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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
Gnosticism , 靈智主義영지주의 세계관은 여러 전통 종교들과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초대 그리스도교에 가장 심오한 영향을 끼쳐 교회법·신조·주교조직이 생겨나게 되었다. 최초의 영지주의자는 시몬 마구스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악이 신성의 내적 분열에서 생겼다는 영지주의의 근본 개념을 소개한 1세기 유대교 이단자였다. 그러나 시몬의 '그노시스'(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는 <신약성서>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영지주의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유대교와 유일신교에 머물러 있었다. 이원론적인 관점은 영지주의가 널리 보급된 이후 헬레니즘 세계에서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확립되었다. 동방의 영지주의는 조금 다른 과정을 겪었다. 전통적인 이란 종교의 영향을 받은 반영지주의적인 마니교는 영혼과 물질의 절대적인 우주적 이원론을 발전시켰다.
영지주의는 여러 전통 종교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었지만, 초대 그리스도교에 가장 심오한 영향을 미쳐 교회법·신조·주교조직이 생겨나게 했다. 영지주의라는 명칭은 그리스어 '그노스티코스'('그노시스', 즉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서 유래했다. 영지주의 사상에 반대한 교부들(185경 이레네오, 230경 히폴리토, 375경 에피파니오)의 글과 영지주의 저작들 자체에 소개되어 있는 영지주의 현상은 신학·윤리학·의식 등과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엄격히 분류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영지주의 분파들은 교육이나 경험적 관찰이 아닌 신적 계시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스런 지식의 구속능력을 공통적으로 강조한 듯하다.
역사학자들은 영지주의 세계관의 기원을 이란의 종교적 이원론, 중기 플라톤 철학자들의 알레고리적 이원론, 특정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의 묵시적 사상에서 찾는다.
이집트인들과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사상에서 기원을 찾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적 종교혼합주의가 충분히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스도교가 등장하고 난 다음이었다. 최초의 영지주의자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몬 마구스이다. 그는 악이 신성의 내적 분열에서 생겼다는 영지주의의 근본 개념을 소개한 1세기 유대교 이단자였다. 그러나 시몬의 '그노시스'는 〈신약성서〉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영지주의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유대교와 유일신교에 머물러 있었다.
이원론적인 관점은 영지주의가 널리 보급된 이후 헬레니즘 세계에서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확립되었으며,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하위의 신 데미우르고스(조물주)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주장을 빌려왔다. 이러한 주장은 〈요한의 외경 Apocryphon of John〉(2세기초), 1940년대에 상(上)이집트 나지 함마디 근처에서 발견된 다른 문서들(통속적인 '영지'를 다루었음), 3세기 콥트어 영지주의 저서 〈신앙의 지혜 Pistis Sophia〉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렌티누스, 바실리데스와 이들 학파가 제시한 지적인 '영지'론은 통속적인 '영지'를 전제로 삼았지만, 그것은 철저히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로 채색되었으며, 때로는 중기 플라톤주의의 견해에 매우 가까웠다(→ 발렌티누스). 동방의 영지주의는 조금 다른 과정을 겪었다. 전통적인 이란 종교의 영향을 받은 반영지주의적인 마니교는 영혼과 물질의 절대적인 우주적 이원론을 발전시켰다.
성격영지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의 무의식적 자아는 신성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행히도 타락했기 때문에 진정한 본질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에 던져졌다.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계시를 통해서 자신의 기원·본질·초월적인 운명을 알게 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이성의 힘을 가지고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철학적 계몽과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교 계시와도 구분되어야 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며, 성서에 의해서 전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의 신비에 대한 직관이다. 영지주의자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이름이나 설명을 초월하는 심연과 침묵이고, 절대자이며, '플레로마', 즉 빛의 영역을 형성하는 선한 영들의 원천이다.
2세기 영지주의 분파들은 히브리와 그리스도교 종교 저서들을 사용하면서도, 영지주의의 의미들을 그것들과 구분하기 위해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영지주의 집단은 학파를 구성하여 권위 있는 가르침들을 전수하고, 해석하며 비밀을 보존한 듯하다. 의식도 분파에 따라 달랐다.
영향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은 대체로 영지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조를 작성하고,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확정하고, 주교(감독)의 권위를 강조한 것은 영지주의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신학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사상체계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체계화되도록 자극했다. 그외에도 그들은 자유·구속·은총 등 그리스도교 저자들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중요한 주제들을 활성화시켰다. 훗날 아우구스티노 신학은 그가 초기에 마니교도로서 경험한 것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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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와 진실, 전설편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이유
타이타닉호가 어떻게 침몰했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한 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그야말로 우연에 우연이 겹쳤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우선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할 당시인 1912년 4월 14일은 달이 뜨지 않았다. 만약에 달이 떠 있었다면 해면 감시원 두 명이 배 옆에 떠다니는 유빙 조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람이 불었다면 빙산에 부딪혀 파도가 부서질 때 생기는 거품이 희미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엔 달도 없었고 바다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둘째, 추운 날씨임에도 해면 감시원들이 임무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해면 감시원 플리트는 빙산을 발견하고 선교에 비상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이것이 불운한 일이었다. 학자들은 선교에 비상 연락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정면충돌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면충돌했다면 피해는 격실 두 개 정도가 부서지는 선에서 그쳤을 것이다. 타이타닉호는 훨씬 덜 기울어짐으로써 격벽이 물에 잠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소 부상자와 사망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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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탈레반
아프가니스탄을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근본주의 집단. 아프가니스탄 남부 파슈툰족 출신의 보수적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아프가니스탄에 출현, 1996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여 극단적인 이슬람근본주의를 바탕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이후 비이슬람문화에 대한 배격과 문화유물·유적의 파괴, 여성인권의 극단적 제한 등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으며,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의 공격을 받아 축출되었다. 이후 근거지 인근에서 지속적인 테러 활동을 벌이면서 미국과 무력 긴장상태를 계속하다가 2020년 2월 평화협정을 맺고 전쟁의 종식을 선언했으나 4월의 포로 협상이 결렬되면서 무장 충돌이 계속되었다. 2021년 미군의 철수 계획 발표 후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으며, 8월 15일 탈레반의 카불 입성을 앞두고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밝히고, 8월 30일 미군이 철수를 완료하면서 탈레반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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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세계사1트로이 전쟁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 전,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름다운 왕비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유혹에 빠져 남편과 딸을 버리고 트로이로 건너간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모욕을 참을 수 없었던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형이자 그리스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던 미케네 왕국의 왕인 아가멤논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내를 되찾기 위한 원조를 청하였다. 동생의 청을 들은 아가멤논은 크게 분노했다. "이것은 비단 너만의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 전체의 수치다. 이번 기회에 트로이를 단단히 혼내주어야겠다." 그는 사신들을 그리스의 여러 나라에 보내어 그들 간의 옛 서약을 상기시키며 트로이 공격에 합세할 것을 호소했다. 그 결과 그리스의 여러 왕들이 이에 찬성하여 제각기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보에오티아 지방의 아우리스라는 항구로 집결했다. 그들의 옛 서약이란 헬레네가 처녀였을 때 그녀의 미모에 반한 모든 그리스의 젊은 영웅들이 모두 그녀와의 결혼을 원하게 되자, 그녀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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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인 100인서태후
청나라 함풍황제(咸豊皇帝)의 비. 함풍제 사후 아들 동치제(同治帝)가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수렴청정을 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동치제 사후 다시 광서제(光緖帝)를 등극시키고 일시적으로 수렴청정을 거두었다가 다시 광서제를 연금하고 실권을 장악한다.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서안으로 피신했다가 되돌아와 근대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꿈을 이루지못하고 1908년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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