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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철학적 대상의 변화와 종합 본문
탈레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철학적 대상의 변화와 종합
일상을 담는 범주 중 6하 원칙이 있다. 6하 원칙은 인간 활동을 ‘누가, 무엇을, 어떻게, 언제, 어디서, 왜’로 나눠 질문하고 답하도록 돕는다. 6하 원칙을 철학에 적용해 보자. 철학은 누가 하는가? 인간이 한다. 철학은 무엇에 대한 것인가? 존재 전체에 대한 것이다. 철학은 어떻게 하는가? 관찰과 생각이 주된 방법이다. 왜 하는가? 존재를 설명하고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한다.
철학사는 철학의 목적, 대상, 방법을 특정한 시대(언제)와 장소(어디서)에서 전개한 어떤 사람(철학자)들의 이야기다. 특히, 그 철학자가 무엇에 대해 어떻게 철학 했는가가 주된 내용이다. 탈레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철학의 대상은 무엇이었으며, 어떤 방법으로 철학 했는지 살펴보자.
1. 철학적 대상들
철학은 존재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 우주, 자연, 인간이 그 대상이다. 한편, 우리는 존재 전체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의 대상은 보이는 우주, 자연, 인간과 보이지 않는 우주, 자연, 인간 등 6가지다. 이러한 구분은 엄격하지 않다. 철학자에 따라 하나로 묶일 수도 있도, 더 세분될 수도 있다. 맥락에 따라 같은 말로 사용되었다가, 대립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1) 전체로서의 우주(존재)
여기서 보인다는 말은 인간 감각을 통해 경험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보이는 우주는 보이는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하늘에 떠있는 해, 달, 별과 땅에 있는 나무, 동물 등은 경험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생각도 달랐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우주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주가 존재하는 목적, 우주를 변화시키는 힘과 원리 또는 법칙, 우주의 본질과 기본 재료 그리고 그 재료들의 결합 양식 또는 구조 등을 말한다. 탈레스 이전 신화시대에는 이에 대한 대답을 신(神)에게서 찾았다. 이 때에는 보이지 않는 우주와 보이는 우주의 구별이 없거나 있더라도 통합적으로 이해되었다.
밀레토스학파는 우주를 신의 창조물이 아닌 어떤 근원 물질과 원리(Arche)의 구성물로 보았다. 그러나 신화 세계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해, 그들이 밝힌 우주의 공통 밑바탕은 신적 위상을 가졌다. 우주 공통 밑바탕에 대한 질문에 탈레스는 물로,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으로,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로 대답했다. 탈레스가 일식을 예언한 것, 아낙시만드로스가 진화론적 사유를 한 것 등은 자연현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설명했다는 의미로, 과거 신화적 세계로부터의 탈피라고 평가할 만 하다. 밀레토스학파가 보편적, 추상적 설명에만 치우쳤다면, 피타고라스는 수(數)를 통해 보편성과 개별성을 통일적으로 설명했다. 수(數)는 무규정자(아페이론)에 한계(페라스)를 부여함으로써 형상과 질료 그리고 질서를 설명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영원히 흐르고 있다」라는 점을 세계의 참된 본질로 봤지만, 그 변화는 불변의 로고스에 따라 조화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로고스란 생성을 조정하는 세계 법칙이다.
현상은 보이는 우주의 모습이다. 늘 변하는 현상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원리와 법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엘레아학파가 대답하고 있다. 크세노파네스는 ‘일자’를 통해 그 안에서 모든 만물이 관계를 맺는다는 대답을 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진리로 나가기 위한 세 가지 주장을 한다. 첫째, 사람들은 항상 오직 존재만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그와 반대로 무는 없다. 둘째, 사고와 존재는 동일하다. 셋째, 서로 연관이 되어 있는 존재가 있다. 이런 존재는 하나요, 모든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존재 전체는 하나요, 보편적이며, 동일한 것이다. 동일한 것에 의해 설명되는 우주는 인간이 가진 추상 능력에 대한 절대적 신념이라고 볼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사고의 세계,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는 감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세계를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여야 할 공고한 대상이 아닌, 인간 의식에 의해 규명되어야 할 무언가로 만들었다.
엠페도클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와 엘레아학파를 종합했다. 그의 엘레아학파 쪽 내용은 생성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 ‘원소’를 주장한 것이고, 헤라클레이토스 쪽 내용은 생성을 결정하고 끊임없이 혼합과 분리되는 우주의 모습을 주장한 것이다. 그의 철학에는 하나의 한결같은 존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성과 운동이 있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라는 양적 개념으로 사물들의 차이를 설명한다. 원자는 모양과 크기다 각기 다르다. 이로서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한다. 원자의 다양한 결합을 위해 운동이 필요하고, 운동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게 된다. 아낙사고라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정반대다. 그에게는 질적으로 다른 원자들이 무한히 많다. 질적으로 다른 것을 어떻게 종합하느냐는 절대 정신의 힘, 의지,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그의 누우스(정신)은 만물 운동의 원인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양적 구조인 세계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가, 아낙사고라스는 질적 구조인 세계를 어떻게 종합할 것이냐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2) 인간
인간은 크게 개인 차원과 사회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개인적 차원의 인간은 신체로서, 생물학과 의학의 대상이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인적 차원의 인간은 따지고 계산하는 이성적 영역과 느끼고 원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감성적 영역으로 구분된다. 이성적 영역은 논리학이, 감성적 영역은 심리학이 탐구한다. 사회를 이룬 인간 사이의 문제는 윤리학이, 인간 공동체의 최종 형태인 국가와 권력 문제는 정치학이 담당한다.
보이지 않는 인간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다움, 즉 인간 본질에 대한 것과 인간이 어떻게 인간 밖에 것들에 대해 ‘알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 문제 그리고 인간의 삶을 만족스럽게 하는 가치(진선미, 각종 덕목)의 문제 등이다.
먼저 인간 본질을 보자. 인간 본질 또한 다른 사물과 다른 것이 없다고 한다면 유물론적 사고가 된다. 예컨대, 데모크리토스는 영혼과 사고도 원자의 운동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맞서 인간에게만 특별히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영혼, 이성, 정신, 마음 등이 그것이다.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개념 정립에 주의를 요한다.
다음으로 인간이 어떻게 우주, 세계, 인간 자신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적 문제는 크게 감각에 기초한 경험과 개념과 논리에 의한 사유가 대칭을 이룬다. 우주를 변화와 생성으로 읽어내는 쪽은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는 태도이고, 고정불변의 우주 법칙과 원리를 주장하는 쪽은 개념과 논리를 중시하는 태도다. 물론 양극단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사유도 다양하게 있다.
철학을 인간 밖 대상에서 인간으로 돌린 철학자로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를 들 수 있다. 소피스트 중 고르기아스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 존재해도 알 수 없다, 알더라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합리적 토론과 확신은 불가능하다. 오직 설득의 기술, 즉 수사학만 남는다. 고르기아스의 관심은 참과 거짓, 정당과 부당을 구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청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있었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사물들이 언제나 일정 시점에 한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의무에 의해서 규정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남을 강조한다. 일종의 인식론적 관점주의와 다원주의 그리고 상대주의를 함축한다. 이는 참과 거짓이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대상의 현현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가깝다. 특정 관점에 종속된 진리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이데아를 통해 하나의 보편적인 윤리적-정치적 질서가 존재하는가에 긍정적 답변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된다.
소크라테스는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개념적 분석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모호한 개념들을 명료하게 함으로써 앎을 추구한다. 우리는 통상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의 앎을 갖는다. 첫째, 있는(~인) 것(What is)에 대한 사실적 지식, 둘째,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What should be)에 대한 규범적 통찰, 셋째, 그 사람이 진정으로 “책임을 지는” 통찰. 소크라테스는 앎을 개념의 명료화를 통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즉,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명료하게 만들고 이것을 올바른 맥락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획득하는 인식인, 하나의 사람이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에 대한 인식-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위 세 가지 앎을 모두 포괄한다.
(3) 자연
자연은 크게 생물과 무생물로 구분된다. 여기서 중심개념은 생명이다. 생명에도 본질, 목적, 구성 등의 문제 제기가 가능하다. 자연전체를 위계질서로 체계화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생명 역시 위계화 했다. 그는 생존 본능에 충실한 식물, 감각과 운동 중심의 동물, 이성을 활용할 수 있는 인간을 구분하고 위계화 한다.
2. 철학적 대상의 종합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통해 앞서 제기된 철학적 질문들을 대화 형식으로 접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는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여 철학적 종합을 이뤘다. 플라톤은 이데아에서 출발해 개별 사물들에게로 다가갔고(이데아 안에 있는 세계),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 사물들의 관찰을 통해 보편적인 이데아로 다가갔다(세계 안에 있는 이데아).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데아가 사물과 별도로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들 안에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 점은 같다. 방향은 서로 달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이데아인 셈이다.
(1) 플라톤
플라톤이 다룬 주제는 크게 선, 진리, 인간(영혼), 국가, 세계, 신 등이다. 선(善)의 이데아는 최고의 이데아이다. 선의 이데아는 태양에 비유된다. 선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선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은 가치 중립적이다. 이 지식의 가치판단은 인간 의지가 지향하고 있는 목표와 목적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인지가 중요하지만 플라톤은 이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가치의 선천성을 주장한다. 우리가 사랑해서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치있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존재 자체가 선하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존재는 선하다. 플라톤은 여기서 출발해 존재를 목적론적 사고형식에 맞춰, 인과관계로 연결한다. 모든 것은 선의 이데아와 관련된다. 각 존재자들은 선의 이데아를 나눠 가지고 있고, 선의 이데아는 이들에 관여한다.
플라톤에게 참된 것은 이데아 자체이다. 이데아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신적이다. 따라서 이데아를 아는 진리 역시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신적이다. 이러한 앎은 인간의 영혼이 로고스를 활용할 때만 가능하다. 영혼은 항상 가지 자신과 동일한 것을 찾는다. 영혼은 태어나기 전에 이데아 세계에서 보았던 것을 기억해 낼 뿐이다. 인간의 모든 인식은 로고스를 통해서 생기며, 동일성에 기초한 유비적인 인식이다. 로고스를 이용하지 못한 인간 사유는 일방적 주장인 독사(doxa)에 불과하다.
이데아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진리의 근원으로서의 이데아와 객관적 진리의 대상으로서의 이데아가 그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대상을 항상 현실적이고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대상을 정신에 맞세웠다.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사고와 존재는 동일하다」가 대표적 표현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원론이 아니다. 플라톤의 실재 세계는 오직 이데아뿐이다. 현상세계는 그림자요 모사에 불과하므로 현실이라고 할 수 없다.
플라톤의 인간은 영혼에 집중되어 있다. 영혼은 데미우르고스가 그 기원이다. 영혼의 본질은 불멸성, 비물질성, 전체로서의 단일성이다. 플라톤에게 영혼은 정신적인 실체이면서 동시에 운동의 원리 및 생명이라는 뜻도 있다.
플라톤의 국가는 확대된 인간적 유비가 적용된다. 완전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지혜, 용기, 절제는, 지혜자, 수호자, 생산자라는 신분(계급)을 이룬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플라톤 「국가」의 주제이다. 정의란 지혜자, 수호자, 생산자 계급의 중용 상태이다.
플라톤은 우리들의 물리적인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를 분명하게 구별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생성의 세계다. 생성의 세계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다. 여기에는 참된 실재는 없으며, 항상 변한다. 플라톤은 물리적인 세계가 이데아에 관여함으로써 전체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 세계는 신의 선의지 때문에 생긴다. 세계 근거는 그 자체가 자신의 근거로서 목적개념에 의해 질서져 있다. 데미우르고스는 전능한 세계창조가가 아니다. 그를 한계 짓는 것은 질료이다. 데미우르고스는 질료 때문에 그에 맞는, 즉 필연적인 창조활동을 요구하지만, 플라톤은 이 필연성을 진정한 인과관계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 모든 생성의 진짜 원인은 항상 영혼뿐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적 지식을 중심으로 철학 전반을 다룬다. 여기서 논리학과 범주가 매우 중요하다. 그의 형이상학은 4원인론과 플라톤의 이데아론 비판이 중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혼, 윤리학과 국가 등 인간적 문제도 다루고 있다.
논리학은 정신을 분석하는 것이다. 해부학이 인간의 신체를 구성요소별로 분해하는 것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분석한다. 그는 인간 정신이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논리학의 궁극적 요소들은 개념, 판단, 추리 등이다.
개념은 논리적 분석이 발견해 낸 궁극적 요소다. 「한 가지의 명제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요소들, 즉 명제의 대상(主辭)과 명제가 언표하는 것(賓辭)을 나는 개념이라고 한다.」 개념은 참과 거짓이 아니라, 사실적 차원이다. 올바르게 형성된 개념을 정의라 한다. 정의란 「본질을 드러내는 말」이다. 정의는 유(類)와 종차(種差)를 지적함으로써 생긴다. 정의란 항상 종개념(種槪念)을 가리키고 있다.
플라톤에게 본질은 많은 것들에서 추상해냄으로써 생긴 것이 아니다. 본질은 선천적으로 존재하며 직관적으로 끄집어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론도 이와 같다. 나눔(Diairesis)의 방법 없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도 있을 수 없다. 그의 정의는 개념의 전체적인 체계 내에서 논리적 존재론적인 위치를 정해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은 개념을 분류한 것이다. 그는 명제 속에서 연결짓는 개념들이 항상 전형적인 그룹으로 정돈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으로 범주표를 만들었다. 범주는 크게 실체와 속성으로 나뉜다. 속성은 분량, 성질, 관계, 시간, 공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 등 9가지다. 실체까지 총 10가지 범주가 된다. 그는 범주를 그저 논리적인 요소로만 보지 않고 존재론적인 요소로도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 개념은 완전히 객관적이다. 「존재자는 있고, 비존재는 있지 않다고 말하는 데에, 진리는 성립된다.」, 「네가 희다고 우리들이 믿기 때문에, 네가 흰 것이 아니라, 네가 희기 때문에, 우리들이 희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판단은 합리주의적 방향이다. 플라톤에게 로고스는 이미 현실 자체이며, 순수히 이성적·분석적으로 개념의 내용으로부터 결합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결정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주목한다. 그는 개념을 떠나 현실에 호소한다. 로고스는 이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사고수단이요, 현실에로 나아가는 길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제일실체는 개별자이다. 개별적인 것은 「말로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이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개념으로서는 남김없이 다 말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를 그 일회적인 독자성 그대로 존중할 여지를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항상 전제들로 출발해 중개념을 추구하고 도출한다. 엄밀한 지식의 기초와 출발점은 항상 본질 인식인 바, 본질인식은 본질에 바탕을 둔 증명과 이유가 있다. 삼단논법은 바로 이러한 본질 인식을 위해 「근거를 지우는 정신의 태도」인 셈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본질 개념들은 선천적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인간들의 인식에게는 개별적인 것이 먼저라고 한다. 이 개별적인 것을 바탕으로 해서 보편적인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모든 인식은 감각적인 지각에서 시작된다. 그는 플라톤에 반대하여, 「만약에 처음부터 정신에게 최고의 지식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사실이 어떻게 우리들의 정신에게 감춰져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감각들은 항상 참이며, 오류는 이 감각들의 관계를 판단하는 데서 생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와 존재자를 나눈다. 그는 형이상학을 「존재 자체와 이것에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모든 것을 고찰하는 한 가지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형이상학은 제일 첫 번째 것과 원인에 관한 학문인 것이다. 여기서 제일 첫 번째 것은 신, 즉 부동의 동자를 말한다. 부동의 동자란 자기는 남에 의해 움직이지 않지만, 남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를 말한다. 영향을 받지 않고 영향만 주는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소크라테스는 개별성에서 존재를 가진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자체는 그들의 보편적인 본질 속에서 존재를 갖는다. 존재는 항상 속성으로서 어떤 실체에 붙어 있는, 그런 한 가지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존재라는 말은 유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일의성과 다의성 사이에 놓여 있는 이런 관계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계지워진 다의성」이라고 한다. 그에게 유비는 관계 비례와 같다. 기하학적 유사성이 유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가 원래적인 뜻의 존재라고 하지만, 플라톤에게 존재는 이데아 뿐이다. 그에게 개별적인 사물들은 독자적인 실재가 아니며, 따라서 나는 세계를 이중으로 만들지 않았으며, 개별적인 사물들은 이데아를 통해서만, 지금 있는 그대로 있다고 한다. 이런 이데아론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보편적인 개념들은 사물들과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안에 있고, 오직 정신만이 여러 가지 것들에서 같은 것을 끌어 모은다. 보편적 개념은 논리적인 것이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다. 둘째, 이데아는 사물들을 필요없이 이중으로 해 놓았다. 이 이데아는 사물이 이미 있는 그대로의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셋째, 이데아는 사물들 안에 있지 않으므로 사물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 플라톤의 관여는 단순한 시적 비유요 헛말이다. 넷째, 이데아는 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 그 자신이 정적이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이데아에 의해 생겨난 집은 아직 한 채도 없다. 다섯째, 이데아론에 의하면 무한한 후퇴가 생긴다. 어떤 이데아와 사물을 동일성으로 연결할 때, 양자를 묶어줄 수 있는 상위 이데아가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후 이데아에는 결코 도달 할 수 없다.
실체 자체도 그 바탕이 되는 질료가 꼭 필요하다. 생성된 것은 항상 질료와 형상이 합쳐져서 된 것이다. 이를 질료형상설이라고 한다. 분석적 사고는 질료적인 원인과 형상적인 원인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존재전체가 그 자체로서 질서지워져 있다. 존재는 결정의 핵이며, 생명의 중심이며, 구조요, 종과 유요, 층이며, 바로 형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엘레아 학파가 생성에 대해 문제 삼았던 것, 즉 어떻게 하면 모순율에 저촉되지 않고, 존재자에게 어떤 것이 생겨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와 무의 중간자인 질료를 도입함으로써 다리를 놓았다. 질료는 보편에서 개별화로 넘어가는 원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생성이란 형상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데아와 같아지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혼은 유기적이고 물리적인 물체의 제일 엔텔레케이아이다. 영혼은 신체의 형상이다. 영혼이란 한 가지의 살아있는 물체의 이데아와 그 전체, 의미와 목적관련 등을 뜻한다.
[출처] 탈레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철학적 대상의 변화와 종합|작성자 dasio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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