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다석 류영모의 명상록-3.만드신 경위 創造始末 본문
다석 류영모의 명상록
3.만드신 경위 創造始末
뭇 사람이란 다른게 아니라 사형수 衆生無他死刑囚
몸이 죽기까지 처형될 날만 기다려 終身有待執行日
헛되이 태어난 처음부터 판결은 선고되고 判缺宣告虛誕初
오래산다 일찍 죽는다지만 한 유예기간 猶豫期間壽夭日
1959 12.1
始末(시말):경위 虛 :헛될 허 待:기다릴 대 猶豫(유예):날짜를 미루다.
壽夭(수요):오래 사는 것과 일찍 죽는 것
침팬지와 사람의 유전자인(DNA)는 98%가 같다.5백만 년 전까지는
공동 조상을 가졌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공동조상의 유인원
을 프로콘솔이라 이름 붙혔다.지금의 침팬지들이 하루아침에 사
람처럼 바로서서 걷고 ,말을 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면 얼마나 놀
라운 일일까.그런데 사실은 털 없는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1만 년 전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을 하였던 것이다.인간이 불을 쓰기
시작한지가 50만년 전이고 ,원시 농업을 한 지가 1만년 전의 일이
다.창세기에 아벨과 가인이 유목이나 농사를 하면서 天祭를 지
냈다는 것은 이를 말해 준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것은 털 없는 원숭이가 하느님을 그리워하게
되었을때부터라 할 것이다.카시이러는 언어
와 신화에서 언어와 신화는 한 뿌리에서 돋은 두 가지와 같다고 하
였다.사람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그리워하게 된 흔적이 신화로
남아있고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기 위해 말을 하게 된 것이
다.그 이전에는 오늘날의 침팬지와 별로 다르지 않은 수준의 의사 소
통만을 했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는 창세기 신화나 단군신화 같은
여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신화의 의미는 자못 깊다고 하겠다.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어린이의 생각처럼 유치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
다.다만 어린이가 그린 아동화와 대화가가 그린 추상화에 어딘가 상
통하는 점이 있을수 있듯이 무시할 수 없는 상징성은 지니고 있다.
창세기의 여호와(야훼) 하느님도 인태신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을 백발노인으로 생각한 것이다.미켈란제로가 시스티나 성전
천정화에 그린 하느님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인태신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인류 역사는 보다 더 차
원 높은 신관 향상(up lift)에 그 의미가 있다.그런데 컴퓨터는 업그레
이드(up grade)시킬줄 알면서 신관을 향상시킬 줄 모르고 있다.신관
을 향상 시킬 줄 모른다면 인류는 존재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류영모는 창세기 신화에 대해 이르기를 "창세기에 적혀 있는대로
창조주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나는 하느님
을 생명의 근본으로 ,진리의 근본으로 믿는 것이다.옛사람들이 천지
에 대한 시말을 생각해 본것이 창세기다.이건 옛사람들
의 생각이다.그 걸 오늘의 우리에게 믿으라고 해서는 통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창세기의 창조설,프로티노스의 流出說,스피노
자의 變態說 중에서 스피노자의 변태설이 차원높은 창조관
이라 하겠다.그러나 이것은 우리 사람의 생각이고 하느님 쪽에서 생
각하면 하느님이 절대유일의 존재로 계실 뿐이다.공연히 사람들이
옅은 소견으로 이러쿵저러쿵 할 뿐이다.
"뭇 사람이란 다른 게 아니라 사형수" (衆生無他死刑囚)
예수를 진리의 자리에서 보면 하느님 아들이지만 세상의 자리에서
보면 처형된 사형수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낙오자들이 사형수가
되기도 하지만 선지자들이 사형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류영모는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이미 나기 전부터 죽음이 언도되어
있는 사형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진시황을
비롯하여 많은 사랄들이 죽음을 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모두
가 실패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사는 동안에 지나
친 욕심을 가지고 있다. 산몸으로 신선(神仙)이 되어 영생불사(永生不
死)하기를 바라는가 하면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내려와서 죽지 않고
살려서 하늘로 구름 타고 올라가기를 바라고 있는데 몸으로 죽지 않
고 살 욕심 때문에 이런 것을 믿는다."(다석어록)
"몸이 죽기까지 처형될 날만 기다려" (終身有待執行日)
사람들은 자신이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라는 것을 모른다. 아니 알
면서도 애써 모른 체하려고 애쓴다. 톨스토이는 석가의 소전기를 쓸
만큼 불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참회록에는 불경에 나오
는 우화를 인용한 곳이 있다. 어떤 나그네가 인생이라는 광야를 헤매
다가 고통이라는 사자를 만나 죽기살기로 도망을 쳐서 가정이라는 오
래된 깊은 웅덩이 속으로 피했다. 마침 그 곳에 있는 애정이란 관목을
잡고 의지했다. 위에서는 사자가 내려다보며 울부짓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죽음이라는 용이 떨어지기만 하면 한 입에 삼키려고 입을 벌리
고 있었다. 그러나 우선 배가 고팠다. 마침 옆에 쾌락이란 석청이 있
어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위의 사자도 아래의 용도 다 잊어버렸다.
그런데 잡고 있는 관목 밑동을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면서 갉
아먹고 있었다. 이것이 사람이 처한 절망스런 상황이다.
우주 물리학자 스터븐 호킹 때문에 세상에 알려진 루게릭병으로 죽
어 간 모리슈워츠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죽게 되리라는 사실은 누구
나 알지만 자기가 죽는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만약 자신이 죽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자기는 안 죽을 거라며
자신을 속인다. 사람이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
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다들 잠든채로 걸어다니는 것처럼
사니까 우리는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다. 그저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만 기계적으로 하며 반쯤 졸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미치앨봄.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자로(子路)가 공자(孔子)에게 죽음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공자가
말하기를 "삶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 焉知
死-『논어』선진편)라고 하였다. 이는 공자의 말 가운데 가장 미숙한
말이다. 죽음을 알아야 삶을 알 수 있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말한
공자가 죽음을 몰랐을 리 없다. 만용에 가까운 용기로 목숨을 가볍게
생각하는 자로의 물음이라 핀잔을 준 것 같다. 아마 안회가 같은 질문
을 하였으면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70살을 살았다면 70년을 죽어 온 것이다 .일 초 전에 한 일
도 내가 바꿀 수 없는데 그것은 '이미 죽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죽어야 할 지를 알아야 어떻게 살 지를 안다는 것이다. 사는
것이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바로 죽
을 줄을 알았기에 바로 살 줄 알았던 것이다.
벽암록에 나오는 운문(雲門)이 그의 문하생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15일 전의 일은 너희들에게 묻지 않겠다. 오늘 15일 뒤의 일에 대해
서 한마디 해보라." 그러나 아무도 입을 떼는 이가 없자 운문이 스스
로 대답하기를 "나날이 좋은 날이다"(日 日是好日 -벽암록 제6칙)라
고 하였다. 운문의 '나날이 좋은 날'이란 무슨 뜻일까. 세상 사람들이
좋다는 부귀영화를 버린 스님에게는 어떤 날이 좋은 날일까?사형수
에게는 죄수복을 벗는 날이 좋은 날이듯이 나고 죽는 몸나를 떠나 나
지 않고 죽지 않는 얼나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수의의 몸을 벗
는 날보다 기쁜날이 없다.류영모는 "죽는 날이야말로 축하할 날일지
모른다"라고 말하였다.
"헛되이 태어난 처음부터 판결은 선고되고" (判決宣告虛誕初)
아담과 해와가 여호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형선고는 이러 하였다.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 류영모는 말하기를 "우
리는 날 때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 사형수가 교수대에서 밧줄을
목에 걸고 딛고 선 마루청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러한 형
편에 우리는 서 있다.이 사실을 잊으면 쓸데없는 잡념에 시달리고 욕
망에 사로잡히고 교만에 빠진다. 종당 죽음이 결정된 사형수들이 서
로가 잘 났다고 다투다니 사람이란 짐승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모
르겠다.더구나 향락을 하겠다니 요절복통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의사 안중근(安重根)은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조선 왕국을 죽인 이또오(伊藤博文)
를 저격하였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3분간
기도를 올린 뒤 밧줄이 안중근의 목에 걸치었다. 10시 4분에 간수가
그의 발 밑 판자를 떨어뜨리자 그의 몸이 공중에 달렸다. 10시 15분
에 의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였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데 11분
도 안 걸렸다. 우리의 목에 걸린 눈에 안 보이는 밧줄을 의식하고 살
아야 어리석은 사람이 안 된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사형수이기 때문
이다.
오래산다 일찍 죽는다지만 한 유예기간 (猶豫期間壽夭日)
젊어서 죽으나 늙어서 죽으나 죽고 나면 마찬가지다. 30대에 죽은
예수와 80살에 죽은 석가가 오늘에 와서 다른 것이 무엇인가. 사형
집행을 당긴 것이나 미룬 것이나 오십보 백보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유예기간을 늘리려고 애를 쓰는가 하면 유예기간이 길다고 못
견디는 이도 있다.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
에게 맡겨 놓고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날이 오늘이
다'라고 할 때 왜?' 하고 대들어서는 안 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몸은 얼마 앞서 어쩌다가 부모님의
精血로 실없이 시작했으니 조만간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몸으로는 죽기 위해 온 것이다. 자꾸 더 살자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이 몸을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게 영생이다. 날마다의 생각
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하자. 참된 생각이란 죽는 연습이다.죽음을 생
각하여 언제 떠나도 미련이 없도록 준비와 각오를 하면 좀더 생각을
깊이하게 된다. 인간의 몸뚱어리는 아끼고 아끼다가 거름이 될 뿐이
다. 죽음의 연습이란 것은 오늘 하루하루를 참되고 아름답게 생각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나는 오늘 내 삶의 순간순간을 또박또박 참되고
아름답게 가면 마지막 끝(終命)도 참되고 아름답다."(다석어록)
전체(하느님)의 생명으로 있던 것이 전체를 잃고 개체(個體)로 떨어
져 유배(流配)생활 아닌 유배생활을 하다가,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전
체로 돌아가는 것이 이른바 죽음이다. 개체에게는 더없이 기쁜 날이
요 감격스런 날이다. 비록 개체로 있으면서도 전체(하느님) 의식을 회
복한 것이 신앙이다. "임의 종인 죽음이 이 몸의 문 앞에 왔나이다.
(줄임) 이 몸은 양손을 맞잡고 눈물로써 그를 공경하겠나이다"(타고르,
『기탄자리』)라고 한 타고르도 훌륭하지만 "나는 죽음 맛 좀 보고싶다.
그런데 그 죽음 맛을 보기 싫다는 게 뭔가. 이 몸은 내던지고 얼은 들
려야 한다"는 류영모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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