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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다 본문

하나님/예수님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다

柏道 2019. 8. 1. 18:22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다  


 기독교 공부

2019. 3. 4. 16:05

                                                                                      



     *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다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면 도리어 불행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행복은 바라는 바,

   즉 욕망이 충족될 때 느껴지는 감정인데

   원하는 욕구가 너무 많아 충족되기도 어렵거니와

   몇가지 충족으로 잠시 행복감을 느낀다 해도 금방 다른 욕구가

   자리를 대신하게 되고,

   어렵게 채워진 욕망이라 해도 더 큰 것을 요구하게 되니 

   행복에의 기대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요

   무지개를 따라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따라가면

   그 행복은 늘 뒤로 물러가 우리 품에 안기지 않는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역사를 돌아 봐도,지금 우리 주위를 돌아봐도 

   행복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 '모든 인생은 허무하고 괴롭다'고 깨친 석가모니나 솔로몬 같은 지혜는

   모두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럼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내가 깨닫기는 '성장과 성숙'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완전함인데 인간적인 기준은 예수가 보여 주었고,

   철학적 개념은 '완전한 신성'이 그 목표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예수는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일깨우면서

   자신이 그 삶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의 삶은 고난과 불행의 연속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삶을 뒤따르기를 내켜하지 않는다.

   도리어 피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는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의 내면과 그의 영적 상태를 볼 줄 아는 눈이 열린 사람은

   예수만큼 행복한 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느끼고 살았으며 급기야 아버지와 밀접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수준으로 빨리 의식과 삶이 성장했다.


   그럴수록 그의 삶은 확신과 담대함,평안과 기쁨으로 넘쳐 흘렀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생각과 삶이 일치해 나갈수록 행복은 더욱 커졌다.

   그가 십자가의 고통까지 나아간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대신 졌다고 하는데

   그렇게 믿어 위로를 얻고 구원의 감격과 선한 삶의 의욕을 가지게 되는 것은 

   탓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본질을 가리거나 오해,왜곡을 하게 되면

   그가 얻을 것은 또 다시 욕구불만과 지루함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바로 이 구덩이에 빠져 어쩔줄 몰라 하고 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대개 십자가 구원의 은혜가 약해져서 그런가 하고

   더 큰 감동과 자극을 찾아 다니는데

   사실 십자가의 피로 대속적인 구원을 받은 수준에 머물게 되면

   끊임없는 부담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대신 살찢고 피흘려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셨다는데 도대체 나의 삶은 이게 뭔가?' 하는 생각에

   도리어 더 죄송하고,미안하여 괴로워지는 것이다.


   거기다 그런 약점을 이용하여 돈과 시간,헌신을 요구하는 자들이 즐비하니

   차라리 예수를 믿지 않는게 나을 정도다.

   그런데도 고정관념과 편견에 매여 있다보니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은 것이 아니요,

   그럴 필요도 없었고,그래서도 안된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만 진지하게 연구해 보면 답이 나온다.

   한시적으로 절망에 빠진 자들을 건져내기 위해,

   그리고 감사와 용기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그러한 교리가 도입되었고,

   실제로 제법 오랫동안 효과를 내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그 교리가 영원한 진리였다면

   기독교가 이런 모습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기독교는 실패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도 여전히 대속을 외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예수의 무능을 드러내는 것이 되고 만다.

 

   아담은 한순간에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예수는 2천년이 지나도 인구의 반도 구원하지 못한 채 쩔쩔매고 있다면

   이것이 어떻게 복음이 되겠는가?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은 대속보다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유란시아서는 예수가 굳이 십자가까지 질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도 그런 죽음을 요구한 적이 없다고 한다.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아버지의 선하심과 사랑을 자신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온 인류에게

   증거하고자 했다.

   그의 모든 가르침과 행적,삶과 성품은 모두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럼 왜 그가 십자가를 졌는가?

   그것은 일차로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증거였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를 스스로와 우리에게 증거하기를

   '나의 모든 고통과 수치, 심지어 비참한 죽음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클 수 없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이다.


   아버지는 그 만큼 사랑할 만한 분이시고,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려도 건져낼 분이실 정도고 신뢰할 만한 분이시다는 것을 

   스스로와 인류에게 증거하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를 통해 우리에게도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셨다.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사랑하여 

   그런 수준에까지 올라오라는 것이다.

   

   예수가 대신 죽은 것으로 위로받고 좋아하지 말고

   그 수준을 넘어 우리도 각자 예수가 가졌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키워나가고 삶으로 증거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아버지께 더 가까이 나가기를 원하게 되면  

   자신의 완전하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되고,

   그 길은 오직 예수가 보여준 길을 따르는 것 외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렇게 예수가 보여준 모범을 따라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향해 올라가는 것,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행복은 바로 여기에 들어 있다.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완전하심을 향해 날마다 성장해 나가고

   그 인격이 성숙해지면 질수록 행복은 커지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심에 이르도록 창조되고 계획되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예수처럼 그 길을 행할 때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푸른오솔길'  곽현영 목사님의 글

        

                                                2018.10.26ㅡ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