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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 본산 조계사가 신흥종교 보천교의 전각을 옮겨 대웅전 지은 까닭은
2018. 3. 14.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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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편액이 어디서 많이 본 글씨입니다.^^::
쓴 이는 선조의 여덟째 아들이자 인조의 숙부였던
의창군 이광(李珖/ 1589~1645)인데요.
아버지를 닮아 한석봉체 큰 글씨를 잘 써 조선 중기 서예가에 꼽힙니다.
그러나 이 편액은 의창군이 1636년 구례 화엄사에 써 내려준 대웅전 편액 글씨를 본떠 새긴
번각(飜刻) 편액입니다.
번각 편액 왼쪽에는
'의창군 서(書)'라고 짤막한 관지(款識/ 낙관)가 붙어 있는 데 비해,
아래 사진 화엄사 원본은 연호와 연도, 계절이 길게 딸려 있습니다.
이 글씨는 서울 진관사, 하동 쌍계사, 완주 송광사, 불 타기 전 내장사 대웅전,
지금은 원담 스님 글씨로 바뀐 수덕사 대웅전까지
여러 절에서 번각해 달았습니다.
글씨 짜임새가 좋고 운필이 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숭유억불 시대 핍박받던 사찰 입장에선
임금 숙부의 글씨를 걸어놓아
탐관오리 벼슬아치들의 횡포를 덜어보려는 뜻도 컸을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번각판이 걸린 곳이
한국 불교의 대종인 조계종 본산 서울 조계사입니다.
지난 12월 2일 토요일 오후 조계사에 갔습니다.
서울 산 지가 벌써 40년도 넘었는데 안으로 들어가긴 처음입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이야기, 대웅전에 얽힌 사연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서울 종로구 종로1.2.3.4가동
전화
종로구 우정국로 55
견지동 45
02-768-8600
http://www.jogyesa.kr/
조계사는 부지가 좁은 도심 절이어서 전각이 몇 안 되지만
대웅전만큼은 웅장하다는 말이 어울리도록 큽니다.
사방에 계단을 둔 석조 기단 위에
정면 일곱 칸, 측면 네 칸짜리 156평 팔작지붕 집이 올라섰습니다.
공포는 출목이 다섯이나 되는 화려한 다포식이고요,
외부 기둥만 스물 두개나 됩니다.
조선 후기 불교 건축양식에 충실하게 지으려고 애쓴 흔적이 뚜렷하면서도
조선왕조 궁전보다 더 장대하고 화려한 외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선 대웅전 기단 높이가 1.6미터에 이르러
기단 한 층으로만 따지면 경복궁 근전정을 비롯한 어떤 궁전 기단보다 높습니다.
안 천장 높이도 8.5미터나 되고요.
정면 기단 앞에 늘어선 석상 넷 중에서 계단 양쪽에 해태를 둘 둔 것도
궁궐 아니면 보기 힘들지요.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령스러운 짐승으로
궁궐에 장식을 겸해 세워놓는 해태거든요.
전각 안에서 정사를 돌보는 임금의 공평무사를 뜻하기도 한답니다.
나머지 둘은 사자인 듯하고요.
이렇게 거창한 대웅전이 조계사에 자리잡게 된 사연은 사뭇 깁니다.
조선 왕조 내내 불교를 억압 탄압하면서 한양 도성 안에는 절을 세울 수 없었고
인조 때 도성 출입금지로 300년 가까이 4대문 만에 승려가 드나들 수도 없었다가
구한말에 불교를 중시하는 일본의 입김이 커지면서 1902년 동대문 바깥 지금 창신동에 원흥사가 설립됩니다.
그래서 당시 불교계에 남은 숙원은 4대문 안에 절을 창건하는 것이었지요.
마침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은 일본이 원흥사를 일본 불교 번식의 거점으로 이용하자
만해 한용운을 비롯한 불교 지도자들이 전국 승려들에게 모금한 돈으로
1910년 사대문 안 지금의 수송공원(옛 중동고자리)에 각황사를 세워 한국 불교의 중심 사찰로 삼고
도심 포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세력에 눌려 있다가 1935년 전국 31본산 주지회의를 거쳐
조선불교 선교 양종 종무원이라는 대표기관을 설치하고
이듬해 조선 불교 1번지의 위상을 지닌 사찰을 세우기 위해
각황사를 바로 옆 동쪽 지금 자리로 옮기고 태고사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러면서 1937년 전북 김제에 있던 신흥종교 보천교가 쇠락하면서 매물로 나온
보천교 본전 십일전을 고스란히 옮겨 와 조립해 1938년 준공한 것이 지금 대웅전입니다.
의창군의 대웅전 편액도 이때 화엄사에서 탁본해 와 새겨 달았고요.
그리고 3년 뒤 교단 이름 조선불교선교양종을 조선불교 조계종으로 변경 확정해
지금 조계종의 뿌리가 되지요.
그렇다면 보천교란 어떤 종교단체였기에 이렇게 궁궐처럼 거창한 전각을 지었을까요.
관군에 붙잡혀 처형된 동학 접주 차치구의 아들이자
증산교 창시자 증산 강일순의 제자였던 차경석이
스스로를 천자로 칭하며 1921년 창시한 신흥종교였는데요,
증산교처럼 후천개벽을 교리로 내세워
천지개벽의 문이 열리고 조선이 세계의 종주국이 된다며 국호까지 내세웠지요.
새 세상이 온다는 교리는 착취와 탄압에 찌들었던 백성의 호응을 얻어
한창 때 신도가 600만명에 이를만큼 번창했고
막강한 자금력으로 전북 김제 2만평 부지에 4년 공사 끝에
건물 55채를 거느린 본소 공동체 '성전'을 1929년 완공합니다.
그중에 본전은 흙 토(土)자를 파자해 십일(十日)전이라고 이름 붙였는데요,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던 만큼 1920년대 창덕궁 대조전 중건 공사를 총지휘했던 최원식이 도편수로 불러 왔고
목재는 백두산 소나무를 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포에 내민 출목을 다섯 개나 만들어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궁전의 출목보다 둘이나 더 많습니다.
보천교는 교리로 보면 전형적인 신흥종교였지만
상해 임시정부에 거금을 독립자금으로 지원한 사실이 기록으로 밝혀지면서
민족종교의 측면도 지닌 논쟁적 종교여서
앞으로도 계속 평가가 진행돼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보천교가 십일전에 절 건축 양식을 최대한 살렸다고 하지만
이렇게 공포 아래 평방과 창방부터 기둥 윗부분까지
판형 세로 부재를 지느러미처럼 내민 건 절에선 볼 수 없는 부분입니다.
기둥 윗부분에 비단옷을 입힌 듯한 주의초는 옮겨 온 뒤 불교식으로 새로 단청한 듯하고요.
그렇다면 조선 불교는 왜 불교와 아무 관계도 없는 신흥종교 대표 전각을 가져와
조선 불교의 상징 주불전으로 삼았을까요.
1936년 보천보 교주 차경석이 죽자 일제는 보천교를 해체하고 신도들을 해산시킨 뒤
십일전을 경매에 붙여 헐값에 팔아 버렸는데요,
이걸 조선 불교가 사들인 겁니다.
당시 신자 12만명에 불과했던 불교계로선
무엇보다 1만2천원(쌀 한 가마 5원30전)이라는 적은 자금으로
웅장한 불교식 건물을 가질 수 있다는 데 마음이 끌렸겠지요.
정면 가로부재 창방엔 비단무늬 금문 단청을 하고 가운데에 별화로 용을 그려넣었고요,
그 위 평방엔 범어 문자로 단청했습니다.
대웅전 전면은 모두 커다란 문으로 처리해 시원스럽고
측면 후면 역시 분합문이 많습니다만,
전면보다는 더 파격적이고 전통 불교에서 벗어난 부분들이 많아집니다.
측벽 기둥엔 날개처럼 튀어나온 판형 세로 부재가 더 큰 데다가,
거기에 우산이나 풍선을 든 동자승들이 단청돼 있습니다.
꽃과 바람개비도 등장하고요.
물론 보천교 십일전 때부터 있던 그림은 아닐 거고요,
스테인리스 사천왕상처럼 지금 조계사가 시도하고 구현하는 현대적 이미지의 하나인 듯합니다.
측면엔 학을 탄 동자승 별화가 있는가 하면
동화스러운 불교 교리 그림도 보입니다.
전통 별화에선 학에 비천이 올라탄 모습이거든요.
역시 조계사다운 현대적 단청이라고 해야겠지요.
문짝들은 전통 사찰 문과 달리 근대적인데요,
아래 궁창초는 전통적인 겹연화 당초문입니다.
빙둘러 측면 아래쪽 벽면을 따라서는
석가모니의 잉태부터 탄생, 성장, 출가, 고행, 성불, 설법, 열반까지
일생을 담은 벽화 서른 장면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왼쪽부터 19 녹야의 설법, 20 본국에 돌아온 부처, 21 라훌라의 출가이고요,
이건 25 바라문 외도를 섬기던 앙굴리마를 구제하고
26 계율을 정하고, 27 부왕을 위한 최후 설법을 하는 장면입니다.
제게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정면에서부터 측면 후면으로 화려하게 이어지는 투조(透彫) 문과
그 위 부조 장식들입니다.
문에는 홍매가 흐드러졌고,
그 위엔 천의자락 휘날리는 비천과
기린 같은 성스러운 짐승과
불법을 지키는 권속 천부중과 신중들이 다채롭게 새겨져 있습니다.
비천의 모습이 유난히 한국적인 것도 볼만 합니다.
조계사 대웅전이기 앞서 보천교 십일전의 화려함이 놀라울 뿐입니다.
다채로운 부조와 문 투조는 빠짐없이 찍어 왔기에
다음 기회에 따로 포스팅하면서 찬찬히 음미해 볼 생각입니다.
대웅전의 내력을 더듬어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계사의 역사도 살펴보게 됐는데요,
조계종과 조계사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마저 곁들이겠습니다.^^;;
우리 불교 고유의 종파 명은 고려 전기 대각국사 의천이 개창한 교종 계열 천태종이 처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조계종은 뚜렷한 창시 기록 없이
신라 이래 이어온 구산선문을 뭉뚱그려 이르는 선종 종파로 드문드문 기록에 등장한 뒤
고려 말 보조국자 지눌이 순천 조계산 송광사에서 중흥시켰습니다.
하지만 조선 세종 때 억불정책으로 종파를 모두 없애고 선종 교종 둘로만 부르게 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1930년대 후반 조계사 자리에 태고사를 세워 조선 불교의 본산으로 삼고
1941년 이 유일한 통합 조선 불교 종파 이름 조계종으로 되살아난 겁니다.
하지만 광복 직후 불교계 주도권과 불교 재산을 둘러싸고
결혼하지 않는 비구승(독신승)과 일제가 퍼뜨린 대처승(혼인승)이 대립하면서
법정 싸움으로 비화한 끝에
1969년 조계종 종권과 정통성이 비구승에 있다는 최종 판결이 나오게 되지요.
그러자 이듬해 대처승들은 태고종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해 나갔고
그 뒤 1975년에야 태고사라는 절 이름도 조계사로 바뀌었습니다.
구체적으론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쳤지만 간략하게 압축한 게 이 정도입니다.
덕분에 저도 조계종과 조계사 역사에 대해 많이 알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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