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1(2)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1 (2)
삶이 일종의 학교 같은 것이고, 여기서 우리는 특정한 교훈들을 배우게 되어 있으며, 일단 “졸업”하고 나면 더 이상 육체에 얽매이지 않고 더 큰 것들을 추구해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는 말인가요?
그것은 인간의 체험에 근거한, 너희 신화의 또 다른 부분이다.
삶은 학교가 아닌가요?
그렇다.
우리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니고요?
그렇다.
그럼 우리는 왜 여기 있죠?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고 재-창조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되풀이해서 말해주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 사실 너희 스스로 ‘자신’을 창조해보지 않고서는 그 말을 믿을 수도 없으니까.
뭐가 뭔지 잘 모르겠군요. 학교 얘기로 다시 되돌아가보도록 하죠. 저는 많은 선생들로부터 삶은 일종의 학교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당신이 그걸 부정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교는 너희가 알고자 하는 어떤 걸 모를 때 가는 곳이다. 너희가 어떤 걸 이미 알고 있고, 너희가 원하는 것이 그 앎을 체험하고 싶은 것뿐이라면, 너희가 가야 할 곳은 학교가 아니다.
삶(너희의 표현대로)이란 너희가 이미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기회이다. 이걸 하기 위해 뭔가를 배울 필요는 전혀 없다. 너희는 그저 이미 알고 있는 걸 기억해내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렇게 시작해보자. 영혼, 너희의 영혼은 언제나 알아야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영혼에게 숨겨진 것, 미지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앎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혼은 체험하고자 한다.
네가 자신의 관대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관대함을 펼치는 뭔가를 하지 않는다면, 너는 오직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가 자신의 친절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면, 너는 자신에 관한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 영혼이 지닌 유일한 갈망은 자신에 관한 가장 위대한 개념을 가장 위대한 체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개념이 체험이 되기 전까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색에 불과하다. 나는 나 자신에 관해 오랫동안 사색해왔다. 너희와 내가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이세상 나이의 몇배나 되는 이 우주의 나이보다 더 오랫동안. 그러니 나 자신에 관한 내 체험이 얼마나 짧고 얼마나 새로운지 족히 짐작이 가리라!
또 다시 뭔가 뭔지 모르겠군요. 당신 자신에 관한 당신의 체험이라구요?
그렇다. 나 자신에 관한 내 체험 말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해주마.
태초에 ‘존재’Is는 존재했던 모든 것all there was이었고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재 전체’ All That Is는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존재 전체’가 곧 존재했던 모든 것이었고 그 밖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리하여 ‘존재 전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 전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에.
이것은 신비론자들이 시간이 시작된 이후로 줄곧 다뤄온 저 위대한 ‘존재/부재Is/Not Is'의 등식이다.
이제 ‘존재 전체’는 자신이 이미 존재했던 모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더없는 장대함을 체험이 아닌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러나 그것이 갈망한 것은 자신에 대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그토록 장대하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나 “장대하다”는 용어 자체가 상대적인 용어이기에 그런 체험은 불가능했다. ‘존재 전체’는 비(非)존재가 없이는 장대함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비존재가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겠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 말씀 계속하시죠.
좋다.
‘존재 전체’가 알았던 단 한가지는 자기말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기 외부에 있는 어떤 준거지점에 비추어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준거점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오직 단 하나의 준거점만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유일한 거점, 즉 “존재-부재”, ‘있음-없음’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인 전체’는 체험으로 자신을 아는 쪽을 택했다.
이 에너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관찰되지 않는, 따라서 다른 어떤 에너지도 파악할 수 없는 이 순수 에너지는 더없는 장대함으로 자신을 체험하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이렇게 하려면 내부의 준거점을 이용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의 어떤 부분도 필연적으로 전체보다 못한 게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단순히 자신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기만 해도 전체보다 못한 각 부분은 자신의 나머지를 돌아보고 그것의 장대함을 목도할 수 있으리라는, 아주 정확한 추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존재 전체는 영광스런 한 순간에 자신을 이것과 저것인 것으로 나누었다. 처음에 이것과 저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존재했다 그럼에도 둘은 함께 존재했다. 그 어느 쪽도 아닌 전체가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불현 듯 여기 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 그리고 여기도 저기도 있지 않지만 여기와 저기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건 무nothing이고 공간을 지탱해주는 건 비공간이며, 부분을 지탱해주는 건 전체다.
이걸 이해할 수 있겠느냐?
내 설명을 따라오고 있는가?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믿고 안믿고는 차치하고요. 당신은 아주 명쾌한 보기를 들어가면서 설명하셨기에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 더 앞으로 나가보기로 하자. 지금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이 무(無)를 신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신이 아닌 어떤 것, 곧 “무”가 아닌 모든 것이 있다는 걸 뜻하므로 정확하지 않다. 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망라한 ‘전부’이다. 그러므로 나를 이렇게 ‘위대한 보이지 않음’, 즉 ‘무’ 또는 ‘사이 공간Space Between'으로 설명하는, 동양 특유의 신에 대한 신비주의 정의 역시 신을 보이는 모든 것으로 규정하는, 서양 특유의 실용주의 설명만큼이나 정확하지 않다. 나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다.
이제 신은 “여기” 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을 창조하여, 신 스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내부로부터 일어난 이 엄청난 폭발의 순간에 신은 상대성relativity을 창조했으며 그것은 일찍이 신이 자신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따라서 관계relationship는 신이 일찍이 너희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은 나중에 상세히 논의하기로 하자.
그렇게 해서 ‘무’로부터 ‘모든 것’이 솟아났다. 덧붙여 말하면 이것은 너희 과학자들이 빅뱅 이론이라 부르는 것에 딱 들어맞는 영적인 사건이었다.
그 모든 요소들이 앞으로 내달릴 때 시간이 창조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처음에는 여기 있다가 다음에는 저기 있으니,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는 데 걸리는 기간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존재의 보이는 부분들이 자신들을 서로 “관련된” 것으로 정의하기 시작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 역시 그렇게 했다.
신은 사랑이 존재하려면, 또 자신을 순수한 사랑으로 인식하려면 그것의 대립물도 존재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신은 자진해서 그 위대한 극단, 사랑의 절대 대립물, 곧 사랑이 아닌 모든 것, 오늘날 두려움이라 부르는 것을 창조했다. 두려움이 존재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사랑은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그 대립물 사이의 이원성을 창조한 이 사건이 바로 인간들이 여러 신화들 속에서 악의 탄생이니 아담의 타락이니 사탄의 반란 따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너희는 순수한 사랑을 신이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던 것처럼 비천한 두려움을 소위 악마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다.
이 지구의 몇몇 사람들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투쟁과 전쟁, 천사의 군대와 악마의 전사들, 선과 악의 힘, 빛과 어둠의 힘들이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갖춘, 꽤 정교한 신화들을 만들어냈다.
이 신화들은 인류가 그 영혼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으나, 그 정신으로는 좀처럼 인식하기 힘든 우주적 사건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주기 위해서 생겼다.
신은 자신의 나눠진 변형으로 우주를 있게 하면서 순수 에너지로부터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만들어냈다.
달리 말해 그렇게 해서 신은 물질 우주뿐만 아니라 형이상의 우주까지도 창조한 것이다. 존재/부재 등식 중에서 부재를 이루는 신의 부분 역시 전체보다 작은, 무한히 많은 수의 단위들로 폭발했다. 이 에너지 단위들을 너희는 영혼이라 부른다.
너희의 종교 신화들 중 일부는 이 사건을 “아버지 신”이 많은 영적 자식들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스스로 번식하는 생명체라는, 인간의 체험에 견준 이같은 비유는 현실에서 일반 대중에게 갑작스런 출현이라는 개념, 즉 “하늘 왕국”에 무수한 영혼들이 갑작스레 존재하게 되었다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보면 너희 신화가 말하는 이야기들은 궁극의 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전체를 이루는 무수한 영혼들은 우주적인 의미에서 내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나눈 것은 나 자신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줄 내 부분들을 충분히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주임을 체험으로 아는 방법은 딱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 무수한 부분들 각각에게(내 영적인 자식들 모두에게) 전체인 내가 갖고 있는 창조력과 똑같은 창조력을 부여해줬다.
너희의 여러 종교가 너희는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꼴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 말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신체가 서로 닮았다는 뜻이 아니다(신은 특정 목적을 위해 택하는 물질 형상이 어떤 것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말은 우리의 본질이 같다는 뜻이다. 우리는 같은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같은 성질”이다! 우리는 똑같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으며, 허공에서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비롯하여 같은 능력들을 지니고 있다.
내가 영적인 자식인 너희를 창조한 것은 나 자신을 신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나로서는 너희를 통하는 것 말고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에 대한 내 목적은 너희가 자신을 나(神)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리고 이미 여러 차례 말해왔다).
이것은 굉장히 간단해보이지만, 더 들어가면 아주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너희가 자신을 나로 인식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방법은, 우선 너희 자신을 나 아닌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야기가 아주 미묘해질테니 내 얘기를 따라오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준비되었느냐?
그런 것 같습니다.
좋다. 이런 설명을 요구해온 건 너라는 걸 명심하라. 너는 여러해 동안 이것을 고대해왔다. 너는 신학 교리나 과학 이론이 아니라 속인(俗人)들의 평이한 용어로 이런 설명을 요청해왔다.
그랬죠-전 제가 뭘 요구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네가 청해온 것이니 받아들일 것이다.
자, 이제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논의를 위한 토대로 신의 자식이라는 너희의 신화 모델을 이용해보자. 그것이 너희에게 친숙한 모델이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면에서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 인식이라는 이 과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자.
내가 내 모든 영적인 자식들에게 자신들을 내 부분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그냥 그들에게 얘기해주는 것뿐이다. 나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영혼이 자신을 그냥 신 또는 신의 일부, 신의 자식, 또는 하늘왕국의 상속자(또는 너희가 이용하는 신화가 어떤 것이든 간에)로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이미 설명했듯이 뭔가를 안다는 것과 그것을 체험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영혼은 자신을 체험으로 알고자 갈망했다(내가 그랬던 꼭 그대로!). 개념으로 안다는 것만으로는 너희에게도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온 우주에서 가장 비범한 착상이며 가장 빛나는 합작품이다. 내가 여기서 합작품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너희 모두가 나와 더불어 그 계획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계획하에서, 순수 영혼인 너희는 이제 막 창조된 물질 우주로 들어가게 된다. 물질성이야말로 너희가 개념으로 아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해주는 유일한 길이기에. 내가 맨 먼저 물질 우주와 우주를 지배하는 상대성 체계와 그밖의 온갖 피조물들을 창조한 까닭도 사실 거기에 있다.
내 영적 자식들인 너희가 일단 물질 우주로 들어가면, 너희는 자신에 관해 아는 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희는 그 대립물을 알아야 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너희는 키가 작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자신이 키가 크다는 걸 알 수 없다. 너희가 말랐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뚱뚱함이라는 자신의 일부를 체험할 수 없다.
궁극의 논리에 따르면, 너희는 너희 아닌 것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자신을 자신으로서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이, 즉 너희 아닌 것이 너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의 목적이자 모든 물질적 삶의 목적이다.
이제 궁극의 앎에서, 곧 너희 자신을 ‘창조주’로 인식하는 경우에, 너희는 직접 창조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을 창조주로서 체험할 수 없다. 또 너희가 자신을 창조하지 않을uncrate 때까지는 너희는 자신을 창조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기 위해서 너희는 먼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내 말을 잘 따라오고 있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 상태에 계속 머무르라.
물론 너희가 너희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너희는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러할, 바로 그것(순수하고 창조할 수 있는 영혼)일 뿐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을 벌였다. 즉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스스로 잊게 만든 것이다.
너희는 물질계로 들어오면서 자신에 관한 기억을 지웠다. 덕분에 너희는, 말하자면 성(城) 안에서 그냥 깨어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너희가 완전한 선택권을 가진 존재, 즉 규정상 신(神)인 존재로서 자신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너희가 신의 일부라는 얘기를 듣는 데서가 아니라 신의 일부가 되고자 선택하는 행동 속에서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문제라면 너희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겠는가? 너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너희가 내 자식이 아닐 수는 없다. 하지만 너희는 잊을 수는 있다.
너희는 지금껏 언제나 신성한 전체의 신성한 일부, 그 몸체의 한 구성부분member이었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전체와 재결합하는 행동, 신에게로 돌아가는 행동을 기억remembrance이라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사실상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재구성하는re-member 쪽을, 너희의 전체인 내(神) 전체를 체험하기 위해 너희의 여러 부분들과 함께 결합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너희의 직무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미 알고 있으니) ‘자신’을 재구성하는(기억하는-옮긴이)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깨우쳐주는remind 것(즉 그 사람들에게 다시 마음쓰는re-mind 것)이 너희의 직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훌륭한 영혼의 스승들이 하나같이 해온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너희의 유일한sole 목적이다. 다시 말해 너희 영혼soul의 목적이다.
맙소사, 이건 정말 단순하군요. 또 정말....... 대칭적이고, 제 말은 모든 게 다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는 겁니다! 갑자기 모든 게 다 그렇게 맞아들어가다니! 지금 저는 예전엔 한번도 끼워맞춰보지 못했던 그림을 보고 있어요.
좋아. 좋아. 이 대화의 목적이 바로 그거니까. 너는 내게 대답을 청해왔고, 나는 네게 대답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너는 이 대화를 책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만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네가 할 일의 일부다. 자, 너는 인생에 관해 던질 많은 질문과 의문들을 갖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 기반을 다져놓았고, 다른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터전을 깔아놓았다. 이제 다른 질문들로 넘어가보기로 하자.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이제까지 다뤄온 것들을 네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금방 선명해질 터이니.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습니다. 묻고 싶은 것들이 워낙 많아서 우선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들, 가장 두드러진 것들에서 시작해야 할 듯싶습니다. 예컨대 왜 세상이 지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나 하는 문제 같은 거요.
그것은 인간이 신에게 던진 질문들 가운데서 가장 자주 물어왔던 것이다. 인간은 그 질문을 태초부터 던져왔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너희는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알고 싶어해왔다.
그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의 전형은 대체로 이렇다. 만일 신이 더없이 완벽하고 더없이 애정깊은 존재라면, 왜 전염병과 기근, 전쟁과 질병, 지진과 회오리바람과 태풍을 비롯한 온갖 자연재해, 개인의 극심한 불행과 전세계의 재난을 창조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주의 깊은 신비와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 속에 들어 있다.
나는 너희 주변에 너희가 완벽함이라 부르는 것만을 창조하여 내 선함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나는 너희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할 수 없게 하여 내 사랑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미 설명했다시피 너희는 사랑 아님not loving을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는 사랑을 증명할 수 없다. 절대계를 제외하고는 대립물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절대계는 너희에게도 내게도 충분치 못했다. 나는 거기에서 언제나 그대로임 속에 존재했으며, 너희가 나온 곳도 거기이다.
절대계 속에는 앎만 있을 뿐 체험은 없다. 앎은 신성한 상태이지만 가장 위대한 기쁨은 존재 속에 있다. 존재는 오로지 체험한 뒤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순서대로 펼쳐 놓으면 앎, 체험, 존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성삼위일체’ ‘삼위일체’인 신이다.
성부(聖父)는 모든 이해의 부모요, 모든 체험의 원천인 앎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자(聖子)는 아버지가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의 체현 또는 육화(肉化 embodiment)인 체험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신(聖神)은 아들이 그 자신에 관해 체험한 모든 것의 탈육화(脫肉化 disembodiment)인 존재다. 그것은 오직 알고 체험한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질 때만 가능한, 소박하면서도 절묘한 있음is-ness이다.
이 소박한 있음은 더없는 기쁨이다. 그것은 알고 체험한 뒤에 오는 신의 상태이며, 신이 태초에 갈망했던 상태이다.
물론 너는 신을 아버지-아들로서 설명하는 게 성(性)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설명해야 하는 단계는 이미 지난 사람이다. 나는 여기서 너희의 가장 최근 경전들에 나오는 비유들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보다 훨씬 더 앞서 나온 경전들은 이 비유를 어머니-딸의 관계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정확하지 않다. 너희 사고방식에서는 그 관계를 부모-자식 관계로 보는 게 제일 좋을 것이다. 아니면 생기게 하는 것과 생긴 것 간의 관계로 보거나.
삼위일체의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하면 다음과 같은 관계가 이루어진다.
생기게 하는 것/생긴 것/존재하는 것.
이 ‘삼중의 실체’는 신의 표식이다. 그것은 신성한 패턴이다. 하나 속의 셋은 숭고한 영역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든, 신과 의식이든, 혹은 그 외의 다른 모든 미묘한 관계들을 다루는 문제에서, 너희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반면에 너희는 삶의 모든 조악한 관계들에서는 이 삼위일체 진리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삶의 미묘한 관계들을 다루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런 관계들 속에서 삼위일체 진리를 인식하고 있다. 너희 종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삼위일체 진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표현해왔다. 너희 정신과 의사들 중 일부는 초의식과 의식과 잠재의식이라는 용어들을 쓰고, 너희 심령주의자들 중 일부는 정신과 육체와 영혼을 이야기하며, 너희 과학자들 중 일부는 에너지와 물질과 에테르(氣 또는 精氣를 말함-옮긴이)를 본다. 너희 철학자들 중 일부는 어떤 것이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 모두 진실일 때만 너희에게 진실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시간을 말할 때 너희는 오로지 세 가지 시간, 곧 과거 현재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너희의 지각 속에는 전(前)과 지금과 후(後)라는 세 순간이 존재한다. 우주 속의 지점들을 다루든 자기 방 안의 지점들을 다루든 간에, 너희는 공간 관계의 면에서 여기와 저기와 이것들 간의 사이 공간을 인식한다.
조악한 관계들에서는 너희는 어떤 “사이in-between”도 인식하지 못한다. 숭고한 영역의 관계들은 변함없이 3개조(組)인 반면 조악한 관계들은 언제나 2개조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왼쪽-오른쪽과, 위-아래, 크다-작다, 빠르다-느리다, 덥다-춥다, 그리고 일찌기 창조된 것 중에서 최대의 쌍인 남성-여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쌍들에는 사이라는 게 전혀 없다. 모든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나, 이 양극단 중 어느 하나의, 더하거나 덜한 변형(變形)일 뿐이다.
조악한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어떤 개념도 그 대립물의 개념화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너희의 일상 체험 대부분이 이런 현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미묘한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존재하는 어떤 것도 대립물을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 원을 그리며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나아간다.
시간이 바로 그런 절묘한 영역이다. 거기에서 소위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들은 이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즉 그것들은 대립물이 아니라 같은 전체의 부분들이요, 같은 개념의 진행들이며, 같은 에너지의 원들이고, 변치 않는 같은 진리의 측면들이다. 만일 여기에서 너희가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너희의 결론이 옳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점을 논의할 때가 아니다. 나중에 시간 전체 개념을 탐구할 때 훨씬 더 상세하게 이 문제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조악한 물질성의 영역 속에 있기 때문에 이와 달리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진과 태풍, 홍수와 회오리, 그리고 그 밖의 소위 자연재해라는 것들은 원소(element)들이 한 극에서 다른 한 극으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 탄생-죽음의 전체 순환 역시 이런 움직임의 일부이다. 이 움직임은 생명의 리듬이다. 조악한 현실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이 리듬을 따른다. 생명 그 자체가 하나의 리듬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파동이고 진동이며, 존재하는 전체의 심장부에서 울려나오는 고동이다.
병은 건강의 대립물로, 너희 명령에 따라 너희의 현실에서 드러난다. 어떤 수준에서든 너희가 자신을 아프게 만들지 않았는데 아파질 수는 없으며, 건강해지기로 그저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한순간에 좋아질 수 있다. 개인의 극심한 불행은 그 개인 스스로 선택한 방응이며, 전세계의 재난들은 세계의식의 결과이다.
너희의 질문에는 이런 사건들을 선택한 게 나(神)이고, 내 의지와 바램 때문에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건들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나는 그저 너희가 그렇게 하는 걸 관조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건들을 막을 일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너희 의지를 방해하는 것이고, 너희의 신 체험, 곧 너희와 내가 함께 선택한 체험을 도로 빼앗는 것이 되기에.
그러니 너희가 세상에서 나쁘다고 말하는 어떤 것도 비난하지 마라.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너희가 그것의 어떤 면을 나쁘다고 판단했는지, 그리고 정녕 나쁘다면 그것을 바꾸기 위해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보라.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향해 이렇게 물으면서 생각해 보라. “지금 이런 재난을 당하면서 나는 자신의 어떤 부분을 체험하고자 하는가? 나는 존재의 어떤 측면을 불러내고자 하는가?” 왜냐하면 삶의 모든 것은 너희 자신의 창조 도구일 뿐이며, 삶의 모든 사건은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자신’이 될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영혼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므로, 이 우주에는 어떤 희생자도 없으며 오로지 창조자들만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되리라. 이 행성을 걸었던 모든 위대한 선각자들Masters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희가 그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지 않은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그들 중 다수가 진실로 박해받았는데도 말이다.
하나하나의 영혼은 모두 선각자들이다. 자신의 기원과 자신의 유산을 기억하지 못하는 영혼들은 있긴 하지만, 개개의 영혼은 지금이라는 순간마다 자신의 더없이 고귀한 목적에 맞고, 가장 빨리 자신을 기억해내는 데 적합한 상황과 조건을 창조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걷는 업보의 길을 판단하려 들지 마라. 너희는 영혼의 계산서 속에서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 알지 못하니, 남들의 성공을 질투하지도 말고, 남들의 실패를 동정하지도 마라. 어떤 것을 재난이라 부르지도 말며, 기쁜 일이라고 하지도 마라. 그것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판단하거나 목격할 때까지는. 한 죽음이 수천의 생명을 살릴 때 그 죽음이 과연 재난인가? 한 삶이 비탄만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과연 기쁜 일인가? 그러나 너희는 이런 판단조차 내리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남에게 충고하지 말며,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충고하게끔 내버려둬라.
이것은 남들이 도움을 청할 때 무시하라거나, 너희 영혼이 어떤 환경이나 조건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걸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하는 동안, 꼬리표 붙이기나 판단 내리기를 피하라는 뜻이다. 각각의 상황은 모두 하나의 축복이며, 체험 하나하나마다에는 진짜 진정한 보물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 자신이 빛인 걸 아는 한 영혼이 있었다. 이것은 새로 생겨난 영혼이어서 체험을 갈망했다. 그것은 “나는 빛이다. 나는 빛이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것의 어떤 앎도, 또 그것의 어떤 말도 그것의 체험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영혼이 생겨난 영역에는 빛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영혼이 다 위대했으며 모든 영혼이 다 장엄했고, 내외경스런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의 그 작은 영혼은 햇빛 속의 촛불같았다. 작은 영혼 자신이 그 일부인, 그 위대한 빛 속에서 그것은 자신을 볼 수도 없었고, 자신을 ‘참된 자신’으로 체험할 수도 없었다.
이제 그 영혼은 자신을 알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지내게 되었다. 그 바램이 너무나 커서 하루는 내가 이렇게 말했다. “작은 영혼이여, 네 그런 바램을 충족시키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아느냐?”
작은 영혼은 물었다. “오, 신이시여, 뭘 해야 합니까? 뭘요? 저는 뭐든지 다 할 겁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에게서 너를 떼내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 자신을 어둠이라 불러야 한다.”고 대답하자,
작은 영혼이 물었다. “오, 거룩한 분이시여, 어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가 아닌 것이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작은 영혼은 그 말뜻을 이해했다.
그리하여 작은 영혼은 전체에서 자신을 떼어냈으며, 거기다 또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는 일까지 해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이 영역에서 자신의 체험 속으로 온갖 종류의 어둠을 불러들이는 힘을 행사하여 그것들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 영혼은 더없이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아버지시여,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너희가 가장 암담한 순간에 소리치듯이 그렇게. 그러나 나는 한번도 너희를 버린 적이 없다. 나는 항상 너희 곁에 서 있다. 늘 변함없이 ‘참된 너희’를 기억시킬 채비를 갖춘 채, 너희를 집으로 불러들일 채비를 갖춘 채.
그러므로 어둠 속에 존재하는 빛이 되라. 하지만 어둠을 저주하지 마라.
그리고 너희가 자기 아닌 것에 둘러싸인 순간에도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고, 그같은 창조를 이룬 자신을 칭찬하라. 너희가 그걸 변화시키려고 애쓸 때조차도.
그리고 가장 큰 시련의 순간에 행하는 것이 최대의 성공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라. 너희가 창조하는 체험은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에 관한 진술이기에.
내가 너희에게 작은 영혼과 태양에 관한 이런 우화를 들려준 건 세상이 왜 이런 식인지 너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며, 모든 이들이 자신의 더없이 고귀한 본질에 관한 신성한 진리를 기억하는 그 순간, 세상은 한 찰라에 변화될 수 있다는 걸 너희가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지금, 인생은 학교이며 너희가 인생에서 관찰하고 체험하는 것들이 다 너희의 배움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에도 이런 견해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지만, 여기서 다시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너희는 배워야 할 어떤 것도 갖지 않은 채 지금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너희는 이미 알고 있는 걸 밝히기만 하면 된다. 그것을 밝힘으로써 너희는 그것이 제 기능을 다하게 만들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삶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그것에 목적을 부여한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삶을 거룩한 것으로 만든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나쁜 일들이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이란 말씀인가요? 이 세상이 재앙과 재난들조차 어떤 면에서 보면 ‘참된 자신’의 대립물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창조해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창조하는, 좀 덜 고통스런 방식,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덜 고통스러운 방식은 없나요?
너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그 하나하나가 다 좋은 질문들이다. 자, 그것들을 한번에 하나씩 다뤄보기로 하자.
아니다. 너희에게 일어나는, 소위 나쁜 일들을 다 너희가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처럼 자각된 감각으로는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너희 자신의 창조물들이다.
너희는 항상 창조하는 과정 속에 있다. 순간순간마다, 일분일분마다, 그리고 날마다. 너희가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는지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지금은 그것에 대한 내 이야기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라. 너희는 하나의 커다란 창조기여서 말 그대로 너희가 생각하는 속도만큼이나 재빠르게 새로운 현상들을 드러내간다.
일과 사건과 조건과 상황들은 모두 의식에서 창조된다. 한 개인의 의식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강력하다. 그렇다면 너희는 둘 이상의 의식이 내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어떤 종류의 창조 에너지가 분출될지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대중의식이라면? 우와! 그 힘은 너무나 막강하여 세계적인 중요성과 지구적인 결과를 갖는 사건들과 환경들을 창조할 수 있다.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방식으로, 너희가 그런 결과들을 선택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는 만큼이나 너희도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는다. 너희 역시 나처럼 그것들을 관찰하고, 그것들에 비추어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떤 희생자도 없고 어떤 악당도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선택으로 네가 희생되는 일도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너희가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들 전부를 너희 자신이 창조해냈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들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앞선 수준의 사고방식으로 모든 선각자들이 늦든 빠르든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일부라도 바꿀 힘을 얻는 것은 그들이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일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그따위 짓을 하는” 어떤 것이나 어떤 자가 저 밖에 있다는 관념을 즐기고 있는 한, 너희는 그것을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말할 때라야 비로소 너희는 그것을 바꿀 힘을 얻을 수 있다.
네가 하는 걸 바꾸는 게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바꾸기보다 훨씬 더 쉽다.
뭔가를 바꾸는 첫단계는 네가 그렇게 되도록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사 너희가 개인 차원에서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너희의 오성으로 이 말을 받아들이도록 하라. 그러고 나서는 어떤 것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진술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바꾸고자 노력하라.
어떤 행동을 하는 데는 딱 한 가지 이유가 있을 뿐이다. 즉 우주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술하는 것으로만.
삶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때 삶은 ‘자기’ 창조가 된다. 너희는 자신을 ‘자신’으로, 그리고 ‘항상 되고자 했던 자신’Who You've Always Wanted to Be으로 창조하기 위해 삶을 이용한다. 어떤 일을 하지 않는 이유 역시 딱 한가지뿐이다. 즉 그것이 더 이상 ‘되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진술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 그것은 더 이상 너희를 반영하지 않고, 더 이상 너희를 대변하지represent 않는다.(즉 그것은 너희를 재표출re-present시켜 주지 않는다.......).
만일 너희가 정확하게 재표출되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영원 속에 투영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과 맞지 않는, 삶의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은 너희가 선택한 것들이다. 잘못은 그것들을 선택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데 있다. 그것들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은 너희 자신을 나쁘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창조한 것이 너희 자신이기 때문에.
너희는 이런 꼬리표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나쁘다는 꼬리표를 달기 보다는 그것들이 너희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너희가 세상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게 바로 이 지적(知的), 영적(靈的) 부정직함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세상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받아들였다면, 혹은 책임감을 깊이 느끼기만이라도 했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다같이 책임감을 느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라는 바로 그 점이, 그것을 그토록 완벽한 고통을 만들고, 그토록 신랄한 역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자연재해와 재난들, 즉 회오리와 태풍, 화산폭발, 홍수 따위의 물질적 소동들을 특별히 네가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창조하는 것은 이런 사건들이 네 삶에 미치는 강도(强度)다.
우주에서는 그 어떤 분방한 상상력으로 네가 조장하고 창조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런 사건들을 창조해내는 것은 인류의 결합된 의식이다. 세상 전부의 공동 창조가 이런 체험들을 낳는다. 너희 각자가 하는 일은, 그것들이 뭔가 의미가 있다면 자신에게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것들과 관련해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판단하면서 그것들을 경험하며 지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영적 진화라는 목적을 위해 집단으로, 또 개인으로 너희가 체험하는 삶과 시간들을 창조하고 있다.
너는 이런 과정을 좀 덜 고통스럽게 겪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외부체험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겪는 세상 체험과 세상 사건들에서 연상하는 고통을 줄이려면, 너는 그것들을 보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네가 외부 사건을 바꿀 수는 없다. (외부 사건은 너희 다수가 창조해낸 것이다. 집단이 창조한 것을 개인이 바꿀 수 있을 만큼 네 의식이 충분히 성숙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면 체험을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삶을 깨닫는mastery 길이다.
저절로, 그리고 그 자체로 고통스러운 건 아무것도 없다. 고통은 잘못된 생각의 결과다. 그것은 생각의 오류이다.
선각자들은 가장 쓰라린 고통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선각자들은 이런 식으로 치료한다.
고통은 너희가 어떤 것에 관해 내린 판단 때문에 생긴다. 그 판단을 제거해보라. 그러면 고통이 사라진다.
판단은 흔히 과거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것에 대한 너희의 관념은 그것에 관한 이전 관념에서 나온다. 이전 관념은 그보다 더 앞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고, 또 그 관념은 다시 그보다 더 앞의 관념에서 나오고....... 마치 벽돌을 쌓듯이. 이 거울의 방 속에서 내가 ‘맨처음 생각’ first thought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거슬러 올라 갈 때까지.
모든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으나 어떤 생각도 원래 생각original thought보다 더 강하지는 못한다. 이따금 이 원래 생각을 원죄original sin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죄는 어떤 것에 관한 너희의 맨처음 생각이 틀렸을 때이다. 그러고 나서 그 틀림은 너희가 그것을 두 번 세 번 생각해감에 따라 몇 번이고 합성된다. 성신이 하는 일은 너희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날 새로운 오성에 이를 수 있도록 너희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다.
당신은 내가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이들과, 미국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불의, 브라질에서 수백명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지진에 대해 유감스럽게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의 세계에는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너를 반영하는 것, 너 자신의 위대한 변형으로서 너를 재표출해주는 일을 하라. 유감스럽게 느끼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심판하지도 비난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너희는 그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도, 어떤 식으로 끝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을 명심하라. 너희가 비난하는 것이 언제고 너희를 비난할 것이며, 너희가 심판하는 것이 언제고 너희를 심판하리란 것을.
차라리 네 가장 고귀한 ‘자신’을 더 이상 반영하지 않는 것들을 바꾸려 노력하거나, 그런 것들을 바꾸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하라.
그럼에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라. 그 모든 것이 다 신의 창조이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창조이기에.
여기서 잠시 멈추고 제가 좀 따라잡게 해주시겠습니까? 좀 전에 신의 세계에는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없다고 말씀하신 게 맞나요?
맞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당신의 세계에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럼 어디에 존재하는 겁니까?
호오, 어디에.......?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어디에 나타난다는 거죠? 당신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요.
너희의 상상 속에
하지만 옳다 그르다, 하라 하지 마라,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들에 대해 제게 가르쳐준 사람들은 그 모든 규칙들을 당신, 곧 신이 설정해놓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를 가르친 사람들이 틀렸다. 나는 한번도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라”거나 “하지 마라”는 걸 설정한 적이 없다. 그렇게 한다면 너희가 받은 최고의 선물, 즉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하고 그 결과를 체험해볼 기회와, 너희가 ‘참된 자신’의 모습과 닮은꼴에 비추어 자신을 새롭게 창조할 기회와, 또 자신의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더욱더 고귀한 자신을 만들어줄 공간이란 선물을 빼앗는 것이 되리라.
어떤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그르다”는 것은 너희가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너희 자신을 금(禁)하는 것이다. 너희를 금하는 건 자신을 제한하는 것이며, 자신을 제한하는 건 ‘참된 자신’이라는 실체를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실체를 창조하고 체험할 기회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내가 너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내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지옥으로 보내리라 주장한다. 무슨 그런 자유의지가 있단 말인가? 이런 주장은 우리 사이의 진짜 관계가 아닐 뿐 아니라, 신을 조롱하는 짓이기도 하다.
자, 이제 우리는 제가 논의하고 싶었던 또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군요. 천국과 지옥을 둘러싼 그 모든 논란의 영역으로요. 지금 제가 여기서 주워들은 것들에서 보면 지옥같은 건 없군요.
지옥은 있다. 하지만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이 너희에게 제공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지옥을 체험하는 건 아니다.
지옥이 뭐죠?
지옥은 너희의 선택과 결정과 창조들이 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神)를 부정하는 모든 생각, 즉 ‘자신’과 나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모든 생각의 당연한 귀결이다.
지옥은 잘못된 사고로 너희가 겪는 고통이다. 그러나 “잘못된 사고”란 용어조차도 틀린 것이다. 잘못된 것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옥은 기쁨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음이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는 있으되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못난 존재다. 그것이 바로 지옥이며, 너희 영혼에게 그보다 더 끔찍한 건 없다.
하지만 너희가 상상하는 그런 곳, 불길 속에서 영원히 불타거나, 고통스런 상태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그런 곳으로서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내가 그런 것에 무슨 의미를 둘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내가 너희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지극히 신(神)답지 못한 생각을 품고 있을지라도, 무엇 때문에 내가 너희의 실패에 대해 앙갚음하거나 벌하려 들겠는가? 너희를 처치하는 것쯤이야 나로서는 손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내 어떤 부분이 복수심에 불타서, 굳이 너희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종류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의 고통에 영원히 처하길 요구하겠는가?
만일 너희가 정의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답한다면, 천국에서 나와 가까이 지낼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정의라는 목적은 간단하게 달성되지 않겠는가? 끝없는 고통의 형벌도 필요하다고?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두려움에 근거한 신학들 속에서 쌓아올린 식의, 죽음 뒤의 체험같은 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극히 불행하고 불완전하며, 전체보다 지극히 모자라고 신의 더없이 큰 기쁨과는 한참 거리가 먼 영혼의 체험이란 건 존재하니, 너희 영혼에게는 이것이 바로 지옥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그곳으로 보내지도 않으며, 이런 체험이 너희를 찾아가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런 체험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너희 자신이다. 너희 자신을 자신에 대한 가장 고귀한 생각에서 떼어낼 때마다, 또 아무리 떼어낸다 해도, 그런 체험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너희 자신이다. 너희가 자신을 부정할 때마다, 너희가 ‘참된 자신’을 거부할 때마다, 너희는 그런 체험을 창조한다.
그러나 이런 체험조차도 결코 영원하지는 않다. 너희가 영원히 영원히 내게서 떨어져나가는 건 내 의도가 아니기에. 사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너희가 ‘자신’을 부정해야 할 뿐 아니라 나 역시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중 어느 한쪽이 너희에 관한 진실을 간직하는 한, 궁극에 가서는 그 진실이 이길 것이다.
그런데 지옥이 없다면, 그건 제가 응보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무슨 행동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진정으로 옳은 것이 되고 옳은 것을 하고 옳은 것을 가지려 할 때, 네게 필요한 것이 두려움인가? 너는 “착해”지려면 굳이 협박을 받아야 하느냐? 그리고 “착하다는 게” 무엇이냐? 누가 그것에 관해 최종 판결권을 갖는가? 지침들을 정하는 건 누구이며, 규칙들을 만드는 건 누구인가?
내가 말하노니, 바로 네가 너 자신의 규칙을 제정하고, 바로 네가 그 지침들을 설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잘해 왔고, 지금 얼마나 잘해나가는지 판단하는 사람도 너다. 왜냐하면 너야말로 ‘자신이 참으로 누구이고 무엇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자 하는지’를 판단해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야말로 자신이 얼마나 잘해 가는지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너희 이외에 어느 누구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왜, 어떻게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하고 나쁘다고 규정하겠는가? 만일 너희가 완벽하길 바라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길 바랐더라면, 나는 너희를 너희의 고향인 절대완벽 상태에 그대로 남겨뒀을 것이다. 이 과정의 전체 핵심은 너희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요, 참된 자신으로서, 그리고 너희가 참으로 되고자 하는 바대로 너희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선택권까지 갖지 않는다면 너희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 스스로 너희 앞에 놓아준 선택권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너희를 벌주어야 하는가? 너희가 두 번째 것을 선택하길 원치 않았다면, 왜 나는 첫 번째가 아닌 것을 창조했는가?
이것이 너희가 비난하는 신의 역할을 내게 배당하기에 앞서, 너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이다.
네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그렇다이다. 너희는 응보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그러나 그 귀결을 깨닫는 것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리라.
귀결consequence이란 결과result다. 당연한 결말(outcome). 이것들은 응보나 징벌과는 전혀 다르다. 결말은 그저 단순히 결말일 뿐이다. 결말은 자연법칙의 자연스런 적용에서 결과하는 것이다. 결말은 이미 일어난 것의 귀결로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모든 물질적 삶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일단 너희가 이 법칙들을 기억해내고 적용하기만 하며, 너희는 물질 수준에서 삶을 지배하게 된다.
너희에게 징벌처럼 비치는 것, 혹은 너희가 악이나 불운이라 부르는 것들은 스스로를 주장하는 자연법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제가 이 법칙들을 알게 되고 그것들을 따른다면 앞으로 단 한순간도 근심거리를 갖지 않게 되는 겁니까? 당신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이 그런 건가요?
너희는 소위 “근심거리” 속에 놓인 자신을 체험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너희는 삶의 어떤 상황이 문제거리가 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공포스런 어떤 상황도 맞닥뜨리지 않을 것이며, 모든 근심과 의심과 두려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너희는 육체에서 벗어난 절대계의 영혼들로서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상대계의 영혼들로서, 아담과 이브가 살았다고 너희가 상상하는 식대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너희는 온갖 자유와 온갖 기쁨과 온갖 평온과, 너희 영혼의 온갖 지혜와 오성과 권능을 갖게 될 것이다. 너희는 완전히 실현된 존재가 될 것이다.
이것이 너희 영혼의 목표다. 육체 속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 참된 모든 것의 화신(化身)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너희 영혼의 목적이다.
또한 이것이 너희를 위한 내 계획이다. 내가 너희를 통해 실현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개념을 체험으로 바꾸고, 나 자신을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 이것이 내 이상이다.
우주의 법칙들은 내가 설정한 법칙들이다. 그것들은 물질 세계를 완벽하게 작용케 하는 완벽한 법칙들이다.
너희는 눈송이보다 더 완벽한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복잡함, 그 문양, 그 대칭성, 그것의 자기동일성과 다른 모든 눈송이들에 대한 독창성-이 모든 게 하나의 신비다. 너희는 자연이 펼치는 이 외경스런 기적에 감탄한다. 그런데 내가 겨우 눈송이 하나로도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 때, 내가 이 우주를 가지고도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해왔다고 생각하는가?
너희가 가장 큰 물체에서 가장 작은 입자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대칭성, 그 도안의 완벽함을 알게 된다면, 너희의 현실로는 우주의 진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그 진리에 흘깃 눈길을 주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너희는 아직 그것이 뜻하는 바를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뜻하는 바가 있다는 것, 너희의 현재 이해능력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놀라운 뜻들이 들어 있다는 건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의 셰익스피어는 이것들을 멋지게 표현했다. “호레이쇼, 이 천지간에는 자네의 지혜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네.”(햄릿 제1막 5장-옮긴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가 이런 법칙들을 알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그것들을 배울 수 있죠?
그건 배움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의 문제다.
어떻게 해야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나요?
고요히 있는 것에서 시작하라. 외부 세계를 가라앉혀라. 그러면 내면 세계가 네게 시야sight를 줄 것이다. 너희가 찾아야 하는 게 이 통찰력in-sight(내면 시야-옮긴이)이다. 하지만 너희가 외부 현실에 지나치게 깊숙이 빠져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가능하면 자주 내면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도록 하라. 그리고 너희가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을 때는, 바깥 세계를 다룰 때처럼 내면에서 나오게 된다. 다음 공리를 명심하라.
너희가 내면으로 가지 않는다면 너희는 바깥으로 가게 되리라.
이 공리를 외울 때는 좀 더 실감나도록 주어를 일인칭으로 바꾸어라.
내가
내면으로 가지 않는다면
나는 바깥으로
가게 되리라.
너희는 평생동안 바깥으로만 가왔다. 하지만 너희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봤자 뭔가 이루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가 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가질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말씀은 그림의 떡을 약속하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너는 신이 어떤 다른 약속을 하도록 만들고 싶은가? 이보다 못한 것을 약속한다면 너희는 내 말을 믿을 것인가?
수천년 동안 사람들은 참으로 괴이한 이유로, 즉 그 약속들이 너무나 근사해서 진짜일 리 없다는 이유로, 신의 약속들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너희는 이보다 못한 약속, 즉 이보다 못한 사랑을 선택해왔다. 신의 가장 고귀한 약속은 가장 고귀한 사랑에서 나오는 법이기에. 그러나 너희는 완벽한 사랑을 상상하지 못하며, 따라서 완벽한 약속 역시 상상하지 못한다. 그리고 완벽한 사람 또한 상상하지 못하기에, 너희는 자신조차 믿지 못한다.
이 모든 수단들을 믿지 않는 건 신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을 믿으면 신의 가장 큰 선물인 조건없는 사랑과, 신의 가장 큰 약속인 무한한 잠재력을 믿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말을 끊어도 될까요? 신이 말씀하시는데 중간에 가로채기는 싫지만....... 하지만 전에도 무한한 잠재력에 관해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그건 인간의 체험과는 부합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이 부딪치는 온갖 어려움들은 둘째치고라도, 정신이나 육체에 장애를 안고 태어난 사람들이 겪는 고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잠재능력도 무한합니까?
너희는 너희 경전에 그렇다고 적어놓았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여러 군데서.
한가지 예를 들어주십시오.
너희의 성서 창세기 11장 6절에 너희가 써놓은 것을 찾아 보라.
이렇게 나와 있군요. “야훼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그렇다. 이제 너는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내용은 정신박약자와 허약자, 신체장애자같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관한 제 질문에 대답하는 게 아닌데요.
너는 그 사람들이 네 말처럼 장애를 가졌다고 생각하느냐?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고? 너는 한 인간의 영혼이, 그게 어떤 것이든 간에, 우연히 삶의 도전들과 마주친다고 상상하느냐? 이게 네가 상상하는 것이나?
그럼, 한 영혼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삶을 체험할지 미리 선택한다는 말씀인가요?
아니, 그렇게 한다면 마주침의 목적이 무산될 것이다. 마주침의 목적은 지금이라는 거룩한 순간에 너희 체험을 창조하는 것이고, 따라서 너희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자신이 체험할 삶을 미리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는 자신의 체험을 창조하는 데 함께 할 사람과 장소와 사건들, 즉 조건과 상황들과, 도전과 장애들, 그리고 기회와 선택사항들을 선택할 수는 있다. 너희는 자신의 팔레트에 짜놓을 색깔들, 자신의 궤짝을 짜는 데 필요한 연장들, 자신의 작업장에 필요한 기계들을 선택할 수는 있다. 이런 것들을 써서 뭔가를 창조하는 것이 너희의 일거리이다. 그것이 인생의 일거리이다.
너희가 하기로 선택한 그 모든 일에서 너희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소위 장애 있는 신체를 지닌 한 영혼은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한 것이 아니라고 억측하지 마라. 너희는 그 영혼이 무엇을 하려는지 모른다. 너희는 그것의 진행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모든 조건을 축복하고 그것들에 감사하라. 신이 창조한 것들의 완벽성을 인정하고 그 창조물들에 믿음을 보여라. 신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우연의 일치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구잡이식 선택이나 너희가 운명이라 부르는 것들 역시 그 세계를 희롱할 수도 없다.
눈 한 송이가 그 동안에서 더없이 완벽하다면, 너희의 삶만큼 장대한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하지만 예수조차도 병자를 치료했습니다. 만일 그들의 상태가 그토록 “완벽”했다면 예수는 왜 그들을 치료했을까요?
예수는 그들의 상태가 불안전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치료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 영혼들이 자기 과정의 일부로서 치료를 요청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그 과정의 완벽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영혼이 뜻하는 바를 인정하고 이해했다. 만일 예수가 정신의 병이든 육체의 병이든 모든 질병이 불완전을 나타낸다고 느꼈다면, 그는 지구상의 모든 이들을 그냥 한꺼번에 치료하지 않았을까? 너는 예수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의심하느냐?
아뇨. 예수는 능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좋다. 그런데 네 정신은 여전히, 왜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왜 그는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고통 받게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치료해주었을까, 몹시 알고 싶어하는군. 그렇다면 왜 신은 그것이 어떤 고통이든 항상 고통을 묵인하는가? 과거에도 줄곧 제기되어온 이 질문의 대답은 항상 똑같다. 그 과정 속에 완벽함이 존재한다는 것. 게다가 무릇 삶이란 선택에서 비롯된다. 선택에 간섭하거나 선택을 문제삼는 건 적절하지 않다. 선택을 비난하는 건 특히나 더 적절하지 못하다.
적절한 쪽은 그 선택을 관찰하고, 그런 다음 그 영혼이 좀 더 고상한 선택을 추구하고 더 고상한 선택을 내리고자 할 때, 그것을 도와줄 뭔가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의 선택을 주의깊게 지켜보되 판단하지는 마라. 지금 이순의 선택이 완벽하다는 걸 그들이 깨닫게 해주라. 그러나 그들이 더 새로운 선택, 또 다른 선택, 즉 더 고상한 선택을 하려는 때가 오면 기꺼이 그들을 도울 수 있게 옆에 서 있도록 하라.
타인들의 영혼과 깊이 교감하라. 그러면 너는 그 영혼들의 목적, 그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자신이 치료해준 사람들과, 자신이 그 삶에 접촉한 모든 이들과 함께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는 자기에게 온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보내 치료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 모두를 치료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마구 치료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했다면 그건 우주의 성스러운 법칙을 모독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즉 모든 영혼이 제 갈 길을 가게 하라는 법칙을.
그렇다면 그건 우리가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돕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분명히 그건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인도의 굶주리는 아이들이나 아프리카의 고통당하는 민중들, 혹은 그 외 다른 곳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학대받든 사람들을 도울 수 없을 겁니다. 모든 인도적인 노력을 없어질 것이고, 모든 자선이 허용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명백히 옳은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떤 개인이 절망에 빠져 우리에게 절규하거나 어떤 나라의 국민들이 도움을 간청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까?
보다시피 그 질문은 스스로 답하고 있다. 만일 어떤 일이 명백히 옳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네가 “옳다”와 “그르다”에서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음을 기억하라.
모든 건 오로지 너희가 그렇다고 보기 때문에 옳거나 그를뿐이다. 어떤 것이 그 본질에서부터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아니라고요?
“옳음”이나 “그름”은 본래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가치체계 속에만 있는 주관적인 판단이다. 너희의 주관적인 판단들로 너희는 자신의 자아를 창조한다. 너희는 너희 개인의 가치들로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증명한다.
세계는 너희가 이런 주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려고 지금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만일 세계가 완벽한 상태로 존재한다면 자기창조라는 너희 삶의 과정은 종막을 고할 것이다. 그것은 끝날 것이다. 더 이상 소송이 없다면 변호사가 할 일을 내일이면 끝날 것이다. 더 이상이 병이 없다면 의사가 할 일도 내일이면 끝날 것이다. 더 이상 의문이 없다면 철학자가 할 일도 내일이면 끝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문제거리가 없다면 신의 할 일도 내일이면 끝나구요!
맞다. 네가 아주 완벽하게 표현했다. 더 이상 창조할 게 없다면, 우리, 즉 우리 모두는 창조하기를 끝낼 것이다. 우리, 즉 우리 모두가 그 게임을 지속시키는 것에 기득권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다고 얘기하는 만큼이나 우리는 감히 그 문제들을 몽땅 해결하려고 나서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할 일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기에.
너희의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는 이 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그것이 세계 도처에서 더 이상 전쟁하지 않는 정부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를 강력하게 막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희의 의료기관들 역시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런 기관들이 기적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모든 기적의 약이나 치료법에 완강히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의 종교단체들 역시 이 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런 단체들이 한결같이 두려움과 심판과 응보가 들어 있지 않은 신에 대한 모든 정의(定議)들과, 신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과 관련하여 자기네 이념이 들어 있지 않은 모든 자아 규정들을 공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일 내가 너희가 신이라고 말한다면 종교가 설 땅이 어디겠는가? 만일 내가 너희의 병이 나으리라고 말한다면 과학과 의학이 설 땅이 어디겠는가? 만일 내가 너희가 평화롭게 살리라고 말한다면 중재인들이 설 땅이 어디겠는가? 만일 내가 세상이 고쳐지리라고 말한다면 세상이 설 곳이 어디겠는가?
그럼 배관공들은 어찌 될까?
본질적으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에게 주는 사람들과, 사태를 고정시키는fix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육점 주인과 빵집 주인, 촛대제조공들처럼 단순히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제공해주는 사람들 역시 고정시키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에 욕구를 갖는다는 건 흔히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마약중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마약주사를 fix라고 말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욕구가 중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세상에는 항상 문제거리가 존재할 거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세상이 그런 식인 걸 당신이 참으로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거냐구요?
나는 눈송이가 지금 존재하는 방식 꼭 그대로 존재하듯이, 세상도 지금 존재하는 방식대로 존재할 거라고 말하는 중이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창조한 건 너희다. 너희가 지금 있는 꼭 그대로의 너희 삶을 창조했듯이.
나는 너희가 원하는 걸 원한다. 너희가 진실로 굶주림의 종식을 원하는 바로 그 날, 더 이상 굶주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을 주었다. 너희는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모든 도구들을 갖고 있다. 너희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너희가 그것을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인류는 내일이면 이 세상의 굶주림을 끝장낼 수 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날마다 사만명이 굶어죽어야 할 만한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충분한 이유란 건 없다. 그럼에도 너희가 날마다 사만명씩이 굶어죽어가는 걸 막을 아무 방도도 없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 너희는 날마다 오만명씩을 세상에 데려와 새 삶을 시작하게 한다. 그리고 너희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너희는 이것을 신의 계획이라 부른다. 따뜻한 연민은 말할 것도 없고, 논리나 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런 계획을.
나는 너희가 선택했기 때문에 세상이 지금 식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한 용어들로 설명하는 중이다. 너희는 너희의 환경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면서, 이른바 자연재해들을 신의 잔혹한 장난이나 자연의 냉혹한 법칙을 보여주는 증거로 들이대고 있다. 장난을 쳐온 쪽은 너희이고, 잔혹한 쪽은 바로 너희의 법칙이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도 자연보다 더 온화하지는 않다. 그리고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도 인간보다 더 자연에게 잔혹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기에 절대 말려들지 않으려고 옆으로 비켜선다. 모든 책임을 부정한다. 너희는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 점에서는 너희가 옳다. 그건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너희는 내일이라도 열대우림의 파괴를 끝내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너희는 너희 행성 위를 떠도는 오존층의 고갈을 그만두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너희는 너희 지구의 정교한 생태계에 대한 쉼없는 공격을 멈추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너희는 눈송이를 다시 엉기게 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것이 가차없이 녹는 걸 중단시키려고 애쓸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너희가 그렇게 할까?
마찬가지로 너희는 내일 당장 모든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쉽고도 간단하게. 필요한 것, 지금까지 항상 필요했던 것은 너희 모두가 동의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서로 죽이는 짓을 끝내는 것처럼 극히 간단한 일에도 함께 합의를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하늘에다 대고 종주먹을 치면서 너희의 삶을 질서 잡히게 해달라고 외쳐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 스스로 하지 않는 어떤 것도 내가 너희를 위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법칙이고 예언이다.
세상이 지금 상태대로 존재하는 것은 너희 때문이고, 너희가 내린 선택들 때문이다. 혹은 너희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하지 않는 것도 결정하는 것이다.)
지구가 지금 모습대로 존재하는 것도 너희 때문이고, 너희가 내린 선택들 때문이다. 혹은 너희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의 삶이 지금 방식대로인 것도 너희 때문이고, 너희가 내린 선택들 때문이다. 혹은 너희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저는 그따위 트럭에 치이길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강도에 습격당하거나, 그런 미치광이에게 강간당하길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말할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너희 모두가 도둑의 마음, 속에 훔치려는 욕구, 즉 감지된 필요를 만들어낸 기존 상황의 원인제공자들이다. 너희 모두가 강간을 가능케 하는 의식을 창조했다. 너희가 자신에게서 범죄를 일으킨 이런 면을 볼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그런 범죄가 일어나는 상황을 치유할 수 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걸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라. 운 나쁜 사람들에게 기회를 줘라. 더 나은 내일이라는 사소한 약속으로 대중을 움츠려들게 하고 화나게 만드는 편견을 끝장내라. 성(性)에너지에 대한 무의한 금기와 억압들을 치워버려라. 그보다는 성에너지의 경이를 진실로 이해할 수 있게, 그것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게 사람들을 도와주어라. 그러면 너희는 강도와 강간을 영원히 종식시키는 사회로 나아가는 긴 여정에 들어설 것이다.
트럭이 느닷없이 모퉁이에서 튀어나오고 하늘에서 벽돌이 떨어지는, 이른바 “사고란 것”에 대해서는 그런 개개 사건을 더 큰 모자이크의 작은 일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라. 너희는 자신을 구원하려는 각자의 계획을 실행하고자 이곳에 왔다. 그러나 구원이란 게 악마의 함정에서 벗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악마같은 건 결코 없으며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희는 실현되지 않음이라는 망각의 늪에서 자신을 구해내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이 싸움에서 패배할 수 없다. 너희는 실패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싸움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이 점을 알지 못하면 너희는 그것을 끊임없는 투쟁으로 볼 것이다. 너희는 그 투쟁을 둘러싸고 웬만한 종교 하나를 창조해내기에 족할 만큼 오래도록 그 투쟁을 신봉할 수도 있다. 이런 종교는 투쟁이 모든 것의 핵심이라 가르칠 것이다. 그 가르침은 틀렸다. 그 과정을 진행시키는 것은 투쟁이 아니다. 오히려 승리는 지는 데서 얻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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