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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훈련의 첫 번째 관문 ‘고독과 침묵’ 본문

성경과 영성신앙/복음과 구원

영성 훈련의 첫 번째 관문 ‘고독과 침묵’

柏道 2020. 4. 18. 12:06

 

영성 훈련의 첫 번째 관문 ‘고독과 침묵’

 

영성훈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영적인 삶의 진보를 이룬 사람치고 어느 시점에서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요동치 않는 견고한 발판을 찾고 지키게 해주기 때문이다.

 

1. 고독과 침묵의 가치

고독하며 침묵하는 것은 의지적으로 개발해 낸 삶의 질서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통찰력과 에너지를 공급한다. 탁월성과 효능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몸에 밴 거짓과 착각을 떨쳐내고, 세상의 칭찬과 보상을 외면한 채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며 살도록 만드신다. 그 속에서 새롭게 됨과 위로와 활력을 얻으며, 유혹과 공포와 외연(가장자리)에 직면한다. 매사에 조급하고, 수다스럽고, 산만한 이 시대에 고독과 침묵이야말로 그리스도 중심의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이 마련하신 거대한 지하수맥과 같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과정에는 지속적인 연습과 내면 깊은 곳의 울림, 자아와 하나님에 대한 예리한 인식, 복잡한 주변상황과 공동체적 유대관계 속에서 늘 자신을 살피며 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 포함된다. 갈망하는 눈과 열린 마음으로 홀로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고독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붙잡고 매달렸던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탐색하며 새 자아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가운데서도 옛 자아에 대해서 죽는다. 이러한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돕는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도록 옛 것은 새 것으로 변모되고,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며, 인간적인 모습에서 비롯되는 고통과 불편들을 인식하게 해주며, 그 고통의 원인을 발견하게 해준다.

 

고독하고 침묵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은 영혼에 매우 유익하며, 다른 신앙 행위만큼 결코 어렵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다른 영적 훈련 보다 더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인식, 우선순위, 자신이나 세상과의 하나 됨에 대한 내적 인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의 에너지를 만나게 된다. 자기 애착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이 일시적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 될 수 있다. 영성은 우리 내면의 불이 거룩한 것을 향하도록 도와준다.

 

2. 고독과 침묵의 의미
고독을 가꾸는 것은 개별화의 자기 정의의 과정이며, 더욱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이다. 홀로되기(singling)와 홀로 있음(singlehood)을 향한 도약이다. 모든 영혼은 고독으로 나아가는 내적 여정에 나서야 하며, 거기서 더욱 더 자신을 안식하고, 자기를 보존하고, 자신을 성취하며, 자율적이 되는 것이다.

 

홀로 있는 독거나 고독은 혼자 있거나 타인과 멀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의 영혼과 소통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에 촉각을 세우고 그것과 대면하고 앉아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다른 활동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거기서 호젓함과 홀로됨을 만족의 위안으로 삼아 그것을 통해 내적인 힘을 얻는다.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하는 것이요, 자기 머릿속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어긋난 요소들이 고통과 주의를 촉구하는 외침을 들을 수 있다. 방해 받지 않고 하나님께 말씀 드리고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다. 자신이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것,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과 몰아가는 것, 후회하는 것과 고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파할 수 있다. 거룩한 것을 향해 나가는 것이며, 스케줄과 해야 할 것들, 갈망과 두려움, 일상의 소음을 듣고 볼 수 있게 해주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걸리는 것 없이, 벌거벗은 상태로, 있는 그대로 서는 것이다. 홀로 거하며, 삶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도록 환경과 공백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며, 하나님만이 우리에 대한 절대적 우선순위를 가지며, 우리는 하나님으로 충분하며,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총체적이라는 순종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홀로됨과 하나님과의 궁극적 연합이라는 동일한 소명을 갖는다. 자아를 훈련시키고 제한시키는 것은 신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욕심과 주제넘은 태도에 제동을 걸어준다. 자기만족이나 자신이 신이라는 착각으로부터 끌려 나오게 될 때 우리가 보다 더 보잘것없고 결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 더 깊게, 그리고 더 든든하게 성장한다. 자아를 가두고 제한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일깨워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홀로 있는 것은 장소라기보다는 마음과 정신의 상태이다. 고독이 내적 공허라면 홀로 있기는 내적 충만이다. 혼자 있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소음과 혼란 중에서도 깊은 내적 고요함 속에서 안정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홀로 있음의 가장 큰 유익은 자신과 하나님을 제대로 직시하고 직면한다는 것이다.

 

홀로 있음은 마음의 고요함을 위해서이다. 고요함이 때로 말이 없는 것과 관련되지만 듣는 행위와는 항상 관련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마음 없이는 단순히 말을 금한다는 것은 고요함이 아닌 것이다. 내적 홀로 있기와 내적 고요함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홀로 있기를 알려면 변화시키는 고요함의 능력을 반드시 체험하고 알아야 한다. 고요함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기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확실한 순간이 된다. 고요함은 성령의 가장 심오한 훈련 가운데 하나가 된다. 고요함은 부자연스럽게 하는 모든 일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통로가 된다. 특히 혀를 멈추는 일은 오직 영적 고요함의 결과에서 온다. 우리는 홀로 있기를 통해 고요함 속에 잠겨 있게 되며, 우리 마음이 갈망하는 내적 고요함을 얻어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행위들을 조절할 힘을 갖게 된다.

 

고독과 침묵은 친교를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거룩한 홀로 있음을 통해 남들 안에, 또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다. 독립적인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그 외적 요구들로부터 물러서서 공동체가 끝나고 ‘내’가 시작되는 곳을 찾는 홀로 있음이 필요하다. 감추어진 의도, 불합리한 기대, 모호해진 경계선을 인식할 수 있는 자율적 자아가 등장하려면 반성과 영혼의 탐색,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영혼이 공동체에 함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려면, 공동체가 주는 유익을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질문 즉, 자율적 자아와의 관계에서 묵상함으로써 가능하다.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과 공동체 밖으로 나오는 것을 통해 사회적 삶과 개인적 삶, 공동체의 참여와 물러남, 자신이 누구인가를 적극적 활동으로 나타내는 것과 자신의 단점을 잠잠히 바라보는 것 사이를 오가게 된다.

하나의 거울처럼 공동체는 나 자신의 뜻과 단체 뜻 사이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그래서 홀로 있음이 필요하다. 거기서 나는 참된 자신의 경계선을 회복시키고, 내 말이 수다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점검하고, 내가 공동체에서 힘을 얻고 있는지 아니면 공동체에 함몰되어 있는지 관찰 할 수 있다. 공동체는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악과 덕을 들추어내며, 내가 온전하다고 생각하던 상상 속에 자아에 대한 꿈에서 나를 흔들어 깨운다. 공적 신앙생활과 사적 신앙생활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 성도들이 볼 수 있는 활동과 오직 하나님만 볼 수 있는 활동을 번갈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우리 자신으로부터 단절된 위험이 있다.

 

3. 고독과 침묵의 필요성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애굽의 고센 지방으로 분리시키셨고, 그 후에는 광야로 고독하게 분리시키시고 훈련하시며 말씀하셨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혼자 있을 때 말씀하셨다. 모세가 부름 받았을 때나 율법을 받았을 때, 엘리야가 홀로 있을 때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고독한 은둔자인 세례 요한도 그랬고, 예수님은 사역의 중요한 때마다 물러가 홀로 계셨다. 바울도 오래 홀로 있는 시간을 가졌으며(갈 1:17,18), 밧모섬의 요한도 혼자 있을 때 계시를 받았다.

 

홀로 있음이 우리에게 약속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사랑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은 광야에서의 괴로운 경험, 생소하고 험악한 주변 환경, 미래의 불확실성, 우리의 자율성과 통제 욕구에 대한 위협이다. 그리고 우리의 비겁함, 분노, 원망, 조급함에 직면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약속해 주는 것은 세미한 소리 속에서 주님의 위로의 음성을 듣는 것이고, 우리의 약점과 두려움이 강점과 소망으로 바뀌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강박적인 자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를 추구하고, 겹겹이 덮여있는 자기기만을 떨쳐버리고 참된 자아를 되찾는 것이다. 홀로 있음은 영적 전투의 장이다. 그곳에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조사함으로서 개인적인 죄를 깊이 인식하게 된다. 또한 부가적인 것들과의 분리의식, 진정한 자기 인식의 개발, 자아로부터 분리된 내면세계와 하나님을 향한 심령의 자유가 주어진다.

 

홀로 있음과 침묵과 금식으로 광야 생활의 혹독한 환경을 만든다. 자기 영혼의 동굴 안에 발을 들여 놓고, 덜 먹고, 덜 움직이고, 더 작은 것을 가짐으로써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권세들과 악한 영들을 직면하게 되고, 자기와 직면하던 습관에 직면하게 되며,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자리보다 높이 올라서 있는 소유와 애착에 직면하게 된다. 고독과 침묵에 대한(수도원 헌신의 서약) 근간이 되었던 것은 제자도의 본질에 관련된 것이었다(마 10:34-39). 여기서 고독과 침묵으로의 주님의 부름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환상 위에 세워져 있음을 드러낸다. 가까운 관계들이 사실은 믿음과 순종을 방해해 왔다. 크거나 작거나 간에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단독 자로 서는 것을 막는 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그것을 미워해야 한다. 예수님의 모든 명령은 우리가 가진 애정과 정욕에 대해 죽으라는 부름이다(마 16:24-28).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능력으로 우리 자신이 가진 애정, 애착, 열정을 면밀히 살피게 한다. 타인과의 연결에서 얻는 힘과 능력이 무엇인지를 조사하게 한다. 하나님 외에 우선선위를 두고 있는 바깥 것들을 깨닫게 한다. 십자가는 우리가 매일 자신의 것들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새롭게 동참하라고 초청한다. 이것은 영적 순교이며 믿음의 피를 흘리는 것이기도 하다.

 

4. 고독과 침묵의 훈련 방법

1)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짧은 시간의 홀로 있기를 이용할 수 있다.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이나, 잠자리에 들어서기 전 밖으로 나가 잠깐 동안, 아침 출근 시 교통 체증으로 자주 멈추는 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한참을 가야 할 때, 식사 전 조용한 시간, 창밖으로 하늘을 볼 수 있을 때, 휴식 시간에 꽃이나 나무를 볼 수 있을 때, 방이나 마당에서 산책을 하면서 등 잠시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 내적 고요함은 나침반의 바늘이 그러하듯이 우리 삶의 방향을 가리켜준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가 현재 처한 자리를 진실하게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매일 5분부터 시작하여, 매주 한 번씩 한 시간 동안, 매달 하루, 매년 한 주말을 고독과 침묵의 시간으로 가지면 효과적이다. 성경을 정독하고 묵상하고 글을 쓰는 시간을 고독에 포함시킬 수 있으며, 화창한 날에는 밖으로 나가 해거름을 감상하거나 달과 별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2)고요한 장소, 곧 홀로 있기 위해 설계된 고요한 장소를 마련하거나 찾을 수 있다. 조그만 방이나, 안뜰의 자그만 곳, 거실의 의자 하나로도 그 의미를 살릴 수 있다. 집 밖의 어떤 곳(공원의 벤치, 산책로, 교회 건물의 은밀하고 조용한 곳을 설정하여 ‘뿌스뜨냐’poustinias,러시아어의 ‘광야’)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그곳에서 자신을 관찰하라. 특히 언어의 사용은 간결하고 충실한지, 명백하게 말하고 한 말은 실행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불필요한 말은 발설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은 간략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루를 반성하기도 한다. 하루 동안의 행동이나 대화를 돌아보고,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와 관심을 생각해보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며, 타인을 위해 중보 하기도 한다. 동작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침묵을 지킨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하나님의 평화를 느끼는 시간을 갖는다.

 

3)하루 종일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생활하기를 시도해 본다. 일종의 실험인 셈이지만, 전달 수단으로서의 말에 너무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에 의존하지 않고도 소통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본다. 존재 자체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가치를 평가해보고 그 의미를 더욱 확대해 나간다.

 

4)일 년에 네 차례 정도(부분기별) 삶의 목표를 재정비 하기 위하여 하루에 서 너 시간 홀로 있는 시간을 갖는다. 사무실에 늦게 머문다든지, 공중도서관을 이용한다든지, 한적한 공간을 찾아가서 삶의 목적과 중간 목표들을 평가해 본다. 평가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함으로 그 시간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목적과 방향과 맞아 떨어지는 시간이 되게 한다.

 

5)예수께서 그러셨듯이 홀로 있기의 목적만을 위하여 일 년에 한 차례는 집을 떠나 조용한 곳을 찾으라.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때 사람들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홀로 있음으로써 타인에 대한 동정심과 관심을 증대시켜주고, 타인과 교제하는데 있어서 자유를 얻으며, 타인의 어려움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며,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하여 새로운 반응의 행동을 갖게 된다. 지금 해온 것보다 더 나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의 경험과 더 온전히 느끼고 놀랍고 부드럽고 너그러운 고요함 속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6)혼자 사는 것도 홀로 있음의 방법 중 하나이다. 독신으로 있거나, 사정상 혼자 살게 되었을 경우, 또는 독방에 갇히게 되는 경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홀로 있음의 기회를 고독과 묵상의 기회로 활용하는 행운의 기회일 수도 있다. 제자도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서신서들은 대게 옥중에서 기록되었으며,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감옥에서 혼자 있을 때 기록했으며, 본 회퍼의 저작들도 테겔 감옥에서 기록되었다. 십자가 요한도 스페인의 톨레도에서, 알렉산더 솔제니친도 러시아의 굴라트(수용소)의 독방에서 혼자 있는 동안 창조적 에너지가 분출하는 경험으로 신앙과 상상력들이 터져 나왔다. 홀로 있게 되는 시간을 창조적인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7)심지어 공동체의 모임 속에서도 고요함의 시간을 만들 수 있다. 함께 모여 드리는 공동예배 중에도 ‘그것은 진실한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면서 하나님을 위한 홀로 있음의 자리를 만들 수 있고(칼 바르트), 대중이 통성기도를 하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에게로 고요하게 갖고 나갈 수 있으며, 북적거리는 교회의 봉사활동의 자리나 교제의 자리에서도 순간순간 고요한 영혼을 가질 수 있다.

 

8)삶의 규례를 홀로 있음의 의미로 만들어 나가는 경우도 있다. 고독을 사랑하고, 그 고독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즐기는 성향으로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가난에 헌신하고, 소박한 생활에 몰입하며, 신중하게 금욕생활을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순종하는 삶 속에 자신을 드리는 것은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 현대 속에 살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고요한 라이프 스타일이다.

 

9)단련이 되면 하루 중 중요한 한두 시간을 날마다 반복적으로 할 수 도 있고, 좀 더 필요 하면 따로 고독과 침묵의 날로 정해놓고 할 수도 있다. 그 날을 금식의 날로 함께 병행하면 대단한 결실을 낳는 굉장한 영적 체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탐구하기
성경속의 주요 인물들 중에서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졌던 상황을 공동 연구한다.
1) 예수(마 4장;14:23;17:1-9;막 1:35;6:31;눅 5;16;6:12)
2) 모세(출 2,3장;행 7:23-36)
3) 엘리야 (왕상 17장-19장)
4) 세례 요한(막 1:4-6)
5) 바울(갈 1:17,18)
6) 사도 요한(계 1:9)

 

적용하기
자신의 삶에 고독(홀로 있음)을 어떻게 발전적으로 적용시킬 것인지 고요한 시간을 통하여 계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