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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의 "초탈 - 돌파"와 "하나님 아들의 탄생" 본문
에크하르트의 "초탈 - 돌파"와 "하나님 아들의 탄생"
인간 영혼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한다는 생각은 에크하르트에서 이보다 더 근본적인 하나의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모상이라는 인간 영혼의 특수한 존재론적 위상이다. 아들의 탄생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보편적인 출산의 활동이든 혹은 우리들 자신의 초탈과 돌파를 통해 현실화되는 경험이든, 이 모든 것은 여타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인간 영혼의 특수성을 전제로 한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직 인간 영혼 속에서만 아들을 출산하기 때문이다. 모상론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탄생을 위한 보다 더 근본적인 전제, 그 선험적 존재론적 근거를 접한다.
본성론의 의미는, 인간 영혼 안에 이미 지성이라는 하나님의 보상이 각인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의 노력이나 하나님의 활동 어느 것도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영혼 자체가 여타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모상이라는 존재론적 특권이 없다면, 하나님은 거기에 아들을 낳지 않을 것이며 우리도 그것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수행이 없으면 본성은 현실화되지 않으며, 은총의 도움 없는 인간의 수행도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시킬 수 없다. 수행과 은총을 통해 본래 하나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본성이 "장식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본성이 기반이 되어 그 위에 은총과 수행이 함께 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탄생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에크하르트가 이해하는 인간 본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모상이라는 개념을 다시 한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에그하르트는 인간존재를 기본적으로 영과 육의 두 범주로 파악하는 사도 바울의 사상에 따라 인간에 두 측면이 있음을 논한다. 즉,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다. 외적 인간은 영혼에 결부되어 있되 육에 둘러싸이고 육과 섞이고 육체에 묶여 몸의 지체들과 더불어 활동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낡은 인간", "땅에 속한 인간", "원수 같은 인간", "종과 같은 인간"으로서, 악과 부도덕한 삶으로 기울어지는 인간이다. 반면에 내적 인간은 "새로운 인간", "하늘에 속한 인간", "젊은 인간", "친구", "고귀한 인간"으로서, 선하고 도덕적이며 영원한 것을 지향하는 인간이다. 내적 인간은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이며 하나님이 좋은 씨앗을 뿌려 놓은 밭과 같다. 이 씨앗은 우리 안에 있는 신적 본성의 씨앗 혹은 "하나님의 씨앗"으로서,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모상, 하나님의 아들이다. 오리게네스를 인용하면서 에크하르트는 "하나님 자신이 이 씨앗을 심고 다지고 낳으셨기 때문에 뒤덮이고 은폐될 수는 있어도 결코 뽑혀 버리거나 소멸될 수는 없다. 그것은 달아오르고 빛나서 광명을 발하고 타오르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움직인다"고 말한다. 에크하르트는 드러나기도 하고 기도하는 이 신적 성품의 씨앗, 즉 하나님의 모상에 대하여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리게네스에 따라 영혼의 근저에 흐르는 생명의 샘에 비유한다. 이 샘이 욕망의 흙더미로 막히면 우리는 그것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다만 우리가 흙을 제거해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로, 태양과 태양을 가리는 구름, 밭에 묻힌 보화에 비유하기도 한다. 혹은 우리 눈에 장애가 생기면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고 한다. 에크하르트는 또 조각의 비유를 들기도 한다. 조각가는 조각을 할 때 자기가 드러내고자 하는 형상을 돌이나 나무에 새겨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있는 형상을 그것을 가리는 부분들을 파냄으로써 드러낸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우리가 본성상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상태를 현재와 미래의 긴장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지를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며 그리고 아들들이다"(요한일서 3: 1)에 대한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성 요한)는 단지 "불리다"라고만 말하지 않고 "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하나님의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대는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요한일서 3:2) 그러나 이어서 "사랑하는 이여,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들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여기서 매우 미묘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선, 우리가 성자 하느님과 "동일한 하나님의 존재" - 하나님의 본질 혹은 본성- 혹은 "하나님 아들의 아들다운 존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기에 아들이라고 "불린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서의 그를 볼 때" 드러나서 우리의 본래성과 현실성이 일치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숨겨져 있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본성상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이다.
이상을 통해서 에크하르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영혼을 덮고 있는 모든 욕망과 상들에도 불구하고 "영원의 근저에 흐르는 생명의 샘"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는 것, 즉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상, 하나님의 아들, 신적 본성의 씨앗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상이 영혼의 근저에서 드러나려면, 그리하여 우리의 본래성과 현실성의 괴리가 극복되려면, 하나님의 은총과 더불어 우리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수행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조각가가 불필요한 부분들을 파내어 자기가 원하는 상을 드러내듯, 초탈을 통해 모든 피조물의 상들을 제거하고 영혼의 근저에 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모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존재"로 옮겨지려면 우리는 무가 되어야 한다.
인간 영혼의 근저에 각인된 지성이라는 하느님의 모상, 그리고 거기에 끊임없이 아들을 낳으시는 성부 하나님의 활동은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기 위한 하나의 선험적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즉 이 영원한 진리가 우리 자신의 경험적 사건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영혼의 근저를 은폐하고 있는 "이것저것"들 때문이다. 우리의 혀가 불순한 것에 익숙해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조물들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초탈과 돌파가 없으면 우리 영혼의 내오(영혼 안의 깊숙한 곳)는 결코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의 영혼의 근저에 접하지 못한 자는 그 곳에 각인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상을 자각하지 못하며 거기서 항시 일고 있는 하느님의 활동을 깨닫지도 못한다. 영혼의 근저에 각인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상과 거기서 끊임없이 자기 아들을 생산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활동이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보편적인 현상학적 진리라면, 이를 자각하게 하고 나의 현실로 만드는 초탈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불교의 참선에서 우리 마음의 본바탕 혹은 본심이 곧 부처의 성품으로 주어져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중생이 성불할 수 있듯이,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영혼의 근저에는 결코 파괴되거나 지워질 수 없는 지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심어져 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 인간 영혼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어 지성이라는 하나님의 모상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상 그 자체인 성자 하나님과 똑같은 아들로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과 성향을 본성으로 갖추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가능성으로서의 모상, 본성과 본래성으로서의 모상은 은폐되고 드러나지 않는다. 이 괴리를 극복하는 것이 에크하르트나 참선의 공통된 문제이다. 에크하르트에게는 은총과 수행, 참선에서는 돈오와 점수가 해결책으로 제시된다.(《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길희성 지음, 243~246쪽)
(* 책에서 길희성 교수는 "하느님", "엑카르트"라고 썼지만, 여기서는 "하나님", "에크하르트"로 표기하였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에크하르트의 "초탈 - 돌파"와 "하나님 아들의 탄생"|작성자 늦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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