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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으로 본 一雅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주기도문으로 본 一雅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

柏道 2019. 12. 25. 21:52


3호 한국의 종교개혁자들 / 생각하다


주기도문으로 본 一雅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

책임적 실존, 세계 개방성 그리고 종교 해방에 이르기까지

새길이야기

  

이정배

현장아카데미 원장

 

 

멍에와 명예 사이에서

  

나는 평소 2010년부터 20년까지 10년의 기간을 하늘이 이 땅 교회에게 허락한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2013년 분단된 조국에서 열리는 WCC대회로 교회가 세상(세계신학)과 소통하기를 바랐고 그 변화로 종교개혁 500년을 맞는 2017년에 한국 교회개혁을 꿈꿨고 그 힘으로 2019년 3.1 독립선언 100년 되는 시점에서 이웃종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을 시작하길 바랐다. 하지만 2013년의 꿈은 한국 최고가 되고 싶은 한 교회 지도자의 탐욕으로 조각났고 2017년의 소망 역시 사필귀정으로 500이란 숫자가 주는 무게감마저 가볍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온갖 종교들의 타락상이 봇물 터지듯 천하에 들어났고 신학교들조차 예외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미래마저 절망케 했다. 따라서 2019년도 기대할 바가 없을 것 같다.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을 차지했던 기독교는 통일운동은커녕 자기 생존을 위해 허덕이는 종교로 퇴락하고 말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나는 한국교회의 개혁은 1901년에 출생한 4사람의 생각으로 돌아갈 때 가능하다고 믿어 왔다. 함석헌, 김재준, 김교신, 그리고 이용도가 그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선생격인 多夕 유영모가 이에 더해져야 할 것이다. 바로 이들의 후예가 서남동이고 안병무이며,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변선환이다.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은 이용도에서 시작하여 유영모(김흥호)를 거쳐 안병무, 서남동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신학적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본래 변선환의 학창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신앙부흥사가 될 것이라 기대할 정도였다고 한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로 감리교단에서 출교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부터 내 스승인 변선환에 대해 내가 배우고 느낀 것을 소박하게 진술하겠다. 하지만 객관적일 수는 없을 것 같다. 개인적 차원에서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양해 바란다.

 

 

스승인 변선환과 나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멍에와 명예 사이에서’라고 말할 수 있다. 유교적 가치와 무속적 신앙 배경에서 자랐으나 신앙을 접해 부모를 속이고 신학교에 갔던 나를 신학의 길로 옳게 인도한 이가 바로 변선환이었다. 당시로서는 심각한 결단이었겠으나 달리 보면 무모할 정도의 열성을 지녔던 까닭이다. 그런 열심을 갖고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그곳은 내가 기대하던 그런 공간이 아니었다. 목사, 장로 가정의 아이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나의 배경은 초라했고 때론 배척의 대상이었다. 옛 종교성을 품고 사는 내 부모의 구원문제가 늘 걸림돌이었다. 힘겨워 학교를 그만두려 했던 순간이 수차례 있었다. 그때 내게 다른 신학, 다른 기독교의 길도 있음을 알려준 이가 바로 스위스 바젤에서 막 귀국한 변선환이었다. 가정의 종교배경을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고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다. 이점에서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이정배도 없었다. 신학의 길을 포기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변선환은 내게 명예이다. 하지만 출교 후 그의 제자란 것은 동시에 멍에였다. 많은 이들이 선생에게서 떠났으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멍에를 명예로 만드는 것을 내 소임으로 여겼다. 마지막 고별강연에서 그가 ‘내 제자들을 건드리지 말라(No touch)’고 했던 말씀을 기억했던 탓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도 ‘멍에와 명예 사이에서’ 살았던 흔적 때문일 것이다.

 

 

변선환의 삶과 사상

 

 

1927년 신의주 진남포 인근에서 출생한 변선환은 평소 자신이 신석구 목사에게서 세례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신석구 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던 분이었으나 모진 옥살이 감내하며 변절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선언서 서명을 망설인 이유는 당대 선교사들의 가르침 탓이 컸다. 신앙인은 정치 문제에 관여할 수 없고 기독교 이외의 낯선 종교인들과 마음을 섞을 수 없다는 선교사들의 지침 때문이었다. 이점에서 선언서 서명은 정치적 문제였고 이웃 종교인들과 협력하는 사안이었다. 당시 이 가르침은 강제성을 띄었기에 무시하기 어려운 족쇄였다. 하지만 고민 끝에 신석구는 결단하였다. 정치, 종교(신학)적 이유를 들어 민족의 자유를 방해하는 선교사들을 의심하여 저항한 나머지 마지막으로 서명에 참여한 것이다. 변선환은 이 이야기를 강의 중, 종종 침을 튀기며 말했고 감신의 얼이 바로 이런 것이라 가르쳤다. 종교해방신학이란 말은 오랜 후에 생겨났으나 내 생각에는 이것이 신석구 목사에 대한 그때의 경험과 중첩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기독교는 민족독립을 위해서 얼마든지 이웃종교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신석구의 자발적 깨침이 세례 시부터 변선환 영혼 속에 자리했을 것이다.

 

 

이북서 감리교계통의 성화(聖化) 신학교를 다니다 감신대와 한신대 대학원, 드루 신학교 그리고 늦은 나이로 바젤 신학부를 졸업하고 교수로 활동하던 초창기 변선환은 자신을 ‘3B’s Kid’ 즉 Barth, Bultmann 그리고 Buri의 신학적 유산을 먹고 자란 자녀라 칭했다. 한신대 대학원 시절 바르트를 만났고 미국 뜨루 대학에서 불트만 신학을 연구했으며 바젤에서 부리의 지도로 박사논문을 썼기 때문이다. 감신 학부에서 배운 웨슬리 신학이 한신대 박봉랑 선생을 만나 바르트 식으로 기울었지만 불트만을 통해 웨슬리 정신을 회복했고 부리와 만남으로 선불교와의 대화로까지 진일보 시킬 수 있었다. 변선환이 이웃 종교, 특히 선불교에 눈을 떠 박사논문주제로 삼았던 것은 자유의지 및 선행은총을 강조한 웨슬리 신학, 비(非)신화화를 주장한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 그리고 그를 넘어선 부리의 비(非)케리그마화 프로젝트 덕분이었다. 이로써 변선환 신학은 스승 부리를 따라 칼바르트 계시신학과 대척점에 서게 되었다. 바르트 신학이 예수의 유일회적 계시를 실증적으로 강조했다면 변선환 역시 그리스도(케리그마)를 비신화시켜 실존적으로 이해했던 결과이다. 바르트의 경우 예수가 기독교를 포함하여 여타 종교를 능가한 유일무이한 신적 계시였다면 변선환에게 그리스도는 기독교 전통에 있어 (초월 관계된) 무제약적 책임 존재에 대한 실존적 상징이었다. 세계 속 악(惡)에 대해 사람들이 저마다 상대적 관계를 맺을 때 그에 대해 무제약적인 책임을 감당한 십자가상의 예수, 그가 바로 초월 관계된 존재로서 그리스도란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를 변선환은 ‘거용(巨龍)살해자’라 불렀다. 기독교 서구 전통에서 용(龍)이 악의 상징이었던 탓이다. 이런 그리스도 이해로써 변선환이 목적한 것은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는 바르트처럼 기독교 서구가 동양과 이곳의 종교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를 일점에 고정시켜 이전과 이후를 어둠과 빛으로 나누는 도식을 거부했던 것이다. ‘거용살해자’로서 그리스도는 서구 전통에서만 통용되는 상징이라 했다. 둘째는 동양, 특히 유교와 불교에서도 무제약적 실존의 상징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붓다, 공자 역시 아시아적 전통 속에서 자기실현을 위한 무제약적인 실존적 상징으로 여겼다. 서구 그리스도 상징이 이들 아시아적 상징을 임으로 부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 상징 역시 초월 관계된 자기이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선환은 셋째로 소외(疎外) 동기의 부족으로 악의 문제에 소홀했던 아시아 전통에 거용살해자로서 그리스도 상징이 미칠 영향이 크다고 했다. 현실세계 속에 만연된 악과의 싸움을 위해 기독교적 공헌이 많다고 여긴 것이다. 이점에서 변선환은 아직 충분히 종교 다원주의적이지 못했고 동양의 구원은 서구로부터 온다는 명제에 갇혀있었다. 아직도 동양은 주객미분의 마술 동산에 갇혀 있다는 암묵적 전제 하에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성취론을 설(說)한 것이다.

 

 

이처럼 바젤 유학에서 돌아온 초기 변선환은 악과 투쟁하는 책임적 실존이란 말로서 그리스도 상징을 이해했고 한국 신학계에 나름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이후 민중신학과 만날 수 있는 씨앗이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변선환은 바르트 유형의 사고와는 달랐으나 여전히 서구 중심적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본격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전개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변선환은 아시아 신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수정해 갔다. 자신이 아직도 서구신학의 포로였음을 자각한 것이다. 이때 만난 대표적인 아시아 신학자 두 사람이 중요하다. 스리랑카의 A. 피에리스 신부와 인도의 R. 파니카가 그들이다. 먼저 파니카의 사유는 변선환을 종교재판에 이르게 할 만큼 한국교회는 과격하게 여겼다. 예수는 그리스도지만 그리스도만이 예수는 아니라는 이론을 펼쳤던 까닭이다. 즉 예수는 하나의 그리스도(a Christ)이지 유일한 그리스도(the Christ)가 아니라 한 것이다. 또한 그는 세계관 차(差)에 따라 종교 역시 달리 생성되는 것이기에 종교 간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변증법적 대화가 아니라 상호 배우려는 대화적 대화가 필요하다 하였다. 변선환은 이점을 적극 수용하였다. 기독교 서구가 초지일관 강조했던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벗고 신중심주의라는 새 패러다임 하에서 종교다원주의자가 된 것이다. 변선환에게 있어 종교다원주의는 세계 개방성과도 일맥상통한다. 기독교에 있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하겠다. 기독교 이후 시대를 살게 되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에게서 충분한 계시되었으나 하느님의 전체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존 힉(Hick)의 말도 변선환의 단골 인용문이 되었다. 이렇듯 신중심주의적 틀로서 동서양을 회통했고 다원주의 신학자가 되었으나 변선환은 차이만 강조하는 포스트모던주의와는 달랐다. 현상적으론 차이가 있겠으나 종교들 간의 공통본질 역시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본질은 실재론적이지 않았고 실천적인 내용을 담았다. 스리랑카 신학자 피에리스와의 만남이 그를 파니카와 다른 길을 가게 한 것이다. 피에리스는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남겼다. “예수께서 공생애 시작 전,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셨듯이 서구 신학 또한 아시아에 발 들여 놓기 전에 아시아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이 때 아시아의 요단강은 아시아적 종교성과 민중성을 일컫는다. 그래서 아시아의 민중성과 종교성에 몸을 담그지 못한 신학을 사치라 여겼다. 종교성 속에 함의된 민중성, 이들 간의 불이(不二)성이 바로 변선환 신학의 골자였던 것이다. 그는 민중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종교는 종교라 칭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서구적 종교다원주의자에서 종교해방신학자로서의 변선환의 변신을 일컫는다. 종교들 간의 다름이 문제가 아니라 종교 자체가 무슨 역할을 하는가가 중요해진 탓이다. 이전 시기 논했던 악(惡)에 대한 이론적 책임성이 민중의 해방과 실천적으로 접목된 결과라 생각된다. 변선환이 폴 니터(Knitter)의 『오직 예수이름으로만?』이란 책을 번역한 것도 90년대 초반 바로 이때의 일이었다. 니터 역시 神중심적 틀에서 실천(해방)적 기독론을 말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변선환의 이런 변신을 주목하지 못했다. 그의 다원주의를 포스트모던주의로 매도하여 신학토론 한번 없이 교회 밖으로 내쳤다. 교회의 크기로 목사의 크기를 가늠하는 교권주의자,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예수처럼 그렇게 성문 밖 존재가 되었다. 교회 밖 구원 없음을 말하기 전에 교회 안에 구원 있는가를 물었던 그를 교회들이 불편하게 여긴 까닭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교회 안에 구원이 있는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할 때다. 가톨릭 교종 역시 ‘교회의 복음화 없이는 세상 복음화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늘 복음을 선포하며 구원을 제도적으로 보증하고 있으나 정작 자본 종속적인 그 교회들은 붕어 없는 붕어빵처럼 복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의 도전

 

 

변선환의 이런 전환은 민중신학의 도전을 창조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토착화 신학자로 알려진 유동식, 윤성범의 신학의 길을 걸었으나 이들 속에서 종교의 민중 해방적 기능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언젠가 나는 유동식 교수에게 이런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군부독재가 시작되고 민주화 투쟁이 시작되던 1960년대 선생님은 어찌 민중신학과 대별되는 토착화(문화)신학을 시작하셨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36년간 우리 것을 빼앗긴 경험을 한 입장에서 우리 안에서의 다툼이 사소한 것으로 보였다”고 답했다. 일면 긍정되었으나 토착화신학이 시대(상황)적합성을 잃은 것이라 반문했던 적이 있다. 이점에서 변선환은 감신의 토착화 전통에 민중성을 수용하여 종교해방신학으로 진일보 시켰다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민중신학자들에게 충고도 잊지 않았다. 민중성만 알고 아시아의 종교성을 논외로 하는 것도 절름발이 신학이라고 말이다. 이때부터 변선환은 박사논문의 한 축이었던 선불교 대신 민중불교에 관심했고 원불교를 공부했으며 여성신학이 한국 신학의 꽃인 것을 강변하기 시작했다. 여성이 해방되어야 할 또 다른 민중, 마지막 민중인 것을 자각한 결과다. 노(老)신학자가 여성들 모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여성신학회에 찾아와 응원해 주었다. 결국 변선환은 한국 신학의 두 산맥인 토착화 신학과 민중신학을 종교해방신학의 이름으로 합류시켰던 독보적 위치를 확보했다. 나는 이를 신석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변선환 삶의 열매라 생각한다.

 

 

순교자

 

 

누구나 그렇듯이 변선환의 신학은 특히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신학자들에게 신세를 진 결과였다. 그렇기에 어느 신학자는 변선환을 가리켜 자기 것 없는 ‘안테나 신학자’라 비판한 적도 있다. 그러나 변선환을 마음으로 느낀 가톨릭 신학자 심상태 신부는 달리 이해했다. 자신의 길이 너무 외로웠기에 동서양 이웃 신학자들의 생각을 빌어 자신의 말을 대신 한 것이라고 말이다. 어느 경우가 되었든 변선환은 지극히 외로운 길을 갔다. 학창시절 도드라졌던 부흥사의 열정을 학문하는 데 쏟았고 교회를 향한 비판에 썼으며 제자들을 기르는 데 소진했다. 대학원생들 다수가 그의 지도하에 논문을 쓰고자 했기에 교수 한사람이 여섯 명 이상을 지도할 수 없다는 내규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의 배움을 얻은 제자들, 거지반 30명 이상이 신학박사 학위를 얻고 귀국한 것도 주변에서 찾을 수 없는 사례라 하겠다. 그러나 그는 정말 외로웠다. 출교이후는 더욱 그랬다. 불러주는 교회도 없었다. 그는 홀로 책을 읽다가 고독하게 돌아가셨다. 교회는 그를 내쳤으나 이웃종교인 원불교에서는 그를 추모했다. 그야말로 참 목사라 칭하며 추모의 시간을 가져 주었다. 예수의 죽음을 그의 제자들마저 외면했을 때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만이 유일하게 그의 죽음을 알아보고 고백했다. “저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말이다. 이웃종교인에게서 참된 목사로 인정받은 변선환, 그이야말로 복음을 증거했던 참된 신학자가 아니겠는가? 죽음을 몇 년 앞둔 시점부터 변선환은 우리에게 두 가지 걱정이 있다고 말했다. 신학하는 이들의 영혼의 크기가 한없이 작아진 현실과 신학대학이 교단정치의 희생양이 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이 둘은 동전양면처럼 상호 얽혀 있었다. 그래서 변선환은 교단과의 싸움을 위해 키에르케고어가 말했듯 자신의 자화상을 순교자로 그렸다. 이 시대가 순교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교단과의 적당한 타협을 통해 출교만은 막자고 수차례 권유했으나 그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당시 감신 이사장은 그의 절친 중 한사람이었고 감리교단의 연회감독은 학창시절 그를 형이라 부르며 따랐던 변선환의 4년 후배였다.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었다. 타협도 가능했다. 그러나 변선환은 스스로 죽고자 했다. 종교개혁 500년을 맞아 지금도 순교자를 시대가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도 고독을 두려워하기에 순교자를 꿈도 꾸지 못한다. 별을 손에 넣을 수 없다하여 별보기 조차 거부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들로 변질된 탓이다. 본래 하나님 나라가 ’체제 밖‘을 꿈꾸는 일이었거늘 모두가 체제 안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변선환의 외우(畏友)이자 초현실주의 신학자인 이신이 말했듯 상상력이 부패, 타락된 소치다. 한마다로 믿음(信)이 없는 것이다. 이점에서 변선환의 출교는 영혼의 크기가 한없이 작아진 이 시대의 목사, 신학생 그리고 기독교인 모두에게 신학자란 무엇인지, 믿음을 지닌 사람의 선택이 어떠한 것인지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를 영혼이 궁핍했던 시대의 신학자라 부른다. 횔더린이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었고 하이데거가 궁핍한 시대의 철학자였다면 그는 신학영역에서 주저 없이 그렇게 불릴 수 있다.

 

 

주기도문

 

 

끝으로 주기도문과 연관시켜 종교해방신학자로서 변선환의 삶과 사상을 풀어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 알려준 기도문은 마태와 누가 복음서에만 수록되었다. 첫번째 복음이라는 마가에는 없다. 주기도문은 의당 원천(Quelle)이라 불리는 예수 어록 중심의 Q 자료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것 역시 바울의 첫 번째 서신들만큼이나 오래된 자료이기에 오히려 마가서보다도 이른 시기의 문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는 무수한 말을 쏟았으나 주기도문만큼 명확한 가르침은 그리 많지 않다. 예수께서 ‘구하라’ 하셨고 바울이 ‘기도하라’ 한 것은 실상 주기도문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한 누구도 홀로 부자일 수 없고 누구도 홀로 슬퍼할 수 없다. 하늘을 누가 홀로 독점할 수 없듯이 말이다.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 부분은 하늘 아버지를 생각하는 예수의 시각이다. 하느님이 예수고 예수가 하느님이란 교리가 생기기 전의 예수의 하느님 생각이 담겼다. 예수에게 하느님은 하늘 부모로서 근원적 존재다. 누가서의 족보이야기가 말하듯 조상의 끝은 하늘, 곧 하느님이란 것이다. 예수는 이 하느님을 거룩하게 하는 일이 우리들 인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인 것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하느님을 거룩하게 하는 일은 발 딛고 사는 현 세상 속에서 이룰 과제와 결코 무관치 않다. 하늘의 거룩함은 이 땅에서 이룰 과제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는 아니지만 둘도 아닌 탓에 이를 동양적으로 불이(不二)적 관계라 말해도 좋다. 이 땅에서 이뤄야 할 하늘의 거룩함, 그 실상은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 잘못을 인정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나 일용할 양식을 얻는 일이다. 이 일은 종교적일 뿐 아니라 정치 경제적 사안과도 깊이 연루되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것은 종교적이며 물질적인 것이 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정치, 경제가 제대로 서지 못하면 거룩함의 실상이 헛된 염불 되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남미 해방신학이 물질을 중요하게 여긴 것도 민중신학이 빵의 문제로 고통 하는 민중의 우선성을 말한 것도 그리고 변선환이 민중성과 종교성의 하나 됨을 강조한 것도 모두 이런 선상에서 이해될 일이다. 신학자 李信 역시 신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다시 신되는 것을 성육신의 본질이라 여겼다.

 

 

이점에서 나는 주기도문 속의 이런 가르침이 변선환의 신(神) 중심적 종교 해방신학에서 구체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신(神)중심적이었기에 그의 신학은 ‘다원적’일 수 있었고 종교 해방적이었기에 ‘현실’을 품을 수 있었다. 변선환에게 神, 곧 하늘은 모두를 품으며 모두를 거룩케 하는 근원적 일자(一者)이다. 땅의 사람들 모두가 일용할 양식을 얻는 방식으로 이 땅이 거룩해질 때 비로소 거룩할 수 있는 존재이다. 홀로 거룩하고 홀로 완전해지기를 바라지 않았고 땅과 하늘, 神과 인간이 함께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Pro me’ 적 존재라 하겠다. 이 경우 ‘me’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 혹은 땅 전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 이반 일리치는 “기독교의 골자인 성육신의 신비는 오로지 현장(現場)에서만 재현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초월을 초월한 것이 성육의 본뜻이기에 성육신의 종교인 기독교를 이 땅의 종교라 본 것이다. 변선환의 종교해방신학 역시 결국 땅을 위한 땅을 사랑하는 신학일 뿐이다.

 

 

금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며 변선환의 제자들이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하는 가정아래 살아생전 기독교에 대한 그분의 염려와 우환을 기억하기에 1년의 세월을 투자하여 『종교개혁 500년 ‘以後’ 신학- 루터 밖에서 루터 찾기』를 펴냈다. 루터에게로의 회귀가 아니라 루터 밖에서 새로운 루터를 찾을 목적에서였다. 처음의 루터가 역사적인 비텐베르크의 루터라면 나중 루터는 이 시대를 개혁할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제자들을 ‘노 터치’하라 선언한 변선환, 기독교의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홀로 순교자의 길을 갔던 변선환, 우리는 그를 잊지 못하여 사후 20여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8월 8일을 전후하여 용인 묘소를 찾았다. 어느 날은 너무 더웠고 어느 날은 폭우를 만나야 했다. 어떤 때는 나와 내 제자들 또 그들의 학생들이 함께 하기도 했다. 묘소에 누우신 선생님까지 4대에 걸친 학문의 인연이 함께 했던 것이다. 여하튼 20여 년간 묘소를 참배했던 그 힘으로 우리는 600페이지 되는 책을 함께 만들 수 있었다. 두 번째 종교개혁은 아시아에서 나와야 한다는 변선환의 사자후(獅子吼)를 기억한 탓이다. 변선환이 그토록 사랑했던 웨슬리의 감리교단은 그를 버렸으나 그를 종교개혁자로 중히 여겨 이런 글을 쓸 기회를 준 새길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불러 준 로마 백부장처럼, 고마운 존재다. 새길이 두 번째 종교개혁의 출발지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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