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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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야고보서4:1-4절을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 했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겨우 이름만 알고 있을 뿐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모든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아는 것에 힘쓸 시간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이 야고보서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든지 성경 속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보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는데 지금 교인들은 그것은 딴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행위에 열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위에 급급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단이 성행을 하고 있고 또 이단에서 조금 특별하게 가르치는 그것에 사람들이 쉽게 미혹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기는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있다고 하는 그것이 결국 육체의 정욕의 다툼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참 답답합니다.
행위에는 그렇게도 열심을 내는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단이 알고 있는 하나님 보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안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하나님보다 못 하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교회가 운영 되려면 어떻게 하든지 행위를 강조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너무 큰 건물을 지어 놓고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보니까 그것을 유지 관리 하려고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행위를 강조해야 하고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대한 열심인가를 모릅니다.
자기가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그 열심이 과연 하나님에 대한 열심인가를 한번이라도 냉정하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하는데 거의 맹목적으로 사람을 신뢰하다 보니까 의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게 생각을 하고 마치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착각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성도와 가라지가 있습니다.
신약의 거의 모든 말씀은 바로 이 성도와 가라지를 비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과 교회 안에 들어 온 사람들을 비유하는 말씀이 아니라 알곡과 가라지를 비유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서 관연 내가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인가 아니면 알곡인가를 성령의 감동을 받아 확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교회를 나오는 것으로 마치 구원을 보장 받는 보증 수표를 받은 것으로 착가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알곡인지 아니면 가라지인지 분별을 하지 못하고 그저 행위에 열심을 내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행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면서 부도난 수표를 가지고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가 되지 마세요.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가 바르다고 믿고 있습니다.
바르다고 믿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서 더욱 열심을 내고 그런 자기의 행위를 보면서 부도난 수표를 쥐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처음부터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신고 한 그들이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를 합니다. 또 십일조를 하고 주일을 지키고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헌신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있느냐면 그들의 믿음이라는 것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신념이기 때문입니다
신념과 믿음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모르기 때문에 조직에서 울어 나오는 신념을 가지고 마치 믿음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신념의 사전적 뜻은 굳게 믿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을 아는 성도는 굳게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념에 사로 잡혀 있고 또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믿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신념은 내 의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내 의지가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섭리를 하셔서 나로 자연스럽게 믿게 하시는 역사 안에서 내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의지가 들어가 있는 신념을 가져서는 안 되고 성령이 감동을 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념이 행위를 강조합니다.
가지가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하든지 보이고자 하려면 당연히 행위를 보여야 합니다. 바로 이런 신념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는 행위가 강조되고 자기 믿음을 보이려 하니까 자꾸 더 열심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열심이 간음이 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것이 간음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안 하고 도리어 더욱 더 열심을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적인 간음이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행위에 열심을 내고자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그 차이가 가라지와 알곡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하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 행위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고 있는 가를 전혀 모르고 행하는 사람은 가라지이고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복음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알곡입니다
성도는 자기 모든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압니다.
악하다는 것을 알지만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게 되고 또 그 행위에 대해서 조금도 마음에 담아 두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도로서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것 이상의 것을 하려고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신 은사에 감사를 하고 그것만을 행하려고 하지만 가라지는 남이 칭찬을 받은 것을 보면 참지를 못하고 자기도 그것을 행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치 로마서의 반대가 되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그 행위를 보여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고 또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모두 하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행위가 필요하다고 하면 이 명제를 벗어나게 되고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잠언22:10절을 보면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교회 안에 거만한 자가 있어 다툼과 싸움이 생깁니다.
누가 거만 합니까?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만 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율법을 잘 지키는 자는 항상 거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거만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그런 사람이 거만하면 조롱거리가 됩니다.
더 많은 것을 하는 사람은 거만 합니다.
자기가 많은 것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똑 같이 요구를 하면서 당연히 거만해 집니다. 교회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 앞에서 거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겸손한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그 마음에는 거만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디도서3:9절을 보면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율법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모든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이 지키기를 요구 합니다.
율법은 완전성이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완전한 사람과 조금 부족한 사람과는 늘 다툼이 있기 마련이고 심지어는 말로 구타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심하게 말로 구타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정한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정죄를 하면서 구타합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설교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모든 설교가 율법의 다툼에서 나고 있습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느니 누가 또 하나님께 헌신을 어떻게 했느니 하면서 서로 다툼을 일으키게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의 기능 자체가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어느 이단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면서 토요일 날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성 교회를 잘못 되었다고 말 합니다. 왜 그런 다툼이 있느냐면 바로 율법의 기능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서로 싸웁니다. 한 쪽에서는 성경대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이제 안식일이 변해서 주일이 되었다고 다투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어느 이단은 유월절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주 타당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이 성경적으로 유월절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하면 그대로 넘어 갑니다.
율법은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니까 바리새인들이 하고 많은 날 중에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느냐고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다 자기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특정한 율법을 이용을 하고 있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 아니다 하면서 서로 다툼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것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그런 다툼은 모두다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시작이 되어 싸움이 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갖기 위해 율법을 지켰습니다.
복음을 모르니까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갖기 위해서 율법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율법으로 얼마나 많은 다툼을 일으켰습니까? 심지어는 안식일에 얼마를 가면 안 된다 안식일에 대한 자기들의 규례를 만들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정욕에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정욕이라고 하니까 나쁜 것만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 의롭게 살고자 하는 것 율법을 잘 지키고자 하는 것 이런 모든 것도 역시 정욕입니다 오히려 강도 보다 도적보다 더 정욕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강도나 도적은 그래도 양심에 가책을 받고 있지만 율법의 정욕에 빠지면 그것을 더 하고 싶어서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께 더 하게 달라고 눈물을 흐리며 기도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육체의 정욕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하기 위해서 늘 다툼을 일으키고 또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냐고 하면서 다툼이 있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도 이 율법에 빠져서 아니 율법을 안 지키면 마치 믿음이 없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율법에 대한 욕심은 대단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남의 영혼을 살인을 하는 것인 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이 어떤 율법으로 칭찬을 받으면 자기도 그것을 하고 싶어서 시기를 하고 또 그것이 바른 가 틀린 가 늘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너무 집요할 정도로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 때문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율법을 가지고 다투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자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바로 믿는 도리라고 생각을 했으며 바리새인과 제사장 사이에서도 자기들 나름대로 율법을 정해서 지키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누가 맞나 틀리냐 하면서 싸웠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것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구하고는 있지만 실제 그들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율법적인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을 구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아니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구하지를 않습니다.
의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전혀 구하지 않고 자기 정욕에 빠져 율법의 의를 위해 구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의 정욕에 빠져 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화평케 하는 것을 구하지는 않고 오히려 다툼이 일어나는 율법에 대한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조금 더 빛나기 위해서 내가 조금 더 칭찬을 받기 위해서 다툼이 있는 율법에 대한 것은 그렇게도 잘 구하는 그들이 의의 열매를 맺는 화평케 하는 것은 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기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모두가 자기 정욕에 빠져 그것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는 그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자기가 더 옳게 보이려고 하는 정욕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게 해 주세요.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교회에 봉사를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는 이런 모든 것이 다 자기 정욕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 해서 이웃을 구원하려고 하는 그 모든 행위들을 구하는 것이 바로 정욕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다가는 결국 자기 영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까지도 망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해서 받지 못하는 것이 마치 세상을 위해 쓰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지금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함께 걸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래도 나름대로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 모든 것 역시 정욕입니다
내가 십일조를 얼마 내겠다. 내가 돈을 벌어서 건축을 하겠다. 내가 주일을 지키겠다. 하는 이 모든 것 역시 정욕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고 그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 몸으로 하는 것은 모두 다 정욕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구하느라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하겠다고 구하는 그것 역시 모두가 정욕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구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화평으로 말미암아 의에 열매를 맺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일조를 내는 것과 그리고 건축을 하는 것과 선교를 하는 것과 또 봉사를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바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모르면 정욕에 빠집니다.
정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기는 정욕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으면서 그리고 정욕을 위해 구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행하고 싶어 하는 정말 하나님을 위해하고 싶어 하는 거의 모든 것이 정욕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럼 아무 것도 구하지 말라는 말이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구해야 하는 것은 영혼에 대한 것을 구해야지 그런 정욕에 대한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상이 다 율법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구합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는 그 말씀을 오해를 하고 아무 것이나 자기 정욕에 빠져 구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얻지 못할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왜 구 합니까?
교회 안에 가라지에게는 사단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정욕에 쓰려고 구하면 구하는 대로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단으로부터 받은 것인 줄 모르고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오해를 하고 교회 안에서 자랑을 하니까 사람들이 미혹이 되어서 자기들도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가라지는 사단이 줍니다. 그들을 사망에 빠뜨리려면 정욕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아주 잘 줍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에게서 오는 것인 줄 모릅니다.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주고 있는데도 그것을 줘서 미혹에 빠뜨리고 있는데도 마치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인 줄 착각을 하고 자랑도 하고 교회에서 간증을 하면서 자기 영혼을 팔고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세상과 벗된 여자들이 간음하는 여자들입니다
그 여자들은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고 그것을 얻은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서로 칭찬을 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도 세상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하고 있는 세상은 이 세상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들은 세상과 벗되어 자기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과 벗된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 세상은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큰 음녀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교회는 자기 정욕에 빠져 율법적인 것을 더욱 많이 구하게 되고 그것을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경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와 벗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내가 벗이 되고자 하는 순간 음녀로 변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 시대 무지한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거의 맹목적으로 충성을 하고 있고 자기 전 재산을 드려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행하는 자기들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믿음이 좋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정욕에 빠집니까?
교회에서 더 잘 보이고 싶어서 정욕에 빠지는 것 아닙니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싶어서 그리고 자기 믿음을 보이고 싶어서 정욕에 빠져 그것을 하나라도 얻으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 것임 지금 교인들의 모습니다.
교회도 우상이 됩니다.
너무 지나치게 교회에 충성을 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내가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고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화평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세상과 벗이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성도로서의 직책을 잘 수행을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모든 신앙생활의 의는 정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버리는 성도만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있고 그런 성도만이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 육체의 정욕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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