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 본문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 와 메덴 아간(덤비지 마라!)
지금의 시대는 불의의 시대고 카오스 혼탁의 시대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간들의 몰락과 타락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윗대가리부터 아래까지 혼탁하고 썩어빠진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인간들의 파렴치한 범죄는 함께 몸담았던 지난 시대의 모습 전체가 거대한 허상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딛고 선 지반이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는 불안감을 갖게 합니다.
한편에서는 모두가 예상한 것이었음에도 사회적으로는 대통령부터 경제적으로는 재벌들, 종교적으로는 성직자들까지 다양한 범죄 혐의가 구체적으로 나열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야 정의가 실현되는구나 하는 안도감과 더불어 묘한 자괴감이 느껴집니다.
정의를 실현하리라 여겼던 유명인들이 사실은 불의 그 자체였습니다.
이 시대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권력을 휘두를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과정을 통해 점점 더 문명적인 단계로 나아간다고 믿었으나 헛된 믿음이었습니다.
탁월한 리더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잘못된 꿈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멀리하고 떠나 처음부터 포기한 우리 자신의 중요한 가치가 사탄의 야만에 우리를 머무르게 하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진실을 보는 눈이 있기에, 우리가 모르는 길을 알고 있기에,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수치심을 느끼게 할지라도 사소한 것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여겨 왔습니다.
상처와 모욕을 감내할수록 그의 권위는 커지고, 폭력과 잔인성은 일상화됐습니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남들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그들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갑이 을을, 사용자가 노동자를, 상사가 부하직원을, 교수가 대학원생을, 의사가 후배 의사를, 극단장이나 감독이 배우를 무시하고, 폭행하고, 희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생계에 대한 위협으로 일상화됐습니다.
우월한 지위에서 사태를 더 잘 보고, 더 잘 알기 때문에 그가 그럴 권리가 있다는 기만적 승인을 통해 폭력을 감내하는 스스로를 정당화했습니다.
잘못된 교육을 통해 침묵이 최고 덕목인줄 알고 때론 순종과 맹종을 구분 못한 어리석음으로 길들여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앎이란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업무가 아니라 타자를 괴롭히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자신이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모든 조직에서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폭행하고, 나를 모욕하는 우월한 지위의 사람들에게 부당한 폭력을 중단할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와 관습이 갖추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는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
델포이 신탁입니다. 신탁이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문답법을 이용한 내면적 탐구는 고대의 철학적 관점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유래는 꽤 오래됩니다.
이집트로도 건너갑니다. 고대 희랍의 델피(아폴로)신전 입구 현판에 새겨진 경구인 이 말은 애초에 '인간아! 깨달아라, 너는 신(神)이 아님을' , '너는 기껏 사멸할 인간임을 명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는 델피신전의 다른 경구인 '메덴 아간(Μηδὲν ἄγαν'), '덤비지 마라!'라고 풀이되는 말과 함께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플라톤(Platon)의 영혼에 대한 남다른 통찰과 확고한 신념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유럽으로 전파된 것입니다. 유럽의 기독교는 플라톤을 받아들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배척을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랍 세계로 스며듭니다. 오늘날 AL접두사로 시작되는 영어는 거의 아랍이 어원입니다. 플라톤의 그 같은 영혼관(靈魂觀)은 과연 플로티노스의 영혼 개념의 초석이 될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떻게 저 궁극적인 진리(존재원천)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해명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우 중요한 열쇠로 작용하게 됩니다.
미셸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너 자신을 돌봐라’로 말합니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은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푸코의 재해석입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훌륭한 정치인이 되려면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 소크라테스에게 묻습니다.
‘너 자신을 돌봐라’라는 말은 그 물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입니다.
푸코는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라는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격언이 가진 참 뜻을 ‘너 자신을 돌봐라’(epimeleia heautou)라는 말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에서 앎에 관한 말은 사실은 우리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실천과 무관하지 않은데, 데카르트가 앎의 문제를 오로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문제로 부각시킨 근대 이후에는 앎과 실천의 문제는 분리되어 후자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자기인식의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너 자신을 돌봐라’라는 자기배려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푸코는 서양의 지성사에서 보이지 않게 이어져온 실천과 수련의 역사를 추적합니다.
진실은 아무에게나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주체는 “정화, 자기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주체의 해석학》 58쪽) 등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은 철학과 구분해서 ‘영성’이라고 불렸습니다.
“진실은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거는 대가로만 주체에게 부여”(59쪽)됩니다.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자기배려에 대해 말한 것은 그가 훌륭한 정치인으로 성장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 자체를 내거는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키비아데스가 자신의 무지에 대해 수치스럽다고 토로하자 소크라테스는 “걱정하지 말게, 수치스러운 무지 속에 있다는 것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50세에 깨달았다면 그것을 치유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배려를 한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하지만 너는 그것을 깨달을 적정한 나이에 있다.”(76쪽)라고 답합니다.
오늘날 자기를 돌보는 문제는 근대가 만들어낸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합니다. 효율성을 실현하기 위한 거대한 감시체계는 끊임없이 나의 삶을 이윤에 결부시킬 것을 강제합니다.
푸코는 세네카를 원용하면서 그런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상당수의 책무를 부과하고 거기로부터 이득(재정적 이득, 영광, 평판, 쾌락과 생활에 관련된 이득 등)을 얻으려 합니다. 인간은 이러한 책무-보상의 체계, 채무-활동-쾌락의 체계 속에서 삽니다.”(303쪽)
푸코가 구체적으로 제안하는 자기 배려의 방법은 독서, 글쓰기, 자연을 응시하고 탐구하는 것, 요가나 태극권과 같은 수련 등입니다.
우리 자신을 이렇게 형성하고 변형시켜 나갈 때 우리는 근대 권력의 미시물리학이 만들어낸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주체의 권리를 빼앗아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충고였지만 그 연관 고리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배욕, 성욕, 물욕 등에 사로잡힌 권력자가 자기를 돌볼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리는 일에 덜 몰두하게 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그럴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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