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소크라테스 본문
소크라테스
▣ 내용
1. 생애와 인물 : 석수장이 아버지와 산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크라테스(기원전 470? ~ 기원전 399)는 대머리에 주먹코, 툭 튀어 나온 이마 등으로 못생긴 철학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집중력과 의지가 대단히 강하고 용감하여 전쟁에 나가 용맹을 떨쳤다. 기원전 399년 “이방의 신을 도입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소피스트들의 고발에 따라 아테네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는 소크라테스 때문에 정치적 지배력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 한 소피스트들의 음모였다. 소크라테스의 최후 모습을 그린 플라톤의 변명(apologia)에서 소크라테스는 설득력 있는 변론이 무엇인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2. 보편적인 것에 대한 주장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 사상의 핵심은 ‘귀납적 논구’와 ‘보편적인 것에 대한 정의’이다. 여기에서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보편적인 것에 대한 정의’이다. 소피스트들은 보편적인 것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는 어떤 보편적인 것이 있으며 우리는 이 보편적인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당시 그리스에서 영원한 것은 신적인 것이라 하였다. 나중에 플라톤에 의해 ‘이데아(idea)’라 이름 붙게 된 이 보편적인 존재들과 그것을 알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즉 ‘이성(理性)’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혔다는 이유로 죽음의 독배를 마셔야만 했다.
3.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행복은 인간 삶의 목표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추구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본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입구 바위에 써있던 경구였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인식의 중요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는 인간 마음속에 보편적인 어떤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무지를 깨달으라는 이중적 의미가 들어 있다.
4. 지행합일설 : 소크라테스는 이 보편성을 인간 기능(ergon)의 완전한 실현에서 찾는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본래 가지고 있는 완전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대로 이어지는 이 생각은 후에 서구적 자아실현과 인격완성의 출발점이 된다. 일단 자신의 목표를 알게 되면 인간은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설이 나온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인간이 악을 행하는 이유는 그것이 악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 실행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을 알고 실현하게 되면 그는 점차 완전한 인간이 되어 간다. 이것이 행복의 실현이다. 이점에서 지행합일설은 지덕복(知德福) 합일설로 이어진다.
5. 대화법 : 소크라테스의 철학하는 방법은 대화법이다. 영어로 'Dialectic'이라 번역되는 이 말은 ‘로고스를 통해’, 또는 ‘로고스를 가지고’ 진리를 찾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 잘못된 거짓(doxa)을 진리로 착각하고 있다. 따라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짓을 제거해야 한다. 이 거짓을 제거하는 과정을 반어법(irony)이라 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참된 지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산파술’이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누구나 참된 지식을 알고 있었지만 현생에 태어나면서 이 지식을 잊었다고 본다. 산파술은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다음은 소크라테스의 최후진술의 일부이다. 본인이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소피스트라 가정하고 이를 논박하는 반론을 제기하라.
나는 이처럼 여러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괴롭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판보다는 신에 대한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신탁(‘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최고의 현자이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제일 훌륭하다고 소문난 정치가들은 사색에 있어서 가장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에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훌륭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정치가들 다음에 작가와 음유시인들을 찾아갔습니다. 나는 그들에 의해 내가 무식하다는 것이 곧 드러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이 정성을 들여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작품들에 대해 그것이 지니고 있는 뜻을 캐어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에게서 무엇인가 배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고백하건대 여러분들께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 작가나 음유시인의 작품에 관하여 작가 자신보다도 훨씬 더 잘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작가가 작품을 쓰는 것은 그들의 지혜로 하는 일이 아니고, 마치 예언가나 점쟁이들이 자신들이 하는 말뜻도 모르는 채 지껄이는 것처럼, 그렇게 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인들은 마치 자신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아는 체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들도 정치가들과 똑같은 부류로 분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으로 나는 훈련받은 전문가(※소피스트)들을 찾아갔습니다. 나는 그들처럼 훈련받은 적이 없었기에, 그들이 참된 지식을 알고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나보다 더 현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이 직업적 전문가들도 작가들이 범하는 것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을 유창하게 잘 한다는 사실에서 자신들이 모든 일에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신탁을 대신하여 내 자신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내가 그들처럼 현명한 척하며 우둔하게 지내는 편이 나은지, 아니면 현명하지도 우둔하지도 못한 과거의 내 모습대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은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예전의 내 모습대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신에게 대답했습니다.
- 플라톤, ?변론(Apologia)? 중에서 -
1. 소크라테스와 혼(psyche)
소크라테스가 일생을 통해서 한 일들과 관련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가장 생생한 모습에 접하도록 해주는 저술로는 무엇보다도 플라톤이 쓴 ?변론(Apologia)?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삶의 의미를 캐물으며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의 사람다움 내지 사람으로서의 훌륭함(arete)과 관련해서 날마다 “담론을 하는 것”을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일과도 같은 이 담론, 즉 대화(dialogos)의 목적을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혼(psyche)이 가능한 한 훌륭하게 되게끔’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곧 사형의 판결을 내리게 될 법정에 서서, 설령 자신을 앞으로는 철학적 활동을 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방면해 준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결코 승복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가장 위대하고 슬기와 힘으로 가장 이름이 나 있는 나라인 아테네 시민이면서도, 그래 재물에 대해서는 되도록 많았으면 하는 관심을 쏟으면서, 그리고 세평과 명예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면서, 지혜와 진리에 관해서, 그리고 자신의 혼이 가능한 한 훌륭하게 되게끔 혼에 관해서 마음을 쓰거나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실로 “혼에 대한 보살핌”이야말로 그래서 인간이 지닌 혼을 가능한 한 훌륭한 것으로 되게끔 하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있어서의 최대 관심사일뿐더러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도 가장 보람 있는 일임을 그는 역설했던 철학자였다. 그래서 그는 독배를 비우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부탁할 것이 무엇인가고 묻는 그의 오랜 친구 크리톤에게 오히려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한다.
“언제나처럼 말하는 걸세. 조금도 새로울 건 없네. 자네들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들을 돌본다면, 자네들이 무슨 일을 하든, 자네들은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 처자를 위해서 그리고 또 자네들 자신들을 위해서 고마운 일을 하게 되는 것일세.” 여기에서 “자기 자신들을 돌보는 것”은 바로 ‘혼을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혼”이라 편의상 옮겨 놓은 말 프시케는 우선 무엇보다도 숨, 즉 목숨을 뜻한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말은 “프시케가 안에 있다(empsychos)”란 뜻이 된다. 또 이 말은 일반적으로 자아 내지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 프시케는 초기에는 우주 혼의 일부로 간주된 의미를 지녔다가 차츰 정신적 기능을 포함한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요컨대, 인간의 프시케에 관해서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것은 그것이 참된 자아라는 것이었다.”고 말한 거스리(Guthrie)의 말은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다. 헬라스 사람들이 스스로 인간을 하루살이들이라 비하시켜 보던 눈에 비해 보자면 인간의 프시케 속에서 이성 및 정신의 능력까지 찾아내게 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긍정적인 인간관으로의 대 전환으로 보아 마땅하다. 어쨌거나 소크라테스가 프시케의 능력을 확대시켜 보기 시작함으로써 희랍 철학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박종현, ?희랍철학의 이해?(종로서적), ‘로고스와 희랍 철학’ 중에서)
2. 삶의 목적
‘삶의 목적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제기되지 않았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의사가 될 때 그는 자신이 할 일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결정할 것입니다. 그 이후 그는 대부분 판에 박힌 듯이 정해진 대로 살아갑니다. 그가 일을 잠시 멈추고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해야만 할 때에도, 그는 목적의 가치가 아니라 수단을 생각합니다. 그는 ‘이 환자를 치료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만약 이 환자가 죽는다면 오히려 이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또는 ‘건강 혹은 생명 그 자체는 다른 가치 있는 것들과 비교해서 어떤 가치를 갖는가?’와 같은 문제들을 제기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목적들이 과연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혹은 없는가?’와 같은 문제들을 제기하지 않고서, 이미 설정된 목적들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면서 매일매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제기했던 문제, 즉 다른 사람들이 숙고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던 문제입니다. 인생을 하나의 전체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그 밖의 다른 것을 위한 단순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또 본래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도대체 인생에서 유일하게 욕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하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까?’ 고 물은 것이지요. (중략)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소크라테스이래 이것은 여러 학파들이 논쟁하였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행복은 그 자신의 ‘혼의 완성(the perfection of the soul)’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가능한 한 인간의 혼을 좋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 부르는 것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 밖에 인간이 욕구하는 모든 목적들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역 그러한 것들이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혼의 완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컨퍼드[이종훈 역],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박영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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