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대한국사의 요약 본문
Ⅱ. 대한국사의 요약
1. 머리말 - 단학과 천부경에 대해서
ⅰ. 단학이란단학은 생체에너지를 연구하는 기학(氣學)이자, 그 기운을 터득하여 조절 및 활용하는 법을 배워 인간완성에 이르게 하는 민족 고유의 학문이다. 이는, 거대한 우주의 생명에너지와 인체의 에너지를 상호유통하는 이치와 체내의 기혈을 원활하게 하는 이치를 직접 체험시킴으로써 우주의 순환법칙과 생명의 참 모습을 온전하게 깨닫는 것이다.그 연원은, 한민족의 건국이념과 교화이념을 담고 있는 3대 민족경전인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에 있다.ⅱ. 천부경이란..① 천부경의 연원와 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시대에 이르러 녹도문으로 기록되었던 내용이 고운 최치원님에 의해 현재의 천부경으로 옮겨졌다고 한다.② 천부경의 중요 사항 ㈀ 하나 (一)우주 만물의 근원으로, 시작점이자 종결점이다. 한민족의 가슴에 살아있는 본래의 하늘로, ??, 황(黃), 한(桓) 단(檀), 인(因), 인(仁), 그리고 사람에 있어서는 본성(本性), 신성(神性)이라 했다. 또한, 근원적 속성과 창조적 속성을 결합해 천(天), 신(神), 천신(天神), 천일신(天一神) 등으로 표현했고, 이는 만유의 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하나'에서 나타나는 하늘의 의미와 그 곳에서 이뤄져 나온 하늘의 차이점이다. 또한, 이 둘의 관계는 음양의 관계와 다르며, 그보다는 우주만물의 완성과정에 부합한다.마지막으로, '하나'의 주된 속성은 창조와 진화의 '조화'로서,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을 우아일체(宇我一體)라 하며, 이러한 사람을 신인(神人) 혹은 천지인(天地人)이라 하는데, 이 사람이 갖는 마음가짐이 곧 천지마음이다.㈁ 일석삼극(一析三極)'하나'가 스스로 끝없이 만들어낸 우주 만물을 종류 별로 구분하면, 천·지·인이 되는데, 이를 가리켜 일석삼극이라 한다. 이 때, 셋은 우열과 차별없이 불가결의 존재로서 하나를 이룬다. 이는, 전래의 삼태극(三太極)문양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우리 민족이 삼(三)이라고 하는 숫자를 중요시여기는 것과, 삼일철학, 삼신신앙, 삼신일체론과 같은 류의 종교적·사회적·철학적·문화적 관점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지나의 복희씨가 만들었다는 음양설(陰陽說)역시 여기서 기인하고 있는데, 천지인이 서로 조화되는 과정에서 음과 양이 나뉘는 것이다. 하늘에는 낮과 밤이, 땅에는 물과 뭍이, 사람에는 남녀가 있음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말이 많을 수 있는데, 근본을 따지자면, 복희씨가 본래 한국시대 제 5 대 태우의 환웅의 아들이었으며 그가 후에 수인씨의 뒤를 이어 현재의 지나를 다스리게됨으로써 음양론이 지나에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태호복희란 말도, 태호는 곧 '탱그리'로서 당골, 단군이다. 복희는 곧 '밝'으로서 밝음이니 배달Paedal과 같은 말로, 곧 '머리밝은'이란 말이다.㈂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는 '人二三'을 심화시킨 내용으로, 사람 속에 하늘과 땅의 에너지가 내재함을 일컫는다. 이들이 계발되면, 큰 지혜(知慧), 사랑(大德), 힘(大力)이 되며 궁극적으로 신인완성을 하게 해준다. '태백일사'에서 유위자는, '하늘의 기틀은 내 마음의 기틀에서, 땅의 모양은 내 몸의 모양에서, 사물의 주관은 나의 기의 주관에서 알 수 있다. 이것이 곧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함이며,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감이다."라고 하여 '일석삼극'의 뜻이 우주와 사람에게 동일하게 작용함을 밝혔다. 만일, 이를 깨닫지 못한자의 천·지·인은 귀(鬼)로 된다고 이른다.㈃ 수승화강(水昇火降)삼일신고에서 '느낌을 그치고 숨쉼을 고르고 부딪힘을 금하여 오직 한 뜻으로 나아가 허망함을 돌이켜 참에 이른다(止感 調息 禁觸 一意化行 返妄卽眞)고 하여, 세 갈래의 법을 밝히고 있는데, 이 때 일어나는 기적변화를 가리켜 수승화강이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이 가득해지면, 기운이 장해지고, 신이 밝아지면서 신인의 길로 가게 된다(精充 氣壯 神明). 이와 함께 심기혈정(心氣血精)의 원리가 적용되는데, 이는 자연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사회적으로는 효(孝), 충(忠), 도(道)라 하였다.㈄ 본성광명(本性光明)사람에 있어서, '하나'로부터 비롯한 하늘의 씨앗을 곧 본성, 신성이라 하였고, 그 밝음을 자연물 중에 가장 밝은 태양에 비유한 것이 '본심본태양(本心本太陽)'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밝음을 추구하였는데, 이에 따라 각종 이름에 태양과 관련된 내용이 담기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박병식 님의 고대어의 어원연구를 살펴보면, '한(桓)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태양족의 나라'요, 배달·조선·대부여·고구려·백제·신라·옥저·읍루·가라·거란·산융·숙신·여진·발해·요·선비 등의 나라 이름들이 모두 '태양의 곳' 혹은 '태양의 자손들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2. 창세기우리 민족의 창세기에는 다른 민족의 것들과는 독특한 점을 담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창조주가 인간의 형상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창조주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은 '율려(律呂)'라고 하는 일종의 음(音)인 것이다. 여기서 '율(律)'은 양성음, '려(呂)'는 음성음에 속하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율려란 태극의 움직임과 유사하다. 그러나, 율려에는 음양의 대극적 측면보다는 창조의 근원과 진화의 방향과 목적이 내포된 조화로움이 강조되고 있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율려란 조화의 원리가 전개되는 순수한 원초의 리듬으로서, 조화주의 마음과 숨결이 빚어내는 빛이며 음이며 파장이며 만유의 생명이자 모습인 것이다. 이는, 기의 형태로 다가오는 것에 빛(光), 음(音), 파(波)의 세 가지가 있다는 점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에 내재한 율려음을 밝히는 과정을 '수증(修證)'이라고 하거니와, 이는 스스로의 뿌리를 닦아 입증하는 일이라는 뜻이다.그리고, 이 율려음에서 실달성(實達城)과 허달성(虛達城), 마고대성(麻姑大城)과 마고(麻姑)가 나와 인류의 시원을 이루게 된다. 이의 시작이 '선천시대(先天時代)'로서 마고가 선천을 남자로 후천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 없이 궁희와 소희의 두 딸을 낳았다. 이들은 '오음칠조(五音七調)'의 음절을 관장하였으며, 이 둘이 다시 선천과 후천의 정을 받아 결혼치 아니하고 각각 두 천인과 두 천녀를 낳아, '황궁'씨와 '백소'씨, '청궁'씨와 흑소'씨를 낳게 된다. 이들 중, 네 천인은 율(律)을, 네 천녀는 여(呂)를 관장하게 된다. 이후, '후천시대(後天時代)'가 열려 낮과 밤, 계절이 생기며 뭍과 바다가 갈리게되고, '역수(曆數)'가 시작되는데, 이는 우주의 본음과의 연결을 의미한다. 때가 바뀌는 것을 아는 것이 우주의 질서변화를 아는 것과 연관되는 듯인 것 같다. 또한, 네 천인은 각각 토(土)-황(黃), 수(水)-청(靑), 기(氣)-백(白), 화(火)-흑(黑)이 되어 직책을 지켰는데, 이와 같은 기수화토 4요소설은 지나의 오행설과 유사해보이지만 앞서 율려와 태극간의 차이처럼 조화와 대극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사상은 훗날 불교의 지수화풍설(地水火風設)로 이어지게 된다.3. 마고성 시대마고성 시대에 이르러 각각 3천명씩 12,000명의 인류의 조상들이 천인과 천녀사이에 태어나지만, '오미(五味)의 화(禍)'가 발생함에 따라서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오미의 화란, 1만여명의 사람들이 살던 마고성에서는 지유(地乳)를 마시고 살았는데, 백소씨의 일족인 지소씨가 배고픔에 지쳐 포도를 먹게된 데서 시작된다. 이를 통해 처음 접해본 감각에 마음이 동한 사람들이 다른 생명을 강제로 먹게 되고, 법없이는 생활치 못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조절되던 율려의 조화세계에서 상대적인 이원(二元) 세계로 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오감을 열게 된 자들이 스스로 성을 떠나가게 되는데,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지유를 찾고자 성곽 밑을 파헤친 사람들에 의해 성 내의 지유마져 마르게 되어 음식을 가리지 않는 이가 늘어만 가게 되었다. 결국, 마고성의 보존을 위해, 뭇 부족의 장자였던 황궁씨가 천부를 신표로 나눠주고 전원 성 밖으로 나가는 출성(出城)을 명하게 된다.앞서 4대 종교의 온상지와 마고성의 위치가 가까움에 따라서, 다른 종교들의 시원을 이뤘다고 했는데, 김은수님의 연구에 의하면 마고성은 파밀고원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기리는 형상이 우리 전래의 윷판과 고누판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중앙에 천부가 봉수되어 있고, 사방을 천인들이 지키며, 그 후손들이 어울려 살았던 모습이다.4. 인류의 분거이는 마치, 한민족이 제일 잘났다는 국수주의로 생각될 지도 모르지만, 실은 문명의 근원이 하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제로, 소련의 사학자 고로보프스키에 의해 지지되고 있으며, 독일의 고고학자였던 A.훔볼트의 말에 따르면 "아메리카의 많은 신화, 기념물, 우주 발생에 관한 사고는 동아시아의 것과 놀랄만큼 흡사하다."고 한다. 또한, '삼신오제본기'에 따르면 한웅천황 치세하에 있던 구한(九桓)의 무리들이 피부색에 따라 황부인(黃部人), 백부인(白部人), 적부인(赤部人), 남부인(南部人)으로 나뉘는 바, 이들 모두가 최소한 한웅시대까지 한국의 영역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곳곳으로 나뉘게 된 무리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다시 성으로 돌아가려던 그 본래의 뜻을 잃고 성품이 변화하여 신체적으로도 몰라볼 만큼 원시화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5. 황궁씨 시대천산주에 도착한 황궁씨는 조화선법을 이루기 위해 천산에 들어가 스스로 음상을 토하는 돌이 되어 율려와 하나되고 영원히 사람들의 수증을 돕게 된다. 그리고 장자인 유인씨에 의해 무리가 다스려지며, 둘째 이하는 세계 곳곳을 순행하며 오미의 화 이후로 원시화되어가는 사람들에게 수증하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에서는 한웅이 배를 타고 사해를 순방한 기록이 있으며, 단군 왕검 역시 천부의 이치를 깨우쳤다고 한다. 또, 의 기록에서도, 화랑들이 좋은 산수를 유람하고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한 것은, 단순한 호연지기의 함양이 아니라 순행이 근본 목적이었던 것이다. 훗날 이들에 관한 얘기는 신화 속에서 다양한 지식의 전승자들로 표현된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 남아메리카의 만코 카발리, 보티카, 유카탄의 이츠암나, 멕시코의 케찰 코아틀, 이스터 섬의 마케마케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그 문명의 원 거주자들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이방인들로 표현되어 있다. 바빌론의 역사가였던 벨롯수스는 '오안네스'라는 자에 대해 기술해 놓기도 했는데, 오안네스는 정기적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 문자를 전하고 기술을 가르쳤으며 치세(治世)의 법을 전했다고 한다.6. 유인씨 시대유인씨 시대의 기록은 극히 적지만, '황궁 - 유인 - 한인'으로 이어지는 삼세에 걸친 치세의 노력으로 사람들의 모습이 점차 본래대로 돌아왔다는 기록에 따라, 별반 차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들의 관계가 모계가 아닌 부계로 이뤄졌다는 점은 자못 주목할 만한데, 지나의 경우에는 한 무제에 이르러서야 이와 같은 법이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인씨는 황궁씨가 그러했듯이, 다음 세대인 한인에게 법을 전한 후 입산하여 계불에 전념했다고 한다. 7. 한인 한국시대 (BC 7197∼3898)황궁씨족의 노력은, 에 기록된 황궁씨와 유인씨 시대 각각 천 년씩 2천년과 에 전하는 BC 7197∼3898년까지 모두 7세에 걸친 한인시대 약 3301년을 합하여 도합 약 5300여년에 걸쳐,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삶을 안정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이후, 거발한 한웅에게 법을 전하고 청구시대가 이어진다.한인 한국시대의 강역은, 파나류산 아래 천해의 동쪽에 있었으며 동서2만리, 남북 5만리였다고 한다. 이 곳에 한인의 아홉형제가 나누어 12나라를 이루었는데, 이를 구한(九桓), 구역(九域) 구주(九州)라 칭하며, 이 곳에 살았던 64민을 가리켜 구족(九族), 구이(九夷)라 하였다. 여기서, 우리의 강역을 언급하는 것이 과거 잘못된 국사를 배운 이들에게는 한낱 신화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 하는 책에 의하면 구다국은 마늘과 쑥이 나는 곳으로, 북쪽으로 500여리 가면 울지국이 있고 북개마대령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난하가에 있던 매구여국이 구다국에 패하여 금산으로 옮겨 살았다고도 한다. 여기서 북개마대령이 개마국과 관련이 있다면 웅심산은 웅심국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루국과 구다천국은 에, 구다국은 에, 진수(陳壽)의 에는 일곱 개의 비리국이, 진서(晉書)의 에는 비리국· 양운국·구막한국으로 가는 방향과 거리가 기술되어 있다.한인 한국시대에는 왕을 가리켜 '안파견'이나 '거발한'이라 하였는데, 에서는 앞에서 말한 부자상속제 말고도 무리의 추대로도 뽑았다고 한다. 이 당시의 가르침은, 신시 오훈(神市五訓)과 자재율(自在律)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자재율에 관해서는, 그 자체를 설명하기 전에 그 근본 원리가 되는 오행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재율의 근본이 되는 오행은, 마고성의 구조도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주임에 천부가 봉수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천인들이 사방을 조절하고 있는 모습이 그것인데, 지나의 오행과는 성격이 역시 다르다. 지나의 것은 중심이 사방을 지배하는 이내제외(以內制外)의 것인데 반해, 우리네 것은 중심이 '모습없이 보고, 함이 없이 이루고 말없이 행하는' 성격을 띄어 조화와 평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자재율은 세상에 법규는 없었을지라도 계통이 스스로 이뤄져 조화롭게 이치대로 살았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의 이와 같은 역사는 지나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을 뿐 아니라, 왜곡되기까지 했다. 의 '태고'편을 보면, 중국 역사의 시발점에 있는 태고시대의 지배자를 가리켜 천황·지황·인황이라 하였는데, 이는 천부경의 근본 원리를 인용한 것일 뿐이다. 또한, 천황이 목덕(木德)으로 왕이 되었다 하였는데, 지나의 오행설에 따르면 '목(木)'은 푸른 색(靑)의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스스로 청궁씨의 후손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천황의 형제가 12인이라 하는 것도 마고성의 12시조를 가리킨 표현이고, 인황씨 형제 아홉이 아홉 주를 나누어 통치했다는 것도, 앞서 얘기했던 한인시대 한국의 기록이다. 뿐만 아니다. 복희씨나 신농씨와 같은 신화적 존재들도 실은 신시시대 때 활약했던 인물들이었다. 8. 한웅 신시배달 청구시대 (BC 3898∼2334)한웅 신시배달국 시대는 거발한 한웅이 무리를 이끌고 천산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는 '제 2의 출성'을 통해 시작된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에도 전하고는 있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므로, 이 시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이를 실증적으로 고증해봐야 한다.한웅이 인간세상에 첫 발을 디딘 곳이 어디냐는 문제에 있어, 그 동안 우리는 현재 우리가 있는 한반도의 어딘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 이르길 '동방의 뭇 산을 태백의 이름으로 불리는 바가 사뭇 많다.'고 하였으며, 에서 '삼(三)'은 '신(新)'이 되고 신은 또 백(白)이 되며, 백은 신(神)이 되고 신은 고(高)가 되고 고는 두(頭)가 된다. 때문에 삼신산을 백두산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하여 백두산은 '일석삼극'의 원리를 반영한 이름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웅이 한인으로부터 천부의 법을 받아 홍익인간하고자 내려온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이나 태백산이 아니며, 현재의 지나 대륙이 한단시대까지 한민족의 주요 무대였음을 참고한다면, 태백산의 진짜 위치는 아마도 협서성 서안 부근으로 짐작된다. 덧붙여, 신단수(神檀樹)라는 장소는 부락에서 가장 신성한 중심 장소로,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었다. 그 근본은 마고성 시절에 천부가 봉수된 장소로, 신시시대 이래 '소도(蘇塗)'였으며, 제정일치의 중심지에서 종교의 중심지로 변화한 곳이다.한웅 본인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가 '서자(庶子)'였다는 사실이 우리의 자존심을 괴롭힌다. 그러나, '서(庶)'의 뜻은 '무리'로서 적서의 차별과 관련이 없으며, '자(子)'라는 의미 역시 혈통 상속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부계 상속말고도 화백의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자'의 뜻을 풀어 설명하면 '부족의 뭇 젊은이들'이란 것이 된다. 이를 증명하는 사실로, '서자부(庶子部)'라는 곳이 서자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었는데, 훗날 화랑의 배움터인 경당으로 이어지게 된 일을 들 수 있다.여기서, 화백의 관례가 신라시대의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연원이 한단시대 이전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을 적어본다. 에서는, '때에 구한은 모두 삼신을 한 뿌리로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책화로 관리하여, 무리와 더불어 의논해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을 화백이라 하였다.' 하였고, 에서는 '포로와 죄수를 풀어주고 아울러 사형제도를 없애고 화백으로 공평하게 하며...'라고 하였다. 또한, 에서는 오가의 무리들이 지도자를 뽑는 경우에 '제각기 생각하는 바대로 판단하여 스스로 선택하게 하였으니 그 추구하는 핵심은 오로지 구한이 공평하게 대동단결하여 하나로 돌아감에 있었다.'고 하여, 한인 한국시대에까지 이 제도가 미침을 보여준다. 이는 실상, 화백제도의 근본 사상이 마고성의 맹세를 이루기 위해 행한 의결제도의 일환인 삼신일체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위의 표는 앞에서 언급한 각 시대별로 나라를 다스리던 근본을 보여주는데, 배달국 시대에는 교육으로 사람들을 복되게 하고자 하였다. 에 의하면, '소도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나니, 바로 충효신용인(忠孝信勇仁)의 오상지도(五常之道)이다.'라고 하였는데, 오상지도는 훗날 신라시대 원광법사가 화랑에게 일러준 세속오계와 유교의 인의예지신의 원형격이다. 덧붙여, 이와 같은 교육의 내용은 이 시대에 최초로 발생한 문자에 의해 기록되며,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의 시원을 이룬다. 결국, 한웅은 이를 통해 그 자신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 목적인 '개천(開川)'을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 표는, 한웅시대에 제정된 '무여율법(無餘律法) 4조'인데, 신시 배달국시대의 '오훈'보다 더 원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단군시대의 8조금법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내용 중에 유배지로 가리키고 있는 '섬도'는 지금의 태국으로, 에서 '아유타는 삼국유사에 서역을 이른다 하였으나 이제 옛 기록을 고찰한즉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이다.'라고 한 부분에서 근거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시의 다스림이 태국에까지 미쳤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그러나, 한웅이 당시에는 이 같은 목적은 이뤘을 지라도, 현재에 와서는 지나와 다른 이방민족들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왜곡된 채, 잘못된 국사 교육이 이뤄지고 있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우선, 중국 창세신화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반고신화'는, 실상 한인시대에 기이한 술법을 좋아하던 이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나아간 일을 역사적으로 미화한 것일 뿐이다. 특히, 반고와 함께한 세 명의 유씨는 유인씨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으며, 십간·십이지 등의 이야기는 훗날 지나족의 역을 이루게 된다.때에 반고라는 자가 있어 기이한 술법을 좋아하여 길을 나누어 가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화와 보물을 꾸리고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의 신장(神將)을 거느리고, 공공, 유소, 유묘, 유수 등과 함께 삼위산 납림동굴에 이르러 군주가 되었는데, 이를 제견이라 이르니 그를 반고가한이라 하였다.치우천왕과 공손헌원에 대한 이야기도 위와 유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고대 중국의 삼황(三皇)은 천황·지황·인황(태호 복희·염제 신농·수인)씨를 말하고, 오제(五帝)는 황제·전욱·제곡·제요·제순을 말하는데, 여기서 황제는 공손헌원을 말한다. 그가 치우천왕과 함께 언급되는 것은, 이 두 인물이 서로 오랫동안 다퉜으며, 사마천이 공손헌원을 의 첫머리에 놓아 시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마천은 그가 반역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한(漢)족의 자주성을 위해 황궁씨족의 역사를 왜곡시켰다.실상, 헌원은 반고처럼 기이한 술수와 재물을 좋아했던 자로, 한웅천왕의 지방 제후에 불과했던 인물이다. 그러던 그가, 소전의 후예임을 핑계로 신시 제 14세 치우천왕(BC 2707∼2599)에 대항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그가 황제라 칭한 것도, 그가 황궁씨족의 황부에서 공부했던 사실을 내세운 것에 불과하다.헌원이 반란의 명목으로 내세웠던 소전과 신농씨에 대해서는, 당시 신시를 다스리던 오가(五加)와 족속에 대한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아래 표에 나온 족속들 중, 치우·신지·고시계가 가장 번성했다고 하며, 에서는 치우족이 서남지방을, 신지계가 북동에, 고시계가 동남에 살았는데, 이들이 후에 구이(九夷)를 이루어 삼한의 바탕이 되었다 한다.이들 중, 치우계의 치우천왕은 배달국의 영토 확장에 힘썼으며, 소전과 신농은 고시계에서 나왔다. 이 때, 신농이 우가·고시계에 속했기에, 훗날 저들의 신화에서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진 자'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농 말기에 유망이란 자가 있어 법도를 어지럽혀 치우천왕이 이를 다스렸는데, 헌구에 유배되었던 공손의 후예인 헌원이 이를 핑계로 군사를 일으킨 것이 일말의 사건인 것이다. 복희씨도 왕금영계에서 나온 자로, 신시 제 5세 태우의 한웅천왕(BC 3512∼3420)의 12번째 아들이었는데, 서쪽 영토의 주인이 되어 자신이 창시한 복희역을 발달시킨다. 복희역은 천지인의 삼극을 음양론으로 밝히고자 한 것으로 근본에 있어서는 천부경의 원리가 있었으나, 훗날 굴절되어 '1 - 2 - 4 - 8'의 과정을 거쳐 변화하는 대극(大極)의 형태를 띄게 된 것으로, 우리의 한역(桓易)과는 다른 것으로 변화했다고 추측된다. 굳이 '추측'이라는 말을 쓴 것은, 한역에 관해서는 자료가 소실되어 있으며, 단지 주역의 근본이 천부경이기 때문이다.배달국 시대는 문자가 최초로 등장한 시기임을 앞에서 밝혔다. 그런데, 이 문자는 후에 한글로 발달할 뿐 아니라, 한자로도 발달한다. 과 에서는 한글이 '고전자(古篆字)'를 본뜬 것이라 하였고, 에서는 동방에 옛부터 일상적으로 쓰던 문자가 있다 하여, 한글과 이들 문자의 연관성을 암시하게 해준다. 그리고, 한자의 연원에 언급되는 창힐과 왕문 등의 인물들은 ··을 통해 각각 치우와 부여의 사람으로서, 신시에 한자의 연원이 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한글의 연원에 있어서, 가장 훈민정음과 유사한 글자체로 현존하는 것은 단군 가륵의 명으로 삼랑 을보륵이 만들었다는 38자의 가림토이고, 한글의 철학적 바탕을 추정하게 해주는 자료 중 하나는 생육신 중 한분인 김시습이 에서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을 에서 취했다.'고 한 부분이다. 박현님은 훈민정음의 근본이 '삼재(三才)와 음양(陰陽) 및 오행(五行)의 융합체'로서 성리학 사상의 창조물이 아닌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오랜 문화적 전통과 관련된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한자의 경우에 우선, 한문은 5천년 전의글자인데 반해, 한나라는 2천년전의 나라(BC 202)이다. 그리고, 국사 교과서에서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주었다는 때가 AC 285년인데, 세계사 시간에 지나는 천자문이 양나라 무제 때(AC 6세기) 작성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지나인들 스스로가 온전하게 발음치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한자의 음은 동한(東漢)의 허신이 에서 540부수 9353자를 설명하면서 확정지은 것에 기초하는데, 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처음에 만든 자와 후에 사용하는 자가 서로 다르다고 추측할 수 있다. 임승국 교수의말에 따라 이를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즉, 한자는 원래가 일자 일음이면서 반절음인 반해, 지나인의 발음은 그와 틀리며 일자이음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한글뿐 아니라, 한자의 연원이 신시시대에 있다는 점에서는 갑론을박이 심할 듯하여 몇 자 더 적어본다. 우리 국사책에 불교나 주자학·과거제·기독교 도입 연대들은 모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다못해 고구마와 감자, 고추까지도 언제 수입되었는지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한자나 한문은 언제 수입되었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이러한 이유가 실은, 우리가 원래부터 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그리고,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나라들은 모두 한자를 쉽게 줄인 간자체를 쓰는데, 왜 유독 우리만 정자체를 쓸까? 실은, 한문과 한글은 상호 보완하는 음양의 글자인 것이다. 녹도문이 뿌리가 되어 탄생한 한문은 음의 글자로 '표의문자'요, 가림토 문자에서 나온 한글은 양의 문자인 '표음문자'인 것이다. 단지, 단군조선 멸망 후 약해진 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성해진 지나에 의해 한문으로 정착되고 만 것이라 하겠다.9. 단군조선 고조선시대 (BC 2333∼BC 146)단군조선시대의 우리 역사는, 이제는 어느 정도 신화가 아닌 실제로 인정받고 있으나, 아직은 미흡하다 하겠다. 이는, 지난 수 세기간 쌓여온 지나족의 왜곡된 사실의 주입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역사는 자칭 중토의 패자였다는 지나족의 역사와 우리의 상고사를 비교해봄으로써 상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우선 우리가 과거에 역사가 아닌 '신화'로 배운 '단군신화'를 상세히 밝혀보아야 하겠다.단군신화하면 생각나는 책에는 와 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일제의 문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진정한 이유에 대해, 역사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비교적 왜곡하고 있는 자료만을 일부러 남겨둔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말엽까지도 '국조(國祖)'로 섬겨지던 단군이 신화로만 치부되기 시작한 시간적 공백에 위치한 것이 일제 강점기라는 점과, 일제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 쇠말뚝까지 박았던 사실을 되새겨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웅녀라는 말의 뜻도, "웅(곰 → → 신神) + 녀 + 님 지신(地神)" 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고맙다'의 '고마'와 '꼬마'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이며 신묘(BC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밝달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주변의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하였다. 14세가 되던 갑진(BC 2357)년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함을 듣고 비왕을 삼고 대읍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무진(BC 2333)년 제요도당 때에 단국으로부터 아사달 단목의 터에 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단군 왕검에 대한 이해는 예전과 달라야 할 것이다. 에 따르면 단군은 하늘에 제사 올리는 일을 주관하는 천군(天君)이며, 왕검이란 무리를 감독하는 자인 동시에 무리들이 서로의 경계를 탐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수장을 뜻한다고 한다. 단군조선이 여러 부족들의 연합체였으며, 단군은 연합체의 우두머리로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통해 그들을 통솔하고, 화백으로서 공동의 뜻을 모으고, 책화로서 서로의 경계를 관리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특히, 제사를 관장했다는 사실은, 제례를 통해 '하나'와 '삼극(三極)'이 나에게 온전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조상에 대한 제례만이 남아 있으나, 에 의하면 1세 단군왕검이 정한 '삼한'이 '삼조선'으로 개칭된 44세 단군 구물시대까지 10월 상순에 원 모양의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방(方)형의 구릉을 쌓아 땅에 제를 지내고, 각(角)형의 나무를 세워 사람에 제사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엽 고종 때에는 구국의 일념으로,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원구단에서 제사를 올렸으나, 지금은 조선호텔이 그 자리에 서 있다.단군 왕검은 황제가 된 후, 아직은 현재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한 후 단군 칙어를 내리고 천범을 공표하였으며 천법에 의거하여 규범을 정했다. 그 행함은 신시시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부도를 건설하였다. 그 위치가 아사달과 동일한 곳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역시 불분명하지만, 그 구조나 주변상황에 대해서는 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사항이라면, 10년마다 '신시'를 열어 지금의 개천절과 유사하지만 그 규모는 추석과 같은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는 점이다. 이제 단군왕검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지나와 우리의 관계를 살펴보자. 대부분의 민족들이 자민족의 역사를 이민족의 역사에 비해 월등하게 나타내려고 하는 경향성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나의 역사관은 이러한 경향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중화사관'이라는 특별한 호칭까지 갖고 있다. 그 특징은 다음 표와 같은데, 공자를 예로 들면, 그는 우리를 상제(上帝)·천제(天帝)·구이(九夷)·동이(東夷)·숙신(肅愼)·만이(蠻夷)·산융(山戎)·융적(戎狄) 등의 이름으로 둘러대면서도 동방의 예를 그리워했던 전형적 인물이다. 그의 저작인 에서 '능히 큰 덕을 밝히시어 9족을 사랑하시매 9족이 이미 화목해진지라. 백성을 ..' 이란 부분에서 나타나는 9족이, 앞에서 언급했던 9족이라는 점이 하나의 실례이기도 하다.지나가 동양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하는 자들 중에 하나는 요 임금인데, 그의 실상은 오미의 화 이후에 먼저 출성한 자의 후예로, 부도 주위를 돌아다니며 '수(數)'를 배워 근본을 벗어난 '이내제외(以內制外)'라는 오행을 만들고, 거북의 무늬나 명협의 잎과 같은 동식물의 역을 인간에 적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검이 타 지역을 순행하는 사이에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와 대립하였다. 그의 이론은 중앙이 나머지를 지배하는 것이어서, 훗날 강력한 중앙정부와 봉건주의의 출현을 가능케한 바탕이 되었으며, 동식물의 역을 인간에 적용하니 서로 일치하지 못하게 되었다. 요의 뒤를 이은 순은 유인씨의 후예인 유호의 아들로, 부도의 법을 행하는 환부가 되어 회대지방의 제후들을 관리하였으나 능력이 부족하고 생활에 절도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그의 인품을 알아본 요가 자신의 두 딸로 유혹하여 함께 묘족을 정벌하고 현자들을 죽였다. 결국, 아버지였던 유호가 무리들을 모아 요순을 토벌하니, 요는 순에게 양위하였으나 몇 년에 걸친 토벌 끝에 유폐되어 죽고, 순은 요의 무리인 우에게 창오의 들에서 피살되었다. 이 과정은 요의 시대에, 하늘에 천제의 아들인 열 개의 해가 나타나 세상을 황폐하게 하니 천제가 보내준 예가 활로서 아홉 개의 해를 쏘아 떨어뜨렸다는 일종의 우화로 남겨졌다.이후, 순의 아들인 상균을 따르는 자들을 우가 억누르고 세운 나라가 하(夏)왕조이다. 그는, 왕검의 명으로 도산회의에 참석한 부루태자에게서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배워 무리의 신임을 얻었는데, 서남 제족을 정벌한 후 스스로 제후라 칭하고 부도로 통하는 수륙의 길을 끊었다. 이에 유호가 부도로 다시 돌아올 것을 권하자, 오히려 싸움을 걸었으나 번번이 패하기만 하였다. 요·순·우로 이어지는 이 같은 역사의 과정은 부계 상속제가 아닌 것이었는데, 이는 공자가 말한 제가(齊家)에 실패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릴 만한 그릇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궁씨족도 그 역사 중에 부계상속제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으나, 황궁씨족의 경우에는 '화백'을 통해서라도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최소한 한 씨족 내에서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요순우의 것은 그들의 역사서에서 우리의 것과 같은 제도가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상대가 나보다 낫기에 물려준 것으로만 나와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들의 시작이 된 오행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두어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주체로 내세운 것이었기에 세상에 올바른 것이 되지 못했다.에서 3세 단군 가륵시에 삼랑 을보륵에게 왕의 할 바를 물은 바에 대해 답하길, 다음과 같이 하였다.하늘을 대신하여 왕이 천하를 다스림은 홍도익중(弘道益衆)하되 한 사람도 그 참된 성품을 잃지 않도록 하고, 뭇 왕들을 대신하여 인간의 주인이 됨은 병을 없애고 원통함을 해결하되 일물이라도 그 목숨을 다침이 없이 하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망녕됨을 고쳐 참으로 나아감을 알게 하는 데 있다.그러나, 지나가 1084년에 완성했다는 과, 1662년 경에 저작했다는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문왕이 역괘를 나열할 때, 건과 곤을 처음에 두었다. 공자가 이를 해석하되, '... 이것에 따라 이 세상의 서열이 생기고 귀천의 자리가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군신의 자리는 천지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변할 수 없는... ...군주가 되면... 천하의 이해를 결정하는 권한은 모두 자신의 손 안에 있다고 믿어버린다. 천하를 막대한 사유재산으로 보고 ... 영구히 자신의 것으로 하려 한다.... 하 왕조의 마지막은 유명한 폭군 걸이었는데, 한의 유향이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에 따르면, 은탕이 하걸을 치려고 하자 재상 이윤이 조공의 양을 줄여 걸의 거동을 보고 결정하자고 하여 그렇게 하자, 하걸이 노하여 구이의 군사를 일으키니 탕이 사죄하고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또한, 이듬해 은탕이 또다시 조공을 바치지 않자 걸왕이 다시 구이의 군사를 동원하려 하였으나 움직이지 않자, 결국 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에는, 처음에 은이 하를 정벌하자 걸이 구원을 요청하여 단제께서 도와주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오히려 은탕의 어진 정치를 칭찬하고 하걸의 무도함을 꾸짖었던 것이다. 하에서 은으로 넘어가는 위의 모습에 대한 양측의 상반된 주장에 있어서 우선, 만일 구이의 군사가 걸의 휘하에 있었다면 움직이지 않았을 까닭이 없다. 또한, 에 의하면 하걸의 신하인 비창이 황하를 건널 때 두 개의 해가 나타난 것을 보고, 황하의 수신 하백에 물으니 하백이 서쪽의 해가 하, 동쪽의 해가 은이라 하자, 그는 은탕에게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은탕이 걸의 도성을 육박할 때 상제의 명을 받은 위대한 신이 나타나 상제의 명을 도우러 왔다고 하고, 도성을 점령하도록 돕는다. 에서는, 갑오년에 장군 치운으로 탕을 도와 걸을 치게 했다고 적는다. 여기서, 하백은 단군조선이요, 하백의 답은 하걸은 지는 해요 은탕은 뜨는 해임을 암시한 것이다. 그리고 단제를 상제로, 그가 파견한 장군을 신으로 묘사한 것은 그들의 경외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그러나, 이에 대해 손진태 씨는 '중국의 시조인 요보다 겨우 50년 뒤져 단군이 즉위하였다는 것은 민족의 유구성을 자랑하는 심정의 표현'이라 하였고, 이병도 씨는'누구나 상상할 수 있음고 같이 역사적 의식과 민족적 자존심에서 유래한 것이니, 즉 우리의 역사적 발족이 중국의 그것과 같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허세였음을 시사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들은 모두, 아직 가시지 않은 단군신화 사상의 일부일 것이다.단군시대에는 요·순·우와 같은 사람들이 마구 일어날 정도로 인간의 오감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기적 욕망의 문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에 단군 왕검은 마한·번한·진한의 삼한을 세우고, 천제의 화신으로 신시의 옛 규칙을 되찾고자 '단군칙어'와 '천범 8조'를 세웠다. 또한, 인세가 복잡 다양해짐에 따라 더 많은 가르침이 나왔는데, 2세 때에는 '어아가'를, 3세 때에는 '신왕종전지도', 6세 때에는 '서효사' 등이 나왔다. 국사 책에 자주 나오는 '8조 금법'은 22세 단군 색불루가 세운 법도이다.왕권의 계승은, 30차례는 부자상속이 이뤄졌으나 나머지는 화백제도나 명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양위되었다. 특히, 22세 단군 색불루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번한의 우현왕에 임명된 고등의 아들로, 단제의 제위 선양에 반대하여 주변의 무리와 스스로 즉위하고 이에 반대하던 번한과 대립했다. 결국에는 색불루가 번한의 서우여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서우여가 번한을, 여원흥이 마한을, 단제가 진한을 다스려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게 된다. 지나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 사이에 대립되는 것들 중에는, 현재 우리 국사 교과서에 실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에 관한 사항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국가는 모두 지나인들이 삼한 중 가장 국경이 밀접했던 번조선과의 접촉에서 파생된 가공의 나라이다. 기자는 왕이 된 적이 없으며 위만은 연 나라 사람인데, 이들 국가가 생겨났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물론, 기자의 후손 중 일부는 번한의 왕이 되기도 했으나 진한의 단제나 천제가 되지는 못했으며, 기자 본인은 아예 번한의 왕조차 되지 못한 은의 유민일 뿐이었다. 즉, BC 1114년에 기자가 은의 유민으로 번조선에 들어와, BC 365년 경에 연을 토벌하는 데 노력한 공로로 읍차가 되었다가, 군사력을 이용하여 번조선의 왕이 되었고, 단제의 자리를 노렸으나 토벌되었다. 이후,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어' 준왕을 안심시키고 번조선을 탈취하였다. 결국,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이 우리 역사에 편입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다.이후, 47세 고열가 단제가 제위를 버리고 입산했고 오가들이 화백제로 나라를 다스렸으나, 번왕 기비의 도움으로 일어나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에게 진한은 흡수 통합되었고, 단군의 전통은 북부여로 이어진다. 이후 북부여는 고구려에게, 고구려의 전통은 발해에게 이어지면서 그 명맥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삼조선의 후예들은 서로 헤어져 일부는 월지에 후삼한을 세우고, 일부는 한반도에 들어와 삼국시대를 열게 된다.Ⅲ. 결론대한국사에서 다룬 내용에 대한 의문사항은, 대한국사의 저자이신 단재장님 (0547 - 434 - 4324)에게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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