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김흥호 목사님의 글 (관념을 떠나 실존의 세계로) 본문
김흥호 목사님의 글 (관념을 떠나 실존의 세계로)
2019. 4. 17. 10:10
관념을 떠나 실존의 세계로
인간은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사람의 생각도, 감정도, 의지도, 욕구도 모두 문화의 결정적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의지가 문화의 전통 없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행위도 학습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문화 속에 있다는 것은 관념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다.
관념 속에서 산다는 것은 말 속에서 산다는 뜻이다.
사람은 배운 말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전달한다.
말은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말은 우리가 배울 때 벌써 실재와 독립된 것이다.
말은 실재와 나 사이에서 어느 정도 실재를 대표하면서 그와는 독립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있는 돈과 마찬가지로
말은 하나의 개념으로써 우리 지식의 근거가 된다.
말과 비슷한 것이 도구다.
도구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자연을 소재로 하여 하나의 독립된 형상이 되고,
인간의 목적에 적응하여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도구는 기능을 가진 관념존재다.
문화의 세계에서는 인간도 하나의 기능으로 처리되어 어떤 목적에 쓰이는 도구로서 관념존재가 되기도 한다.
도구와 비슷한 것이 생활양식이다.
인간관계는 역사적으로 성립된 하나의 생활양식에 의하여 규정된다.
이 양식에 근거하여 인간은 살고, 인간은 죽는다.
이 양식은 인간의 생활을 어느 정도 대표하면서
인간의 생활과 독립하여 실재하는 하나의 제도로서 인간을 규제한다.
인간은 말에 지배되고, 도구에 지배되고, 제도에 지배되는 가엾은 존재다.
관념과 도구와 제도는 인간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독립한 실재로서 인간을 규제하는 관념적 실재다.
인간에게 말이 필요하고, 도구가 필요하고, 제도가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말로 사상을 대표하고, 도구로 사물을 처리하고, 제도로 인간관계를 관리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문화적 존재가 된다.
그러나 사람이 말에 붙잡히고, 도구에 집착하고, 제도에 얽매이면
생각과 행동과 발전은 없어지고 만다.
마치 어항의 물이 썩듯 말이 탁해지고, 도구는 낡아지고, 제도가 늙어지면
어항의 고기가 죽듯 사람의 생각과 행동과 발전은 죽게 마련이다.
호수에는 언제나 샘물이 솟아올라야 한다.
물은 다시 맑아지고, 말은 다시 힘을 얻고, 도구는 다시 새로워지고, 제도는 다시 고쳐져야 한다.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행동과 새로운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젊음을 실존이라고 한다.
실존은 사유적, 행위적, 창조적 존재다.
실존은 새로운 문화의 창조력을 갖고 있다.
실존 없는 문화는 썩게 마련이다.
실존이 없으면 인간은 낡은 관념에 갇혀 인간의 문화는 병들게 마련이다.
관념은 본질적으로 현재적 존재다.
과거와 장래의 내용도 관념이 되면 현재가 되고 만다.
더욱이 무無나 비존재일지라도 그것이 관념이 되면 유有가 된다.
관념의 세계는 일체가 유有요, 현재다.
문화의 터에서 관념은 실재다.
신의 관념은 실재의 관념을 포함하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증명도 있고,
신은 궁극 원인으로서 실재한다고 하는 우주론적 증명도 있고,
신은 궁극의 의미와 목적으로서 존재한다는 목적론적 증명도 있다.
이러한 모든 관념은 실재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리하여 신은 존재한다고 증명된다.
그러나 관념이 실재하는 것은 문화의 세계에서만 설득력을 가진다.
실존의 입장에서 보면 관념은 실재가 아니다.
오히려 실재야말로 관념의 원천이다.
관념이라는 나무가 자랄 수 있는 터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관념만의 세계는 뿌리 없는 나무나 마찬가지다.
조만간 말라버릴 운명에 놓여 있다.
관념적 실재로서의 신은 잘못된 사유의 산물에 불과하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지식도, 계획도, 행위도 모두 이미 있는 관념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관념을 형성해 간다.
지식도 지성과 지식으로부터 출발, 경험을 거쳐 다시 지식으로 가는, 관념으로부터 관념으로 가며,
의지도 일정한 계획을 실현하려고 하는 한, 관념으로부터 관념으로 간다.
그런고로 문화적 자아는 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고 생각되는 것,
즉 관념을 있다고 전제하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즉 율법을 있게 하려고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적 자아는 관념으로부터 관념으로 가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인생은 꿈이란 말이 있다.
인생은 관념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문화적 인생은 일체를 관념화한다.
인간은 쾌감, 불쾌감이란 감정도 관념화한다.
감정이란 체험으로서는 순간적이요, 계속되는 것이 아니지만,
쾌 o 불쾌가 관념화될 때는 그것이 지식이 되고 기억이 되어
쾌는 계속 추구하게 되는 관념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인간의 관념화가 자기에게 적용되면
자기도 하나의 관념이 되어
주어진 관념으로부터 자기를 이해하고, 사유하고, 행위하고, 생활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아는 관념의 타율 밑에 노예가 된다.
일정한 세계관, 인생관 밑에서 자기를 이해하고, 그러한 자기이해에서 인생은 출발된다.
일단 자기의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일정한 관념이 성립되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인간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생에 있어서는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수단이 되고 만다.
관념적 자아의 설정은 행복(쾌快)의 추구가 되고, 남(타자)은 수단이 되어
경쟁은 노골화되고, 사회는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러한 생을 도덕으로 해결하려고 들면 관념화된 도덕의 노예가 되고,
종교로 해결하려고 들면 관념화된 종교가 다시 인간의 목을 조른다.
여기에 인간은 관념으로부터의 해탈을 부르짖게 된다.
실존이란, 관념으로부터 해탈한 존재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관념에 빠져 관념 속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깨치고 실재에 부딪힌 사람을 실존이라고 한다.
보통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지만 진리란 별것이 아니다.
관념 가운데서 제일 마지막까지 붙어 다니는 관념이 결국 진리인 것이다.
사람은 결국 진리라는 관념을 벗어나게 될 때 실재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이 관념을 꿰뚫고 실재에 부딪히는 것이 직관直觀이다.
혹은 순수직관이라고 한다.
옛날 동양 사람들이 도통道通이라고 하는 말과 비슷하다.
도에 통한다는 말도 망상을 벗고 실재에 부딪히는 것이다.
사람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밥으로 산다.
돈이라는 관념을 벗어나 밥이라는 실재에 부딪히면 실존이다.
그러나 관념에 사로잡힌 문화인은 밥은 안 보이고 돈만 보인다.
돈이 안 보이고 밥이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결국 진리를 깨닫는다는 하나의 사건을 가져야 한다.
계시를 받았다고 하건, 성령을 받았다고 하건, 순수직관을 얻었다고 하건,
무엇으로 표현되든 간에 인간은 한번 거듭나는 데가 있어야 한다.
천지개벽하는 사건을 통해서만 인간은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순수직관만이 관념으로부터의 해탈을 가져온다.
관념이 붕괴될 때 직관된 세계는 무한히 충만한 실재의 세계다.
순수직관이 성립될 때 관념적 자아, 문화적 자아는 해소되고,
쾌의 지식과 경쟁의식과 생의 목표는 물러간다.
순수직관으로 말의 세계는 무너지고 참의 세계가 전개된다.
관념적 자아가 무너지고 실재적 자아로 바뀔 때
허무는 변해서 충만이 되고, 나는 남과 비로소 연관이 된다.
나의 생각과 행위는 관념적 자아에서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현실과 요청에서 출발이 된다.
이것을 인간은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은 순수직관의 결과다.
사랑의 근원을 믿음이라 한다면 순수직관이야말로 믿음이다.
믿음과 사랑에는 집착이 없다.
집착은 자기중심의 관념적 생에서 나오는 것이다.
순수직관은 관념을 초월한다.
실존이 초월자를 말하게 되면 그는 종교적 실존이다.
그는 초월자를 말하고 초월자에게 감사한다.
초월자야말로 자기 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다.
실재이기 때문에 신앙은 사유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으로부터 시작한다.
직관의 세계는 관념이 아니요
기억될 수 있는 지식도 아니다.
종교적 실존은 가르쳐서 되는 것도 아니다.
가르쳐서 된다면 그것은 관념적 생이지 순수직관이 아니다.
순수직관은 누구의 도움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실존은 꽃이 피듯이 저절로 된다.
이것은 모든 관념적 자아가 무너지는 하나의 위대한 사건이다.
마치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소돔과 고모라가 없어지듯이
관념적 자아가 없어지고 만다.
생의 욕구도, 행복의 추구도, 남과의 투쟁도 다 없어진다.
다만 존재의 빛이 비치는 대로 삶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이 길에 충만이 있다.
생각이 넘치고, 말이 넘치고, 글이 넘치고, 기운이 넘친다.
넘치는 힘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면 원수로 보였던 모든 중생이
원수가 아니라 내 이웃이다.
종교적 실존의 표현은 그야말로 계시요, 상징이다.
그 속에는 아무런 관념적 내용이 없다.
종교적 실존의 자기표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새가 노래를 부르고 사슴이 뛴다고 해서 거기에 어떤 지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생명의 약동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생의 매듭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석가가 출가하고 부처가 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생명의 매듭을 보여준 것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했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계시된 것뿐이다.
종교적 실존의 표현은 계시요, 상징이지
어떤 의미가 아니다.
종교적 실존의 세계는 관념이 아니다.
실재다.
거기에는 힘이 있고 빛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재의 세계가 관념으로 해석될 때 상징이 변하여 의미가 된다.
이렇게 되면 종교적 상징이 절대화하여 교의가 되고,
종교적 입장이 없어지고 문화적 입장이 유일한 입장이 되어
문화적 관념성이 의미내용이 된다.
인간이 이미 순수직관을 잃고 근원적 사유와 행위가 말살될 때
상징은 이미 상징이 되지 못하고
다만 전달된 종교적 관념만이 절대화가 된다.
그때 거기에는 무서운 독단과 어리석은 우상숭배만이 신앙이라고 생각되게 된다.
교리가 절대화가 되어
관념으로부터 관념으로의 새로운 죄악이 되풀이되고
교단 안의 모순과 갈등은 종교 없는 세계보다도 더 더럽게 된다.
종교는 종교적 실존을 회복해야만 종교가 된다.
근간 『심재』에서 발췌
[출처] 김흥호 목사님의 글 (관념을 떠나 실존의 세계로)|작성자 당포
'마스터와 가르침 > 다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흥호 목사님의 글 (내 속에도 진리가 있다) (0) | 2019.07.10 |
---|---|
김흥호 목사님의 글 (철든 사람) (0) | 2019.07.10 |
김흥호 목사님의 글 - 나라가 없으면 철학이 없다 (0) | 2019.07.10 |
김흥호 목사님 (말씀) (0) | 2019.07.10 |
시해선 그리고 진정한 복음 빛 힘 숨 (0) | 2019.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