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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참전계경 제98사 -幼我(유아) 본문

천지인 공부/참전계경

참전계경 제98사 -幼我(유아)

柏道 2019. 3. 20. 05:47


참전계경 (參佺戒經),
8理, 366事를 통한 인생지혜 탐구 110 
 


용서는 사랑에서 싹이나서 지혜로 꽃이 피며 능력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신의 성품이다. 용서하라는 말이 단순히 남이 받을 벌을 면제해 주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함이 아니다.
용서는 '율법'을 넘는 고상함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시비논리와 정의를 넘어 신의 성품인 자비와 어짐을 자신에게 실현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 듣기는 좋아 보여도 실제의 삶에서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여전히 두려움에서 나오는 율법, 즉 옳고 그른 논리가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서를 말하면 당장 우리의 이성은 '그럼 불의도 용납하라는 말이냐?'
하며 반박하고 나온다. 그러면 모든 입을 막아 버린다.
그런 경우 더 이상 용서를 말하게 되면 시비논리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런식으로 용서는 요구될 수 없다. 스스로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에게 적용함으로 자기에게서 실현되는 하늘의 영광이지 설득도, 강요도 그 어떤 것으로도 열매를 맺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경지가 어려운 것이고 웬만한 지혜나 능력, 사랑이 없으면 도리어 불화만 일으킬 위험이 있는 것이 바로 용서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이미 우리 속에 신의 성품이 내재되어 있고, 우리가 율법을 넘는 긍휼과 용서를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용서를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
 


제 98 事  愛 1 範 恕 1圍
(애 1범 서 1위) 幼我(유아) 
 
幼我者(유아자)는
幼人如我(유인여아)라
我寒烈(아한열)이면
人亦寒烈(인역한열)이며
我飢餓(아기아)이면
人亦飢餓(인역기아)하니
我無奈(아무내)이면
人亦無奈(인역무내)니라 
 
'유아(幼我)란 다른 사람을 나와 같이 사랑함이니라
내가 춥고 더우면 다른 사람도 춥고 더우며 내가 주리고 배가 고프면 남도 역시 주리고 배가 고프고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을 만나면 남도 어쩔 수 없는 일을 만나느니라' 
 
여기에 쓴 '幼'(어릴 유, 사랑할 유)는 흔히 사랑을 표현하는 '愛'와는 다르다.
어리고 연약함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아는 차원에서 행하는 사랑을 말한다. 당연히 그 근본은 '자비심,' 즉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용서를 할 수 있는 자는 먼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고 용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크심을
깨달아 적용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항상 그 시작점이 하늘이다.
하늘의 관점에서 자신을 먼저 보아야 한다. 약하고 불쌍한 자신이 보인다.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믿고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럴 때 내가 나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할 수 있으며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어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연약함이 보이고 그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바로 이런 원리로 적용이 된다. 그러니까 참전계경이 이를 뒷받침 해주며 부연설명을 해주어 우리로 보다 확실한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 같은 자신을 먼저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어린아이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린아이는 약하지만 극히 사랑스러운 존재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는 바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일어나며, 우리의 자녀된 아름다움에 근거하여 성취된다.


모든 진리의 기본이 그러하듯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와의 관계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진정한 용서도, 사랑도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나를 사랑하셨듯이, 자신의 연약함을 사랑하라.
연약함 자체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연약함이 사랑을 불러일으키듯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라는 의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볼 때도 내게 어린아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어린아이임을 이해하게 되면 사랑도 용서도 충분히 가능하다.