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정직한 신앙고백이 가능한가? 본문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1장. 정직한 신앙고백이 가능한가?
우리가 교회의 사도신경이라 부르는 것은 3세가 말엽 이전에는 형성되기 시작하지 않았으며, 4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채택되었다. 사도신경이 채택된 이후에도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문자적이며 최종적인 진리라는 주장은, 그것이 나중에 니케아 신조와 더욱 후대의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의해 수정될 때 타협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모든 신조의 목적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명백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맞부딪치는 견해를 배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신조들은 교회 공의회에서 열렬한 논쟁들과 정치적 동기에 의한 타협들 속에 채택되고 확대되었다.
... 그러므로 나는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채택된 기독론(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였는가에 관한 논의-역자주)이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
정통 기독교란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 속에 묶여야만 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은 참된 신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당하는 일종의 종교적 속박이 되어 버렸다. 정통 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것은 그의 견해가 옳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 견해가 고대의 논쟁에서 이겼다는 것을 뜻할 따름이다. 나는 기독교 신앙의 미래가 고대의 표현을 계속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오늘날 이해될 수 있도록 그 상징들을 재구성할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
우리의 과제는 어제의 신학적 합의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을 예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과제는 애당초 이런 신조를 만들어낸 체험으로 되돌아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할 수 있는 언어로 그 체험을 표현하도록 노력함으로써, 그 진리를 훼손시키지도 않고 이 시대의 시민으로서 우리의 정직성도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다. 한 사람의 신자로서 나는 그 신조의 배후에 있는 기독교인의 경험의 실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의 미래와 그 형태는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진 기독교 형태와는 다를 수 밖에 없으며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이슈는 그렇게 발전하는 미래의 기독교가 과거의 기독교와 적절히 연계되며, 여전히 연계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
나는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당시의 문자적 이해로부터 유배당한 상태이다.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세계관으로부터 유배당한 것이다.
기독교 역사의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 유배지에 들어가, 그 불안과 불편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신자로 남아있는 일이다. 이것이 현재 나의 자기 이해이다. 나는 기독교가 이제까지 선포되어 왔던 전통적 방식으로부터 점점 더 유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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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유배상태이다.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읊조릴 수가 없다.
예수만이 하느님의 외아들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리아가 동정녀로서 예수를 낳아야 하는 필연을 인정할 수 없으며,
예수 몸의 부활, 승천이 내 믿음의 초석으로 필요하지 않고,
산 자와 죽은 자들 굳이 다시 일으켜 그 해묵은 죄를 심판해야 할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성령은 있다고 믿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사도신경을 외우는 시간에 차라리 침묵하고 있다. 때로는 눈을 뜨고, 사도신경을 외우는 주위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온전히 믿고 있을까? 그래서 더 은혜를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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