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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의 “心卽理”와 함석헌의 “仁愛의 불길”: 사고의 출발점으로서의 존재사건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왕양명의 “心卽理”와 함석헌의 “仁愛의 불길”: 사고의 출발점으로서의 존재사건

柏道 2019. 7. 30. 19:59



왕양명의 “心卽理”와 함석헌의 “仁愛의 불길”:

사고의 출발점으로서의 존재사건

양명의 良知와 함석헌의 씨알, 생물권정치학(biosphere politics) 시대를 위한 존재사건 (2)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 승인 2019.05.18 19:08




잘 알다시피 15세기 후반부터 명나라(1368-1644) 후기의 유학자 양명이 고통 받고 있던 문제는 前 시대의 거대한 사상 체계가 불러온 삶과 사고의 고사(枯死)였다. 어린 시절부터 참된 인격자(聖人)가 되는 것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아온 인물이 양명이었다. 그러한 추구 가운데서 만난 주희(朱熹, 1130-1200)에 따르면, 우리의 공부는 한 포기의 풀에도 내재해 있는 세계의 원리에 대한 공부에서부터 시작하여 세계 만물과 만사에 대한 공부가 무르익어서 마침내는 깨달음에 이른다고 한다.



왕양명의 心卽理(심즉리)


하지만 양명이 그의 친구와 대나무 밭 앞에서 대나무의 이치(理)를 깨닫기 위해 몇 날을 지세면서 지쳐 떨어질 때까지 애썼다는 일화가 잘 말해주듯이 그는 우리가 그렇게 세상의 만물을 탐구할 수 있을 만큼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 가르침대로라면 인간(心)과 초월(理) 사이의 심연이 너무 깊어서 이것은 유가 정통의 道, 곧 ‘사람은 누구나 다 ‘배움’(學)을 통해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에도 상치된다고 생각했다.

양명이 이렇게 엄청난 지적인 공부의 무게로 절망하고 있을 때 그는 당시 조정의 막후 세력가였던 환관 유근에 대항한 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유배지의 철저한 고독 속에서 공부의 새로운 출발점을 발견한다. 보통 양명의 ‘용장대오’(龍場大悟, 1508)라고 일컬어지는 경험 속에서 그는 인간의 삶은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한 지식을 모두 습득할 만큼 그렇게 한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이론적 지식의 습득만으로는 결코 위대해질 수 없으며, 참된  행위에로 나갈 수 없음을 발견했다.

일반적으로 주희의 ‘성즉리’(性卽理)에 대해서 양명의 ‘심즉리’(心卽理)로 말하여지는 이 명제는 양명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참된 인격에 도달하는 길이 바로 자신의 내면(心)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 어떤 외부적인 조건에 달려있거나 특히 바깥 사물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쌓는 주지주의적 실행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감정, 의지의 일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책도 볼 수 없고, 생사의 문제도 어찌해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돌관을 앞에 두고서 불현듯 깨달은 사실은 인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그토록 밖에서 찾고자 했던 성인(聖人, 참된 인간)의 의미가 이미 자기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理’가 바로 자신의 ‘心’ 속에 내재해 있음을 깨달은 것(悟性自足 心卽理)이다. 그리하여 그 심을 닦아가는 구체적 행동에 의해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발견이다(知行合一).

“사람들이 공부를 시작하려 한 때에는, 토대(출발점)는 가져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만이 그것이 해결점으로 인도되고, 비록 그의 노력이 지속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마치 키를 가지고 있는 배처럼 확실한 방향을 가질 것이다.”(1)

이러한 각성에 근거해서 양명은 이제 ‘성인’(聖人)을 아주 간단하게 그의 마음이 인간적인 욕심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늘의 뜻’(天理)과 하나 된 사람으로 그린다. 그에 따르면 ‘성인됨’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지적이나 도덕적인 능력의 “양”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깨끗함과 관계된다. 그의 유명한 ‘金’을 통한 비유로 그는 자신의 인간 이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순수한 금이 되는 것은 그것의 양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질의 순전도에 달려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성인이 되는 것은 그의 능력이나 재주의 양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천리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배워서 그의 마음이 온전히 천리와 하나가 되게 한다면 그도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 근짜리 금을 1만근의 금과 비교해 봐도 양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지 질에서는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요순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여진 것이다.”(2)

이것은 매우 강력한 인간 ‘가능성’과 ‘평등성’에 대한 선언이다. 일찍이 맹자가 선포한 언어, “만물이 모두 내게 갖추어져 있으니 나 자신을 돌아보아 진실(성실)하면 이 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盡心」上4)라고 한 선언과 유사하게 양명은 인간의 마음이 온전히 하늘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즉 ‘(천)리의 직접성’(die Li-Unmitellbarkeit)의 경험이다.

물론 주희도 인간 인식력의 가능성을 들어서 성인됨의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열어두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 존재를 다시 ‘性’(理)과 ‘氣’의 차원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그 모두를 포괄하는 마음의 선험적인 창발성과 능동성보다는 오히려 후에 채워져야 하는 지식의 량과 아는 것의 범위에 더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성인되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했는데,(3) 양명에게는 이러한 답은 충분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자칫 인간 존재를 다시 태어날 때부터 형이상학적으로 차별을 두는 존재론적 차별화의 근거가 되기 싶고, 인간 배움과 공부를 대상적 사고와 이성적 탐구의 절대 독점에 가두어두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양명에 따르면 효도하는 마음과 충성하는 마음이 있어서 孝의 원리(理)가 있고 忠의 원리가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효나 충의 원리가 내 마음 밖의 다른 곳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내 마음이 부모님을 봉양하는 일에 접하게 되면 거기서 효의 원리가 나오고, 임금을 섬기는 일과 관계되면 거기서부터 충의 원리가 나온다는 것이다.(4)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야말로 만물(萬物)과 만사(萬事)의 근원이 되고, 뭇 이치가 갖추어져 있어서 온갖 일이 거기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마음 밖에 이치가 없고, 마음 밖에 일이 없다.”(心外無理, 心外無事)라는 양명의 새로운 깨달음은 이제부터 그의 모든 삶과 사고의 토대로 작용한다.(5) 유교 전통의 오랜 주지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양명은 한 번은 곁에 샘이 있는 연못가에 앉아 있다가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 마음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떻게 그 마음이 천리와 도로서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일과 사물을 낳는 창조자인지를 생생하게 밝혔다. 즉 그는 인간의 마음이란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근원이 없는 호수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비록 작지만 끝없이 마르지 않는 근원을 가지고 있는 ‘샘물’과 같은 존재라고 가르쳤다.(6) 여기서 그는 우리 마음의 “생의”(生意, 생명의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이 우리 마음에서 무궁무진하게 끝없이 흘러나오는 생명의지, ‘낳고 살리는 생명의 힘’(生物之理)과 창조력, 이데올로기처럼 죽어있는 또는 죽이는 이치가 아니라 살아있어서 낳고, 살리고, 창조하는 “생리”(生理)를 말하는 것이다. 양명의 이러한 역동적인 심 이해는 그가 나중에 그 심의 본체로서의 ‘양지’(良知)에 대한 의식을 뚜렷이 한 후 우리 마음의 선한 본성으로서 우주적 ‘역’(易)과 일치시키는 사고에서 더욱 웅장하게 전개된다. 즉 『역경易經』의 “하늘과 땅의 큰 덕은 生이라고 한다”(天地之大德曰生)라든가, “낳고 살리는 것을 일러 역이라고 한다.(生生之謂易) 등의 비전을 말한다.



함석헌의 “인애(仁愛)의 불길”


함석헌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렇게 뚜렷하게 양명이 용장에서 겪은 것과 같은 극적인 존재사건의 순간을 지적하기가 쉬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1923년 일본 대지진 사건을 계기로 겪었던 일련의 경험들이 이와 유사한 존재의 뿌리에 대한 경험이 되지 않는가 생각한다. 즉 그가 나중에 “씨알” 사상으로 깊게 전개하게 되는 ‘민중’과 ‘인민’의 발견과 관계되는 ‘생명의 뿌리’(仁)에 대한 경험을 말한다.

▲ 함석헌 선생이 일본 체류 중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동경 우에노 공원의 ‘시노비즈 못 가’(不忍池) 현대 모습 ⓒGetty Image

그는 1973년에 쓴 「내가 겪은 관동대진재」라는 글에서 그가 어떻게 “신기하게 생각을 아니하려도 아니 할 수가 없다”로 할 정도로 동경 우에노 공원의 ‘시노비즈 못 가’(不忍池畔)에서 밤새도록 떨면서 신기하게도 방향을 바꾼 바람과 물 펌프의 도움으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지게 되었는지를 적고 있다.(7) 그는 그렇게 자신이 목숨을 건진 사건을 “그 사람들이 산 것은 나 하나 살리기 위해서요, 나를 살려준 것은 증거할 것이 있어서 하신 일 같이만 뵌다.”고 고백한다.(8)

하지만 그 사건은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건진 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50년 만에 처음으로 밝히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당시 그 화마 속에서, 언제 덮칠지 모르는 화마의 습격에 떨면서도, 자신 속에도 바로 그 실제의 화마처럼 커다란 “리바이던”의 본능과 충동의 불길이 잠자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정말 무서운 것은 하늘에도 있지 않고 땅에도 있지 않다. 지진도 불도 아니다. 내 마음이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스스로도 부끄럽고 두렵지만 할 수 없었다. 저 사람의 손에 반지가 있고 팔목에 시계가 있는 것도 뵈고 저 여자 얼굴이 예쁘고 그 보드라운 살갗이 뵈는 것이 사실이다. … 왜 이럴까, 나 스스로 반문하지만 … 붙는 불을 몽둥이로 때리면 점점 더 뛰어 번져 나가듯 그것을 쓸어버리려 하면 할수록 더 펄펄 일어나고 섞이고 끓고 고여 돌아갔다. 그것이 지진보다 더 무서운 지진이요 불길보다 사나운 불길이었다.”(9)

하지만 거기서 바로 그 고통의 시간을 뒤로 하고서 새벽이 동터오면서 그는 깊은 새 생명의 탄생을 경험했다고 밝힌다. 즉 그러한 죽음과 죽임의 껍데기 속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의 “새싹”을 경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 경험을 다음과 같이 언술한다.

“예수께서 음행하다 잡힌 여인과 고소하는 바리새인을 놓고 말없이 땅에 글씨를 쓰고는 지우고 지우고는 또 쓰셨다 하지만,(요8:3-11) 그 대 무슨 글자를 쓰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시노비즈 이케가의 그 밤에 밤새도록 내 마음 밑바닥 모래 위에 백팔번뇌의 가지가지 글자를 쓰고는 또 지웠다. 이튿날 아침 먼동이 환난의 하늘 위에 훤히 터올 때 친구들의 손을 잡고 내 하숙으로 가자 일으키며 나는 지옥에서 놓여나오는 느낌이 있었다. 내 양심은 남은 듣지도 못할 가는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나는 터진 땅 밑에서 무슨 새싹이 삐죽이 올라오는 것 같음을 느끼며 피난민 사이를 빠져나갔다.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없다. 50년간 어디서도 누구보도도 해본 일이 없다. 오늘이 처음이다.”(10)

이것은 그가 자신 안에서 직시한 선악의 깊은 갈등 가운데서도 마침내 우리 존재의 더 깊은 근원인 선의 뿌리, 존재의 근거, 인간성과 생명의 근원을 체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은 평북 용천군에서 “물 아랫놈들”이라는 멸시를 받는 바닷가에서 살았다. 선한 부모님 밑에서 특히 “인간다운 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올라가자는” “보통이 아닌” 사람이었던 어머니와 “어려서부터 양심이 아주 날카로운 분”이었던 아버지의 양육을 받고 자랐다.

이와 더불어 고향에 일찍 들어온 장로파 개신교의 덕일학교를 다녔고, 그 후 오산학교 시절의 교육을 통해서 기독교의 “죄에서의 해방”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 자신 속에 더 큰 욕망의 불길이 타고 있는 것을 직시했다. 하지만 그 무서운 고뇌 속에서 그 고뇌를 뚫고 올라오는 인간성의 새싹을 보았다. 그래서 그 순간에 마치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안심함을 느끼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그곳을 벗어나났다고 고백한다.

나는 이러한 함석헌의 체험이 앞에서 우리가 서술한 양명의 용장대오와 유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양명의 경우처럼 그렇게 극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몇 년 전에 3·1 만세운동을 뼈아프게 겪었고, 이후 오산학교에서 ‘생각하는 인생’을 시작했지만 마치 “전쟁 포로에 잡혀가는” 심정으로 일본 유학을 와있던 그가 양명이 용장대오의 심즉리의 체험을 통해서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의 본래적인 선함과 인간 누구나의 마음 안에 놓여있는 거룩(理)의 씨앗을 보았듯이 나는 함석헌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성’의 씨앗에 대한 신비한 경험이었고, 모든 생명의 핵이 되는 ‘인’(仁)의 씨앗에 대한 경험이었다.

함석헌은 이 시노즈비 못가에서의 경험에 더해서 관동대지진 사건과 관련한 또 다른 경험도 서술한다. 즉 그때까지 아주 고루하고 “감상적인 데는 하나도 없는” 건조한 “유교식의 군자”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자식의 생사를 확인하고서 답하는 모습을 보며 평소에 내심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고서 한 경험을 말한다.

“사랑이 지극하신 줄 모른 것 아니지만 평소에 말에는 아니 나타내시는데 그렇게까지 애절하게 하셨을까, 겉과 속의 차이가 너무 심한 데 놀랐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동경지방의 땅이 쭉 갈라지고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나온 걸로 알았다고 했지만, 나야말로 정말 도덕주의의 지각(地殼)이 터지고 혼이 지심(地心)에서 폭발해 나오는 인애(仁愛)의 불길에 내 몸이 타버렸다.”(11)

함석헌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발견한 이러한 ‘인애의 불길’과는 대조적으로 당시 지진이 나자 평소의 일본인들이 어처구니없이 미쳐서 “조선놈 사냥”을 자행하면서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죽이고, 임신한 여자까지 찔러 죽이는 것을 보고서 “땅이 흔들린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흔들린 인간성이 정말 놀랍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것도 지진으로 인해 터져 올라온 불길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내가 아버지에게서 본 것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불길이다.”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함석헌은 20대의 초반에, 그래도 오산중학교라는 사립학교를 다녀서 “원수의 나라를 내지, 원수의 말을 국어라고, 시키는 대로 하며 입을 헤벌리고 걸어다니”는 “멍청이”는 가까스로 면한 상태이지만, 마치 “전쟁 포로에 잡혀가는 일”로 여겨진 일본유학을 가서 아직 들어갈 학교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 근본적인 경험을 한 것이다.(12) 그것은 양명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펼쳐질 그의 삶과 사상에서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존재사건을 겪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 호에 계속

미주

(미주 1) 『傳習錄』上, 103조, 先生謂學者曰,爲學須得箇頭腦, 工夫方有看落。縱未能無間,如舟之有舵,一提便醒. 본 논문에서 따른 양명의 『傳習錄』은 김흥호의 『양명학공부』1, 2, 3 이 사용한 臺灣商務印刷館의『傳習錄』이다. 그 해석에 있어서는 Instructions for Practical Living and Other Neo-Confucian Writings by Wang Yang-Ming, Trans. by Wing-tsit Chan,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을 많이 참조하였다.
(미주 2) 『傳習錄』上 100조, 蓋所以爲精金者,在足色,而不在分兩。所以爲聖者,在純乎天理,而不在才力也。故雖凡人, 而肯爲學,使此心純乎天理,則亦可爲聖人。猶一兩之金,此之萬鎰。分兩雖懸絶,而其到足色處,可以無愧。故曰人皆可以爲堯舜者以此。
(미주 3) 전목, 『주자학의 세계』, 이완재/백도근 역, 이문출판사 1989, 81쪽 이하.
(미주 4) 『傳習錄』中 133조: 故有孝親之心,卽有孝之理,無孝親之心,卽無孝之理矣。有忠君之心,卽有忠之理,無忠君之心,卽無忠之理矣。理豈外於吾心邪?
(미주 5) 『前習錄』上 32조: 虛靈不昧,衆理而萬事出。心外無理。心外無事。
(미주 6) 『傳習錄』上 68조: 「與其爲數頃無源之塘水,不若爲數尺有源之井水,生意不窮」。時先生在塘邊坐。傍有井,故以之喩學云。
(미주 7) 함석헌, 「내가 겪은 관동재진재」, 노명식 전집 4, 『함석헌 다시 읽기』, 책과  함께 2011, 180-181쪽.
(미주 8) 같은 글, 180쪽.
(미주 9) 같은 글, 182쪽.
(미주 10) 같은 글, 182쪽.
(미주 11) 같은 글, 192쪽.
(미주 12) 같은 글, 165-167쪽.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