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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Ch 40 신앙고백 - 1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네빌 고다드

Ch 40 신앙고백 - 1

柏道 2022. 8. 6. 23:55

Ch 40 신앙고백 - 1
  
 
이제 요한이 갇힌 후에 갈릴리에 오셔,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그 시간이 다 찼고, 하느님의 왕국은 임박해 있더라.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4~15

예수의 사역은 요한의 사역이 유대에서 끝난 후 시작됐다.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할 때는 약 삼십 세가 되어서였더라.
누가 복음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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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의 토양은
하느님의 복음을 위해 경작되었고 써레질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이 세워놓은 구원의 계획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복음을 저술한 작가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전부는 우리 스스로 성서를 경험해서
추론해봐야만 합니다.
그들의 권위는 성서라는 죽어있는 글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작가들의 경험에 있습니다.
그들의 복음서는 하나의 새로운 종교가 아니었고,
아브라함의 믿음만큼 오래된 성서를 완전하게 자신의 경험 속에서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실 것을 미리 알고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더라.” (갈라디아서 3:8)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미리 보여준 구원의 이야기에 맞춰 살았습니다.

복음서를 쓴 알려지지 않은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나타난 성서의 완전한 성취를 강조했습니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는 성서를 성취합니다.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는가?”
(고린도 후서 13:5)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그리스도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과 같은 죽음 안에서
우리 역시 그와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확실히 부활 속에서 그와 하나가 될 것이더라.”
(로마서 6:4)


17세기의 신비가인 조안 쉘퍼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그의 삶을 펼치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천 번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그대 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대의 영혼은 여전히 버림받아 있을지니.
- 에드워드 토마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되,
‘오 어리석은 자들아, 선지자들이 말했던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런 고통들을 겪고 그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하더냐?’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율법과 시편에서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들이 성취되어야 한다는 뜻이더라.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서를 이해하게 하시더라.”
(누가복음 24:2,5,27,44,45)


그렇게 그들이 하느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의미를 알려주어
백성들로 낭독한 것을 깨닫게 하였더라.
느헤미아 8:8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예언적인 청사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복음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미래에 대한 계시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기를 기뻐하였더라.”
(요한복음 8:56)


그것은 그리스도가 깨어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장차 다가올 시대의 삶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일으켜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과 같은 부활 속에서 그와 하나가” 될 것이라는 말은
모든 것에서 하느님이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승리의 날이 오기 전에 인간은 고난의 용광로에서 제련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그대를 고난의 용광로에서 제련했더라.
나 자신을 위하여, 곧 나 자신을 위하여, 나는 그것을 행하리니,
어찌 내 이름을 더럽게 하리요?
나는 나의 영광을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아니하리라.”


하느님과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를 아들의 형상에 맞추려면 고난의 용광로가 필요하고,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형상에 맞추기 위해서도
고난의 용광로가 필요합니다.


“그때 그의 모든 형제들과 그의 모든 누이들과
전에 알았던 모든 자가 그에게 와서...
그들은 주께서 그에게 내리셨던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애도하고 위로하더라...
그리하여 주께서는 욥의 후반을 그의 처음보다 더 복을 주셨더라.”
(욥기 42;11~12)


욥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자신의 한 부분에게 내린 무자비한 시련으로 인한,
죄 없는 희생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말씀하시되, 인간을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라.”
(창세기 1:26)


하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고통이 우리에게 드러날 영광과 비교되지 못하다고
나는 생각하노라.” (로마서 8:18)


여기서 말하는 영광이란 하느님 아버지가 감추고 있던 장막을 걷어내고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을 직접적으로 목격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신비한 구원의 계획은 창조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구약에서 세상에 대해 예언적으로 이야기 한 것은
개개인 안에서 실현됩니다.
모든 것은 저에게 말해졌지만,
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이야기가 제 안에서 재연된 후에,
진정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성서를 경험한 사람은...
성서의 진정한 의미를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하는 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복음을 쓴, 알려지지 않은 저자들은
과거의 상황이나 사건을 역사로서 기록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을 [직접 경험]했던 작가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썼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신들의 초자연적인 경험에 맞춰 구약을 해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의 진리를 입증하는, ‘가장 높은 세계에 대한 증인’이었습니다.


구원의 이야기를 경험하게 되면서,
저의 증언을 그들의 증언 위에 더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입증된 그들의 경험들은 인류에게 주어졌는데,
인류에게는 이 해석을 받아들이느냐 혹은 거부하느냐는
짐이 주어져 있습니다.
경험한 자들의 증언을 들어야만 하고,
그 경험은 자신의 경험과 일치해야 합니다.
성서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를 반드시 경험해야만 합니다.

성서를 쓴 사람들은 예수의 외형에 관해서 묘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이야기가 인간 안에서 재창조될 때,
인간은 “내가 그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와 하나 된 자는 주와 함께 하나의 영이 되더라.
고린도 전서 6:17


“그는 하느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약탈이라 생각지 아니하셨으나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느니라.
그리하여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까지 순종하셨으니,
(인간의)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더라.” (빌립보서 2:6~8)


하느님은 자신의 영적인 형체를 버리고
종의 형체를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열굴 위에 가면을 뒤집어 쓴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약함과 한계에 종속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 즉 골고다로 불리는 [인간의 해골] 속으로 들어간 하느님은
이제 세상의 [구세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더라.
우리의 하느님은 구원의 하느님이시더라.
그리고 주이신 하느님에게,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속해 있더라.”
(시편 68:19~20)


“내가 죽지 아니하면, 그대는 살 수 없노라.
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대는 나와 함께 하리라.”


[밀알]은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한다면, 단지 밀알 하나로서 남게 되더라.
하지만 그것이 죽는다면, 많은 결실을 갖고 오더라.”
(요한복음 12:24)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비밀입니다.
하느님은 확장을 가져오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속박을 던져 놓고, 스스로를 위축시킵니다.
즉 하느님은 죽음의 문, 나의 해골로 들어가서는
무덤 위에 나와 함께 눕습니다.

블레이크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무엇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나는 알지 못하니,
그래서 그대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정말 알지 못한다고 맹세할 것이라.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으니,
오직 하느님만이 긍지를 가질 수 있고,
오직 하느님만이 부끄러움을 가질 수 있더라.


 
“그리고 내가 이것을 확신하노니, 내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 (빌립보서 1:6)

세상 속에 태어나지 않은 형상이 내 안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을 때,
그때 내 안에 오랫동안 감겨있던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펼쳐내십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하늘 위로 올라가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3:13)


하느님은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나의 두개골인,
하느님의 무덤 골고다로 내려왔습니다.


“내가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하여, 나는 나의 생명을 내려놓음이라.
그 누구도 나에게서 생명을 뺐지 아니하고,
단지 나 스스로 그것을 내어 놓으리라.”
(요한복음 10:17,18)

“너를 지우신 이가 네 남편이니, 만군의 주가 그의 이름이라.” (이사야 54:5)

그것은

“주와 하나 된 이는 그와 하나의 영이 되더라.” (고린도 전서 6:17)
“그러므로 하느님이 하나로 만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말라.” (마가복음 10:9)

인간은 하느님의 분광이지만, 하지만
죽음의 잠이 지나갈 때까지는
하느님의 아내일 뿐입니다.

“그대 자신을 일어나게 하소서! 오! 주여, 왜 잠속에 있으시나이까?
일어나소서!” (시편 44:23)

그가 일어났을 때,
“나는 그(HE)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잠에 들기 위해 내 안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잠에 들었을 때, 하느님은 [하나의 꿈]을 꿉니다.
그는 ‘하느님이 나’라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하느님은 내가 됩니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윗이 모습을 드러내, 성령 안에서 나를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는 ‘내가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
누구도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오지 못하느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더라.” (요한복음 14:6,9)


[깨어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아버지에게 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이더라.” (요한복음 10:30)
고 말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죽음에서 불멸의 생명까지 이어집니다.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서,
자신이 숭배할 수 있는 존재로서, 그리고
자신이 복종할 수 있는 존재로서
그리스도를 찾고 있는 것은
내 안에 살고 있는 아버지를,
즉 복음서의 그리스도가 자신과 하나라고 주장했던
바로 그 아버지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그리스도는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불멸의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에 대한 갈망은
[신약]의 끝을 맺는 외침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소서, 주 그리스도여! (요한계시록 22:20)
“그대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냐?” (고린도 후서 13:5)
“그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 형태로 거하시나니.” (골로새서 2:9)

이것은 비유적인 몸이 아닌, 진짜 우리의 육신입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는

“여러 시대와 여러 세대 동안 감추어진, 그대 안의 신비,
곧 영관의 희망이더라.” (골로새서 1:26,2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가
인간의 눈을 멀게 하여
아버지의 [진정한 본성]을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주 예수는 아버지로서의 주 예수가 되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성경에 대한 역사학적인 연구는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한 근거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예수는 주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더라.”
(고린도 전서 12:3)

인간의 목적은 [아버지를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는 오직 그 아들만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아들을 알지 못하고,
아들과 아들이 그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아버지를 알지 못하더라.”
(마태복음 11:17)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땅 위의 어떤 사람도 그대의 아버지라 부르지 말거라,
그것은 그대는 하나의 아버지, 즉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 한 분만이 있기 때문이라.”
(마태복음 23:9)

그리고 그 하늘나라는
“그대 안에” (누가복음 17:21)
있습니다.


다윗은 말했습니다.

“나는 주께서 선포하신 것을 말하겠노라. 주께서는 내게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아들이니, 오늘 내가 그대를 낳았노라.” (시편 2:7)


다윗과 하느님 아버지의 부자 관계는
어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비교할 수 없었고,
전적으로 세속적인 관계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는

“피로도 육신의 뜻으로도 태어나지 않았으며,
오직 하느님의 뜻으로만 태어났더라.”
(요한복음 1:13)


다윗이 영 안에서 나의 주라고 아버지를 부를 때처럼,
오직 [일인칭 단수]에 [현재 시제]의 *관점에 (역주: 아이엠(IAM)을 말합니다.)
서 있는 사람만이 아버지를 알아봤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말하기를,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더냐?”

그들은 예수에게 말하기를,
“다윗의 아들이나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성경 안에서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더냐...
그렇게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부른다면,
어찌 다윗이 그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더냐?”


유대인이 생각하기에,
역사는 모든 인류와 그들의 경험들이 모두 합해진 [거대한 총합]이라 생각했고,
[하나로 응축된 이 시간을 영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영원]이라는 시간 안으로 모든 인류가 융화되어 들어가고 있고,
이 [영원]이라는 시간으로부터 모든 인류가 나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영원함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시어,
하느님께서 지으신 일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람이 찾아낼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11)

[영원]에 대한 히브리어는 또한 젊음, 청년, 젊은이를 뜻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고 아브넬에게 말했습니다.
“이 젊은이가 누구의 아들이냐... 누구의 아들인지 물어보라”
그리고 다윗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습니다.
“그대는 누구의 아들인가. 젊은이?”
그러자 다윗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대의 종 베들레헴의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라.”
(사무엘 상 17:55~58)


누구의 아들...? 성경에서 다음 부분 모두를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사무엘 상편 17:55,56,58 마태복음 22:42.
그 질문은 아들에 관해서 묻는 것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에 관해서 묻는 것입니다.
다윗이 알아볼 수 있는 아버지는 진정한 불멸의 아버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윗은 말했습니다.
“나는 이새의 아들이니라.”
이새(Jesse)는 Be동사의 모든 형태입니다.

다윗의 대답은 “나는 그의 아들이니라.”
여기서 그의 이름은 “아이엠(IAM)”입니다.
즉 다윗의 대답은
“나는 아이엠의 아들이니라.”, “나는 주의 아들이니라.”입니다.

하느님을 부르는 이름 중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었던 이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아 말하라,
‘아이엠(IAM)’이 나를 그대에게 보냈노라(I AM has sent me to you).”
(출애굽기 3:14)


그는 불멸의 ‘아이엠(I AM)’ 입니다.
하느님이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낸 것은
‘전능한 하느님(God Almighty)’(출애굽기 6:3)입니다.
자신을 [두 번째로] 나타날 때는 ‘영원한 아이엠(The Eternal I AM)’(출애굽기 3:14)
으로 드러냈습니다.
하느님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는 ‘아버지(The Father)’(요한복음 17장)라고
나타냈습니다.
오직 아들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어떤 인간의 눈으로도) 하느님을 이제껏 본 적이 없으나,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만이 그를 알아보더라.” (요한복음 1:18)


인간의 마음 안으로 들어간 자는,
영원한 [아이엠]인 하느님 바로 그분이자 하느님의 독생자,
곧 영원한 청년 [다윗]입니다.

이 영원한 죽음의 정점에서
고난의 용광로를 통해
자신의 여정이 끝날 때,
인간은 다윗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나는 다윗을 찾았더라... 그는 나에게 소리쳐 말하게 될 것이니,
그대는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그리고 나의 구원의 반석이시나이다.”
(시편 89:20,26)


나는 나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하느님으로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성경에서 다윗이 영 안에서 나를 아버지라 불렀을 때처럼,
이렇게 성서와 일치하는 관계를 통해
나 자신에게 하느님으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로 나 자신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내부로부터 얻어진 지혜는
어떤 조금의 의심도 자리 잡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기꺼이 내 안에 그의 아들을 드러낼 때에,
나는 살과 피로 의논하지 아니하였더라.” (갈라디아서 1:15~16)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그 계시의 실체를 확실히 믿게 되고,
그것 이외의 것을 믿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초자연적인 성서의 경험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 일어나는 곳과는 동떨어진 영역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전체는
[역사적인 상상력]이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성으로 보았던 세상’보다 ‘더욱 진실하고 더욱 생생한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오, 그대가 의심 없이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나는 과연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오, 나는 단지 내가 본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
내가 있었던 곳에
그대를 데려올 때까지, 어떻게 말해야 하며,
아니면 어떻게 그대가 그것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마이어


http://baecs55.blog.me/120192567322
 
Ch 40 신앙고백 - 7 (편집 중...)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진정한 은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더라.”
(요한복음 3:16)

하느님 자신을 인간에게 보낸 것은
하느님의 [불멸의 계획] 이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아버지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켜 줄 사람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입니다.

영 안에서 다윗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에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자신에 대한 개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즉 자아의 이전의 모습으로서 존재하던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제 자신의 자아는 더 거대한 자아를 포함하게 됩니다.
그 자아는 다름 아닌, 다윗이 영 안에서 주라고 부르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내하여 참아낸 아브라함은 약속을 얻었더라.” (히브리서 6:15)

아들이 우리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후,
그 아들이 우리가 아버지임을 밝혀냈을 때에
우리가 [경험]하게 될 [은총]은
세상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의 [최종적인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밑에 깔려있는 권위는 두 가지의 증거입니다.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내적인 증거를 나타내고,
다른 하나는 성서가 진실이라는 외적인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예수가 구현된 사람 안에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스스로 들어오셨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서에서 우리 [인간이 경험할 것]이라고 말한,
징후에 의해 확인될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
그러하지 못하겠거든 행한 그 일들을 보고 나를 믿으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할 것이요,
또 이보다 큰 일들을 할 것이리라.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 (요한복음 14:10~12)


“나는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세상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가노라.” (요한복음 16:2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더라.” (요한복음 10:30)

하느님의 시선은
우리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예수의 삶에서,
독생자 아들인 다윗이 우리를 아버지라고 불러,
아버지임이 밝혀진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오직 우리가 징후들을 경험했을 때만
하느님의 목적과 성서의 목적은
우리 안에서 성취됩니다.

“성서는 내 안에서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느니...
그것은 나에 대해 쓰인 것들이 그것의 성취를 갖기 때문이라,”
(누가복음 22:37)

 
하느님은
하느님 자신을 우리 모두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아버지였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 줄 것은,
영 안에서 우리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독생자 다윗입니다.

“그래서 만약 아들이 그대를 자유롭게 만든다면,
그대는 정말로 자유롭게 될 것이라.” (요한복음 8:36)

“그리고 다윗이 그 필리스틴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
그의 손에는 필리스틴 사람의 머리가 들려 있더라.
사울이 그에게 말하기를 ‘청년아, 그대가 누구의 아들이더냐?’”
(사무엘 상 17:57,58)

사울이 이처럼 물었던 이유는
사울은 왕이 이스라엘에서 자유를 약속했었던
다윗의 아버지가(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기를 “너희가 올라오는 이 사람을 보았느냐?
분명히 그가 이스라엘을 모독하려고 올라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그에게 큰 재물로 부유케 하고 자기 딸을 그에게 줄 것이며
그의 아비의 집을 이스라엘에서 자유케 하리라.” 사무엘상 17:25)
누군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왕은 이스라엘의 적을 물리치는 자의 아버지를
자유롭게 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구원에 관한 계획이 아주 직접적이면서,
초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존재를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계획의 성취는 바로 [인간 안에서] 일어납니다.
[죽은 자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계획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새로이 다시 태어났더라...
죽은 자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베드로 전서 1:3)

부활한 자는 여러분 안의 그리스도, 즉 여러분의 아이엠(I AM)입니다.
부활은 [죄]와 [죽음]의 몸으로부터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가 자유로워진 것],
그리고
하느님이 신성한 인간의 형체인,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신성한 몸으로 돌아가는 것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하느님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은

“그가 때가 되어 성취되기 위하여 하나의 계획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내어 놓았더라.”
(에베소서 1:9,10)

“만군의 주께서 약속하셨더라. 내가 계획을 세운대로,
그것은 그렇게 될 것이며, 그리고 내가 목적한 대로,
그렇게 그것은 세워질 것이더라.” (이사여 14:24)


하느님이 자신의 계획을 성취했고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살고 행동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내 안에,
그리고 우리 모두 안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로,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 안으로 스스로 들어왔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복음서의 익명의 작가들 안에서 깨어났었고,
계속해서 개개인들 안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작가들의 증언을 믿으시고,
[이미 성취된 목적]에 다가가는 새로운 방법을 찾지 마십시오.

아마도 하느님의 복음을 기록한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 관한 설명은
이 말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일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는 들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눈으로 목격하였으며,
우리가 그것을 주목하였으며, 그리고 우리의 손으로 직접 만졌던,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라...
우리가 보았던, 그리고 들었던 것을
우리는 그대에게 선포함이라.” (요한 1서 1:1,3)


믿음은 그것이 경험될 때까지는 완성되지 못합니다.

자신의 눈으로 생명의 말씀을 목격했고 사용했던 사람들은
그것을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보내져야만 하고,
자신이 그 말씀을 전하는 사자라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 멍에를 그대가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영혼에 안식처를 찾을 것이더라.”
(마태복음 11:29)
고 말한 이는 부활한 그리스도 사람이자 두 번 때어난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서
성서에 대한 지식을 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지식들은 사색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놓은 지혜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받아들인 것은 
여러분이 종교적인 진리로 알고 있는 엉킨 생각들 속에서
여러분의 길을 잃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고,
[아버지에게로 이르는 유일한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하느님의 복음을 설교하도록 보내진 이는 영 안에서
신들이 심판을 여는 신성한 모임 안으로 초대됩니다.
 
 
“하느님은 신성한 회의를 개최하고, 신들 가운데에서 그는 심판을 열더라.”
(시편 8:21)
 
히브리어인 엘로힘(Elohim)은 여럿이면서 하나로 묶인 통일체,
다른 것들로 만들어진 하나를 말하는데,
하느님과 신들로 번역이 됩니다.
부름을 받은 사람은 엘로힘, 깨어난 그리스도 앞에 초대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그는 바울이 했던 말로 대답합니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 이들 세 가지나이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나이다.” (고린도 전서 13:13)

그 순간에 하느님은 바울을 감싸 안았고,
하느님과 바울은 융화되어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주와 합해진 자는 그와 하나의 영이 되더라.” (고린도전서 6:17)

고 말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이상 둘이 아닌, 하나이더라.
그러므로 하느님이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을, 그 누구도 나누지 말지어다.”
(마태복음 19:6)

우리는 모두 하나의 인간이 되기 위하여,
곧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부름을 받습니다.

“주께서 곡식을 탈곡할 것이니,
그리하여 그대들은 하나씩 모여질 것이더라.
오 이스라엘의 백성들아.” (이사야 27:12)

이렇게 깨어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은
성령(Holy spirit)에 의한 세례입니다.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부활하기까지,
“메시아의 날”, 곧 30년의 기간은 흐릅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하느님 복음의 메신저로서
그리고 전령으로서, 자신의 사명에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푸욱 빠져,
그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나에겐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것은 나에겐 숙명이기 때문이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재앙이 나에게 닥칠 것이더라!”
(고린도 전서 9:16)

고 느낄 정도로
그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신성한 구속이 마치 예레미야를 구속했던 것처럼
그를 몰고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말했습니다.

만약 내가
나는 그에 관해서 언급하지 아니할 것이고
즉 그의 이름 안에서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다면
내 심장 안에서는 뼈에 사무치는 타는 불같은 것이 있어서,
이것을 견디고 있기 지쳐서,
그렇게 할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9

이 30년 기간의 마지막은
그 기간의 끝이 오는 것을 관찰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극적으로 갑작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시작할 때가 나이가 서른쯤 되셨더라.”
(누가복음 3:22)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직접적이고,
일인칭 단수에 현재시점(아이엠 I AM)의 경험우로 펼쳐집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이제 3년하고 반년의 기간이 걸립니다.
그가 부활하고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시작됩니다.

죽은 자는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고ㅡ
잠으로부터 깨어나기 시작했다.
만물은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생명 속으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윌리엄 블레이크

Ch 40 신앙고백 - 10
 
 
침상에 누워 잠을 자면서,
“거리에는 뛰노는 소년과 소녀로 가득 메워 있는” (스가랴 8:5)
 하나의 마을이 구원된 세상을 꿈꾸는 동안에,
그의 두개골의 근저에 놓인 강렬한 진동이 그를
“깨어나라, 잠자는 자여, 그리고 죽은 자로부터 깨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가 그대에게 q;ㅊ을 가져다 줄 것이더라.” (에베소서 5:14)
고 말하면서 깨웁니다.
 그가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잠들었던 방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두개골(골고다)에 있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의 두개골은 완전히 봉인된 무덤입니다.
그는 그가 어떻게 그곳에 들어왔는지를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하나의 절실한 욕망은 그곳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두개골의 밑을 밉니다.
그리고 무언가가 굴러 나가면서 작은 출구를 만듭니다.
그는 그 출구를 헤치고 자신의 머리를 밀어 넣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에서 아이가 태어날 때처럼,
자신을 조금씩 밀어 그 출구 밖으로 빠져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두개골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몸을 봅니다.
등을 바닥에 눕히고 있는 백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큰 병에서 회복되고 있는 사람처럼 몸을 이쪽저쪽으로 뒹굴고 있습니다.
“그대는 슬퍼할 것이나, 그대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더라.
한 여인이 산고 중에 있다면
그녀의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에, 슬픔을 가지거나 ,
아이가 그녀에게 안겨질 때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녀는 더 이상 고통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더라.” (요한복음 16:20,21)

매서운 고통 안에서 산고를 겪다가,
기쁨 속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쓰디 쓴 눈물 속에서 뿌린 씨앗을,
기쁨 속에서 그 결실을 거두는 것과 같더라.
윌리엄 블레이크


“그대는 위로부터 태어나야만 하느니라.” (요한복음 3:7)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우니, 그곳은 우리의 어머니더라.” (갈라디아서 4:26)

그의 무덤이었던 두개골은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자궁이 되었습니다.
그를 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그의 두개골 안에서 일어나는 진동은
마치 하나의 거센 바람처럼 들리면서, 지금 외부에서 들려오는 듯 나타납니다.

그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그의 몸이 있었던 곳을 돌아보자, 몸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세 명의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랍니다.

그가 겪은 이런 경험은 아브라함에게 행해진 약속의 성취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는 그에게 나타났더라...
그는 자신의 눈을 들어 살피자,
보라, 세 명의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 있더라...”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그대의 아내 사라는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그녀는 장막 안에 있나이다.”
주께서 이삭에게 말합니다.
“내가 반드시 생명의 시간에 맞춰서 그대에게 돌아올 것이고,
그대의 아내 사라는 아들 하나를 가질 것이더라...
아브라함은 그에게 낳아준 그의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고 불렀더라.
(그는 웃습니다.) (창세기 18:1,2,9,10, 21:3)
세 명의 사람은 갑자기 나타났고, 그들은 다가오는 인기척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이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 역시 바람에 의해 방해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젊은이는 가장 방해받았으며 교란되는 원천을 조사하기 위해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베넷저고라에 쌓여, 바닥에 눕혀 있는 한 어린 아이에게 끌립니다.
그는 아이를 들고서, 부활한 인간의 아이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이를 침대에 눕힙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이를 들어 올리고는 말합니다.
“잘 지내지. 내 사랑스러운 아가?”
그 아이는 웃음을 보이고 첫 번째 막은 끝이 납니다.


“그 지역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라...
그리고 그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마을에 그대들을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베넷 옷에 싸여 여물통에 누인 아기를 보게 되리라.”
(누가복음 2:8~12)

하느님은 구원자로 불리기에 그 분이 태어나더라.
(이사야 43:3, 45:15, 누가복음 1:47)

계시가 이루어진 후에,
그는 고대의 성서에서 자신이 겪은 초자연적인 경험에 대한 암시와 전조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서에서 찾아내서는 이렇게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은 내게 이야기되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 후에
바람이 소리를 어떻게 내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에드워드 토마스


그리스와 유대에서는 바람이라는 단어가 바람뿐만 아니라
영혼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는데,
바람에 대한 예측할 수 없는 성질이
신성이 돌발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무엇보다 더 쉽게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의 구원의 계획은
고대 성서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개인이 *경험할 때까지] 진정으로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말씀하셨고,
하느님이 예언한 것은 모든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예언은 예상과는 다르게 그것이 의도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이해됐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날에 그는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서 우리에게 말하셨더라.”
(히브리서 1:2)

인간이 부활해, 위로부터 태어난 후로부터 5개월이 지난 때에,
처음 활동을 시작했던 것과 유사한 진동이 자신의 머리에서 시작됩니다.
이번 진동은 자신의 머리 위쪽에서 자리 잡습니다.
그 진동은 폭발할 때까지 점점 세기가 강해집니다.

폭발이 일어난 후에
검소하게 꾸며진 방 안에 자신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열려진 문 쪽에 기대어, 그리고 전원적인 풍경을 보고 있는 자신의 아들인
성경속의 다윗이 있습니다. 십대 초반의 어린아이입니다.
다윗은 그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 부활한 자는 자신이 다윗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그의 아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두 명의 사람이 다윗을 음탕하게 쳐다보고,
아버지는 그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필리스틴의 거인을 이긴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자신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동안에 두 번째의 막은 내립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는,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가 되도록 합니다.


“네가 주의 명령을 전하노라. 주께서는 내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이르시더라.”
(시편 2:7)


Ch 40 신앙고백 - 12
 
 
세 번째 막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드러난 지 4개월 후에 펼쳐집니다.
시작부터 끝이 극적입니다.

번개 하나가
부활한 인간의 몸을 그의 두개골에서 척추의 밑 부분까지 나누어 놓습니다.
이제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 휘장을 가로질러서,
즉 자신의 몸을 가로질러서 열립니다.

계시는 항상 [인간적인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인간의 대리자]는 결코
[인간]을 초월한 영역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세상에 오실 때에 말씀하시길
‘주께서는 희생제물과 예물을 바라지 아니하시고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주께서 죄로 인한 번제와 희생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때 내가 말씀드리기를,
오 하느님이여, 보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에 관하여 기록한 것과 같이,
주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왔나이다.’고 하였노라.”
(히브리서 10:5~17, 시편 40:68)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은 구원했으며,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했습니다.
자신의 척추 밑에서 황금색의 투명한 빛으로 이루어진 웅덩이를 보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는 이제

“예수의 피로 인하여 거룩한 장소에 들어갈 믿음이 있나니,
이는 그가 휘장, 곧 그의 육체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열어놓은 새롭고 살아있는 길에 의해서이더라.”
(히브리서 10:19,20)


그가 황금색의 투명한 빛, 즉 하느님의 피이자 살아있는 물에 관해서 생각할 때,
그는 그것에 동화되고
그것이 자신의 신성한 창조주이자 구원자인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압니다.
마치 나선형의 번개처럼,
그는 자신의 척추의 뼈를 기어올라 자신의 두개골에 있는
하늘나라의 거룩한 장소에 격렬하게 들어갑니다.
그의 머리는 마치 천둥처럼 울려 퍼집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간도 들려야 하리니.”
(요란복음 3:14)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의 왕국은 격렬하게 다가오니,
하늘나라의 왕국은 격렬함에 있는 자가 힘으로 취하더라.”
(마태복음 11:12)


새로운 세상은 그런 자에게 열렸습니다.


2년 9개월 후에,
즉 예수가 사역하는 3년6개월의 기간을 채우는 시기에,
구원 드라마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막은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내려왔더니,
하늘나라에서 목소리가 나기를,
‘그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대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3:22)


부활한 자의 머리는 갑자기 투명하게 됩니다.
위에서 한 마리의 비둘기가 마치 떠다니듯이 맴돌면서, 사랑스럽게 그를 쳐다보며
그가 벌린 팔에 내려오고, 그는 비둘기를 자신의 얼굴로 가져오니,
비둘기는 그의 얼굴과 머리와 목에 키스를 하면서 사랑으로 그를 가득 채웁니다.
하느님의 음성의 딸인, 한 여성이 그에게 말합니다.
“그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드라마는 그곳에서 끝을 맞이합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아들, 곧 부활의 아들입니다.
그는

“더 이상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이니,
그는 하느님의 아들, 곧 부활의 아들이기 때문이라.”
(누가복음 20:36)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요한복음 10:30)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더라.
(요한계시록 22:16)

그는 인류의 아버지이자 인류의 자손입니다.
인간이 되어서는, 즉 제한과 불투명의 한계 속에 들어가서는,
다시 인간의 껍질을 깨고 투명함 속으로 자신을 확장시켜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냅니다.
그는 이제

“모세가 율법에서 기록하였고, 또한 예언자들이 기록한 이를 찾아냈더라.”
(요한복음 1:45)


하느님의 복음을 쓴 익명의 작가들은
죄와 죽음의 육신으로부터 해방된,
더 이상은 죽음을 맛보지 않는, 두 번 태어난 자들, 하느님의 자녀들,
부활의 자녀들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장을 마치면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글을 인용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신성한 계시들을 묶어놓은 책 속에 등장하는,
모세와 아브라함 같은 인물들은
우리 유한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이야기에 나타나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 이름들은 [어떤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
그리고 대표하는 어떤 개체들과
어떤 상태에 대한 [비전]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나는 이런 [다양한 상태]들을 [상상력] 안에서 [목격]했다.
당신이 성경속의 인물들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들은 [하나의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다가간다면
그들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어 나타난다.



성경에는 세속적인 역사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역사]이자
그 모두가 현세적인 이야기를 넘어서 있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