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과 큰 배움
앞에서 살펴본 양명의 비전과 이상이 400여년을 지나서 한국의 함석헌에게 아주 친밀하게 전달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적으로 함석헌은 자신의 스승 유영모가 유교 경전 『대학(大學)』의 처음 구절(大學之道在明明德 在親民在止於至善)을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무름에 있나리라”라고 옮겼다고 하면서 그 ‘대학’(大學)을 자신의 방식으로 “한 배움”, “큰 것을 배움”, “하나를 배움”으로 양명의 ‘대인’(大人)의식과 유사하게 풀었다.(미주 1) 그렇게 양명의 양지와 치량지의 사상은 함석헌의 사상과 참으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특히 그가 삶의 후반기로 갈수록 더욱 의식하고 다듬고 집중한 씨알 사상과 그 씨알을 온전히 기르기 위해 시도한 모든 활동, 종교, 농업, 교육, 정치, 사회문화의 활동과 비전속에서 잘 녹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함석헌은 자기 자신에게서 그가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에,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관동대지진의 경험 전에 “그때 이미 씨알로서의 알갱이는 넣어 주심을 받은 것 있었노라고 믿고 있다”고 했다.(미주 2) 하지만 양명이 맹자의 양지 개념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뚜렷한 의식을 통해서 새로 ‘양지’를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인간 속의 생명의 씨앗(仁/性)을 특히 “씨알”로서 뚜렷이 의식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고 보고자 한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10년 동안 교사로 있다가 1938년 일제가 모든 학교에서 일본어만을 사용할 것을 강요하자 더 이상 학교에 남아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사임한다. 또한 창씨를 거부하고 더 근본적으로 씨알의 삶을 사는 농사꾼을 기르는 농사학원을 맡기도 하고, 1942년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나온 후는 자신 스스로가 더욱 철저히 농사꾼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다.(미주 3) 그의『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보면 그는 한국인들의 인격적 특성으로 仁의 “착함”, ‘차마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을 들었다.(미주 4)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짓는데 많이 쓰는 단어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순(順), 순(淳), 화(和), 덕(德), 명(明), 양(良), 숙(淑)’ 등이 모두 착함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국민적 이상을 드러내주는 일이라고 지적한다.(미주 5) 비록 그 이상이 당시 일제 치하에서 볼 때 오랜 고난을 겪으면서 많이 상한 점도 없지 않지만 결코 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래서 그는 그 인간성의 씨앗을 민족을 살리고 세계를 살리는 일에서 “일루의 희망”이라고 지적했다.
씨알과 인(仁), 참된 종교
이렇게 사람에게서 ‘알맹이’와 ‘씨앗’(桃仁), ‘알짬’이고, 동물에서 하면 ‘활동하는 생명력’이고, 사람에게 하면 사람 된 본 바탈이 된다고 하는 인(仁)을 함석헌은 점점 더 ‘씨알’로 보았고, 1970년에는 비록 70대의 노년에 접어들었지만『씨알의 소리』라는 잡지를 내게까지 된다. 1973년에 쓴「내가 맞은 8·15」라는 글에서 그는 그 씨알에 대한 믿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8·15는 실패람 실패다. 일제 밑에 종살이하던 민중은 해방의 이름은 얻었으나 실제로는 없다.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지 자유는 여전히 없다. 그러나 실패면서도 얻은 것이 있다. 첫째, 씨알의 불사성(不死性)이 드러난 것이다. 일제 말년에 그 정치가 강요하는 대로 모든 것을 내놓는 것을 보고 우리는 모두 거의 죽은 줄로 알았다. 그들은 그 말을 내놓고 글을 내놓고 모든 고유한 풍속을 내놓고 심지어 제성까지도 내놨다. 그러나 해방이 한번 올 때 그들은 마치 흐린 물결 속에서 올라오는 바위처럼 그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일어섰다. 마치 일제 36년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 그들 스스로 제 속에 죽지 않는 생명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것이 큰 소득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비관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7) “… 나는 결코 그것(수십 년 서로 다른 체제 밑에 있어 온 것)을 두려워할 것 없다고 한다. 민중은 마치 물 같은 것이다. 지극히 유약해서 칼로 자르면 아무 저항 못하고 잘리는 듯하다. 그러나 칼을 뽑는 순간 곧 다시 하나가 된다. 몇 천백 년을 있어도 그 본성은 변함이 없다. 그것이 이번 해방으로 증명이 됐다. 오늘의 민중은 옛날의 민중이 아니다. 민중은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강하다. 제도나 이데올로기는 민중을 선하게 못하는 대신 근본적으로 타락도 시키지 못한다. … 정치는 힘에 살지만 민중은 믿음에 산다. 믿음은 모든 상처를 씻어 낫게 한다. 정치는 재생하는 법이 없지만 씨알은 부활한다. … 나는 지금도 그들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 비판으로 민중 속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민중을 믿지 않고는 전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마치 신을 믿지 않고는 신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8) |
이러한 함석헌의 씨알과 민중과 전체에 대한 믿음은 그의 칭의론이 점점 더 그리스도성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되는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는 1953년「대선언」과「흰손」의 두 시로 자신의 신앙이 무교회주의의 복음주의도 넘어서서 “이단자”라는 칭호도 불사하면서 보다 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그리스도론으로 향하는 것을 널리 공표했다.
▲ 경찰에 저지당하고 있는 함석헌.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빌딩.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그는 예수가 “나를 믿으라” 한 말을 “떡을 받아들이듯이 좋아서” 그대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은 바울이 싸우다가 믿은 것처럼 “싸움으로 믿”는데, 즉 자신을 믿으라고 하는 예수에게 대어 들어서 예수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했다면 그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우리 육의 흙 속에 잠자고 있는 아들의 씨를 불러내어 광명 속에 피게 하기 위하여서”라는 의미로 이해한다고 밝힌다.(9) 그는 “속죄의 근본 뜻은 대신에 있지 않고 ‘하나됨’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10) 또한 “진리는 제 스스로 맘속에 찾는 것입니다”라고 쓰고 있다.(11)
그에 따르면 “나와 하나님을 맞대주지 못하는 종교, 참 종교가 아니다.”(12) 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하라.”라고 외치면서 우리나라에서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민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직접 만나게 하지 못했다고 일갈한다. 거기에 “씨알의 설움”이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함석헌이 급진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민중과 씨알의 직설과 하나됨을 외치는 근거는 그의 다음과 같은 씨알 이해였다;
“민중이 뭐냐? 씨알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알사람이다. 알은 실(實), 참, real이다. 임금도, 대통령도, 장관도, 학자도, 목사도 … 죄수도 다 알은 아니다. 실재(實在)는 아니다. … 정말 있는 것은, 알은 한 알뿐이다. 그것이 알 혹은 얼이다. 그 한 알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선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 … 알사람, 곧 난 대로 있는 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전체다. 그것이 民이다.”(13) |
씨알과 생각하는 힘, 통유(通儒)로서의 함석헌
함석헌이 씨알에 집중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그것은 우선 “물은 바다로 가는 것이라면 역사는 씨알로 간다”라고(14) 할 정도로 세계 삶의 기본과 토대를 민(民)으로 발견한 것의 의미이다. 함석헌은 1958년 “6.25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상고하는 일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외쳤고, 그것을 다시 1972년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라고 한 데서도 잘 드러나듯이 씨알의 핵심과 일을 “생각하는 일”(理)로 본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양명이 존재와 생명의 핵을 ‘양지’(선한 사고력)로 본 것과 매우 상통한다. 아무리 천한 상황(예를 들면 감옥)에 있어도, 또는 어떤 외형적인 지위(임금이나 대통령)에도 좌우되지 않고 인간과 존재의 핵을 ‘생각’(知/理)할 수 있는 능력으로 파악한 함석헌은 그것은 “물질 속에 와 있는 정신”이고 “유한 속에 있는 무한”이며, “시간 속에 와 있는 영원”이라고 강조한다. 그러한 정신의 핵을 깨달을 때 몸도 잘 지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 정신 속의 신적 씨앗, 낮고 낮은 씨알 속에 있는 생각하는 힘을 그토록 소망했던 민족의 독립과 자주, 민주화와 문화 창달의 길로 발견한 함석헌은 이제 그 씨알을 기르는 일에 매진한다. 일찍부터 자신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교육·종교·농촌”의 셋을 하나로 붙여서 생각해왔다고 하는 그는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이라는 맹자의 언어와 관련해서 이 세상이 타락하기 전까지 “신성(神聖)이라는 것이 셋이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그 세 가지란 바로 “가정의 신성, 노동의 신성, 그리고 교육의 신성”이라는 것인데,(15) 참으로 깊은 혜안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거론된 ‘가정’과 ‘노동’, ‘교육’은 보통 신성한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종교나 정신, 철학이나 정치에 비해서 한 없이 속되고 이차적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어온 영역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로 그러한 일과 영역을 가장 신성한 영역으로 보고서 거기에 몰두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초월을 내면화하는지는 잘 알 수 있게 한다.
그는 결코 성직자가 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체제로서의 학교 교사로서도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일생을 자신과 민족의 나아감과 됨, 올라감을 위해서 학생이면서 동시에 교사로서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사상은 “최소한적 종교”(minimal religion) 또는 “세속적 종교”(a secular religion)로 이름 지어지는 유교적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과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의 실천과 너무도 잘 연결된다.(16) 그런 맥락에서 나는 함석헌이야말로 한국이 낳은 ‘진유’(眞儒)이고, 또한 그의 정신이 이러한 끊임없는 발걸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가면서 점점 더 좁다란 인간중심주의와 민족중심주의도 넘어서서 온 세계의 인류, 온 우주의 생명을 포괄하는 진정한 ‘통유’(通儒)가 되었다고 이해한다.(17)
씨알과 인류 세계
그가 1961년부터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해서 사람들은 다시 그를 퀘이커교도로 묶으려고 하지만 그가 스스로 “나는 퀘이커가 되자고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닙니다. 퀘이커만 아니라 무엇이 되자고 온 것도 아닙니다. 종교가 나 위해 있지 내가 종교 위해 있는 것 아닙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18) 라고 밝혔다. 따라서 나는 함석헌을 그렇게 한정된 규정으로 묶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즈음 그가 5·16의 의미를 평가하는 글(“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1961.6)에서 그 참 의미를 엿볼 수 있다고 여긴다. 즉 함석헌은 당시 한국 사회가 5·16 등으로 겪는 혼란은 더 큰 “세계 역사의 흐름”의 차원에서 이해해야지 단순히 국내적으로 군인의 총칼로 진정시킬 수 없다고 일갈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시의 혼란은 이제 인류의 삶은 “민족”이 더 이상 도덕의 마지막 표준이 될 수 없고, 지금까지 당연시되던 “소유권”의 신성에 대한 물음이 강하게 제기된 것이며, 또한 이날까지 인류 삶의 토대였던 “가정”이 크게 흔들리게 되면서 야기된 문제라고 한다.(19) 그러므로 이러한 “인류사회의 캠프를 버텨오던 세 기둥”의 문제를 푸는 일에 진정한 혁명의 성공여부가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잘 나타나듯이 함석헌은 이즈음에 이미 좁은 민족주의도 벗어나고 있었으므로 퀘이커와의 연결을 그러한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더 넓게 세계와 연결하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겠다.
‘민족주의’, ‘소유권’, ‘가족’의 문제는 50여년이 지난 21세기 오늘 우리 시대에는 이제 모두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인류 삶과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함석헌은 이렇게 선각자적으로 동아시아의 작고 가난한 변방에서 일어난 사건 속에서 이미 그러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간파했는데, 그럴수록 그는 씨알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육을 중시한다. 그는 “국민을 될수록 넓은 눈을 가지도록, 높은 이상을 가지도록, 깊은 신앙을 가지도록 길러야 할 것이다. 분명히 잊지 말 것, 민중을 기르는 일이다. 호랑이 넋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다.(20)
씨알과 참된 교육
그가 중시하는 교육이란 단순히 겉옷의 치장으로서의 교육이 아니라 그 내면의 혼속에 생명의 힘을 기르는 것을 말하고, “몸에서 나와서 나의 근본 바탈을 찾으란” 의미의 교육이며, 그러한 교육은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라는 것은 제 바탈을 찾은 자의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 교육이라고 밝힌다.(21) 그는 “생명 그 자체가 힘”이라고 강조하는데, 이러한 통찰은 양명과 한국의 정하곡이 양지를 천지만물의 낳고 살리는 우주적 ‘생리’(生理)와 ‘생의’(生意)의 놀라운 힘으로 파악한 것과 매우 잘 상통한다.
이렇게 궁극의 하나님을 우리 안의 살리는 힘, 얼과 “속알”로 보는 함석헌은 왕양명의 유명한 「대학문(大學問)」의 앞부분을 “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한글로 풀어내면서 나름의 해석을 붙였다. 원래 『예기(禮記』)의 「예운편(禮運篇)」에 나오는 이야기임을 다시 지적하면서 양명이 거기서의 ‘성인)聖人)’을 ‘대인(大人)’으로 바꾼 것을 다시 “한 사람”이라고 옮기고자 한다.
그 이유는 “우리말에 큰보다는 한이 더 좋아서 ... 크다면 나이 들고 몸이 큰 것을 말하지만, 한은 그 속으로 마음으로 큰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22) 이 양명의 “옛글”에 대한 해석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도 양명과 같이 대인이 이렇게 우주를 한 몸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슨 “제 사사 생각으로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본시가 그렇다. 우주가 하나의 산 한 몸이다.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본질적인 것이 仁이다”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23)
그러면서 함석헌은 오늘 문명의 제일 큰 걱정이 “세계의 원자화”라고 지적하고, 대신에 “우리나라 옛날의 선비, 온달, 처용, 검도령, 원효, 모든 화랑 하는 사람들이 우주는 하나로 살아있다는 것을 믿었다”라고 밝힌다.(미주 24) 함석헌이 이렇게 양명의 대인 정신을 크게 환영하면서 다시 “옛글 고쳐 씹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생각하는 단계”로 들어가면서 특히 “동양에서 희망”을 보기 때문이고, 그 동양의 옛글 속에서 “시간을 뚫고 살아 있는 생명”을 특별히 “젊은이에게 읽히자”는 뜻이었다고 한다.(25)
그는 여기서도 “생명이란 본래 불효자다. 집 나가는 아들이다. 젊은 세대가 제 말을 버리고 낡은 세대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배우는 수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해석의 권위주의, 절대주의, 귀족주의, 고정주의 등을 타파할 것을 강조했다.(26) 그는 2천 년 전 “씨알 중의 으뜸 씨알”이었던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오늘날 씨알인 우리들도 “전체를 살리기 위해” 옛글들은 새롭게 고쳐 읽고서 “그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한다.(27) 이는 참으로 앞서나간 예수 이해이고, 오늘날 포스트모던적으로 전개된 어떤 예수 이해보다도 앞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십자가와 경전과 새 시대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 더불어 간다.
씨알과 덕, 한국적 보편종교
그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맨 마지막에서 “덕(德)”이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덕이란 “자기 속에 전체를 체험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앞으로 인류가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데 요청되는 “새 시대의 종교”와 “미래의 종교”는 “노력의 종교일 것이다”라고 갈파했다.(28) ‘노력의 종교’는 더 이상 생각 없이, 대속을 구원의 보증수표처럼 되뇌면서 그러나 실질의 삶에서는 ‘무신론자로서’ 물질만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이지(理知)의 종교시대”로 접어든 인류가 특히 동양 종교에게서 깊게 배워서 “노력의 과정 그것을 존중하고”, “믿음은 곧 그대로 생활인” 종교를 말한다. 생각하는 힘과 실천하는 힘이 하나로 된 종교, ‘일상’에서 ‘보편’을 보고, ‘오늘’에서 ‘영원’을 보는 통찰이다.
나는 여기에서 다시 함석헌 사상에서의 깊은 신유교적 흔적을 본다. 이성(理)과 신앙이 연결되고, 한없이 정치적이고 교육적이지만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온 세계를 靈과 정신을 향한 “한 개 산 생명운동”으로 보는 “생명사관(生命史觀)”의 종교이해는 바로 앞에서 신유교 사상가 양명이 그의 「발본색원론」이나 「대학문」에서 웅장하게 펼친 우주적 큰 하나 됨을 향한 대인의 학문과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29)
함석헌은 “유교야말로 현실에 잘 이용된 종교다”라고 했다.(30) 또한 “세계의 통일성을 믿는 사상이 나와야 한다”고 갈파했다.(31) 그 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뜻’(志)을 갖는 일에서 그 ‘뜻’(志)이란 ‘선비’(士)의 ‘마음’(心)이고, 다시 그 ‘선비’(士)란 바로 ‘열’(十)에서 ‘하나’(一)를 보고, ‘하나’에서 ‘열’을 보는 사람이라고 지시했다면,(32) 그것은 참된 대학과 학자의 일은 바로 우주의 큰 하나 됨을 지시해 주고, 그 일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는 사람이라는 비전을 밝혀주는 것이다.
또한 바로 이렇게 크게 통합하는 정신, 만물을 하나로 보는 비전에 민감한 그가 자신의 마지막의 희망과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길을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라고 했다면 그는 오늘날은 바로 모든 씨알들이 그렇게 ‘선비’의 마음으로 거듭나는 일을 바랬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으로 한국이 낳은 ‘참 선비’였으며 우리 시대를 위해서 긴요히 요청되는 ‘보편종교’의 화신이었다고 이해하고자 한다.(33) 그의 새로운 보편종교에서의 주인공인 씨알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믿음, 그의 사상이 가지는 “근본적인 민중주의적 성향”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면서 나는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는 씨알에 미쳤습니다. 죽어도 씨알은 못 놓겠습니다. 나 자신이 씨알인데, … 참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종자 갓은 베고 죽는다“고, 우리 마을에서 표본적인 농부였던 우리 할아버지한테 들었습니다. … 나는 이 씨알을 믿습니다. 끝까지 믿으렵니다. 믿어주지 않아 그렇지 믿어만 주면 틀림없이 제 할 것을 하는 것이 씨알입니다. … 씨알을 믿는다는 말은 그대로 내버려두란 말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가르쳐야 합니다. … 민중이 스스로 제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각 못한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 씨알은 착하지만, 착하기 때문에 잘 속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집에는 늙은이가 있어야 합니다. 늙은이는 그 집 양심의 상징입니다. 나라에도 늙은이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 『씨알의 소리』를 해보자는 것은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나라에 늙은이 없으면, 못생긴 우리끼리라도 서로 마음 열고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우리 다음 세대는 늙은이를 가질 것입니다. 그밖에 어느 성인이 오신대도 다른 길을 제시하지 않을 것입니다.”(34) |
마무리하는 말 : 존재사건과 혁명, 지속적인 씨알의 발견
함석헌 선생은 8·15와 4·19, 5·16 등의 정치적 대변혁을 겪고 나서 “혁명”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밝혔다. 나는 이 중에서 1979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재출간된 책의「인간혁명」이라는 글에서 지금까지 양명과 함석헌 존재사건의 정치적 함의에 대한 지금까지의 숙고를 참으로 잘 요약해 주는 글을 만났다;
“민족 개조를 하려면 정치와 종교가 합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아개조를 하려면 사람과 하나님이 합작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민족의 씨가 나요, 나의 뿌리가 하늘이다. 그러기 때문에 참 종교는 반드시 민족의 혁신을 가져오고, 참 혁명은 반드시 종교의 혁신에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혁명의 명은 곧 하늘의 말씀이다. 하늘 말씀이 곧 숨·목숨·생명이다. 말씀을 새롭게 한다 함은 숨을 고쳐 쉼, 새로 마쉼이다. 혁명이라면 사람 죽이고 불 놓고 정권을 빼앗아 쥐는 것으로만 알지만 그것은 아주 껍데기 끄트머리만 보는 소리고, 그 참뜻을 말하면 혁명이란 숨을 새로 쉬는 일, 즉 종교적 체험을 다시 하는 일이다. 공자의 말대로 하면 하늘이 명(命한 것은 성(性), 곧 바탈이다.”(35) |
이 말 속에 잘 드러난 대로 종교와 정치, 교육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서로 짜여 있어서 어느 하나가 부재하고서는 나머지도 잘 기능하지 못한다. 그 큰 통합의 실재와 방식을 500여 년 전의 양명이 체험했고 거기서 나오는 정신의 힘이 가지는 파급력과 영향력을 함석헌도 일면 마셨다. 다시 그 함석헌은 또 다른 고유한 방식으로 새로운 숨을 쉬면서 한국 사회를 새롭게 하였고,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계속되면서 이제 세계로 뻗어나가서 참으로 오늘 인류의 ‘보편종교’가 필요로 하는 때에 인류의 큰 사표가 되고 있다. 그는 “지금 인류가 가장 원하는 것은 새 종교가 아닐까?”라고 물었다.(36) 또한 “정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을 찾으면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 모든 것이 정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37)라고 했다.
이렇게 그는 큰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자신의 부인, 황득순 여사가 1978.5.8. 숨지고 나자 “나의 가장 큰 잘못은 그를 내 믿음의 친구로 생각하지 못한 점입니다”라고 고백하였다.(미주 38) 그들의 자녀들이 어머니 황득순 여사에게 “나야 뭐”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할 정도로 철저히 ‘자신을 버리면서 남을 따랐고’(捨己從人), “스물에 가까운 큰 가족에 밤낮 손님이 끊이지 않는 집의 맏며느리로서 불평 한 번 없이 섬김으로만 살아온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선여인동’(善與人同,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선을 행함)과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사람이었던 그녀야말로 그가 그토록 주장하고 강조해온 씨알 중의 씨알이었을 것인데, 어떻게 그러한 그녀를 함석헌은 잘 알아보지 못했을까를 나는 물어 본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옷깃을 여미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의 주기도문을 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 주변과 삶에서도 아직도 우리에 의해서 하늘의 거룩한 씨알로 발견되지 않고 있는 존재가 누가, 무엇으로 있는지를 잘 살피고 돌아볼 일이다.
미주 |
(미주 1) 함석헌, 「한 배움」, 『함석헌 다시 읽기』, 504쪽. (미주 2) 함석헌, 「내가 겪은 관동대진재」, 같은 책.171쪽. (미주 3) 함석헌, 「내가 맞은 8·15」, 같은 책, 304-306쪽. (미주 4)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324쪽. (미주 5) 같은 책, 68쪽. (미주 6) 같은 책, 323쪽. (미주 7) 함석헌, 「내가 맞은 8·15」, 『함석헌 다시 읽기』, 319쪽. (미주 8) 같은 글, 321쪽. (미주 9) 함석헌,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 『함석헌 다시 읽기』, 467쪽. (미주 10) 같은 글, 475쪽. (미주 11) 같은 글, 479쪽. (미주 12) 함석헌, 「씨알의 설움」, 『함석헌 다시 읽기』, 527쪽. (미주 13) 같은 글, 529쪽. (미주 14) 같은 글, 530쪽. (미주 15)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2』, 함석헌 저작집 9, 275쪽. (미주 16) Mikhail Epstein, Alexander Genis, and Slobodanka Vladiv–Glover, Russian Postmodernism : New Perspectives in Post-Soviet Culture, NewYork/Oxford: Beghahn Books, 1999, in : Charles Taylor, A Secular Age,, p. 533-535; 이은선,『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성과 여성주의』, 도서춮판 모시는 사람들, 2009, 200쪽. (미주 17) 이은선, 「仁의 사도 함석헌 사상의 유교적 뿌리에 대하여」, 325쪽. (미주 18)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I」, 『함석헌 다시 읽기』, 133쪽. (미주 19) 함석헌,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함석헌 다시 읽기』, 622쪽. (미주 20) 같은 글, 623쪽. (미주 21) 함석헌, 「옷을 팔아 칼을 사라」, 『함석헌 다시 읽기』, 548-549쪽. (미주 22) 『씨알의 옛글풀이』, 함석헌 저작집 24권, 457쪽. (미주 23) 같은 책, 458쪽. (미주 24) 같은 책, 463쪽. (미주 25) 같은 책, 25쪽. (미주 26) 같은 책, 28쪽. (미주 27) 같은 책, 30쪽. (미주 28) 『새 시대의 종교』, 함석헌 저작집 14권, 74쪽. (미주 29) 김세정, 『왕양명의 생명철학』, 청계, 2006, 189쪽 이하 참조. (미주 30) 함석헌, 『인간혁명의 철학』, 함석헌전집 2, 83쪽. (미주 31) 같은 책, 99쪽. (미주 32) 『뜻으로 본 한국역사』, 354쪽. (미주 33) 김조년, “함석헌의 그리스도교 이해(1)”, 『함석헌 연구』, 제1권 제1호, 2010 상반기, 씨알사상연구원, 105쪽. (미주 34) 함석헌, 「나는 왜 『씨알의 소리』를 내나」, 『함석헌 다시 읽기』, 657-664쪽. (미주 35) 함석헌, 『인간혁명의 철학』, 80쪽. (미주 36) 함석헌,『뜻으로 본 한국역사』, 362쪽. (미주 37) 함석헌, 「한 배움」, 『함석헌 다시 읽기』, 508쪽. (미주 38)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2』, 함석헌 저작집 9권, 213쪽. |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