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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符都誌) 해설 13 본문

천지인 공부/부도지

부도지(符都誌) 해설 13

柏道 2019. 3. 20. 18:09


율려(律呂)의 창세기(創世記)를 풀다.
부도지(符都誌) 해설 13 
 
마고는 두 딸을 낳는다. 마고도 여성성을 가진 존재인데 마고가 처음으로 낳은 두 소생도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매우 이상하고 묘하다. 
 
先天爲男(선천위남)하고 後天爲女(후천위녀)하여
無配而生二姬(무배이생이희)하고  
 
이를 자세히 보면 마고가 궁희와 소희, 두 딸을 낳는 과정에 ‘남성’과 ‘여성’이 등장을 한다. 바로 남성이 先天이 되고, 여성이 後天이 되어 궁희와 소희를 낳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기가 낳은 두 딸인데도 부모격인 남성과 여성은 선천과 후천으로 따로 있다. 그러니까 궁희와 소희는 그 부모가 ‘선천’과 ‘후천’인데, 그러면서도 또 어머니는 ‘마고’다. 말이 안된다.
선천과 후천을 남성과 여성으로 삼아서 딸들을 낳는다는 것도 이해가 안되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 두 딸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도 논리에 맞지 않다.
바로 여기서 비유적으로 묘사한 미스테리를 풀어내어야 한다.
일단 궁희와 소희의 부모격으로 등장하는 ‘선천’과 ‘후천’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들은 인격이 아니다. 시기요 시대이다. 마고의 시점에서 보면 선천은 이미 지난 시기요, 후천은 이제 열리는 시기이다. 마고 자신은 선천과 후천의 중간인 짐세(朕世)시기에 출현하여 지금 후천시대를 열고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선천’을 남자로 삼고, ‘후천’을 여자로 삼는다는 말의 의미는 과거역사와 미래역사를 하나로 묶는다는 의미다. 과거는 기원, 씨앗이지만
미래는 목적, 열매이다. 남자는 씨앗이요, 여자는 열매를 내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마고가 출현하고 활동하는 朕世(짐세)시기는 금방 지나간 과거, 혹은 현재(당시)를 말하며 씨앗으로부터 시작하여 잎과 줄기를 내는 시기요, 열매를 준비하는 시기이다. 2장을 보면 이미 짐세 이전에 여러번 부활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선천시대가 마무리되는 과정 중에 몇 번의 창조와 파멸의 과정이 있었고, 마고의 등장과 활동은 마지막 짐세, 그러니까 후천을 여는 시점이 되는 것이다.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겠지만 성경의 창세기를 풀이할 때 접하게 되는 매우 곤란한 상황은 바로 빛 창조 이전에 나오는 ‘혼돈과 공허’(창세기 1:2)에 대한 것이다. 도대체 이 혼돈과 공허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학자들은 무리하게 이 부분을 ‘형체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고 거주자가 없는 상태’라고 해석을 하여 부정적인 요소를 없애보려고 하지만 성경 자체가 이 ‘혼돈과 공허’는 심판의 결과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예레미야 4:23) 아주 정확하게 창세기 1장 2절의 상황과 같다.
이에 대해서 기독교에서는 풀이를 내지 못한다. 일각에서 이 때문에 ‘중조론’(gap theory, 재창조설)을 말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보니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도 그냥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며, 다른 것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답답함 속에서 벗어날 길을 스스로 차단해 버리고 있다.
왜 부도지 등을 통해 한번 풀어보려고 하지 않는가?
무슨 근거로 부도지는 엉터리고 성경만 진리라고 주장하는가? 진리인지 아닌지는 겸손하고 진지하게 연구하고 분석하면 드러날 일이지, 교만하게 확인도 해보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면 어떻게 정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지금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 유기적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론은 기독교 안에서 그렇게 하자고 받아들인 것이지 객관적 증거나 보증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독교인들끼리야 서로 그렇게 믿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다른 종교나 비기독교인들과 대화를 하려면 그런 입장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만 옳고 남은 틀렸다고 하니 싸움이 끝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야 어떻게 평화를 말하고, 화목과 사랑을 말할 자격이 있나?
이런 독선과 배타성은 진리와 상반되는 모습인데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비판과 정죄만 하고 있다면 그보다 안타깝고 불쌍한 모습은 없다. 진리는 자유케 하고, 사랑은 용납하는 것이 그 속성이다. 그런데 자기 교리에 매여서 도무지 자유는 없고, 용납은커녕 자기편끼리도 결국은 교파로, 교단으로 나뉘어 싸우고 경쟁하고 있으니 진리나 사랑을 말할 자격도 이미 상실한 증거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