 타고난 것, 내재된 것, ‘존재 전체’ 속에 있는 것이다.
너희가 섹스에 대해서(나아가 사랑과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해) 내리는 도덕 규정과 종교상의 제한, 사회적 금기, 관습상의 감정들은 너희가 사실상 자신의 존재를 축복하기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태초부터 모든 사람들이 항상 원해왔던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다. 그런데 태초부터 사람들은 전력을 다해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왔다. 섹스는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의 경이로운 표현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섹스를 좋아해야 한다. (너희는 그렇게 하고 있다. 단지 남들에게 그렇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을 뿐이다. 너희는 자신이 그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감히 드러내지 못하며, 드러냈다가는 성도착자로 몰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도착된 관념이다.)
다음 책에서 우리는 섹스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며, 섹스의 역학에 대해 더 상세하게 탐구할 것이다. 섹스는 지구 규모에서 사람들을 뒤흔들 만한 의미를 가진 문제요, 체험이기에.
지금은(그리고 너 개인으로는) 단지 이 점만 알아두도록 하라. 나는 적어도 너희의 몸이나 그 기능들 중에서 너희가 수치스럽게 여길 어떤 것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특히 너희의 몸이나 그 기능들을 감출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들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나 너희 서로간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고.
너희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적나라한 폭력을 보여주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지만, 적나라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에는 움츠려든다. 너희 사회 전체가 이런 식의 우선순위를 받영하고 있다.
12. 다른 행성들에도 생명체가 있습니까? 그런 것이 우리를 찾아온 적이 있었나요? 우리는 지금 관찰 대상이 되고 있는 중인가요? 우리는 사는 동안 변경할 수 없고 논박할 수 없는 외계 생명체의 증거를 보게 될까요? 우주의 모든 생명체는 각기 나름의 신을 갖고 있나요? 아니면 당신이 그 모든 것들의 신인가요?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물음들에 대한 답 역시 그렇다이다. 네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내가 미래를 예견해야 하는데,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제2권에서 미래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그리고 제3권에서는 외계 생명체와 신의 본성(들)에 관해 다룰 것이고.
이크, 3권까지도 있나요?
여기서 그 계획을 대충 설명해주마.
1권에서는 궁극의 진리들과 기본 이해사항들을 다루고 개인 차원에서의 본질적인 문제와 주제들에 대해 언급한다.
2권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진실들과 더 깊은 이해사항들을 다루고, 범지구적인 문제들과 주제들에 대해 언급한다.
3권에서는 현재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최대의 진리들을 다룰 것이고, 우주적인 문제들과 주제들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들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네 이 책을 끝내는 데 1년이 걸렸으니 다음 두 권을 끝내는 데도 각기 1년씩 해서 이년 정도가 걸릴 것이다. 이 삼부작은 1995년 부활절에 완료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명령인가요?
아니. 그런 식으로 묻는다면 너는 이 책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너는 이 일을 하기로 선택했으며, 이 일을 하게끔 선택되었다. 그 순환은 완료되었다.
이해하겠는가?
예.
13. 이 지구 행성에 언제고 유토피아가 도래하기는 하는 겁니까? 신은 이미 약속한 대로 언제고 지구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겁니까? 재림(再臨)이라는 게 있습니까? 성경에 예언된 대로 세상의 종말, 혹은 계시록의 대재난이란 게 과연 오는 겁니까?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참된 종교만이 존재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건 어떤 종교인가요?
이 문제들만으로도 책 한권이 족히 되겠지만, 이 문제들의 상당 부분은 제3권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나는 삼부작의 서론편인 이 책을 개인적인 문제들과 더 실질적인 주제들에 국한시켰다. 앞으로 나올 두권의 책에서는 더 큰 물음들과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문제들로 옮겨갈 것이다.
그렇다고요? 지금은 이것으로 다인가요? 여기서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인가요?
나와 헤어지는 게 벌써부터 아쉬운가?
그렇습니다! 아주 재미있었어요! 이제 우리는 헤어지는 건가요?
너는 좀 쉬어야 한다. 너의 독자들도 좀 쉬어야 하고. 이 책에는 소화해내야 할 게 많다. 붙잡고 씨름하면서 심사숙고해야 할 것들이. 얼마간 시간을 따로 내어 이 책의 내용을 차분히 더듬으면서 깊이 생각해보라.
버림받은 것같이 느끼지 마라.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 너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겠지만, 앞으로 네게 일상적인 의문들이 떠오르면 언제든지 그것들에 답해달라고 나를 부를 수 있음을 알아두어라. 꼭 이런 형식의 책이 필요한 건 아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유일한 방식인 것은 아니다. 나는 꼭 이런 형식으로만 너희에게 말하지 않는다. 너희 영혼의 진실 속에서 내 말을 들어라. 너희 가슴에서 우러나는 느낌들 속에서 내 말을 들어라. 너희 마음의 고요 속에서 내 말을 들어라.
어디서든지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의문에 부딪칠 때마다 내가 이미 그것에 답해왔다는 걸 알아둬라. 그러고 나서 눈을 활짝 뜨고 세상을 바라보라. 내 응답은 이미 발간된 신문기사들 속에 들어있을 수도 있고, 이미 원고로 쓰여져 곧 행해질 설교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으며,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와, 어제 작곡된 노래와 사랑하는 이의 말과, 새로 사귀고 있는 친구의 가슴 속에 들어있을 수도 있다.
바람의 속사임과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천지를 울리는 천둥소리와 나직하게 두드리는 빗발 소리에도 내 진리가 깃들어 있다.
내 진리는 대지의 감촉, 백합의 향그러움, 태양의 따스함, 달의 인력이다.
내 진리와 너희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항상 도우리라는 진실은 밤하늘만큼이나 외경스럽고, 갓난아기의 옹알이만큼이나 단순하고 자명하다.
내 진리는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만큼이나 크고, 나와의 합일 속에서 쉬는 숨소리만큼이나 고요하다.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또 떠날 수도 없다. 너희는 바로 내 소산이요 창조물이고, 내 딸이요 아들이며, 내 목적이자 나.......
자신이기에.
그럼으로 너희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 본질인 평화로움에서 분리될 때마다 나를 부르도록 하라.
나는 거기 있으리라.
진리와.
빛과.
사랑과 더불어.
'영성수행 비전 > 신과 나눈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과 나눈 이야기 2 (2) (0) | 2018.02.07 |
---|---|
신과 나눈 이야기 2 (1) (0) | 2018.02.07 |
신과 나눈 이야기 1(4) (0) | 2018.02.07 |
신과 나눈 이야기 1(3) (0) | 2018.02.07 |
신과 나눈 이야기 1(2) (0) | 2018.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