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일천번제란 무엇일까? 본문
일천번제란 무엇일까?
개역 개정판-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에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 천 번제를 드렸더니”
현대어 성경- “한 번은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서 북서 쪽으로 12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기브 온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스라엘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산당이 있었다. 솔로몬은 그 곳에 있는 제단에서 수백 마리의 짐승을 잡아 희생제물로 바쳤다. 그가 이렇게 북쪽 지파의 영토에 가서 제사드린 것은 그 곳 백성의 지지를 얻고, 통치자로 필요한 계시를 꿈속에서 받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솔로몬이 그 제단 위에 일천의 번제 예물을 드리니라.(왕상3:4)
솔로몬 왕은 다윗 왕이 준비한 성전을 건축하기 전에 산당에서 일천번의 번제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다.
구약의 모든 희생물들은 율법에 속하여 제사장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죄를 범했을때나 절기 때나 심지어
자녀를 낳았을 때까지 수많은 희생물로 하나님께 죄사함의 예물를 드렸다.
그러나 그러한 수많은 희생물 들의 피가 결코 그들의 영혼의 죄를 사해주지는 못하였다.
왜냐면 그 희생물들은 모두 율법에 속하였고 염소 들과 황소 들의 피가 결코 죄를 사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기억나게 하기때문이다.
율법에 속한 희생물 들은 육체적 죽음만 면할수 있을 뿐 영혼의 죄는 용서를 받지 못하였고 미래의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을 알려 주는 그림자요 모형이였을 뿐이다.
율법으로는 결코 죄사함을 받을수 없었다.
그러나 율법아래 오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때에 유월절 절기를 성취하시고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어 골고다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용서해 놓으셨다.
그때에 율법은 완성되어 예수님 안에서 다 이루어졌으며 온 세상은 더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짐승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 했던 유대인들은 짐짓죄를 범하다(히10:26)
서기 70년 로마 제국에 완전 멸망당해 다니엘 9:27절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히브리서의 짐짓죄란 예수님께서 흘리신 고귀한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계속해서
짐승의 피로 죄를 용서받으려 하는 행위를 말한다.
또한 사단은 예수님의 단번에 흘리신 보혈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로마 교회, 갈라디아 교회
골로세 교회등에 지속적으로 율법주의를 투입시키려 하므로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려했었다.
은혜에 행위를 더하거나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는 행위는 스스로 저주아래 있고 자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나 그 희생물들에는 해마다 죄들을 다시 기억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로는죄들을 제거할 수 없기때문이라."(히10:3-4)
"염소들과 송아지들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피로 단 한번에 거룩한 처소 안으로 들어 가시어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느니라"(히9:12)
그런데 여기 그 보다 더 사악한 사기 행위들이있다.
필자가 한창 전도 집회 초청을 받아 여러 교회들에 바쁘게 전도 집회를 다닐 때의 일이다.
한번은 평택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초청을 받아 월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하루에 세차례
말씀을전하는데 집회 전에 강단에 헌금이 올라오고 담임목사는 강사인 필자에게 헌금 봉투를
들고 하나하나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필자는 헌금 봉투들고 기도하는 것은 생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말씀을 전해야 하기에 봉투를 들고
기도를 하다가 깜짝 놀라는 일이 있었는데 어떤 헌금 봉투에 " 일천번제 325번제 예물"이라고 써있었다.
마음에 야, 이런 헌금(이런 사기)도 있구나 하면서 번제라는 말은 못하고 감사 헌금으로 밝히면서
대충기도를 끝낸 적이 있다. 그 신도는 집회 시간마다 헌금 봉투를 가져와서 일천번 헌금수를 채우려고
봉투에 숫자를 쓰고 있었던것이다.
아직도 650번이상헌금을 해야 하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는 솔로몬의 일천 번제 희생물을
일천 번의 헌금으로 교묘히 연관지어 피를 흘리는 희생물을 돈으로 둔갑을 시켜 돈을 바치게 하였다.
희생물은 피를 흘려서 죄를 사함 받으려는 율법 아래서의 행위였는데도 번제를 감사로 바꿔서
헌금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헌금 행위에 구약의 율법을 인용한 행위는 현대판 속죄권을 파는 행위라 할수 있겠다.
솔로몬이 일천번의 희생물을 바친것은 율법으로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돈을 뜯어 먹으려면"이만 이천화목제" 와 "십이만 화목제"를 이용해서 헌금을 하게 하면
죽을 때까지 해도 다 못하게 할 수가 있지않는가?
" 솔로몬이 화목제 예물을 드렸으니 그가 주님께 드린 수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십이만 마리 였더라"(왕상8:63)
하기야 봉투 안에 천 원짜리 지폐를 넣어 천 번해도 되고 만 원 짜리를 넣어 천 번 해도 될것이다.
하지만 속죄하는 희생물 법칙을 헌금 방법으로 악용하는 것이나, 하나님 앞에 감사의 한계를 정하는 행위나,
이미 폐지된 말라기의 십일조를 강요하는 행위는 모두 주님 앞에 바른 신앙이 아니다.
여기 또 다른 유형의 헌금 사기법이 있었다.
필자의 교회에 한 젊은 여성도가 같은 어떤 자매에게 고백했던 이야기가 있다.
그 녀는 여자가 목사로 목회하는 어떤 교회 초신자였다.
그 녀가 그 교회에 나간지 얼마 안되어 쌍둥이 아들들을 낳았다.
그 소식을 들은 여자 목사는 레위기 12장을 펴보이며 여자가 아이를 낳았을 경우 번제 예물로 어린 양을
바치라(레12:6)는 말씀에 따라 번제 예물을 바쳐야 하는데 양 대신 염소로 값을 매겨 한 마리당
40만원의 헌금 예물을 바치라고 했단다.
그런데 쌍둥이를 낳았으니 80 만 원의 번제 헌금을 내야 아이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에 힘든 신혼 살림이라
돈(번제예물)을 마련 할 수 가없어 결혼 패물을 몽땅 팔아 그 주님의 거룩한 종(사기꾼)에게 바쳤다고했다.
그런데 그 여자 목사는 같은 레위기12장8절에 형편이 안되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라도 드릴 수있다는
말씀은 왜 무시했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어느 날 남편이 급하게 돈이 필요해 결혼 패물을 찾았으나 찾을 수없어 아내를 다그친 결과
쌍둥이 예물로 교회 헌금으로 내버렸단다.
대판싸우고 그 날로 교회를 졸업하고 쉬다가 필자의 전도 집회에 참석해서 :돈없이,값없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실이 있다.
이런 일 들을 볼 때참으로 필자가 목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는 것이 부끄럽기 그지 없을 뿐이다.
<출처>www.jesusoflove.com
요즘 많은 교회들에서 일천번제 헌금이 자행되고 있다.
일천번제 헌금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자들이다.
즉각 멈추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말려야 한다.
나는교회개혁 플레비언에서 이것을 폐지하자는 운동에 적극 찬성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즉각 금지되어야 한다.
첫째는,동기가 불순하다.
일천번제 헌금은 솔로몬왕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 것에 근거한다.
그 일천번제가 어떤 번제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일단 솔로몬은 어떤 댓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을 왕으로 삼아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일천번제 헌금은 댓가를 바라고 드려지는 것이다.
이것은 흥부와 놀부가 똑같이 제비다리 고쳐주었지만,
놀부는 흥부와 그 동기가 다름으로써오히려 벌을 받았음을 우리는 잘 안다.
일천번제 헌금을 통해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는 것은,
마치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돈을 주면서 능력을 사려고 한 것과같다.
베드로가 무어라고 말했는가?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돈을 드려서 하나님께 소원함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는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둘째는, 헌금은 번제가 아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전체를 드리는 헌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양이나 소를 모두 남김없이 태우는 것이다.
만원짜리 한장을 봉투에 넣고는 "번제"라고 표현하는 것은
마치번제의 참 뜻을 잊은채,
병든 소나 절름발이 소로 제사를 적당히 떼우고는 "번제"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라고 하나님께서 질책하셨다.(말 1:7,8)
구약의 번제 자체가실체가 아닌 그림자에 불과한데,
그런 그림자를 실체로 보고 본받아 그림자의 그림자를 만드는 것은 소경이나 할 짓이다.
그림자의 그림자는 존재하면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그림자에서 실체를 찾아내야 한다.
번제의 실체가 돈 만원인가? 어디에 번제라는 이름을 함부로 붙이는가?
이런 행위를 통해 교인들은 제사에 대해 왜곡된 의식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오해하게 된다.
셋째는, 하나님은 한번도 일천번제헌금에 대해 약속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일천번제헌금을 드리면 크게 축복하겠다는 식으로 한번도 약속한 적이 없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그 후의 어떤 왕도 일천번제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일천번제헌금을 드리고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안지키신다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결국 일천번제 헌금은하나님을 돈이나 밝히는 맘몬신으로 오해케하고,
하나님의 환심을돈으로 사게하려는마귀의 아이디어이다.
일천번제 헌금은 교회의 재정에 도움을 될 지 모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결국 실족케 하고 하나님에게 실망하게 만들 것이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거듭말하지만,하나님은 일천번제헌금을 요구하신 적도 없고, 기뻐하시지도 않는다.
이것으로 복을 얻어내려는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일천번제 헌금을 하는 자들은 축복은 커녕 오히려 화를 입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말리고 싶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무엇이 필요하면, 단지 믿음으로 구하면 되는 것이다.(요 15:7)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이용할 수 없고, 그에게 뇌물로 달랠 수도 없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 진실된 믿음을드리고, 그를 사랑함으로더욱 긴밀해질 수 있을 뿐이다.
부디 하나님의 은총을 물질로사려는 모독적이고, 어리석은 행위를 당장 중지하길 바란다.
아...언제나 한국교회에서
"형제사랑과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헌금"을 강조하는 설교를 들어볼 수 있을까?
<숭사리개혁포럼 카페지기 최야곱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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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천번제 제사, 알고 보니 '한 번' |
1천 번의 제사를 드린 게 아닌 '1천 마리'의 생축을 태운 제사 |
윤종상 inglove@hitel.net [조회수 : 198] |
한국교회에 무지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에 대해 통탄하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성경이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음에도 최소한의 살핌과 연구도 없이 임의로 해석하고 무리하게 적용하는 목회자와 성도를 바라볼 때 실로 한국교회의 모습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위 '일천번제'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리자 그날 밤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으신 성경의 사건을 두고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1천 번의 제사를 드린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일천번제는 '1천 번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1천 마리의 생축을 불태워 제사 드렸다'는 뜻이다. 한자로는 一千番祭가 아니라 一千燔祭인 것이다.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에는 '1천 마리의 생축'으로 표현해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무속신앙과 다를 바 없는 일천번제(?) NIV를 보면, 솔로몬이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The king went to Gibeon to offer sacrifices, for that was the most import!!!!!ant high place, and Solomon offered a thousand burnt offerings on that altar".[왕이 희생물을 드리려고 기브온으로 갔다. 이는 그곳의 산당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그 제단 위에 번제 헌물 천개(a thousand burnt offerings)를 드렸다](왕상3:4). 솔로몬이 왜 기브온 산당으로 올라갔는가. 그것은 그 산당이 그 시대에 가장 컸기 때문이다. 그곳은 1천 개의 번제 헌물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였다. 천일 동안 매일 매일 바쳤다는 것은 솔로몬의 일천번제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솔로몬이 제사장도 아니고 매일 매일 3년 동안 번제 드리는 일에만 골몰했다면 어떻게 왕국을 다스렸겠는가. 그것은 왕이 되고 나서 드리게 된 한 번의 번제에 1천 개의 헌물을 드렸다는 뜻이다. 성경을 바로 보라. 일천번제는 '1천 날 동안 희생을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1천 개의 번제 헌물을 드렸다'는 의미다. "솔로몬이 회중과 함께 그 성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주 앞 곧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주 앞에 곧 회중의 성막 옆에 있는 놋 제단에 이르러 그 위에 번제 헌물 1천 개(a thousand burnt offerings)를 드렸더라"(대하1:5b,6). 역대상 29장 21절과 역대하 7장 4∼7절 등 솔로몬의 제사를 다룬 다른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1천 마리의 생축을 태워 제사 드린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굳이 원어를 보지 않고 영어 성경을 한 번만 살펴봐도,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을 한 번만 봐도, 이러한 우를 범하지는 않을 텐데. 무속신앙에서 백일 기도 또는 천일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천번제를 그저 그렇게 막무가내로 이해하는 것은 뿌리 깊이 박힌 샤머니즘에서 비롯된 것일까.
어려우면 일천번제 헌금해라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 백화점에서 일천번제 헌금 봉투가 버젓이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면, 일천번제 헌금을 해 보라고들 말을 한다. 3년은 헌금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무지하고 공부 안하는 목회자들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다. 더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일천번제운동본부니 하는 것도 생겨나고 있고, 거기에 회장이니 위원장이니 하는 직함들도 무슨 자랑이라도 하듯이 버젓이 내밀고 다닌다. 일반 성도들이 무슨 큰 잘못이 있을까. 잘못이 있다면 너무 분별없이 따른 무지의 잘못일 것이다. 정말 몰라서일까. 아니면 알고도 손해 볼 것이 없으니 이용하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는 틀림없이 신학도 없을 뿐더러 기복신앙에 물든 사람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일천번제 헌금을 유도하는 목회자의 기복신앙 내지는 세속화된 신앙을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일천번제 헌금의 발생은 교회가 점점 돈을 좋아하는 기복신앙의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는 증거요, 목회자들의 세속화된 목회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변질을 주도하는 목회자의 역할을 버리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내가 바친 천일의 헌물이 내 기도 응답에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곧 배교다. 하나님께서 받기 원하시는 가장 좋은 헌물은 우리의 물질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도 그리하실 것임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분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고 그분의 눈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라"(요일3:20~22).
가장 좋은 헌물은 신뢰하는 믿음 성경은 결코 돈이나 인간적인 정(情) 때문에 기도가 응답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방종교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백만 원 헌금을 천 원씩 천 번을 하겠단다. 차라리 땡빚을 내서라도 한꺼번에 왕창 드리면서 하나님께 서원해 보라. 차라리 그게 본래 일천번제의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듣기로는 한국에 일천번제를 처음 도입한 장본인이 말만 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모 목사로 알고 있다. 무리하게 성전건축을 벌려놓고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만들어 낸 것이 소위 일천번제란다. 손해 볼게 없는 장사란다. 무지한 성도들이야 복받는 일이라는데, 그것도 솔로몬이 받은 유사한 복을 받겠다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정작 번제를 드리고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태도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로도 계속 번제를 드렸는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왜 기록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구약의 제사를 반복해서 드리는 히브리인에게 희생 제물과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성전 제사를 중단하라는 것이다. "이제 이것들을 사면하셨은즉 다시는 죄로 인하여 헌물을 드릴 필요가 없느니라"(히10:18). 구약에 드려졌던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온전히 드리실 것에 대한 예표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스스로 피를 쏟는 희생 제물이 되시므로 구약의 번제를 더는 필요 없게 만드셨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자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번제의 진정한 의미다. 영원한 번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 돈으로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의 희생을 격하시키는 것이며, 그것에 견주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행동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모든 죄들을 사함 받게 하시며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신다. 우리의 번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으므로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라.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 10:19-22).
일천 번의 헛된 경배에서 벗어나라 잘못된 일천번제 습관은 좋은 의도로 시작했더라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돈을 착취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무지한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놓으신 번제를 희석시키게 하는 행습을 속히 중단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구약의 번제를 계속 우리 시대에 끌어오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갈보리의 희생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먼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물질을 신뢰하게 하고, 물질을 걸고 기도하게 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종교적인 행태에 대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당신은 혹시 이런 것에 속고 있지는 않는가. 그것이 헛된 경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내게 가까이 오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거니와 사람들의 명령을 교리로 삼아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 15:8~9). 그리고 목회자와 설교자가 최소한의 공부라도 해야 할 것이다.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설교해야 한다. 비성경적인 것이라면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교인들을 무지와 탐욕으로 이끄는 일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
솔로몬의 '일천번제' 바로알기
일천번제제사,알고보니'한번'
한국교회에 무지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에 대해
통탄하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성경이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음에도 최소한의 살핌과
연구도 없이 임의로 해석하고 무리하게 적용하는 목회자와
성도를 바라볼 때 실로 한국교회의 모습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위 '일천번제'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리자 그날 밤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으신 성경의 사건을 두고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1천 번의 제사를 드린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일천번제는 '1천 번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1천 마리의 생축을 불태워 제사 드렸다'는 뜻이다.
한자로는 一千番祭가 아니라 一千燔祭인 것이다.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에는 '1천 마리의 생축'으로 표현해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무속신앙과 다를 바 없는 일천번제(?)
NIV를 보면, 솔로몬이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The king went to Gibeon to offer sacrifices, for that was the
most important high place, and Solomon offered a thousand
burnt offerings on that altar".
[왕이 희생물을 드리려고 기브온으로 갔다.
이는 그곳의 산당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솔로몬이 그 제단 위에
번제 헌물 천개(a thousand burnt offerings)를 드렸다](왕상3:4).
솔로몬이 왜 기브온 산당으로 올라갔는가.
그것은 그 산당이 그 시대에 가장 컸기 때문이다.
그곳은 1천 개의 번제 헌물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였다.
천일 동안 매일 매일 바쳤다는 것은 솔로몬의 일천번제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솔로몬이 제사장도 아니고 매일 매일 3년 동안 번제 드리는 일에만
골몰했다면 어떻게 왕국을 다스렸겠는가.
그것은 왕이 되고 나서 드리게 된 한 번의 번제에 1천 개의
헌물을 드렸다는 뜻이다.
성경을 바로 보라.
일천번제는 '1천 날 동안 희생을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1천 개의 번제 헌물을 드렸다'는 의미다.
"솔로몬이 회중과 함께 그 성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주 앞
곧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가 거기서 주 앞에 곧 회중의 성막
옆에 있는 놋 제단에 이르러 그 위에 번제 헌물 1천 개
(a thousand burnt offerings)를 드렸더라"(대하1:5b,6).
역대상 29장 21절과 역대하 7장 4∼7절 등 솔로몬의 제사를
다룬 다른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1천 마리의 생축을 태워
제사 드린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굳이 원어를 보지 않고 영어 성경을 한 번만 살펴봐도,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을 한 번만 봐도, 이러한 우를 범하지는
않을 텐데. 무속신앙에서 백일 기도 또는 천일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천번제를 그저 그렇게 막무가내로 이해하는
것은 뿌리 깊이 박힌 샤머니즘에서 비롯된 것일까.
어려우면 일천번제 헌금해라
이러한 문제는 기독교백화점에서 일천번제 헌금봉투가 버젓이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면,
일천번제 헌금을 해 보라고들 말을 한다.
3년은 헌금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무지하고 공부 안하는 목회자들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다.
더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일천번제운동본부니 하는 것도
생겨나고 있고, 거기에 회장이니 위원장이니 하는 직함들도
무슨 자랑이라도 하듯이 버젓이 내밀고 다닌다.
일반 성도들이 무슨 큰 잘못이 있을까.
잘못이 있다면 너무 분별없이 따른 무지의 잘못일 것이다.
정말 몰라서일까.
아니면 알고도 손해 볼 것이 없으니 이용하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그는 틀림없이 신학도 없을 뿐더러
기복신앙에 물든 사람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일천번제 헌금을 유도하는 목회자의 기복신앙 내지는
세속화된 신앙을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일천번제 헌금의 발생은 교회가 점점 돈을 좋아하는
기복신앙의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는 증거요,
목회자들의 세속화된 목회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변질을 주도하는 목회자의 역할을 버리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내가 바친 천일의 헌물이 내 기도 응답에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곧 배교다. 하나님께서 받기 원하시는 가장 좋은 헌물은
우리의 물질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도 그리하실 것임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분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고 그분의 눈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라"(요일3:20~22).
가장 좋은 헌물은 신뢰하는 믿음
성경은 결코 돈이나 인간적인 정(情) 때문에 기도가 응답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방종교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듣기로는 한국에 일천번제를 처음 도입한 장본인이 말만 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모 목사로 알고 있다.
무리하게 성전건축을 벌려놓고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만들어 낸 것이 소위 일천번제란다.
손해 볼게 없는 장사란다.
무지한 성도들이야 복받는 일이라는데, 그것도 솔로몬이 받은
유사한 복을 받겠다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정작 번제를 드리고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태도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로도 계속
번제를 드렸는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왜 기록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구약의 제사를 반복해서 드리는
히브리인에게 희생 제물과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성전 제사를 중단하라는 것이다.
"이제 이것들을 사면하셨은즉 다시는 죄로 인하여 헌물을 드릴
필요가 없느니라"(히10:18).
구약에 드려졌던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온전히
드리실 것에 대한 예표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스스로 피를 쏟는 희생 제물이 되시므로
구약의 번제를 더는 필요 없게 만드셨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자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번제의 진정한 의미다.
영원한 번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 돈으로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의 희생을 격하시키는 것이며,
그것에 견주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행동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모든 죄들을 사함 받게 하시며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신다.
우리의 번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으므로
우리는 언제든 하나님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라.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 10:19-22).
일천 번의 헛된 경배에서 벗어나라
잘못된 일천번제 습관은 좋은 의도로 시작했더라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돈을 착취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무지한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놓으신 번제를
희석시키게 하는 행습을 속히 중단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구약의 번제를 계속 우리 시대에 끌어오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갈보리의 희생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먼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물질을 신뢰하게 하고,
물질을 걸고 기도하게 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종교적인
행태에 대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당신은 혹시 이런 것에 속고 있지는 않는가.
그것이 헛된 경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를 공경하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거니와
사람들의 명령을 교리로 삼아 가르치니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 15:8~9).
그리고 목회자와 설교자가 최소한의 공부라도 해야 할 것이다.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설교해야 한다.
비성경적인 것이라면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교인들을 무지와 탐욕으로 이끄는 일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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