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118사-均憐(균련) 본문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130
예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자비를 말하며 그 비를 악인과 선인에게
모두 내리신다는 말로 그 이치를 전했다.
비로 비유했으나 비 뿐만 아니라 생명에 필수적인 것은 모두 다 포함된다.
골고루 내리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다.
법과 윤리를 지나치게 높이게 되면 이러한 보편적인 이치, 긍휼과 사랑의 이치를 훼손하게 될
위험이 있다.
오늘날 극악한 범죄자나 패륜아를 보면 인권이니 자비니 베풀 필요가 없다고 소리를 높인다.
죄에 대한 응당한 형벌이 모든 기본권까지 박탈할 수 있다는 해석에서 나오는 생각이요 말이다.
그러나 하늘은 이러한 극단에 단호하게 그릇됨을 선언한다.
만일 하늘이 이러한 뜻에 동의한다면 즉시 벼락을 내려 심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조차 여전히 먹이고 입히며 자비를 지속적으로 베푸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이 성숙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려면 이러한 이유부터 밝히고 그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제 118 事 愛 3範 施 6圍
(애 3범 시 6위) 均憐(균련)
均憐者(균련자)는
聞遠艱(문원간)에
如目睹(여목도)하고
非健困(비건곤)하나
如殘傾也(여잔경야)라
天有雨稂(천유우랑)에
不雨莠之理乎(불우유지리호)아
施之均(시지균)이
如雨之霑(여우지점)니라
'균련(均憐: 고르게 긍휼을 베풂)이란
먼곳의 어려움을 듣고
눈 앞에서 보는듯 하고
심한 어려움이 아니라도
큰 위태로움으로 여기는 것이니라
하늘에서 비를 잡풀에도 내리는 것은
잡풀에 비를 내리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기 때문이 아니리오
이처럼 고르게 베푸는 것은
비가 만물을 적시는 것과 같으니라'
분노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고,
그 입에서 폭언과 저주가 나오는 것까지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피해를 입은 자 또한
긍휼의 대상이기에 그러한 반응을
막아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분이 풀리도록 응징을 하고
형벌을 부여하는 것도 정당하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율법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보복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보복하는 것이
정당하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보복을 할지라도 피해를 입은 정도
이상을 넘어가지 말라는 어떤 경계요,
제한 조치이다.
두려움은 분노를 격화시켜
작은 손해에도 10배, 100배로
앙갚음을 하도록 선동한다.
그래서 '눈이면 눈에만, 이면 이에만'
보복을 허용함으로 피해자가
도를 넘지 않도록 보호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가해자 뿐
아니라 피해자도 함께 보호하는 법이다.
이를 알지 못하고 '복수를 정당화'하는 것은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갚지 말고,
오히려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며,
심지어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까지
선언했다.
이 말을 공의가 필요없다는 의미로나,
피해를 입어도 잠잠하고 당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고상함을 떨라고
주신 막연한 이상을 말한 것도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도를 닦고,
수행하는 차원으로는 어렵다.
어느 정도 효과는 보겠지만 스스로
마음에 받는 상처와 후유증 때문에
더 큰 문제로 발전하기 쉽다.
그렇게 풀어낼 것이 아니다.
높은 차원으로 그 의식을 올리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왜 하나님은 악독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지,
특히 마귀와 사단이면 인간의 원수자
하나님을 거역하는 존재인데도 왜
그들을 멸하지 않고 내버려 두시는지,
심지어는 하늘 회의에까지 불러
동참을 시키며 대화와 협의까지 하시는지...
이 의문을 풀지 못하면 아무리 참고
애를 써도 안된다.
사랑이나 용서, 포용, 베푸는 것...
모두가 더 큰 차원의 이치를 깨닫는 것에
답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그렇게
심각해 보이는 것이 사실 높은 차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장난감이나 모래 성을 가지고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유치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의 의식으로 사활이 걸린 문제처럼
보이고, 이것이 허물어지면 다 무너지고,
세상이 다 뒤집어질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보면 그야말로
이 세상의 일들은 '어린애 장난'과 같다.
그런데 이것에 목숨을 걸고 죽니 사니 하니까
오히려 그것이 더 답답하다.
그래서 넌지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런
가르침이다.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고, 잡풀에도
예외없이 우로를 내려 풍성한 생명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답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주 쉬운 답이요, 당연한 이치라도
두려움과 욕심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어리석음이 문제요, 유치한 의식이 문제다.
간단한 답을 소개한다면
사랑이나 용서나, 긍휼이나...
모든 것이 사실은 '나를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깨달음의 첫 관문이요, 성숙의 추진력이 된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보는
자신의 시각을 점검해 보고, 무엇보다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확인해 보라.
혹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요 본질이지,
사실 남과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다.
[출처] 참전계경 제118사|작성자 푸른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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