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은 예로부터 낙천(樂天)의 민족이요, 평화(平和)의 민족이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금수강산과 ‘인정(人情)’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은 역사에서는 매우 불리하다. 역사란 투쟁의 역사이고, 전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남의 나라를 먼저 공격한 적이 없다. 도리어 1000회 가까이 외침을 받았다. 진정한 평화의 민족이다. ‘평화의 왕’이 탄생하기에 이만 한 조건을 가진 나라가 지구상 또 어디에 있겠는가.
평북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 있는 문선명 총재 생가. 1991년 문 총재 방북 때 북한 당국이 말끔하게 복원했다. |
한민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시작하여 ‘해 뜨는 살기 좋은 땅’을 찾아 동진하기를 거듭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한반도에 정착할 때까지 여러 종족과 민족의 좋은 유전자 DNA를 물려받았다. 역사적 수난은 인류의 좋은 유전자를 선물 받은 반대급부가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세계 어느 민족보다 혈통에 민감한 민족이다.
한민족은 스스로를 천손족(天孫族)이라고 부르고, 예부터 하늘(하나님, 하느님, 한울님)신앙을 품고 살았고, 어려운 역사적 곤경 속에서도 온갖 지혜와 은근과 끈기로 살아남았다. 한민족은 81자로 된 인류의 최고(最古) 경전, 천부경(天符經)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종적·문화적 전통과 융합 속에서 오늘의 한국인이 있는 것이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문선명 총재는 탄생했다.
문 총재가 탄생한 1920년 즈음은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질곡인 일제식민 기간이었다. 식민지라는 현실 또한 성인이 탄생하는 조건이 된다. 메시아 사상, 구세주 사상은 한국문화의 전통 속에 줄기차게 있어왔고, 그러한 염원이 서린 곳이 바로 한국이다.
서울 흑석동 명수대 새예수교회에 다니던 문선명 총재(앞줄 왼쪽 세번째)가 1941년 교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
근대란 바로 자연과학과 산업혁명, 그리고 기독교가 중심이 되는 시대이다. 결국 이러한 근대를 맞아서 전통적인 주자학과 동도서기(東道西器)로 대응하던 조선은 처참한 말로를 걸은 셈이다. 그나마 18세기에 들어온 천주교와 뒤를 이어 들어온 기독교가 한민족으로 하여금 근대에 발을 들여놓는 희망과 계기를 마련한다. 개항도 우리 민족은 외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악조건은 필연적으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문 총재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定州). 우리나라 기독교는 북쪽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먼저 융성했다. 평북 정주군은 평양에서도 멀리 떨어지지 않는 지역이다. 예로부터 정주, 곽산은 인물이 많이 나는 지역이다. 평안도를 흔히 맹호출림(猛虎出林)의 지역이라고 한다. 특히 정주 지역은 큰 인물이 많이 나왔고, 기독교가 융성했던 지역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처음부터 서구문물과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문호가 되었지만, 한국의 근대화는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외세에 저항하는 성격을 갖게 했다. 이는 한국으로 하여금 ‘동양의 이스라엘’이라 불릴 만한 성격을 갖게 한다. 한민족과 유대민족은 상통하는 데가 많다. 유대민족은 선민사상을 가진 데 비해 한민족은 천손족이라는 사상을 가졌다.
한민족은 전통과 단절된 채 새로운 근대 문명을 맞게 된다. 식민지적 상황에서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은 민족적 불행이었다. 근대화가 된다고 해도 전통문화가 일방적으로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 자주성이나 자긍심이 망각된 채, 심지어 나라의 독립과 해방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저항적 성격의 근대화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1955년 촬영한 청파동 본부교회 모습. 문선명 총재는 1954년 통일교를 창시하고 이곳을 본부교회로 삼았다. |
조일병탄이 일어난 해는 1910년이지만 일본은 이미 1870년대부터 침략의 야욕을 보였다. 즉 흥선대원군의 실각(1873)과 개항(1876) 이후 한국은 거의 일본의 영향권에 있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일본은 병자조약의 1조에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권을 갖는다’라고 명시하고, 종래 중국 사신을 맞았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獨立門·1897년)을 짓게 한다. 이는 실지로 조선의 독립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와의 사대관계를 단절시키고, 그런 후에 병탄할 목적이었다.
청일전쟁(1894∼1895)과 노일전쟁(1904∼1905)의 승리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립하게 된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어 행정권·사법권·경찰권을 빼앗아간다. 조선은 임오군란에 이은 조선 군대의 해산(1907년)으로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빼앗긴다. 무(武)를 천시하던 사대주의의 마지막 응보였다.
문 총재가 태어난 1920년은 3·1운동이 일어난 바로 직후이다. 민족자결주의가 팽배하였고, 자주독립의 의지가 불붙는 시점이었다. 아마도 선생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민족주의를 달성하는 사명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민족주의는 기독교적 세계주의 혹은 세계평화주의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좌표에 있었던 것 같다.
일제 식민기간에 민족이 물질적으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처참하게 몸과 마음이 무너졌을 때에 민족을 부활시키는 일은 오직 영적(靈的)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민족 문화의 가장 밑바닥 상태에서 택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적 부활과 평화에 대한 염원이었을 것이다. 이를 역사적 실체로서 담당한 인물이 바로 문 총재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의 한국문화에서 가장 먼저 영적 폭발과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고 기치를 높이 든 인물이 문 총재다.
문 총재는 1920년 1월 6일(음력),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문경유(文慶裕)와 어머니 김경계(金慶繼)의 사이에 3남6녀 중 차남이었다. 부모님은 충효를 으뜸으로 여기는 유교 선비집안 출신이었다. 기독교사상의 세례는 종조부인 문윤국(文潤國) 목사로부터 받았다. 종조부는 당시 기독교의 중심인물이었다. 문윤국 목사는 이승만 박사와 친구이며, 독립선언문을 기안한 다섯 사람 중 한 분인 이승훈 선생이 오산학교를 세울 때 배후에서 도운 분이고, 3·1운동 당시 이북5도 대표였다.
문선명 총재가 2006년 3월27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천주평화연합(UPF)’ 창설대회에서 기념강연을 하고 있다. |
문 총재는 어릴 적에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신식교육은 14살(1934년)에 정주군 오산(五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고부터이다. 문 총재에게 결정적으로 생애의 목표가 설정된 것은 1935년 부활절 아침 정주군 묘두산(猫頭山)에서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특별계시를 받고부터이다.
“고통받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라. 지상에서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맡아라.”
문 총재는 자라면서 산천초목과 마음을 통하고, 자연을 교과서 삼아 지냈다. 온갖 동물이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지극히 사랑하는 모습에서 천리와 자연의 이치를 터득했다. 때로는 밤이 이슥하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과 이야기하고, 삼라만상과 대화를 하면서 우주의 신비와 진리를 터득했다. 그리고 농사에서도 훌륭한 일꾼으로 자랐다.
문선명 총재가 1989년 2월 세계일보 창간 리셉션에서 당시 야당 총재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접견하고 있다. |
청년 문선명은 서울의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1938년)하게 되는데 서울의 흑석동에서 하숙과 자취 생활을 이어간다. 이때 서빙고 오순절교회와 예수교회 소속인 명수대 새예수교회에서 유년주일학교 반사 활동을 하면서 신앙심을 키운다. 신앙생활과 전기과 공부를 병행한 선생은 1941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전기과에 유학한다.
청년기 일본 유학 중에 저항운동을 하다가 여러 차례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육신의 고통과 굶주림, 지상의 지옥과 사형수의 생명에 대한 애착을 알고, 한줄기 빛과도 같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구를 느끼게 된다. 그럴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을 키웠다.
일본의 천황주의에 대항하면서 지하운동을 펼쳤다. 그 때문에 요시찰 인물이 되어 일본 형사들의 미행을 당하고, 와세다대학 오른편에 있었던 경찰서 유치장에 여러 번 들어가서 고문을 받기도 했다.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저생활과 빈민생활 경험, 긴자(銀座)거리의 리어카꾼, 가와사키(川岐) 철공소와 조선소에서의 노동자 생활 등 산전수전을 다 겪게 된다. 더욱이 일제 탄압 속에서도 원수의 나라인 일본인을 사랑함으로써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장과정을 통해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잠의 문제, 배고픔의 문제, 정력의 문제를 넘어서며 자아주관 완성의 길을 걷는다. ‘우주주관을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을 완성하라’는 것이 청년 시절의 좌우명이었다.
문 총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격화로 1943년 한 학기를 단축하여 졸업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 후 토목건설회사인 가시마구미(鹿島組) 경성지점 전기부에 취직하면서 서울의 용산에서 머물게 된다. 이때 일본 유학 시절 항일지하운동 사실이 밝혀져서 극악무도한 고문을 당한다. 그때 상처가 너무 심해 고향에 돌아가서 요양을 하기도 한다.
식민지에서 해방을 맞기까지 선생은 기독교적 신앙의 궁극적 깨달음과 완성을 위해 온갖 경험과 시련을 겪었다. 해방공간에서는 여러 번 유치장 신세를 졌으며, 특히 기성교단의 질시와 공산당 당국의 종교말살 정책으로 평양 내무서에 구속되는 비운을 맞는다.
공산치하 종교 말살… 생사 기로에
그 후 평양형무소 수감, 흥남 덕리특별노무자수용소 이감, 그리고 흥남 비료공장에서 강제노동과 6·25전쟁 발발로 인해 흥남감옥에서 출감되는 기간(1948년 2월 28일부터 1950년 10월 14일까지 2년8개월간)은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그야말로 생사를 오가는 극한 상황이었다.
문선명·한학자 총재 내외가 2005년 7월 피스컵 개막식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
1950년 8월 1일 B-29의 흥남폭격으로 흥남공장은 초토화되었다. 문 총재는 사형집행 하루 전인 10월 13일 연합군이 들어와서 겨우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이것은 기적과도 같은 구원이었다. 6·25전쟁 중 미국 전투기 조종사가 우연히 찍은 북한 상공에 현현한 예수님의 형상(1950년 10월 20일, 프랑스 ‘파리마치’지 게재)이 나타났다.
문 총재에게 공부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정규학교의 전기과 공부와 교회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와 탐구, 그리고 서당에서 전통 충효사상에 대한 공부가 그것이다. 이들 공부는 통일교를 창립하는 사상적 세 기둥이었던 셈이다. 결국 전기의 과학적 현상과 기독교 신앙의 결합을 통한 절대상대적인 세계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서당에서 배운 동양의 충효정신과 이기(理氣)철학에 대한 공부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당신만의 ‘인격’과 ‘신(神)’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문 총재는 동족상잔이라는 6·25전쟁 피란 중에 부산 범냇골 토담집에서 통일교의 근본원리인 ‘원리원본(原理原本)’(1952년 5월 10일)을 상재한다. 흔히 외래 문물을 받아들여서 그 문화를 완전히 토착화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데는 100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문 총재는 그러한 100년의 과정에서 한국인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심신수련과 절대적 신앙으로 오늘날 ‘심정의 하나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교를 창립한 셈이다.
이대·연대 사건으로 또 핍박
흥남수용소에 이어 문 총재에게 일어났던 가장 치명적인 사건은 자유당 정권의 통일교에 대한 최초의 종교탄압이었다. ‘이대·연대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문 총재는 1955년 7월4일부터 10월4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죄목은 ‘병역기피’였지만 결국 무죄를 선고받고 출감했다.
‘이대·연대 사건’으로 이화여대생 14명과 연세대생 2명이 이단 신앙을 이유로 퇴학당하였다. 이에 앞서 이단 신앙을 이유로 연세대 박상래 교수와 이화여대 교수 5명(양윤영·한충화·최원복·김영운·이정호) 등이 퇴직당하는 사태가 있었다.
이 사건은 1954년 5월 1일 북학동(서울시 성동구 북학동 391-6호)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한 이후 기성교단 출신인 박마리아(이대 부총장)와 이기붕 권력(자유당)에 의해 맞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사건은 헤아릴 수 없다. 탄압과 고통은 신앙심을 더욱 더 키웠다. 바로 암울한 근대사의 시기에 문 총재는 민족의 독립과 기독교사상의 완성과 미래 지상천국·천상천국을 만들어내기 위한 통일교적 세계관과 우주관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문 총재의 지상천국·천상천국의 개념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종적·완성적 천국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 이후 실로 2000년 만에 ‘낙천(樂天) 민족’의 후손인 당신이 결국 인류가 정착해야 할 실체적 천국의 개념을 완성한 셈이다.
한국은 예로부터 지구상의 동서남북 문화가 만나는 곳이다. 실크로드의 최동단에 있는 한국은 역사적 단계마다 인류의 보편문화를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소화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한 문화능력이 한국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통일교 교리서인 ‘원리원본’. 문선명 총재가 6·25전쟁 피란 중 부산에 머물며 직접 쓴 자필본이다. |
바로 그 미래 문명의 패러다임 중 하나가 통일교의 원리원본, 원리강론, 원리본체론을 중심한 통일원리와 통일사상이다. 아직도 사대주의에 찌들어 있는 보수기독교 세력, 소위 정통이라고 하는 세력들은 막연하게 매우 비현실적으로 재림예수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한국인이 재림예수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문 총재는 오늘의 시대를 구약시대, 신약시대에 이은 ‘성약(成約)시대’라고 규정한다. 성약은 분명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와 주체화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사적으로는 약속의 완성이다. 그는 분명 우리 시대 깨달음을 얻은 한 사람이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보여준 인물이다. 외래 사대사상에 매몰된 한국의 보수기독교인들은 한국에서 기독교가 완성되면 마치 큰일이라도 나는 듯한 태도다. 한국에서 성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왜 잘못인가.
세계의 통일교 신도들은 한국을 기독교의 예루살렘처럼 생각한다. 신앙의 모국이며, 성지이다. 한국문화, 한국사에서 가장 큰 잘못은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입장을 갖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문화 여러 부문에서 세계적 선진 혹은 정상의 위치에 오르려고 하고 있다. 산업 부문은 경제개발로 이루었고, 종교 부문에서는 통일교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이 일제의 나락에 떨어진 것이 1910년이고, 그 중간에 해방(1945년)과 6·25전쟁(1950년)을 겪은 뒤 1960년부터 역사적 전기(1960년 4·19, 1961년 5·16)를 마련, 2010년에 이르러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말하자면 50년을 주기로 전환점과 부흥의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통일교는 1960년 ‘참부모님의 성혼’(음력 3월 16일) 이후 안정과 융성의 결정적인 전기를 맞게 된다.
2006년 10월 임진각에서 열린 평화통일기원대회에 참가한 미국 성직자들이 비둘기를 북녘으로 날려보내고 있다. |
한국 현대사에서 1960년, 1961년은 참으로 중요한 시기이다. 식민지에서 100년 만에 선진국으로 전환한 나라는 세계사에 없다. 지금 한국은 세계에도 없던 것을 실천하고 기록하는 나라이다. 통일교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도 일제가 이 땅에 뿌려놓은 남북분단의 씨앗은 한민족을 괴롭히고 있다. 일본은 그 죄를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문 총재의 교리에 담겨 있다. 그게 지구적 탕감복귀의 논리이고 책임분담의 논리이다. 한국과 일본은 침략과 반목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 통일교의 섭리사이다.
일제의 질곡과 6·25를 거치면서 가난하고 헐벗은 한국 땅에는 처음으로 문 총재의 영적 폭발이 일어났고,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끝내 ‘통일교’로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에 대한 신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국은 이제 ‘제2의 예루살렘 성지’가 되어 신앙의 고향, 신앙의 모국으로 순례의 발길이 이어질 것이다. 통일교의 60년간 성취는 앞으로 통일교 신도와 한국인들에게 신앙과 세계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이 세계사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다. 통일교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것을 종교적으로 실천하여 왔다. 통일교는 이제 선진국 ‘한국의 깃발’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종교인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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