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168사-衆寡(중과)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180
우리의 이성적 사고는 효율성 위주로 발전했다.
그러니까 더 빨리, 더 많이 효과를 얻도록 하는 방향으로 달려간다는 것이다.
당연히 손해를 보아야 한다면 더 적게, 더 천천히 잃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것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성향은 두려움에 기초한 자아의 속성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더 빨리, 더 많이로 마구 달려왔다. 그리고그것이 성공을 우리는 지름길이요,
남들보다 빠르고 많이 얻게 되면 그것이 행복을 줄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두려움에 기초하여 욕심으로 나타난 이러한 계산법은 결국 자신과 남을 함께 구덩이로 몰아가게 된다.
허무한 경쟁에 서로 뛰어들어 영원한 승자가 없는 무한경쟁의 어리석음에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그런 경쟁에 뛰어들지 않는다고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부류도 있는데 근원은 같기에 별 의미가 없다.
금욕주의나 쾌락주의, 둘 다 초점이 '욕구'에 맞추어져 있기에 같은 뿌리의 두 양상이듯이 '빠름'에 반발하여 '느림'을 추구하면 그 또한 뿌리가 모두 '속도'에 맞추어져 있기에 본질이 같다는 것이다. 답은 그런 식으로 오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의식이 약하면 그 이상의 답을 기대할 수 없다.
속도 조절은 아무리 해봐야 그 길을 벗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 가야된다.
진정한 답은 속도 조절이 아니라 벗어나는 것이다.
第 168事 濟 3規 序 4模
(제 3규 서 4모) 衆寡(중과)
千人八分其困(천인팔분기곤)하고
百人十分其困(백인십분기곤)이면
其困而重因勝寡因
(기곤이중인승과인)이니라
十分多八分(십분다팔분)하나
其雙成者(기쌍성자)는
濟衆以德(제중이덕)하며
濟寡以惠(제과이혜)니라
천명 중 8%가 곤란하고
백명 중 10%가 곤란하면
많은 수의 곤란함이
적은 수의 곤란함보다 우선이니라
10%가 8%보다 많기는 하나
(실제로는 10명 < 80명)
양편을 다 구하려면
많은 쪽은 덕으로 구제하고
적은 쪽은 은혜로 구제해야 하느니라
산수가 등장하는데 좀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천명 중 8분이 8/1000을 말하는지
아니면 1000의 8%, 그러니까 80을
의미하는지 아리송하다.
백명의 10%면 1/10이니 10명이다.
그 뒤에 나오는 10분이 8분보다 많다고
한 것은 실제의 수보다 백분율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백분율은 크지만 실제의 수는
작다(80이 10보다 많으니까).
이런 경우 실제 수로 해야 하는지,
아니면 백분율로 따져야 할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실제 수로 따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백분율로
따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다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상황에서 구제를 행하려면
상당한 곤란에 처하게 되고,
어느 한 편의 원망을 들을 수 밖에 없다.
아마 우리의 이성에 기초한 자아는
이런 경우를 만나면 답을 내어 놓지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
빠지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단순한 도움을 주는 차원이면
모르지만 목숨이 걸린 문제라고 하면
매우 심각해 진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가지 골치아픈
상황과 비슷하다.
예수에게 던진 질문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리이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리이까?'는 식의 궁지몰기와 같다.
이러한 경우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답은
지혜롭지 못한 결정이다.
솔로몬의 재판이나 예수의 답은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참전계경도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고 전혀 다른 답을 제시한다.
덕이나 은혜는 둘 다 같은 말이다.
많고 적고 상관없이 덕과 은혜로 구제하라는
말이다.
이 말은 궁지를 빠져나가기 위한 잔꾀나
회피의 말이 아니다.
진정한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평함을 중시하고, 정의를 강력하게
요구하지만 실제로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사랑이요, 자비를 원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깊은 바람이다.
사랑과 자비는 최선을 다할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나타난다면 내가 손해를 보고
심지어 생명을 내어 놓아도 아깝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따라서 오늘날 공부 잘하는 똑똑한 자들을
세워서 정치를 맡기고, 법의 판결을 내리도록
자리에 앉혀 놓는 것은 자충수를 두는 일이다.
지금 한국의 상황을 보라.
모두들 정의와 공평을 외치지만 다들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짧은 생각의 군중들은 일단 지금 머리 아프고
화가 나는 문제부터 풀고 보자고 하고,
책임을 맡은 자들은 그렇게 하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하느냐고 하소연한다.
안타깝게도 답은 거기에 없다.
잘 생각해보라.
애초에 문제가 어디서 발생했고,
지속적으로 악화된 경위가 어떠하며,
지금도 모두가 기대하는 답이 무엇인지 말이다.
정의와 공평은 최소한의 요구다.
법은 상식과 양심의 최소한의 기준이다.
사람들은 그보다 인애와 자비를 원한다.
덕과 은혜, 겸손, 사랑, 희생, 배려...
지금 세월호 희생자 가족이나,
국민들 모두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그리고 그 답을 주는 것이 뭐가 어려운가?
솔직하게 정직하게 모든 것을 다 밝히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댓가를 달게 받겠다는
진실된 사죄...
그것 하나 하면 될 일 아닌가?
안타깝게도 두려움과 욕심에 매인 자아는
절대로 이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럼으로 인해 최악의 결과를 자초한다.
국민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답을 정의와 공평에서 찾게 되면
그 칼날이 자신에게로 닥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두려워서
덮고 넘어가거나 용서한다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방치와 비겁함이 된다.
정의감을 가지고 나가서는 안된다.
사랑으로 나가야 하며, 자비와 인애를
가져야 한다. 당연히 사랑 안에 공의가 있고,
사랑이라고 해서 무조건 덮고 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안다.
아무리 엄격한 매를 들어도 그 뿌리가
사랑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지금 상황은 주권자 국민이 심판의 칼을
쥔 형국이다. 그 칼이 분노의 칼이 아니라
수술의 칼이 되도록 해야 이 모든 혼란이
모두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며
우리 민족은 세계에 멋지고 현명한 국민으로
환호와 칭찬을 받을 것이다.
나도 솔직히 비행기라도 타고 가서
촛불 집회에 힘을 보태고 싶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전에 흘려야 할 눈물이 있다.
적어도 느헤미야 같이 한 며칠은 슬퍼하고,
금식하며, 기도를 한 후라야 자격이
주어질 것 같다. (느헤미야 1:3-11)
내가 흘린 눈물을 보니 아직 양이 많이
모자란다. 그렇다고 억지로 울 수도 없고...
깊은 속에서 우러나는 긍휼과 자비에 근거한
눈물... 그것이 나의 영적 수준과
나의 역할을 말해줄 것이다.
[출처] 참전계경 제168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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