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의 저항, ‘다른 격물’
이 세상 안에서 존재의 성스런 뿌리를 경험한 이들에게 있어서 세계는 더 이상 속된 곳이 아니다. 이 세계 자체가 도가 실현되는 곳이고, 인간은 이미 자신 안에 선의 뿌리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제 남은 것은 그러한 통찰에 근거해서 행하고, 義를 실천해내는 일뿐이다. 양명이 심즉리를 경험하고서 주창한 또 하나의 정리가 ‘지행합일(知行合一)’인 것은 그런 의미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참된 知란 이미 그 안에 행위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知는 知가 아니고 단지 허위의식일 뿐이다. “행(위)은 지식의 완성이고”(行是知之成), “知는 行을 지향한다.”(知是行的主意)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행위를 포함하지 않는 지식은 知라고 부를 수 없다”(不行不足謂之知)고 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의 극심한 지적, 도덕적 타락이란 바로 이렇게 ‘知’와 ‘行’을 나누어서 추구한 결과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더 배워야한다고 하면서 온갖 지적 공부에 몰두하지만 결국은 삶의 종당에 가서도 행하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알게 되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러한 비판의 근거인 지행합일의 존재론적 근거를 양명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사물의 원리들이란 마음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 마음이 하나이고, 그것이 모든 것이다. 그것이 전체 동정의 측면에서 이야기하면 ‘仁’으로 불리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 라는 것을 얻는 측면에서 말하면 ‘義’라고 하고, 조리(條理)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理’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仁이나 義는 마음 밖에서 찾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理만은 마음 밖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理가 마음밖에 있다고 하기 때문에 知와 行이 갈라지게 되었다. 聖人의 知行合一의 가르침은 진리를 마음 안에서 찾는 것이다. 왜 그것을 의심하느냐?”(1) |
양명이 이렇게 지와 행의 본질적인 하나 됨을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그 둘(知, 行)이 ‘하나 되어야 함’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것은 행을 위한 것이고, 양명에게서 지가 가치 있는 이유는 바로 행 때문이다. 그는 말하기를, “너는 내 가르침의 근본 목적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오늘날 배움에 있어서 知와 行을 서로 다른 두 가지 일로 나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인데도 그 생각이 아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내가 지행의 하나 됨을 주장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이미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2)라고 하였다.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양명에게 있어서 지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에 있다. 그는 행이란 지의 완성이라고 보았으며, 그리하여 그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배움과 공부란 지와 행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다. 만약에 우리의 공부가 이런 뜻을 가진 공부라면 그 공부는 방법과 과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그의 강조이다. 즉 여기서 지행합일은 공부의 목표를 나타내기도 하고, 방법을 나타내기도 하는 ‘입언종지(立言宗旨)’가 되는 것이다. 지행합일의 참다운 삶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행합일의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양명에 따르면 당시의 정통 공부법이라고 여겨지던 주자의 방법은 바로 이러한 지행합일의 공부법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 선함의 가능성이 인간 지적 능력의 크고 작음에 따라 좌우된다고 보았으므로 그 주안점을 우선적으로 지적인 경(經) 공부에 두었다. 주자의 유명한 격물 해석을 말한다. 하지만 양명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커다란 맹점을 보고서 자신이 경험한 존재사건에 근거해서 그러한 주자의 격물 해석에 도전하고 저항한다.
그에 따르면 주자의 격물 이해는 원래 하나였던 지와 행을 둘로 나누는 것이고, 그래서 그 공부의 목표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 양명에 따르면 『대학(大學)』이 가르쳐주는 성학(聖學)의 길인 ‘8조목’(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격물은 주자가 가르쳐준 대로 수많은 외물에 대한 탐구를 통한 지식의 확충이 아니라 그 외물들이 바로 나의 ‘뜻’(意)이 다가가서 존재에로 불리는 일들이므로, 먼저 그 사물을 촉발하는 나의 ‘뜻’(意)을 고치는 공부, 나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내 뜻을 사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성실히 하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주희가 송 대 이전의 『대학』고본을 새롭게 편하면서 ‘성의(誠意)’ 장 앞에 ‘격물(格物)’ 장을 두는 것에 반대하고, 원래의 고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8조목의 모든 가르침이란 한 가지로 ‘뜻을 성실히 추구하는데’(誠意) 있으며, 이것이 바로 격물의 진정한 의미라고 결론짓는다.(3)
부모님을 잘 섬기는 일은 그 부모님 섬기는 일에 관해 기록해 놓은 수많은 책들을 읽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 섬기는 일에 마음이 닿자마자(知 또는 意) 거기에 어떤 사심도 끼어들지 않게 해서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일(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그는 격물(格物)의 ‘물(物)’ 자를 물건의 물(物)이 아닌 인간관계의 사(事)로 먼저 해석할 것을 주장하면서(4) 당시의 학자들이 그렇게 중시여기는 ‘사서(四書)’와 ‘오경(五經)’도 매우 비신화화 하여 이해하였다. 그는 “사서와 오경도 다만 이 마음의 본체에 대해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蓋四書五經不過說這心體)라고 하면서 공부란 바로 마음의 심체에서 하는 것이 그 요령이라고 강조한다.(5)
양명의 이러한 급진적인 전통 해체와 개혁의 요구는 단지 경(經) 이해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당시 매우 경직되어 있었고, 이론적 논쟁에 휘둘려서 그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예(禮) 수행과 관련해서도 매우 급진적인 이해를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예(禮)’와 ‘리(理)’의 서로 다른 두 단어는 원래 같은 뜻이다.
여러 상이한 예칙들은 리(理)가 서로 다르게 표현된 것에 불과하고, 그 리(理)란 다시 우리 마음의 본성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 예(禮)들을 마음에서 이해하지 않고 단지 옛 규례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진정한 리(理)를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일갈한다.(6) 이렇게 급진적으로 전개되는 양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한 해체요구는 공자 자신에게로도 향해져서 그는 주자와의 격물 해석과 관련된 논쟁에서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말을 한다;
“무릇 학문은 마음에서 얻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마음에서 구하여 그르다면 비록 그 말이 공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감히 옳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공자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마음에서 구하여 옳다면 비록 그 말이 평범한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감히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공자에게서 나온 것은 어떻겠습니까?”(7) |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공자가 거하고 있다고 강조하는 양명에게서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시금석은 더 이상 어떤 외형적인 권위나 객관적인 이론이 아니다. 오직 우리로 하여금 참된 행위에로 이끄는 능력이 시금석이 된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만약 자신들이 옳고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욱 힘써서 자신들의 말을 실천에 옮기고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8) 그는 말하기를,
“무릇 도는 공적이고 천하에 속하는 것이고, 학문도 역시 공적이고 천하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주자나 공자라 할지라도 사사로이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에게 열려있고 그러므로 그들에 대해서 논의하는 올바른 길은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입니다.”(9) |
라고 하였다. 그가 체험한 심즉리의 존재사건이 어떠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하겠다.
함석헌의 義, ‘다른 구원’(대속과 자속)
양명이 자신의 심즉리의 체험에 입각해서 당시 넘볼 수 없는 권위였던 주자의 격물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심지어는 공자조차도 그에게 절대적인 권위가 될 수 없음을 밝히면서 당시의 지적,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부패의 근본을 치유하려고 한 것처럼 함석헌은 1923년 관동대지진과 거기서의 일련의 체험 이후 자신의 진로를 위해서 중요한 결정을 하고, 특히 그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큰 전환이 마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 함석헌에게 많은 생각을 만들었던 관동대지진 ⓒGetty Image |
그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학교와 전공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선택한 것도 이즈음의 경험들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그의 또 다른 삶의 내러티브인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I」에 보면 그는 이 사건 속에서 “인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았고, 종교도 도덕도 어떤 것인지 눈앞에 똑바로 나타났습니다.”고 한다.(10) 고향에서 기독교를 접한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것,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것밖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11) 생각하던 그가 전쟁에 끌려가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일본 유학을 와서 그러한 참상을 겪고, 또한 거기서의 특별한 섭리를 체험한 후 신학이나 철학 등의 이론적 탐색을 선택하지 않았고, 또한 소질도 있었고 무척 하고도 싶어 했다던 미술도 마다하고 ‘사범학교’를 선택한 것은 그저 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양명이 심즉리를 경험하고서 지행합일의 행과 실천에 몰두한 것과 같이 그렇게 그가 “우리나라 형편을 살펴 볼 때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교육으로 결정했습니다.”라고 한 대로 이제 참으로 중요한 것은 ‘현장’이고 ‘현실’이며, 평범한 사람들(씨)의 ‘교육’이라는 깨달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나중에 1928년 졸업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서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10년을 재직할 때 쓴 글에서 “교육이야말로 하나님의 발길질입니다. 절대입니다.”라고 쓰고 있다.(12)
나는 그가 오산학교에 들어가서도 다른 과목의 교사가 아니라 바로 ‘역사’ 교사가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도 스스로 밝히기도 했지만 당시 역사교사가 된다는 것은 가장 힘없고 나라를 빼앗기기까지 한 조선의 역사에서 무엇인가 의미 있고 긍정적인 것을 찾아내어서 학생들에게 전달해주어야 하는 것이므로 참으로 어렵고 난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가장 약하고 그래서 ‘속된 영역’(俗)에서 ‘거룩’(聖)을 찾아내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름의 존재사건을 겪지 않고서는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이 비참한 민족의 역사가 “수난의 여왕”으로 “세계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밝혀준 것은 예사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13)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내 머리와 가슴과 씨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파리한 염소 모양으로 나는 씹는 것이 일이었다.”라고 자신이 어떻게 스스로 ‘조선역사’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애썼는지를 밝히고 있다.(14) 이에 더해서 함석헌이 체험한 일련의 존재사건의 정치적 함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일이 그가 행한 기독교전통 해체적인 신앙이해와 구원이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1924년 동경고등사범의 학생으로 입학한 해에 한 반 위인 김교신(金敎臣)을 통해서 우치무라 간초의 무교회주의 예배와 만났다. 무교회주의는 이미 당시 기성의 기독교와는 다른 또 하나의 급진적 개혁체였지만 함석헌은 거기에 가서도 우치무라의 그리스도 이해와는 함께 갈 수 없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에는 문제없는 것 같던 것들이 문제가 됐습니다. ... 그 하나는 나도 자주(自主)하는 인격을 가지는 이상 어떻게 역사적 인간이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담은 자유의지를 가지는 도덕인간에게 대속(代贖)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 깊은 체험보다는 감정의 도취인 것같이 뵈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과 상징과는 혼동하는 것이 있다고 보였습니다. ... 체험은 이성 이상이지만, 모든 체험은 반드시 이성으로 해석돼야 합니다. ... 사람은 이 세계에서는 행동하는 도덕인간인데, 이성에 의한 해석으로 파악되지 않고는 실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석을 거부하는 신비주의는 모두 미신에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15) |
“차라리 선생을 배반할 수는 있어도 나는 나 자신을 배반할 수는 없었습니다.”할 정도로 스승에게서 배웠지만 그를 넘어서갔던 함석헌의 기독교 전통신앙에 대한 물음은 그 후 점점 더 급진적으로 전개되어서 그가 귀국해서 ‘조선역사’의 의미를 탐색해 갈 때는 더욱 심화되었고(“나는 언제까지나 남의 종교를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16) 또한 1940년대로 들어서면서 감옥을 오가면서 여러 불교 경전과 『노자』, 『바가바드기타』, 『장자』등을 읽고 하면서 그는 더욱 더 모든 종교들 속에 내재해 있는 보편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1959년에 썼던 「이단자가 되기까지」라는 글에서 보수적 장로교 정통신앙의 훈련을 받고 자란 그가 어떻게 무교회주의를 배웠고, 그 무교회주의도 포기하지 못했던 정통 기독론의 배타주의적 대속론을 넘어서는지를 밝히고 있다. 양명에게서 이단이란 더 이상 이론의 문제가 아니고 실천의 문제였던 것처럼 함석헌에게서도 유사한 의식이 보인다;
“나는 지금 종교는 하나다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 기분을 발표한 것이 「대선언」이요, 「흰손」이요, 그 이후의 글들이다. ...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는 생각은 케케묵은 생각이다. 허공에 길이 따로 있을까? 끝없이 나아감, 한없이 올라감이 곧 길이지. 상대적인 존재인 이상 어차피 어느 한 길을 갈 터이요, 그것은 무한한 길의 한 길밖에 아니 될 것이다. ...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맘이 바로 이단이람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17) |
나는 일전에 「仁의 사도 함석헌 사상의 유교적 뿌리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함석헌의 기독교와 믿음과 대속에 대한 이해가 배타적인 역사적 예수 중심의 속죄론을 벗어나서 더욱 더 인간의 보편성에 주목하고, 또한 인간 내재의 자발성에 연결시키는 일에서 뿌리 깊은 유교적 영향력을 밝혀 보았다. 함석헌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진실한 유교적 선비로서 “양심의 자연법칙”에 따라, “칠령팔락”(七零八落)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해서”, “아무 죄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고(18) 서술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영향이다. 또한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 義의 문제를 자기 성찰의 핵심 관건으로 삼았던 맹자의 “사생취의(捨生取義)”와 같은 정신이 함석헌이 비판한 “감정적인” 기독교의 값싼 대속 신앙과는 같이 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는 의미에서였다.(19)
미주 |
(미주 1) 『傳習錄』 中 4조, 心一而已,以其全體惻怛而言謂之仁,以其得宜而言謂之義,以其條理而言謂之理。不可外心以求仁,不可外心以求義,獨可外心以求理乎?外心以求理,此知行之所以二也。求理於吾心,此聖門知行合一之敎,吾子又何疑乎! (미주 2) 『傳習錄』 下 26조, 此須識我立言言宗旨. 今人學問,只因知行分作兩件, 故有一念發動,雖是不善,然卻未曾行,便不去禁止. 我今說箇知行合一,正要人曉得一念發動虛,便卽是行了. (미주 3) 쥴리아 칭, 『지혜를 찾아서-왕양명의 길』, 이은선 옮김, 분도출판사 1998, 110쪽 이하. (미주 4) 『傳習錄』 上 6조, 先生曰, 然。身之主宰便是心。心之所發便是意。意之本體便是知。意之所在便是物。如意在於事親,卽事親便是一物。意在於事君,卽事君便是一物。意在於仁民愛物,卽仁民愛物便是一物。意在於視聽言動,卽視聽言動便是一物。所以某說無心外之理,無心外之物。 (미주 5) 『傳習錄』 上 31조. (미주 6) The Philosophical Letters of Wang Yang-ming, tr. and ann. by Julia Ching, South Carolina 1972, p. 98. (미주 7) 『傳習錄』 中 173조, 夫學貴得之心. 求之於心而非也,雖其言之出於孔子,不敢以爲是也,而況其未及孔子者乎?求之於心而是也,雖其言之出於庸常,不敢以爲非也,而況其出於孔子者乎? (미주 8) The Philosophical Letters of Wang Yang-ming, p. 67. (미주 9) 『傳習錄』 中 176조, 夫道,天下之公道也,學,天下之公學也,非朱子可得而私也,非孔子可得而私也,天下之公也,公言之而已矣。 (미주 10)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함석헌 다시 읽기』, 148쪽. (미주 11) 같은 글, 140쪽. (미주 12) 함석헌,「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II」, 같은 책, 214쪽. (미주 13)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같은 책, 419쪽. (미주 14)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한길사, 1986, 제11판, 16쪽. (미주 15)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I」, 『함석헌 다시 읽기』, 154쪽. (미주 16) 함석헌, 「네째판에 부치는 말」,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전집1, 17쪽. (미주 17)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함석헌 다시 읽기』, 301쪽. (미주 18) 같은 글, 274-277쪽. (미주 19) 이은선, 「仁의 사도 함석헌 사상의 유교적 뿌리에 대하여」, 『陽明學』 제33호, 2012.12, 308쪽 이하. |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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