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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본문

배움과 깨달음/숨터일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柏道 2020. 6. 9. 04:33
응무소주이생기심
應無所住而生其心

원불교대사전

필자김도공(金道公)
[개요]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곧 응당 텅 빈 마음이 되었다가 경계 따라 그 마음을 작용하라는 뜻. 천만 경계를 응용하되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 어느 것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게 하여 그 마음을 일으키라는 말. 무주심(無住心)ㆍ비심(非心)이라고도 한다. 《금강경》의 이 구절을 듣고 육조대사가 깨달았다고 하여 선가(禪家)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내용]
응무소주이생기심은 텅 빈 마음, 곧 자성청정심을 갖고 모든 경계에 상응하라는 뜻이다. 마음속에 선악ㆍ시비ㆍ미추ㆍ호오ㆍ죄복ㆍ부처중생ㆍ극락지옥 등 모든 선입관념을 놓아버리고 본래심으로 천만경계를 응용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선입관념에 사로잡히면 곧 틀려버린다. 일이 없을 때에는 분별심을 다 놓아 버리고 허공같이 텅 빈 마음이 되고, 일이 끝나면 마음도 텅 비어 버리면 그 자리가 곧 부처의 경지가 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갊아 있는 지혜(智慧)를 계발(啓發)함으로써 무명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본성은 원래부터 항상 맑고 조촐하여 모든 상대적 현실에 상응(相應)함이 맑고 밝은 거울과 같아서 물건이 오면 비추고(照見) 물건이 가면 비추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되(照空) 그 거울에는 털끝만한 상(相)도 머물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오고(來) 간 것은(去) 물건뿐이오 거울 그 자체에는 오고 감에 흔적이나 집착이 없는 것이다. 본래 맑고 깨끗한 우리 인간의 본래심(本來心)도 이처럼 시비(是非)ㆍ선악(善惡)ㆍ미추(美醜)ㆍ호오(好惡) 등의 분별을 상대에 따라 역연(歷然)하게 비추되 그것에 끌리고 머물러(집착)서 혼란이나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깨끗한 거울처럼 나타남에 비치고 지나감에 자취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응무소주의 마음은 맑고 조촐한 본래심, 즉 진성(眞性)인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두루 갊아 있는 이 마음을 활용하여 모든 판단과 행위의 규범을 삼는 것이 바로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육조혜능은 말하기를 모든 도를 닦고 행하는 사람이 남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말지니 스스로 내가 잘하고 내가 잘 안다하여 마음에 배우지 못한 사람을 업수이 여기면 청정한 마음이 아니다.

자기 성품에 항상 지혜를 내 마음을 낮추고 일체중생을 공경함이 수도하는 사람의 맑고 깨끗한 마음이나 만약 스스로 그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맑고 깨끗함에 애착하여 마음에 머무는 바 있으면 곧 법상(法相, 법이라고 하는 집착심)에 끌림이라 색(色)을 보고 색에 머무는(住, 집착) 마음을 내면 미혹한 사람이요, 색을 보되 색을 초월하여 색에 머물지 아니한 마음을 내면 곧 깨달은 사람이다. 색(色, 물질, 현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은 구름(雲)이 하늘을 가린 것 같고, 색에 머물지 아니하고 마음을 내는 사람은 허공에 구름 한 점 없고 해와 달이 밝게 비추는 것과 같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곧 망녕된 생각이요, 색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은 곧 참된 지혜이니 망녕된 생각이 나면 곧 어둡고, 참다운 지혜가 비추면 곧 밝아질 것이며, 밝아지면 번뇌(煩惱)가 생겨나지 못하고, 어두워지면 육진(六塵)이 다투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응무소주하여 이생기심하라, 즉 마땅히 무엇에든지 머무름과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본래심)을 활용하라는 의미이다. 원불교적 용어를 빌리면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라’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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