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책 제목: 누구도 죽지 않는다. 본문

책제목: 누구도 죽지 않는다.
부제: 삶과 죽음, 전생에 대하여...
원제목: And Now And Here
출판사: 도서출판 황금꽃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을 지닌 채 여러 삶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죽음을 알지도 못하고, 바라보지도 못한다....만약 한번이라도 죽음의 순간에 의식을 가지고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죽음의 두려움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단지 죽음을 아는 것만으로, 죽음은 사라진다. 그리고 이겨야 할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탄생과 죽음은 우리가 옷을 갈아 입거나 말을 갈아타는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밤이 되면 우리는 휴식을 느낀다. 에너지를 다시 안으로 끌어들여, 육체가 이완된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우리는 다시 생기를 되 찾는다....재미있는 것은 단지 에너지를 느끼는 것만으로 에너지는 안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첫 번째로 할일은 생명 에너지, 즉 Prana 를 그 근원으로 되돌리는 일이다....이를 통해서, 우리가 분리되었으며 육체는 마치 벗어 놓은 옷처럼 우리의 바깥에 누워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다음 단계는 호흡을 이완하는 것이다. 깊은 곳에서 호흡은 생명 에너지, 프라나를 담고 있다. 그 때문에 숨이 끊어질 때 사람은 죽는 것이다. 깊은 곳에서 호흡은 우리를 육체와 연결되어 있도록 해준다. 호흡은 아트만 (atman: 眞我) 즉 영혼과 육체사이의 다리이다. 호흡이 연결 지점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호흡을 프라나라고 부르는 것이다. 호흡이 멈추는 순간, 프라나는 떠나간다....호흡이 멈춘 그 한 순간, 바로 그 한가운데에서, 번개가 그대의 전 존재를 치게 된다. 그리고 그대의 몸과 그대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죽음이 일어 난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단계로 그대는 그대의 호흡을 이완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 그대는 그대의 마음을 이완해야 한다. 호흡이 이완되었다 할지라도, 마음이 이완되지 않았다면, 물론 번개는 칠지라도 그대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번개는 쳤지만, 나는 나의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생각이 멈춰 있어야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네 번째 단계로서 우리는 10분동안 침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침묵동안, 그대는 죽음을 보려는, 죽음이 그대에게 내려오도록 하려는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고통은 이미 충분히 있다. 나의 말은, 먼저 고통과 행복, 양쪽 모두를 겪을 때에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음 번에 약간의 고통을 초대하여 그대가 그대의 의식을 그 고통으로부터 얼마나 멀리에 둘 수 있는지 보라는 것이다. 기억하라. 고통을 초대하는 실험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왜냐 하면 누구나 행복을 초대하고 싶어할 뿐, 고통을 초대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원치 않는 고통은 스스로 찾아오며, 우리가 찾는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연히 행복이 찾아왔을 때조차도, 그 행복은 우리의 집 문 밖에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가 손짓해 부르는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부른 적이 없는 불행은 스스로 걸어 들어온다. 한 사람이 고통을 초대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힘을 모았다는 것은, 이제 고통을 초대해도 될 만큼 행복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너무나 至福에 넘쳐, 이제 고통을 초대한다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이제 고통에게 와서 머물라고 말할 수 있다.....우리는 우리 앞에 찾아오는 고통이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하여 깨어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고통을 만날 때마다 점점 더 깨어 있게 되어 갈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이 찾아왔을 때에도 의식을 가지고 남아 있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때, 자연은 우리가 죽음 속에서도 깨어 있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자연은, 고통 속에서도 의식적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죽음 속에서도 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미리 같은 종류의 경험을 갖지 않은 채,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때 깨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한 생의 기억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데, 여러 생의 기억들이 장벽을 허물고 밀려든다면, 사람은 미쳐 버릴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자연은 우리가 계속 과거를 잊어 가도록 만든 것이다. 자연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잊을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그래서 그대의 마음은 견딜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짐을 지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것은 그대의 마음의 용량이 커졌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용량이 커지기도 전에 이러한 기억들의 무게가 그대를 짓누를 때, 문제가 발생한다.......그러나 실험에 들어가기 전에 깊은 명상을 거치는 것은 필수적이다. 기억의 홍수가 터져 나올 때, 단지 목격자로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그들의 마음이 고요하고 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목격자로서 성장해 갈 때, 전생은 그에게는 단지 꿈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기억들 때문에 고통받지 않는다. 이제 그 기억들은 꿈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전생을 기억해 내는 데 성공해서 그것이 꿈처럼 보이게 된다면, 그 즉시 현재의 삶 또한 꿈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 세상을 마야(幻影: maya) 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단지 철학적 이론으로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자티 스마란, 즉 전생을 기억해 내는 것이 그 바탕에 있었던 것이다. 전생을 기억한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들의 모든 일들은 갑자기 꿈으로, 환상으로 변해 버린다. 전생의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친척들, 아내와 아이들, 살던 집은 어디로 갔는가? 그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너무나 실제라고 믿었던 그 모든 것들은 어디에 있는가? 밤잠을 못자게 만들었던 그 걱정거리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너무나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고통을 주었던 그 괴로움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토록 갈망했던 행복은 어찌 된 것인가? 그토록 이루고자 애쓰며 고생했던 그 모든 것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만약 그대가 전생을 기억해 내고, 그 생에서 70년을 살았다면, 그 70년의 생애 동안 보았던 것들은 꿈으로 보일 것인가 아니면 현실로 보일 것인가? 그것은 오히려 나타났다가 시들어 사라져 버린 꿈처럼 보일 것이다.....벌써 몇번이나 이런 바람들이 불었던가? 벌써 멏번이나 이 구름들이 흘러갔던가? 그것들은 모두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이미 사라져 가는 과정인 것이다.....그것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지만 모두 덧없는 것이다. 하나의 꿈이 찾아오고, 또 다른 꿈이 이어지고, 다시 또 다른 꿈이 이어진다. 순례자는 한 순간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 순간으로 들어간다. 순간에서 순간으로...순간은 사라져 간다. 그러나 순례자는 계속 나아간다. 그리하여 두 가지 체험이 동시에 일어난다. 하나는, 외부 세계는 환상, 마야라는 것, 오직 관찰하는 자만이 실재라는 것이다. 둘째는, 드러나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 오직 보는 자, 지켜보는 자만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외부 현실은 매일 변한다. 그것은 언제나 변해 왔다. 오직 지켜보는 자, 관찰하는 자만이 변함없이 전과 똑같이 남아 있다. 그리고 기억하라. 외부 현실이 실제처럼 보이는 한, 그대는 구경꾼, 지켜보는 자에 초점을 맞출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외부 현실이 실제가 아닌 것으로 밝혀져야만, 지켜보는 자를 알게 된다. 따라서 나는 말한다. 전생을 기억해 내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명상 속으로 깊이 들어간 이후여야만 한다. 삶을 꿈으로 바라 볼 수 있도록 깊이 들어가라. 마하트마 (mahatma) , 성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도, 도둑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꿈일 뿐이다. 그대는 좋은 꿈을 꿀 수도 있고, 나쁜 꿈을 꿀수도 있다. 그리고 재미 있는 것은, 도둑이 되는 꿈은 흔히 쉽게 사라지는 반면에 마하트마가 되는 꿈은 즐겁기 때문에, 사라지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마하트마가 되는 꿈은, 도둑이 되는 꿈보다 더 위험하다. 괴로운 꿈은 사라져 버리지만, 즐거운 꿈은 계속되기를 바란다. 바로 그 때문에 성스런 사람도 도달하지 못하는 신 앞에 죄인이 도달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電子 입자의 빠른 움직임이 '密度'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밀도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물질 속의 입자들은 이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입자들은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전기적 에너지이다. 물질은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 입자들 때문에 밀집 된 것처럼 보인다. 모든 물질은 빠르게 움직이는 에너지의 부산물이다.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의식의 에너지는 너무나 빨리 움직이고 있고, 이 때문에 '나'라는 환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환상이 있다. 하나는 물질의 환상, 그리고 둘째는 '나'라는 환상, 에고이다. 양쪽 모두 기본적으로 거짓이다.
기억하라. 두려움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두려움은 그대를 움츠러들게 한다. 그대가 두려울 때, 그대는 움츠러든다. 행복할 때, 그대는 확장된다.
그대는 매일 잠을 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사람은 평생 동안 잠을 자지만, 역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전히 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이다. 그대가 잠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이유는, 잠이 거기 있을 때, 그대는 없기 때문이다. 잠이 없을 때에만 그대는 존재한다.......잠으로 들어가는 것과 神性으로 들어가는 것은 똑같은 현상이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명상에서는 의식적인 상태에서 신에게 들어가는 반면에, 잠에서는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신에게 들어간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그대가 수천 生동안 잠을 통해 신에게 들어갈지라도, 그대는 결코 신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순간이라도 그대가 명상에 들어간다면, 그대는 수천, 수만 생동안 그대가 깊은 잠 속에서, 무의식 상태에서 도달하곤 했던 바로 그 곳에 도달할 것이며, 그것은 그대의 삶을 완전히 변형시킬 것이다.
생사윤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란 그대가 다시 여기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 어디로도, 어느 차원에서도... 그 때 그대는 '그대가 없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일이 일어나는 날, 기쁨의 샘들이 사방에서 갑자기 솟아난다. 상상의 장소에 있을 때, 우리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정말로 있는 그 곳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될 때에만 행복해질 수 있다. 자신이 아닌 것이 되려고 해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따라서 생사윤회 속을 움직인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의 장소들을 헤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간 적이 없는 곳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있는 그 곳은 완전히 잊어 버린채, 우리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어떤 곳을 헤매이고 있다. 따라서 삶과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란,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것,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는 모든 최면으로부터, 모든 조건화로부터 빠져 나와야 한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무 최면도 없는 지점으로, 완전히 깨어 있으며, 우리 자신의 존재에 뿌리내리고 있는 지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 때 그대가 겪게 되는 경험은, 삶이 하나로 합쳐지는 경험이 될 것이다. 존재가 하나가 되는,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되는 경험이 될 것이다.
미신이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채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거부한다. 이것 또한 미신이다.
인간은 언제나 죽음을 잊으려고 노력해 왔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우리는 죽음이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 삶의 모든 세계를 간신히 유지해 왔다. 죽음이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과 계획은 성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죽음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도망칠 것인가? 어디로 도망 칠 것인가? 심지어 그대가 죽음으로부터 달아난다 해도, 그대는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향해 달아나는 것이다. 어디로 달아나든, 어느 방향으로 가든 결국 그대는 거기에서 끝나게 된다. 그대가 죽음을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그대가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든, 달아나지 않든, 죽음은 매일 가까이 다가온다. 사람은 결코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죽음은 미래에야 일어날 일인데 왜 지금 죽음을 생각해야 하느냐 하는 식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 또한 잘못 생각한 것이다. 죽음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다. 죽음은 이미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비록 미래에 가서야 완성되지만 실제로는 매순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순간 죽어가고 있다. 우리가 여기 한 시간을 앉아 있으면 우리는 한 시간을 죽은 것이다. 완전히 죽는 데는 7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이 한 시간은 그 일부이다. 이 한 시간 동안에도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70년 후에 갑자기 죽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결코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갑작스런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탄생과 함께 시작되는 하나의 성장이다. 사실, 탄생은 죽음의 첫 번째 부분이며, 죽음은 그 마지막이다. 이 여행은 탄생과 함께 시작된다. 우리가 생일이라고 부르는 날은 실제로는 죽음의 첫째 날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여행은 계속 될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에고를 가지고 있다. 왜냐 하면 에고란 압축된 인격, 단단함 매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안에서 움츠러든다.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안에서 움츠려들게 되며, 움츠러든 것은 무엇이나 하나의 매듭이 된다. 그 사람 안에 하나의 콤플렉스가 만들어진다. '나'라고 하는 느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느낌이다.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죽음에 등을 돌리지 않는, 죽음을 살기 시작하는 사람, 그의 '나'는 사라진다. 그의 에고는 사라진다. 그리고 에고가 사라질 때, 남는 것은 오직 삶뿐이다. 오직 에고만이 죽을 뿐, 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에고로서 남아 있기 때문에 커다란 어려움이 생겨난다. 사실은, 오직 에고만이 죽을 수 있다. 오직 에고만이 죽음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에고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죽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에고에 매달리고 있다......죽음을 바라보라. 죽음을 피하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죽음으로부터 달아나지도 말라. 죽음을 보라. 그러면 단지 죽음을 보는 것만으로, 이쪽에서 볼 때에는 죽음으로 보이던 것이, 그 안으로 좀 더 들어가보면 바로 그것이 삶이었음이 드러나게 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때 물결은 바다가 된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사는 법을 배워라. 그대가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그대는 죽는 법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죽기를 바란다면, 나는 그대에게 사는 법을 가르치겠다. 왜냐하면 그대가 일단 사는 법을 배웠다면, 그대는 죽는 법 또한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연장시키는 데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삶의 의미는 삶의 강렬함 속에 찾아온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수한 생을 살면서도 살 수 없었던 젠체적인 삶을, 한순간 동안에 살 수 있다. 그것은 삶의 문제이다.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이 없는 사람만이 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죽음의 두려움은 인간을 벌벌 떨게 만든다. 그는 결코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다. 그는 언제나 달려간다......우리의 삶 내내, 우리는 달리고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인가? 무엇이 그 두려움인가? 그 두려움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삶을 충분히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의 두려움이 곧 닥칠 것 같고, 현존하고 있다는 두려움이다.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죽음을 겁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죽음을 받아 들여라. 죽음을 초대하라.
우리의 모든 과거의 기억들이 생각들이다. 생각과 생각들을 모두 연결해 주는 연결망이 있으며, 우리는 거기에 매달리고 있다. 우리는 그 생각들이 죽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대의 생각들이 죽게 하라. 죽은 것은 죽은 채로 남게 하라. 그것을 살려 두려 하지 말라.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살려주려 한다....죽은 것은 죽어 있게 하라. 과거는 과거가 되게 하라. 그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보내 버려라. 그대의 기억 속에 간직해 둘 필요조차 없다. 그것과 작별하라. 그것이 떠나도록 하라. 어제는 어제 끝났다. 이제 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것은 그대를 계속 지배한다.
강물에 떠가는 나뭇잎을 보라. 떠 가는 나뭇잎의 기쁨과 즐거움은 실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나뭇잎에게는 어떤 근심도, 어떤 장애도, 어떤 다툼도, 어떤 걱정도 없다. 나뭇잎은 매우 영리하다. 무엇이 나뭇잎의 영리함인가? 나뭇잎의 영리함은, 나뭇잎은 강을 자신의 배로 만들었으며 이제 그것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나뭇잎은 강물이 데려가는 곳이면 어디나 갈 준비가 되어 있고 기꺼이 가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나뭇잎은 강물의 힘을 무너뜨린 것이다. 나뭇잎은 강물에 대항해 싸우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강은 나뭇잎에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다. 나뭇잎은 어떤 저항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단지 떠 갈 뿐이다. 그리하여 나뭇잎은 완전한 조화 속에 있다. 왜 그런가? 이제 나뭇잎은 강과 조화되려 애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뭇잎은 단순히 떠 간다. 그것이 전부이다. 강물이 데려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나 나뭇잎은 간다. 따라서 물에 떠 가는 나뭇잎을 마음 속에 간직하라. 그대는 삶의 강물 속에서 이와 같이 떠 갈 수 있는가?
삶이 무엇일까? 죽음은 무엇일까?...죽음은...우리가 살고 있었던 신체인 그 집을 떠나고, 새로운 집을 향한 여행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집을 떠나 또 다른 집을 향해 출발한다. 이 집은 한정 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집은 하나의 기계이다. 그것은 낡았다. 그것은 지쳤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떠나야 한다.
그대의 생명에너지는 항상 움직이고 있어, 위쪽을 향해 여행하지 않으면 아래쪽으로 여행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라. 생명에너지는 결코 정지할 수 없다. 각성의 세계에서는 기다림도 없고 멈춤도 없다. 내려서 쉴 수 있는 정거장이 없으니, 위로 아니면 아래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매 순간마다 삶은 움직이고 있다. 의식을 끌어 올려, 이 의식들을 높은 곳에 머무르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 볼 수 있도록 해야 할 때가 왔다.
태양광선을 렌즈에 통과시키면 즉시 불이 일어난다. 응축된 빛은 불을 만들어 낸다. 불이 밀도를 잃어갈 때, 그것이 희미해질 때 빛이 남는다. 불붙은 석탄 속에는 아주 농축 된 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이 있다. 빛이 응축되면 언제나 불이 생성된다. 빛이 희미해질 때, 즉 빛의 농도가 감소될 때, 그 때는 빛만 남게 된다. 밀도가 감소할 때 어둠이 증가한다. 밀도가 증가함으로써 빛이 증가한다. 태양을 향해서 여행을 한다면 빛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태양 표면에서는 광선의 밀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나는 무의식과 의식 상태에 같은 원리를 적용한다. 기본적인 원리는 주의력이다. 주의력의 유동성, 밀도, 희박성, 견고성이, 깨어있는 상태와 잠들어 있는 상태, 무의식 상태와 의식 상태를 결정한다....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움직이는 요소는 주의력이다.
실제로 그것이 이해 밖에 있다면, 어떻게 그에 대한 대답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누구든 조용히 있어야 한다. 대답할 필요가 없다.....철학은 결코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제공하지 못했다. 모든 철학은 근본적으로 부정직하다.
무의식 상태에 떨어지는 것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이용되는 장치이다....통증이 너무 심할 때는 더 이상 그 통증으로 인한 괴로움을 겪지 않기 위하여 무의식 상태에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의 정신적인 속임수이다. 통증이 사라지지 않을 때, 오직 다른 대안은 마음의 스위치를 끄는 것이다. 스위치를 끄면 통증에 대해 각성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무의식 상태가 되는 것이 견딜 수 없는 통증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견디지 못할 정도의 통증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동안만 통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통증이 견디지 못할 정도에 이르게 되는 순간 그대는 사라진다. 그래서 견딜 수 없는 통증은 결코 느끼지 못한다....사소한 질환이라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으킬 정도의 생각을 하는 한 우리를 두렵게 만들어 우리는 무의식 상태가 된다. 바로 이 죽음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죽인다.우리는 의식을 잃고 그러한 무의식 상태에서 죽음이 일어난다.
신체와 의식의 분리가 죽음이다. 이 분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 그것은 다만 연결이 풀려 없어진 것이고, 연결이 단절 된 것일 뿐이다. 그것은 의복을 바꾼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각성상태로 죽은 사람은 실제로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는 죽음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환영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누가 죽는다, 그리고 누가 죽지 않다는 말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어제까지 삶이라고 불렀던 것이, 다만 유대 관계였을 뿐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것이다. 그 유대관계가 깨졌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의미로는 유대관계가 아니다. 아마 그것은 새로운 연결, 새로운 여행일 것이다....
죽음의 사건은 그와 같은 현상에 속하는 일련의 사건들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 마지막 사건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분리 과정일 뿐이다. 하나의 관계, 하나의 질서가 다른 하나의 관계, 다른 하나의 질서로 대치된다.
열반 (nirvana) 은 우선 죽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그것은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열반은, 우리가 죽음이라고 이해했던 것이 전혀 죽음이 아니라는, 우리가 삶을 의미한 것이 실제로 삶이 아니라는 실체의 각성을 의미한다.....죽음이 사회적 환영인 것처럼 삶 또한 사회적 환영이다. 열반은 이 두가지 본질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이다......삶은 신체 속에 있을 때만 체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보는 것은 삶의 진실이 아니다. 완전히 각성하고 있을 때만이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진실은 무의식 정도에 비례해서 그만큼 거짓으로 오염된다. 사물은 잠들어 있는 정도만큼 왜곡되고 비뚤어져 보인다. 우리에게 보이는 사물은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은 거짓이고, 그것은 환영이라고 지적해 주면 그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내가 명샹, 또는 쿤달리니, 또는 영적 수련의 기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을 탐구하는 방법들이다. 그대가 본 것이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때, 이 모든 기법들은 의미가 없게 된다. 모든 수단들이 쓸모 없게 된다.....내가 영적 수련의 모든 기법들이 거짓이라고 말할 때, 그런 의미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결코 잃어버릴 수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무엇을 성취하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붓다는 "그 질문은 의미가 없다.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성취라는 의미로 묻는다면, 나는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분명히 나의 노력은 허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했던 방법을 따르고 내가 했던대로 하라고 나는 말하겠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잃었다. 나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것을 잃었다. 나는 실제로 그 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내가 있다고 믿었던 것을 잃었다. 내가 찾아 낸 것은 언제나 알려져 있는 것으로,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찾아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거짓으로 둘러싸인 것,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그것이 내가 찾아낸 것이다."
이 우주에서는 자연적인 것만이 일어난다. 비자연적인 것은 어떤 것이든 일어날 길이 없다. 어떤 것이든 생긴 것은 다 자연적이다.....자연은 무한한 가능성의 쌓임이다....어둠은 자연적이고 빛도 자연적이다. 넘어지는 것도 자연적이고 일어서는 것도 자연적이다. 우리는 항상 무한한 수많은 길들이 나타나는 교차로에 서있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것은 무엇이든 간에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고 선택하는 능력 자체도 그렇다는 사실은 흥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될지라도 자연은 우리를 그 길 바로 끝까지 데리고 갈 것이다. 자연은 매우 협조적이다. 우리가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다 해도 길을 치우기 시작하고 우리가 나아가도록 안내한다. 자연은 우리를 말리려 하지 않는다.....사는 것도 자연적이고 죽는 것도 자연적이다. 자연의 다차원 성을 파악할 수 있다면 내 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苦難도 자연적이고 행복도 자연적이다. 맹인으로 사는 것도 자연적이고 눈뜨고 사는 것 또한 자연적이다. 깨어 있는 것도 자연적이고 잠들어 있는 것 역시 자연적이다. 자연은 끝없는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의 바깥에 살고 있지 않고 우리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의 선택도 우리 안에 있는 자연적인 능력에 기인한다. 각자가 의식적으로 되면 될 수록, 선택하는 능력은 더욱 더 심도가 깊어지고 무의식적이 되면 될 수록 선택하는 능력은 더욱 더 심도가 얕아진다....인간은 의식이 훨씬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더 많은 선택에 직면한다. 신체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역시 마음을 통해서도 선택을 한다.....그것 또한 인간의 선택능력 안에 있다. 인간은 어떤 것이나 선택할 수 있다. 더 의식적인 사람일수록 행복을 위한 선택을 더 할 수 있게되고, 더 무의식적일 수록 비참함에 더 다가가게 된다.....무한한 방향들이 있고, 자연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무한한 선택들이 있고, 자연은 또한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 자연 자체의 확인 할 수 없는 부분인 무한한 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각자는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든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늘에서 조절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면으로부터 조절을 받게 된다.....그래서 무한한 차원과 무한한 선택과, 무한한 선택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감시하는 제어장치 같은 신은 없다. 위에 앉아서 지시하는 관리자 같은 신은 없다. 오히려 내면의 무한한 에너지가 모든 것을 확장시키는 원천일 뿐이다. 그래서 세 가지 수준이 잇다. 하나는 무의식 상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무엇이든 일어난다. 바로 저절로 일어날 뿐이다. 선택이란 거의 없다. 두 번째는 의식 수준으로, 선택이 존재하는 인간 수준이다. 여기서는 무엇이든 일어나지만 선택때문에 일어난다. 여기서는 누구에게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없다.....무엇이 됐든간에 그것은 결국 자기의 선택이다. 인간 수준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든간에 그것은 선택 때문에 있게 된다. 이 수준은 반은 의식적이고 반은 무의식 상태로 이뤄져 있으므로 때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도 한다.....인간 수준을 넘어서면 전적으로 깨어나 있는 상태인 제3의 수준이 있다. 이 수준에서도 선택은 없다. 그러나 첫 번쨰 수준의 선택 없음 상태와 이 수준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선택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함에 대한 문제가 없다.
우리가 모아 놓은 아무리 작은 행복이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 더 앞으로 나아가면 그것들이 떨어져 나가 버리게 될 것만 같다. 우리는 그런 까닭에 건너기만 해야 할 바로 그 다리 위에 집을 짓고 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 곳에 자리를 잡고 그것을 삶의 터로 바꾸었다. 이제 누군가가 우리한테 더 나아가라고 말한다면 주변에 모아 놓았던 것들을 잃어버릴까 걱정을 하게 된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뒤에 남기고 떠난다는 것을 의미함이 확실해 진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려 주세요, 내가 늙어지고,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모든 것을 떨쳐버리기 시작 할 때, 그 때가 바로 제가 서슴없이 앞으로 나아 갈 때입니다. 그 때는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에 더욱 가까이 갈수록 움켜쥠은 더욱 강해진다. 죽음이 접근해 올수록 우리는 두 주먹을 더 꽉 쥐게 된다. 그것이 젊은 사람은 그렇게 까지 비참하게 되지는 않지만 늙은 사람이 아주 비참하게 되는 이유이다. 늙은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욕심쟁이가 된다. 그는 단단하게 붙든다. 이별의 시간에 늙은 사람은 자기가 꽉 붙들고 있는 것들이 수중을 빠져나가지나 않을까 하여 편집증 환자가 된다. 그는 쥐고 있는 손이 풀리지 않도록 자기 소유물을 힘껏 쥐고 있다. 소유물에 대한 바로 이 강한 집착 때문에 추한 노인이 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는다면 비길데 없는 아름답고 고상한 노인이 될 수 있을텐데...펴진 손은 아름답게 보이고, 쥐어진 주먹은 추하게 보인다. 자유로움은 아름답고 집착은 노예이다.
명상은 내면 삶의 궁극적인 일치감이며 최고도의 조화이고 모든 것 중의 가장 심오함이다. 명상은 내면으로부터 지금 삶의 궁극적인 법칙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통증은 무의식 상태에서 확대되는 것과 똑같이, 각성상태에서는 협소해져서 작아진다. 그러한 의식상태에서는 그렇게 많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겪더라도 비참함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는 과장 된 고통으로 괴로워 해 왔다. 행복에 관해서도 똑같다. 우리가 경험했던 행복은 겉으로 나타난 것만큼 크지는 않다. 우리는 역시 과장 된 형태로 그것을 향유하고 있다. 각성상태로 행복을 즐기게 된다면 행복 역시 아주 작아짐을 알게 될 것이다. 비참함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각성상태에서 겪게 된다면 그것 역시 매우 한정되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각성이 커질수록 고통이나 비참함은 더 작아지고 더 한정 될 것이다. 그것들은 의식이 더 깊어지면 아주 작게되어 의미 없게 되어 버린다.....죽음에 대한 공포는 모든 병에 대한 것을 모두 합해 놓은 것과 같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죽음은 병이 아니다. 죽음은 병과 아무 관계도 없다. 그것은 병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다. 병이 죽음에 선행한다 해도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인과 관계는 없다. 사람이 병의 결과로 죽는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 적어도 병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거나 잘못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아마 사실은 정반대일 것이다. 죽음에 다가가기 때문에 병을 움켜 잡는다. 어느 누구도 결코 병으로 죽지 않는다. 죽음이 다가오기 때문에 병을 붙든다. 죽음이 임박하니까 신체가 약해지고 병에 대한 감수성이 증가한다. 병에 걸리기 쉬워지고, 병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삶에 더 가깝게 있었더라면 그같은 병이 해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병이 붙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친근한 것에 너무 묶여 있어서 자신의 사슬을 벗기기만 해도 아픔을 느낀다. 우리는 친근한 것을 붙잡고 있어 그것을 삶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죽음을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은 친근한 것을 꼭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죽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깨어나 있기 위한 첫 번 째 원칙은 비참함을 각성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신체와 별개임을 알 수 있다. 두 번 째는 지켜보는 능력이다.....삶은 전기의 심오한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전자의 위대한 상호작용이다. 인간의 신체를 모든 방법으로 절단하여 분석한다 해도, 마지막에는 전자 외에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이 방의 벽을 부수어서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를 찾아보면 결국, 전기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는가? 실제로 영화 스크린과 삶의 스크린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영화 스크린 위에서도 전자의 상호작용을 발견할 수 있다. 유일한 차이는, 영화 스크린에서는 그 영상이 이차원적이고 삶의 스크린에서는 삼차원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는 영화 속에 없지만, 머지않아 다른 차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지금 그대들을 보는 것처럼 미래의 어느 날, 누구나 그와 똑같은 스크린 위에서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아무 어려움 없이, 배우가 스크린에서 걸어 나와 영화관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머지않아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건 오래 걸리지 않는다.그것은 다만 기술을 개발하는 문제여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인간은 군중 속에서도 외롭다. 주위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 아내, 아들들, 딸들, 아버지, 어머니, 집단으로서의 전 가족 그리고 그 외 모든 것...그러나 인간은 외롭다.
눈은, 자력이 그 곳을 통해 흘러나가는 또 하나의 큰 구멍이다. 그러나 눈을 반쯤 감고 있으면 이 힘의 흐름이 정지된다.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뿐 아니라 눈을 꼭 감고 있을 때도, 에너지가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되면 놀랄 것이다. 눈을 반쯤 감고 있을 때는 에너지가 흐르지 않는다. 눈을 반쯤 뜨고 있거나 반쯤 감고 있을 때에는 눈 안의 회로가 깨지게 된다. 에너지는 밖으로 나가려 하기도 하고,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도 한다. 그래서 에너지는 내부에서 둘로 나뉜다. 반은 흘러나가려 하고 , 다른 절반은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하고 서로를 무력화 시킨다. 그래서 탄트라나 요가 등에서는 눈을 반쯤 뜨고 있는 것이 매우 의미가 있다. 모든 부분으로부터 에너지가 보존되고, 내면에 있는 반대되는 신체를 각성하고 있으면,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된다.
우리의 전생에 대한 기억들은 자연에 의해서 기억해 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 삶의 전반적인 체계에서는 날마다 일어난 일을 대부분 잊어버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시간동안 만들어진 기억을 전부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대가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이 그대의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다. 그대의 의식과 기억 사이의 연결만은 보존되어 있다......그것이 이번 생의 기억일 지라도 그걸 전부 기억해 낼 수 있게 된다면 생활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미래의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으려면 과거는 잊어버려야 한다. 어제 있었던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내일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마음이 계속 비워지게 되기 때문에 앞일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의식에는 나이가 없다. 그것은 오직 조건화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5살, 10살 또는 50살 된 의식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오직 관념일 뿐이다.....날짜, 요일, 그리고 날짜에 기초한 우리의 계산 때문에 나이가 존재한다. 나이는 이 모든 것들의 부산물이다. 내면에서 찾아보면 나이는 없다.
자연의 준비는, 견디어 낼 수 있을 만큼의 기억만을 하게 한다. 그래서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기 전에, 특별한 수련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혼돈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전생의 기억으로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세상을 꿈, 릴라 (leela) 즉 놀이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까지는 어떤 사람을 전생으로 데려가서는 안된다. 일단 이 세상을 하나의 놀이, 하나의 꿈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지난 기억들 속에 다시 살게 되는 순간, 그것이 하나의 꿈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이 됐든간에, 사업상의 흑자나 적자, 아내와의 다툼, 아버지의 화 냄, 아들의 가출, 딸아이의 탐탁치 않은 사람과의 결혼 등, 이 모든 것들이 내일이면 결국 기억의 쓰레기장에 들어가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기억들이 되돌아 왔을 때, 과거에 여러 번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지금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몇 번의 계기들이 어떻게 해서 잠시나마 모든 것들을 생사의 문제처럼 보이게 만들었는지,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계기들이 지금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들은 길 위 어딘가에 먼지 더미처럼 쌓여있다. 그것들은 폐품처럼 쓰레기 더미 속에 들어 있다. 그래서 지난 기억으로 다시 사는 것은 두 가지를 불러 일으킨다. 첫 째, 그렇게 심각했던 것은 무엇이든 간에 결국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님이 입증된다. 그것은 기억해야 할만큼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목숨을 걸만한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이해가 삶을 변형시키게 된다......잠깐만 기다려라. 그러면 모든 것이 기억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든 결과가 기억일 뿐이라면, 보통사람의 삶과, 배우가 스크린에서 사는 삶이 어떠한 차이가 있겠는가? 결국 배우가 하는 것은 무엇이 됐든간에 그 마지막 결과는, 우리가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창작품이다. 이와 비슷하게 전반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가 겪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가 다시 볼 수 있는 필름에 기록된다. 우리가, 삶이라고 하는 것은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한 때 그렇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며 손에 넣었던 기회들은 스크린에 영사된 영화와 흡사하다. 그것들은 필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유일한 차이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필름은 상자안에 넣어질 수 있으나, 삶에서 기록된 필름은 기억이란 용기 안에 저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둘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이다.
사람들은 답을 받을 준비는 하고 있지만 아무도 진실로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답은 하찮은 것이다. 그것은 책에서 찾아볼 수 있고 스승들이 말해 줄 수도 있다. 답을 찾는 것은 완전히 지적인 일이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사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체험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체험을 위한 탐구가 요구된다.
우리는 의지력이 나타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자발적으로 죽음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의지력으로 행할 수 있는 모든 실험 중에서 가장 심오한 것이다. 삶에 유리한 쪽으로 결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렵지 않다. 사실 우리는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을 체험하기 위하여 의지를 이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삶의 완전한 의미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번은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고는 실제로 삶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결코 알 수 없다. 자기가 무한한 가치가 있는 삶의 정수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 유일한 길, 그것은 죽음을 체험함으로써만이 알 수 있다.
자살하는 사람은 다음 생에서는 훨씬 더 연약한 영혼으로 태어날 것이다. 이번 생의 영혼보다 훨씬 무기력한 영혼으로 태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의지를 깨워 줄 기회가 되었던 상황에서 도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험시간이 다가오자, 아이가 교실에서 도망쳐 버리는 것과 같다.
타타타, 如如함은 종교의 궁극적인 꽃핌이다. 그것은 至高의 성취이다. 그것은 전체적인 수용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열려있고 그것을 따른다. 오직 그런 사람은 전적으로 침묵할 뿐이다. 왜냐하면 아주 조금만 화를 내도 불안함이 오래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불만이 아주 조금만 있어도 긴장과 불안이 계속 남아 있게 될 것이다.....그래서 타타타는 근본적인 원리이다. 전 세상에서 발견 된 영적 수련법중에서 타타타가 가장 위대하다. 그래서 붓다의 이름이 타타가트 (Tathagat) 如來이다. 이 '타타가트'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느정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타타타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붓다는 스스로 '타타가트'란 말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그는 "타타가트가 말하기를..."라고 말하곤 했다. 타타가트는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가 버렸다."는 뜻이다. 산들바람처럼 아무런 목적도, 아무런 의미도 없이 왔다가 가 버린다. 미풍이 그대의 방에 아무 이유도 없이 들어 왔다가 나가 버린다. 그래서 산들바람처럼 이유없이, 바라는 것 없이 왔다가 가버리는 사람, 그러한 존재를 타타가트라 부른다.
우리가 한 삶, 한 신체를 저 버리고 다른 삶, 다른 신체로 여행을 시작할 때 이와 똑같이 퍼져 있던 의식이 거두어 들여져서 다시 한번 씨앗이 된다. 그것이 지금까지는 현존으로서 기능을 했고, 이제는 다시 한번 잠재상태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제 씨앗처럼 새로운 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모든 여행들이 씨앗과 함께 시작해서 씨앗과 함께 끝난다. 시작인 것이 역시 끝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여행의 순환은 그것이 시작했던 곳에서 끝난다. 우리는 씨앗으로 시작해서 다시 씨앗으로 끝난다.
'배움과 깨달음 > 좋은책과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물이 그 창조주를 보고 붉혔도다 (4) | 2024.09.03 |
---|---|
인생의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다 (1) | 2024.06.20 |
웨이아웃 - 내려놓음. 완벽한 해결책, 개정판 (0) | 2024.06.06 |
조하리의 창(Johari's Windows) (0) | 2024.04.07 |
배철현의 '위대한 리더 '"자신에게 리더인 사람이 리더다" (3) | 2024.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