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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 존 쉘비 스퐁
돈 쉘비 마크로산
2016. 4. 17. 14:58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작가
존 쉘비 스퐁
출판
한국기독교연구소
나는 그로 인한 논쟁이 교회에 부정적이거나 심지어 파괴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은 건강과 활력의 적극적인 표징이라고 간주한다. 그것은 신앙 전통이 발효하여 동시에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가슴만이 아니라 머리로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또한 어떤 분야로부터든 새로운 진리에 의해 위협을 당하는 신이라면 그 신은 이미 죽은 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1장 정직한 신앙고백이 가능한가?
사도신경의 단어들과 그 후에 확대된 니케아 신조는 하나의 세계관에 맞도록 표현된 것인데 그 세계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 세계관은 오늘날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매우 낯선 것이다. 그런 기독교 신조들이 만들어질 당시에 사람들이 실재를 파악했던 방식은 그 후 사람들의 지식이 확장됨으로써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 사실은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말할 필요조자 거의 없다. 만일 내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이런 옛날 신조들의 표현과 문자적인 의미에서 똑같은 분이어야 한다면, 나로서는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 하나님은 내 헌신의 주체가 될 가치도 없다. 나 혼자만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전통적인 종교적 이해로는 그 옛날의 능력을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일 따름이다.
우리는 교회의 교인이면서 여전히 생각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 점점 더 어렵다고 느끼는 대다수의 침묵하는 신자들이다. 교회는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는 신자들이 되도록 격려하지 않는다. 교회라는 제도는 점점 더 깨지기 쉬운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신조의 상징체계들을 열어 젖혀 새로운 가능성들로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열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2장 유배의 의미와 우리가 유배당한 과정
기독교 신앙이 만들어진 세계는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그것은 프톨레미의 이론인 삼층세계(하늘-땅-지하)를 기초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인간의 문제에 친밀하게 개입하는 신으로 이해한다. 군대와 전쟁의 신이고, 부족신이며, 외부적인 힘과 침입해 들어오는 하나님이다. 기독교 신조들의 언어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근대가 시작되면서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대두되었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간사를 지휘한다는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는 더이상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저 위나 저 밖에 계시지 않는다. 교회는 하늘 저편의 하나님, 즉 성서 이야기에 따르면, 갈멜 산에서 엘리야가 바친 제물을 태우기 위해 하늘에서 불을 내려보냄으로써 바알신을 섬기던 제사장들을 패망시킨 바 있는 하늘 저편의 하나님에 관해 어떻게 계속 말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죽은 후 하나님에게 돌아가기 위해 승천하였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여전히 지적인 성실성을 갖고 선포할 수 있겠는가? 또한 예수가 갈리리의 산 위에서 하늘로부터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이야기나 사도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에 하늘에서 예수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더욱 더 문제거리가 되었다. 그런 성서 이야기들은 명백히 고대세계의 삼층천으로 이루어진 세계관에 의해 형성된 것들인데, 그런 삼층천 세계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뉴턴에 의해 기적과 주술이라는 종교적 범주는 사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하나님이나 다른 외부의 법칙이 아닌,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다윈은 인간의 생명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하던 원칙들을 대부분 날려버리도록 만들었다. 교회는 다윈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고대 시대의 교회 권력은 이미 무너졌으며, 다윈을 이단자로 처형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는 교회의 능력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 다윈에 대한 비판자들이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다윈의 사상은 서구세계의 생물학을 구성하고 있다. "창조과학"이라 불리는 괴상한 것은 겁먹은 종교적 심성이 죽어가는 것을 반영하는 무식한 고함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이드의 사상은 서구 세계의 종교체계를 형성하는 전근대적인 인간 이해를 파괴시키는 힘에 공조하였다. 이어서 융은 기독교를 인간 의식의 발전을 위해 필요했던 역사적 과정의 일부로서, 이제는 그 종교의 사라져 가는 그림자만이 남아있다고 보았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 모두를 외부적인 특성이 아니라 존재와 관련된 측면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모두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상대성을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는데, 여기에는 종교인들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라고 불렀던 것도 포함되었다.
우리는 이제 어쩔 수 없니 인류 역사에서 우리 세대 이전에 다른 신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늘날 바알, 아스다롯, 몰렉, 레, 쥬피터, 제우스, 마스, 미트라 신을 위한 제단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만일 지금도 신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우리의 하나님 차례가 아닐지 의문을 갖게 된다.
기원전 6세기에 유배당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하나님에 관해 지니고 있었던 모든 정의들과 예상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유배당함으로써 똑같은 일을 겪었다. 과거의 하나님에 관한 믿음들은 더 이상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지탱하지 못한다. 우리의 새로운 영적인 여행에서 첫 번째 관문은 유배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3장 하나님을 찾아서 : 무신론은 유신론의 유일한 대안인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유신론이 "세상의 창조주이며 최고 통치자인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브리태니카 대백과 사전에는 "모든 제한된 혹은 유한한 사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이 인격적 술어로도 말할 수 있는, 최고의 혹은 궁극적 실재에 의존되어 있다는 견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런 정의들을 토대로 하여 나는 유신론을 세상 바깥에 계신, 인격적, 초자연적, 개입할 잠재성을 지닌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고 정의하겠다. 그러나 유신론과 하나님은 똑같은 것이 아니다. 유신론은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내린 하나의 정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내린 어떤 정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미를 모두 다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떤 피조물도 자신의 한계나 존재 너머의 것을 개념화할 수 없다. 인간은 안 그런 척 하지만,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인간들이 신을 갖고 있다면, 그 신은 인간과 비슷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런 한계부터 인정하고 시작해야만 한다. 실제로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예배해왔던 이런 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신들이 단순히 인간처럼 행동하였을 뿐 아니라, 때로는 인간 행동의 최악의 방식으로 행동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 성서에서 유대인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증오했던 모든 사람들을 증오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즉 우리가 하나님에게 붙인 속성들은 인간의 한계 너머로 확장된 인간의 특성일 따름이다. 인간은 죽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유한하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그 능력에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한계가 없다. 인간은 특수한 공간이나 불변의 자연법칙에 의해 구속된다. 하나님은 그런 구속을 받지 않는 분으로 인식된다. 하나님은 하늘에 사는, 인간의 한계가 없는 인간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감추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과 그처럼 비슷한 이유는 인간이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과정이 반대였음을 알고 있다. 유신론의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역시 죽을 수밖에 없으며 지금 죽어가고 있다. 유신론의 기원에 대한 이런 탐구를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우리는 "하나님을 애당초 우리 자신의 이미지대로 만들게 한 인간의 욕구는 무엇이었는가?"라고 질문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드는 유신론적 종교가 자의식의 충격(trauma)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종교의 첫 번째 교리는 인간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연약하고 겁먹기 쉬운 인간들은 이러한 외부적인, 인격적인 힘들의 비위를 맞출 수 있게 되어, 그 힘들의 희생자가 되는 대신에 그 신들을 감동시켜 자신들을 보호하도록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연적 재해들은 흔히 이 세상 너머에 사는 초자연적 존재의 분노가 표현된 것으로 해석되었다. 프로이드는 이런 모든 유신론적 징후들 속에서 새롭게 자의식을 갖게 된 피조물의 억압된 히스테리를 발견했다. 히스테리를 방어하는 것은 그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그래야만 자의식의 고뇌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종교적 진리를 그와 같이 꿰뚫을 수 없는 장벽들로 둘러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객관적 형태의 진리는 공개적인 논쟁을 통해 서로 경쟁하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진리와 유신론적 이해는 그런 논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종교 자체는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는 인간 생활의 안전체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태동된 것이었다. 우리가 종교의 이런 방어기제를 인식할 때만이 우리는 원시 종교와 또한 분명히 서구 종교 속에 계속 존재하는 강렬한 분노, 심지어 죽일듯한 분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끊임없이 교리를 새로 만들어내어 이 종교 사업 속에 누구는 들어오고 누구는 들어오지 못하는지를 명백하게 밝힘으로써,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적이 누구인지, 그들에 맞서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를 알도록 만든 것도 분노 때문이었다.
4장 유신론 너머의 새로운 하나님 이미지들
"감독님, 유신론자가 되지 않은 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나요?"
우리는 또한 소크라테스가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판결을 받아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되었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오늘날 소크라테스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판결이 얼마나 완전히 무식한 판결이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다른 비전을 갖고 있었다. 즉 그는 다른 렌즈를 통해 신의 실재를 보았는데, 이것을 당시 속 좁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올림퍼스 산의 일반적 신들은 시대가 바뀌는 전환기에 살아남을 만큼 크지 못했으며 진정한 신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런 신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나갔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러나 약 2400년이 지난 오늘날 그는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 내용을 거부하는 신자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20세기의 아마도 가장 탁월한 신약학자였던 루돌프 불트만은 복음서의 모든 재료들이 고대의 신화 속에 싸여 있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줌으로써 이런 신학적 연구를 더욱 강도 높게 만들었다. 화이트헤드는 수학자로 출발하였는데, 하나님을 단순히 외부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의 생명 속에 들어오는 신적인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신학적 틀을 놓았다. 한편 본회퍼는 이 세상에 "종교 없는 기독교"를 요청하였고, 나찌 독일의 감옥에서 제3제국의 배신자로 처형될 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폴 틸리히는 나의 스승이었고 그 자신이 나찌 독일의 피난민으로서 1930년대부터 저술활동을 하였는데, 그는 역사적으로 유신론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했던 이미지, 즉 세상 밖의 높은 곳에 계신다는 이미지를 버리고, 그 대신에 이제는 내면적으로 깊은 곳에 계신다는 이미지, 즉 우리와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만물의 존재의 근거이며 핵심이라는 이미지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틸리히가 가리킨 하나님은 생명의 무한한 중심이었다. 이 하나님은 인격체가 아니라, 오히려 신비주의자들의 통찰력처럼, 신비적 현존으로서 그 속에서 모든 인격들이 번창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만물을 존재하게 한 힘이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불러낼 수 있는 외적이며 인격적 힘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인 실재로서, 우리가 그 앞에 서면, 우리로 하여금 생명 자체의 의미에 대해 우리를 개방하게 만드는 실재였다.
유대인들이 기원전 6세기 초에 바빌론에 유배당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주의 노래"를, 적어도 시온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을 예배했던 방식으로는 결코 미래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새로운 노래를 배우거나, 아니면 두 번 다시 노래를 부르지 말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 기독교인의 운명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새로운 노래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믿으며, 그 노래를 부를 세대의 일부가 되고 싶다.
5장 신약성서의 예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
성서는 문자적 의미나 언어적 의미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결코 그랬던 적도 없다. 복음서들은 하나님이 저술한, 오류가 없는 작품이 아니다. 즉 복음서들은 신앙 공동체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심지어 그 공동체들의 편견까지도 표현하고 있다. 또한 복음서들 속에는 심각한 내적 모순들이 없지 않으며, 난처하게 만드는 도덕적 및 지적 개념들도 있다. 복음서들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신학적 관점들이 변하고 발전하는 모습으르 드러낸다. 더구나 복음서들은 원본도 아니다. 복음서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사도 바울의 작품들과 히브리 성서의 영감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복음서들은 흔히 주장되는 것처럼 목격자들의 말도 아니다. 즉 복음서들이 기록되었을 때는 예수의 생애를 목격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없었다. 복음서들은 또한 기록된 당시의 사건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았으며, 아마도 이런 사건들은 예수 당시의 사건들보다도 더욱 극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원후 70년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파괴시킨 것은 각각의 복음서 이야기들의 배경이 되는 막강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들을 적절한 역사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야말로 성서 이해의 첫걸음이다.
내가 이런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은 그런 본문들을 헐뜯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체험을 신약성서와 교리적 발전에서 나타난 그 체험들에 대한 신학적 해석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다.
신약성서의 첫번째 저자는 사도 바울이었는데, 그는 그들(로마교회 성도)에게 하나님이 예수를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했다"고 말한다(롬1:4). 여기에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든가, 나중에 "성육신"이라 불리게 된 것이 없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한 근거가 십자가 처형 이후의 부활절 체험이었다. 바울은 기적 이야기들이나 하나님이 주도한 예수의 처녀 출생에 관해 몰랐던 것 같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지 10년 내지 15년이 지나, 마가복음이 생겨났다. 마가는 하나님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했다는 바울의 말을 받아들여, 그 지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묘사하였다. 마가는 하늘로부터 들려운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1:11)고 선언했다고 묘사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었다고 선었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가 공적인 생애 초기에, 즉 세례 받을 때에 그 일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마태는 마가복음이 기록된 지 10년 내지 20년 후, 즉 예수가 죽은 지 50년 내지 55년이 지난 후에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었는데, 예수의 신적인 기원에 관한 선포 이야기가 또다시 이동하게 되었다. 마태로서는 예수가 세례받을 때, 혹은 부활 때에 전혀 새로운 어떤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태는 마가의 논리, 즉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그의 세례 때에 선포했던 것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라는 논리를 빌려다가 그것을 확대시켜, 예수의 세례와 부활은 모두 예수가 임신된 순간부터 있었던 것을 단지 드러냈을 뿐이라고 말했다.
마태 이후 5년 내지 10년이 지나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마태의 세부적인 사실들을 약간씩 바꾸고 그 이미지들을 좀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만들었지만, 본질적으로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손을 대지 않았다.
요한이 복음서를 쓸 당시에는 분명히 예수의 출생에 관한 전승이 광범위하게 논의되었음에 틀림없지만, 그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그 출생 이야기를 빼버렸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더 나아가, 요한은 두 차례나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불렀다(1:45; 6:42). 이것은 마치 요한복음 저자가 예수의 처녀 출생 이야기를 이교도들의 이야기로 간주하여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처녀 출생 이야기들은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매우 흔했던 이야기들이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신적인 생명이 태초부터 하나님의 존재의 일부였던 로고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질서 속에 태어난 계기였다. 그러므로 요한에게는 인류의 모든 역사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던 때는 없었다.
6장 구원자 예수의 이미지는 사라져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람 잡아먹는 도깨비로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아버지가 무슨 이유에서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면 그는 아동학대로 체포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말함으로써 마치 그렇게 말해야만 하나님을 더욱 거룩하며 예배 받기에 합당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는 식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이런 입장을 더욱 받아들이거나 믿기 어렵게 되었다. 나는 자신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요구한 신을 예배하기보다는 진저리를 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차원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신학적 체제와 괴상한 전제들도 오늘날 우리의 포스트모던 세계에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것은 이제 매우 의식적으로 기독교에서 제거될 필요가 있다. 그 해체가 시작된 것은 아담과 이브가 인류의 원초적인 부모가 아니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 두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진화론은 아담과 이브가 기껏해야 전설적인 존재들인 것으로 만들었다. 인간은 분명히 45억 년 내지 50억 년의 과정을 거쳐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첫 부모들은 없었으며, 또한 첫 부모들이 불순종한 행동이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피조물이 보기에 좋았다는 말은 창조 작업이 완결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윈은 창조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꺠닫게 해주었다. 죄란 무엇인가? 죄란 하나님이 창조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의도했던 완전성으로부터 소외된 것이 아니며, 결코 그런 것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창조 따위는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 속으로 타락했다는 것도 없었다.
우리 인간은 죄 가운데 살지 않는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우리의 원죄의 때를 씻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만일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타락한 피조물들이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과거의 진화과정을 통해 등장했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 과정 중에 있다.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점은 우리가 그 길고도 힘든 과거의 생존자들로서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짐에 대한 표지이다. 우리는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인 유전자"라 부른 것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일 따름이다. 즉, 우리들이 생존경쟁에 직면하면, 우리의 고상한 본능마저 무너지고,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욕구들이 또다시 우리를 물고 뜯는 싸움에 끼어들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 존재에 대한 설명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킬 구원자란 다윈 이전 시대의 미신이며, 다윈 이후 시대에는 헛소리이다. 피조물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의 타락한 세상에 들어온 초자연적 구원자란 유신론적 신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그 구원자 역할로부터 해방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완전히 이런 이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들 대부분은 예수를 훌륭한 선생이나 혹은 훌륭한 본보기로 환원시키는 것 이외에는 그에 대해 달리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체험이 단지 그런 것(훌륭한 선생이나 혹은 훌륭한 본보기)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 체험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 지에 대해 나는 의심한다.
7장 영의 사람 그리스도
분명한 사실은 복음서들이 1세기 해석들에 기초한 1세기의 이야기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들은 예수 체험에 대한 1세기의 여과작업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 복음서들을 읽으면서 예수에 관한 문자적 진실을 발견할 것이 아니라, 복음서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예수 체험으로 인도되어야만 한다. 그 왜곡의 배후에는 항상 예수 체험이 놓여있는데, 단어들이란 제한된 것이기 때문에 그 왜곡이란 불가피한 것이다. 만일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진리를 계시하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본문들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며, 그 단어들 배후로 들어가, 그 단어들을 필요로 했던 체험을 발견해야 하며, 이런 식으로 그 단어들이 가리키는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우리는 본문을 계시와 동일시할 수 없으며, 전달자를 전달 내용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큰 잘못이었다.
복음서들 가운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가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예수가 영의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는 1세기의 멋진 방식이었다. 분명히 이것이 말하는 것은 생물학이 아니었다. 기원후 90년대에 예수의 처녀 출생 이야기가 발전되기 이전에는 어떤 저술가도 그런 기적적 출생 이야기 전승을 암시했던 적이 없었다. 즉 바울은 예수의 출신 가족에 관해 언급했던 적이 없었으며, 단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자에게서 태어났다"(갈 4:4)는 것과 육신적으로는 다윗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 언급했다(롬 1:3). 또한 첫 번째 복음서인 마가복음 역시 예수가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출생했다는 것에 관하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예수의 출생 이야기들이 마침내 나타나게 되었을 때, 그 이야기들은 이처럼 역사로 읽혀지기 위해 의도된 것이 분명히 아니었다. 오히려 그 출생 이야기들은 유대인들의 신성한 이야기들에 기초한 해석적 초상화들로서, 1세기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이해했던 언어와 스타일로 그려낸 초상화였다. 즉 마태가 처녀라는 개념을 끌어온 것은 이사야 7:14을 오역한 것이며(마 1:18-25), 누가는 마태의 실수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동방박사 이야기(마 2:1-12)는 이사야 60장에서 끌어온 것으로 시바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 이야기(왕상 10장)의 요소들을 덧붙인 것이다. 또한 별은 민수기 22-24장의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와 유대인들의 구전 전승에 나오는 일화들에서 끌어온 것이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과 다윗의 연관성, 즉 목동이었다가 왕이 된 다윗과의 연관성에서 나온 이야기였다(눅 2:1-20). 마리아의 노래(눅 1:46-55)는 사무엘서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삼상 2:1-10)를 각색한 것이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 이야기(마 1,2장)는 창세기 37-50장에 나오는 고대 족장 요셉 이야기에서 끌어온 것이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분석을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문자적인 전기가 아니라 미드라쉬적 기록으로 이해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이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가 '영'에 의해 잉태되었다고 주장했을 때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다. 그들의 체험은 그들이 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체험이었다. 그 현실에 대해 그들이 응답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속에는 초월적이며 거룩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속에서 만난 자질(quality)이란 인간이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는 점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영의 산물임에 틀림이 없다.
복음서 기자들이 자신들의 제한된 개념 속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영의 사람 예수의 특정한 생에 속에서 자신들은 단지 하나님을 본 것만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완성했을 때에 어떤 모습일지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즉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초상화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8장 너희는 그리스도를 누구라 생각하는가?
이 탐구를 위해 내가 아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인간성, 즉 그 유신론적 설명들 배후에 있는 현존을 검토하는 길이다. 예수의 죽음을 포함하여 그의 존재에 도대체 무엇이 있었기에, 그를 '유월절 어린양', '속죄일의 희생양', '고난받는 종', '사람의 아들', '로고스'라고 믿게 되었을까? 이런 모든 이미지들이 예수에게 적용된 것이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거룩한 하나님을 섬겨왔던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예수 안에서 만났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도록 된 것은 무엇때문이었는가?
예수가 살았던 세계에서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를 갈라놓는 전형적인 편견의 깊은 골이 있었다. 예수가 살았던 세계는 또한 여성을 인간 이하의 존재,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문화적 장벽이 있었던 세계였다. 또한 당시에는 사람들을 배제시키는 제의적 장벽도 있었다. 이런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그 고백 밑에는 어느 누구든 종교, 부족, 문화, 제의, 질병 따위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될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살아냈던 한 인간이 있었다.
역사를 통해 예수의 생애의 의미가 사람들을 감동시킨 방식들을 검토해 볼 때, 우리는 이 예수로부터 생겨난 자극이 계속해서 예수 공동체로 하여금 인간적 장벽을 넘어 전진하도록 몰아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언제나 편견의 장벽을 넘어 보편적인 공동체가 되도록 전진했다. 즉 이방인들이 결국에는 교회 안에서 환영을 받았으며, 노예제도 역시 결국에는 사라졌다. 인종차별과 분리정책도 철폐되었으며, 여성들도 교회 안에서 지위와 권력을 얻었다. 정신병자들도 결국에는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 환자들로 이해되었다.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들도 결국에는 교회의 담장 안에 매장되었다. 이혼한 사람들도 마침내는 거부당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로 혼인하여 행복을 누릴 기회가 주어졌다. 왼손잡이들도 마침내는 현실 그대로 이해를 얻게 되어, 자연스럽지 못한 변화를 강요당하지 않고, 그들의 뇌의 구조와 반대되는 방식으로 행동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긍극적으로는 동성애자들도 교회 안에서 환영을 받게 되어, 교회에 입회하는 대가로 그들에게 부과된 독신생활이나 "교정"할 마음,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장벽도 사라졌다. 물론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힘든 시절, 거절했던 시기, 역행했던 시간과 어두운 기간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들 신자들의 공동체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힘이 우세하였고, 한때 교회가 문을 굳게 닫았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제는 문을 활짝 열어놓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들이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 속에서 발견했던 똑같은 특징이며, 이런 특징은 세대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교회로부터 솟아나고 있다.
9장 외부적 신이 없는 세상에서 기도의 의미
"주님,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는 것은 새로운 요청이 아니다. 이런 요청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제기되는 것 같다. 우리의 포스트모던 세계는 초자연적인 유신론의 가정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는 실재를 매우 다르게 이해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인생과 우주 모두에 대해 매우 다른 경험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매우 다른 질문을 갖는 것은 불가피하다. 우리가 "주님,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외칠 때,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통해 위험이 사라지고, 질병이 치료되며, 자연적 재해를 피할 수 있거나,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믿을 이유가 전혀 없는 세상 속에서 외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를 드려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유신론적 견해가 기껏해야 순진한 것이 되었으며 최악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된 우주 속에서 기도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늘은 빈 공간이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신적인 보호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기도를 계속할 수 있는가? 우리가 유배지에서 묻게 되는 질문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유신론의 관 뚜껑에 마지막 못을 박음으로써, 유배지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작하겠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유신론의 완전한 죽음만이 우리를 새로운 기도 형태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유신론은 이제 지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파산 당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파산 당했다.
기도의 체험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한 나의 시도는 내 안 깊은 곳에 또한 모든 사람들의 심층 속에, 생명의 원천과 교제할 것을 요구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설명할 수도 없으며 부정할 수도 없는 생명의 신비한 중심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나를 초월해 있는 무엇이지만, 언제나 나 자신의 심층 속에서 나를 만나기를 갈구한다. 나는 이 현존을 '당신'(Thou)이라 부르는데 그것이 인격적 존재이기 떄문이 아니라, 언제나 나를 내 인격의 심층적 차원 속으로 불러들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현존에 관해 의미 있게 말하려 하면, 나는 거의 말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또다시 나사렛 예수에 대한 복음서의 초상에로 되돌아간다. 나는 그 현존이 그에게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식으로든 들어오고 있거나 아니면 실제로 현존한다고 선언한다. 나중에는 그 나라가 심지어 그 나라의 원리를 구현한 우리들 속에 임재한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온전함을 드러낸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이 현존한 모습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며, 기도는 하나님을 만난 이런 체험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기도는 인간의 의식적인 의도로서 삶의 깊이와 사랑에 연결되려는 의도이며,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 속에 온전함을 창조하는 대리인이 되려는 의식적인 의도이다. 기도는 나의 존재를 다른 사람의 존재가 되도록 요청하는 것이며, 그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아마도 삶 전체를 새로운 차원에서 존재하도록 모험할 용기를 주는 것이다. 기도는 또한 다른 사람의 인격과 존재를 축소시키는 편견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기도는 기회가 균등하며 아무도 현재 상태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제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적절한 정치적 행동을 취한다. 기도는 모든 사람들 속에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거룩한 핵심이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기도는 인생의 절박함에 직면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우리 모두가 통제할 수 없는 여러 상황 속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기도는 이런 상황들 앞에서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를 갖고 그 상황들을 기꺼이 맞이하는 것이다. 기도는 인생의 연약함을 포용하는 능력이며, 심지어 우리가 그 희생자가 된다 하더라도 인생을 변혁하려는 능력이다. 기도는 환상들, 즉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라거나, 혹은 우리의 인생이 외부적인 신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 신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기도는 어린이 같은 의존성에서 벗어나 영적인 성숙으로 들어가도록 불러낸다.
나에게 기도하는 일과 깊이 있게, 풍성하게, 온전하게 살아가는 일은 이처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살전 5:17)라고 말한 의미일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10장 새로운 시대에서 윤리의 새로운 기초
만일 우리의 세계관에서 유신론의 외부적인 하나님을 제거한다면, 즉 인간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계획된 신적 법률들을 만든 분으로 생각되어 왔던 외부적인 하나님을 제거한다면, 도대체 윤리의 근거가 있는가?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윤리의 원천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에 의해 고대의 법률들에 계시되었다는 신화는 완전히 넌센스이다. 즉 그 법률들을 세밀하게 연구하면 그 법률을 만든 사람들의 부족적 편견, 상투적 사고, 제한된 지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것은 율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십계명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법률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첫 번째 증거는 성서에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다룰 때에는 종종 이런 법률들을 어겼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십계명에는 사람들이 거짓 증거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다. 모세는 그들이 단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사흘 동안 광야로 나가기만을 원했다고 말했는데, 그 다음에는 그들이 다시 노예생활로 돌아올 것처럼 말했다. 모세도 바로 왕도 이것을 믿지 않았다(출 5:1-3). 이것은 분명히 거짓 증거였으며, 따라서 신성한 법률을 어긴 것이다. 십계명에는 "살인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지만, 여호수아는 포로로 잡은 다섯 명의 가나안 왕들을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여호수아 10:22-27). 이처럼 도덕적으로 당혹스러운 성서 이야기들 모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은 이런 비윤리적 행동들이 이방인들을 상대로 저질러졌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못한다는 법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는 적용되는 것으로 믿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법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희박하다.
이런 법률들은 또한 고대인들의 가부장적 사고방식, 즉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성차별적 태도는 마지막 계명, 즉 "탐내지 못한다"는 계명에 분명히 드러나 있으며, "간음하지 못한다"는 계명 속에도 함축되어 있다. 즉 마지막 계명의 전체 본문은 "너희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너의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할 것 없이,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출 20:17)고 되어 있다. 율법의 어디에도 이웃의 남편을 탐내는 것에 대한 금지조항은 들어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남편은 소유물이 아니지만 아내는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웃은 남자였다. 그의 재산목록은 가치 있는 것들부터 시작해서 열거되어 있다. 첫째가 그의 집이며, 둘째가 그의 아내이며, 셋째가 그의 노예들이며, 그 다음이 소와 나귀와 그 밖의 소유물들이었다.
이 계명은 일차적인 문자적 의미에서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소유물 혹은 재산인 여자를 범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것이었다. 이런 사실에 대한 증거는 이 계명의 본질적인 의미가 만일 이 법률에 따른다면, 한 유대인 남자가 혼인하지 않는 여자와 성관계를 맺을 경우에는 간음에 해당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 경우에는 그 여자의 아버지의 재물을 범한 것이 되어, 그 범죄자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재정적으로 보상하기에 충분한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처럼 인간을 마치 소유물처럼 다루는 법률은 즉각 비도덕적인 것으로 선언되어 폐기될 필요가 있다.
고대의 윤리규범은 분명히 그 시대의 산물이다. 오늘날의 윤리적 논쟁은 매우 복잡하며, 그 고대의 종교적 규범은 우리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빛을 비춰줄 수 없다.
오늘날 전세계에 걸쳐 기독교 교회는 성 윤리에 대해 특별히 열심히 논쟁하고 있다. 이 논쟁의 핵심은 과거의 성 규정과 전형 모두에 대해 도전하는 동성애에 대한 이해 문제이다. 이 논쟁이 뜨거운 이유는 첫째로 성서 안에서 성 문제에 관한 언급들이 일관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문자적으로 인용되는 본문들의 권위가 심각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사람들은 성서를 이런 식으로 이용하였으며, 성공하지 못했다. 즉 과거에 사람들은 노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질병을 치료하는 방식에 반대하기 위해, 여자에 대한 성직 서품을 반대하기 위해, 또한 여자를 2등급의 시민적 지위에 매어두기 위해 성서를 문자적으로 인용하였다. 우리는 이처럼 케케묵은 생각들의 변호자들 역시 "성서의 분명한 가르침"에 따른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 하다. 그러므로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동성애 혐오증에 대한 성서적 뒷받침을 주장할 때, 그들 속에서는 성서 이외의 다른 진실이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유신론의 하나님이 사망함으로써 우리 세계에서는 윤리의 전통적 기초가 사라져버렸다. 이것이 우리가 내릴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또한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논쟁이 그처럼 폭넓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을 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불안정한 공허감을 피하기 위해 병적으로 종교에 빠져드는데, 그들은 마치 확신에 차서 특정한 종교적 구호를 열심히 외치면 모든 것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라도 할 것처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은 모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의미를 잃었다는 사실에 대한 표징일 따름이다.
새로운 윤리의 기초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장소에서 찾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외부적이며 객관적으로 진정한 것의 근거가 되는 권위를 삶의 바깥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인간성의 핵심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질문들을 통해 그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질문들은 하나님에 관한 질문들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질문들로서, 우리 자신의 존재의 깊이를 탐색하게 만든다.
(그런 질문들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인간성을 억압하는 것은 결코 생명의 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다.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 도덕성은 위협과 부정을 통해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적인 에너지를 억압하는 것이 그 동안에는 전통적 윤리의 특징이었지만, 생명의 충만함으로 인도하지 못했다. 그것은 오히려 성적인 에너지의 반발을 초래하여 우리의 본질적 인간성에 파괴적인 작용을 하였다. 즉 인간의 성의 가치가 억압될 때, 그것은 포르노그라피로 되돌아온다. 우리가 성을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할 때, 우리는 단지 성으로부터 사랑을 제거하는 데에만 성공한다. 윤리와 도덕은 이처럼 잘못된 이분법을 넘어서야만 한다.
인간의 행복은 분명히 인생의 바람직하며 심지어 탐낼 만한 목표이다. 그러나 윤리의 근거를 우리의 인간성에서 찾게 되면, 충만한 삶은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나 자신의 운명을 성취하는 것은 나의 상호의존적인 세계의 운명의 일부로서만 성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묶여 있다. 두 번째로, 궁극적이며 또한 여전히 인간적인 가치는 이런 자유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지식의 객관적인 가치이다. 즉 완전히 인간적인 사람은 인간의 안녕을 높이기 위해 이성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피부색이란 사람들이 태양광선에 노출된 기후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적응과정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성이 밝혀 주었을 때, 피부색에 근거한 편견은 무식의 소치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그런 무식함을 사회적 및 경제적 차별의 기초로 사용하는 것은 무자비하며, 또한 계속해서 그런 차별을 하는 것은 객관적 지식을 거스르는 일이다. 동성애적 태도가 뇌와 그 신경작용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성적 입장의 정상적인 태도로 밝혀져, 선택한 생활방식이 아니라 주어진 생활방식임이 밣혀질 때, 그의 성적인 입장을 토대로 편견을 갖는 것은 무자비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동성애자의 가치와 안녕을 해치는 판단, 혹은 그에게 기회를 제한시키는 것도 무식의 소치가 된다.
오늘날처럼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할 근거가 어렴풋하며 혼돈되어 있을 때, 과거에 초자연적 신의 뜻을 계시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전통적 기준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인간의 행동을 판단할 객관적인 가치들이 남아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때, 나는 우리가 인간성의 깊이를 들여다보고, 생명을 증진시키는 행동은 선한 행동이며, 생명을 감소시키는 행동은 악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우리는 인간의 생애와 행동을 단지 그 사람의 열매를 통해서만 판단해야 한다는 복음서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이 삶의 바깥에 있는 외부적인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근거 자체, 즉 모든 존재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존재일 가능성을 파악하기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인간적인 가치들도 외부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궁극성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유신론적 하나님이 아니다.
그와 같은 윤리체계에 포함되어 있는 보상은 우리의 동기를 부여하는 축복이 아니며, 영원한 형벌을 피하기 위한 욕망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단지 옳은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주는 보상이다. 그 보상은 생명이 고양되고, 인간성이 확증되며, 존재가 깊어지며, 사랑이 언제나 되돌아가 그 사랑을 베푼 이의 존재를 고양시키는 보상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과업은 생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높이며, 무식함과 편견을 노출시키고, 생명이 온전하게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내가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한, 깊이 있게, 풍성하게, 충만하게 살 것이다. 나는 이런 윤리적 원칙들에 대한 나의 결단으로 인해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인생을 잘 살았다는 것 자체가 보상이다. 나의 실패나 실수를 외부적인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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