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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공부-다석 사상으로 읽는 삶과 죽음의 철학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죽음 공부-다석 사상으로 읽는 삶과 죽음의 철학

柏道 2019. 12. 18. 14:48


보도자료

죽음 공부

 다석 사상으로 읽는 삶과 죽음의 철학


박영호 지음 / 분야 : 사상, 종교 


“나의 말은 죽을 때 필요하고 죽은 뒤에 필요한 말이다.
내 말은 죽음에 관한 말이기 때문이다.
죽음 공부야말로 마지막 공부다.” - 다석 류영모


“죽음 공부가 삶 공부다”
다석 사상으로 통찰하는 동서고금의 죽음 철학

“출생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지 않은가? 한 면에서는 죽음을, 다른 면에서는 출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왜 이것이 하나는 슬픔을 주고 하나는 기쁨을 줄까?”(마하트마 간디)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삶을 사랑하면 죽음도 사랑해야 하고 죽음을 미워하면 삶도 미워해야 한다. 태어나는 순간 삶과 죽음이 함께 시작되며, 우리가 죽는 순간 죽음도 끝난다. 삶이 죽음이요, 죽음이 삶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상상하기조차 끔찍하고 두려운 일로만 여기고 외면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건강할 때 죽음을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잘 먹고 잘 사는 법’ 즉 ‘웰빙(well-being)’의 시대를 지나 ‘웰다잉(well-dying)’의 시대가 온 것이다. ‘웰다잉’ 즉 ‘잘 죽기’란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아름답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기’라 할 수 있다. 췌장암 선고 후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창조적인 삶의 에너지로 삼았던 스티브 잡스, 생명 연장 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럽고 존엄한 죽음을 택한 김수환 추기경, 마지막까지 무소유와 나눔의 삶을 실천하다 입적한 법정 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자연스런 삶의 한 단계로 받아들이고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 공부는 삶을 위한 공부다. ‘잘 죽는 법’을 알아야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 공부》는 기독교를 근간으로 삼아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꿰뚫어 독자적인 종교 철학을 세운 다석 류영모의 사상을 바탕으로 삼아 다석의 직제자 박영호가 인류의 큰 스승이라 불리는 현자들과 철학자들이 일평생 궁구한 죽음의 철학을 살피는 책이다. 특히 다석 류영모의 사생관(死生觀)을 보여주는 다석의 유일한 단편소설 <귀남과 수남>(1917년)이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책에서는 소크라테스․예수․노자․석가부터 키르케고르․파스칼․스피노자․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이르기까지, 생로병사와 본능에 갇힌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고 죽음의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었던 이들이 남긴 귀한 조언이 담겨 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 한계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난 것일까?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죽음 공부》는 언젠가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다.

장자(莊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없음(無)을 머리로 삼고 삶(生)을 등뼈로 삼고 죽음(死)을 꽁지(尾)로 하였다. 그 누가 알리? 죽고 나고 있고 없음이 하나인 것을.”(《장자》 대종사 편) 없음(無)에 달린 꼬리 같은 제나는 있어도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죽음 공부는 죽지 않는 생명인 얼나를 깨닫고자 하는 공부다. 이것은 석가․예수․노자․장자가 가르쳐준 공부이기도 하다. 이 경지에 이르러야 ‘웰빙(well-being)’이니 ‘웰다잉(well-dying)’이니를 말할 수 있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나의 말은 죽을 때 필요하고 죽은 뒤에 필요한 말이다. 내 말은 죽음에 관한 말이기 때문이다. 죽음 공부야말로 마지막 공부요 귀중한 공부다.”라고 하였다. ― 머리말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곧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키케로
“백 년 뒤에 우리가 살아 있지 않으리라고 슬퍼하는 것은 백 년 전에 우리가 살아 있지 않았다고
 슬퍼하는 것처럼 미친 짓이다.“ - 몽테뉴
“진정한 철학자는 죽음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다.” - 소크라테스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잘 살지도 못한다.” - 세네카
“삶이 좋다면 죽음 역시 좋은 것.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으니까.” - 톨스토이



“죽음 연습은 생명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 다석 류영모의 죽음 공부

“죽음 맛을 좀 보고 싶다”
다석 류영모는 유․불․도와 기독교를 넘나들며 동서고금의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공부하고 일상에서 철저히 금욕적인 삶을 실천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생사(生死)와 애증, 욕망의 노예인 제나(自我, ego)로 죽고 진정한 나인 얼나로 솟나야 한다’는 것이다. ‘제나’란 물욕, 식욕, 정욕을 지닌 이기적인 자아를 가리킨다. 류영모는 괴롭고 허무한 제나의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보았다. 예수가 말한 영원한 삶도 몸나(제나)의 영원한 삶이 아니라 얼나를 말한 것이다.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얼의 부활, 얼의 영생을 말한 것이다.
류영모는 죽음을 이기는 바른 길은 ‘제나’로 죽어 ‘얼나’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죽음 공부는 죽지 않는 생명인 얼나를 깨닫고자 하는 공부라 하였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다. 죽음의 연습은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다.”(류영모) 《죽음 공부》에서 우리는 ‘오늘 하루살이(一日一生)’의 철학으로 잠자는 것과 죽음을 똑같이 보고 하루를 평생으로 여기며 살았던 다석의 독특한 죽음 철학을 만나게 된다.

몸 살림은 겨우겨우 살면 되지 더 바라지 말아야 한다. 몸을 위해 자꾸 재물을 모을 것 없다. 재물을 모으려고 애쓰지 않으면 마음이 비워진다. 마음을 비워 두면 영생할 하느님의 씨(얼)가 맘속에서 자란다. 하느님이 주시는 얼은 영원한 생명이라 죽음이 없다. 하늘에도 땅에도 죽음이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얼나를 깨닫지 못하여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다. 밑 빠진 항아리와 같아 물을 아무리 부어도 소용이 없다. 탐욕을 좇아 사는 것은 손실이요 결국은 죽음이다. 참으로 욕심을 버리면 생사의 제나를 넘어설 수 있다. 살았다고 좋아하지도 않고 죽는데도 싫어하지 않는다.(류영모, 《다석어록》) - 132~133쪽

이 세상엔 죽기 위해 나온 건데 그걸 뻔히 알면서 ‘죽긴 왜 죽어?’ 하고 잡아떼지만 그게 말이 되는가? 나는 죽음 맛을 좀 보고 싶다. 그런데 그 죽음 맛을 보기 싫다는 게 뭔가? 이 몸나는 땅으로 내던져지고 얼나는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져야 한다. 땅에서 온 몸나는 죽어 땅에 떨어지고, 위에서 온 얼나는 들리어 하느님께로 올리운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땅의 일도 충실히 해야 한다. 나는 이 다음에 대학생이 될 테니 유치원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류영모, 《다석어록》) - 178~179쪽

하느님 나라에는 죽음이 없다. 하느님께서는 비롯도 없고 마침도 없는데 죽음이 있을 리가 없다. 빈탕 한데(허공)이신 하느님께서 안고 계시는 상대적 존재들이 변화하면서 나고 죽을 뿐이다. 그런데 그 변화를 보고 죽음이 있는 줄 알고 무서워한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육체적인 생각을 내던져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죽음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이 무서워 몸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이를 놓아주려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다.(류영모, 《다석어록》) - 180쪽

하루하루를 지성껏 살면 무상한 인생이 비상한 생명이 된다. 하루하루를 덧없이 내버리면 인생은 허무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지성을 다하여 쉬면서 쉬지 않는 숨처럼 언제나 깨어 있는 사람은 쉬지 않으면서 쉬는 숨이며 늘 괴로우면서 제일 기쁜 것이다. 늘 제나를 죽임으로써 참나인 얼나가 사는 것이다. 얼나가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일하는 것이다.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데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러나 반드시 그 일이 하느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며 자기 몫을 다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제 몫의 하이금(使)을 가지고 사는 삶, 언제 죽어도 좋다고 하는 삶, 죽어서 사는 삶, 그것이 참삶이다.(류영모, 《다석어록》) - 337~338쪽

다석의 죽음 철학이 담긴 소설, <귀남과 수남>
류영모가 27살 때인 1917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을 응모하여 당선되었다는 이야기가 류영모의 유족을 통해 알려졌으나 그동안 그 작품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중 2010년에 고려대 국문과 조경덕이 논문을 준비하다가 소설 전문을 찾아냈고, 다석학회 회원들이 읽기 쉽게 다듬어 2011년에 다석 추모 문집 《하루를 일생처럼》에 실었다. 《죽음 공부》에는 박영호의 해제와 함께 실었다.

<귀남과 수남>은 가난한 중년 부부가 기독교에 입신할 즈음 귀남이와 수남이라는 두 아들을 잇달아 잃고 그 슬픔을 끝내는 믿음으로 극복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생사(生死)의 제나를 초월하는 깨달음은 귀남과 수남 형제를 낳은 어머니가 이룬다. 류영모의 사생관(死生觀)이 귀남, 수남 어머니의 입으로 대변된다. “살고 죽고 이롭고 해로운 것을 벗어나 깨끗하고 거룩한 얼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참 믿음이지요. 죽는 것을 슬퍼할 것은 무엇 있나요?” - 469쪽

이 짧은 소설은 류영모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류영모의 형제는 모두 13명이었는데, 스무 살을 넘긴 이는 영모와 영철 형제 둘뿐이었다. 그리하여 류영모는 “일찍 죽은 그들(형제들)이 더 행복한지 일흔 살을 넘겨서까지 살고 있는 내가 더 행복한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류영모는 아우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몸성히’(건강)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일생 동안 ‘몸성히’에 마음을 기울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생명을 지닌 이는 조만간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서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류영모라는 독창적 사상가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동생들의 죽음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이치를 더 깊이 궁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똑바로 보는 사람 - ‘캐는 이’

저자 박영호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여느 이(俗人)’ ‘캐는 이(哲人)’ ‘깨달은 이(覺人)’를 구분한다. 몸의 삶에 얽매인 보통 사람, 즉 ‘여느 이’는 짐승 성질인 탐욕․분노․어리석음(嗿․瞋․痴)의 삼독(三毒)에 끌려 다닐 뿐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짐승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달아나듯 여느 이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한사코 도망치려고만 든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언제나 죽음의 종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 여느 이들이 걷는 고달픈 삶의 길이다. 그런데 죽음을 두려워하여 달아나던 사람들 가운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똑바로 보는 ‘캐는 이’, 즉 철인이 나타났다. 소크라테스가 대표적이다. 《죽음 공부》에서는 소크라테스, 키르케고르, 몽테뉴, 파스칼, 스피노자, 페스탈로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최치원 등 동서고금의 ‘캐는 이’들이 남긴 죽음에 관한 깊은 생각을 만날 수 있다.

“사는 것이 좋은지 죽는 것이 좋은지는 알 수 없다” — 소크라테스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이 지혜가 없으면서 지혜가 있는 듯이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면서 마치 그것이 가장 나쁜 것임을 잘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비난받을 만한 무식, 곧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무식이 아닙니까? ……
죽음은 다음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곧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없는 것이어서 죽은 사람은 전혀 아무 감각도 없거나 아니면 전해 내려오는 말처럼 영혼이 여기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바꾸어 옮겨 사는 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처럼 죽음이 만약 아무런 감각도 없어서 꿈 한번 꾸지도 않는, 깊은 잠 같은 것이라면 죽음은 놀랄 만한 이득일는지 모릅니다. …… 그러나 두 번째처럼 죽음은 영원히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따라서 죽은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 286~287쪽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지 않는 법을 배운 셈이다” — 미셸 몽테뉴  
우리 인생의 모든 다른 행위들은 이 마지막 행위(죽음)를 위해 시험받고 시련을 겪어야 한다. 죽는 그날은 내가 보낸 모든 세월을 심판해볼 날이라고 어느 옛 사람은 말했다. …… 그때 내 말이 입에서 나오는지, 마음에서 나오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 사람들의 인생을 평가할 때, 나는 항상 그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를 본다. 내가 살면서 중히 노력하는 것도 마지막을 좋게 하려는 것이다. 곧 묵묵히 고요하게 죽어 가야 할 일이다. (몽테뉴, 《수상록》) - 175쪽

죽음이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든지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준비하자. 죽음을 미리 예상하는 것은 자유를 미리 예상하는 것이다. 죽기를 배운 자는 죽음에 얽매인 마음을 씻어버린 자이다. 죽음을 알면 우리는 모든 굴종과 강제에서 해방된다. 생명을 잃는 것이 손해도 악도 아님을 알면 세상에 불행이란 없다.(몽테뉴, 《수상록》) - 176~177쪽

“그 뜻에 내 몸을 맡겼다” — 블레즈 파스칼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 죽어 간다. 그러니 사람은 혼자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으리으리한 저택을 지을 필요가 있을까? 그저 망설임 없이 진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사람은 분명히 생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것이 사람의 품위의 전부이며 가치의 전부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하는 순서는 자기 자신부터 시작하여 생명의 임자인 하느님께 이르러야 한다. (파스칼, 《팡세》) - 189쪽

“사람은 언젠가 죽을 운명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우리의 생각은 늘 죽은 이들과 함께한다. 죽은 뒤에도 잊히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하늘로 올라간다. 아니, 그들이 우리의 세계로 내려온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죽고 나면 영영 잊히고 만다. 형제자매라 하더라도 영영 기억에서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아예 우리는 떠나 영영 잊히는 이들도 있다. 반면에 죽은 뒤 오히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가까워지는 이가 있다. 죽고서야 비로소 살아 있을 때의 참모습을 드러내어 더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죽어서 갈라지기는커녕 더 가까워진다. (소로, 《소로의 일기》) - 203쪽

“스스로를 잊은 채 수천 번 변신하게 되리라” — 헤르만 헤세
긴 한숨 내쉬며 몸뚱이의 덧없음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깨닫다 보면 돌이나 흙이나 딸기나무나 나무 뿌리로 변해 가는 나 자신을 느끼게 된다. …… 내일, 모레, 머지않아 나는 나뭇잎이 되고 흙이 되고 뿌리가 되면 더는 종이에 글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화려한 계란풀의 향기도 맡지 못하게 되고, 치과 진찰권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지도 못하게 되고 험상궂은 관리인한테서 신분증을 보자는 성가신 요구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구름이 되어 파란 하늘을 둥둥 떠다니고, 시냇물의 물살이 되어 흘러가고, 나무에 새순으로 돋아나고, 스스로를 잊은 채 수천 번 염원해 왔던 변신을 하게 되리라. (헤르만 헤세, 《아름다운 죽음에 관한 사색》) - 289~290쪽

죽음을 넘어서는 사람 - ‘깨달은 이’

소크라테스나 스피노자 같은 ‘캐는 이’ 즉 철인은 예수, 석가처럼 죽음을 넘어서는 사람, 즉 ‘깨달은 이’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섰을 뿐 아니라 제나를 버리고 얼나를 깨달은 이의 본보기는 예수다. 사람들이 예수처럼 얼나를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멸망의 생명인 제나는 거짓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나에 집착하는 마음을 온전히 버리면 얼나(성령, 얼)를 깨달을 수 있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석가, 노자는 얼나를 깨달아 하느님 아들이 되었다. 예수, 노자, 석가는 여느 이들이 평생 사로잡혀 사는 가정, 국가, 종교에서 자유로웠으며, 죽음에서조차 온전히 자유로워졌다. 이 자유를 석가는 ‘해탈’이라 하였다. 《죽음 공부》는 류영모의 사상을 바탕으로 삼아 예수, 석가, 노자의 정신이 모두 하나로 통함을 알려주고, 나아가 깨달은 이들의 삶을 통해 죽음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보여준다.

예수는 죽음을 앞에 놓고 “나는 죽음을 위해서 왔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러 왔다. 예수는 죽음을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는 것으로 본 듯하다. 나무가 불이 되는 것이 죽음이다. 인자(얼나)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진리 정신을 드러낼 때가 왔다. 진리 정신은 죽음을 넘어설 때 드러난다. 죽을 수 있는 것이 정신이다. 사람은 때와 터와 람(값어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죽을 때 죽어야 하고 죽을 터에서 죽어야 하고 죽을 보람에서 죽어야 한다. 예수는 세 가지를 다 계산해본 결과 지금이 바로 죽을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이를 위해 이때에 왔다.” 계산은 끝났다. 이제 제나의 죽음을 넘어서 얼나가 드러난다. 얼나는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참나인 영원한 생명이다. 내가 믿는 것은 영원한 생명인 얼나이다.(류영모, 《다석어록》) - 312~313쪽

나는 몰라요. 내가 예수교인인지 불교인인지. 나 훌륭한 불교인이에요. 나는 깨기를 생각해요. 깨닫기를 생각합니다. 그거 불교지요. 나만큼 염불을 부지런히 하는 사람은 없을는지 몰라요. 나는 깨기를 생각하면서(念佛) 살아갑니다. 예수가 왜 깰 줄 몰랐겠습니까? 하느님 아들인데 깨닫지 않았을까요? 예수는 깨신 이입니다. 석가와 예수가 만일 동시대에 나타났다면 가장 가까이 만났을 것입니다.(류영모, 《마지막 다석 강의》) - 329쪽

예수․석가․노자는 상대 세계에 대해서는 철저한 부정이다. 이 철저한 부정을 안 하려면 예수․석가․노자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 낱동(개체)은 없음에서 시작해 없어진다. 있다는 것은 마침내 없음이다. 우리가 이를 느껴야 한다. 쉬이 느끼지 못하니까 좀 느껴보자는 것이다. 있음인 이 세상이 벌여 있지만 그만둘 것이다. 땅에서 그만이란 소극적인 뜻이다. 위(정신 세계, 하늘나라)로 가서 ‘그만이다’는 그이(하느님)만이다. 참으로 계시는(存在) 것은 하느님 한 분 그이만이다. 그(하느님)만이다. 우리는 온통(전체)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부분(낱동, 개체)이다. 부분은 온통(전체)을 밝혀야 한다. 부분은 어디까지나 전체에 포함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분은 전체 앞에서는 없다. 전체인 하느님만이 계신다. 그러므로 낱동인 부분은 부분의 참생명인 온통(전체, 하느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온통(전체)을 하느님 아버지라 하고 낱동(개체)은 아들이라고 하였다.(류영모, 《다석어록》) - 373~374쪽


지은이․박영호(朴永浩, 1934~)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사상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임을 알아본 그는 곧바로 함석헌에게 편지를 쓰고 이후 40~50통의 서신을 교환했다. 1956년 천안에 농장을 마련한 함석헌 선생이 농사 짓고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지내자고 청하자 그곳으로 곧장 달려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였다. 낮에는 과수원에 똥거름을 주고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성경, 톨스토이, 사서삼경, 고문진보,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한 시간이 3년이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겐 영적으로 새로 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줄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1959년 함석헌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 예수”라고 말하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다석 선생처럼 제자 박영호도 농사 짓는 일을 양심적으로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의왕에 6천 평 농장을 개간해 밭을 일구면서 짬짬이 책을 읽고,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댁으로 찾아가 다시 가르침을 받으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1965년 어느 날 스승이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냈다. 이젠 스승을 떠나 독립해 혼자 살아가라는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을 떠난 그는 5년간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부해,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한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다. 그 무렵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마침보람’이라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류영모의 참제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스승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그 뒤 류영모는 박영호에게 자신의 전기 집필을 맡겼다. 1971년부터 준비한 다석 전기는 1984년에야 책으로 나왔다.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술받고, 스승이 평생 써온 일지를 필사하면서 10년 자료를 준비한 후 스승이 돌아가신 1981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만 13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박영호는 지금껏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 스승을 세상에 알렸다. 류영모 전기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외에도 《다석 류영모 어록》《다석 류영모 명상록》《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 《다석 마지막 강의》 등이 있고,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 연재한 후 이를 묶어 〈다석사상전집〉(전 5권)을 간행하였다. 또 《잃어버린 예수》《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등을 썼다. 지금 그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절실한 ‘다석 류영모 낱말 사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앎과 삶이 하나로 일치한 우리 겨레의 큰 스승, 
다석 류영모(1890~1981)

다석 류영모는 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 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그러던 중 한국인으론 첫 YMCA 총무를 지낸 김정식의 인도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어 16세에 세례를 받았다. 1907년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했으며,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하였다. 이때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전파하여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 정인보와 함께 191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다. 1921년(31세)에 고당 조만식 선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1년간 재직하였다.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다.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30년이 넘도록 강의를 하였다.

처음 세례를 받고 8년 동안 정통 기독교인이었으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뒤로 교회에 나가지 않고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나아가 《노자(老子)》를 한글로 완역하는 등 여러 성인의 말씀을 우리 말과 글로 알리는 일에 힘썼다.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여, 한자를 쓰는 대신 옛말을 찾아 쓰거나 ‘씨알(민중)’ ‘얼나’ ‘제나’ 같은 말을 만들어 썼다.

류영모는 생활에서도 성인의 삶을 실천했다. 51세에 믿음에 깊이 들어가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얇은 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했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늘 “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라고 말했으며, 가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 이 땅에서 90년 10개월 21일을 살다가 숨졌다.

생전에는 함석헌의 스승으로만 알려졌으나, 지금은 독특한 신관과 인생관을 지닌 철학자로서 다석 류영모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05년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진 데 이어 2007년 10월 5일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철학자들과 종교학자, 재야 학자들이 모여 ‘재단법인 씨알’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