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얼의 나(참나)를 찾는 생각 본문
蘧然覺
얼의 나(참나)를 찾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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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23. 2:08
人人有貴於己者 不思耳(인인유귀어기자 불사이) - 孟子(맹자)
모든 사람들의 저 자신속에 귀한 보배(하나님의 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보배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구나.
몸으로서의 사람은 다른 짐승들과 다를바 없으나 모든 사람에겐 다 하나님의 씨앗인 하나님의 얼이 심령 깊은 곳에 깃들어 있는 것이 다른 짐승들과는 다른 점이라 하겠다.
내가 태어나기전 어머니의 胎盤(태반)인 母體(모체)의 窮滄(궁창)속에 있을때 하나님께서 내게 넣어주신 하나님의 얼의 끄트머리 얼인 그 씨알의 얼을 나의 주인님으로 삼고 내 自我(자아)가 그 씨알의 종이 되면 生命(생명)의 참 주관자이신 하나님 얼의 생명삶을 살겠지만.
내 自我(자아)가 나의 主人(주인) 이 되어버리면 곧 貪, 瞋, 癡(탐, 진, 치)의 獸性(수성)인 짐승성질로 사는 짐승같은 삶을 살게 되어 먹고 탐하고 싸우고 할퀴며 음욕의 늪에 빠져 허우적이고 아무데나 放淫(방음)질 하는 그런 짐승보다 못한 삶에 지나지 않을 뿐이 아닌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르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7~11>
마태복음의 이 말씀이나 孟子(맹자)의 人人有貴於己者不思耳(인인유귀어기자불사이) 가 같은 말씀의 다른 表現(표현)이라 하겠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이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인지 孟子(맹자)의 글속에 그것이 잘 설명되어 있지 않는가 말이다.
人間(인간)들의 本能的(본능적)인 貪, 瞋, 癡(탐, 진, 치)를 밑빠진 독에 물 붓듯이 그 貪欲心(탐욕심)과 瞋恚心(진애심)과 癡愚心(치우심)을 채우고자 祈福的(기복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信仰生活(신앙생활) 한다는 基督敎人(기독교인)이나 佛敎人(불교인)이나 하나같이 이말을 잘못 알아들어선지 구하고 , 찾고, 두드리는 것이라곤 썩어질 몸뚱아리가 잘먹고, 잘살고, 안아프게 해주시고, 자식새끼들 잘되게 해달라는 등 얼토당토 않는 헷소리들만을 그것도 기도랍시고 입에 거품이 나도록 울고 불고 하며 애걸 복걸 하는데 이런건 기도도 아니고 하나님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삼중의 말씀으로 懇切(간절)히 지성스럽고 절실하게 생명바쳐 찾으라는 것은 썩어질 육신을 위한 헛된것들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속에 하나님이 심어주신 귀하고 귀한 그것 하나님 자신의 얼의 끄트머리 한점인 얼을 넣어주셨는데 그 얼의 끄트머리인 참얼의 나인 靈我(영아)를 목숨을 다 태워서 한줌의 재가 되기까지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窮究(궁구)하고 窮神(궁신)해서 짐승성질인 貪, 瞋, 癡(탐, 진, 치)의 三毒(삼독)의 불을 끄고 내 던져버려서 하나님이 넣어주신 하나님 얼의 끄트머리 얼인 참 나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로 바로 알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넣어주신 그 끄트머리 얼인 씨알얼은 한점 흠도 없어 본디 올곧고 밝은 빛의 성품이라서 바로 찾기만 하면 그빛으로 肉身(육신)의 모든 어둠을 꺼버릴 수가 있게됨도 알아들을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하길 하나님의 보내신자를 믿는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한복음 6:28~29>
이말은 하나님이 내게 숨겨두신 얼의나(하나님께서 보내신이)를 찾고 또 그 얼의나가 참나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말로 알아들어야 함이다. 하나님이 내속에 넣어주신 하나님얼(성령)의 끄트머리 얼로 영원한 생명의 얼인 얼사람(얼의나)으로 거듭나야 人子(인자)로서 사람노릇을 바로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 못하면 짐승새끼나 다름이 없다는 말씀이다.
예수가 人子(인자)라고 한 것은 짐승의 새끼가 아닌 사람의 아들이란 말로 하나님의 얼을 깨달아 찾은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하신 것이라 하겠다.
예수가 말한 人子(인자)란 하나님의 끄트머리 얼을 깨달아 찾은이로서 그 얼은 하나님의 얼과 같은 얼이라 하나님과 이어져 있기에 이땅에 속한 것이 아닌줄 알아야 함이다.
지금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내세우는 이 헛껍데기 허울인 이몸옷은 하나님의 씨알(얼)의 끄트머리얼의 나가 맑히고 밝혀 얼의 나를 찾아내야 할 임시거소에 지나지 않음이다. 절대자이신 하나님 또는 니르바나님은 전체로서의 모든 존재이시고, 사람은 그 전체이신 하나님의 일부분인 먼지나 티끌같은 개체존재에 지나지 않음이다.
하나님은 갈것도 없고 올것도 없다.
가지 않아도 안계신 곳이 없고 오지 않아도 안오신 곳이 없으시다. 이것은 하나님이 온통 전체이신 하나라서 그렇다.
사람의 일생이란 살고난 세월을 뒤돌아 보면 한바탕 낮꿈을 꾼것같은 허탈한 느낌을 너나 없이 갖게 된다.
주어진 시간과 공간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열심히 삶을 살아왔지만 모든 것이 그 시간과 그때를 지나고 보면 내가 그때 왜 그랬던가 싶을 때가 많다.
꿈속에 또 꿈을 꾸는것 같은것이 사람의 삶이란 건지도 모르겠다. 잠속에서는 잠을 자고 있다는 것도 모르며 잠속에 꾸고있는 꿈이 꿈인줄도 모르고 생시의 현실인줄로 생각한다.
이세상을 산다는 것이 꼭 잠속의 잠꼬대 같은 삶인지도 모르겠다.
꿈이란 잠을 깨어야만 그것이 꿈꾼것임을 알듯이 우리도 이런 꿈같은 삶에서 잠을 깨야 함이다.
시인 천상병님은 여기 이세상을 소풍나온곳이라고 했고 세상 소풍 끝내고 고향인 하늘로 돌아갈 것이라며 歸天(귀천) 이라는 詩(시)를 남기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너희가 내말을 마음에 새기고 살면 너희는 참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1~32>
사람들은 늘 자유롭지 못하고 부자유하여 勞心焦思(노심초사)하며 轉轉矜矜(전전긍긍)하여 스스로 自足(자족)하여 그칠바를 모르고 온세상을 다 깔고 앉아도 足(족)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 인생들인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얼과 그 끄트머리 얼로 이어진 얼의 나를 깨달아 알고나면 그때는 탐하고 혈기부리고 음탕한 육정을 품던 그런 짐승같은 욕정이 다 끊어져 버릴 때이니 진리이신 참얼로 인하여 묶이고 엉켜있던 마음이 풀려나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저절로 자유로워진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함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부질없는 것이라서 나침반의 자석침처럼 흔들리며 떨고 있는지라. 그 흔들림의 정도에 따라 불안, 초조, 우울하기도 하고, 극한의 절망과, 공포감으로 떨기도 하며, 심하게 되면 自虐(자학)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기도 하게된다. 그러나 이 생명은 내것인줄 알지만 내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임을 알아야 한다.
存其心養其性 所以事天也(존기심양기성 소이사천야) - 孟子盡心上(맹자진심상)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알(얼)을 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니라.
彼特以天爲父 而身猶愛之(피특이천위부 이신유애지) - 莊子大宗師篇(장자대종사편)
저 절대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여 몸바쳐 하나님을 사랑하자꾸나.
孟子(맹자) 말씀이나 莊子(장자) 말씀이나 예수님 말씀이나 다 똑같이 하나님이 내속에 넣어주신 하나님 얼의 끄트머리 얼인 얼의 나를 찾아 참되게 살자는 말씀으로는 같다 하겠다.
해서 있다는 것도 참으로 있는것도 아니고, 없다는 것도 참으로 없는것도 아니다.
生死(생사)에 걸려 있어서 迷惑(미혹)과 幻想(환상)의 비늘에 가려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이지 있다, 없다를 말하는 그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단지 우리의 알량한 감각으로 있다, 없다 하는 境界(경계)의 分別(분별)로 그러는 피상적인 것일 뿐이지 있다, 없다 하는 것도 다 마음에서 그러는 것인데 이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요망한 것인가 말이다.
몸도 죽고 마음도 죽지마는 죽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얼로 이어진 하나님 얼의 끄트머리 얼인 얼나만은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임을 알아야한다.
얼의 생명으로 몸을 뛰어넘으면(거듭나면) 몸이야 살아도 그렇고, 죽어도 그렇고 삶과 죽음을 넘어서게 된다는 말씀으로 알아 들어야 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라. 내일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리라.」<마태복음 6:33~34>
知所先後則近道矣(지소선후즉근도의) - 孔子(공자)
먼저 할바와 나중 할바를 알면 거의도에 가깝다.
이두 말씀도 같은 뜻의 말임을 보게된다.
사람으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내가 태어날때 내속에 넣어주신 하나님 얼의 끄트머리얼인 얼나를 찾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찾고 부처님을 찾는 다면서 무언가를 바라고 찾는다면 그것은 잘못 찾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위해서 찾는 것이 옳은 찾음이라 하겠다.
내가 이정도 하면 하나님께서도 은혜를 주시겠지 하는 그런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는 무작정 순종하겠나이다. 하는 그런 마음이 하나님을 찾는 바른 마음이라 하겠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기를 바라고 믿고 섬기는 것은 자기자신의 욕심을 믿고 섬기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다.
죽이든 살리든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죽든지 살든지간에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아 따라 올라가는 생각하는 삶이 신앙인의 해야할 먼저 일이다.
오고 가고 있고 없고 하는 것은 다 상대성 존재들이다.
自我(자아) 로는 나서는 죽고 있다가는 없어짐을 이르는 것이 상대계의 생명존재들이다.
부질없이 왔다가 하염없이 滅(멸)하는 것이 상대성세계에 갇힌 유한한 유기물들의 본모습인 物像(물상)의 실체들인 것이다.
석가는 말하길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이라 하여 일체의 有爲法(유위법)인 상대성의 세계는 한바탕 꿈같고 허깨비 환상같고 바람에 일어오르는 물거품같고 잡을래야 잡히지 않는 그림자 같으며 또 아침 햇살에 금방 말라버리는 이슬방울 같고 번쩍하고 마는 번개와 같아 그 참된 실상이 없음이니 마땅히 이와같이 생각하여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또한 머물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는 절대존재인 니르바나님(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다.
無去無來亦無住(무거무래역무주)
석가붓다가 찾으신 절대존재가 곧 Nirvana이니 이 니르바나가 바로 석가식 표현의 하나님이다.
니르바나가 사람에게 자기의 얼생명을 준것이 곧 Darma인 法(법) 또는 얼의나인 것이다.
知我者其天乎
나를 알아주기는 하나님 뿐이로고
성경을 보건 불경을 보건 유교 경전을 보건 베다경을 보건 코란경을 보건 도경을 보건 천부경을 보건 그것을 보아 알자는 것이 한가지로 다 우리의 삿된 마음을 죽이자는 봄임을 생각해야 함이다.
모든 경전이 그 경전 자체가 신성시되는 것이라면 참 믿음의 道伴(도반)이라 할 수 없다.
모든 경전은 하나같이 진리의 길을 가리켜 주는 하나의 손가락이요 참고서이지 경전 그 자체가 진리인 것이 아님을 꿰뚫어 알아야 함이다.
그 경전을 보고 읽음을 通(통)하는 가운데 내 마음속에 또아리를 잔뜩틀고 들어앉아 탐, 진, 치의 삼독을 품어낼 기회만 노리고 있는 구렁이를 다 죽이자는 것이다.
自我(자아)인 내가 나라고 내세우며 거들먹 거리는 내가 한번 죽어버리면 마음은 터엉비게된다.
그렇게 비어버려서 내가 없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 움직이게 됨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 여기는 우리가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간이역 같은 곳이지 늘어붙어 살 곳이 아니다.
본디 여기서 살았던 것도 아니고 영생토록 여기서 살수 있는 것도 아닌것이 우리 인생들이 아닌가.
사람들은 보통 말하기를 성경을 본다 불경을 본다 말씀을 듣는다고 한다.
이것은 自我(자아)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다는 소리다.
우리는 여기서 뛰어넘어야 한다.
경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얼의나인 영으로 먹어야 함이다.
말씀도 먹고 성경만 먹어서도 될것이 아니고 얼의나가 커감에 따라 불경도 먹고, 유교경전도 먹어 보고 희랍의 것이나 인도의 베다경이나 이슬람의 코란경전도 먹어보고 모든 선각자들과 성자들의 연구하고 생각한 것들을 다 먹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먹어가다 보면 참의 눈인 얼의나가 거짓나가 아닌 참의 나를 보게되는 얼의눈이 떠지게 되고 참과 거짓이 가려지게 되는 법이다.
생각을 하려면 바르게 正思(정사)하여 반듯하고 올곧게 생각해야 한다.
내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은 내것과 다르니까 그건 틀렸고 저건 이단이다 하는 그런식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바르게 생각하는 것은 이세상은 틀렸고 거짓된 환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 같은 것이요 잠속에 꾸는 꿈같은 것임을 깨달아 알아서 선뜻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먼저 해야 할 바른 생각이라 하겠다.
꿈에서 깨어난 바로 지금이 우리가 살고있는 때라 하겠다.
숨쉬고 있는 지금이란 순간순간에 내생명을 다 태우는 삶을 사는 사람에겐 걱정할 내일이 끼어들 틈이 없으며 지나간 삶이 기웃거릴 무엇이 없는것이다.
늘 지금이란 순간 순간을 사는것에 목숨을 다 불태워 사는 것이 참 살이라 할 것이다.
지금 있는 이제의 이 나란 존재는 실은 잠시후면 꺼져버리는 비눗방울 마냥
凬飛雹散(풍비박산)되어 없어져 버릴 존재로 잠시 이세상의 穢土(예토)에 머물었다 가는 거짓의 나이다 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깨달아서 줄곧 내 심령속 깊디깊은 곳에 하나님 얼과 하나로 이어져 있는 하나님 얼의 끄트머리 얼인 나의 참얼을 찾고 또 찾아 솟아 올라야 하는 것이다.
나라고 내세우는 이 몸뚱이란 것이 본디는 없었던 것인데 너고 나고 이세상에 있게되었고 잠시 이세상에 머물다간 또 消滅(소멸)되어 痕迹(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안개같은 존재가 이몸이 아닌가. 물거품의 泡沫(포말)처럼 곧 꺼져버릴 것이 사람인데 금방 손잡고 입맞추고 얼싸안고 부벼대며 사랑한다던 사람도 꼴깍 숨지고 나면 흙속에 묻던지 불속에 태워야 하지 않는가. 그러고 나면 함께 지냈던 일이 꿈속의 꿈같은 것이 내가 살았다고 하는 지난 일이 아닌가 말이다.
몸이란 헛껍데기 같은 허깨비가 참나인줄 알고 속은것이 아닌가 말이다.
저 살았다고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다 허깨비 같음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내노랍시고 모가지를 빳빳하게 쳐든체 도무지 겸손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食色(식색)은 허기를 채우고 자식낳는 것으로 知足(지족)하여 족할줄 알아야지 食色(식색)의 맛을 貪溺(탐닉)하여 그것을 즐기는 것에 빠져들면 죄의 늪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죄의 종이 되고 마는 것이다.
知足禪師(지족선사)는 面壁十年之坐禪(면벽십년지좌선) 으로 達磨(달마)가 小林寺(소림사)에서 面壁九年(면벽구년)을 한 것보다 일년이나 더 道心(도심)을 닦았으나 妖艶(요염)한 妓生(기생)의 한몸짓에 무참히 무너져 내렸으나 草野(초야)에 隱居(은거)하여 自然(자연)을 벗삼으며 마음의 때를 닦아오던 庶孼(서얼)출신의 화담 서경덕은 妓生(기생) 황진이의 妖艶(요염)한 色情(색정)을 惻隱(측은)히 여겨 달래어서 그마음 中心(중심)을 꿰뚫어 본지라. 황진이는 서경덕을 우러러 尊敬(존경)한나머지 그를 스승님으로 모시는 아릿다운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深山幽谷(심산유곡)에 入山(입산)하여 面壁精進(면벽정진)하는 것도 좋은 方法(방법)이긴 하나 日常(일상)의 生活(생활) 한가운데인 塵垢(진구)로 엮이어 나가는 티끌과 먼지 때로 풀석이는 삶가운데에서 面心精進(면심정진)하는 것도 한 方法(방법)이라 하겠다.
個體(개체)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個體(개체)는 全體(전체)의 한 부분 부분으로 전체에 부속된 한부분에 지나지 않음이다.
전체란 온통 하나이신 절대존재(하나님 또는 나르바나님)를 이름이다.
해서 지구상의 모든 너와 나가 몸으로는 개체로 나뉘어져 너와 나인줄 알지만 영(참된 얼의 나)으로는 모두가 다 한나무(절대존재인 하나님 또는 니르바나님)에 달린 이파리나 꽃이라 할 수 있다 하겠다.
사람이란 것이 이세상을 잠깐 스쳐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함을 알아서 마침내 그윽히 窮神(궁신)하여 참의 참인 참나를 찾고 깨달아서 서로 한얼로서 사랑하는 것으로 사랑의 꽃을 피워내야 함이다.
본디 하나님께서 내게 숨겨두신 얼생명(하나님얼의 씨알 끄트머리인 얼나)이 여물어지게 생각을 마음에 물고 불리고 불리면 반드시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랑으로 살면 다시말해 사랑의 本體(본체)이신 하나님 사랑에 들면 바로 거기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겠는가.
뿌리가 같은데 가지가 서로 동서남북으로 뻗었다고 해서 (믿는 종교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티격태격 할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을 한뿌리로 하는 지구촌의 수십억 인류는 한집안의 형제자매가 아니겠는가.
예수나 석가는 온 인류가 모두 하나같이 한뿌리에서 파생된 한형제 자매임을 가르치시고 가신 분들이라 하겠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길은 저마다 제 각각이다.
한 이불속에서 살을 섞고 잔다는 부부사이도 내 뱃속에서 낳았다는 자식과 부모사이도 사람으로서 저마다 생각하고 살아가는 양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모두가 인생이란 迷路(미로)를 지나가는 한 찰나의 그림자일 뿐이다.
엄마 뱃속에서 나온 몸의 나는 나의 참나가 아니다.
多夕柳永模(다석유영모)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없던 것이 나온 것이므로 곧 없어질 껍데기 몸이요 피와 오줌과 뚱과 고름 주머니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엄마 뱃속에선 내생명을 키우던 탯집이었지만 엄마 배밖에선 훌러덩 벗어져야 내몸생명이 코로 숨쉬고 살수 있듯이 이몸으로서의 나는 엄마 뱃속을 나온 탯집같아서 그걸 훌러덩 벗어던져야 할 것짓의 나일 뿐이지 더이상 그 탯집을 벗지못하면 죽어지게되니 이 탯집인 내몸이 참의 나가 아닌것이란 말씀이다.
이 몸사람은 곧 껍데기 사람으로 흙한줌이고 재 한줌으로 끝나버릴 그런 유기물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그럼 나의 참나는 무엇인가?
바로 내속에 하나님께서 은밀히 숨겨두신 하나님의 씨알(하나님의 얼인 성령)의 끄트머리얼인 얼의 나가 참나인 것이다.
탯집과 배꼽을 잇고 있던 탯줄(생명줄)을 싹뚝 끊어버렸듯이 거짓된 몸에 집착하여 홀려있던 몸사람의 나에서 참나를 찾아 미련없이 뛰쳐 나와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
고 하신 사도 바울이 정녕 죽어야 할 몸의 욕심과 아집에 갇혀있던 몸의 나(멸망할 나)에서 내(바울) 속에 있던 참의얼(하나님의 성령인 얼)인 진리의 성령(얼)으로 거듭난 체험의 고백이 바로 이 말씀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혓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사도 바울의 이 말씀도 앞의 에베소서 말씀과 같은 말씀이다.
육신에 묶여있던 삶인 몸삶을 자기십자가에 못박아 던져버렸기에 더 이상 그 몸삶에 애착하여 마음쓰지 않고 본디 내안에 거하여 계시던 참얼의 하나님을 좇아 산다는 말씀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困苦(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8:22~24>
바울 사도의 이말씀도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서의 죄로 인한 困苦(곤고)함을 고백한 말씀으로 위의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 말씀과 一脈相通(일맥상통)한다 하겠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반기지만 하는 것은 곧 내 속에 하나님이 넣어주신 하나님의 씨알인 얼의나를 말하는 것이고 내지체속에 있는 죄의법이란 우리몸의 짐승성질인 몸으로서의 本能(본능)인 自我(자아)의 罪性(죄성)을 일컬음이라 하겠다.
몸뚱이의 所欲(소욕)을 充足(충족)시키고자 하는 마음은 곧 죄의 수렁으로 빨려들어가는 마음이다.
무슨 맛을 연연해하고 못잊어 찾는 것은 몹쓸 몸에 묶인 마음이다.
어떤 무엇에 마음이 머뭇거리고 있는것은 실제 마음이 욕심을 내어거기에 잡혀 미혹되어 있다는 증거다. 마치 여름밤 부나비들이 타는 등불빛이 자기들의 갈길을 밝혀줄 태양빛인줄 알고 열심히 날아와서 타는 등불빛에 몸이 부딪혀 죽는것과 같이 迷惑(미혹)하여 어두워진 어리석은 사람들이 저 자신의 욕심의 불꽃에 몸을 던지는 것이지만 마음속의 얼생명인 얼의 나를 깨달아 알게되면 이와 달라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이 일어오르는 욕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욕심의 불길이 타오르는 火宅(화택)을 벗어 넘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한복음 12:35~36>
하나님께서 내속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씨알인 얼의나(영)가 곧 빛이란 말씀이다. 그 빛은 몸생명의 짧은 삶동안 잠시뿐이니 그 몸생명이 불어있는 동안 저 잘났다고 죄만 짓고 몸뚱아리의 맛만 찾아 허랑방탕하지 말고 그불이 꺼지기 전에 너는 빨리 참 빛이신 얼의 나를 찾으라는 말씀이고 이몸생명이 잠시나마 내게 있게해주신 하나님의 참 뜻은 하나님이 넣어주신 영성의 얼나를 찾아 하나님나라로 솟날수 있도록 잠시의 생명을 허락하신 것이니 육신의 소욕에 묶이고 붙잡혀 꿈꾸다가 끝내지 말고 그 영생의 빛을 빨리 찾아서 너도 어서 하나님의 영생에 들어오라는 말씀이다.
諸行無常 是生滅法(제행무상 시생멸법)
生滅滅己 寂滅爲樂(생멸멸기 적멸위락)
- 大乘涅槃經(대승열반경) -
자아가 행하는 모든 짓거리 다 덧없음이라.
이것은 나고 죽는(상대성 세계의)법칙이라.
나고 죽는 나를 멸하여 죽이고, 절대존재인 참나를 찾아 기뻐하리라.
이것이 석가의 깨달음이고 석가의 가르침이다.
여기서의 寂滅(적멸)은 Nirvana의 의역으로 기독교 용어로 바꾸면 곧 하나님과 같은 말이다.
Nirvana의 音譯(음역)은 涅槃(열반)으로 니르바나의 음과 비슷한 음을 찾다보니 검은흙녈(涅)과 쟁반반(槃)자를 租合(조합)하여 만들어진 어거지 단어로 열반이란 한문글자 자체로선 아무런 뜻도 없다 하겠다.
원어인 산스크리스트어로된 불경 380여권을 漢譯(한역)한 쿠마라지바(위구르족 사람)의 작품정도로 알면 되겠다.
求援(구원)이나 復活(부활)의 참뜻은 肉身(육신)의 所欲(소욕)인 三毒(삼독)으로 불타는 慾心(욕심)의 불을 끄고 참 眞理(진리)이신 하나님의 성령을 깨달아 받고 自由解脫(자유해탈)하여 몸뚱이에 붙잡힌 꿈에서 탁깨자는 것이 그 참뜻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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