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변선환 선생님 추모 페이지 http://www.nathanjo.net/ph/ph08.html
위대한 순교자 변선환 박사의 신학여정
이 정배 박사
들어가는 글 1. 변선환 박사는 어떻게 신학을 하게 되었는가? - 그 분의 신학적 실존에 관하여 2. 변선환 박사에게 있어 신학적 실존 전환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3. 변선환 박사의 종교신학은 그의 웨슬리 이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들어가는 글 평소학자로서의 품위를 올곧게 지켜 오셨던 변선환 선생님께서 8월7일 오후 5시경 자택에서 소천하셨다. 그 분의 전 삶이 그랫듯이 마지막까지 홀로 소재의 책상에 앉아 원고를 쓰시다가 홀연히 우리곁을 떠나신 것이다. 그 분이 남겨놓은 유고작품은 [한.일 양국의 근대화와 종교]라는 논문이다.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원광대학교가 마련한 심포지움의 주제발표를 위한 것이었다. 선생님을 대신하여 논문을 읽고 온 필자의 가슴 속에 애통함이 넘쳐났다. 그 곳에 모인 일본 사람을 포함한 2백여명의 학자들이 기립하여 고인을 간절히 기리는 묵념을 보내 주었다. 유대인에게서 버림받은 예수가 이방인들, 세리 그리고 창기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평화를 나누었다는 성서 증언을 다시 보고 듣는 듯 여겨졌다.
그 분의 이른 죽음이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는 한이 되고 있지만, 그러나 글을 쓰시다 운명하신 사건은 학자로서의 영광스런 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종교재판 앞에서 감신지키기와 신학함의 학문성(진리)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그 분에게 허락하신 하느님의 은혜라고 믿는 것이다.
비록 그 분은 떠나셨지만 그의학문에 대한 열정과 감신사랑이 영원히 우리 감신인의 가슴속에 거듭 되살아 날 것을 기대해 본다. 더욱이 오늘과 같은 냉천동의 현실 속에서.
1. 변선환 박사는 어떻게 신학을 하게 되었는가? - 그 분의 신학적 실존에 관하여
1928년, 선생님은 진남포에서 태어나셨다. 당시 진사였던 할아버지의 지도아래 어린시절 서당식 공부를 하였으며 그로부터 도양적 심성을 배울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선생님은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세계 4대 성인들의 인물됨과 사상을 소개한 책들과 만나게 된다. 이들을 통해 선생님은 비극적인 생의 한계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간정신의 위대한 승리를 배울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동서 성현들의 삶이 그로 하여금 생의 신비에 눈뜨게 한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선생님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가 찾아 온 것은 그가 18살이 되던 해 신석구 목사님과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아는바 목사님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민족대표 중의 한 분으로서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신앙적 권위를 지키신 감신(협성신학교) 동문이시다. 한학자로써 기독교로 개종하였던 목사님은 선교사들이 보수적 신앙 가르침 때문에 처음에는 불교인들과 같이 행동을 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를 찾고자 했던 그의 애국정신은 불교인들과도, 천도교인들과도 손잡게 하였다. 후일 공산주의자의 무력 앞에서도 목사님은 자신이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다. 바로 나라를 사랑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라는 백발이 성성한 신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선생님은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이와함께 한학자인 신목사님이 내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던 기독교에 대한 변증적 이해 역시 세계 종교 및 동서 성현들을 알고 있었던 선생님에게는 놓칠 수 없는 신학적 주제가 되었다. 이후 선생님이 토착화 신학에로의 여정, 종교해방신학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학문적 자유를 지켜 내려는 일관된 삶의 태도등은 신석구라는 위대한 기독교 영혼과의 만남으로부터 싹튼 것이라 하겠다.
신석구 목사님을 영혼의 아버지로 모신 선생님은 1948년 평양성화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성화신학교는, 성분상 김일성대학에 입학할 수 없는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들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가 심했고, 그럴수록 신학교의 분위기는 엄숙한 경건이 흐르는 신앙과 사랑이 넘쳐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수 있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선생님은 성화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옛친구 선배들과 우래옥 냉면집에서 만나 그 시절을 회상하곤 하셨다.
6.25 발발과 함께 홀홀 단신으로 선생님은 자신을 배웅하던 어머님의모습을 못내 그리워 하셨다. 남하한 그 분은 1951년 부산 감리교신학교 시절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윤성범 교수의 영향을 깊게 받았으며 홍현설, 송정률,김철손 교수들의 가르침을 귀하게 생각하셨다. 더욱 선생님의 영원한 친구 장기천 감독과의 우정이 시작된 곳도 바로 부산의 초라한 신학교인 것이다. 어려운 시절, 함께 공부하며 신앙과 꿈을 나누었던 그분들은 감신대 학장으로,감리교 감독회장으로 한국감리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귀한 기회를 얻기도 했다.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선생님은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바르트 신학 전공자인 박봉랑교수를 만나게 된다. 한신대학원은 당시 대학원과정을 갖지 못했던 감신 출신들의 유일한 진학통로였다. 그러나 한국 종교.문화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계시신학이 틈 속에서 신학적으로 사유하게 된 선생님은 이 곳에서 웨슬리를 신정통주의자로 해석하는 논문을 쓰게 되었다. 당시 그분의 석사논문 제목은 '웨슬레이의 성령론'이었던 바 여기에서 기독자의 완전사상 및 인간경험에 대한 여지가 생략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선생님은 틸리히를 강의하던 서남동 선생으로부터 '계시신학이 간과하고 있는 종교와 문화로부터의 계시신학 그 자체가 도전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이러한 선생님의 문제의식은 실존주의 신학사조를 만나게 되면서 더욱 영글어갔고 후일 웨슬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실제로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에 대한 선생님의 새로운 해석은 장로교의 칼빈주의적 신학과 견줄만한 감리교적 신학의 틀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본 주제에 관하여 뒷부분에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두번에 걸친 미국 뜨루대학 유학시절(1962-63,66-67), 선생님은 바르트 신학과 결별할 수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하이데거, 불트만으로 이어지는 실존론적 신학을 칼 마이켈슨 교수를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신(神)의 초월성을 신학의 절대지평으로 삼았던 바르트의 계시 신학과는 달리 그리고 또한 존재자체에 큰 비중을 둔 틸리히의 상징론이 그리스도 계시를 불필요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면서 역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신학의 재구성을 시도하는 마이켈슨의 작업에 선생님은 매료됐던 것이다. 역사적 해석학은 생의 의미물음과 관계되지 않는다는 마이켈슨의 신학적 명제는 선생님으로 하여금 어떤 류의 존재사유, 자연적 신인식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었다.
2. 변선환 박사에게 있어서 신학적 실존 전환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칼 야스퍼스, 불트만 그리고 프릿츠 부리 등의 신학 사상과 선불교와의 대화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돌아온 70년대 후반의 선생님은 불교철학자 이기영 박사와의 폭넓은 대화를 통해 기독교와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공존가능성을 역설하셨다. 모든 종교가 각자의 배타적 절대주의를 넘어서 책임적인 한국적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해 상호 협력하는 입장을 견지해 나가자고 하는 요지이다. 여기에서 기독교와 불교 간의 만남을 위한 해석학적 지평은 그 분의 학우논문이 말해주는 바 [실존적 기독론]이었고 그 대상은 자아와 무(無)혹은 공(空) -의 개념이었다. 선생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앞서 말한바 십자가 사건의 유일무이한 역사성(historität)을 인정하는 불트만의 비신화의 맥락 에서가 아니라 진리를 역사적 일점에 고정시키는 교조적 임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그의 역사적 잔재마져 벗겨 놓으려는 비케리그마화의 여정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즉 선불교와 같은 동양적 종교사상과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던 선생님의 문제의식은 부리 교수의 경우보다 더욱 철저하게 케리그마로서의 십자가 사건을 인간 실존의 자기이해로 비신화화시키지 못하는 서구신학의 자기 한계성에로 집중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실존적 기독론의 책임적 인간실존(무제약적 책임)을 위한 암호 내지 상징으로서 은총적 실존이 되다는 사실에 까지 열려지게 되었다. 이렇듯 인간 실존 자체가 하느님 앞에서 은총받은 존재의 상징으로서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이제 책임적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불교와의 대화는 마음껏 자유로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불교적 [자아]이해가 주객도식의 난파를 통하여 무 또는 공으로서의 존재합일의 신비주의속으로 침참해 들어가고 있는 불교적 현실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며 이에 대해 애정어린 충고를 하고 있다. 아시아적 풍토 속에서 성장해온 한국불교가 이 땅위에서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좀더 책임있게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제약적 책임 존재의 상징으로서 [실존 기독론]을 함께 고려해 나가야 한다는것이다. 즉 인간 존재를 구원해 내는 길은 존재신비주의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불가해성(의미거역성)이 난무하는 역사의 한가운데서 그를 극복해 내는 무제약적 책임 존재로 자신을 자각하는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생님은 불교의 형이상학 개념인 [Sunjata - 공(空) 또는 열반]를 존재신비주의의 실체로 보지 않고 책임적 자아로서의 실존 가능성을 위한 역사적 상징, 곧 악의 실체인 거대한 용과 더불어 투쟁하여 싸워 이기는 거용살해자(Drachentäter)의 상징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애정어린 충고를 선생님은 종래의 정복적 선교론과는 다르게 대화적 선교론으로 명명하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붓다 혹은 무(無)혹은 공(空)은 거용살해자로서의 책임적 실존으로 살아가려는 현금의 불교인들에게 실존의 그리스도로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8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선생님의 토착화신학의 방향성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신학적 관점이 여전히 서구적 틀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동양의 세계를 존재 신비주의 차원에서 인식하고 인간의 자아개념이 함몰된 역사망각의 실체로 규정하고 그것에게 구원을 베풀려고 하는 자신의 신학적 주장 속에 어느덧 서구신학적 편견이 들어와 있음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신학자 파니카, 스리랑카의 종교해방 신학자 알리오스 피어리스, 그리고 서구 신학자로서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No Other Name?)]의 저자 폴 니터 등과 교제하면서 선생님은 아시아 종교라고 하는 것이 더이상 신학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신학함에 있어서 아시아 종교들이 텍스트가 되고 서구신학적 견해들이 각주로 사용되져야 한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시기도 했다.
여기에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낫지 않으며 하느님의 계시는 구원이 다른 종교들 속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나타나 있다는 신중심주의 신학 내지는 종교다원주의에로의 획기적인 전환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생님은 기독교의 배타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적 신학, 곧 종교신학의 과제를 다음 세가지로 정리해 놓았다. 첫째, 한국적 신학은 종교에 대한 서구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모든 종교들의 영문표기에 따르면 유대교, 불교, 유교 등의 아시아 종교들을 [-ISM]으로 언표함으로써 그것을 기독교, 곧 Christianity와 구별되는 이데올로기, 인간에 이해 만들어진 조작물 정도로 가치절하하고 있는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한 것이다. 이로부터 선생님은, 기독교중심의 서구적 가치에 편향됨에 따라 아시아의 제반 종교를 경원시 했던 한국교회의 일반적 태도를 벗어나기 위한 순교적 차원의 사자후를 발하신 것이다. 둘째로, 선생님은 한국적 신학이 타파해야 할 우상을 교회중심주의라고 보았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배타적 교회중심주의는 교회, 더욱 가시적 교회 자체를 계시와 은총의 통로로 이해함으로써 세상과 교회의 단절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봉직하셨던 현영학 님의 글을 빌어 자신이 하고픈 말을 이렇게 전달한다. [ 우리는 한국에 실려온 병신스런 하느님 믿지 않는다. 그분은 선교사들이 오기 오래전에 우리의 역사, 우리의 땅위에서 활동하고 계셨다]고.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난공불략으로만 알았던 기독교의 절대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절대성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계시 사건에 의존하는 바 선생님은 이미 실존 기독론을 통하여 배타성을 넘어서는 신학적 발판을 마련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선생님은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넘어서 신중심주의를 지향하는 더욱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그 밖에서도 현재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고 계시기에 모든 종교의 중심은 기독교(예수)가 아니라 신(神)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예수는 전적인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의 전체는 될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관용과 대화를 근간으로하는 이러한 신중심주의적 종교신학은 이제 기독론의 난제를 구원론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시도한다.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니터의 말도 다음과 같은 것이 생각난다. [신약성서의 기독론적 언어와 칭호들은 예수의 인물과 사역에 대한 결정적인, 존재론 적인 진술을 하기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비전의 힘에 매력을 느껴서 그와 마찬가지로 길을 걷고 행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다. 신약성서의 공동체들이 예수에 대해 무엇인가 참된 것을 말하려고 했음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이 그 것의 일차적인 의도는 아니었다. 그 주장들은 어떤 의미에서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었고, 더 나아가서 제자직에로의 부름이었다.
이로써 선생님은 기독론을 서구 형이상학적 사유와 언어의 포로로 부터 해방시킬수 있었고 예수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한 바른 행위(正行)곧 전 인류의 평화를 위한 해방적(구원론적) 삼 속에서 기독론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선생님은 한국적 종교신학의 과제를 가난과 빈곤 그리고 의미거역적인 모든 현실로부터 해방받기 위해 노력하는 비기독교적 종교인들의 영성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 했다.
더욱 80년대 말기에 이르러 그 분은 한 민족의 종교성이 어떤 대종교의 체제나 경전종교 안에서 발견될 수는 없고 비경전적이며, 전승종교의 담지자들인 민중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한 바있다. 이는 그분의 후기사상이 종교다원주의의 실체를 고등종교문화에서 보는 것을 포기하고 민중종교들에게서 그것을 보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윤성범과 유동식 박사의 토착화신학을 넘어 민중신학과의 정신적 합류를 이룰수 있었던 부분이다.
선생님을추모하는 한 잡지의 글에서 안병무 박사는 한국신학계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순교자로 그 분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와같은 제 2. 제 3의 순교자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끝으로 감리교 신학자 웨슬리 아리아라자의 글로 선생님의 마음을 재차 표현해 보고자 한다.[ 타종교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성서의 중심적인 메세지에서가 아니고 성경귀절로부터 도출되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3. 변선환 박사의 종교신학은 그의 웨슬리 이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바르트적으로 각색되었던 웨슬리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 역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선생님은 아시아의 구원론적 신학형성을 위하여 웨슬리적인 에토스가 얼마나 중요한 신학적 토대가 될 수 있는지를 밝히려 한 것이다.
선생님에 따르면 웨슬리의 신학적 주요관심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행위, 곧 하느님의 사랑에 있었다. 루터의 하는님이 인간의 의로움을 찾는 분이었다면, 그리고 칼빈의 신(神)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의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는 타자성으로 이해되었다면, 웨슬리의 하느님은 보편적 구원을 약속하신 분, 곧 인간의 모든 행위에 맞서서 전 인류를 향해 은총의 빛을 발하시는 그래서 그들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자비로운 사랑의 존재인 것이다. 하느님의 주권과 공의는 우선적으로 그의 사랑과 자비에 조화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없다는 것이 웨슬리 신학을 보는 선생님의 관점이다. 바로 이것이 웨슬리가 칼빈주의자들의 이중예정론을 평생토록 거부해했던 이유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선생님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역사적 수육 이전에 살던 사람들 조차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 밖으로 내팽겨진 사람이 없다는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에 주목한다. 선행은총론이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하느님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새롭고도 현실적인 가능성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인간의 자유의지, 양심, 그리고 이성 등을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재적 은총의 선물로 고백하고 있다. 이제 인간이란 누구든지 선행은총으로 인하여 하느님에게로 행할 수있다. 유한이 무한을 품을 수 있다는 웨슬리의 보편적 인간론은 선생님으로 하여금 세상의 휴머니스트들,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들과의 열려진 대화를 가능케 하였다.
[이성을 포기하는 것울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요, 종교와 이성은 병행을 이루며 모든 이성적인 종교는 거짓종교라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 교리입니다.] 이는 종교에 있어서 비합리와 초합리, 비상식과 초상식의 경계가 애매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선생님은 전 사회및 우주의 성화를 목적하는 선행은총론이 18세기라는 시대적 제한성으로 인해 아시아의 비기독교적인 구원론을 포함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18세기에 펼쳐졌던 웨슬리의 정신은 근본에 있어서 오늘의 신중심주의적인 다원주의 사황을 품어들일 만큼 크고 넓었다고 평가한다. 선생님에게 있어서 웨슬리안 곧 감리교도가 된다는 것은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및 우주의 거룩해짐을 위해 종교간의 열려진 대화와 협력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웨슬리가 지녔던 민중신학적인 삶의 자세 역시 아시아의 민종종교들 속에서 해방의 영성을 발견하려고 했던 선생님의 후기 사상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아뭏든 감리교 신학자로서의 선생님에게 있어서 웨슬리 신학사상은 자신의 종교신학을 전개시킴에 있어서 힘있는 뒷배경이 될 수 있었다.그래서 선생님은 열려진 대화를 추구했던 자신의 평소 주장과 모순되는 듯한 말 [나는 오로지 감리교주의자, 감신주의자이다] 라는 말로 감리교와 감리교 신학대학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셨다.
그러나 예수가 그토록 사랑하던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버림받았듯이 선생님은 그가 사랑하던 모든 것으로부터 등돌림을 당했다. 그렇기에 영결 예배식장에서 선생님의 제자 이현주 목사는 다음과 같은 조사를 올렸다. [제자들로부터 배반당한 스승의 슬픔을 아는 하늘아 ,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우리 스승 변선환 박사를 잘 대접해야 한다]고.
이제 영원히 감리교단에 몸담을 우리들이 선생님을 기억하고 그 분의 감신 사랑, 감신지키기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로써 출교당한 채 소천하신 그분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야만 할 것이다. 그분은 아픈 마음을 위로해야만 할 것이다. 그 분은 죽어서도 말씀하신다. 나의 사랑 감신, 그리고 감리교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