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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해방 본문

배움과 깨달음/좋은책과 글

동물해방

柏道 2021. 3. 26. 21:43

동물해방

 

동물해방

 

피터싱어 지음

 

이번 개정판은 이전 판들 출간 이후 이 책이 가져온 학계 및 관련 산업에 미친 변화와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였으며, 부록으로 ‘피터 싱어가 말하는 피터 싱어’와 ‘동물 해방 30년’을 수록하였다. 이 책에서 싱어는 먼저 자신의 윤리적인 입장인 보편주의적 공리주의의 논리적 정당성과 이의 논리적 귀결을 소개하고, 이어서 사실에 관한 자료를 면밀하게 분석한다.

그는 수많은 동물들이 관여하고 있는 실험실과 공장식 농장이라는 환경을 검토하면서 이러한 환경이 동물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 분명하며, 이러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이와 같은 잔혹 행위가 나타나게 된 역사적·문화적·사회적 배경을 살피고, 마지막으로 그와 같은 동물 학대의 배후에 깔려 있는 종차별주의의 사고의 그릇됨을 폭로하고 이를 극복해 나갈 것을 권유하고 있다.

목차

목차

2009년판 서문
1975년판 서문

제1장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인간 평등의 토대가 되는 윤리 원리가 배려의 범위를 확장하여 동물도 동등하게 배려하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차별과 인종차별, 그리고 동물의 도덕적 지위|동물이 느끼는 고통|종차별 거부

제2장 연구를 위한 도구
당신의 세금이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미국의 동물 실험 실태|심리학 분야에서의 동물 실험|실험자들의 의인주의 회피|독극물을 이용한 동물 실험|동물 실험을 재고해 보려는 징조|의학 분야에서의 동물 실험|다양한 실험|어떻게 잔혹한 실험이 가능할 수 있는가?|과학자들의 반응|규제의 결여|동물 실험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는 언제인가?|동물 실험 대체

제3장 지금 공장식 농장에선…
저녁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고기가 살아 있는 동물이었을 때 어떤 일을 겪었을까
육계들의 운명|과밀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산란 닭|영리한 돼지 사육방법|식용 송아지가 살아가는 환경|젖소의 운명|육우가 살아가는 환경|다섯 가지 기본적인 자유|가축들의 고통과 자행되고 있는 관행들|도축의 현장|동물의 복리를 향한 발걸음

제4장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
환경 손실을 줄이면서 고통을 적게 산출하고 더 많은 음식을 생산하는 방법
고기 생산의 비효율성과 환경 파괴|무엇까지 먹을 수 있는가|채식주의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

제5장 인간의 지배
종차별주의의 간략한 역사
기독교 이전의 사유 방식|기독교의 사유 방식|르네상스 시대|계몽 시대와 그 이후

제6장 오늘날의 종차별주의
동물 해방에 대한 옹호, 합리화, 그리고 그에 대한 반론과 이를 극복하는 데서 이루어진 발전
인간이 우선이라는 가정|종차별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식물도 고통을 느끼는가|종차별주의와 철학|결론

더 읽을거리 / 주석 / 감사의 말 / 역자 후기
부록
피터 싱어가 말하는 피터 싱어
동물 해방 30년
찾아보기

 

첫문장

'동물 해방'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중대한 목표라고 생각되기보다는 다른 해방 운동의 서투른 모방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 인간 아닌 동물이 획득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람들은 피부 색깔이 검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을 멋대로 괴롭혀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괴롭힘으로 인한 피해를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고 방치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다. 설령 다리의 숫자, 피부에 융모가 있는지의 여부, 또는 천골의 끝모습 등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더... 더보기
    - 호밀인간 아닌 동물이 획득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람들은 피부 색깔이 검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을 멋대로 괴롭혀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괴롭힘으로 인한 피해를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고 방치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다. 설령 다리의 숫자, 피부에 융모가 있는지의 여부, 또는 천골의 끝모습 등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차이가 감각을 느낄 있는 존재의 고통을 방관하는 이유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이겠는가? 이성 능력인가? 그렇지 않으면 담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인가? 하지만 완전히 성장한 말이나 개는 갓난아기 또는 태어난 지 일 주일이나 한 달이 지난 아이보다도 훨씬 합리적이다. 또한 우리는 어린 아이들에 비해 그들과 훨씬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들의 능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문제는 그들에게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있는가, 또는 대화를 나눌 능력이 있는가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접기
    - 호밀
  • “모든 사람들이 읽어야 하며, 읽고 나서 우리의 세계관과 다른 생물들에 대한 책임 의식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 리처드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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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동물을 보는 방식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어 놓을 매우 중요한 책.”
    - 시카고 트리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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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싱어가 전거로 들고 있는 자료는 과장되지도, 정서에 호소하고 있지도 않다. 그의 논증은 치밀하고 매우 강력한데,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입장을 개인적이거나 종교적, 혹은 매우 추상적인 철학 원리가 아닌, 우리가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도덕적 입장에 호소하여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 뉴욕 타임스 북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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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1975) 출간 이후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인간 가치 대학 센터’에서 생명 윤리학 Ira W. DeCamp 교수이자 멜버른 대학교 계관 교수이다. 그는 『실천윤리학(Practical Ethics)』(1979), 『당신이 구할 수 있는 생명(The Life You Can Save)』(2009), 『현실 세계에서의 윤리학(Ethics in the Real World)』(2016) 등을 저술하였다. 2005년 『타임』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더보기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1975) 출간 이후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인간 가치 대학 센터’에서 생명 윤리학 Ira W. DeCamp 교수이자 멜버른 대학교 계관 교수이다. 그는 『실천윤리학(Practical Ethics)』(1979), 『당신이 구할 수 있는 생명(The Life You Can Save)』(2009), 『현실 세계에서의 윤리학(Ethics in the Real World)』(2016) 등을 저술하였다. 2005년 『타임』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의 명단에 포함시켰으며, 2012년에 오스트레일리아 국가 최고 시민 훈장인 Companion of the Order of Australia를 받았다. 접기

 

 

 

전주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관심 분야는 함께 살아가는 삶, 채식, 진화론 등이고, 저서로는 <나누고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 만들기>, <어느 철학자의 농활과 나누는 이야기>, <왜 당신은 동물이 아닌 인간과 연애를 하는가>, 역서로는 <채식의 철학>, <동물해방>, <사회생물학과 윤리>, <프로메테우스의 불>, <동물에서 유래된 인간>, <섹슈얼리티의 진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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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동물 해방 운동의 바이블, 혁명의 도화선이 된 책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동물의 해방을 주장하는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대표작 『동물 해방』의 개정완역판이 연암서가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개정판(제4판)은 이전 판들 출간 이후 이 책이 가져온 학계 및 관련 산업에 미친 변화와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였으며, 부록으로 ‘피터 싱어가 말하는 피터 싱어’와 ‘동물 해방 30년’을 수록하였다. 1975년 처음 출간된 이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동물 해방 운동의 바이블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 선구적인 저술은 우리에게 동물에 대한 태도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으며, 동물들에 대한 잔혹 행위를 금하는 범세계적 운동을 촉발했다.
이 책에서 싱어는 먼저 자신의 윤리적인 입장인 보편주의적 공리주의의 논리적 정당성과 이의 논리적 귀결을 소개하고, 이어서 사실에 관한 자료를 면밀하게 분석한다. 그는 수많은 동물들이 관여하고 있는 실험실과 공장식 농장이라는 환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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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해방 운동의 바이블, 혁명의 도화선이 된 책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동물의 해방을 주장하는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대표작 『동물 해방』의 개정완역판이 연암서가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개정판(제4판)은 이전 판들 출간 이후 이 책이 가져온 학계 및 관련 산업에 미친 변화와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였으며, 부록으로 ‘피터 싱어가 말하는 피터 싱어’와 ‘동물 해방 30년’을 수록하였다. 1975년 처음 출간된 이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동물 해방 운동의 바이블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 선구적인 저술은 우리에게 동물에 대한 태도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으며, 동물들에 대한 잔혹 행위를 금하는 범세계적 운동을 촉발했다.
이 책에서 싱어는 먼저 자신의 윤리적인 입장인 보편주의적 공리주의의 논리적 정당성과 이의 논리적 귀결을 소개하고, 이어서 사실에 관한 자료를 면밀하게 분석한다. 그는 수많은 동물들이 관여하고 있는 실험실과 공장식 농장이라는 환경을 검토하면서 이러한 환경이 동물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 분명하며, 이러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는 이와 같은 잔혹 행위가 나타나게 된 역사적·문화적·사회적 배경을 살피고, 마지막으로 그와 같은 동물 학대의 배후에 깔려 있는 종차별주의의 사고의 그릇됨을 폭로하고 이를 극복해 나갈 것을 권유하고 있다. 아마도 종차별주의에 깊이 빠져 있거나 육식을 지나치게 즐겨하여 다른 생각의 여지를 두는 사람이 아니라면 싱어의 논리에 결국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새삼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이성과 논증의 힘을 굳게 신뢰하고 있다. 나는 오늘날 동물 해방 운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논증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갖게 하리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완전히 냉소적이 되어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이나 감정 때문에 움직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동물 해방 운동은 철학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운동으로, 그들이 사람들과 논의를 함으로써, 전제들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함으로써,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증거를 끌어옴으로써 역할을 했던 운동이다. 이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부록: 피터 싱어가 말하는 피터 싱어 중에서

∠주요 내용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인간 아닌 동물들을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면밀하고도 일관되게, 그리고 남김없이 생각해 보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이 책은 우리의 현재의 태도와 행위 뒤에 숨겨져 있는 편견을 폭로한다. 그러한 태도가 어떠한 관행으로 나타나고 있는가―인간의 폭정으로 인해 어떻게 동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를 서술하고 있는 장들에서는 정서를 자극하는 구절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자극이 책에서 서술된 관행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동반되는 노여움과 분개의 정서이길 바란다. 하지만 내가 이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독자의 정서에만 호소하고 있는 경우는 이 책의 어떤 곳에도 없다. 서술해야 할 내용이 불쾌한 사실이라면, 불쾌하다는 것을 숨기면서 이를 어떤 중립적인 방식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당신은 ‘열등 인간’이라고 간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나치 강제수용소 ‘의사들’의 냉정한 실험을 흥분된 감정 없이 객관적으로 서술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오늘날 미국, 영국, 그리고 그 외 여러 곳의 실험실에서 자행되고 있는 몇 가지 실험을 서술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 실험을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을 통해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가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도덕 원리에 호소함으로써 반대를 정당화하고자 하며, 위의 두 가지 종류의 실험에 희생되고 있는 대상에 이러한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요구다.-17쪽

해방 운동은 도덕적 지평의 확장을 요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까지는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던 관행들이 정당화될 수 없는 편견의 결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 누가 자신의 모든 태도와 관행이 정당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억압자 편에 들어 있지 않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른 집단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태도로 인해, 그리고 그러한 태도에 따르는 관행으로 인해 고통 받는 존재들의 입장에서 우리의 태도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익숙지 않은 정신적 전환을 이룰 경우, 우리는 다른 집단을 희생해서 동일 집단―우리들 자신이 속해 있는―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시종일관 노력하고 있는 우리의 태도와 관행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칠 경우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해방 운동이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당신의 태도와 관행을 바꾸어 매우 규모가 큰 존재들의 집단, 즉 우리 종이 아닌 다른 종의 성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있다. 나는 다른 생물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매우 오랜 역사를 갖는 편견과 독단적인 차별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이익에 대한 동등한 고려라는 기본 원리를 다른 종의 성원에게 확장할 것을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착취 집단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이기적 욕구를 제외하고는―주장하고 있다. 나는 다른 종의 구성원들에 대한 태도가 다른 인종이나 성에 대한 편견과 마찬가지로 반대할 만한 편견임을 당신이 인식해 주길 바란다.-19쪽

도덕 철학의 한 학파인 개혁적 공리주의의 창시자인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은 “모든 사람은 각각 한 명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아무도 그 이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정식을 이용하여 도덕적 평등의 핵심적 토대를 자신의 윤리학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행위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개별 존재들의 이익은 다른 존재들의 이익과 다를 바 없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또한 동일한 비중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벤담 이후의 공리주의자 헨리 시즈윅Henri Sidgwick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범 우주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 개인의 이익(good)은 다른 사람의 이익 이상의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더욱 최근 들어 현대 도덕 철학의 주요 인물들이 견지하는 도덕 이론의 근본 전제는 대체로 서로 일치하고 있는데, 즉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하라’와 유사한 어떤 조건을 자신들의 근본 전제로 생각하는 데 서로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33쪽

만약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면, 그와 같은 고통을 고려하지 않으려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평등의 원리는 그 존재가 어떤 특성을 갖건 그 존재의 고통을 다른 존재의 동일한 고통과 동등하게―대략적이나마 비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취급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낄 수 없거나 즐거움이나 행복을 누릴 수 없다면, 거기에서 고려해야 할 바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쾌고 감수 능력(limit of sentience)은 다른 존재들의 이익에 관심을 가질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우리가 옹호할 수 있는 유일한 경계가 되는 것이다. 지능이나 합리성 등과 같은 다른 특징으로 경계를 나눈다는 것은 임의적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들이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예컨대 피부색과 같은 다른 특징을 경계 기준으로 채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다른 인종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에 자신이 속한 인종의 이익에 더 큰 비중을 둔다는 측면에서 평등의 원리를 위배하고 있다. 성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이 속한 성의 이익을 우위에 둠으로써 평등의 원리를 위배한다. 이와 유사하게 종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이 속한 종의 이익이 다른 종의 더욱 커다란 이익에 비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경우에 문제의 패턴 자체는 동일하다.-38쪽

인간 아닌 동물들이 고통을 느끼는가? 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간이건, 인간이 아니건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자기 자신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는 직접적인 고통에 대한 경험을 통해, 예컨대 누군가가 담뱃불을 손등에 지지는 경우 파악이 가능하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은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이건, 길 잃은 개이건 타인이 느끼는 고통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고통이란 의식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는 ‘정신적인 사건(mental event)’이다. 고통은 그 자체를 관찰할 수가 없다. 몸을 뒤튼다거나, 고함을 지른다거나 담뱃불에서 손을 치우는 등의 행위 자체는 고통이 아니다. 두뇌 활동에 대한 신경학자의 기록 또한 고통 그 자체에 대한 관찰이 아니다. 고통이란 본인이 느끼는 무엇이며, 우리는 다양한 외적 표시들로부터 타인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론상으로 보자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느낀다고 추정할 때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가 교묘하게 제작된 로봇이며, 고통의 느낌을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표현하지만 다른 기계들과 마찬가지로 감각을 느끼지 못하며, 영민한 과학자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다. 물론 이와 같은 문제는 철학자들에게 골칫거리의 과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일상인들 중에선 그 누구도 가까운 친구가 자신처럼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추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완벽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위하는가를 관찰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는 추정이다. 또한 이는 친구들이 우리와 같은 존재, 즉 우리와 동일한 기능을 갖는, 유사한 경우에 유사한 느낌을 산출할 수 있는 신경계를 갖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추정이다.-41쪽

과거로부터 과학에서는 가급적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온건한 설명 방식이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져 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의식적 느낌, 욕구 등을 거론하며 동물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즉 의식 또는 느낌을 도입하지 않고서도 어떤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단순한 설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들의 실제 행동에 관한 설명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해 볼 때, 우리는 의식적 느낌, 욕구 등의 용어가 포함되지 않은 설명이 다른 경쟁하는 설명보다 사실상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의식과 고통의 느낌을 언급하지 않을 경우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설명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사한 신경계를 갖는 동물들의 유사한 행동을 인간의 행동과 동일하게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설명, 예컨대 인간 아닌 동물들의 행동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창안해서 이를 이용해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들의 행동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보다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44쪽

지금까지 나는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동물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한 바가 없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최소한 이론적으로 생각해 볼 때, 고통을 가하는 행위에 평등의 원리를 적용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통과 괴로움은 그 자체로 나쁘며, 따라서 고통 받는 존재의 인종이나 성, 또는 종과 무관하게 고통은 억제되거나 최소화되어야 한다. 고통이 얼마나 나쁜가는 그것이 얼마나 강렬하며,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동일한 강도와 지속성을 갖는 고통은 동일하게 나쁘며, 그것을 인간이 느끼는지 또는 동물이 느끼는지는 고통에 대한 평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52쪽

종차별주의를 피하고자 할 경우 우리는 모든 측면에서 유사한 존재들이 유사한 생명권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들 자신이 속해 있는 생물학적 종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권리를 갖는지의 여부를 나누는 합당한 도덕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제한 범위 내에서도 우리는 예를 들어 자기 인식 능력과 미래에 대한 계획 능력, 그리고 타인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능력 등을 갖춘 정상적인 성인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방금 언급한 성인 인간이 갖춘 특징들을 공유하지 못하는 쥐를 죽이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입장을 견지할 수가 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인간이 갖는(쥐는 동일한 정도로 갖지 않는) 가까운 혈연간의 유대나 다른 사적인 관계에 호소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을 죽일 경우 다른 사람들이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낄 것이기 때문에 쥐보다는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밖에 우리는 이들 요인들이나 다른 요인들의 조합으로 인해 정상적인 인간 살해가 더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기준을 선택하건 우리는 그러한 기준이 우리 종의 경계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떤 존재의 어떤 특징이 다른 존재들에 비해 그 존재의 생명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는 입장을 정당하게 견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판단 기준으로 가름해 보아도, 어떤 인간 아닌 동물의 생명이 어떤 인간의 생명보다 가치가 있는 경우가 분명 있다. 예를 들어 침팬지, 개 또는 돼지는 심각한 결함을 가진 아이나 노쇠한 고령의 노인보다 높은 자기 인식 능력 및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생명권을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은 특징들에 근거 지우고자 할 경우, 우리는 결함을 가지고 있거나 노쇠한 사람들과 유사한, 또는 그 이상의 생명권을 이러한 동물들이 갖게 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55쪽

결론적으로 나는 “종차별주의를 반대한다”는 주장이 “모든 생명은 동등한 가치가 있다”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의식,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포부를 가질 수 있는 능력, 타인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등은 고통을 야기하는 문제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설령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다른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고통은 결국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목숨을 앗아가는 문제를 따져보고자 할 경우에는 위에서 열거한 능력들을 감안해야 한다. “추상적인 사고나 미래에 대한 계획, 그리고 복잡한 의사소통 등이 가능한 자의식을 갖추고 있는 생물의 생명이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 생물의 생명에 비해 가치가 있다”는 주장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고통을 가하는 문제와 목숨을 앗아가는 문제의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 하는지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57쪽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인간 아닌 동물들에 대한 실험은 종차별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인간 혹은 다른 동물들의 중요한 이익을 증진시킬 가망이 조금도 없는 수많은 실험으로 인해 가혹한 고통이 야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실험은 다른 상황과 동떨어져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실험은 주요 산업의 일부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실험자들이 동물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과학 실험’의 횟수를 보고해야 하는 영국 정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988년 한 해 동안 동물에게 시행된 과학 실험이 350만 번이나 되었다. 미국에서는 영국과 비교할 만큼 정확성을 지닌 통계 자료가 없다. 동물 복리법이 시행되고 있는 미국에서는 농무부 장관이 등록된 시설의 수와 더불어 그 시설이 사용하는 동물의 숫자가 기재된 보고서를 발행하고 있지만 이는 여러 가지로 미흡한 점이 많다. 이 보고서에는 실험에 사용되는 쥐(rats), 생쥐(mice), 새, 파충류, 개구리 또는 가축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보고서에는 중등학교에서 사용되는 동물도 제외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동물을 주州 경계 너머로 수송하지 않는 연구 시설이 수행하는 실험이 포함되지 않으며, 연방 정부의 승인을 얻은 연구 시설 혹은 연방 정부와 계약을 맺은 연구 시설이 행한 실험도 포함되지 않는다.-81쪽

수없이 시행된 실험들 중에서 중요한 의학 연구에 이바지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실험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동물들이 대학의 임학과, 심리학과 등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그보다 많은 동물들이 상업적인 목적, 즉 화장품, 샴푸, 식용 색소, 그 외 하찮은 품목 등의 실험에 이용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있어날 수 있는 것은 우리 종 구성원이 아닌 생물의 고통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의 편견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물 실험 옹호자들은 동물들이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물의 고통을 부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실험이 인간의 목적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고 주장하려면 인간과 동물들 간의 유사성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험자들은 쥐에게 굶주림과 전기 충격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고, 그것이 그들에게 궤양을 일으키는가(실제로 궤양을 일으킨다)를 살펴본다. 그런데 실험자들이 그런 실험을 하는 이유는 쥐가 인간과 매우 유사한 신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유사한 방식으로 전기 충격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86쪽

가장 고통스런 실험 중 상당수는 심리학 분야에서 행해지고 있다. 심리학 실험실에서 사용된 동물들의 수를 어느 정도 파악해 보고자 한다면 1986년 한 해 동안 ‘국립정신건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가 350건의 동물 실험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될 것이다. NIMH는 심리학 실험에 자금을 지원하는 여러 연방 기관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기관은 뇌에 직접적인 조작을 가하는 내용이 포함된 실험에 약 1,100만 달러를 사용하며, 약물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실험에 500만 달러 이상을, 학습과 기억 실험에 약 300만 달러를, 수면 박탈, 스트레스, 공포와 불안 등을 포함한 실험에 200만 달러 이상을 사용한다. 이 정부 기관은 동물 실험에 매년 3,000만 달러 이상을 사용하는 것이다.-90쪽

전기 충격은 동물에게서 공격적인 행동을 촉발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아이오와 대학에서 행해진 한 연구에서 리처드 비켄Richard Viken과 존 넛슨John Knutson은 160마리의 쥐를 집단으로 나누어 그들을 전기가 통하는 스테인리스강鋼으로 된 바닥의 우리 안에서 “훈련시켰다.” 짝을 이룬 쥐들에게는 곧게 선 자세로 서로를 마주할 경우 상대 쥐에게 덤비거나 상대를 물어뜯음으로써 싸움을 학습하게 될 때까지 전기 충격을 가했다. 쥐들이 처음 충격을 받을 때 즉시 이렇게 하도록 학습이 이루어지기까지는 평균 30번의 훈련이 필요했다. 그 다음으로 연구자들은 훈련되지 않은 쥐들이 있는 우리에 충격 훈련을 받은 쥐들을 집어넣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하루가 지난 후 실험자들은 모든 쥐들을 살처분하고 털을 깎아 상처를 검사했다. 실험자들은 자신들이 얻은 실험 “결과가 전기 충격으로 유발된 반응의 공격적 또는 방어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99쪽

가장 널리 알려진 급성 독성 실험은 LD50이라고 하는 것이다. LD50은 ‘50퍼센트의 치사량(lethal dose 50 percent)’을 약어로 쓴 것이다. 즉 연구 대상이 되는 동물의 절반이 죽게 되는 물질량을 일컫는 것이다. 실험자들은 그 용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표본 집단의 동물들을 중독시킨다. 대체로 반은 죽고 나머지 반은 살아남은 시점에 이르러서는 실험 대상이 된 모든 동물들의 건강이 매우 나빠져 있으며, 격심한 고통을 겪는다. 비교적 무해한 물질의 경우마저도, 동물들의 반을 죽게 하는 농도를 발견하는 것은 좋은 방법으로 간주된다. 그 결과 동물들은 대량의 물질을 강제로 먹게 된다. 그들은 단지 많은 분량 또는 고농도의 물질을 먹게 됨으로써 죽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그 제품을 사용할 것인지의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러한 실험은 동물의 50퍼센트를 중독사시키는 당해 물질의 양이 얼마 만큼인가를 측정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데, 죽어가는 동물은 정확하지 못한 결과가 산출되리라는 우려 때문에 반복적으로 실험 대상이 되며, 이로 인해 죽음을 통해 신속하게 편안함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미국 의회기술평가국은 매년 ‘수백만’의 동물들이 미국 내에서 독성 실험에 사용되고 있다고 추산했다.-107쪽

화장품 및 기타 물질들이 동물들의 눈에 투입되어 실험되고 있다. 드레이즈Draize 식 눈 자극 실험은 1940년대에 최초로 사용되었다. 당시 미국 식품의약청에서 근무하고 있던 J. H. 드레이즈J. H. Draize는 어떤 물질이 토끼의 눈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자극을 주는가를 평가할 척도를 개발해냈다. 대개 토끼들은 머리만을 내민 채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에 놓여진다. 이러한 장치는 동물들이 눈을 긁거나 부비는 것을 막아 준다. 그리고 나선 실험 물질(표백제, 샴푸, 또는 잉크 등과 같은)를 개별 토끼의 한쪽 눈에 투여한다. 이때 아래 눈꺼풀을 당겨서 컵처럼 생긴 움푹 파인 조그만 곳에 물질을 집어넣는 방법이 사용되며, 그리고는 눈이 감겨진다. 때로는 이러한 방법이 반복해서 시행된다. 실험자는 토끼를 매일 관찰하며, 이때 눈에 종기, 궤양, 감염, 출혈 등이 나타났는지를 조사한다.-108쪽

동물 실험은 인간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이로 인해 동물에게는 위험하지만 인간에게는 위험하지 않은 유익한 제품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인슐린은 새끼 토끼와 쥐에게 기형을 일으킬 수가 있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는 평온을 가져오는 모르핀이 쥐에게는 극도의 흥분을 일으킨다. 또 다른 독물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만약 페니실린의 유독성이 모르모트를 통해 판단되었다면, 결코 페니실린은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이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115쪽

실험이 ‘의학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그러한 연구가 인간의 고통을 경감하는 데 기여하리라고 믿는다. 때문에 이에 수반되는 고통이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앞에서 이미 치료용 의약품 실험이 선善의 최대화보다는 이익의 최대화에 대한 욕구의 추동을 받는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의학적 연구’라는 막연한 말은 일반적인 지적 호기심으로 시행된 연구에도 사용될 수 있다. 만약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호기심은 지식을 얻기 위한 기초적인 연구의 일부로 받아들일 만하다. 하지만 고통을 야기한다면 이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기본적인 의학 연구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실험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121쪽

어떻게 가학성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원숭이를 평생 동안의 우울증으로 몰아넣고, 개에게 열을 가하여 목숨을 빼앗고, 고양이를 약물 중독에 빠뜨리며 일과를 보낼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는 어떻게 흰 가운을 벗고, 손을 씻고, 자신의 가족들과 식사를 하러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납세자들은 이러한 실험에 돈이 사용되고 있음을 용인해도 되는 것일까? 어떻게 학생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대학 캠퍼스에서 자행되어 왔던―그리고 현재도 자행되고 있는―잔혹 행위는 무시하면서 모든 종류의 부정의不正義, 차별, 그리고 모든 종류의 억압(아무리 자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일이라 해도)에 반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우리가 종차별주의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인간에게 가해졌다면 분노를 느꼈을 잔혹 행위가 다른 종 구성원들에게 가해질 경우에는 입을 다문다. 연구자들은 종차별주의적 태도를 고수함으로써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로 실험동물을 생각하기 보다는, 장비나 실험실 기구 품목쯤으로 간주하게 된다. 실제로 정부 자금 지원 기관의 보조금 신청서에는 시험관 및 기록 장비들과 더불어 동물들이 ‘공급품’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133쪽

아이의 잠재력을 내세워 실험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아는 한 인간의 유아는 성장한 인간 아닌 동물 이상의 도덕적인 배려와 관련한 중요한 특징들을 갖추고 있지 않다. 잠재력이라는 특징을 중요한 요소로 생각해야 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유아에 대한 실험과 아울러 낙태 또한 비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아의 잠재력과 태아의 잠재력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자 한다면 원래의 질문을 약간 수정하여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아가 회복될 수 없는 정도의 뇌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6개월 된 유아 수준 이상의 지적 발달을 기대할 수 없다고 가정해 보자.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유아들은 실제로 많이 있으며, 전국 각지의 특별 병동에 수용되어 있다. 그들의 일부는 부모와 친척들에게 버림을 받은 후, 그리고 슬프게도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그렇게 수용되어 있다. 지적 장애가 있음에도 이 아이들의 해부학적·생리학적 특성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정상인들과 동일하다. 때문에 그들에게 다량의 바닥 광택제를 강제로 먹이거나 눈에 화장품 농축액을 떨어뜨려 결과를 확인할 경우 인간에 대한 안전도를 나타내 주는 매우 신뢰할 만한 지표를 얻게 될 것이다. 이는 현재 다른 여러 종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로부터 얻게 되는 자료보다도 더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LD50 실험, 드레이즈 눈 실험, 방사능 실험, 가열 실험, 그리고 이 장 전반부에서 서술한 다른 많은 실험들을 개나 토끼 대신 심각한 뇌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행할 경우, 인간의 반응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152쪽

우리가 더욱 계몽된 국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최소한의 개혁을 좀 더 발전시킬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동물의 이익이 그와 유사한 인간의 이익과 동등한 배려의 대상이 되는 지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는 오늘날 우리가 거대 산업으로 파악하고 있는 동물 실험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동물들을 가두어 두었던 우리는 텅 비게 될 것이며, 실험실은 폐쇄될 것이다. 하지만 의학 연구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거나, 시장에 실험을 거치지 않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미 말했던 바와 같이 신제품의 경우는 이미 안전한 것으로 알려진 성분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조금 덜 사용하면서 이럭저럭 살아가면 될 것이다. 이것이 커다란 손실이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른 연구와 마찬가지로,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제품을 실험하고자 할 경우 동물을 사용하지 않는 다른 방법이 사용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방법이 앞으로 발견될 것이다.-160쪽

어떤 경우라도 동물 실험이 우리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방법을 통해 동물 실험의 정당성에 관한 윤리적 질문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와 같은 혜택이 있다는 증거가 아무리 명백해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익 동등 고려라는 윤리적 원리에 입각해서 생각해 볼 때, 지식을 획득하는 몇 가지 수단들은 배제시켜야 한다. 지식을 추구할 권리에 신성함을 부여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이미 우리는 과학 연구에 관한 많은 제한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사람들의 동의 없이 그들에 대한 고통스런, 또는 치명적인 실험을 수행할 일반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와 같은 실험을 통해 다른 어떤 방법보다 훨씬 신속하게 지식이 발전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이 생기더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는 실험에 관한 기존의 제한을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의 주요 건강 문제들은 우리가 어떻게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하는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방식에 따라 실천하는 데 충분한 비용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적절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산업화가 이루어진 서구의 빈민가를 휩쓰는 질병들은 대체로 우리가 치료법을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와 같은 질병들은 적절한 영양과 위생, 그리고 건강관리가 갖추어진 공동체에서는 크게 줄어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매주 25만 명의 아이가 목숨을 잃고 있으며, 그들의 사망 중 4분의 1이 설사로 인한 탈수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미 알려진, 동물 실험이 필요 없는 단순한 치료만으로도 이들 아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진정으로 건강 개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연구소를 떠나서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존의 의학적 지식이 닿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인간의 건강에 훨씬 효과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다.-167쪽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살아 있는 동물 학대에 대해 무지하다. 가게나 식당에서 식품을 사거나 먹는 것은 오랜 학대 과정의 종착점이다. 최종 제품 외의 나머지 과정은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깔끔한 플라스틱 꾸러미(package) 안에 담겨 있는 고기와 가금을 구입한다. 이 상태에서는 동물들이 좀처럼 피를 흘리는 법이 없다. 이러한 꾸러미를 보고 있노라면 살아 숨쉬고, 걸어 다니며, 고통 받는 동물이 쉽게 연상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는 그 자체가 고기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은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몇 가지 이유에서 어린 양의 다리라고 하였을 때에 그 본질을 파악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쇠고기(beef)를 먹는다고 하지, 황소(bull), 거세 황소(steer) 또는 암소(cow)를 먹는다고 하지 않으며, 돼지고기(pork)를 먹는다고 하지 돼지(pig)를 먹는다고 하지 않는다. ‘쇠고기(meat)’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기만적이다. ‘meat’는 원래 고형固形 음식 일반을 지칭하는 단어로, 오직 동물 고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용례는 아직도 ‘nut meat’(견과堅果의 살)와 같은 표현에 남아 있다. nut meat는 flesh meat(살코기)와의 차별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듯한데, 이를 그냥 ‘meat’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그런데 이처럼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meat’를 살코기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사실상 살코기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174쪽

심각한 좌절로 점철된 현대 계란 공장에서 사육되는 암탉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나마 암탉으로 가득 찬 새장을 살펴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들은 편하게 서있거나 앉아 있기가 불가능하다. 설령 한두 마리가 자신들의 자리에 만족해도 닭장 안의 다른 닭이 움직이면 자신들 또한 움직여야 한다. 이는 한 침대에서 세 사람이 편안한 밤을 보내기 위해 애쓰는 경우와 비슷한데, 암탉들은 하룻밤이 아니라 1년을 꼬박 별다른 효과도 없이 버둥거린다는 점에서 침대의 경우와 구분된다. 설상가상으로 닭은 닭장에서 몇 개월을 보내면서 깃털을 잃기 시작한다. 이는 철망에 깃털이 문질러짐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암탉들에게 쪼임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결과 맨살이 철망에 문질러지기 시작하며, 그리하여 닭장 안에서는 깃털이 얼마 남지 않고, 피부가 문질러져 맨살이 밝은 적색으로 바뀐, 특히 꼬리 부분이 그렇게 된 암탉이 흔히 발견된다.-207쪽

현재 시행되고 있는 모든 형태의 집약적 축산 중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송아지 고기(veal) 산업이다. 송아지 사육의 요체는 감금되어 있는 생기 없는 송아지에게 고단백 사료를 먹여 고급 식당의 단골손님에게 제공되는 연한 빛깔의 고기를 공급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산업의 규모가 가금, 소(beef) 또는 돼지 생산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착취의 정도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터무니없이 비능률적이라는 측면에서 송아지 산업은 극단성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230쪽

1950년에 이르러 네덜란드의 송아지 고기 생산업자는 고기가 붉게 되거나 질기게 되지 않은 상태로 송아지를 오래 살려둘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 비결은 송아지를 매우 부자연스러운 환경에 두는 것이었다. 송아지들을 야외에서 성장하도록 내버려두면 들에서 마음껏 뛰어놀 것이다. 이때 그들은 고기를 질기게 만드는 근육을 발달시킬 것이며, 칼로리를 소모하여 생산업자가 그 비용을 부담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풀을 먹을 것이며, 이로 인해 갓 태어난 송아지 고기가 갖는 연한 색깔을 잃게 될 것이다. 때문에 송아지 고기 생산 전문가는 경매를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곧장 송아지들을 감금 장치로 끌고 간다. 그 곳, 다시 말해 개조된 헛간, 또는 특별히 지어진 우리는 나무로 된 칸막이가 여럿이 죽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각각의 우리는 1피트 10인치의 폭과 4피트 6인치의 길이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은 우리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 깔아놓은, 나무로 된 작은 널빤지로 이루어져 있다. 몸집이 작을 때 송아지가 우리 안을 한 바퀴 도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 송아지의 목은 사슬로 묶여 있다.(송아지가 성장하여 조그마한 우리에서 방향을 바꿀 수 없게 되면 사슬은 제거된다.) 헛간에는 지푸라기나 깔짚이 깔려 있지 않다. 왜냐하면 송아지들이 그것을 먹어치워 고기의 연한 색깔을 망쳐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도축될 때에만 우리를 벗어날 수 있다. 송아지들은 비타민, 미네랄, 그리고 성장 촉진제가 첨가된 탈지분유로 된 완전 액체 사료만으로 사육된다. 그렇게 송아지는 16주를 더 산다. 갓 태어난 송아지의 체중은 41킬로그램 남짓 나간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사육된 송아지는 16주가 지나면 181킬로그램까지 나가게 된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상당한 장점이다. 또한 송아지 고기는 상당히 비싼 가격에 팔린다.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송아지를 사육해서 판매하는 것은 수지맞는 사업이다.-231쪽

대부분의 쇠고기 생산자들은 소에게서 뿔을 잘라내고, 소인燒印을 찍으며, 거세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심각한 육체적 고통을 야기한다. 소에게 뿔이 있을 경우 여물통으로 목을 내밀 때, 또는 운송을 할 때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또한 틈이 없을 정도의 과밀한 상태에서 실어 나르는 경우 서로를 다치게 할 우려가 있다. 이 때문에 생산자들은 소의 뿔을 자르는 것이다. 죽은 소의 상처 입은 몸통과 흠이 있는 생가죽은 가격이 덜 나간다. 그런데 뿔은 단순히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뼈가 아니다. 뿔이 잘려 나갈 때에는 동맥과 다른 조직이 함께 잘려나가게 된다. 이때 피가 많이 터져 나오는데, 특히 송아지가 출생 직후 뿔을 자르지 않았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거세去勢가 행해지는 이유는 거세한 수소가 그렇지 않은 소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게 될 것―실제로는 더욱 체중이 많이 나갈 것같이 보일 뿐인데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수컷의 호르몬이 육질을 감염시킬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거세가 행해지기도 한다. 거세된 소는 다루기도 쉽다. 대부분의 영농인들은 거세 수술이 소에게 쇼크와 고통을 준다는 점을 인정한다. 거세 수술시에 마취제는 대개 사용되지 않는다. 수술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시행된다. 우선 소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칼로 음낭을 찢어발겨서 고환을 노출시킨다. 그 다음으로 고환을 차례대로 움켜쥐고 잡아당겨서 거기에 붙어 있는 건腱을 파괴시킨다. 소가 나이가 들었을 경우에는 건을 아예 잘라 버려야 한다.-257쪽

가축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거세, 소인, 그리고 어미와 새끼가 격리됨으로써 고통을 당해 왔다. 그런데 인도주의 운동이 가축들에 대한 처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19세기에는 수송과 도축할 때의 잔혹한 처우가 번민에 찬 탄원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에서는 소들이 로키 산맥의 목장으로부터 철도 운송 종점까지 수송되었다. 이어서 그들은 기차가 시카고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며칠 동안 철도 객차에 처박혀 있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소들은 피비린내와 썩은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거대한 임시 가축 수용소에서 삶을 마감했다. 순번이 된 소들이 경사로를 질질 끌려 올라가면 그 위에 자루 도끼를 든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에게 운이 따라 주면 그 사람은 목표를 정확히 가격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에게는 그다지 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260쪽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 자체가 마음이 괴로워지는 행위다. 만약 우리 손으로 먹을 동물을 직접 죽여야 한다면 우리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물론 도축장에 가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으며, 도축장 운영에 관한 방송은 TV에서 인기가 없다. 개중에는 구입하는 고기가 고통 없이 죽은 동물들의 것이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어쨌거나 고기를 구입함으로써 동물의 죽음을 방조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입한 고기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이런 저런 측면에 사실상 도움을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죽음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은 법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고통스러워야 할 이유는 없다. 계획대로 나아간다면 인도적 도축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는 선진국에서는 동물들이 죽음을 순식간에, 고통 없이 맞이하게 될 것이다. 동물들은 전류나 가축 도축용(captive-bolt) 총을 맞고 기절하게 되고, 무의식 상태에서 숨통이 끊어진다. 물론 그들이 도축장 경사로로 끌려갈 때 이미 가버린 동료들의 피 냄새를 맡으며 죽음 직전의 짧은 시간 동안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동물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론과 현실 사이에는 흔히 차이가 있다.-264쪽

종교적 의례에 따르는 도축은 “죽이기 전에 기절시켜야 한다”라는 조항에 따를 필요가 없는데, 이는 인도적인 도축법을 피해가는 또 다른 구멍이다. 정통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식사 계율에 따르면 죽일 때 ‘건강하게 살아 움직이지 않는’ 동물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기절시키는 것은 숨을 끊기 전에 동물에게 상해를 가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요구가 생긴 역사적 배경에는 아프거나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하려는 생각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 정통주의자들은 오늘날에도 율법을 지나치게 문구에 매달려 해석함으로써 죽기 전 단 몇 초 동안이라도 동물을 무의식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도축은 급소와 경동맥을 겨냥해 날카로운 칼로 단 한 번에 베어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도축 방법이 유대법으로 정해졌을 당시에는 아마도 다른 어떤 선택지보다도 이 방법이 인도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방법은 예를 들어 가축 도축용 총을 사용하여 즉각적으로 동물들이 의식을 잃게 하는 도축보다 인도적이지 못하다.-270쪽

우리는 여러 경향이 충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경전의 자구에 얽매여 그러한 방법에 따라 동물을 계속 도축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과학자들은 동물 자체의 본성을 변화시키려는 혁명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데 여념이 없다. 바야흐로 인간이 직접 만들어낸 동물들의 세계가 구축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세계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8년 미국 특허 상표국이 암에 걸리기 쉽게 유전적 조작을 가한 쥐에 대한 특허를 내주면서 만들어졌다. 특허 상표국은 하버드 대학의 연구자들에게 가능한 발암 물질을 판별해내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이러한 쥐에 대한 특허를 내주었던 것이다. 1980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인간이 만든 미생물(microorganism)에 대한 특허 취득이 가능해졌는데, 1988년에는 이의 선례를 따라 동물에 대해서도 특허 등록이 승인되었던 것이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특허 등록 승인은 이것이 최초였다.-274쪽

엄밀한 논리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동정이라는 견지와 식도락적 견지에서 동물의 이익을 고려하는 데는 아무런 모순이 없을지도 모른다.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데 반대하면서도 고통 없이 죽이는 데는 반대하지 않는다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살았고, 순간적으로 고통 없이 도축된 동물은 계속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리고 심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 아닌 동물들을 배려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계속 먹을거리로 삼을 수는 없다. 단지 어떤 특정 유형의 음식으로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생물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면 이때 그 생물은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 이상이 될 수 없다. 얼마 안 가 우리는 아무리 강한 연민을 느낀다고 해도 결국 돼지, 소, 그리고 닭을 우리가 이용할 무엇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러한 동물들이 처한 환경을 확실하게 변화시킬 경우 이들의 고기를 적절한 가격에 계속 구입하기 힘들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이때 동물들이 처한 환경을 조금밖에 변화시키지 않았다고 해서 비판을 가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공장식 축산은 동물이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을 응용한 기술技術에 지나지 않는다. 식습관은 우리에게 소중하며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다른 동물을 배려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물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다. 동물 고기를 먹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누구건 동물의 사육 조건이 고통을 초래하는지를 판단할 때 완전히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상당한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식용 가축을 대규모로 사육하기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집약적인 방식이 사용되지 않는 전통적인 축산에도 거세去勢, 어미와 새끼의 격리, 가축 무리의 해체, 낙인찍기, 도축장으로의 수송 그리고 최종적으로 도축 등이 포함되어 있다. 동물들이 이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고 식용으로 사육된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물론 사육이 소규모로 이루어질 경우에는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비집약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고기로 오늘날의 엄청난 도시 인구의 수요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어쨌거나 소규모로 사육된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육 과정을 거쳐서 생산된 고기는 오늘날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릴 것이다. 동물 복리에 대한 동등한 배려를 통해 사육되다가 도축된 동물의 고기는 오직 부자만이 사 먹을 수 있는 진귀한 음식이 될 것이다.-278쪽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상징적인 제스처만은 아니다. 또한 이것이 자신의 깨끗함을 유지하고, 그리하여 도처에서 이루어지는 잔혹한 처우와 살육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여 세상의 추한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도 아니다.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 아닌 동물 살해와 고통 야기의 종식을 향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매우 실천적이며 효과적인 행보라 할 수 있다. 당분간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살해가 아니라 고통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앞장에서 서술한 집약적 축산법을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280쪽

일단 당신이 가금, 돼지, 송아지, 소, 그리고 공장식 농장의 계란을 먹는 것을 중단했다면, 다음 단계는 어떤 유형의 도축된 조류나 포유류도 먹지 않는 것이다. 이는 먹지 않을 대상의 범위를 아주 조금 넓힌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먹는 조류나 포유류 중 집약적인 방식으로 사육되지 않는 동물은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채식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상상으로라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단계로의 이행을 커다란 희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일단 한번 해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괜찮은 채식주의 요리책을 사라. 이때 당신은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전혀 희생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좀처럼 가지 않는 길을 걷는 이유는 입맛을 만족시킨다는 사소한 목적을 위해 이러한 동물들을 죽인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설령 집약적 방식으로 사육되지 않아도 이러한 동물들이 앞 장에서 서술된 바와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을 겪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296쪽

우리는 계란 산업이 가장 무자비한 형태의 현대 집약형 공장식 축산임을 살펴본 바 있다. 암탉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계란을 낳도록 잔혹하게 착취당한다. 우리가 이러한 유형의 축산 방식으로 생산된 계란을 거부해야 할 의무는 집약적으로 생산되는 돼지나 닭을 먹지 말아야 할 의무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구할 수 있다고 한다면 방사되는 닭의 계란은 어떠한가? 이 경우 윤리적 반대가 제기될 수 있는 여지는 훨씬 약해진다. 몸을 피할 곳이 있고, 야외에서 마구 돌아다니며 땅을 긁어댈 수 있는 암탉은 편안한 삶을 영위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란을 가져가는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육되는 닭의 계란마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의 주요 논거는 다음과 같다. 산란 닭이 낳은 수평아리는 부화되자마자 죽임을 당할 것이며, 암탉도 더 이상 계란을 충분히 낳지 못하게 되었을 때 도축되어 버리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는 과연 암탉의 쾌적한 삶이 시스템의 일부인 도축을 능가할 만큼 충분히 가치가 있는지의 여부다. 이에 대한 답변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죽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이는 고통 야기와는 별개의 논의다)에 달려 있다.-303쪽

우리들의 식습관에서 종차별주의적 요소를 일시에 모두 제거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여기서 지지하는 지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실상 동물 착취를 반대하는 대중 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동물 해방 운동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이러한 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가급적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불매운동을 확산하여 대중들의 관심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형태의 동물 착취를 즉각 중단하려는 훌륭한 욕구가 지나칠 정도로 넘쳐흐름으로써, 자칫 유제품을 먹길 중단하지 않는 경우와 가축의 고기를 계속 먹는 경우가 다를 바 없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줄 수가 있다. 이런 경우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전과 다름없이 동물들에 대한 착취가 이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묻는 비종차별주의자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들에 대한 답변을 몇 가지 살펴보았다. 이 절의 처음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내가 언급한 내용들은 제안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세부 문제에 대해 비종차별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것에 대한 의견이 일치되는 이상 세부적인 불일치가 공통적인 목표를 향한 노력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305쪽

많은 사람들은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논변이 강력하다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적인 확신과 평생의 습관을 타파하는 데 필요한 행동 사이에 틈새가 있는 경우는 너무나도 흔하다. 책이 이러한 틈새에 다리를 놓아 줄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확신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나는 틈새를 좁히려는 노력을 해보고자 한다. 나의 목표는 독자들이 훨씬 쉽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기가 포함된 식사로부터 채식주의 식사로 전환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식사의 변화를 즐겁지 않은 의무로 생각하기 보다는 새롭고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요리에 대한 기대를 걸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 새로운 요리에는 신선한 음식들뿐만이 아니라 고기를 쓰지 않은 유럽, 중국, 그리고 중동의 진귀한 요리가 포함될 것이다. 나는 비교를 통해 그러한 요리들이 너무나도 다채로워서 고기 투성이인 대부분의 서구 식사가 진부하고 반복적이라고 느끼게 할 작정이다. 식물성 요리의 좋은 맛과 영양가 있는 품질은 땅에서 직접 제공된 것으로, 땅이 생산한 것을 낭비하지 않으며, 쾌고 감수 능력이 있는 존재의 고통이나 죽음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우리는 식물성 요리를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먹을 수 있게 된다.-306쪽

채식을 할 경우 음식과 식물, 그리고 자연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살코기는 우리의 식사를 오염시킨다. 아무리 그럴 듯하게 꾸미려 해도, 저녁 식사의 메인 요리(main dish)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축장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숨길 수 없다.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냉동하지 않을 경우 이내 썩어서 악취를 풍기게 된다. 우리가 먹을 경우 그런 고기는 며칠 후 배설하려고 애를 쓰게 될 때까지 우리의 위장에 대량으로 남아 있으면서 소화 과정을 막는다. 반면 식물 음식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는, 그리고 먹어도 몸에 아무런 해가 없는, 땅으로부터 온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기로 인해 미각이 무뎌지는 대신 땅에서 곧장 가져온 신선한 채소를 먹음으로써 매우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저녁 식사를 손수 장만하겠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채식주의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뒤뜰을 일구어 채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는 내가 이전에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었지만 채식주의자 친구들은 이미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식단에서 고기를 제거함으로써 식물과 흙, 그리고 계절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내가 채식주의자가 된 후 흥미를 가지게 된 또 한 가지는 요리를 하는 것이다. 메인 요리가 두 가지 종류의 익힌 채소와 고기로 이루어진 일상적인 앵글로색슨의 식사를 하며 성장한 사람들에게 고기를 제거하는 것은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에서 논의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줄 경우 흔히 대중들은 내게 고기 대신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질문하는 어투로 봐서는 질문자가 자신의 식사용 접시에 으깬 감자와 끓인 양배추를 남겨둔 채, 두껍게 자른 고깃점이나 햄버거를 빼고 무엇을 얹을지 고민하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콩을 한 더미 쌓아 올려놓아야 하는가?-307쪽

동물들에 대한 서구의 태도는 두 가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대주의와 고대 그리스가 그것이다. 이러한 뿌리들은 기독교에서 통합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유럽에 확산된 것은 기독교를 통해서이다. 우리와 동물들의 관계에 대한 좀 더 계몽적인 견해는 교회로부터 사상가들이 비교적 독립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차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근본적인 측면에서 18세기까지 유럽에서 당연시 되었던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을 고려해 보았을 때, 우리는 동물의 태도에 대한 역사적 논의를 기독교 이전, 기독교, 그리고 계몽시대와 그 이후라는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319쪽

만약 바위, 나무, 식물, 종달새, 그리고 소를 동등하게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차이를 잊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쾌고 감수 능력의 정도라는 차이를 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어차피 생존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무엇인가를 죽이지 않을 수 없으며, 이 때문에 그 중 어떤 대상을 죽일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성 프란체스코는 새와 소를 사랑했지만 이들을 계속 먹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가 창설한 수도회의 탁발 수도사들이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제정할 때, 금식일을 제외하고는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지침을 포함시켰는지도 모른다.-338쪽

인간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오늘날의 견해는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이전의 모든 견해와 큰 차이를 보여 준다. 하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 따져볼 때, 다른 동물을 처우하는 방식에 관한 우리의 태도는 변한 바가 거의 없다. 이제 동물은 더 이상 도덕의 영역 밖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여전히 영역 바깥쪽 가장자리 근처의 특별한 구역이다. 그들의 이익은 인간의 것과 충돌하지 않을 때만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 충돌이 발생한다면―심지어 인간 아닌 동물이 일생 동안 겪게 되는 고통과 인간의 식도락 기호 간의 충돌이라 할지라도―인간 아닌 동물의 이익은 무시당한다. 과거의 도덕적 태도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동물들에 대한 지식이 달라졌어도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359쪽

어떠한 경우이건 ‘인간 우선’이라는 생각은 양립 불가능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경우보다는, 인간 혹은 인간 아닌 동물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변명하기 위해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배려와 동물에 대한 배려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이건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힘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경우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활용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인간 문제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사람들이 축산 산업에서 자행되는 학대의 결과로 생산된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운동에 동참한다고 해서 무엇인가를 중단할 필요는 전혀 없다. 다시 말해 동물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주의자가 된다고 해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373쪽

인간 아닌 동물들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생각, 그리고 동물들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시사하는 바에 관한 잘못된 추론 또한 우리가 종차별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않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제껏 우리는 흔히 우리들 자신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야만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을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친절하다는 것을 뜻했다. ‘야수 같은’, ‘짐승 같은’이라고 하거나 ‘짐승처럼’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잔인하고 거칠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죽일 때 최소한의 이유라도 갖고서 죽이는 동물은 인간 동물(human animal)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우리는 사자나 늑대가 다른 동물들을 죽이기 때문에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죽이지 않으면 굶주려야 한다. 반면 인간은 운동 삼아,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자신들의 몸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 그리고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동물들을 죽인다. 또한 인간은 탐욕이나 권세를 얻기 위해 자기 종의 구성원을 살해한다. 나아가 인간은 단순히 죽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역사를 통틀어 인간은 다른 인간과 동물들을 죽이기 전에 괴롭히고 고문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 주기도 했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375쪽

한 마리의 동물의 상실이 새로운 동물의 탄생으로 보상된다는 주장에 대한 마지막 지적은 다음과 같다.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구를 변호하기 위해 그와 같은 기발한 방어책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논거가 함축하는 바를 끝까지 추구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만약 생물의 탄생이 좋은 것이라면 아마도, 다른 모든 조건이 동등하다면, 가급적 많은 사람들도 탄생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여기에 인간의 목숨이 동물의 목숨에 비해 더욱 중요하다는 견해―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이러한 견해를 틀림없이 수용할 것인데―를 추가한다면, 논의는 애초에 문제를 제기한 자에게는 불편하겠지만,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 버릴 것이다. 만약 가축에게 사료를 주지 않는다면 그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식량을 얻어 연명할 수 있게 될 것인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결국 우리는 채식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또다시 도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388쪽

철학은 시대가 공유하고 있는 기본적인 전제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철학의 주요 임무는 우리들 대부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초지일관 비판적이고도 조심스럽게 검토하는 데에 있으며, 이로 인해 철학이 가치 있는 활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철학이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항상 훌륭히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도를 옹호하였다는 사실은 철학자도 인간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갖가지 편견에 구속되게 마련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물론 선행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성공한 철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는 선행 이데올로기를 매우 세련된 형태로 옹호하는 경우가 더욱 많다.-399쪽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본래적인 존엄성에 대한 호소가 평등주의 철학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오직 ‘인간이 본래적으로 존엄하다는 생각이 도전을 받지 않을 경우’에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일단 모든 인간―유아, 지적 장애인, 반사회적 정신질환자, 히틀러, 스탈린, 그리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이 코끼리, 돼지, 또는 침팬지가 가질 수 없는 어떤 존엄성 또는 가치를 갖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 이 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인간과 다른 동물 간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어떤 적절한 사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답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질문은 사실상 하나의 질문이다. 여기서 본래적인 존엄성이나 도덕적 가치를 운운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 그리고 오직 인간만이 본래적 존엄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만족스럽게 옹호하고자 한다면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어서, 그로 인해 인간이 유일무이한 존엄성 또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적절한 능력이나 특징을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데 다른 이유가 아닌 존엄성과 가치라는 관념을 도입하는 것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거창한 구절은 논거를 대는 데 한계를 느끼는 사람들의 마지막 방편에 불과하다.-403쪽

이 책의 요지는 단순히 한 개체가 어떤 종種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 존재를 차별하는 것이 일종의 편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어떤 인종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개인을 차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부도덕하고 정당화될 수 없다. 나는 나의 주장이 그저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주장 또는 사견私見을 드러낸 것으로 파악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종차별을 반대하는 입장을 감정이나 정서에 호소하지 않고 이성에 호소하며 논증하였다. 내가 이러한 길을 택한 것은 다른 동물에 대한 애정 어린 느낌과 존중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성이 훨씬 보편적이며 호소력 또한 더욱 강력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다른 동물들에 대한 순수한 동정 어린 관심을 모든 쾌고 감수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 확대함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종차별주의를 제거해 버린 사람들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오직 동정심과 고운 마음씨에 호소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종차별주의의 그릇됨을 설득할 수 없다. 우리는 심지어 인간들 사이의 문제를 고려할 때에도 오직 자신이 속한 국가와 인종만을 고려하는 데 놀라울 정도로 익숙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한 명목상으로라도 이성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도덕성에 우열의 차이가 없다고 말하면서 지나친 주관주의의 유희에 빠진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히틀러의 도덕성 내지 노예 상인의 도덕성이 알베르트 슈바이처나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도덕성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느냐고 종용해 보면, 그들은 결국 어떤 도덕성이 다른 도덕성에 비해 훌륭하다고 믿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4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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