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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신재(念在神在) 생각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염재신재(念在神在) 생각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柏道 2020. 2. 1. 19:03

 

 

동양적 사고로 신학하기

 

생각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念在神在)

 

 

2008.01.03 15:02

 

그러함

 

 

생각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念在神在)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신(神)이 있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신과 연락하는 것, 곧 신이 건네주는 것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건네주지 않으면 생각이 없다. 생각을 한다면 신과 연락이 되어야 한다. 마귀하고 연락하고 사귀면 못된 생각이 일어 날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의 신관이 염재신재(念在神在)이다. 생각이 있는 곳에 곧 신이 있다”(다석강의, 96-97쪽).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신(神)이 있어서 이루어진다. 신이 내게 건네 주는 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신이 건네주지 않으면 참 생각을 얻을 수 없다. 거룩한 참 생각은 신과의 연락에서 생겨난다.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못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곳에 신이 있다고 염재신재(念在神在)라 한다. 그러면 생각이 신(神)인가? 나로서는 모른다”(다석어록, 22쪽).

 

  

 

향일성(向日性) 식물이 해를 따라 움직이듯이 사람은 하느님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하느님을 찾는 신앙의 여정을 궁신(窮神)이라고 한다. 모든 초목이 태양에서 왔기에 식물은 언제나 태양이 그리워서 태양을 이고 태양을 찾아 곧이 곧장 뻗어가는 것처럼, 사람은 하늘에서 왔기에 언제나 하늘에 머리를 두고, 하늘을 사모하며, 곧이 곧장 일어서서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없이 계시는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영’이시기에 없이 계신다(다석어록 144쪽). 생각하는 내 마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참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 내게 건네 주는 얼이 참된 거룩한 생각이다. 하느님께서 건네 주는 얼이 없으면 참된 생각을 얻을 수 없다. 참된 거룩한 생각은 하느님과의 연락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몸의 욕망과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은 잘못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각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여 염재신재(念在神在)라 한다.

 

   

 

모든 것은 변화과정 속에 있다. 자연자체의 변화과정을 아는 것을 지화(知化)라고 한다. 우리 인간의 정신은 항상 하느님을 알려고 하고(窮神), 사물의 생성, 변화과정을 알고자(知化)한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원초적인 가장 높은 곳, 태고의 지고선(至高善)에 이르는 데에 있다. 이러한 목적을 찾는 것을 궁고고(窮古高)라 한다. 궁(窮)은 궁신(窮神)한다는 말이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변화과정과 우주현상을 보면서 ‘하나’인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궁신지화(窮神知化)로 하느님의 사랑의 여정의 길을 살펴보면 일체(一切)가 변화하고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다석어록, 178쪽 참조). 그래서 다석은 얼로 거듭나 없이 계신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궁신지화(窮神知化)의 신앙의 길을 걸었다. 생각이 깨어 늘 ‘하나’이신 하느님을 향해 귀일(歸一)하는 다석 유영모의 신관은 ‘생각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관점에 기인한다.

 

    

 

우리는 태우는 것을 ‘사린다’고 한다. 내 맘속에 생각의 불꽃을 태우는 것이 하느님에게 말씀 사뢰는 것이다. 우리를 가리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사뢰는 중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얼의 불꽃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고요 속에서 하느님하고만 대화하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지만, ‘내가 존재하기에 나는 생각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존재하는 것이 먼저냐, 생각하는 것이 먼저인가를 따지기 전에 서로의 논리를 전제해야 한다. 존재와 사유가 상호보완되어야 한다. 그래야 완전한 사고를 할 수 있다. 다석의 사고는 ‘내가 존재하기에 사고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양 논리를 모두 포함하고 서로를 조화시킨다.

 

  

 

산상수훈을 애독하였던 톨스토이는 ‘사랑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사고 아래 여러 단편소설과 잠언록을 썼다. 톨스토이는 사랑의 실천이 없는 교회를 향해 사랑의 실천을 외쳤다. 성서는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공동번역).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사고는 애재신재(愛在神在)의 신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실천도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여야 가능하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얼로 거듭나서 하느님을 사모하고, 늘 정신이 깨어 하느님을 향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신관과 생각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신관 역시 상호보완되고 조화되어야 한다. 사랑이 먼저냐 생각이 먼저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은 사랑으로 보완되고, 사랑은 생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