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1(3)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1(3)
사고는 그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일어난다. 사고란 삶의 특정 요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결과들, 너희가 나름의 이유로 불운이라 부르기로 선택한 결과들을 가지고 함께 모여든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전혀 불운이 아닐 수도 있다. 너희 영혼이 나아갈 일정이란 면에서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우연의 일치란 없으며,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각각의 사건이나 모험은 ‘참된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하기 위해서 너희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다. 모든 참된 선각자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 신비주의 선각자들이 최악의 체험들(너희가 규정하는 식대로 하면) 직면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게 바로 이 때문이다.
기독교의 위대한 선각자들은 이 점을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면서도 동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원했다는 걸 알고 있다. 예수는 달아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시점에서 그 과정을 중단시킬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인간의 영원한 구원의 상징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걸 허용했다. 그는,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라, 무엇이 진실인지 잘 보라, 그리고 너희 역시 이런 일들, 아니 이보다 더한 일들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아라. 그러기에 내가 너희가 바로 신이라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정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면 나를 믿도록 하라고 말했다.
예수의 연민은 그토록 커서 모두가 다 하늘나라(자기실현)에 이를 수 있게끔 세상에 강력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청했고,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면 자기를 써서 그렇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는 불행과 죽음을 굴복시켰기에 드디어 그 방법을 창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너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
예수의 가장 큰 가르침은 너희가 앞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리란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누리고 있다는 것이었으며, 너희가 앞으로 신과 형제가 되리란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그렇게 되고 있다는 것이었고, 앞으로 너희가 구하는 건 뭐든지 갖게 되리란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아는 게 너희에게 필요한 전부이다. 왜냐하면 너희 현실의 창조자는 너희이며, 삶은 너희가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꼭 그대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 된다. 이것이 창조의 첫단계다. 성부(聖父)는 생각이다. 너희의 생각은 모든 것을 낳아주는 부모다.
그건 우리가 명심해야 할 법칙의 하나군요,
그렇다.
다른 것들도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다른 것들도 말해줬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줄곧 그것들 전부를 너희에게 얘기해왔다. 나는 수도 없이 되풀이했으며, 수많은 선각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주었다. 너희는 내가 보낸 선각자들의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너희는 그들을 죽인다.
하지만 왜죠? 왜 우리는 우리 중 가장 거룩한 이들을 죽일까요? 우리는 그들을 죽이거나 욕되게 합니다. 그건 같은 행동이겠죠. 하지만 왜 그렇게 하는 거죠?
나를 부정하고자 하는 너희의 모든 생각에 그들이 맞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 자신을 부정하자면 너희는 나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어째서 저희는 당신이나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할까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약속들이 너무나 훌륭해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가장 위대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사랑과 권능과 수용보다는 두려움과 의존과 편협함을 가르치는 영성sprituality으로 자신을 축소시켜야 한다.
너희는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너희의 가장 큰 두려움은 내 가장 큰 약속이 인생의 가장 큰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큰 환상을 창조해낸다. 즉 너희는 너희에게 권능을 부여해주고 사랑을 보장해주는, 신의 모든 약속은 악마의 거짓된 약속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너희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신은 결코 그런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악마만이 두렵고, 심판하고, 질투하고, 복수하고, 벌주는, 실체 중의 실체로서 신의 참 면모를 부정하게끔 너희를 유혹하려고 그렇게 할 것이다.
이런 식의 묘사가 악마(그런 게 존재한다고 치면)에 대한 규정으로 더 잘 들어맞긴 하지만, 너희는 너희 창조의 신다운 약속들, 혹은 너희 자신의 신다운 속성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을 자신에게 납득시키고자 악마의 속성들을 신에게 덮어씌워왔다.
바로 이런 것이 두려움의 힘이다.
저는 두려움을 떨쳐버리려 애쓰고 있습니다. 저한테 더 많은 법칙들에 대해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너희는 자신이 상상하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는 게 첫 번째 법칙이다. 두 번째 법칙은, 너희는 두려워하는 걸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요?
감정은 끌어당기는 힘이다. 너희는 크게 두려워하는 걸 체험할 것이다. 너희가 열등한 생명체로 간주하는 동물들 (동물들이 인간보다 더 완벽하고 더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데도)도 너희가 자기들을 두려워하면 당장 그것을 안다. 너희가 더한층 열등한 생명체로 간주하는 식물들도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보다 자기네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잘 반응한다.
이중 어떤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우주에는 어떤 우연의 일치도 없다. 단 하나의 위대한 설계, 경이로운 “눈송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감정은 움직이는 에너지이다. 너희가 에너지를 움직이면 결과가 창조된다. 만일 너희가 그만큼 충분한 에너지를 움직이면 너희는 물질을 창조한다. 물질은 응축된 에너지다. 둥글게 모아졌고 함께 밀쳐진 에너지. 만일 특정한 방식으로 충분히 오랫동안 에너지를 조작한다면, 너희는 물질을 얻을 수 있다. 선각자들은 모두 이 법칙을 이해하고 있다. 그것이 우주의 연금술이다. 그것이 모든 생명의 비밀이다.
생각은 순수 에너지다. 너희가 갖고 있고, 일찍이 가졌으며, 앞으로 가질 모든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너희의 생각 에너지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영원히. 그것은 너희라는 존재와 머리를 벗어나 우주 속으로 영원히 퍼져나간다. 생각은 영원하다.
모든 생각은 모여든다. 즉 모든 생각은 엄청나게 복잡한 에너지의 미로 속에서 서로 교차하면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늬를 이루면서 다른 생각들과 만난다.
비슷한 에너지는 비슷한 에너지를 끌어당긴다. 그렇게 해서 비슷한 종류의 에너지 “덩어리들”을 이룬다(쉬운 말로 하면). 충분히 비슷한 “덩어리들”이 교차하여 서로 부딪칠 때 그들은 서로 “달라붙는다”(이번에도 역시 쉬운 용어를 사용하면). 그러므로 물질을 형성하려면 “서로 달라붙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양의 비슷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질은 이런 순수 에너지에서 형성된다. 사실 물질이 형성될 수 있는 건 이 길뿐이다. 일단 에너지가 물질로 되면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물질로 남아 있는다. 대립하는, 즉 닮지 않은 에너지의 형성으로 그 구조가 무너지지 않는 동안은. 물질에 작용하는 이 닮지 않은 에너지는 물질을 이루고 있던 원래 에너지를 방출시키면서, 사실상 그 물질을 해체한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원자탄 뒤에 있는 기초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그 전의, 또 그 후의 어떤 사람보다도 우주의 창조 비밀에 가깝게 접근하여, 그것을 발견하고 설명하고 적용한 사람이다.
이제 너는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일하면 어떻게 마음에 드는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마태오:18:20-옮긴이)”이란 구절도 훨씬 더 의미심장해졌을 테고.
전체 사회가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할 때, 놀라운 일들-그 일들이 하나같이 바람직하지는 않겠지만-이 그토록 자주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예컨대 두려움 속에서 사는 사회는 실제로, 또 불가피하게 그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형식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대단히 자주 있다.
비슷하게 대규모 공동체들이나 집단들은 종종 결합된 생각(혹은 일부 사람들이 공동 기도라 부르는 것)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찾아낸다.
그래서 개인의 생각(기도, 소망, 바람, 꿈, 두려움)이 놀랄 만큼 강하다면, 개인들 역시 당연히 그런 결과들을 빚어 낼 수 있다. 예수는 일상적으로 이런 일을 했다. 그는 에너지와 물질을 어떻게 다루며, 어떻게 재배열하고, 어떻게 재분배하며, 어떻게 하면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대다수 선각자들 역시 이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있다.
너 역시 이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것이 바로 아담과 이브가 함께 나눈 선악에 관한 지식이다. 그들이 이것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너희가 아는 바대로의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희가 ‘최초의 남자’와 ‘최초의 여자’를 나타내기 위해 붙인 가공의 이름들인 아담과 이브는 인간 체험의 아버지 어머니였다.
아담의 타락으로 표현되어온 것은 사실은 아담의 상승이었다. 이것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단일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이 없었다면 상대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의 행동은 원죄가 아니라 사실은 최초의 축복이었다. 너희는 아담과 이브가 인류 최초로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에, 선택 자체를 할 수 있게 해줬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너희 신화는 여기서 이브를 “나쁜” 사람, 즉 선악의 지식을 아는 열매를 따먹고, 아담을 몰래 꾀어내 함께 그 짓을 하게 만드는 요부로 설정했다. 신화의 이런 상황설정에 힘입어 그 때 이후로 계속 너희는 남성이 “타락”한 것이 여성이라는 설정을 해왔다. 그로 인해 성(性)에 대한 왜곡된 관점과 혼란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종류의 비뚤어진 현실이 생겨났다.(너희는 어떻게 그렇게 나쁜 것에 그렇게 좋은 감정을 품을 수 있는가?)
너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너희를 가장 크게 괴롭힐 것이다. 두려움은 자석처럼 그것을 너희에게 끌어다줄 것이다. 너희가 창조해낸 모든 종교교리와 전통에서 나온 너희의 성스러운 경전들에는 하나같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누구에게나 명백한 충고를 담고 있다. 너는 이것이 우연이라 생각하는가?
법칙들은 지극히 간단하다.
1.생각에는 창조의 힘이 있다.
2.두려움은 에너지처럼 끌어당긴다.
3.존재하는 건 오직 사랑뿐이다.
아니, 그 세번째 법칙은 좀 이상하군요. 두려움이 에너지처럼 끌어 당기는 판에 어떻게 사랑만이 존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은 궁극의 실체다. 그것만이 유일하고 그것만이 전부이다. 사랑의 감정은 너희가 신을 체험하는 것이다.
지고한 진리 중에 지금 존재하고 있고, 일찍이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은 사랑뿐이다. 너희가 절대계로 들어갈 때 너희는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상대계를 창조한 것은 나 자신을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네게 설명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상대계를 진짜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상대계는 너희와 내가 우리 자신을 체험으로 알기 위해서 지어냈고 지금도 지어내고 있는, 창조된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 창조물은 흡사 진짜처럼 보인다. 그것을 창조한 목적 자체가 정말 진짜처럼 만들어서, 우리가 그것을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신은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창조해왔다(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인 나는 존재하는 전체이기에).
“다른 어떤 것”, 즉 상대계를 창조하면서 나는 단순히 너희가 신이라는 얘기를 듣는 게 아니라, 너희 스스로 신이되는 쪽을 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이 속에서만 너희는 신성(神性)을 그냥 개념이 아닌 창조 행동으로서 체험할 수 있으며, 이 속에서만 햇빛 속의 작은 촛불, 그 가장 작은 영혼 역시 자신을 빛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
두려움은 사랑의 다른 한 끝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되는 극이다. 상대계를 창조하면서 나는 가장 먼저 나 자신의 대립물을 창조했다. 지금 너희가 사는 물질 차원의 그 영역에서 존재가 자리잡을 수 있는 장소는 오직 두 곳 뿐이다. 즉 두려움과 사랑. 두려움에 뿌리박은 생각들은 현실에서 한 종류의 드러냄을 만들어내고, 사랑에 뿌리박은 생각들은 또 다른 종류의 드러냄을 만들어낸다.
이 행성 위를 걸었던 선각자들은 상대계의 비밀을 발견한 사람들이어서 그것의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요컨대 선각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순간에도, 어떤 환경에서도, 오직 사랑만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죽임을 당할 때조차 그들은 그 살인자들을 사랑했다. 박해를 받을 때조차 그들은 그 압제자들을 사랑했다.
너는 이것을 흉내내는 건 고사하고 이해하기조차 대단히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바로 지금껏 모든 선각자들이 해온 일이다. 그들의 철학이 무엇이며, 그들의 전통이 어떤 것이고, 그들의 종교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모든 선각자들이 지금껏 해온 일이 이것이라는 데 있다.
나는 이런 예와 교훈들을 너희에게 아주 선명하게 펼쳐보여 주었다. 재삼재사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다.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곳에서, 너희의 전 생애에 걸쳐, 모든 순간에. 우주는 온갖 장치를 다 써서 너희 앞에 이 진리를 펼쳐놓았다. 노래와 이야기에서, 시와 춤에서, 말과 동작에서, 너희가 활동사진이라 부르는 움직이는 영상에서, 그리고 너희가 책이라 부르는 말의 모음집에서.
그 진리는 가장 높은 산정에서 터져나왔고 가장 낮은 골짜기에서도 그 진리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랑만이 모든 것의 해답이라는 이 진리는 인간체험의 모든 회랑(回廊)들을 지나 길게 길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너희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제 너는 이 책으로 다가와, 신이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너희에게 말해준 것을 또 다시 묻고 있다. 그래도 나는 여기, 이 책의 문맥 속에서 다시 한번 말해주겠노라. 이제는 귀담아듣겠는가? 진실로 듣겠는가?
너는 무엇이 너를 이 자료로 데려왔다고 생각하는가? 너는 어떻게 해서 이 자료를 지니게 되었는가? 너는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르리라 생각하는가?
우주에는 어떤 우연의 일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네 마음이 울부짖는 걸 들어왔다. 나는 네 영혼이 찾아 헤매는 걸 봐았다. 나는 네가 얼마나 간절히 진리를 바랬는지 안다. 너는 고통 속에서 그것을 달라고 소리쳤으며, 기쁨 중에도 소리쳤다. 너는 끝없이 내게 간청해왔다. 나(神)를 보여주고, 나를 설명해주고, 나를 드러내달라고.
지금 여기서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 네가 결코 오해할 수 없는 지극히 평이한 용어들로, 네가 결코 혼동할 수 없는 지극히 단순한 언어로, 네가 결코 장황함 속에서 헤맬 리 없는 지극히 평범한 어휘들로.
그러니 이제 앞으로 나아가라. 내게 뭐든지 다 물어보라. 무엇이든 다. 내 힘껏 대답해주리라. 나는 이 일을 위해 온 우주를 다 동원할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하라. 이 책이 내 유일한 도구인 건 아니다. 네가 어떤 질문을 던지기만 하고 대답을 듣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눈을 열고 귀를 기울여라. 네가 듣는 노랫말과 네가 읽는 다음번 신문기사와, 네가 보는 다음번 영화의 줄거리와, 네가 만나는 다음번 사람의 우연한 중얼거림에. 혹은 네 귀를 간질이는 다음번 강과 바다와 바람의 속삭임에. 이 모든 장치들이 다 내 것이다. 이 모든 길들이 다 네게로 열려 있다. 네가 귀담아듣는다면 나는 네게 말할 것이며, 네가 나를 초대하면 나는 네게 갈 것이다. 그러면 내가 언제나always 그 자리에 있다는 걸 네게 보여주리라. 모든 방법으로 all ways.
2
“삶의 길을 몸소 가리켜 주시니
당신 모시고 흡족할 기꺼움이.
당신 오른편에서 누릴 즐거움이 영원합니다.”
-시편 11:11
저는 평생토록 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아 헤맸습니다.
알고 있다, 네가 그랬다는 걸-
-그리고 이제 그 길을 찾았습니다만,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건 마치 제가 저 자신에게 이 글을 쓰고 앉아 있는 기분입니다.
너는 그렇게 하고 있다.
신과 대화할 때 느낌직한 그런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북치고 장구치길 원한다고? 내가 어떤 악기들을 마련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당신도 이 책 전체를 불경(不敬)스럽다고 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특히 당신이 이렇게 지혜로운 이 정도로만 나타날 때는요.
내가 설명해주지. 너희는 신이 오직 한가지 방식으로만 삶에 나타난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 그건 대단히 위험한 관념이다.
그럼 관념이 너희가 어디서나 신을 보는 걸 막는다. 만일 신이 오직 한 가지 방식으로만 보거나, 오직 한가지 방식으로만 소리내거나, 오직 한가지 방식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밤낮으로 내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평생을 신을 찾는 데 보내겠지만, 그녀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는 그녀가 아니라 그를 찾고 있으니까. 이것(신을 남자로만 생각하는 것-옮긴이)은 한가지 예에 나지 않는다.
너희가 범속함과 심오함 모두에서 신을 보지 못한다면 이야기의 반은 놓치고 있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다.
신은 슬픔과 웃음 둘 다에. 괴로움과 즐거움 둘 다에 존재한다. 모든 것 뒤에는 신성한 목적이 있고, 따라서 신성한 존재는 모든 것에 존재한다.
저는 한때 <신은 살라미(이탈리아 소식지-옮긴이) 샌드위치다>라는 책을 쓰기 시작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아주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네게 그런 영감을 주었다. 왜 너는 그 책을 쓰지 않았느냐?
신을 모독하는 것 같아서요. 아니면 기껏해야 끔찍할 만큼 불손한 짓이 되거나요.
경탄할 만큼 불손한 짓이겠지! 신은 “경건”하기만 하다는 관념은 어디서 얻었는가? 신은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며,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며, 왼쪽이기도 하고 오른쪽이기도 하며, 불손하기도 하고 경건하기도 한 존재다!
신은 웃을 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신은 멋진 농담을 즐길 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신은 유머가 없다고 알고 있느냐? 분명히 말하지만 유머를 발명한 것은 신이다.
너희가 나한테 말할 때는 꼭 숨죽인 어조로 말해야 하는가? 상스런 말이나 거친 언어는 내 영역 밖에 있는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내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말,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광경,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 중 일부는 내가 경멸하지만 다른 것들은 사랑하리란게 너희 생각이냐? 분명히 말하노니, 나는 어떤 것도 경멸하지 않는다. 나한테는 그 어떤 것도 불쾌하지 않다. 그것이 삶이며, 삶은 선물이자, 형언할 수 없는 보물이요, 신성한 것들 중의 신성함이다.
나는 삶이다. 왜냐하면 내가 곧 삶을 구성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측면은 신성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할 까닭이 있는 건 아무 것도, 정말 아무 것도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인간이 창조해낸 악의 경우에는요?
너희는 신의 계획 밖에 있는 것을 창조할 수 없다. 단 한가지 생각도, 단 하나의 물체도, 단 한가지 사건도, 즉 어떤 종류의 체험도, 너희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창조하게 해주는 것이 신의 계획이니까. 신이 스스로를 신으로 체험하는 것은 이런 자유 속에서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와 삶 자체를 창조한 이유가 이런 체험을 위해서였다.
악은 너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악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너희가 선을 인식하는 것은 너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너희가 신의 일을 인식하고 행하는 것은 너희가 악마의 짓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추위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더위를 사랑하지는 않으며, 낮음보다 높음을, 오른쪽보다 왼쪽을 더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상대적이고, 그것들은 모두 존재 전체의 부분들이다.
나는 “악”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히틀러는 천국으로 갔다. 이 점을 이해할 때 너희는 신을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저는 선과 악이 존재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은 서로 반대이며, 괜찮지 않고 좋지 않으며 신이 보시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믿도록 교육받아왔습니다.
신이 보기에는 모든 게 다 “받아들일 만”하다. 어떻게 신이 존재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겠는가? 어떤 것을 거부하는 건,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건 그것이 내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너희의 믿음을 고수하고, 너희의 가치에 충실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이것은 너희 부모의 가치이고, 너희 조부모의 가치이며, 너희 친구들과 너희 사회의 가치이니까. 그것들은 너희 삶의 틀을 형성한다. 그래서 그것들을 잃으면 너희의 체험으로 짠 천을 다 풀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그것들을 한조각한조각 조사 하도록 하라. 집을 통째로 헐지는 마라. 하지만 벽돌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깨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 더 이상 구조를 지탱하지 않는 벽돌들을 바꿔 끼우도록 하라.
옳고 그름에 관한 너희의 관념들은 그냥 그것, 즉 관념일 뿐이다. 그것들은 ‘자신’의 모습을 이루고 ‘자신’의 내용을 창조하는 생각들이다. 이것들 중 어떤 것을 바꿀 까닭, 또는 변경하려는 목적은 딱 한가지뿐이다. 너희가 자신에게서 행복을 느끼지 않을 때.
자신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오로지 너희만이 알 수 있다. 오직 너희만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건 내 창조물, 내 아들이다. 이 상태에서 나는 대단히 즐겁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너희의 가치가 너희에게 도움이 되면 그것을 고수하라. 그것을 옹호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라.
그러나 누구에게도 해(害)를 입히지 않은 방식으로 싸우도록 하라. 해침은 치료의 필수 성분이 아니다.
당신은 우리의 가치가 몽땅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와 동시에 “너희의 가치를 고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설명해 주십시오.
나는 너희 가치들이 그르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옳다고 말한 적도 없다. 가치란 건 단지 견해일 뿐이며, 평가요 판단일 뿐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너희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린 판단이다. 아마도 너희 부모와 너희 종교와 너희 선생들과 역사가들과 정치가들이 내린 판단들일 것이다.
너희가 자신의 진리로 포함시킨 가치판단들 가운데 너희 자신의 체험에 근거해서 내린 것들은 아주 적다. 너희가 이곳에 온 것은 체험하기 위해서였고, 너희는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창조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다른 사람들의 체험으로 자신을 창조해왔다.
만일 죄라는 게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체험을 빌어 자신을 현재의 자신으로 만드는 게 죄일 것이다. 이것이 너희가, 너희 모두가 저질러온 “죄”이다. 너희는 자신의 체험을 기다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체험을 복음(福音)으로(말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고 나서 너희가 처음으로 실제 체험과 만날 때, 너희는 그 만남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덮어버린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너희는 전혀 다른 체험, 너희 선생의 원래 가르침이나 원래 근거를 틀렸다고 할 수 있는 체험을 가졌을 것이다. 대체로 너희는 너희 부모와 너희 학교와 너희 종교와 너희 전통과 너희 경전들을 틀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신이 들었다고 여기는 것을 편들어 자신의 체험을 부정한다.
이것이 너희가 인간의 성(性)을 다룰 때보다 더 잘 드러나는 때는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체험이야말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짜릿하며 가장 강렬하고 가장 황홀하며 가장 신선하고 가장 기운차며 가장 확실하고 가장 친밀하며 가장 일체가 되고 가장 기분전환이 되는, 단일의 신체체험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너희는 이것을 체험으로 깨닫고 나서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퍼뜨린, 성에 관한 기존 판단과 견해와 관념들을 받아들이고 만다. 그런 것들 모두가 너희의 사고방식에 기득권을 휘둘러왔다.
이런 견해와 판단과 생각들은 너희 자신의 체험과는 완전히 다르다. 너희는 너희 선생들을 틀린 사람들로 만드는 걸 몹시 꺼려하면서, 잘못된 건 자신의 체험인 게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그 결과 너희는 성에 관한 자신의 진정한 진실을 배반해왔고, 그것은 파괴적인 결과들을 불러일으켰다.
너희는 돈에 대해서도 같은 짓을 저질러왔다. 너희는 살아오면서 돈을 많이 벌 때마다 매우 흡족해했다. 너희는 돈이 들어올 때도, 그것을 쓸 때도 매우 흡족해했다. 결코 돈 자체가 나쁘거나 악하거나 본래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 주제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을 너무 깊이 받아들인 나머지, 소위 “진리”를 편들어 자신의 체험을 거부해왔다.
너희는 소위 이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는, 이것을 중심으로 생각들을, 창조력을 갖는 생각들을 쌓아왔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돈과 관련한 개인적인 현실, 즉 너희에게서 돈을 밀쳐내는 현실을 창조해왔다. 좋지 않은 것을 굳이 끌어들일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놀랍게도 너희는 신에 관해서도 이와 똑같은 모순을 창조해왔다. 신에 관한, 너희 마음의 모든 체험은 신이 좋다고 말한다. 너희 선생들이 가르치는, 신에 관한 모든 것은 신이 나쁘다고 말한다. 너희 마음은 신을 두려움 없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너희 선생들은 신은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으니 신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말한다. 너희는 신의 분노를 두려워하면서 살아야 한다. 너희는 신의 존재 앞에서 떨어야 한다. 너희는 평생토록 주(主)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정의”이기에. 주의 그 무서운 정의에 맞설 때 너희는 고통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신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무엇보다 너희는 “만일 신이 자신의 법에 엄격하게 복종하길 원했다면, 왜 신은 그것을 어길 가능성을 창조했는가” 같은 논리적인 질물들을 던져서는 안 된다. 참, 아니지. 너희 선생들은, 신이 너희에게 “자유선택권”을 주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게 무슨 자유로운 선택인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면 그게 어떻게 “자유의지”인가? 그러니 너희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은 신을 위선자로 만들고 있다.
너희는, 신은 용서이고 자비이지만, 너희가 “올바른 방식”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합당하게 “신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면, 너희의 탄원은 들리지 않을 것이고, 너희의 외침은 무심하게 지나쳐지고 말리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합당한 방법이 딱 한 가지만 있다면 이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것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합당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너희 대다수는 신을 예배하고 복종하고 섬기는 “올바른” 방법을 찾는 일에 어른이 된 이후 삶의 상당부분을 허비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역설은 나는 너희의 예배를 원치 않고, 너희의 복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너희는 나를 섬길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이런 행동들은 너희의 역사에서 군주들, 그것도 대개 독선적이고 불안정하고 전체적인 군주들이 자기네 백성들에게 요구해온 것들이다. 그것들은 결코 신의 요구가 아니다. 세상이 지금까지도 그런 요구가 터무니 없고, 신이 요구나 바램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은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은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존재 전체(신-옮긴이)는 말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규정 자체에서 이미 신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거나 아무거도 부족하지 않다.
만일 너희가 뭔가를 어느 정도 필요로 하는 신, 그리고 그것을 얻지 못하면 몹시 마음이 상해 그것을 주기로 했던 사람들을 벌하는 신을 믿는다면, 너희는 나보다 훨씬 더 왜소한 신을 믿는 것이다. 진실로 너희는 훨씬 더 못한 신의 자식들이 되는 것이다.
내 자식들아, 그렇지 않다. 내 다시 이 글을 통해 너희에게 다짐하노니, 나는 필요한 게 없다. 나는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 바램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바램과 요구는 같은 게 아니다(너희 현생에서 너희 중 다수가 그 둘을 같은 것으로 만들긴 했지만).
바램은 모든 창조의 시작이다, 그것은 맨처음 생각이다. 그것은 영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숭고한 느낌이다. 그것은 다음번에 창조할 것을 택하는 신이다.
그러면 신의 바램은 무엇이겠는가?
우선 나는, 내 모든 영광 속에서 나 자신을 알고 체험하기를,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바란다. 내가 너희와 우주의 온갖 세계들을 발명하기 전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두 번째로 나는, 그것이 어떤 방식이 되든, 너희가 선택하는 방식으로 너희 자신을 창조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에게 준 힘을 가지고, 너희가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알고 체험하기를 바란다.
세 번째로 나는, 삶의 전과정이 지금이라는 순간순간마다 끊임없는 기쁨과 계속되는 창조와 결코 끝나지 않을 확장과 완전한 성취를 체험하는 것이 되길 바란다.
나는 이런 바램들이 실현될 수 있는 완벽한 체계를 세워 놓았다. 그 바램들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너희와 나의 유일한 차이는 나는 이 사실을 안다는 데 있다.
너희가 완전한 앎에 이르는 순간(이런 순간은 언제라도 올 수 있다)에는 너희 역시 내가 항상 느끼는 대로 느낄 것이다. 즉 너희 역시 오로지 기뻐하고 사랑하고 수용하고 축복하고 감사하게 느낄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신의 ‘다섯가지 마음자세이다. 우리가 이 대화를 다 끝내기 전에 나는 이런 마음자세들이 내 지금 삶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보여주겠노라. 그리하여 네게 신성(Godliness)을 느끼게 해주겠노라.
이것들이 짧은 내 질문에 대해 내가 주는 긴 대답이다.
그렇다, 네 가치들을 고수하라, 그것들이 네게 도움이 되는 걸 체험하는 한. 그러나 네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네 생각과 말과 행동과 더불어 네 체험 공간에 지금까지의 너 자신에 대한 관념들 중 가장 고귀하고 가장 좋은 관념을 가져오는지 주의해서 살펴보라.
네 가치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라. 그것들을 높이 들어 공공의 검증이라는 빛에 비춰보라. 만일 네가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네가 믿는 바를 세상에 말할 수 있다면, 너는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다. 너는 전혀 개선할 필요가 없는 자아와 그 자아를 위한 삶을 창조했기에. 나와의 이런 대화를 더 이상 계속할 이유가 없다. 너는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다. 이 책을 내려놓아라.
제 삶은 완벽하지도 않고, 완벽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온갖 불완전 덩어리입니다. 저는 이 불완전함들을 바로잡고 싶습니다. 때로는 온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제 행동의 원인이 되고, 실패를 불러일으키고, 제 앞길을 가로막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당신께 온 이유도 이 때문일 겁니다. 제 힘으로는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네가 와서 기쁘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늘 여기 있었다. 지금도 나는 여기에 있다. 네가 굳이 혼자 힘으로 해답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니다. 예전에도 꼭 그래야 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책 앞에 앉아 이런 식으로 당신과 대화한다는 건 너무....... 주제넘은....... 짓인 것 같습니다. 당신, 곧 신이 응답해준다고 상상하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고요. 제 말은 이건 미친 짓이란 겁니다.
나는 안다. 성서의 저자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었는데, 너는 미쳤구나.
성서 저자들은 예수의 생애를 목격했고, 자기네가 보고 들은 걸 충실히 기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정할 것. 신약성서의 저자들 대부분은 자기 생애에 예수를 만난 적도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지상을 떠나고 나서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태어났다. 그들이 길에서 나사렛 예수를 만났더래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성서 저자들은 위대한 신자들이고 위대한 역사가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즉 나이든 사람들이 나이든 사람들에게서 듣고 자기네와 자기네 친구들한테 전해준 이야기들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글로 적힌 기록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최종 문서(성서-옮긴이) 속에 성서 저자들이 적은 모든 기록들이 다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신 이미 예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강력한 이념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며 모일 때와 모이는 곳이면 으레 그렇듯이, 이런 교회 혹은 집단 속에도 특정한 몇몇 사람들이 있어 예수의 이야기 중 어떤 부분을 어떻게 들려줄지 결정했다. 고르고 편집하는 이 과정은, 복음서들과 성서의 내용을 모으고 기록하고 발간하는 전 시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성경 전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고.
원래의 경전들이 글로 옮겨지고 나서 몇 세기가 흐른 뒤에도, ‘교회 최고회의’는 당시의 공식 성경 속에 어떤 교리와 진리들을 포함시킬지, 그리고 어떤 것들이 대중에게 드러내보이기에 “건전하지 않거나 설익은” 교리와 진리들인지 다시 한번 판단했다.
그리고 다른 성스러운 경전들 역시 존재해왔다. 그것들 하나하나도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극히 평범했을 사람들이 영감을 느낀 순간에 문자로 기록해놓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너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이 글이 언젠가는 “성스러운 경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설마 그런 말씀은 아니겠지요?
내 아들아, 삶의 모든 것이 다 성스럽다. 그 의미에서는 그렇다, 이것도 성스러운 글이다. 하지만 나는 네 말뜻을 잘 알고 있기에 말꼬투리를 잡지는 않겠다.
아니다. 나는 이 글이 언젠가는 성스러운 경전이 될 거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몇백년 동안은. 그리고 이 글에 쓰인 언어가 시대에 뒤떨어진 골동품이 될 때까지는.
너도 보다시피 여기서 쓰고 있는 언어는 너무 일상어투이고 너무 대화체이며 또 너무 현대적이다. 그게 문제다. 사람들은 만일 신이 직접 너와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이웃집 남자처럼 말하진 않았을 거라고 가정한다. 언어에 뭔가 통일된 구조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 신성한 구조는 둘째치고라도 뭔가 권위가 있어야 하고 뭔가 신성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전에 말했다시피 이런 사고방식 역시 문제의 일부다. 사람들은 오로지 한가지 형식으로 “드러나는” 신만을 느낄 수 있다. 그런 형식에 어긋나는 것은 뭐든지 불경으로 비치는 것이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요.
그래, 네가 전에 말했다시피.
그건 그렇고 네 질문의 핵심으로 들어가보자. 너는 왜 자신이 신과 대화할 수 있는 게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기도를 믿지 않느냐?
믿죠. 하지만 그건 다릅니다. 저한테 기도는 늘 일방통행이었습니다. 저는 묻고 신은 늘 침묵을 지키시죠.
신이 기도에 응답해준 적이 한번도 없다고?
아니,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말로 응답하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아, 물론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기도에 대한 응답, 그것도 아주 직접적인 응답이라는 확신이 드는 온갖 종류의 일들이 일어나긴 했죠. 하지만 신이 말을 건 적은 한번도 없었지요.
알겠다. 네가 믿는 이 신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이 신은 단지 말하는 것만 못하는 거로군.
물론 신은 말씀하실 수 있겠죠. 원하시기만 하면요. 다만 신이 제게 말씀하고 싶어하신다는 게 가당치 않은 일인 것 같다는 거죠.
그것이 바로 네가 살아오면서 체험한 모든 문제의 뿌리다. 왜냐하면 너는 자신을 신이 말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으니까.
그런데 굉장하군! 자신을 신이 말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내 목소리를 듣길 기대하다니!
이런 식으로 말해주마. 나는 지금 이 순간 기적을 행하고 있다. 나는 네게만이 아니라 이 책을 집어들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나는 지금 그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중이다. 나는 그 사람들 하나하나를 다 알고 있다. 나는 지금 누가 이 말들에서 나름의 길을 찾아낼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내 다른 모든 교류들에서 그러하듯이) 어떤 이들은 마음으로 들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그저 듣기만 할 뿐 무엇 하나 귀담아듣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군요. 저는 이미 이 자료를 책으로 출판할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요.
그렇지. 그게 뭐 “잘못”됐는가?
제가 돈을 벌려고 이 모든 걸 지어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이 대화 전체를 의심받게 만들지 않을까요?
뭔가를 써서 돈을 벌겠다는 것이 네 동기인가?
아뇨. 제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는 그게 아닙니다. 제가 이 대화를 종이에 적기 시작한 건 제 마음이 지난 삼십년간 수많은 의문들에 시달려왔고, 제가 굶주려왔던 그 의문들의 해답을 얻으려 몸부림쳐 왔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책으로 만들려는 발상은 나중에 나왔습니다.
나한테서 나왔지.
당신한테서요?
그렇다. 너도 내가 이 경이로운 질문들과 답변들이 몽땅 이대로 버려지게 놔둘 거라곤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고 싶었을 뿐이죠. 제 좌절을 끝내고 탐구를 마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좋아. 그럼 네 동기들을 의문스러워하는 짓은 그만두고 (너는 계속 그 짓을 하고 있다). 대화를 계속 진행시키도록 하자.
3
저는 수백가지 질문거리들을 갖고 있습니다. 아니, 수천, 수만가지요. 그래서 종종 어디서 시작해야 좋을지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냥 질문들을 나열해보도록 하라. 어디에서건 그냥 시작하라. 지금 당장 시작해보자. 우선 네 마음에 떠오르는 질문 목록을 만들어 보라.
좋아요. 그 중 몇가지는 아주 유치하고 아주 진부해 보일 겁니다.
자신에 대해 판단하는 짓은 그만둬라. 그냥 나열하라.
알겠습니다. 지금 제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질문들은 이렇습니다.
1. 제 인생이 마침내 도약하는 건 언제쯤일까요? “그것을 모아들여서” 약간의 성공이나마 거두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그 투쟁이 과연 끝날 수 있기는 한 겁니까?
2. 저는 언제쯤에나 남들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을 만큼 인간관계에 능숙해지게 될까요? 관계 속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무슨 방법이 있나요? 아니면, 그건 늘 힘겨운 과제일 수밖에 없나요?
3.왜 저는 한번도 생활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 수 없는 겁니까? 저는 늘 이렇게 쪼들리며 살아야 할 팔자입니까? 돈과 관련된 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걸 방해하는 게 뭡니까?
4. 왜 저는 제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 수 없는 겁니까?
5. 제가 직면하고 있는 일부 건강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저는 평생토록 지속되기에 충분한 고질병들을 앓아왔습니다. 왜 저는 지금까지도 그 모든 병들을 지니고 있는 겁니까?
6. 제가 이 생에서 배우기로 되어 있는 업장(業障)은 무엇인가요? 제가 터득하도록 애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7. 환생이란 게 있습니까? 저는 얼마나 많은 과거생을 거쳤나요? 그 생들에서 저는 무엇이었나요? “업보”라는 게 진짜로 있는 겁니까?
8. 저는 가끔 신들린 것 같은 기분을 강하게 느낍니다. “신들린 것” 같은 현상이 정말로 존재합니까? 제가 그런가요? 자신이 신들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악마와 거래하는” 겁니까?
9. 좋은 일을 하고 돈을 받아도 될까요? 제가 이 세상에서 치유하는 일, 신의 일을 하기로 선택한다면 그 일을 하면서 재정적으로도 부유해질 수 있나요? 아니면 그 두 가지는 서로 배타적인가요?
10. 섹스를 해도 괜찮나요? 이 체험의 배우에 깔린 진정한 의미는 뭔가요? 성행위는 몇몇 종교에서 가르치듯이 순전히 생식을 위한 건가요? 참된 성스러움과 자각은 성에너지의 부정, 혹은 변형으로 얻어지는 건가요? 사랑 없이 성행위를 해도 괜찮나요? 단지 육체적인 쾌감만으로도 성행위를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11.우리 모두가 가급적 섹스를 멀리해야 마땅하다면, 당신은 왜 섹스를 그렇게 근사하고 황홀하고 강렬한 체험이 되게 하셨나요? 무엇을 주시려고요? 그와 관련된 문제로, 온갖 즐거운 일들은 어째서 “부도덕하거나 불법이거나 탐욕스러운” 걸까요?
12. 다른 행성들에도 생명체가 있습니까? 그런 것이 우리를 찾아 온 적이 있나요? 우리는 지금 관찰 대상이 되고 있는 중인가요? 우리는 사는 동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외계 생명체의 증거를 보게 될까요? 우주의 모든 생명체는 각기 나름의 신을 갖고 있나요? 아니면 당신이 그 모든 것들의 신인가요?
3. 이 지구 행성에 언제고 유토피아가 도래하기는 하는 겁니까? 신은 약속한 대로 언젠가 지구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겁니까? 재림(再臨)이란 게 있습니까? 성경에 예언된 대로 세상의 종말, 혹은 계시록의 대재난이란 게 과연 오는 겁니까?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참된 종교만이 존재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건 어떤 종교인가요?
이상은 제가 품고 있는 질문들 가운데 몇가지에 불과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저는 몇백가지의 질문거리들을 갖고 있으니까요. 적고 보니 질문들 가운데 일부는 나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너무 유치해서요. 하지만 제발 대답해 주십시오. 한번에 하나씩, 그것들에 대해서 “얘기”해주십시오
좋다. 지금 우리는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질문들에 변명할 필요는 없다. 이것들은 과거 몇백년 동안 수많은 남녀들이 청해온 바로 그 질문들이었으니까. 만일 그 질문들이 어리석은 것이었다면, 그렇게 대를 이어가면서까지 묻고 또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우선 첫 번째 질문 (인생의 도약과 성공에 관한 질문-옮긴이)으로 가보자.
나는 이 우주에 너희가 선택한 꼭 그대로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법칙들, 즉 창조할 수 있게 해주는 법칙들을 설정해놓았다. 너희는 이 법칙들은 위반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다. 이 책을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희는 이 법칙들을 따르고 있다. 이 법칙들은 만물이 작용하는 방식이기에 너희가 이것들 따르지 않을 도리는 없다. 너희는 이 법칙에서 물러설 수도 없고, 이 법칙 밖에서 움직일 수도 없다.
너희는 삶의 모든 순간마다 이 법칙 안에서 움직여왔다. 그러므로 너희가 지금껏 체험한 것들은 모두 너희가 창조해온 것이다.
너희는 신과 동업하고 있다. 우리는 영원한 계약을 맺은 사이다. 너희에게 주는 내 약속은 너희가 요구하는 건 언제나 주겠다는 것이다. 너희의 약속은 구하는 것, 구함과 응답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과정을 이미 한번 네게 설명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설명하겠다. 네가 그 점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너희는 삼중(三重)의 존재다. 너희는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희는 이것들을 육체, 비육체, 초육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성삼위일체란 게 바로 이것이며, 너희는 이것을 온갖 이름으로 불러왔다.
이것이 바로 너희이고 나다. 나는 삼위일체로서 나타난다. 너희 신학자들 중 일부는 이것을 성부, 성자, 성신으로 불러왔다.
너희 정신과 의사들 역시 이 3개조를 인정하고 그것을 의식, 잠재의식, 초의식이라 불러왔다.
너희 철학자들은 그것을 이드와 에고와 수퍼에고로 불러 왔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에너지, 물질, 반(反)물질이라 부른다.
시인들은 생각, 감정,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뉴에이지(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지난 사백년간 서구를 풍미해온 물질주의 사고방식의 폐해를 반성하고 동양의 정신 지혜들을 통해 물질문명의 문제점들을 극복하려는 운동을 말한다-옮긴이) 사상가들은 몸, 마음, 영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희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눠진다. 이것이 잠재의식, 의식, 초의식과 같은 것일 수는 없을까?
공간 역시 비슷하게 여기와 저기와 사이 공간, 셋으로 나누어진다.
어렵고 잘 잡히지 않는 게 이 “사이 공간”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일이다. 너희가 규정하거나 설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너희가 가리키는 공간은 “여기” 아니면 “저기”가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이 공간”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 영원한 지금이 “전”과 “후”를 제대로 받쳐주듯이, 그것은 “여기”와 “저기”를 제대로 받쳐주는 구실을 한다.
너희의 이 세 측면들은 사실은 세가지 에너지다. 그것들은 생각, 말, 행동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세가지가 함께 합쳐져서 하나의 결과를 낳는다. 그것을 너희의 언어 혹은 이해방식으로는 느낌 혹은 체험이라고 한다.
너희 영혼(잠재의식, 이드, 혼, 과거 등등)은 너희가 일찍이 가졌던(창조했던) 모든 느낌의 총합이다. 그 느낌들 중 자각하는 일부를 너희는 기억이라 한다. 기억memory할 때 너희는 재구성한다re-member, 즉 함께 다시 놓는다. 다시 모은다 reassemble고 말한다.
너희가 자신의 모든 부분들을 다시 모을 때, 너희는 ‘자신’을 재구성하게 될 것이다.
창조 과정은 생각, 즉 발상, 개념, 시각화에서 시작된다. 너희가 지금 보는 모든 것이 한때는 누군가의 발상이었다. 너희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처음에 순수한 생각으로만 존재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점은 우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생각은 창조의 첫 단계다.
그 다음에 말이 온다. 너희의 모든 말은 밖으로 표현된 생각이다. 말에는 창조력이 있고, 말은 창조 에너지를 우주 속으로 내보낸다. 말은 생각보다 더 역동적이다(따라서 좀 더 창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말은 생각과 진동 수준이 다르다. 말은 생각보다 더 강한 충격으로 우주를 뒤흔든다(바꾸고 변화시키고 영향을 미친다).
말은 창조의 두 번째 단계다.
그 다음에 행동이 온다.
행동은 움직이는 말이다. 말은 표현된 생각이다. 생각은 형성된 발상이고, 발상은 한데 모인 에너지들이다. 에너지는 풀려난 힘이고, 힘은 존재하는 요소들이다. 요소들은 신(神)의 조각들이고, 전체의 일부들이며, 모든 것의 재료이다.
그 시작은 신이다. 그 끝은 행동이다. 행동은 창조하는 신, 즉 체험된 신이다.
너희는 자신이 신의 일부가 되고 신과 동업관계를 맺기에 충분할 만큼, 훌륭하지도 않고 경이롭지도 않고 죄없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너희는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부정해온 탓에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말았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로 일어난 일이 아니며, 어쩌다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그 모두가 신성한 계획의 일환이다. 너희가 이미 너희 자신이라면 너희는 ‘자신’을 불러낼 수도 창조할 수도 체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자신’을 충분히 창조함으로써, 즉 불러냄으로써 ‘자신’을 충분히 체험하자면, 우선 나와의 연결을 끊는(부정하거나 잊는) 게 필요했다. 너희의 가장 원대한 소망이자 내 가장 위대한 바램은, 너희 자신을 너희이기도 한 나Me you are의 일부로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단일한 순간마다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면서 자신을 체험하는 과정 속에 있다. 내가 너희를 통해 그러하듯이.
이 동업관계를 이해하겠는가? 그 의미를 파악하겠는가? 그것은 신성한 협력, 참으로 성스러운 교섭이다.
네가 인생이 “도약하는”걸 선택할 때, 네 인생은 너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이다. 너는 지금까지 그렇게 하길 선택하지 않았다. 너는 꾸물거리고 미루고 연기하고 항의해왔다. 이제 내가 네게 약속한 걸 공표하고 만들어낼 때가 왔다. 이렇게 하려면 너는 약속을 믿어야 하고, 또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한다. 너는 신의 약속을 실천해야 한다.
신의 약속은 네가 그의 아들이요, 그녀의 자식이며, 신과 닮은꼴이고, 신과 동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하....... 네가 걸려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군. 너는 “그의 아들”이니, “자식”이니, “닮은꼴”까지는 받아들이지만 “신과 동등한 존재”에서 움츠려드는 구나, 너무 버거운 얘기라, 너무 엄청나고 너무 놀랍고, 너무 부담스러운 얘기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로군. 왜냐하면 네가 신과 동등하다면, 그건 그 무엇도 너를 어쩌지 못하다는 뜻이고, 모든 것이 네 손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이니까. 이 세상에는 희생자도 없고 악당도 없다. 오로지 네 생각의 결말들만이 있을 뿐이다.
네게 말해주마. 너희가 세상에서 보는 것은 너희가 그것들에 대해 생각한 것의 결말이다.
너는 자신의 인생이 정말로 “도약하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에 관한, 자신에 관한 생각을 바꾸어라. ‘너이기도 한 신’God you are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물론 이것은 너를 주위사람들 다수, 아니 대다수에게서 떼어놓을 것이다. 그들은 너를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들은 네가 신을 모독한다고 말할 것이다. 결국 그들은 네게 질색하면서 너를 십자가에 매달려 할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네가 너 자신의 환상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대다수 사람들은 네가 혼자만의 즐거움에 빠지는 걸 허용해줄 만큼은 관대하다), 조만간 다른 사람들이 네 진리에 끌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약속들은 그들에게도 유효한 것이기에.
네가 주위 사람들을 위협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기에, 그들은 이 지점에서 네게 간섭하려 들 것이다. 네 단순한 진리, 단순한 삶은 이 지상의 네 동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아름다움과 더 많은 안락과 더 많은 평온과 더 많은 기쁨을 주고,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더 많은 사랑을 주는 것이기에.
그리고 네 진리가 받아들여지는 건 그 사람들 방식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그것은 미움과 두려움과 완고함과 전쟁의 종말을 뜻하고, 내 이름으로 행해져온 비난과 살인의 종말을 뜻하며, 힘이 정의가 되는 현실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힘으로 손에 넣는 행동의 종말을 뜻하고, 두려움에서 비롯된 충성과 경배의 종말을 뜻하며, 너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세상, 한참 멀리까지 창조해낸 대로의 세상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그러니 어진 영혼이여,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라. 네가 자기실현이라는 성스러운 대의(大義)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너를 비방하고 경멸하고 야유하고 버릴 것이며, 마침내는 자기네가 아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너를 고발하고 심문하고 재판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겠는가?
네가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 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세상이 네게 가져다준 것들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는다. 너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해준 것들을 놓고 기뻐하지 않는다. 너는 고통과 괴로움을 멎게 하고 환상을 끝장내고자 한다. 너는 지금대로의 세상에 질려 있다. 너는 더 새로운 세상을 추구한다.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세상을 구하지 마라. 이제 그것을 불러내도록 하라.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더 알기 쉽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우선 자신에 관한, 네 가장 고귀한 생각(자신이 신과 동등한 존재라는 생각-옮긴이)을 갖도록 하라. 네가 날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산다면 되리라고 생각되는 네 모습을 상상해보라. 네가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에 네가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보라.
그 모습과 네가 현재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겠느냐?
예.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겠습니다.
좋다. 지금 이 순간의 너는 자신에 관한 고귀한 전망을 살고 있지 않다는 걸 너도 나도 알고 있기에,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이제 네가 지금 있는 곳과 되고자 하는 곳 사이의 차이를 알았으니, 네 생각과 말과 행동을 네 가장 고귀한 전망에 걸맞게 바꾸기 시작하라, 의식적으로 바꾸기 시작하라.
그렇게 하려면 실로 엄청난 정신과 육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네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순간순간 끊임없이 관찰하는 일도 해야 한다. 또 여기에는 선택을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과정이 자각으로 가는 위대한 발걸음이다. 만일 네가 이 도전을 받아들인다면, 너는 평생의 반을 아무 의식없이 보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너는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들을 체험할 때까지는, 네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의식 차원에서 자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며, 또 이 결과들을 체험하고 나면, 그 결과들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관련 있음을 부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얘기는 그런 의식 없는 삶을 그만두라는 외침이다. 이것은 너희의 영혼이 태초부터 너희에게 일깨우고자 했던 과제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계속 관찰해나간다는 건 끔찍할 정도로 피곤한 일이 될 것 같은데.......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제이의 천성(天性)이 되기 전까지는. 사실 그것은 너희의 두 번째 천성이다. 너희의 첫 번째 천성은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너희의 첫 번째 천성, 즉 너희의 참된 천성을 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게 두 번째 천성이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걸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의식하는 게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 전과 달라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우둔해지지는 않는다. 예수가 멍청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처가 함께 있기에 따분한 존재였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고 함께 있어 달라고 간청했다. 깨달음을 얻는 그 누구도 멍청하지 않다. 아마 남다르고 비범하긴 하겠지. 하지만 결코 멍청하지는 않다.
그래, 네 삶이 “도약하길” 바란다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네가 되기 바라는 대로 네 사람을 그려보고 그 속으로 옮겨가도록 하라. 그것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행동을 점검하라. 그런 것들에서 떨어져라.
네 고귀한 전망에 걸맞지 않는 생각을 하게 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각으로 바꾸도록 하라. 네 가장 위대한 이상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게 되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게끔 적어두어라. 네 가장 좋은 의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되면,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연관된 사람들과 함께 그런 행동을 바로잡도록 하라.
전에도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저는 그럴 때마다 너무 솔직하지 않은 것 같아서 싫었습니다. 예컨대 속이 몹시 매스껍더라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마라, 쫄딱 망해서 빈털터리가 되었더라도 그 사실을 입밖에 내지 마라, 기분이 아무리 산란해도 그런 티를 내지 마라는 식의 얘기를 말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지옥으로 보내진 세 사람에 관한 농담이 생각납니다. 한사람은 카톨릭교도였고, 한사람은 유태인, 또 한사람은 뉴에이지 사상가였지요. 악마가 카톨릭교도에게 조롱하듯 물었습니다. “자, 어떤가? 뜨뜻한 게 즐길 만한가?” 그랬더니 카톨릭교도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온도를 더 높여달라고 신께 부탁하는 중이요.”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다음에 악마는 유태인에게 물었지요. “자넨 어떤가? 뜨뜻한 게 즐길 만 한가?” 그러자 유태인은, “내가 이보다 더한 지옥만 빼고 달리 뭘 더 바라겠소?”라고 대답했답니다. 마지막으로 악마가 뉴에이지 사상가에게 가서 “뜨겁지?” 하고 물었더니 뉴에이지 운동원은 진땀을 흘리면서 “뜨거워? 뭐가 뜨거워?” 하고 반문했답니다.
재미있는 농담이다. 하지만 나는 문제를 무시하거나 문제가 없는 척하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상황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그 상황에 관련된 네 가장 고귀한 진실을 말하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만일 네가 망했다면 너는 망한 것이다. 그 사실을 놓고 거짓말을 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다. 사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얘기를 지어낸다는 건 속을 허하게 만드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망했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잣대는 그 사실에 관한 네 생각, 예를 들면, “망한 건 나쁜 일이다”. “이건 끔찍한 일이다”. “괜찮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서 실제로 망하기까지 하는 일은 절대 없는데, 나는 못난 놈이다” 따위의 생각이다.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망한 상태로 있을 것인지 보여주는 건 그 사실에 관한 네 말, 예를 들면, “나는 망했어”, “나는 땡전 한 푼 없어”, “내 수중에는 돈이 말랐어” 따위의 말이다. 네 현실이 그런 식으로 지속되게 만드는 것은 그 사실을 둘러싼 네 행동들, 예를 들면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잔뜩 기가 죽어 앉아 있고,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이유로 빠져나갈 길을 찾으려 들지 않는 따위의 행동이다.
우주에 관해 이해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어떤 상황도 “좋거나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건 그냥 있을 뿐이다. 그러니 가치판단 내리길 그만둬라.
두 번째로 알아둬야 할 사실은 모든 상황이 다 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항상 똑같이 머무는 건 없으며, 정지된 채 남아 있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러니 뭔가를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느냐는 너희에게 달려 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또 말씀을 끊어야겠군요. 병이 들었는데 산도 움직일 만한 믿음을 갖고 있어서 자기 몸이 곧 나을 걸로 생각하고 말하고 믿고 있었는데....... 불과 육 주 뒤에 죽은 사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건 그 모든 낙관적인 생각이나 긍정적인 행동양식들하고 어떻게 부합되는 겁니까?
아주 좋다. 너는 계속 까다로운 문제들을 묻고 있다. 이건 좋은 일이다. 그러고 보면 너는 단순히 내 얘기가 네가 든 예들(카톨릭교도와 유대교도와 뉴에이지 사상가의 사고방식을 꼬집은 앞의 농담-옮긴이) 중 하나에 해당된다고 오해하는 것이 아니다. 선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언제고 너는 내 얘기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결국에 가서는 “내 말을 믿어보거나 부정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즉 너와 내가 이 일을 놓고 영원히 논란을 벌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지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니 대화를 계속해보도록 하자.
“산도 움직일 만한 믿음”을 가졌으나 육 주 뒤에 죽은 사람은 육 주 동안에 산을 움직였다. 아마 그에게는 그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사람은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좋아, 이만큼 했으면 충분해. 이제 나는 또 다른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됐어.”라고 결정했을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 그런 결심을 말해주지 않았을 테니 너희가 그 결심을 모를 수도 있다. 사실 그 사람은 좀 더 빨리, 죽기 며칠 전이나 몇 주 전에 그런 결정을 내렸으나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수 있다.
너희는 죽고자 하는 것이 전혀 괜찮지 않은 사회, 죽음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것이 전혀 괜찮지 않은 사회를 창조해냈다. 너희가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너희는 그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누군가가 죽고 싶어한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이 삶보다 더 나은 상황은 무수히 많다. 나는 너희가 조금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런 상황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너희가 죽기를 택하는 다른 누군가를 눈앞에서 보고 있을 때는 이런 진리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진리들이 그렇게 자명한 것들은 아니기에. 죽어가는 사람도 너희가 그렇다는 걸 안다. 그 여자는 그 방안에서 자신의 결정을 어떤 수준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지 눈치챈다.
너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방이 비기를 기다리는지 눈치챈 적이 있는가? 심지어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괜찮으니 어서 가. 가서 뭐 좀 먹어.” 라거나 “가서 눈 좀 붙여. 난 괜찮아. 내일 아침에 와.”라고 말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고 나서 그 충성스런 감시자들이 떠나고 나면 비로소 영혼도 감시당하던 몸을 떠난다.
만일 그들이 방에 모여든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난 이대로 죽고 싶어”라고 말한다면, 거기 모인 사람들은 정말로, “오, 그건 진심이 아닐 거야”라거나, “그런 말 하지마”라거나, “이대로 있어줘”라거나, “제말 날 두고 가지 마”라고 말할 것이다.
모든 의료인들은 환자가 위엄을 잃지 않고 죽을 수 있도록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무조건 목숨을 부지하게 만들도록 훈련받는다.
너도 알다시피 의사나 간호사에게 죽음은 실패를 뜻한다. 친구나 친척에게 죽은 재앙이다. 오로지 영혼에게만 죽음은 구원이고 해방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그들이 평온하게 죽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 생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이 “견뎌야 한다”거나, 계속 힘들어해야 한다거나, 자신들을 염려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러므로 자신이 살 거라 말했고, 살 거라 믿었으며, 심지어 살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한 그 사람은 아마도 십중팔구 영혼의 차원에서 “마음을 바꾸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제는 다른 목표들을 추구하기 위해 영혼이 몸에서 벗어날 때가 왔다는 결정을. 영혼이 이런 결정을 내릴 때 몸의 어떤 행동도 그 결정을 바꿀 수 없다. 마음의 어떤 생각도 그것을 변경시킬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몸-마음-영혼의 3개조 중에서 어느 것이 만사를 경영하는지 깨닫게 된다.
너희는 평생토록 자기 몸이 자기라 여긴다. 너희는 간혹 가다 자기 마음이 자기라 여기기도 한다. 너희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찾아낸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영혼에게 고분고분 귀 기울이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 이런 상황도 네가 묘사한 시나리오(믿음을 가졌으나 6주 후에 죽은 사람 이야기-옮긴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사람들이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 자기 영혼의 말을 듣는 것이다(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렇게 한다는데 유의하라).
이제 영혼이 앞장서서 몸을 떠날 때가 왔다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자주 일어난다. 영혼의 영원한 하인들인 몸과 마음은 이 말을 듣게 되며, 그와 더불어 유리(遊離) 과정이 시작된다. 그런데 마음(에고)은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국 이것은 마음이라는 존재의 종말을 뜻한다. 그래서 마음은 몸에게 죽음에 저항하라고 지시한다. 몸 역시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 지시를 기꺼이 이행한다. 몸과 마음(에고)의 창조물인 외부세계는 몸과 마음의 이런 결정을 크게 격려하고 크게 칭찬한다. 그렇게 해서 그 책략은 확정된다.
이제 이 지점에서는 영혼이 얼마나 간절히 떠나고 싶어하는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만일 여기서 떠나는 게 그렇게 급하지 않다면 영혼은, “좋다, 너희가 이겼다, 너희와 함께 좀 더 머무르겠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로 머무는 것이 더 높은 일정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음이 분명할 때면, 즉 자신이 그 몸을 통해서 더 이상 진화할 방법이 없다는 게 분명할 때면, 영혼은 떠날 것이고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 해서도 안될 것이고.
영혼은 자신이 목표가 진화라는 걸 확실히 알고 있다. 진화야말로 영혼의 유일한sole 목표이자 그것의 영적soul 목표다. 그것은 몸의 성취나 마음의 성숙에는 관심이 없다. 영혼에게는 이런 것들이 전혀 무의미하다.
또 영혼은 몸을 떠나는 일이 별다른 비극이 아니란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극은 몸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너희는 영혼이 이 죽음 전체를 다르게 본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영혼은 “삶” 전체도 다르게 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살면서 심한 좌절과 불안을 느낀다. 너희의 좌절과 불안은 영혼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어떻게 해야 제 영혼의 말을 가장 잘 들을 수 있을까요? 설사 정말 영혼이 보스 같은 존재라 해도 제가 수뇌부(영혼을 뜻한다-옮긴이)에서 내려온 지시문을 받고 있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너는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파악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영혼에 대해 판단하는 짓을 그만두고.
제가 제 자신의 영혼에 대해 판단하고 있다구요?
끊임없이. 나는 방금 전에 죽고 싶어하는 자신에 대해 너희가 어떤 식으로 판단하는지 보여주었다. 너희는 자신이 살고 싶어한다고, 참으로 살고 싶어한다고 판단한다. 또 너희는 자신이 웃고 싶어한다고 판단하고, 울고 싶어한다고 판단하며, 이기고 싶어하고 지고 싶어한다고 판단한다. 즉 기쁨과 사랑을 체험하고 싶어한다고 판단한다. 특히 너는 자신이 지고 싶어한다는 판단을 잘 내린다.
제가요?
너는 어디선가 자신의 기쁨을 부정하는 게 신성한 태도요, 삶을 찬양하지 않는 게 성스러운 태도라는 사고방식을 만난 적이 있다. 너는 자신에게 말해왔다. 부정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부정하는 게 나쁘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그냥 부정일 뿐이다. 만일 너 자신을 부정하고 나서 기분좋게 느낀다면 네 세계에서 그것은 좋은 것이다. 만일 네가 기분나쁘게 느낀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대개의 경우엔 너는 판단하지 못한다. 너는 그래야 한다고 자신에게 속삭이면서 자신을 이런저런 식으로 부정한다. 그러고 나서 너는 그렇게 한 건 좋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 자신이 기분좋게 느끼지 못하는지 의아해한다.
그러므로 맨먼저 할 일은 자신에 대한 이런 판단들을 그만두는 것이다. 영혼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바램과 함께 가라. 영혼과 더불어 가라.
영혼이 추구하는 것은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의 느낌이다. 바로 이것이 영혼의 바램이다. 바로 이것이 영혼의 목표다. 영혼은 그 느낌을 추구한다. 지식이 아니라 느낌을. 지식은 이미 갖고 있지만, 지식은 개념에 불과하다. 느낌은 체험이다. 영혼은 자신을 느끼고자 하며, 직접 체험하여 자신을 알고자 한다.
가장 고귀한 느낌이란 ‘존재 전체’와 하나가 되는 체험이다. 이러한 체험은 영혼이 갈망하는, 진리로의 위대한 복귀(復歸)이다. 이것이 완벽한 사랑의 느낌이다.
완벽한 사랑이란 완벽한 흰빛이 일반 빛깔에 대해 어떤 관계인지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흰빛을 아무 빛깔도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흰빛은 모든 다른 빛깔을 다 포함한다. 흰빛은 존재하는 모든 다른 빛깔이 섞인 것이다.
사랑 역시 감정(증오, 분노, 정욕, 질투, 탐욕)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감정의 합(合)이다. 그것은 그 모든 감정의 총화이며, 모든 것everything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완벽한 사랑을 체험하려면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다 맛봐야 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무슨 수로 연민을 느낄 수 있겠는가? 내가 한번도 체험하지 못한 감정을 다른 사람이 품고 있을 때 무슨 수로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밟아나가는 여행의 단순함과 그 외경스런 위대함을 함께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그것이 무엇에 이르고자 하는지 이해한다.
인간 영혼의 목표는 그 모든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인간의 영혼이 한번도 아래에 있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위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한번도 오른쪽에 있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왼쪽에 있을 수 있겠는가? 차가움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으며, 악을 거부하고서 어떻게 선해질 수 있겠는가? 만일 선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영혼은 뭔가가 될 수도 없다. 영혼이 자신의 숭고함을 체험하려면, 숭고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숭고함 외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혼은 숭고함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은 공간에서만 숭고함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 따라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음을 절대로 비난하지 않는다. 영혼은 그것을 축복한다. 자신의 다른 부분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자신의 일부를 그 속에서 보기 때문에.
물론 영혼이 하는 일은 우리가 숭고함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 최상의 ‘자신’을 고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너희가 고르지 않는다 해도 비난하는 일 없이.
이것은 많은 생을 들여야 할 만큼 엄청난 과제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축복하기보다는, 판단내리기에 급급하고, 뭔가를 “잘못됐다”거나 “나쁘다”거나 “충분치 않다”고 규정하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비난하는 것보다 더 고약한 일을 하고 있다. 사실 너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해를 입히려 한다. 너희는 그것을 파괴하려 한다. 너희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이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공격한다. 자신의 종교에 맞서는 종교가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틀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생각이 있으면, 너희는 그것을 비웃는다. 자신의 이념과 다른 이념이 존재하면, 너희는 그것을 배척한다. 너희는 잘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건 반쪼가리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다른 반을 거부하며 내칠 때 너희는 자신의 반조차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건 정말 하나같이 심오하군요. 감사합니다. 그 누구도 제게 이런 얘기를 해준 일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는요. 그래서 저는 그 말씀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진심입니다. 하지만 이 중 일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당신은 우리가 “옳은 것”을 이해하려면 “그른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건 예를 들면 우리가 악마도 끌어안아야 한다는 뜻인가요?
악마를 치유할 또 다른 방법이 있는가? 물론 진짜 악마같은 건 없지만, 네가 선택한 용어로 대답한다면 말이다.
치유란 모든 걸 받아들이고 나서 그중 가장 좋은 걸 선택하는 과정이다. 이걸 이해하겠느냐? 신말고는 선택할 것이 전혀 없다면, 너희는 신이 되길 선택할 수도 없다,
아니, 잠깐만요! 신이 되길 선택한다는 얘기를 한 게 전혀 아닌데요.
가장 고귀한 느낌은 완벽한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너는 신에 관한 묘사로 그보다 더 나은 걸 찾을 수 있겠느냐?
아뇨, 없습니다.
자, 네 영혼은 가장 고귀한 느낌을 찾고 있다. 그것은 완벽한 사랑을 체험하고자, 완벽한 사랑이고자 한다.
네 영혼은 이미 완벽한 사랑이다. 네 영혼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네 영혼은 그것을 아는 것 이상을 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완벽한 사랑이 되고자 한다.
당연히 너희는 신이 되려 하고 있다! 그것 외에 네가 이르고자 하는 다른 어떤 것이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전 잘 모르겠습니다.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그런 식의 생각엔 그냥 뭔가 불경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악마처럼 되려는 데서는 불경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면서 신처럼 되려는 것에는 질겁을 하다니, 그거 재미있군-
잠깐만요! 누가 악마처럼 되려 한다는 말씀입니까?
네가! 너희 모두가! 너희는 심지어 자신의 악함을 자신에게 납득시키려고, 너희가 죄 속에서 태어났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종교까지 창조해냈다. 그런데도 내가 너희는 신에게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순수한 신이고 여신이며, 순수한 사랑이라 말한다면, 너희는 내 말을 거부할 것이다.
너희는 자신이 나쁘다는 걸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일에 한평생을 허비해왔다. 자신이 나쁠 뿐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들도 나쁘다. 성행위도 나쁘고, 돈도 나쁘고, 기쁨도 나쁘고, 권력도 나쁘고, 많이 가지는 것도 나쁘다. 뭐든지 많이 가지는 건 나쁘다. 너희의 몇몇 종교들은 심지어 너희에게 춤추는 것도 나쁘고, 음악도 나쁘며, 삶을 찬양하는 것도 나쁘다고 믿게 만들었다. 얼마 안가 너희는 미소짓는 것도 나쁘고, 큰소리로 웃는 것도 나쁘며, 사랑하는 것도 나쁘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아니, 천만의 말씀, 내 친구여. 네가 다른 것들은 아마 확신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점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너 자신과 네가 바라는 것 대부분이 나쁘다는 것만은. 너는 자신을 이렇게 판단했기 때문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더 착해지는 걸로 결정했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어떻게 가든 목적지는 똑같으니까. 더 빠른 길, 더 짧은 길, 더 쉬운 길이 있다는 게 다를 뿐.
어떤 길이 그런 길인가요?
지금 당장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
예수가 한 일이 이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길이고, 크리슈나의 방법이며, 이 행성에 나타난 모든 선각자들의 발자취이다.
그리고 모든 선각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가르침을 전했다. 나는 곧 너희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희도 할 수 있다. 또한 너희는 이 이상 가는 것도 하게 되리라.
하지만 너희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대신 너희는 훨씬 더 어려운 길, 자신을 악마라 생각하고 자신을 악하다고 상상하는 길을 선택해왔다.
너희는 예수의 길을 밟는 것,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 크리슈나의 빛을 간직하는 것, 위대한 선각자가 되는 것을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자신’을 받아들이기보다 부정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너희는 선이요, 자비요, 연민이요, 이해다. 너희는 평화요, 기쁨이요, 빛이다. 너희는 용서요, 인내요, 강함이요, 용기이다. 필요할 때는 도와주는 이요, 슬퍼할 때는 달래주는 이요, 다쳤을 때는 치료해주는 이요, 혼란스러워 할 때는 가르쳐주는 이다. 너희는 가장 심오한 지혜이고, 가장 고귀한 진리이며, 가장 위대한 평화이고, 가장 숭고한 사랑이다. 바로 이런 것이 너희이다. 그리고 살면서 순간순간 너희는 자신을 이런 것들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제는 자신을 항상 이런 것들로 인식하도록 하라.
4
휴! 당신은 제 기운을 복돋아주시는군요!
신이 기운을 복돋아줄 수 없다면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당신은 늘 이렇게 튀는 편이신가요?
나는 경박하게 말하려던 게 아니었다. 다시 읽어보도록 하라.
예, 그렇군요.
좋다.
그러나 내가 튀었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신에게 좀 더 진지하게 대했던 편이라서.
부탁하는데, 나를 틀에 가두려하지 마라. 그리고 너 자신도 좀 봐주도록 하라.
이런 일들이 워낙 자주 일어나니, 덕분에 나도 대단한 유머감각을 지니게 되었다. 네가 이때껏 해온 일들을 돌아본다면 너 역시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말인즉슨, 이따금 나는 그런 걸 보고 그저 옷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왜냐하면 너도 알다시피,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게 잘되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요?
너희가 이 게임에서 지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너희는 길을 잘못 들 수 없다. 그런 건 계획의 일환이 아니다. 너희가 가고 있는 곳에 이르지 않을 방도는 없다. 너희의 목적지를 놓칠 방도는 없다. 신이 너희의 표적이라면, 너희는 운이 좋다. 왜냐하면 신은 너무 커서 절대로 놓칠 리 없을 것이기에.
사실 그게 큰 걱정거리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일을 망쳐 두 번 다시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되거나 당신과 함께 있지 못하게 될까봐서요.
“천국에 간다는” 뜻이냐?
예, 우리는 누구나 지옥에 갈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지옥에 가는 걸 피하려고 애초에 자신들을 지옥에 갖다놓는 거군. 흐음, 재미있는 전략이야.
당신은 또 튀고 있어요.
나도 어쩔 수 없다. 지옥 얘기만 나왔다 하면 심사가 뒤틀려!
맙소사, 당신은 진짜 코미디언이군요.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 너는 요즘 세상을 유심히 살펴보았느냐?
세상 얘기를 하시니 또 다른 의문이 떠오르는군요. 왜 당신은 세상을 고치지 않고 지옥으로 빠져들게 내버려두시는 겁니까?
너는 왜 하지 않느냐?
저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너희에게는 지금 당장 온 세상의 굶주림을 끝장내고, 온갖 병들을 고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다. 내가 너희 의료인들은 치료를 보류하고 있으며, 대체의 약이나 대체의술(한방이나 침술 등을 말한다-옮긴이)이 “치료하는” 직업의 구조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어찌하겠느냐? 내가 이 세상 정부(政府)들은 세상의 굶주림을 끝장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어찌하겠느냐? 내 말을 믿을텐가?
저는 그런 문제로 한동안 골머리를 알았더랬습니다. 저는 그게 인민당(미국의 인민당을 뜻한다-옮긴이)의 견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게 진짜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의사도 환자의 치료를 거부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의 국민도 자기 동포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의사 개인이라면 그 말이 맞다. 국민 개개인이라면 그 말이 옳다. 그러나 의료행위와 정치행동은 제도화되어 있고, 이런 식으로 싸우는 건 바로 그 제도화된 기관들이다. 때로는 매우 교묘하고 때로는 의식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러나 필연적으로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이런 기관들에게 그건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게 아주 단순하고 명백한 예 하나만 들어주겠다. 서양의사들은 동양의사들의 치료효과를 부정한다. 그들을 받아들이고 이 대체의학이 그저 약간의 치료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이제까지 쌓아올린 자기네 제도의 바탕 자체를 찢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는 악의는 아니지만 교활하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악해서가 아니라 겁이 나서이다.
모든 공격은 도와달라는 외침이다.
<기적수업A Course in Miracles>이란 책에서 그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거기다 그렇게 썼다.
맙소사, 당신은 무슨 일에든 대답을 갖고 계시는군요.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우리가 네 질문들을 이제 막 다루기 시작하던 참이라는 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네 인생을 제 궤도에 올려놓을지 논의하던 중이었지. 어떻게 해야 그게 “도약하도록” 할 수 있을지를. 나는 창조 과정에 대해 얘기하던 중이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꾸 방해를 했죠.
그건 상관없다. 하지만 너나 나나 그 중요한 문제의 실마리를 잃고 싶지 않을테니 이제 그만 그리로 돌아가기로 하자.
삶은 발견이 아니라 창조다.
너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인생이 너희를 위해 지니고 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너희는 순간순간 너희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아마 그것을 의식하진 못하겠지만.
어째서 그런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가 여기 있다.
1.나는 너희를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꼴로 창조했다.
2.신은 창조자다.
3.너희는 하나 속에 셋인 존재들이다. 너희는 이 세 측면을 너희가 원하는 대로, 성부 성자 성신이라 할 수도 있고, 마음 몸 영혼이라 할 수도 있으며, 초의식 의식 잠재의식이라 부를 수도 있다.
4.창조는 너희 몸의 이 세 부분들에서 진행되는 과정이다. 달리 말해 너희는 세가지 차원에서 창조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창조의 도구들이다.
5.모든 창조는 생각에서 시작된다(“아버지에게서 시작된다”). 그러고 나면 모든 창조는 말로 옮겨간다(“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말하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마태오 7:7-옮긴이]”). 모든 창조는 행동에서 완료된다(“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주했다[요한 1:14-옮긴이]”)
6.너희가 생각은 하지만 한번도 말하지 않는 것은 한 차원에서만 창조한다. 너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창조한다. 너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너희 현실에 구현된다.
7.너희가 진정으로 믿지 않는 어떤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창조 과정에는 반드시 믿음, 즉 깨달음이 들어가야 한다. 절대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소망 너머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성에 대한 깨달음이다(“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마태오 9:22-옮긴이]”). 따라서 창조에는 언제나 깨달음이 수반된다. 깨달음이란 본능적인 명확성, 완벽한 확실성, 어떤 것의 현실성에 대한 완벽한 인정이다.
8.깨달음의 이 자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감사의 자리이다. 그것은 미리 하는 감사이다. 그리고 아마도 창조하기 전에 창조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이것이야말로 창조의 최대 열쇠일 것이다. 그같은 당연시 여김은 신이 용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격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깨달음의 확실한 표식이다. 모든 선각자들은 그 행동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안다.
9.너희가 창조하고 또 창조했던 모든 것을 찬양하고 즐겨라. 그것의 일부를 거부하는 건 자신의 일부를 거부하는 것이다. 너희 창조물의 일부로서 지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너희가 그것의 주인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옹호하고, 그것을 축복하고, 그것에 감사하라. 그것을 비난하지(“빌어먹을! God damn it!") 마라.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니.
10.설사 창조의 일부 측면이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축복하면서 그냥 다른 것으로 바꾸도록 하라. 다시 선택하라. 새로운 현실을 불러오라.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말을 하고, 새로운 행동을 하라. 이것을 장대하게 해내라. 그러면 온 세상이 너를 따를 것이다. 너를 따를 것을 온 세상에 요구하고 크게 외쳐라.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라(요한 14:6-옮긴이)”고 말하라.
이것은 바로 신의 의지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길이다.
그게 그처럼 간단한 일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게 이 열단계의 과정뿐이라면, 어째서 우리 중의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해내지 못하는 겁니까?
너희 모두가 그런 식으로 해내고 있다. 너희 중 일부는 의식적으로 확실히 자각하면서 이 “시스템”을 쓰고 있고, 다른 일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뭘하는지도 모르면서 이 “시스템”을 쓰고 있다.
너희 중 일부는 맑은 정신으로 걷고 있으나, 다른 일부는 자면서 걷고 있다. 그럼에도 너희 모두는 내가 너희에게 준 힘을 이용해서, 내가 이제 막 설명한 과정을 거쳐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발견하는 게 아니라 창조하고 있다.
자, 이렇게 해서 너는 네 인생이 언제 “도약하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 질문에 답해주었다.
네 인생을 “도약하게” 하려면 먼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아주 명확해져야 한다. 자신이 되고 싶고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하라. 이에 대한 네 생각이 아주 명확해질 때까지 자꾸자꾸 생각하라. 그렇게 해서 네 생각이 아주 명확해지면, 다른 것들은 일체 생각하지 마라. 어떤 다른 가능성도 생각하지 마라.
네 의식구조에서 부정적인 생각들을 모조리 떨쳐버려라. 모든 비관주의를 잊고, 모든 의식을 버리고, 모든 두려움을 거부하라. 애초의 창조적인 생각을 굳게 지킬 수 있도록 네 마음을 훈련시켜라.
네 생각들이 명확하고 확고부동할 때, 그것들을 진리라고 말하기 시작하라. 그것들은 큰소리로 외쳐라. 창조력을 불러오는 위대한 명령, 곧 ‘나는I am’ 이용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을 진술하라. “나는”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창조력을 지닌 진술이다. “나는”이란 말 다음에 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말 다음에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은 그 체험들에 시동을 걸고, 그 체험들을 볼러내며, 그 체험들을 네게 가져다준다.
우주가 아는 작동법으로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우주가 아는, 취할 방도로 이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우주는 호리병 속에 든 요정(아라비아 동화에 나오는 요정으로 주인이 무슨 명령을 내리든 그대로 실행한다-옮긴이)처럼 “나는”에 응답한다.
당신은 마치 저한테 빵 한 덩어리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듯, “모든 의심을 버리고, 모든 두려움을 거부하고, 모든 비관주의를 잊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네 의식구조에서 부정적인 생각들은 모조리 떨쳐버려라”는 말씀은 “점심 먹기 전에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라”는 얘기나 다를 바 없이 들립니다. 그건 실로 엄청난 주문입니다.
생각을 길들이고 다스리는 건 보기만큼 어렵지 않다.(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고.) 그것은 오로지 훈련의 문제이고 열의의 문제이다.
그 첫단계는 네 생각을 점검하는 법을 배우는 것,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들, 어떤 것에 대해 네 가장 고귀한 관념을 부정하는 생각들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면, 다시 생각하라! 나는 네가 문자 그대로 이렇게 하길 바란다. 네가 자신이 우울하고 곤경에 빠져 있으며,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좋은 일도 생길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다시 생각하라. 세상을 좋지 않은 사건들로 가득찬 몹쓸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하라. 자신의 삶이 조각나고 있어서 두 번 다시 그것을 도로 모을 수 없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하라.
너는 이렇게 하도록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네가 자신을 얼마나 잘 훈련시켰는지 보라!)
고맙습니다. 저로서는 그 과정을 그토록 명확하게 시작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일이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쉽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제 생각엔 말입니다.
좋다. 네가 재음미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해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많은 생이 남아 있다.
5
신에게 이르는 참된 길은 어떤 것입니까? 일부 요가 수행자들이 믿듯이 극기(克己)로 가능합니까? 그리고 고행이라고 하는 것은요? 많은 금욕주의자들이 말하듯이 고행과 봉사가 신에게로 가는 길인가요? 많은 종교들이 가르치듯이 우리는 “선해져야” 천국에 가게 되나요? 아니면 많은 뉴에이지 주창자들이 말하듯이 우리는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온갖 규칙들을 어기거나 무시하고, 전해오는 모든 가르침을 제쳐두고, 온갖 방종에 빠지는 것으로 해탈에 이르게 되나요? 어느 쪽입니까? 엄격한 도덕 기준들입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대로 하라입니까? 전해오는 가치들입니까, 아니면 내키는데로 만들어내라입니까? ‘십계명’입니까, 아니면 ‘깨달음으로 가는 일곱단계’입니까?
너는 그것이 이 길 아니면 저 길이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모든 것일 수는 없는가?
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묻고 있고요.
그럼 네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끔 대답해주리라. 너는 이미 네 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나는 내 말을 귀담아듣고 내 진리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겠다.
신에게로 이르는 길이 무엇이냐고 열렬히 묻는 모든 마음들에게 그 길을 보여주겠다. 그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가슴벅찬 진리를 주리라. 너희 정신의 여정이 아닌 너희 마음의 길을 따라 내게로 오라. 너희 정신으로는 결코 나를 찾지 못하리니.
너희가 참으로 신을 알고자 한다면 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에도 네 질문이 대답을 간절히 구하고 있으니, 나는 그 질문공세에서 벗어나지 않겠노라.
우선 나는 너희를 깜짝 놀라게 하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민감한 감성을 건드릴 진술에서 시작하겠다. 십계명 따위는 없다.
오, 맙소사, 없다구요?
그렇다, 없다. 내가 누구에게 명령한단 말인가? 나 자신에게? 게다가 왜 그런 계명들이 필요하단 말인가?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있는데.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것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내가 계명들을 선포했다면 그것들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겠는가? 어떻게 내가 어떤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한 나머지 명령까지 내리고, 또 그러고 나서는 지키고 앉아서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을까봐 조바심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왕이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어떤 통치자가?
그러나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왕도 통치자도 아니다. 나는 단지 창조주일 따름이며, 경외스럽게도 창조주일 따름이다. 하지만 창조주는 지배하지 않는다. 그저 창조하고 또 창조한다. 계속해서 창조하기만 한다.
나는 너희를 내 형상대로, 내 닮은꼴로 창조했고, 축복했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몇가지 약속과 서약을 했다. 나는 너희에게 나와 하나될 때 너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평이한 언어로 말해준 바 있다.
너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구하는 자다. 모세 역시 네가 지금 그러하듯이, 내 앞에 서서 대답을 구했다. 그는 외쳤다. “오, 제 조상들의 신이시여, 제 신 중의 신이시여, 제게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제가 제 백성들에게 말할만한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우리가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지금 네게 온 것처럼. 나는 한가지 성스러운 계약, 영원히 유효한 한가지 약속, 확실하고 틀림없는 한가지 서약을 갖고서 모세에게 갔다. “제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모세는 푸념하듯 물었다. 나는 “내가 네게 그렇게 말했기에. 너는 ‘신의 말(言約)’을 갖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신의 말은 명령이 아니라 계약이었다. 그 약속은 이렇다.......
열가지 계약
너희는 다음과 같은 징후들, 표시들, 너희 자신의 변화들을 갖게 될 것이기에, 너희가 신에게 이르는 길로 들어섰다는 걸 알게 될 것이며, 신을 찾아냈다는 걸 알게 되리라. 왜냐하면,
1.너희는 너희의 온 마음과 온 정신과 온 영혼을 다해 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에. 그리하여 내 앞에 다른 신을 세우지 않을 것이기에. 너희는 더 이상 인간의 사랑도 돈도 권력도 숭배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것들과 관련된 어떤 상징물도 숭배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너희는 아이가 장난감들을 치워버리듯 그것들을 치워버릴 것이다. 그것들이 보잘 것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갖고 놀 나이가 지났기 때문에.
그리고 너희는 자신의 신에게 이르는 길로 들어섰다는 걸 알게 되리라. 왜냐하면,
2. 너희는 신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에. 또 하찮은 일들로 내게 호소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너희는 말의 힘과 생각의 힘을 이해할 것이며, 속된 방식으로 신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이름을 함부로 쓰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내 이름, 그 위대한 “나는”은 결코 헛되이(즉 아무 성과없이)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신을 찾아냈을 때, 너희는 그것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또 다른 징후들도 주겠노라.
3.너희는 나를 위해 하루를 비워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며, 그 날을 성스러운 날이라 부르게 되리라. 나를 위해 하루를 지키는 것은 너희가 자신의 환상 속에 오래 머물지 않고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자신에게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그러고 나면 너희는 얼마 안가 모든 날을 안식일이라 부를 것이며, 모든 순간을 성스럽다 할 것이다.
4.너희는 너희 어머니 아버지를 공경하게 될 것이다.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너희가 아버지자 어머니인 신을 공경할 때, 너희는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신을 공경하고 지상의 네 부모를 공경할(그들은 네게 생명을 주었기에)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모든 사람을 공경하게 될 것이다.
5.너희는 자신이 살인(즉 까닭 없는 고의적인 살인)하지 않을 것임을 자각할 때, 신을 찾았다는 걸 알리라. 어떤 식으로도 다른 생명을 끝장낼 수 없다(모든 생명은 영원하다)는 걸 이해할 때, 너희는 가장 성스러운 정당화 없이는 어떤 육신도 끝장내지 않을 것이며, 생명 에너지를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꾸지도 않을 것이다. 너희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경외심으로 식물과 나무와 동물을 비롯한 온갖 생명체들을 다 존중할 것이며, 최상의 선을 위해서만 그것들을 건드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다음과 같은, 이것의 다른 징후들도 보내줄 것이다. 너희가 그 길에 들어섰다는 걸 알 수 있도록.
6.너희는 부정직과 기만으로 사랑의 순수함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불손한 짓이기에. 너희에게 약속하노니, 너희가 신을 찾아냈을 때 너희는 이런 불순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7.너희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또 남을 속여서 빼앗지도 않을 것이며, 나쁜 짓을 눈감아주지도 않을 것이고,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남을 해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짓들은 도둑질이기에. 너희에게 약속하노니, 너희가 신을 찾아냈을 때 너희는 훔치지 않으리라.
또 너희는.......
8.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여 거짓으로 증언하지 않을 것이다.
또 너희는.......
9.너희 이웃의 배우자를 탐내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네 배우자임을 아는데 왜 굳이 네 이웃의 배우자를 원하겠는가?
또 너희는.......
10.너희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재물이 네 것일 수 있고, 네 모든 재물이 세상 것임을 아는데 왜 굳이 네 이웃의 재물을 원하겠는가?
이런 징표들을 볼 때 너희는 자신이 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았음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로 신을 찾는 그 누구도 더 이상 이런 짓들을 하지 않으리라고 내가 약속했기에, 이런 짓들을 계속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이 약속들은 너희를 속박하지 않고 너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들은 내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신은 신이 창조한 것에 대해 명령하지 않는다. 신은 다만 신의 아이들에게, 이것이 너희가 집으로 오고 있음을 알아내는 방법이라고 말할 뿐이다.
모세는 더없이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제게 징표를 보여주십시오.” 모세는 지금 네가 물은 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 누구나 어디서나 물었던 바로 그 질문을. 내 대답 역시 영원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명령이 아니었으며,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명령한단 말인가? 내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누구를 벌한단 말인가?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천국에 가기 위해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건 아니군요.
“천국에 가는” 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너희가 이미 그곳에 있음을 아는 것만이 있을 뿐이며, 수고나 애씀이 아니라 받아들임과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이 이미 서 있는 곳으로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너희가 있는 곳에서 떠나야하는데 그것은 그 여행 전체의 목적을 좌절시킨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기네가 있고 싶은 곳에 가려면, 자기네가 지금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역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국에 가려고 천국을 떠난다. 그래서 지옥을 지나가고.
깨달음이란 어디로 갈 데가 없다는 것과,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 지금 있는 꼭 그대로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너희는 어디에도 있지 않은 곳으로 가고 있다.
너희가 말하는 식의 천국이란 어디에도nowhere 없다. 이 단어에서 w와 h 사이를 약간 벌려보라. 그러면 너희는 천국이 지금now....... 여기here라는 걸 알 것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누구나 다요! 그런 얘기가 절 미치게 합니다! “천국이 지금 여기 있다”면 어떻게 제가 그걸 모를 수가 있죠? 어째서 저는 그걸 느끼지 못하죠? 게다가 세상은 왜 이렇게 엉망진창입니까?
네가 김빠져하는 건 이해가 간다. 이 모든 걸 이해하려는 건, 누군가에게 이걸 이해시키려는 일만큼이나 김빠지는 일일 테니까.
우와! 잠깐만요! 신도 김빠져한다고 말씀하시려는 건가요?
김빠져하는 걸 누가 발명했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너는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걸 네가 체험할 수 있다고 상상하느냐?
분명히 얘기하는데, 너희가 겪는 체험은 모두 내가 겪는 것이다. 너희를 통해 나 자신을 체험하고 있는 걸 모르겠느냐?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난다고 생각하느냐?
너희가 없으면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너희를 창조했다.
그런데 나는 한 장(章) 속에서 나에 대한 네 모든 환상을 깨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네가 신이라 부르는, 가장 숭고한 형태의 나는 짜증스러움을 체험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노라.
휴! 그 편이 좀 낫군요. 당신은 잠시 나를 질겁하게 했어요.
하지만 그건 내가 김빠져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단지 내가 그러기를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 역시 나와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저, 김빠져하든 않든 간에 여전히 천국이 어떻게 지금 여기 있을 수 있는지, 그런데도 제가 왜 그걸 체험하지 못하는지 궁금합니다.
자신이 모르는 걸 체험할 수는 없다. 그리고 너희는 천국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바로 지금 “천국”에 있음을 모른다. 보다시피 너희에게 이것은 악순환이다. 너희는 자신이 모르는 걸 체험할 수 없고, 즉 체험할 방법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고, 너희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없다.
내가 이런 설명을 하는 건 너희가 체험하지 못한 것을 알아내고, 그리하여 그것을 체험해보라는 것이다. 앎은 체험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그런데 너희는 그 반대라고 상상한다.
사실 너희는 너희가 체험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단지 자신이 안다는 걸 모를 뿐이다.
예컨대 너희는 신이 존재함을 안다. 하지만 자신이 그걸 안다는 걸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너희는 늘상 서성거리며 신을 체험하길 기다리고 있다. 너희가 신을 체험하는 동안에도 줄곧. 결국 너희는 알지 못한 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체험을 전혀 하지 못한 것과 같다.
이런. 우리는 여기서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어요.
그렇다. 그리고 계속 원 둘레를 도는 대신 아마도 우리는 원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원이 꼭 악순환의 원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숭고한 원이 될 수도 있다.
참된 영적 삶을 살려면 극기가 꼭 필요한가요?
그렇다. 궁극에 가서 모든 영혼은 사실이 아닌 걸 버리며, 너희가 영위하는 삶에서는 너희와 나와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기에. 하지만 자기 부정이라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극기는 불필요하다.
참된 선각자는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다. 참된 선각자는 그것을 그저 옆으로 제쳐놓을 뿐이다. 더 이상 쓸모없는 것들을 처리할 때처럼.
너희에게 자신의 욕구들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저 그것들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전자의 실천은 엄격한 훈련처럼 여겨지지만, 후자의 실천은 즐거운 연습처럼 여겨진다.
신을 알려면 세속적인 온갖 열정들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희가 저항하는 건 지속되고, 살펴보는 건 사라진다.
세속적인 온갖 열정들을 극복하려고 열심히 애쓰는 사람들은 종종 그 일에 너무 열심히 매달린 나머지, 그것 자체가 그들의 열정이 되고 만다. 그들은 “신을 향한 열정”, 신을 알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똑같은 열정일 뿐이어서, 어느 한 열정을 다른 열정으로 바꾸는 것이지, 열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열정을 느끼는 거에 대해 열정을 느낀다는 판단을 내리지 마라. 그저 그것을 알아채고 난 다음, 되고자 하는 존재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것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는지만 알아보라.
너희는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너희는 순간순간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있다. 너희는 주로 자신이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게 열정을 느끼는가와 관련된 선택들을 통해 이것을 결정한다.
소위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은 흔히 모든 세속적인 열정, 모든 인간적인 욕구들을 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해온 건 그런 열정과 욕망을 이해하고, 그것이 환상임을 깨닫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열정들에서 비켜서는 것이었다. 그 동안에도 계속해서 열정이 자신에게 안겨준 환상, 곧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사랑하면서.
'영성수행 비전 > 신과 나눈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과 나눈 이야기 1 (5) (0) | 2018.02.07 |
---|---|
신과 나눈 이야기 1(4) (0) | 2018.02.07 |
신과 나눈 이야기 1(2) (0) | 2018.02.07 |
신과 나눈 이야기 1(1) (0) | 2018.02.07 |
신과나눈 이야기 가이드북 (0) | 2018.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