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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서평/ 존 쉘비 스퐁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이정모(성균관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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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존 쉘비 스퐁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이정모(성균관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柏道 2022. 4. 18. 11:48
서평/ 존 쉘비 스퐁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이정모(성균관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 교회감독이 유배당한 신자들에게 고함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신학이 만족스런 답을 줄 수 없다는 어떤 편견을 가지고 신학서적에 대한 본격적인 독서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과학도의 길을 걸어 왔다. 그러다가 최근 인터넷을 통하여 해외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과학의 새로운 만남의 움직임을 접하면서 이러한 나의 태도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신관, 종교관을 기본적으로 새롭게 구성하게 하여준 것은 작년부터 시작된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의 〈일요신학 강좌〉를 통하여서였다. 길희성 교수의 강좌, 특히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신학 강좌와 박재순 교수의 다석 유영모의 종교사상 강좌는 한국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신학과는 다른 보다 깊은 수준의 신학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게 만들었고, 참 신앙은 '생각하는 신앙'이란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번에는 '생각하는 정직한 신앙'의 한 고백서와 '만남'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신학적 관점을 담고 있는 스퐁 감독의 책이다.

이 책은 미국 성공회 뉴왁 교구의 쉘비 스퐁 감독이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정직하고' 명료하게, 그리고 용기 있게 이의를 제기하며, 그 대안적 관점을 제시한 책이다. 이 책과의 만남은 나에게 커다란 흥분과 기쁨을 가져다 준 큰 사건이었다. 흥분과 기쁨에 새벽녘까지 잠을 설치는 경험을 하게 한 책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나를 흥분과 기쁨에 싸이게 하였을까? 그것은 현재의 국내 기독교계가 고전적으로 전수하고 주장해 온 '무지한' 기독교 신앙관에 대한 그 동안의 나의 불신과 침묵,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적 생각들이 이 책에서 모두 구체적으로 기술되면서 공감을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이었다면 이 책의 읽기는 약간의 쾌감 또는 즐거움으로 끝나버렸을 수도 있다. 이 책은 그 이상을 나에게 가져다 주었다. 어떤 참 신앙적 삶을 위한 지적 재구성을 시작하도록 하는 체험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이 책의 제 10장 후반을 읽으면서 나는 스퐁 감독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책에서 스퐁 감독은 전통적 기독교 신앙과 교리가 잘못된 토대 위에 서 있으며, 그러한 토대 위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어 온 교리, 신앙, 신관 등은 오늘날에 있어서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 따라서 전통적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종교 생활이 기독교 신자들을 참 하나님, 참 기독교 신앙, 참 기독교 진리로부터 '유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지적한다. 참 하나님과 연결이 되지 않은, '거의 아무런 내용이 없는 개념들만 손에 쥐게 하는' 종교적 관점을 강요받으면서 사람들은 잘못된 종교 현실에 할 수 없이 머물러야 하는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간적 하늘에 초자연적인 인격적 존재로서 천사를 거느리고 계시며, 전능의 '왕'으로서 인간사에 일일이 개입하시어 좌지우지하시며, 인간들이 수많은 고통과 전쟁을 겪도록 내버려두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영광과 찬송을 받기 위해 존재하시며, 최후의 날에 인간의 잘잘못을 심판하여 상과 벌을 내리는 그러한 '유치한' 유신론적(theistic) 개념의 하나님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음을 스퐁 감독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하나님의 개념을 고집하는 한 인간은 참 하나님과는 먼 유배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유아기적 개념의 인간적, 인격체적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 안에 내재하며 생명의 무한한 중심이며, 존재의 근거이며, 사랑의 원천이며, 끊임없이 우리의 잠재적 가능성을 현실성이 되도록 불러내는 그 무엇이라고 스퐁 감독은 본다.

 

또한 전통적으로 신약성서에서 전개된 예수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당시 기독인들의 내적 응집성과 외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몇 십 년에 걸쳐 수정되고 재구성되어 이루어진 하나의 의도적 담론이었기에,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내재적 의미를 중심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본다. 초기 신약성서에는 인류의 대속자, 구원자로서의 예수의 개념이 없었고 후대 로마의 점령 하에서 교인들의 내부 결속과 유대교와의 관계 규정을 목적으로 구원자, 속죄양의 개념이 뒤늦게 도입되었음을 지적한다. 원죄의 개념과, 예수를 통해 속죄함을 받아 인류가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 구원된다는 개념의 한계를 지적한다. 즉 성경을 역사적 관점과 해석학적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육신이 된 예수,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가 아니라 인간 예수, 하나님 의미의 본질인 사랑의 삶, 내어줌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 의미를 인간에게 보여준 예수로서 재 개념화하여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제 10장 '새로운 시대에서의 윤리의 새로운 기초'의 후반에 나오는 스퐁 감독의 말은 그가 하나님, 인간, 삶, 생명, 예수, 윤리에 대하여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며 참 이해와 통합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이 고양됨으로써 드러나는 존재이며, 모든 생명이 살게 됨으로써 계시되는 생명이며, 모든 사랑이 나누어짐으로써 밝혀지는 사랑이며, 장벽들이 무너지고 공동체가 형성될 때 그 하나님의 정체성이 계시된다." 하나님은 외부 하늘에 인격체로 존재하며 상벌을 내리시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 자체의 깊이와 근거이다. 하나님은 나의 안에, 우리의 안에 내재하여 계시며, 나의 일부이다.

종합하여 본다면, 스퐁 감독의 관점과 믿음은 마이스터 엑카르트나 유영모 선생과 다분히 궤를 같이 한다. 이 셋을 꿰뚫고 있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 참 '정직한' 믿음, 깊은 사유에 바탕을 둔 믿음, 생각하는 믿음이다. 스퐁 감독의 통찰들은 지적 능력이 낮은 시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던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와 신관, 신앙관의 질곡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초자연적 인격신의 허상으로부터 기독인들을 해방시켜 참 하나님 신앙을 되찾게 해주며, 더 이상 진정으로 믿을 수 없는 종교적 관념의 유배로부터 현대인들을 해방시켜 준다.


기독인, 특히 한국 기독인들이 온갖 모순을 안고 있는 현 기독교계의 교리와 신앙관에 얽매여 참 하나님의 모습을 보지 못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 각자의 지적 능력의 한계 때문이며 개인적, 집단적인 지적 게으름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참 기독교 신앙의 필수 전제조건은 깊은 생각, 정직성, 용기라고 본다. '하나님은 저 밖의 하늘에 초자연적으로 존재하며, 때때로 우리의 삶에 의도적으로 개입하여 영향을 주며, 우리의 믿음의 수준과 선악의 행동 수준에 따라 최후의 심판 날에 상과 벌을 내리는 인격적 존재' 라는 초등학교 수준의 고정관념이 오히려 참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참다운 관계를 가리우는 방해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잘못된 신앙관을 치열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깊이 성찰하여 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정직하고 용기 있게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참 기독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그러하였고, 다석 유영모 선생, 그리고 스퐁 감독이 그러하였다고 본다. 그들은 치열하게 생각하는 기독인이었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용기 있는 기독인이다.

기성품처럼 주어지는 잘못된 신관, 신앙관, 예수관, 인간관 안에서 안주하는 '생각 없는'(스퐁 감독은 이를 뇌가 없다는 뜻에서 '무뇌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기독인으로 살기보다는, 전통적 기독교가 주창하여 온 그릇된 하나님 개념을 잃어버리고라도, 전통적인 규범적 신앙을 놓치고서라도, 그리고 신앙적 불확실성의 불안을 감수하면서라도, 참 신앙인은 유영모 선생이나 스퐁 감독 처럼 깊은 사고에 기초한 신앙을 추구하여야 하지 않을까? 고통스럽고 뼈를 깎는 듯한 치열한 고뇌 속에서 험난한 신앙적 유배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절박한 심정으로 참된 신앙을 선택하는 정직한 기독인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그리고 참 신앙의 길은) 성경에서 확정적으로 기술된 모양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삶을 통하여 끊임없이 생각하며 찾아 구하고 살려내어야 하는, 끊임없이 그 모습이 새롭게 재구성되는 역동적 '생명의 중심'이 아닐까 한다.


하나님은 나와 너의(구별이 없다), 자연의 생명의 심층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현존이며, 생명의 잠재력, 사랑의 능력, 존재의 용기 속에서 발견되는 현존이다. 그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그 무엇이다. 본원적 존재인 그는 내 안에 살아 계신다. 내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것, 그와 함께 하고 하나일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의 목숨과 사랑과 존재를 예수처럼〈내어주는 정도까지만〉 가능한 것이다. '내가 나의 목숨과, 사랑과 존재를〈내어주는 정도까지만〉' 나는 그와 하나일 수 있다. 내가 그를 만나고 그와 함께 되는 것은 골방에서, 교회당에서 '주여 주여'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가 아니다. 나와 너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모든 생명에 대하여 모든 자연에 대하여 나를〈내어주며〉 삶을 펼쳐나갈 때이다. 사랑이라는 개념조차도 군더더기일 수 있다. 자연, 다른 생명들, 나, 그리고 하나님, 이 모두가 함께이며 하나라는 절실한 깨달음에서 나를 물 흐르듯이 아무 조건 없이, 의도 없이 자연스럽게 내어줄 때, 비로소 하나님은 나를 통해 살아 계시는 것이다. 그것을 구태여 이름을 붙인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없다. '나'라는 것은 '우리'라는 하나님의 생명적 현존 구현 방식의 한 결(마디)일 뿐이다. 따라서 '나'의 속죄, '나'의 구원이란 없다. 공동체로서의 '우리'의 삶이 있을 뿐이고, 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현존하는가 아닌가만 있을 뿐이다. '나'를 예수처럼 내어줌으로써 충만한 생명의 삶이 전개되는 '우리' 속의 한 물결, 한 결로서 '나'는 존재하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은 현존하시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 사후 심판 날의 상과 벌, 천당행, 하나님의 영광 등은 인간의 지적 미숙으로 인하여 잘못 개념화된 그림일 뿐이다. 내가, 아니 우리가, 우리 안에 현존하는 삶, 생명의 삶,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내어줌의 삶, 함께의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참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멀어져 가게 하는 각종 전통적 기독교의 교리와 사상들, 고립된 개개인의 자아 중심적 무관심, 무뇌적(brainless) 사고와 행위의 질곡으로부터 '나'와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그리고 이것을 통해 우리의 유배는 물론이요 '하나님'을 유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치열한 고뇌의 늪을 지나는 용기 있고 정직한 믿음만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일 수 있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적 능력의 한계로 인해 발생되는 너-나의 구분이라는 무지의 상태를 넘어서, '너-나-하나님'이 하나임을 깨달아 예수와 같이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내어 줌〉의 실천적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됨을 구현, 완성하는 길이다. 이것이 기독인의 참 삶일 것이다.


'사랑'! 바로 그것이 생명의 원천이고, 힘이고, 본질이며,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며 창조의 진리가 구현되는 인간 삶의, 참 신앙의 방식이라고 본다. 바로 이러한 길이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길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우리와 하나 되어 내재하는 하나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